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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4년 전 (2020/3/24) 게시물이에요


9月 10
때때로 삶에는 껍질로만 기억되는 이름이 있다.
알맹이였다면 좋았을 텐데.

내가 놓친 이름, 호칭들.
시간. 계절들.
나의 너나, 너의 나.
우리. 우리들.



9月 17
4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붙잡으면서. 실은 아무것도 잊지 않은 삶을 버텨오면서. 잘 자, 재는 그 인사를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잘 지내고. 눈이 마주쳤다. 놓으니까 편하더라. 그러니 너도 편해졌으면 좋겠어.
 어떻게 놓아야 하는지는 영영 알려주지 않고, 재는 처음처럼 웃어 보였다. 4년 만에 보는 편안한 웃음이었다.

 언젠가 B가 한 말을 기억한다. 울며불며 헤어진 건 어떻게든 만난다고. 갈 곳 없는 슬픔이 흐르고 흘러서 길을 낸다고.
그렇지만 웃으면서 헤어진 것들은 정말 끝이 난다는 얘기. 재의 얼굴은 어떠했더라. 막역한 눈동자였다.
그 눈을 보며 생각했던 것 같다. 아. 그래서 네가 웃어 보였나.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끝인가. 너는 우리가 더는 아프지 않기를 바라는구나.



9月 19
새벽을 기다린 이유는 단지 재 때문이었다. 무얼 하고 있을지가 뻔하니까. 잠이 없는 너라서도 이쯤이면 잠들었겠지.
그때부턴 머릿속에 지겹도록 떠올랐다. 잠에 들면 깊어지는 재의 숨소리. 피곤한 날이면 얕게 섞이는 코 고는 소리.
뒤척일 때마다 사각거리는 이불 소리와, 등을 자꾸 웅크리던 태아 같은 너.
가지런히 내려앉은 속눈썹과 꼭 다물려 단단해진 입술. 그렇게 곤하게 자고 있을 재.
한때에는 내가 잠재우던, 내가 눈을 감기던, 품을 맡긴 채로 서로가 서로의 새벽이던, 안전했었던.

 우습지 않니. 이제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너는 고작 새벽의 한 조각뿐이라는 게.



10月 8
썩은 것은 썩은 것의 냄새를 안다.
밤새워 운 눈시울이 쉽게 부르트듯, 당신도 간밤 무사하지 못했구나, 짐작하는 일.
나뒹군 심장을 바닥에서 주워들곤 잘만 웃는 우리.



10月 15
안 놓을 거다. 지진계처럼 나 콱 다물고 기록할 거다.
난잡한 약속과 너저분한 웃음들이 하루걸러 하루 쓰여질 거다. 엊그제의 울음에선 내가 픽픽 그어지고 그저께의 이별에선 네가 픽픽 그려질 거다.
내가 버린 너와 내가 네가 버린 너와 내가 화석같이 손잡고서 못 죽을 거다. 너 없이도 너 있음의 관성으로 꿈길까지 송두리째 여진일 거다.



10月 18
있잖아, 버려진 것들은 다 한때에는 지켜진 것들이란 얘길 들었어. 넌 믿을 수 있니.

 그때는 그냥 말하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개찰구를 지나 1번 출구를 나오면 곧장 우리 집이라든지. 이 골목에선 한 번도 그림자를 밟아본 적 없었다든지.
가장 맛이 있던 계란빵은 사라진 지 2년 째라든지 하는 얘기들. 그저 네 숨소리에 튀어나온 대답 같은 거.
나는, 나는 그냥 네가 더 많이 알아줬으면 했다.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이렇게 사소한 매음새로 이루어진 사람이라고.



10月 20
너 아니면 죽겠다는 말을 눈 하나 깜빡 않고 산 채로 다 뱉어낸다.
내 사랑은 딱 그만큼 파렴치하다.



10月 26
가슴을 쥐어뜯는 사람에겐 가슴이 쥐어뜯긴 웃음을 보여주면 됐다.
사랑을 예속(隸屬)이나 기호품처럼 생각하는 사람에겐 적당한 시일에 다리를 벌려 눕거나 입안에 사탕 같은 혀를 물려주면은 됐다.
그런가 하면, 하루를 새벽 5시로 만든 사람이 있다. 5시에 전화를 끊고 이젠 나 없으니 영영 무섭지, 하던 사람.
세상의 무서운 것들을 다 쥐여주고 덜컥 전화를 끊어 놓고는. 통화음이 곱절을 이어져도 받지를 않아 놓곤. 날 울리고야 이젠 나 있으니 괜찮아, 웃던 사람.

