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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유 ll조회 92l 0




이번에는 난세의 간웅이라고 흔히 말하는

삼국지의 대표적 인물 조조(맹덕)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평가가 점점 후대에 들어 달라지고 있습니다.

항상 드라마나 영화에서 악당으로 등장했던 조조는,


더이상 없습니다.


한번 조조의 일생을 살펴볼까요?







조조(曹操155~ 220)



삼국지 인물 3. 조조(맹덕)은 누구인가? | 인스티즈


자는 맹덕(孟德). 지금의 안휘성 출신으로 황건적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운 후 세상에 두각을 나타내었다. 동탁 암살 실패로 세상을 떠돌던 중 원소, 원술과 동맹을 맺기도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후에 동탁이 죽자 후한의 마지막 황제 헌제를 옹립하였으나 그 자신은 동탁보다 더한 전횡을 휘두른다. 또 최대 군웅 세력인 원소를 관도대전에서 격파하고 화북 지방을 거의 다 손아귀에 넣으면서 그 위세가 하늘을 찌르게 된다. 그 후 천하 통일을 위해 남하하였으나 손권, 유비 연합군에게 적벽에서 대패하고 그 후로는 양자강 이남으로 그 세력을 뻗지 못했다. 승상, 위왕(魏王)의 관직을 받았으나 스스로 황제에 오르지는 않았고 220년에 낙양에서 사망했다. 아들 조비(曹丕)가 뒤를 잇고 헌제에게 양위를 받아 위나라 황제가 된 뒤 태조 무황제로 추존되었다. 그동안 '난세(亂世)의 간웅(奸雄)'이라 하여 간신(奸臣)의 전형처럼 그를 평가했으나 근대에 이르러 여러 제후와 군벌 중 진정한 패자(覇者)이자 영웅으로 재평가하는 움직임도 일어나고 있다.




삼국지 인물 3. 조조(맹덕)은 누구인가? | 인스티즈




출생


사실 조조는 처음부터 환관 출신이 아니었다. 그는 가신인 하후돈, 하후연과 함께 패국 초현 사람으로 환관인 중상시 조등(曹騰)의 양자인 조숭(曹嵩)의 아들이다. 《삼국지》〈무제기〉에 따르면, 전한 시대 유방(劉邦)의 심복으로 재상을 지낸 조참(曹參)의 후손인 조등은 환제 때 중상시를 맡았다. 이에 대해 《후한서 》〈조등전〉에 조참의 후예라는 기록이 없다는 점을 들어 조참 후예설을 위의 선양을 윤색하고 조씨 가문을 격상시키려는 데에 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1] 조등이 환관이라 아들이 없었으므로 조숭을 양자로 삼았다(《삼국지》〈무제기〉에 인용된 〈조만전〉의 일설에 따르면, 조숭이 본래 하후씨이며 하후돈(夏侯惇)의 숙부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 환관의 손자라는 콤플렉스가 나중에 조조의 인물상이나 생활 방식에 커다란 영향을 주게 된다.



어린 시절


조조의 어릴 적 이름은 길리(吉利), 또다른 이름으로 아만(阿瞞)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교묘한 꾀와 기지를 발휘하는 일화가 많이 남아 있다. 소년 시절 매 날리기와 사냥과 노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는 조조를 보고, 숙부가 종종 조조의 아버지인 조숭에게 충고하곤 했다. 어느 날 조조가 숙부를 만나자 입이 마비된 듯한 시늉을 했다. 숙부가 조조에게 묻자 “마비증상이 갑자기 왔습니다.”라고 답했고 숙부는 이 일을 조숭에게 알렸다. 조숭이 이를 놀라 듣고 조조를 불렀는데, 조조는 태연하게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면서


원래부터 마비증상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숙부께서는 저를 싫어하셔서 없는 말을 지어내는가 봅니다.

라고 답하였다. 이후 아버지는 숙부의 말을 신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세설신어에 의하면 조조는 원소(袁紹)와 어린 시절부터 장난꾸러기 친구 사이였다. 언젠가 이 두 사람은 갓 결혼한 신부를 훔치러 갔다. 일이 실패하여 추적자를 따돌리면서 도망하던 도중, 원소는 그만 가시덤불 속으로 굴러 떨어지고 만다. 원소가 가시에 찔려 통증으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자, 조조는 대뜸 범인이 여기 있다고 큰소리로 외쳤다. 원소가 기겁하여 통증도 잊고 얼른 가시덤불 속에서 나와 도망가기에 바빴다고 한다.


이처럼 젊은 시절의 조조는 품행이 불량했으며, 거칠고 학업을 쌓기를 게을리했다고 한다. 양나라의 교현(橋玄)과 남양의 하옹(何顒)은 조조를 남다른 인물로 평가했다. 교현은 조조에게 “천하를 안정시키는 일은 아마도 그대에게 달려있다”라고 말했다. 조조는 교현의 권유로 허소(許昭)와 깊은 친교를 갖는다. 어느 날 허소에게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지를 물었는데, 허소는 조조를 ‘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子治世之能臣, 亂世之姦雄也)’(《삼국지》 배송지주)으로 평가했다(한편, 후한서 허소전에는 조조를 ‘태평시대의 도적, 난세의 영웅(君淸平之奸賊, 亂世之英雄)’으로 평가한다). 이 말을 들은 조조는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조조는 20살에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낭관(郎官)이 되고 낙양북부위에 임명된다. 그는 권세를 휘두르고 있었던 십상시인 건석(蹇碩)이라는 환관의 숙부가 금지된 야간 외출을 하자, 형틀에 묶어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법을 어긴 자는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가차없이 처벌했다.[2] 이로 인해 그는 백성들에게 큰 인기를 얻게 되고 돈구(頓丘)의 현령으로 승진하나, 중앙에서는 멀어지게 된다.



