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중독 위험 때문에 저렇게 내버려두는 게 말이나 되냐구요." "모르핀은 계속 주다보면 나중에는 손 쓸 수가 없어요, 안돼요." "모르핀은 그렇게 쉽게 중독 안된다니까!" 아침부터 이게 무슨 짓인지, 변백현이랑 눈을 치켜뜨고 스테이션에서 언성을 높이고 있었어. 마침 수간호사쌤도 없겠다, 내가 여기선 제일 높은 연차였으니 내가 총대를 맨거지. 어제 밤부터 아파서 잠도 못자는 환자한테 진통제를 쥐꼬리만큼만 처방해줬길래 아침에 양을 좀 더 늘려달랬더니 안된다고 못을 박아. "아니, 중독이 걱정되시면 애초에 모르핀을 안 넣는게 맞죠. 이미리에서 오미리로 올려달라는 게 왜 이해가 안가시냐구요." "이미리에서 오미리, 오미리에서 또 팔미리. 그러다보면 계속 높아져요." "그저께까지만 해도 통증 수치 삼이라고 하던 환자가 어젯 밤에 팔이라고 그랬는데, 이게 이미리로 될 일이에요?" "통증이 갑자기 심해지면 수치를 높게 부를 수도 있어요. 일단 좀 지켜보," "내가 어제 밤 내내 봤다니까!" "나도 오늘 아침에 봤어요." "밤 새도록 본 나랑, 오늘 아침에 본 너랑 누가 더 오래 봤는데? 밤새도록 앓아서 지쳐서 그런거지, 통증이 약해진 게 아니라구요." 이제 반말이랑 존대말이 마구 섞여서 옆에 있던 신규간호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우릴 쳐다봤고 나는 답답함에 한숨만 푹푹 내쉬었어. 변백현은 변백현대로 피곤함에 짜증이 난 듯했고 나는 나대로 처방을 제대로 안해주니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지. "야, 대학다닐 때 뭐배웠냐?" "아니, 통증은 알겠는데. 그것만 보고 바로 처방을 내릴 그런 문제가 아니라고." "너는 학교에서 환자가 느끼는 통증보다 중요한 게 뭐라고 배웠는데, 답답해서 진짜." 퇴근 시간은 다가오는데, 내가 퇴근하면 환자는 계속 쥐꼬리만한 진통제 맞으면서 끙끙거릴 것 같고, 진짜 학창시절처럼 변백현이랑 소리 꽥꽥 지르며 싸우고 싶은 심정이었어. 살벌한 우리 둘의 모습에 지나가던 환자들도 우리를 쳐다보길래 결국 자리를 옮겨야되겠다고 생각했지. "잠시, 얘기 좀 합시다." 내가 변백현을 질질 끌고 주사실로 들어가서 팔짱을 턱 꼈어. 변백현은 피곤한 듯 눈을 손으로 문지르면서 나를 쳐다봤어. 쟤 눈 아직도 빨개, 안과 안간게 틀림없어. "모르핀 주기적으로 주고 있잖아. 환자 상태가 정확히 어땠는데, 천천히 얘기해봐. 화내지 말고." 변백현이 차분하게 내뱉는 말에 내가 줄줄 읊었더니 고개를 살짝 끄덕여. 저러고 또 전공의 쌤이랑 의논해보겠다고 하겠지. 망할 변백현. "그래, 전공의 쌤한테 여쭤보," "의사들 진짜, 답답해서 못해먹겠네." 결국 내가 먼저 주사실 문을 박차고 나오고 뒤에서 한숨을 쉬는 백현이의 소리가 들렸지만 그냥 무시한 채 스테이션으로 돌아왔어. 모르핀 늘려 줄 때까지 집 안갈거야. 스테이션에서 차트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수화기를 탁 집는데 인계사항 변동있다고 모니터에 알림창이 뜨는거야. 