그림자로 세상을 다 까맣게 칠하던 사람.

네 번호가 뜬 화면을 보면, 그래서 네가 이렇게 돌아오기만 하면, 나는 일생이 새벽 5시여도 괜찮겠구나, 하게 한 사람.



11月 3
세상은 매번 한 사람의 이름과 한 사람의 표정, 또 한 사람의 취향이나 한 사람의 버릇으로 수복되고는 했다.
더러는 이별 후까지도 끈질기게 살아남아 집 앞 벤치가, 잘 가던 골목이, 집어 들던 음료수가, 사랑한 밑줄이 낯선 것이 되었다. 날 선 것이 되었다.



11月 11
재와 헤어진 후 남은 일상은 자주 재와의 부록이 되었다.
함께 딛지 못한 걸음과 말해주지 못한 단어가 죽음보다 낯선 긴 밤을 재우고, 철천지 새카만 낮을 버티게 했다.



11月 17
가끔은 그래. 두어 달 버텨보면 고쳐지는 버릇 같은 거. 더 좋은 게 나타나면 금세 바꾸던 취향 같은 거.
옷장 안에 박혀 있는 낡은 옷마냥, 필요할 때 꺼냈다가 쓰고 나면 영 뒷전인 그런 거 말고.
어쩌면 너는 그냥 정체(停滯) 같은 게 아닐까. 아니라며 부인하기에는 너무 자라 긴 꼬리 같다.



11月 28
우리 보고 살지 말까. 그럴까.

네가 내게 지옥인 건 몇 세기를 버틴대도 웃을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너의 지옥이면 그건 어쩌지. 고운 눈에 핏방울이 맺혀 네가 울면 어쩌지.
허튼수작에도 절기는 곧잘 돌아 봄이 되는데. 그러면 또 못 다 죽은 네가 여기서 태어날 텐데.
그때의 네가 나를 원망하면 어쩌나. 귀신의 마음으로 내 곁에서 살면 어쩌나.
이제는 그러지 말까. 이제 우리 관둘까. 너 다시는 태어나지 말라고. 다시는 이 관짝 같은 봄 속에서 보지 말자고.
살고파 입 벌린 마음들의 팔다리를 잘라주며. 이제 그만 죽자, 하며. 그렇게 할까.



12月 13
겨울은 깊고 가슴은 병들었는데 어쩌자고 그 얼굴은 보고 싶은가.
절망뿐인 고백으로 새벽잠 눈 뜨는 일이 여태 숱한가.



12月 17
조금 더 자살 같은 사랑이 필요해.
미친 척 한 움큼 삼키면 깨지 않을 수 있는 사랑. 눈과 영혼을 맞대는 것보다 손과 귀를 잘라 벽걸이로 쓰는 사랑.
절벽 같은 데 매달려, 죽어라 죽여라 죽어야지 죽여야지 하는 사랑.

책장 하나가 넘어가면 그 전 장의 활자는 어디로 갈까. 무수한 파편들로 심장께를 찔러놓곤 왜 저들은 떨어지지 않을까.
소설보단 시를 좋아해,라 말하는 사람은 조금 더 시적으로 죽을 것 같고. 시 대신에 글을 쓰던 사람은 여기 단 한 줄의 묘비명을 쓴 줄 모른다.

모든 사랑은 오탈자투성이다. 개중 몇은 마음에 닿아서 약 대신에 삼켜 먹기도 했다. -그럼 나는 죽을 수 있을 줄 알았거든-
죽음 대신 죽음 같은 슬픔만 남겨준 사람. 실은 더 그 전에 죽었어야 했는데. 아껴 읽다 읽지 못한 글줄처럼 나만 남았다.



12月 31
생각이 난다는 건 마음에 담는다는 거지. 그렇게 도둑질하듯 가져와 버린 시간이 많다. 졸지에 주인 아닌 주인이 되어버리는 것.

영민한 눈가는 입술보다 솔직할 줄 알아서, 모르는 척 셈해본 것들에 이름표를 달아주고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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