포로롱♬l1년 전 (10:26)l조회 924l현재 l추천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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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고정희


길을 가다가 불현듯
가슴에 잉잉하게 차오르는 사람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너를 향한 기다림이 불이 되는 날
나는 다시 바람으로 떠올라
그 불 다 사그러질 때까지
스스로 잠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떠오르는 법을 익혔다
네가 태양으로 떠오르는 아침이면
나는 원목으로 언덕 위에 쓰러져
따스한 햇빛을 덮고 누웠고
누군가 내 이름을 호명하는 밤이면
나는 너에게로 가까이 가기 위하여
빗장 밖으로 사다리를 내렸다
달빛 아래서나 가로수 밑에서
불쑥불쑥 다가왔다가
이내 허공중에 흩어지는 너,
네가 그리우면 나는 또 울 것이다


나무에게 길을 묻다/우진용


팔순의 노모가 무릎을 자주 꺾는다
사람이나 나무나 꺾인 곳이 아프다

옹이가 허공으로 가지를 뻗어가듯
어머니는 관절로 한 생을 걸으셨다

가지들이 손을 펴서 그늘을 드리울 제
관절의 수고로움이 입들을 먹여왔다

옹이에서 옹이까지 한 겁을 걸어 돌아와
한 생에서 한 생까지 나무에게 길을 묻다

나무는 삐걱거리며 옹이부터 빠지고
낡아가며 어머니는 관절부터 삭인다

한때 아름다운 그늘 만들어주던 곳
한때 여러 입들을 먹여 살리던 곳

가장 많이 꺾였던 곳이
가장 많이 아프다


이런 날에는/송해월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나를 감추고 싶어도 감출 수 없는 이런 날에는
그대에게 사랑한다는 말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 안에 두면 튀어 나가고 싶어
죽을 힘을 다해 퍼덕거리는 싱싱한 물고기 같아서

내 안에 가두어 두면 그렇게 퍼덕거리다가
그 은빛 눈부신 비늘 상하게 될까봐
그 탄력있는 아름다운 몸 멍이 들거나 살점은 뜯기어
저도 모르는 새 썪어 들어가게 될까봐
더 이상 가두어 둘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내 안에 살아 펄펄 뛰는 물고기
아슬하게 넘쳐버린 빗물에 놓아 그대에게 보냅니다

사랑합니다

그대의 호수에 어느 날 은빛 비늘 유난히 크고
싱싱하게 살아서 펄떡이는 물고기 한 마리 노닐며는
그대의 호수에 어느 날
은빛 비늘 유난히 눈이 부신 물고기 한 마리 보시거든

참다못해 사랑이란 이름표를 달고 떠난
어여쁜 이로 보아 주십시오

심장을 찌르는 날카로운 햇살에 물 거품 빛나는 아침부터
먼 산과 대지를 돌아 아무렇지 않게 불어가는 바람에
울컥 목이 메이는 어떤 날

물 그림자 짙어가는 저녁이 오고 달이 뜨는 밤을 지나
달 빛 차가운 이슬로 맑은 물비늘 털어내는 새벽 그 때까지
그대 거기 서서 나를 보아 주십시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바다/김지하


가겠다
나 이제 바다로
참으로 이제 가겠다
손짓해 부르는
저 큰 물결이 손짓해 나를 부르는
망망한 바다
바다로

없는 것
아득한 바다로 가지 않고는
끝없는 무궁의 바다로 가는 꿈 없이는 없는 것
검은 산 하얀 방 저 울음소리 그칠 길
아예 여긴 없는 것

나 이제 바다로
창공만큼한
창공보다 더 큰 우주만큼한
우주보다 더 큰 시방세계만큼한
끝간 데 없는 것 꿈꿈 없이는
작은 벌레의
아주 작은 깨침도 있을 수 없듯
가겠다

나 이제 가겠다
숱한 저 옛 벗들이
빛 밝은 날 눈부신 물 속의 이어도
일곱 빛 영롱한 낙토의 꿈에 미쳐
가차없이 파멸해 갔듯
여지없이 파멸해 갔듯
가겠다
나 이제 바다로