뭔가 싶어 버튼을 클릭했더니 모르핀 5미리로 늘렸다는 알림이야. 그제야 좀 마음이 누그러졌지만 아직 변백현한테 웃으면서 가기엔 아까의 여파가 좀 심했지. "퇴근해?" 변백현이 내게 와서 물었지만 고개만 대충 끄덕이고 트레이를 손에 쥐었어. 아까 그 환자 다시 보고 가야지. 달달달달..소리를 내면서 병동으로 들어선 다음에 커텐을 젖히고 환자 이름표를 확인했어. "환자분, 진통제 더 늘렸거든요, 좀 이따가 간호사쌤 오실테니까 조금만 참으세요. 고생하셨어요." 땀을 얼마나 흘린 건지 여자친군지 동생인지, 무튼 여자분이 든 수건이 축축하게 젖어있었어. 내가 막 나가려고 몸을 틀었더니 바로 앞에 변백현이 서있어. 그냥 무시하고 나가려는데 커텐 뒤로 내 손을 슬그머니 잡고선 달래듯이 두어번 쥐었다폈다 한 뒤 손을 놔줘. 이런다고 바로 풀릴 줄 아나. 옆에 환자들 잠깐 보고 병실을 나서는데 그제야 변백현도 병실을 나와. 내 목 부근을 손으로 주물러주길래 고개를 들어서 변백현 얼굴을 쳐다봤는데 눈이 어제보다 더 심하게 빨간거야. 얘는 왜 병원을 가래도 안가는지, 병원에서 일하는 애가 지 몸에는 제일 무심해요. "외래 끝나기 전에 안과 다녀와." "바빠서 못 갔어." "잠깐 내려갔다 온다고 해, 아니면 안과에 있다는 네 선배한테 연락을..어," "응?" 복도를 거닐면서 잔소리하듯 한마디한마디 내뱉다 무심코 변백현 얼굴을 다시금 봤는데, 아까 심각하게 빨갛다고 생각했던 눈에서 피가 나는거야. 깜짝 놀라서 안경을 벗기고 얼굴을 끌어다 살펴봤더니 실핏줄이 터져서 피가 새어나온 것 같았어. "피 나잖아!" "어, 어..피나?" "그러게 내가 안과다녀오라고 했는데 왜 말을 안들어?! 이렇게, 이거 잡고 있어봐. 꾹 누르지말고.." "응, 응." 변백현의 습관이라면 습관일 수 있는 행동이 있는데, 변백현은 의사고 나보다 모든 영역에서 더 전문적인게 사실이잖아. 근데도 얘는 자기가 아플 때 내가 뭐 이렇게 이렇게 해라, 이러면 자기가 환자인 것 마냥 아무런 말도 않고 하라는 대로 다 했어. 지금도 내가 쥐어주는 손수건으로 눈을 살짝 누르고. 제 주머니에도 손수건 있으면서. 무튼 그대로 눈을 살짝 누르면서 스테이션으로 데리고 갔어. 그렇게 심각한 문제는 아닌데 실핏줄이 터져서 피가 날 정도면 눈에 피로가 얼마나 쌓인거야. 안그래도 요즘 시력 더 떨어지는 것 같던데. 외과의사는 눈 안좋으면 불편한 일이 많으니까 시력관리는 필수란 말이야. 뭐, 그래도 대부분은 안경을 쓰고 다니는 의사들이지만. "외래 이제 끝났잖아, 어떡할거야." "내일은 꼭 갈게." "아프진 않아?" "응." "가서 쌤한테 피곤해 죽을 것 같으니까 퇴근 시켜달라고 해. 얼른." "그럴까?" "아, 속상해.." 피가 막 흐르는 건 아니구 그냥 고인 정도였는데 나는 그게 왜이리 속상한지 별 것도 아닌 일에 거즈를 들고 난리법석을 떨었어. 이렇게 접으면 좀 큰가, 아 더 접으면 작을텐데. 거즈 한 장을 가지고 접었다 폈다, 반창고를 붙였다 뗐다, 난리를 쳤더니 변백현이 내 손을 슬쩍 쥐어서 천천히 움직여. "한 번 접구, 두 번 접고. 