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하, 내가 길이 되어 당신께로
길은 내게 일렀다
이제 그만 돌아가라고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많이 걸어왔노라고
길 위에 서면 나는 서러웠다
갈 수도, 안 갈 수도 없는 길이었으므로
돌아가자니 너무 많이 걸어왔고
계속 가자니 내가 이 길을 왜 가는지
그리고 무엇 때문에 가는지
가늠이 잘 되지 않는다
허무와 슬픔이라는 장애물
나는 그것들과 싸우며
비틀거리며 길을 간다
그대라는 이정표
나는 더듬거리며 길을 간다

권선옥, 별
나의 어둠은 네 배경이다
이 땅의 사람들은 너를 바라보면서도
왜 네가 별이 되었는지도 모를 것이다
내 가슴에 떨군 숱한 눈물과 그리움
뉘우침 같은 것들로
빛이 되었음을 짐작이나 하겠는가
애초에 다만 하나의 별이 되어
반짝이고 있다는 무심한 사람들에게
나의 어둠을 말할 수는 없다
너의 배경에서 아무 흔적도 없이
사위어 가는 그 많은 날들의 그림자를
아무도 보지 못하였으리라
다만 다만 하나의 반짝이는 너를
나는 가슴에 담고
앞으로도 너를
사람들은 별이라고 부르리라

나태주, 초라한 고백
내가 가진 것을 주었을 때
사람들은 좋아한다
여러 개 가운데 하나를
주었을 때보다
하나 가운데 하나를 주었을 때
더욱 좋아한다
오늘 내가 너에게 주는 마음은
그 하나 가운데 오직 하나
부디 아무 데나 함부로
버리지는 말아다오

정채봉, 그땐 왜 몰랐을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이었던 것을
그땐 왜 몰랐을까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내 세상이었던 것을
그땐 왜 몰랐을까
절대 보낼 수 없다고
붙들었어야 했던 것을
그땐 왜 몰랐을까

허연, 칠월
쏟아지는 비를 피해 찾아갔던 짧은 처마 밑에서
아슬아슬하게 등 붙이고 서 있던 여름날 밤을
나는 얼마나 아파했는지
체념처럼 땅바닥에 떨어져 이리저리 낮게만 흘러 다니는
빗물을 보며 당신을 생각했는지
빗물이 파놓은 깊은 골이 어쩌면 당신이었는지
칠월의 밤은 또 얼마나 많이 흘러가버렸는지
땅바닥을 구르던 내 눈물은 지옥 같았던 내 눈물은
왜 아직도 내 곁에 있는지
칠월의 길엔 언제나 내 체념이 있고
이름조차 잃어버린 흑백 영화가 있고
빗물에 쓸려 어디론가 가버린 잊은 그대가 있었다
여름 날 나는 늘 천국이 아니고 칠월의 나는 체념뿐이어도 좋을 것
모두 다 절망하듯 쏟아지는 세상의 모든 빗물
내가 여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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