백방포에서 가겠다
무릉계에서 가겠다
아오지 끝에서부터라도 가겠다
새빨간 동백꽃 한 잎
아직 봉오리일 때
입에 물고만 가겠다
조각배 한 척 없이도
반드시 반드시 이젠 한사코
당신과 함께 가겠다
혼자서는 가지 않겠다

바다가 소리 질러
나를 부르는 소리 소리, 소리의 이슬
이슬 가득 찬 한 아침에
그 아침에
문득 일어서
우리 그 날 함께 가겠다
살아서 가겠다
아아
삶이 들끓는 바다, 바다 너머
저 가없이 넓고 깊은, 떠나온 생명의 고향
저 까마득한 화엄의 바다

가지 않겠다
가지 않겠다
혼자서라면
함께가 아니라면 헤어져서라면
나는 결코 가지 않겠다

바다보다 더 큰 하늘이라도
하늘보다 우주보다 더 큰 시방세계라도
화엄의 바다라도
극락이라도.

사랑으로 나는/김정란


사랑으로 나는 내가 보았던
매미날개와 매미날개에 머무는 햇살과
그 햇살의 예민한 망설임 들을 이해한다.
사랑으로 나는 내가 보지 못했던 오로라와
그 오로라가 우주 먼 곳 태어나지 않은
역사와 맺는 관계를 이해한다.
사랑으로

나는 언젠가 그 칼들이
나를 더 이상 아프지 하지 못할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이해한다.

사랑으로 나는 죽어 가는 세계의 모든 생명들과
이제 막 태어나는 어린 생명들과 하나가 되고 싶다,
될 것이라고 믿는다, 될 것이다.
사랑으로 나는 나이며 너이며 그들이다.
사랑으로 나는 중심이며 주변이다.
사랑으로 나는 나의 상처의 노예이며 주인이다.
사랑으로 나는 나의 상처를
세계의 상처 위에 겸손하게 포개놓는다.
세계, 나의 아들이며 나의 지아비인 세계의 상처 위에
나처럼 아프고 불행한 세계의 상처 위에,
가만히, 다만 가만히


찔레/문정희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그리운 가슴 가만히 열어
한 그루
찔레로 서 있고 싶다.

사랑하던 그 사람
조그만 더 다가서면
서로 꽃이 되었을 이름
오늘은
송이송이 흰 찔레꽃으로 피워 놓고

먼 여행에서 돌아와
이슬을 털듯 추억을 털며
초록 속에 가득히 서 있고 싶다.

그대 사랑하는 동안
내겐 우는 날이 많았었다.

아픔이 출렁거려
늘 말을 잃어갔다.

오늘은 그 아픔조차
예쁘고 뾰족한 가시로
꽃 속에 매달고

슬퍼하지 말고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무성한 사랑으로 서 있고 싶다.

커피를 마시며/신달자


견디고 싶을 때
커피를 마신다.

남보기에라도
수평을 지키게 보이려고

지금도 나는
다섯번째
커피 잔을 든다.

실은
안으로
수평은커녕
몇번의 붕괴가
살갗을 찢었지만

남 보이는 일도
무시할 수 없다고 해서
배가 아픈데
아픈데

깡소주를
들이키는 심정으로
아니
사약(死藥)처럼
커피를 마신다.

사랑과 슬픔의 만다라/류시화


너는 내 최초의 현주소
늙은 우편 배달부가 두들기는
첫번째 집
시작 노트의 첫장에
시의 첫문장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나의 시는 너를 위한 것
다른 사람들은 너를 너라고 부른다
그러나 나는 너를 너라고 부르지 않는다
너는 내 마음
너는 내 입 안에서 밤을 지샌 혀
너는 내 안의 수많은 나

정오의 슬픔 위에
새들이 찧어대는 입방아 위에
너의 손을 얹어다오
물고기처럼 달아나기만 하는 생 위에
고독한 내 눈썹 위에
너의 손을 얹어다오

나는 너에게로 가서 죽으리라
내가 그걸 원하니까
나는 늙음으로 생을 마치고 싶지는 않으니까
바닷새처럼 해변의 모래 구멍에서
고뇌의 생각들을 파먹고 싶지는 않으니까