황건적의 난


184년 조조가 30살 때 황건적의 난이 일어난다. 이때 기도위(騎都尉)에 임명되어 영천(潁川)에서 황건적을 토벌하고, 이 공적으로 제남(濟南)의 상(相)으로 승진, 거기에서 그는 뇌물과 향락에 물든 상급 관리 8할을 파면하고, 당시 유행하던 사이비 종교나 미신 부류를 모두 금지시킨다. 그 후 동군태수로 임명되지만 부임하지 않고 돌연 사퇴했다. 그리고 고향에서 사냥과 독서를 즐기며 은거 활동에 들어갔다.


금성의 한수(韓遂)와 변장(邊章)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수도 방위를 위해 전군교위(典軍校尉)로 임명된다. 그 무렵 영제가 죽고 대장군 하진(何進)과 원소는 환관 주살을 계획한다. 그런데 황태후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동탁(董卓) 등 각지의 제후를 소집하여 황태후에게 압력을 행사하려고 했다. 조조는 이 소식을 듣고 “일부러 제후들을 부르지 않더라도 환관의 우두머리만 처형하면 될 뿐, 그들을 모두 죽이려고 한다면 일이 탄로나 실패할 것”이라고 말했다. 과연 조조가 예상한 대로 동탁이 아직 도착하지 않는 사이에 하진은 환관들에게 주살되고 만다. 또한 환관들도 원소에게 모두 주멸되고, 이 와중에 실권은 동탁의 수중으로 떨어진다. 권력을 장악한 동탁은 조조에게 협조를 구하지만 조조는 거절하고 성을 탈출했다.


189년(중평 6년) 12월, 조조는 사비를 털어 군사를 모으고 원소를 맹주로 하는 반동탁 연합군에 가담하여 분무장군을 맡는다. 그런데 동탁군이 워낙 강력했으므로 산조(酸棗)에 집결해 있던 여러 제후들 중 누구도 선뜻 선두에 나서지 못했다. 조조는 장막(張邈)과 힘을 합쳐 형양에서 동탁군과 싸웠고 적장 서영의 부대를 물리는 데 성공했다. 산조로 돌아온 조조는 군사를 움직이지 않고 있는 제후들에게 동탁을 격파할 전략을 제시했지만 이는 연합군의 모든 제후들이 유기적으로 협력한다는 점이 전제되어야 했고, 단지 유력자들의 이합집산일 뿐이었으며 심지어는 맹주인 원소조차 연합군 내부의 견제로 수송로가 차단당해 꼼짝할 수 없었을 정도였던 연합군에게 이런 작전을 수행할 능력은 없었다. 한편 연합군의 맹주 원소는 손쉬운 방법으로 동탁을 견제하고자 했다. 바로 기존 황제를 시해하고 동탁에게 옹립되었다는 명분적 약점을 가지고 있는 당시 황실의 정통성에 도전하여 명망 높은 유우(劉虞)를 새로운 황제로 추대하려던 것이었는데, 원술(袁術) 등이 중심이 되어 이와 대립했고 이때 조조도 원소와 일시적으로 대립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이 계책은 유우 본인의 거절로 실패하게 되었고 이후 구심점을 잃은 연합군은 사실상 해산되고 만다.



동탁 제거와 서주 공략까지


이때 조조가 동탁을 친 것이 계산된 행동으로 '자신이 패할 것을 뻔히 알고도 불구하고 오직 황제를 구출하기 위해 홀로 뛰어들었다.'는 이미지를 만들어 인망이라는 무형의 자산을 얻었다. 원술은 손견(孫堅) 등을 앞세워 화웅(華雄)을 쓰러뜨리는 무훈을 세우고 있었다. 물론 순욱(荀彧)이 그를 그토록 예우하던 원소를 따르지 않고 굳이 조조를 따른 예의 경우 당시 황실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등 노골적인 패권주의를 보여온 원소와 달리 조조가 황실의 권위를 회복시킬 것이란 기대를 가졌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이 무렵의 조조의 행보를 지나치게 미화하는 것은 곤란하다`고들 소극적으로 나대는 부류가 있으나 중원재사와 형주-서주-양주에 걸쳐 둔피하였던 유생 중의 다수가 조조의 근거 있는 야망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더군다나 `양-패 사이에서 진인이 나타난다`는 참설까지 유행하였다)


이후 원소와 제휴한 조조는 191년(초평 2년) 동군에 침공한 흑산적을 연주 전투에서 토벌하고 원소의 대리 교서(통감 등에서는 矯制라고 하여 비난하였다)에 의하여 동군 태수로 임명된다. 192년 4월, 동탁이 여포(呂布)에게 살해된다. 같은 해 청주의 황건적 100만 명이 연주에 침공해 왔다. 당시 연주목이었던 유대(劉岱)는 이를 맞아 싸우다가 전사하고 만다. 평소 조조와 가까웠던 제북상 포신(鮑信)은 조조를 연주목으로 추대했다(구주춘추 등 기타 주석서에서 진궁). 조조는 황건적과 싸워 포신이 전사하고 오른손에 화상을 입어 동료 누이(婁異)에 의해 말에 올라타 구조되는 등 상당히 박전했다. 직후 사기가 땅에 떨어지자 조조가 친히 상벌에 대하여 확언을 주며 적의 퇴로를 예상하여 기병(奇兵)을 풀어 상하로 대파하였다(본기의 원문에 의하면 적의 둔영까지 다다랐다고 하니 하늘을 찌르는 기세였을 것이다). 이후 조조는 이들과 협상해 자기의 세력으로 영입하고, 그 가운데 정예 병력을 선발해 ‘청주병’으로 불렀다. 황건이었던 백성 백만 구(口)와 병사 30만을 흡수해 기반을 얻은 조조는 이때부터 반동탁의 영수로 기주에서 군림했던 원소에 대하여 자신의 치소 연주에 할거하며 중원 구출의 야심을 드러내었다.