됐지?" "어..응." "붙여줘." 그러면서 다리를 굽혀 제 얼굴을 갖다대고 눈을 꼭 감는데, 피가 슬쩍 새어 나오는게 마음이 아프기도 하면서 또 이러고 있는 백현이가 귀엽기도 하고..일단 빛 차단부터 하는 게 맞는 것 같아서 거즈를 갖다대고 안대를 조심조심 끼웠어. "눈 나을 때까지 나 볼 생각 하지마." "응?" "말 자꾸 안 듣잖아." "아니, 안과 정말 가려고 했는데 점심시간도 없었," "점심도 안 먹었어?" "어, 아니. 그게.." "밥 거르지 말라고 했지. 너 오늘 거실에서 자." 명백히 내가 갑이었고 변백현은 을 중에 을이었어. 내 말에 한 쪽 눈꼬리가 추욱 내려가면서 강아지같은 표정을 짓는데, 저것도 한 쪽 눈밖에 안보이잖아. 눈이 좀 시린건지 눈을 무의식 중에 손으로 짚은 변백현이 아차 싶었는지 바로 손을 내렸어. 그럼 그렇지, 눈에서 피가 나는데 안아플리가 있나. "오늘은 집가면 아무것도 하지말고, 자지말고 있어야 해." "빨래가 산더민데," "내가 내일 할게." "잠은 왜, 나 피곤해." "으음.." "..미친 새끼야." 눈 한쪽은 막아놓은 채로 뭘, 뭐 어쩌겠다고. 순식간에 얼굴이 화르륵 달아오른 내가 변백현을 밀치고 빠른 걸음으로 스테이션안에 들어갔어. 저 미친놈,진짜. 병원에서 못하는 말이 없어요. 변백현의 침묵이 뭘 뜻하는 지 알아챈 나만 괜히 얼굴을 식히느라 정신이 없었지. 결국 종종걸음으로 집에 들어온 내가 산더미처럼 쌓인 빨래를 세탁기에 구겨넣듯이 집어넣고 버튼을 누른 뒤 쇼파에 축 늘어졌어. 씻어야겠다는 생각에 어기적어기적 욕실로 가서 샤워도 하고 기분좋게 향 좋은 로션도 바르고 세탁기가 다 돌아갈 때까지 기다리는데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어. "여보세요?" -야아, 왜 이제야 받아! "전화했었어?" 전화를 받자마자 울리는 김종대 목소리에 휴대폰 액정을 확인했더니, 부재중 전화가 5통이 와있었어. 왜 못들었지.. "아, 이제 봤다. 왜?" -빨랑 나와, 나 추워. "어? 어딜?" 얘는 뜬금없이 밤 열시에 어딜 나오라는 거야. -집 앞! 얼어죽는다, 얼른 와아.. 영문도 모른 채 어기적어기적 옷을 집어입고 계단을 종종걸음으로 뛰어내려갔어. 좀 얇게 입었더니 으슬으슬한 것도 같았지만 집 앞인데 뭐, 하는 생각에 그냥 내려갔어. "생일축하해애!!내 친구! 해피 벌쓰데이-." 아파트 앞에 서있던 김종대를 발견하자마자 김종대는 두팔을 쫘악 벌리며 나를 폭 끌어안았고 나는 익숙하게 품에 안겨 머리를 굴렸어. 오늘 며칠인데? "내가, 일찍 오려고 했는데..응급터져서 늦었어. 변백이랑 분위기 좋은데 내가 망칠까봐 쪼오끔 그랬는데, 아니지?" 그래서 내일 줄까 생각도 했는데.. 그건 생일의 의미를 저버리는 짓이야! 케이크는 먹었어? 그래도 내가 사준거 또 먹어! 너 저번에 예쁘다고 했던 머리망, 선물이야. 이건 찢어먹지말구 조심히 써. 겨울이라서 장갑도 샀어. 변백현이.. 어, 야.. 왜그래. "왜 울어, 응? 변백현이랑 싸웠어?" 종대가 쫑알쫑알거리며 내뱉는 말을 멍하니 들었어. 오늘이 그러니까, 내 생일이었고. 