아니다
그것이 아니다
내가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
내가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넌 알몸으로 내 앞에 서 있다

내게 말해다오
네가 알고 있는 비밀을
어린 바닷게들의 눈속임을
순간의 삶을 버린 빈 조개가 모래 속에
감추고 있는 비밀을
그러면 나는 너에게로 가서 죽으리라
나의 시는 너를 위한 것
다만 너를 위한 것

끝이라는 이름의 끗/김민정


1.
여자는 지붕 위를 걷는다고 그가 말했다
빨랫줄 위에 펄럭이는 태극기려니 내가 말했다
잠옷에 아슬아슬한 하이힐이라고 그가 말했다
하이힐로 정상 오른다는 책이려니 내가 말했다
어둠 속에 반짝 별로 빛났다고 그가 말했다
피우다 던진 담배꽁초려니 내가 말했다

우리는 맴돌았고, 우리는 성가셨고,
우리는 불 꺼진 램프처럼 차가웠고,
우리는 각자의 과도로 사과를 푹 찔렀고,
달콤한 과즙은 저 혼자의 혀로 핥기 바빴으니
모두 잃은 내깃돈, 이것이 우리의 마음

2.
더는 끝과 끊을 헷갈리지 않게 되자 끗을 만난다
끝이 끊어지는 것이듯 잘린 머리카락일 때
끗은 끈이듯 비명을 이어붙인 동아줄이라
시방 겨오르고 있는 나 말고의 호랑이들로
울리는 모든 종소리는 그렇게도 불이다
보았는가,
불똥은 솟고 불똥은 튀고 불똥은 옮아붙어
우물은 앉은뱅이책상처럼 더 바싹 엎드리는데
서랍을 뒤지는 자, 손안 가득 볼트와 너트라니!

나는 헐렁했고 나는 풀어졌으나
나는 고무줄바지였고 나는 리본끈이라
공처럼 둥글게 만 유연한 등으로 나는 놂이다
패가 섞이고 패가 나뉘고 패가 던져지는
화투판에서 나는 버려야 할 때가 언제인지
알고 죽는 이의 뒷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남은 패 한 장의 끗발로 말미암아 비로소 안다
그래봤자 본전치기, 이것이 우리의 간과

울다 깨다/김기택


잠에서 깨었는데도
나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
꿈은 깨지 않은 채
잠만 깨어 울고 있었다.
가지가 불인 나무가
아직도 내 내장에 뿌리를 뻗고
두개골을 달구며
활활 자라고 있었다.
빨갛게 달궈진
잔가지들과 실뿌리들 때문에
내 모든 실핏줄들은
몹시 따갑고 간지러웠다.
잠에서 깨자마자
내 눈을 뚫고 나온 가지 하나는
아침 공기에 닿자마자 녹아
뺨이 벌겋게 데이도록
흘러내리고 있었다.
왜 우는지 기억나지 않는데도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그날의 배경/김경미


몇날이고 수도승처럼 눈만 감다가 모처럼 나셨다
나서다가 누군가가 머리에 박은
10센티짜리 대못을 꽂은 채 떠도는
고양이 뉴스를 봤다
빼려고 얼마나 부볐는지
핏속 못이 조금 헐거워졌다고 했다 사람이 동물을
얼마나 낙담시키는지 이미 잘 알고 있다

다정한 모임 속 네가 갑자기 내 머리에 못을 박았다
그 대못 얼버무리려 괜한 웃음을 웃느라
이마와 코가 헐거워졌다,
너무 가깝거나 멀어 몹쓸
사이도 아닌데 인간이 인간을 얼마나 낙담시키는지
이미 잘 알고 있다

잘 알고 있는데도 뺨으로 눈썹이 흘러내렸다
나는 확실히
사람과 잘 안 맞아 어떻게 사람이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죽은 척하는 순간
고양이가 내 두 손을 지목한다