같은 시기 원소와 원술의 분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원소는 형주의 유표(劉表)와 연합했고, 원술은 유주의 공손찬(公孫瓚)과 서주의 도겸(陶謙)과 손잡아 서로를 견제했다. 이때부터 다른 모든 세력과 마찬가지로원소의 영향 아래 있던 조조는 인접해 있던 도겸과 싸우기 시작했던 듯하다. 또 조조는 원소와 연대해 각지에서 원술연합군을 격파하자마자 스스로 용병하여 마침내 원술이 본거지를 버리고 양주로 도망가게 하였다(5차례 싸워 모두 추격하였다). 이 직후에 도겸은 재차 연주 동쪽 태산군에 침공했고 조조의 아버지 조숭이 살해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조조는 193년부터 194년(흥평 원년)에 걸쳐 2차례 도겸 정벌에 나서 서주 땅에서 지나가는 족족 적의 대항 의지를 말살시켜갔다.


《후한서》에는 “주민 수십만 명을 살해하고 개와 닭 등 가축도 가차없이 도살하였다. 이 때문에 사수(泗水)는 흐름을 멈추고 말았다.”


조조가 서주를 공격하는 사이에 친우였던 장막과 연주를 지키던 진궁은 조조에게 반기를 들고 여포를 연주목으로 내세웠다. 조조는 복양에서 궁지에 빠지고 어이없으리만치 전국을 휩쓴 메뚜기의 피해로 갑병까지 타격을 입지만 2년에 걸친 공방 끝에 마침내 연주를 평정하는 데 성공한다. 실제로 둔전병을 데리고 다니던 중 흉년을 만나 먹을 것을 찾으러 가고 남은 병사는 고작 1천도 셀 수가 없었다고 하니 피해가 극심하였다. 그러나 이 부대로 여포가 이끄는 진궁의 구원군 1만을 대타격하고 치중을 획득하였다. 손자병법 주석에 따르면 논밭 근처 제방에서 적을 도발하여 역격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196년(건안 원년)에는 헌제를 옹립하여 대장군으로 임명되고, 수도를 낙양에서 허창으로 옮긴다. 그와 함께 여러 개혁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같은 해에 조지와 한호(《진서》 선제기에서는 사마의)의 건의를 받아들여 둔전제를 실시해 농경을 전문으로 하는 농민을 널리 모집하여, 허도(허창) 주변에서 농업에 종사시켜 곡물 100만 석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이리하여 전쟁에 없어서는 안될 식량을 충실히 마련하여 천하를 장악할 수 있는 기반을 쌓는다.


이때 유비(劉備)가 여포에게 하비를 빼앗겨 조조 밑으로 도망온다. 참모 정욱은 “유비는 끝내 남의 밑에 남아있을 인물이 아니다” 라고 말하면서 제거할 것을 진언하지만, 조조는 다만 유비에게 먹을 것을 하사하였다.


[편집]관도대전과 적벽대전

197년 조조는 완(宛)에 출진하여 장수(張繡)를 항복시키지만 나중에 그는 조조를 배신한다. 이 싸움에서 조조가 패하고 맏아들 조앙(曹昻)과 부하 전위(典韋)가 전사한다. 이때 조조는 맏아들 조앙의 죽음보다도 전위의 죽음을 더 슬퍼했기 때문에 아내와 이혼하게 된다. 198년 조조는 장수, 유표의 연합군을 안중에서 격파하고, 하비에서는 여포를 사로잡아 처형한다. 다음해에는 원술을 토벌하고 장수를 다시 굴복시켜 그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원술 토벌에 유비를 파견한 일이 문제가 된다. 역시 서주자사 차주(車胄)가 유비의 반란군에 습격을 당하고 만다. 별일 없었다는 듯이 조조가 친히 출진하여 유비를 격파하고 버림받은 처자식를 붙잡음과 동시에 관우(關羽)를 항복시켰다. 원소가 발밑으로 도망쳐온 유비에게 잠자리를 하나 내어주었고 마침내 원소와 천하를 놓고 자웅을 겨루게 된다.


원소와 천하 패권을 다투는 전초전은 먼저 백마에서 치러졌다. 여기에서 조조는 원소의 부하인 맹장 안량(顔良)과 문추(文醜)를 죽이는 등 활약했지만, 점차 전황이 불리해지고 아군의 군량이 고갈되어 그 대담한 조조도 마음이 약해진다. 그래서 순욱에게 허도로 귀환하고 싶다는 편지를 보내 상담을 구했는데, 순욱은 격려의 답장을 보내와 그곳에서 버티게 한다. 마침내 원소의 모사인 옛 친구 허유가 투항하고 고시와 오소에 있는 원소의 심장부인 병참사령부를 습격하기를 진언, 조조는 오소 기습전에 앞서 원소의 본진 습격에 대비해 방비를 단단히 한 다음 원소군으로 위장한 5천의 특공대를 이끌고 잠입, 오소의 식량과 군수물자들을 모조리 불살라버림으로서 형세는 역전, 원소군은 완전히 무너지고 만다. 이때 몰수한 전리품 중에서 원소와 내통하고 있었던 조조의 부하의 편지가 무더기로 나왔다. 조조는


원소의 대군을 상대로 해서 나 자신조차도 어찌 될지 알 수 없었다. 하물며 다른 사람들은 어떠했겠는가?