나는 11월30일이 내 생일인 줄은 알았지만 오늘이 11월30일이었다는 건 잊었던 거지. 그러고보니 아까 부재중전화에 엄마번호랑 아빠번호가 찍혀있기도 했고. 우리 예쁜 후배 번호도 찍혀있었던 것 같네. 문자메세지가 다섯통 정도 와있었던 것도 생일축하메세지였나봐. 오늘 바빠서 휴대폰을 확인할 새도 없었는데 그 사이 내 생일이 지나가고 있었던 거야. 아마 카톡도 몇개가 와있을거야. "야아, 변백현 나쁜새끼. 하다하다 생일날까지 애를 울리고 그러냐, 왜! 또 뭐 때문에 싸웠는데?" "..개새끼야, 변백현 욕하지마." "알았어. 미안해. 그럼 뭐 어떤 새끼야, 어?" 하여튼 김종대, 나랑 십년넘게 알고지냈다고 사람 다루는 건 기가막혀요. 김종대 손에 들린 케이크가 치즈케이크인 걸 확인하고 입가에 슬쩍 미소가 퍼지려했어. 나 치즈케이크 좋아하는 건 우리엄마보다도 김종대가 먼저 알았지. 그 때 김종대의 답지않은 조용한 휴대폰벨소리가 울렸고 빈 손이 없던 김종대는 코트 주머니를 턱짓으로 가르키며 받아보라 말했어. "누구야?" "저장 안되어있는데? " "번호 뭔데? 응급실인가?" "팔삼육사..어, 이거 우리 응급실인데." "너네 응급실이 왜 내 휴대폰," 본능적이라고 해야하나, 김종대 휴대폰으로 걸려온 우리 응급실 번호에 바로 통화버튼을 눌렀어. "여보세요?" -네, 여기 서울대병원 응급실인데요. 김종대씨 본인 되시나요? "..네, 그런데요?" -지금 변백현씨 보호자분이 필요해서 그런데 병원으로 와주실 수 있으신가요? 다름이 아니고.. 김종대를 들려주려고 스피커폰으로 전환해놓은 거였는데, 휴대폰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김종대는 손에 든 쇼핑백을 내팽겨치고 내 손에서 휴대폰을 뺏었어. 그리곤 스피커폰을 끈 뒤 자기 귀에 가져다 대. 나는 멍하게 서있다가 그대로 병원을 향해 뛰었어. 왜, 왜. 오늘 내 생일인데. "야, 뛰지마. 넘어져!" 뒤에서 나를 쫓아오는 김종대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결국 손목을 붙잡혔어. 반강제적으로 걸음을 늦춰 병원에 도착했고 김종대는 따라들어오려는 나를 말리지 않았어. 내가 말린다고 안들어오는 게 아니라는 걸 아는거지. 병원에 들어서서 김종대를 쫓아가는 길이 얼마나 떨리던지. 내가 일하는 곳이 이렇게 살떨리게 다가올 줄은 또 몰랐지. 너무 익숙해서 곁눈질로 본 모니터에서 변백현의 자리를 찾을 수 있을 정도였어. 김종대가 변백현을 찾아 커텐을 걷었고 거기에는 한쪽 눈이 아닌 두쪽 눈을 죄다 가린 변백현이 누워있었어. 인기척을 들은 건지, 손을 더듬거리면서 입을 열어. "어, 왔어? 심각한 건 아닌데, 괜히 오라고 해서 미안하다. 보호자 필요하다는데 고집부려도 안된다고 못 박는 바람에..지금 몇시야? 앞이 깜깜하니까 답답해서, 수액은 얼마나 들어갔어?" ㅡ 길어서 잠깐 끊었어용 헉헉..!찬뇨리 생일추카합니다!!!!!짝짝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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