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스 좋아해요?"
"...네?"
그 날 이후로 이틀을 안 오더니(추측해 보건데, 아무래도 부끄러워서 차마 못 왔었던 것 같다) 삼 일째 되는 날 와서 한다는 소리가 대뜸 빅스 좋아해요?란다.
이 남자, 진짜 속을 알 수가 없단 말이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전혀 모르겠다구. 그나마 오늘은 패션이 한 층 시원해졌다.
두꺼운 패딩 대신 긴 스웨...터... 아...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네, 진짜... 왜 그 쪽 몫까지 내가 더워지는 건데...
여튼, 긴 스웨터에 목도리 칭칭 그리고 새카만 선글라스. 근데 이렇게 보니까 체격이 택운 씨랑 비슷한데? 나는 패딩 때문에 덩치가 커보이는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빅스 노래... 항상 나오길래."
"아아."
"...좋아해요?"
"좋아해요. 빠순이가 무슨 뜻인지 알죠?"
끄덕끄덕.
"그래요, 나 빅스 빠순이에요."
"왜요? 어린 애도 아니고 연예인 좋아하는 게 한심해 보여요?"
가시 돋힌 말하는 사람 표정 치고는 내 표정이 너무 평화롭다 못해 평온해 보이기까지 한 건지, 너는 그저 내가 라떼 내리는 모습을 쭉 쫓기만 한다.
시선이 참 집요했다. 첫 날에도 그랬었지, 너는. 그 남자가 가게로 오는 순간 나는 자꾸만 이 곳이 카페라는 걸 잊게 된다.
오로지 그 남자와 나, 이렇게 둘만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더라구요. 네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덕질이냐, 그만둘 때도 되지 않았냐, 걔네가 돈을 주냐, 밥을 주냐..."
"..."
"한편으로는 우스워요. 그러는 본인들은 얼마나 대단한 인생을 살고 있길래. 정작 살펴 보면 나한테 그런 말 할 자격 있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거든요."
"..."
"아, 물론 그 쪽이 그렇다는 건 아니고. 적어도 한심해 보인다는 눈빛같지는 않아요. 선글라스 때문에 내가 헛다리 짚은 건가?"
여전히 말 없이 고개만 도리도리. 나는 되려 그 과묵함이 좋았고 편안했다. 꼭 내 뒷말을 묵묵히 기다려 주는 느낌이 들어서.
"솔직히 누구를 좋아하든 말든, 다른 사람이 신경 쓸 이유 없잖아요. 우리 부모님이라면 몰라. 그리고 나는 내가 빅스를 좋아하는 게 전혀 창피하거나 쪽팔리지 않아요."
우리나라가 언제부터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데에 나이 제한을 두었어요? 내가 좋아하는 데에는 그만큼 가치가 있고 이유가 있다는 걸 사람들은 모르는 것 같아요.
나는 내가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 부끄럽지 않을, 그런 사람들을 참 좋아하거든요. 내 마음을 떳떳하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들. 빅스가 딱 그래요.
막말로 내가 내 사람들 좋아하는데 타인에게 피해를 주나요? 피해를 받는 사람이 있기는 할까요? 그렇다고 해서 내가 공부를 못해서 대학을 못 간 것도 아니고,
덕질 하느라 빚을 벌써부터 이만큼 떠안고 있는 것도 아니고. 대체 뭐가 그렇게 문제인 걸까요, 사람들은... 뭐, 지금은 휴학 중이,
"휴학?"
내 말을 그저 묵묵히 듣고만 있었던 그가 갑자기 내 말을 뚝 자르고 되묻는다.
"...응?"
"그런 말 없었잖아. 휴학이라니?"
이 남자 말 길게 못하는 성격 아니었어...? 택운 씨랑 비슷한 줄 알았는데...? 아니 그것보다 그런 말 없었잖아? 이게 뭔 뭉뭉이 껌 뜯어먹는 소리야.
우리가 조금 친해지긴 했지만 그런 개인 사정까지 낱낱히 보고 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나?
"휴학한다는 말 없었잖아요."
"우리가 그런 깊은 대화까지 나눌 정도의 사이는 아니,"
"학교 잘 다니고 있는 거 아니었어?"
"저기요, 그러니까 내 말은"
"무슨 일인 거냐고 묻잖아, 내가 지금."
"..."
침묵이 흘렀다. 우리 둘 사이의 분위기가 꽤나 살벌해졌다는 걸 눈치 챈 손님들은 이미 자리에서 떠난 지 오래였다.
그간 이 남자 덕분에 설레이고 들떴던 모든 시간들이 우르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또 다시 기분이 저 땅 끝 밑자락으로 추락하는 것만 같다.
"...이해 할 수가 없네요. 내가 왜 당신한테 혼이 나는 듯한 기분을 경험해야 하는 거예요? 우리 사이가 뭔데?"
"..."
"기껏해야 단골 손님과 가게 사장도 아닌 알바생인데. 저번에는 뜬금없이 이상한 말을 하고 홀연히 사라지지를 않나."
"그건 차학...!"
"뭐요?"
왜 말을 하다 말아, 이상하게...? 뭐가 억울하기라도 한 건지 눈썹이 꿈틀거린다. 얼굴을 다 가리고 있으니 표정이 보이지가 않아서 답답했다.
며칠 못 본 상태에서 본 거라 정말 반가웠는데... 저번에 했던 말이 정확히 뭐였는 지도 물어보고 싶었는데...
우리 사이에 자리한 침묵은 꽤 오래 흘렀고, 그는 그렇게 또 말 없이 멀어졌다. 잠시 꾸지 않았던 그 악몽을, 오늘부로 다시 꾸게 될 것만 같았다.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
딸랑
"..."
그 남자였다. 오늘은 안 올 줄 알았는데. 그러고 보니 온 시간도 평소보다 훨씬 더 늦은 시간이다. 시계의 시침은 정확히 11에 향해 있었다.
나도 참 웃긴 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실컷 욕하고 미워할 때는 언제고 막상 얼굴을 마주하니 그런 마음이 싹 사라진 후였다.
"...죄송합니다, 손님. 저희가 곧 마감 시간이라서요. 주문은 커피 종류만 가능하신데 괜찮으시겠어요?"
"커피 먹으러 온 거 아닌데."
"..."
"..."
또 다시 지독한 침묵.
"미안하다고... 말하러 온 건데요."
"..."
"혼내듯이 얘기해서 미안하다고... 나는 걱정 되서 얘기한 건데, 혼내서 미안하다고..."
택운 씨, 이 남자 정말 이상해요. 하루에 몇 번이고 나를 웃고 울게 만들어요, 이 사람.
택운 씨는 나를 늘 기쁘고 행복하게만 해주는데, 이 남자는...
"그때처럼,"
"...?"
"혼자 힘들어 하고 있을까 봐."
"그때처럼...이라뇨...?"
그때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나 뿐인데 지금 당신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내 말에 작게 한숨을 내쉰 너는 크게 숨을 마시고 들이내쉬더니 고개를 숙여 선글라스를 벗는다. 그리고 칭칭 감았던 목도리도...
"...세상에."
"..."
"당신... 내가 어제 좋아한다고 했던 그 빅스 정택운이랑 진짜 똑같이 생겼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