라고 말하면서 편지를 읽지 않고 모두 소각, 내통한 자들은 용서해주고 대신 그 일은 전부 불문에 부쳤다고 한다. 그 후에도 북진을 계속하여 원씨 잔당 세력을 철저히 격파했다.


《삼국지연의》에 따르면, 이때 조조는 군사를 몰아 장성을 넘어 모돈(冒頓 또는 묵돌)을 죽였다고 한다. 모돈은 기원전 209년부터 기원전 174년까지 흉노의 선우(대족장)를 지냈던 사람으로 조조와는 4백년 가까이 시차가 있는 인물이다. 조조의 모돈 살해는 나관중이 삼국지연의에서 꾸며낸 이야기다.


원소 토벌 이후 중국 대륙의 최강자로 자리매김한 조조는 208년 승상(丞相)의 지위에 오르고 3공의 지위를 없앴으며 이미 대장군이 되어 있었기에 '대장군 대승상'(大將軍 大丞相)으로서 공식적으로 후한 조정의 정권과 군권을 모두 장악하였고, 형주의 유종(劉琮)을 항복시켜 적벽대전에서 유비와 손권(孫權)의 연합군과 대치하다가 군을 물리게 되었다.


적벽대전이 일어나기 전 아들인 조비가 미리 화용도를 정비하고 오림에 도착하여 조조가 수월하게 퇴각하였다고 한다. 주유는 적벽에서 지나치게 거대해진 조조의 세력에게 큰 타격을 주고 수월하게 형주와 촉을 병합하려 하였지만, 조비의 길 정비로 인해 기대한 것의 10분의 1만큼의 성과도 얻지 못했다고 한다. 손권과 유비 연합군이 때려부순 조조의 병선은 거의 대부분 형주의 병선들이고, 불길에 놀라 도망친 병사들은 원래 조조의 청주병이 아닌 유표의 수군이었을 뿐이다. 이후 중국 대륙은 위, 촉, 오 삼국의 삼국 시대에 접어들어 완전한 통일의 꿈이 멀어지지만 조조의 우세한 세력 기반은 변하지 않았다.


역시 참전군 대부분(참모 장군 포함)이 역질에 감염되었으며 재정비를 위해 군을 물린 후 주유의 화공으로 서로 연결되어있는 선박이 화재를 입었다는 <<후한기>>의 서술이 그나마 틀린 곳이 적은 것으로 추정해야할 뿐이다.



삼국 정립과 죽음


210년에 조조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구현령과 술지령을 공포한다. “구현령”이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재능있는 사람이면 인재로 등용하는 것이다. “술지령”에서는 수여받은 4현 3만 호 가운데 3현 2만 호를 황제에게 반환하고, 제위 찬탈 등 야망이 없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제도다. 조조는 213년 위공(魏公)으로 책봉되었고, 조조는 자신이 저축한 어마어마한 재산들을 모두 기부한다. 그는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 자신의 많은 재산을 기부함으로써 훌륭한 군주로 거듭났다. 그 영향을 받아 조조를 섬기고 있던 고위 관직층 신하들도 자신들이 저축한 재산을 모두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 나누어주었다.


216년 조조가 위왕(魏王)에 봉해지면서 훗날 위나라의 건국이 이루어지는 기초가 마련되었다. 헌제는 사실상 허수아비였으며 이 무렵 후한의 실권자는 조조였으나 황제가 되지는 않고 주 문왕을 따른다는 고사를 이상하리만치 확고하게 지키며 위왕으로 붕거(추숭 전 훙거. 추숭 후 붕어)하였다.


211년 마초(馬超)와 한수 등이 관중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조조가 토벌에 나섰다. 마초 등이 산과 요새에만 있을 뿐 견벽거수로 일관하자 서황의 진언을 옳게 여기고 진(津)을 건너는 척하며 대기중이던 병사로 그들을 습격하여 대파하였다. 또한 이때 흙을 쌓아올려 성벽을 만들고 물을 뿌려 하룻밤 사이에 얼음성을 완성시켰다고 한다.[3] 가후(賈詡)의 이간책으로 마초와 한수 사이가 벌어지게 하여 적을 물리치고 관중을 평정했다는 기록은 모두 사실이다. 212년 오나라 정벌에 나서고 다음해 유수구에서 격파한다. 이때 다시 군사를 일으킨 마초를 토벌, 215년에는 한중의 장로를 항복시키는 등 매년 지칠 줄 모르고 반란군을 상대로 무승부 없이 정벌(토벌)을 완수하였다.


217년에는 손권과 다시 싸우고 219년 한중에 숨은 유비가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잠자코 있던사이, 동소의 헌책과 손권의 부탁을 응락하고 형주의 관우부대를 괴멸시킨다.


관우가 죽은 이듬해, 220년 1월 23일, 조조가 낙양에서 향년 66살의 나이로 서거했다.