어깨 너머의 삶/장이지


그는 보잘것없는 사람이다.
그에게는 소매 끝이 닳은 양복이 한 벌 있을 따름이다.
그 양복을 입고 딸아이의 혼인식을 치른 사람이다.
그는 평생 개미처럼 일했으며
비좁은 임대 아파트로 남은 사람이다.
아침에 일어나 신문을 보는 굽은 등
투박한 손을 들키는 사람이다.
그는 그 거대한 손으로만 말을 할 줄 알았다.
언젠가 그가 소중하게 내민 손 안에는
산새 둥지에서 막 꺼내온 헐벗은 새가
눈도 뜨지 못한 채 새근대고 있었다.
푸른 숨을 쉬고 있었다.
그때 어두움의 음습한 숲에서
홀로 빛나던 새는 지금 어느 하늘을 꿰뚫고 있을까.
그의 손에 이끌리어 가 보았던 하늘
구름 바람 태양 투명한 새.
그는 그런 것밖에 보여줄 줄 모르던 사람이다.
그의 내민 손 안의 시간.
그의 손에서 우리는 더 무엇을 읽으려는가.
그는 손으로 말했지만
우리는 진짜 그를 한 번도 보지는 못했다.
그는 보잘것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가 내민 손에 있지 않았다.
어깨 너머에 있었다.
닳아빠진 양복을 입고 선술집에 앉아
그는 술잔을 앞에 둔 채 어깨 너머에서 묵묵했다.
그 초라한 어깨 너머를 보고 싶은데
차마 볼 수 없는, 엄두가 나지 않는
그는 어깨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그런 사람이다.


물거품/이사라

계곡에 앉아 무심히 눈길을 주면
작지만 단단한 인연에 걸려 넘어지는 물의 줄기를 보게 된다
물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나오는 것이리라

아주 죽기도 힘들고
살아나오기는 더 힘든 사람들
물거품처럼 온몸이 부서져 돌아온다

오늘도 물거품 속에서
한 아이가 운다
길 없는 길이 아팠다고
한 엄마가 운다
길 아닌 길을 걸어왔다고
입양 간 아이가 이국의 발음으로 돌아와
고국의 저녁을 글썽거리게 한다
오늘도 협곡을 지나온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바라보는 바다는 먼 곳일수록 푸르고
물결치는 분노가 새처럼 배회하던 날들도 있었고
기억하는 냄새가 있는데
죽을 듯이 아파서 돌아가려는 사람이 기억 못할 리가 있으랴

계곡의 밤은 더 깊고
어두운 것이 더 선명한 어둠을 품고
절망이 절망을 볼 수 없게 되면

쉽게 죽을 수 없는 것들의 아름다움이
물거품이다



숨의 기원/고영민

1
이불 밖으로 나온 딸아이의 다리를 슬며시 이불 속으로 넣어줍니다
아이는 슬며시 눈을 떠 나를 한번 쳐다보고는 다시 잠이 듭니다

저렇게 보는 것은 보는 것이 아닙니다
기억할 수 없습니다
잠결입니다

잠은 다시 딸아이의 눈을 감기고 가슴을 부풀려 숨을 고르고 세월을 만듭니다
숨소리는 영혼이 나갔다가 갈 곳이 없어 다시 제 집을 찾아오는 아득한 소리입니다
날숨은 어제 같고 들숨은 오늘 같습니다

2
팔을 뻗어 딸아이가 제 어미의 옷섶에 손을 찔러 넣습니다
아내가 잠결에 슬몃 눈을 뜨고는 벽에 기댄 채 무릎을 안고 있는 나에게
왜, 안자고 있어 라고 물어보고는 다시 잠이 듭니다

저렇게 묻는 것도 묻는 것이 아닙니다
기억할 수 없습니다
잠결입니다

우리가 손을 내밀어 무언가를 가만히 그러쥘 때 얼마나 많은 시간들이 웅크리고 있을까요
무언가를 가만히 쥐고 싶어 부러 빈손을 한번 움켜쥐는 밤입니다
나는 등으로 전해오는 냉기와 이불 밖으로 잠깐 빠져 나왔던
딸아이의 한쪽 다리와 작은 손에 쥐어진 아내의 따뜻한 유방을 생각합니다

