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하면
가 닿으리
너는
그 끝에 눈이 부시게 서있으니
열렬한 것들은
다
꽃이 되리
꽃과 사랑을 기다리는
길고 지루한 날들
네가 내려준
은빛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너의 향기로운 환한 집에 내가 아무도 몰래 숨었으니
네 손에 쥐어진 꽃을 던지고
아, 열렬하게 돌아서서 너는 내게 안기었네
이 세상을 다 삼키고
이 세상
끝에
새로 핀
꽃
한송이
김용택, 꽃 한송이
나는 네가 밤 길을 걷는 것을 본다
네게서는 달의 냄새가 난다
너는 걷고, 걷고, 걷는다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
황인숙, 밤 길 中
여기저기에서 나는 그처럼 있다
그가 보고싶다 그가 너무 보고 싶은데
이젠 볼 수 없다니
이렇게 결정적인 감정은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걸까
그를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를 보려면 슬픔의 끝으로 끝없이
슬픔의 끝으로 들어가야 하나
박지혜, 초록의 검은비 中
한 처음 말이 있었네
채 눈뜨지 못한
솜털 돋은 생명을
가슴속에서 불러내네
사랑해
아마도 이 말은 그대 귓가에 닿지 못한 채
허공을 맴돌다가
괜히 나뭇잎만 흔들고
후미진 내 가슴에 돌아와
혼자 울겠지
사랑해
때늦게 싹이 튼 이 말이
어쩌면
그대도 나도 모를
다른 세상에선 꽃을 피울까 몰라
아픈 꽃을 피울까 몰라
정희성, 그대 귓가에 닿지 못한 한마디 말
문을 뜯고 네가 살던 집에 들어갔다
문을 열어줄 네가 없기에
네 삶의 비밀번호는 무엇이었을까
더 이상 세상에 세 들어 살지 않는 너는 대답이 없고열쇠공의 손을 빌려 너의 집에 들어갔다
나희덕, 다시, 다시는 中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은색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벌들은 귓속의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 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조각처럼
진은영, 청혼
열쇠도
자물쇠도 없이 갇혀버린 마음
네 속에 묶여있던 나
미움을
지우던 날
내 생을
흔들어 대던
너를 내가 보낸다
허열웅, 미움을 지우던 날
어떤 날은 네가 무섭도록 보고팠다
그러나 가장 절실할 때 널 찾지 않기로 했다
그 숱한 그리움으로 여러 날을 앓고
물빛 투명한 심상으로 너를 떠올릴 때도
못내 널 찾지 않기로 했다
어느 외진 바다 기슭에서
수없이 파도에 씻겨 닳아진 차돌처럼
견고하게 다져진 외로움 그대로
끊어질 듯한 기다림의 목울대 그대로
혼자서 살아가는 날의 그 공허한 행복감
쨍쨍 맑은 어느 날 높고 외딴 봉우리에
흰 한숨처럼 감기는 구름인 듯
사랑이여, 그 때 홀연 내게 오려나
김선태, 작은 엽서8 기다림
겨울에 떠난 사람은 봄에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설령 꽃 하나 물고 황무지 위에 서 있어도 나는 그를 알지 못한다
겨울에 떠난 그 사람의 자취가 봄볕에 녹아내릴까 두렵다
봄빛에 기대어 그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겨울을 살다간 그 사람을 나는 떠나보내야 한다
후회는 계획했던 것이 아닌데 현관의 거울과 같다
새로울 것 하나 없는 봄이 발등에 물먹은 잔디를 올리려한다
여름이 오기 전에 후회의 짐을 벗어야 한다
익숙한 봄을 숙명처럼 살아야 한다
또 한사람을 떠나보내지 않으려면
이봉하, 봄이 온다 中
그대, 오늘 볼 때마다 새롭고
만날 때마다 반갑고
생각날 때마다 사랑스런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풍경이 그러하듯이
풀잎이 그렇고
나무가 그러하듯이
나태주, 섬에서
안 보이면 걱정될 때부터 사랑일까
보고 있을수록 걱정될 때부터 사랑일까
네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길 때부터 사랑일까
너에게 시선도 못 주고 네 옆을 재빨리 지나갈 때부터 사랑일까
하루에도 몇 번씩 네가 생각날 때부터 사랑일까
머릿속에서 떨쳐내려고 애쓰는 때부터 사랑일까
너를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을 때부터 사랑일까
너를 꼭꼭 숨겨놓고 나만 보고 싶을 때부터 사랑일까
네 생각에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이 사랑일까
네 생각에 마음이 아파오는 것이 사랑일까
네가 무엇을 하든 용서될 때부터 사랑일까
조금만 서운하게 해도 네가 지독히 미울 때부터 사랑일까
이애경, 눈물을 그치는 타이밍
그대 지금 뒷모습을 보인다고 해도
언젠가는 돌아오리라는 것을 믿기에
나는 괜찮을 수 있지요
그대가 마시다가남겨 둔 차 한 잔 따스한 온기로 남아 있듯이
그대 또한 떠나봤자 마음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웃을 수 있지요
가세요 그대, 내가 웃잖아요
너무 늦지 않게 오세요
이정하, 내가 웃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