조조의 최후에 대해서는 여러 일화가 있다. 건시전을 지을 때 탁용사의 신목(神木)을 베자 나무에서 피가 흘러 이를 본 조조가 기절하고 말았다든가, 배나무를 옮겨심을 때 뿌리에 상처가 나 피가 흐르고, 이것을 본 후 병상에 눕게 되었다는 등의 이야기가 있다.


아들 조비(曹丕)가 위왕에 오르자 조비는 아버지 조조를 무왕(武王)으로 추증하였다가, 헌제에게서 선위를 받고 즉위하자 다시 태조 무황제(太祖 武皇帝)로 추증하였다.


한편 문인으로서도 뛰어났던 조조는 훗날 아들 조비, 조식(曹植)과 함께 당대의 7문학계의 이름 있는 사람들이라 해서 삼조(三曹)라 불렸으며 부자 3인을 세명으로 묶는 이른바 삼소(三蘇)등은 여기에서 모티프를 따왔다는 것이 정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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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볼거리]



후대의 평가




능력에 따른 인재 채용


조조는 군사, 학문, 무예, 내정 모두에 탁월한 재능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시문, 그림, 노래 등 풍류에도 매우 뛰어났다. 또한 통솔력도 굉장하고 수하를 감동시키는 방법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또한 인격면에서도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당시에는 파격적인 기준으로 인재를 선발하였는데 그 기준이 바로 '능력'이었다. 어떠한 분야를 막론하고 한 가지 분야에 뛰어나기만 하면 그 사람의 신분이 아무리 천하다 해도 조조는 크게 인정해줬다.


단점


하지만 가끔가다 의심이 지나치기도 했다는 것을 결함으로 들 수가 있겠다. 모개와 최염 등의 변명을 묵살했던 것을 들 수가 있는데 관도대전 당시 부하의 내통서류를 불태우면서 했던 말도 `나조차 두 생각을 하며 위태로웠다` 였다. 구석(九錫)을 받아 위공이 되려는 조조에게 순욱은 대의명분에 어긋난다는 반발을 살 수가 있다는 취지에서 굳세게 간언하였지만 조조는 옳게 여기지 않았다.


주불의가 위협이 될 것이라면서 또 조충이 죽은 이래로 그를 부릴 자가 없다라는 일반인들이 감당하기 힘든 이유를 들어 말하면서 주불의를 제거하였다. 조조군 내의 가장 핵심적인 두뇌인 사마의도 의심한다. 결과적으로 이 선택은 후대의 사마사, 사마소, 사마염이 일으킨 반정에 대하여 조조의 후세를 찌르는 탁월한 안목에 대한 증거로도 회자되고 있는 것이 웃음이 나오는 일이기도 하다.


다만 연주목 추대 직전까지(연주목 추대도 정작 진궁의 발의이고 제북상 포신이 동조하였다) 진궁을 매우 가까이 두었는데 훗날 여포의 밑으로 들어가는 진궁의 경우나 왕실의 대역적을 후원하던 도겸을 정벌할 때까지도 장막을 신뢰하다가 진궁의 말에 넘어가는 장막을 결국 스스로 그 삼족까지 멸했던 부류의 사건과 심배와 순우경을 살리려 했으나 항장의 눈물 겨운 간언 등으로 끝내 죽였던 일 또는 저수를 풀어주어 은거할 수 있도록 했으나 원소군의 경계를 넘어가려던 그를 붙잡은 뒤 처형했던 일 등은 `은혜를 원수로 갚는 자`를 꿋꿋이 죽이는 조조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데 삼국지 연의로 더욱 유명해진 조조의 `자존감`은 과거 (오히려) 영웅적 단점으로 손꼽히기도 하였다.


배주(裴注)에 따르면 `패왕지주는 남의 제사를 끊지 않는다`·`효로 천하를 다스리는 자는 남의 어버이를 예우하는 것이다` 라는 말을 좇으면서 진궁의 남은 가족을 먹여살렸다고 하니 이 역시 실소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이미지


주 문왕을 본받아 자신이 제위에 오르지는 않았지만 후대 조비에 이르러 자신이 지켜온 주공과 같은 이미지를 조비가 이해하지 못하고 한실의 제위를 찬탈했다는 오명이 계속 쫓아다녔고 명분론과 정통론이 득세하던 시기에는 자식의 일로 인해 명성이 더럽혀지기도 하였다. 나관중의 연의에 이르러서는 간교한 악인의 상으로 그려지기도 하였고, 경극 도중 조조역의 배우가 죽는 경우도 있었다.


복권(復權)


현대에 와서는 중국의 모택동(毛澤東)과 곽말약(郭沫若) 등이 조조의 영웅으로서의 진취성을 평가하면서 조조의 복권에 대한 움직임도 상당히 압도하는 형국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디지털시대를 맞아 삼국지가 수많은 소프트웨어로 판매되는 과정에서 조조 자신의 문무겸전적 인물상은 조비의 일로 인하여 퇴색되지 않고 오롯이 인식되어지고 있다. 또 조조의 중원 평정을 모티프로 삼는 커리큘럼은 항상 빠지는 일이 없어 `중원 구출`의 분위기는 여전하다.


영화 적벽대전


영화 적벽대전 2에서 조조는 리더십이 뛰어난 지도자로 설명된다. 전염병으로 지친 군인들을 위로하여 전쟁에서의 승리의지를 갖게 한다. 또한 문학에 뛰어나서 조조의 시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 감동하였다.