3
딸아이도, 아내도 숨이 깊어집니다 일순 겹치기도 하고 어긋나기도 합니다
아이의 숨은 짧고 아내의 숨은 더 멀리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발품입니다

이제 앞강으로 물을 거슬러 오르는 물고기들이 차갑게 알을 슬어놓고는
한 生을 전해주려 떠내려올 시간입니다 방안은 온통 숨소리뿐입니다
나는 딸과 아내의 숨소리 사이로 내 숨소리를 유심히 들여다봅니다

어디를 갔다 오는 곡절입니까,
기척입니까

뿌리의 힘/공광규


나를 자르지 말라
네 칼이 먼저 상하리라
나는 뿌리가 있어
내 몸을 계속 키울 수 있나니
시간이 우리의 승패를 결정하리라

나를 밟지 말라
네 구두가 먼저 닳아 없어지리라
나는 뿌리가 있어
같은 몸 계속 밀어올릴 수 있나니
네 무릎이 먼저 꺾이리라

나는 뿌리의 힘으로
겨울 나고 꽃 피우고
타는 가뭄에 견디며 대지를 붙들고 있나니
내 억센 뿌리의 손아귀에
네 뼈가 먼저 부러지리라.


꽃게여자/이명윤


햇살과 물살 사이를 걷는다
마트 세일코너 향해 햇살바구니 흔들며 달려가던
세 아이의 엄마
밤에는 미스 홍으로 불리는 여자
골목길 저편 그녀가 떴다
나의 퇴근과 그녀의 출근이 수평선처럼 길게 마주친다
그녀의 화장이 멀리서도 붉다
바다와 육지가 서로 탐하는 변두리
서로 다른 언어가 만나는 곳
그녀는 소위 상습침수지역에 산다
풍파가 몰아칠 때마다
발이 하나씩 생겨난 여자
똑바로 사는 게 뭔데요
당신들이 해준 게 뭔데요
세상 입소문 향해 집게손 높이 들던
발걸음마다 산산이 부서지는 그날의 소란
한 손은 아이들의 웃음에 한 손은
달빛 물살에 담그고 사는
정착할 수 없는 날들
위태로운 경계에 서서 긴 두 팔로
세상의 양 끝을 잡는다
똑바로 사는 게 뭘까요……
골목이 귀찮은 듯 돌아눕는다
전봇대 민머리를 긁적거린다
하나 둘 궁금증을 켜는 세상의 저녁
그녀, 출렁이는 어둠 속으로
빠르게 사라진다




종이 인형들의 세계/하재연


드레스들이 하루에 몇 번씩이나 찢어지는 건
약간 슬픈 일.

머리를 둥근 컬로 말아 올리면
조금 안정이 된다.

오늘은 놀아주는 사람 1과
놀아주는 사람 2가 왔다 간다.

매일처럼 조금 나쁜 일과 덜 나쁜 일과
놀랄 만한 일이 있을 뿐이지만

어떤 날은 다만
쳐다보는 자의 표정을 할 수 있는 거다.

눈화장이 잘 되는 날은 그렇게
기분이 좋다.

잠을 자고 일어나면
또 식탁이 놓여 있고 드레스들이 걸려 있고

욕조가 빛나고 물고기들이 춤을 춘다.
아무 걸로나 골라서 요리를 할 수 있다.

목욕을 하고 손을 모으고 속눈썹을 내리고
아무 때나 잠이 들 수 있다.



내 사랑은/김용택


아름답고 고운 것 보면
그대 생각 납니다
이게 사랑이라면
내 사랑은 당신입니다

지금 나는 빈 들판
노란 산국 곁을 지나며
당신 생각입니다
이제 진정 사랑이라면
백날천날 아니래도
내 사랑은 당신입니다


詩,

나는 너에게로 가서 죽으리라. 내가 그걸 원하니까. 배경음악은 World`s End Girlfriend의 '호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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