당대의 평가


동시대 사람 중 유명한 두 사람은 조조를 서로 상반되게 평가했는데, 양국(梁國) 사람인 교현은 그를 두고 치세의 무협도이자 난세의 대영웅으로 평가했지만, 여남(汝南) 사람인 허소는 그를 두고 치세의 능신이자 난세의 간웅으로 평가했다. 오나라의 마지막 승상인 장제는 참칭 국가의 신하인 신분으로 "위나라 백성들이 조조를 따르는 것은 그 위엄을 두려워하기 때문이지 조조가 은혜를 베풀었기 때문은 아니다"라고 말해 다소 신뢰성이 떨어진다.



진수의 평가


진수가 《삼국지》 〈위서〉 무제기에서 평하기를,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합리적으로 일에 대처했으며, 구악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는 과거의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이성적인 판단으로 대처해 사람을 등용했다는 의미로 간주되고 춘추시대 패자의 덕목이라는 견해를 정가운데로 찔러 일치하는 것이다.



후대의 평가

후조(後趙)를 세운 석륵(石勒)은 동탁 암살의 저런점이 되었으며 반동탁 토벌대의 선봉을 맡았던 위무제와 대승상 조조에게 죽을 것을 두려워하며 임관하고 대신들과 사사로이 교제하였던 사마의를 한데 묶어 평가하길, 저 중화인(=중국인)인 조조나 사마중달 부자처럼 남의 고아나 과부를 속이며 잔꾀를 부리고 온갖 아첨을 일삼으며 천하를 빼앗는 일은 자신은 결코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기도 하였다.[4]


시인이자 정치가였였던 두목(杜牧)은 “조공(조조)은 손무의 병법 13편에 주석을 달아 후세에 전했다.”고 하면서 조조의 군사적 재능을 칭찬했다.


중국의 모택동은 "조조(曹操)를 간신이라고 하는 것은 봉건정통관념이 만들어낸 것으로 반동사족들이 봉건정통을 유지보호하는 것이었다.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 라고 하면서 조조의 복권을 말한 바 있다. 그는 조조의 제도 개혁과 둔전제 등의 정치적 공적과 탁월한 군사재능 그리고 조조의 문학 재능을 칭찬하면서 조조를 공식 석상에서만 32번 언급하여 모택동이 가장 많이 언급한 역사인물이 조조(曹操)라고 한다.



연의의 평가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서는 악인(惡人)의 상으로 그려지고 있다.[5][6] 나관중은 조조를 당대의 민중이 가지고 있던 조조에 대한 반감이 들어 있는 전승과 민간 설화 등을 이용하고, 변방 익주(촉)의 인사들을 대부분 우국지사와 충의지사로 묘사함으로써 실제 역사와는 다르게 조조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삼국지연의》 내에서 자아내고 있다. 또한 조조를 악인으로 나타내기 위해 우스꽝스럽고 경망스러운, 때로는 인신모독에 가까운 묘사도 쓰고 있다.[7]하지만 이문열이 평역한 《삼국지》(민음사)에 나오는 조조는 자신을 위해 죽은 군인들을 위해서 그 가족들에게 밭을 줌으로써 생계에 지장이 없도록 배려하는 훌륭한 지도자로 묘사되며[8],법을 잘 지킨 지도자였다. 조조는 농민들에게 해를 주지 않도록 말을 타고 보리밭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는데, 그만 자신의 말이 보리를 밟았다. 법을 어김을 부끄럽게 여긴 조조는 자신의 목을 자르려고 하려다가, 참모들의 조언에 따라서 자신의 목을 머리카락으로 대신하니, 군인들은 다시는 법을 어기지를 아니하고 또한 군법을 두려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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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의 평생 업보가 된 학살]


조조는 다들 아시다시피 법가주의를 기반으로 한

국가를 창설한 군주입니다.

백성들은 그를 두려워했고,

서주대학살은 그 두려움을 증폭시킨 엄청난 조조의 업보입니다.

그 서주학살 이후, 원소를 제압하고 나서조조는 그래도 선정을 펼치고 피폐한 백성들의 풍토를 고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군초령] : 내가 의병(義兵)을 일으켜 천하를 위해 폭란(暴亂)을 제거했으나, 옛 땅의 인민(人民)들은 거의 다 죽거나 다쳐 국(國) 안을 온종일 다녀봐도 아는 얼굴을 만나지 못했으니 슬프고 가슴아픈 일이로다. 의병을 일으킨 이래 장사(將士-장졸)들 중에 후사가 끊어진 자는 그 친척들을 찾아 후사를 잇게 하고 땅과 밭을 주고 관(官)에서는 농사에 쓸 소를 공급하고 학사(學師-학관, 교사)를 두어 그들을 가르쳐라. 후손이 남아있는 자를 위해서는 묘(廟-사당)를 세워주어 그 선인(先人)에게 제사지낼 수 있게 하라. 혼령이 있다면 우리 백년 뒤에라도 어찌 한스러워하겠는가!

[인간적인 면모] : 당초, 원담을 토벌할 때 얼음깨는 일을 하지 않고 달아난 백성들이 있었는데투항해와도 받아들이지 말도록 영을 내렸다. 얼마후 도망갔던 백성들이 군문으로 나아가 자수하자 공이 말했다, “너희들의 청을 들어주면 내가 영을 어기게 되고, 너희들을 죽이면 자수한 이를 죽이는 셈이 되는구나. 깊은 곳으로 돌아가 숨어서 관원들에게 붙잡히지 않도록 하라.” 백성들이 눈물을 흘리며 떠났는데 그 뒤 결국 붙잡혔다.

[정제풍속령] : 아첨하는 무리들이 파당을 짓는 것은 옛 성인들이 미워했던 일이다. 내가 듣기로, 기주(冀州)의 풍속은 아버지와 아들조차 부(部)를 달리하여 서로 비방한다고 한다. 옛날 직불의(直不疑-전한 초 인물)는 형이 없었으나 세인들은 그가 형수를 도둑질했다고 했고, 제오백어(第五伯魚-후한 초 인물인 제오륜第五倫)가 고아에게 세 번 장가들자 과부옹(撾婦翁-처를 강탈한? 노인)이라 했다. 왕봉(王鳳-왕망의 백부. 전한 때 대사마대장군으로 외척)이 제멋대로 권세를 휘두르자 곡영(穀永)은 그를 신백(申伯-주선왕 때 명신으로 외척)에 비유했고, 왕상(王商)이 충성스러운 말을 하자 장광(張匡)은 그가 도(道)를 그르친다고 했다. 이들 모두는 흰 것을 검은 것이라 하여 하늘을 기만하고 임금을 속인 것이다. 나는 풍속을 정제(整齊)하고자 하니 이런 네가지 일이 제거되지 않는다면 나는 이를 수치로 여길 것이다.

[존휼령] : 근래에 군이 수차례 정벌을 행하는 와중이나 혹은 역병을 만나, 관원과 군사들이 죽어 돌아오지 못해 집안에는 원망이 가득하고 백성들은 흩어져 떠도니, 어진 이라면 어찌 이것이 즐겁겠는가? 부득이한 일일 뿐이다. 죽은 이들 중 집안에 기업(基業-기반이 되는 생업)이 없어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자가 있으면, 현(縣)의 관아에서는 양식을 대어주고 장리(長吏)들은 이들을 존휼(存恤-위문하고 구제함)하고 어루만져 내 뜻에 부합되게 하라.

[신형령] : 무릇 형(刑)이란 것은 백성들의 목숨이 걸린 일이다. 그러나, 군중에서 옥(獄)을 관장하는 자 중에는 혹 그 사람됨이 아닌 자가 있어 그에게 삼군의 생사에 걸린 일을 맡기니 나는 이점을 심히 두려워한다. 법리(法理)에 밝게 통달한 자를 뽑아 그로 하여금 형(刑)을 관장하게 하라.

하지만, 이렇게 조조가 신경써도 백성들이 조조를 두려워했던것은.

서주대학살이라는 잔인한 업보와 더불어,

아무리 조조를 죽이려는 시도가 난무해도 다 실패한데다가,

초인적인 조조의 능력을 백성들도 어느정도 알았기에...

두려워하지 않았나 합니다.

조조 또한 백성들이 자신을 두려워하는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겠지요.

조조가 마초와 교전할 때 조조의 멘트는 조조의 이미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 적장들이 공을 만날 때 모두 말에 탄 채 배례했는데 진인(秦人), 호인(胡人)으로 이를 구경하는 자들이 앞뒤로 몇겹을 이루어 뒤섞였다. 공이 웃으며 적에게 말했다, “너희들이 조공(曹公)을 보고 싶은가? 나 역시 사람일 뿐이다. 눈이 4개도 아니고 입이 두개도 아니나 다만 지모가 많을 뿐이다!” 호인들이 앞뒤로 크게 구경했다.

눈이 4개, 입이 두개달린 괴물은 정말 옛날에 무서운이야기에 나올법한 두려운 괴물이지요.

그러나 소문이 그렇게 난 것은 조조가 진짜 그런 인물이었다는것을 입증합니다.

마초와 교전할때의 민족은 이민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정도인데,

조조 영지 내부의 백성들은 하물며 어떠할까요. 모르긴몰라도 저 소문보다 심하면 심했지 약하진 않을것이라 봅니다.

서주대학살은, 조조가 민심을 잃게 만들어버린, 그리고 조조의 저 이미지를 고착화시킨

조조의 평생을 그림자처럼 붙어서 따라다니는 업보로써

조조를 괴롭힙니다.

조조의 평생 뿐만 아니라 조조는 그것 하나로 영구까임권을 취득하여

여기 삼도에서도 비판받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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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는 다재다능하다?]


1. 용병 - 행군(行軍), 용사(用師-용병)할 때는 대체로 손자, 오자의 법을 가늠해 이에 의거하고, 사안에 따라 기책을 세워 적을 속여 승리하니 변화가 신과 같았다.

2. 병법 - 스스로 병서(兵書) 10만 여 자를 지어 제장들이 정벌할 때 모두 이 신서(新書)에 따라 일을 처리하게 했다. 일에 임해 또한 손수 절도(節度-명령)를 내리니 영에 따르는 자는 승리하고 위배하는 자는 패배했다.

3. 기만 - 진을 치고 적과 대적할 때는 편안하고 한가로워 마치 싸우려 하지 않는 것 같았으나, 결기승승(決機乘勝-결정적인 계기에 결단해 승세를 탐)할 때에는 그 기세가 용솟음치니, 이 때문에 매번 싸울 때마다 반드시 이겼고 군이 요행으로 이기는 일은 없었다.

4. 눈치 - 사람을 알아보고 잘 살펴 미혹하여 속이기 어려웠는데

5. 인사 - 행진(行陳-군진) 사이에서 우금, 악진을 발탁하고 패망한 적들 중에서 장료, 서황을 취하니, 모두 좌명(佐命)하여 공을 세우고 명장(名將)으로 벌여섰고 그외 세미(細微)한 신분에서 발탁되어 목(牧)이나 태수에 오른 자는 일일이 헤아릴 수도 없다.

6. 독서 - 어군(禦軍)한 지 30여 년 동안 손에서 책을 내려놓지 않았으니, 낮에는 무책(武策)을 의논하고 밤에는 경전(經傳)을 생각했다.

7. 시가 - 높은 곳에 오르면 반드시 부(賦)를 짓고 새로운 시(詩)를 지으면여기에 관현(管絃)을 입혀 모두 악장(樂章)을 이루었다.

8. 무력 - 재력(才力)이 남보다 뛰어나 손수 활을 쏘아 나는 새를 맞추고 맹수를 사냥했으니 일찍이 남피(南皮)에서 꿩을 사냥해 하루에 63마리를 잡은 적도 있다.

9. 건축, 토목 - 궁실을 짓고 기계(器械)를 수리함에 이르러서는 법칙으로 삼지 않을 것이 없으니 모두 그 뜻을 다 펼쳤다.

10. 검약 - 고아(雅)한 성정으로 절검(節儉-검소)하며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니 후궁(后宮)들은 금수(錦繡-수놓은 비단)를 입지 않고 시어(侍禦)하는 이들은 두가지 이상으로 채색된 신을 신지 않았고, 휘장과 병풍이 헐어지면 기워서 쓰고 이부자리는 따뜻함을 취할 뿐 장식하는 일은 없었다. 태조가 시집가고 장가갈 때의 사치하고 어그러짐을 우려하여 공녀(公女)를 시집보낼 때 따르는 계집종을 10명을 넘기지 않았다. 일찍이 말씀하시길 송종(送終-장례)의 제도에서 습칭(襲稱-수의)의 수가 번잡하여 무익하고 풍속에서도 또한 이를 허물로 여긴다 하시고, 이에 미리 스스로 죽은 뒤에 입을 의복을 만드셨으니 네 상자에 불과했다. 한나라 말 여러 왕공(王公)들이 왕의 복장을 내버려두고 복건(幅巾)을 평상복(雅)으로 삼으니 이에 원소(袁紹), 최균(崔鈞) 같은 무리도 비록 장수(將帥)이지만 모두 겸건(縑巾-고운비단으로 만든 두건)을 썼다. 위(魏) 태조는 천하가 흉황(凶荒)해 자재(資財)가 부족하다 하여 옛 피변(皮弁-흰사슴 가죽으로 만든 고깔모양의 모자)을 본떠서 겸백(縑帛)을 재단해 갑(帢-모자)으로 썼는데, 간이함을 따르던 시세에 부합하였고 그 색깔로 귀천(貴賤)을 구별할 수 있어 지금까지 시행되었으나 가히 군용(軍容)이라 할 것이고 국용(國容)은 아니다.

11. 실적주의 - 성읍을 함락하여 미려(美麗)한 물건을 얻으면 이를 모두 공을 세운 자들에게 내리니, 훈노(勳勞-공훈과 노고)가 있는 자에게는 의당 상을 주며 천금을 아끼지 않았고, 공이 없으면서 시혜를 바라는 자에게는 한오라기 털조차 나누어 주지 않았으며, 사방에서 헌어(獻禦-진상)한 물건은 여러 신하들과 함께 나누었다.

12. 서예 - 한나라 때 안평(安平)의 최원(崔瑗), 최원의 아들 최식(崔寔), 홍농의 장지(張芝), 장지의 동생 장창(張昶)이 모두 초서(草書)를 잘 썼는데 태조가 이들에 버금갔다.

13. 음악 - 환담(桓譚), 채옹(蔡邕)은 음악에 능하고(이어서↓)

14. 바둑 - 풍익(馮翊)의 산자도(山子道), 왕구진(王九眞), 곽개(郭凱) 등이 위기(圍棋-바둑)를 잘 뒀는데 태조가 이들과 동등하게 능했다.

15. 의학 - 또 양성법(養性法)을 좋아하고 방약(方藥)을 알아 방술지사(方術之士)들을 초빙하니, 여강의 좌자(左慈), 초군의 화타(華佗), 감릉의 감시(甘始), 양성의 극검(郤儉)을 끝내 이르게 했다

16. 자기관리 - 또한 1척에 이르는 들의 칡을 먹었고, 또 적게 먹고 짐주(鴆酒)를 많이 마셨다.

18. 유머 - 매번 다른 이와 담론할 때는 농언(弄言-농담)을 즐겨 말하며 숨기는 것이 없었고,

19. 진수의 총평 - 평한다 - 한나라 말 천하에 대란이 일어 영웅호걸들이 아울러 봉기하니, 원소가 4주(四州)에서 호시(虎視-범처럼 노려봄)함에 강성하여 대적할 자가 없었으나, 태조가 주략과 지모를 내어 우내(宇內-천하)를 편달(鞭撻-독려)했다. 신불해(申不害)와 상앙(商鞅)의 법술(法術)을 취하고 한신(韓信)과 백기(白起)의 기책(奇策)을 갖추었고, 관직은 재능에 따라 수여하되 각각 그 그릇에 맞게 썼으며, 사사로운 감정을 억제하고 냉정한 계산에 임해(矯情任算) 옛 허물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마침내 황기(皇機-황제의 정무)를 능히 총람(總禦)하고 홍업(洪業-대업)을 이루어낸 것은 그의 밝은 지략이 가장 뛰어났기 때문이니, 가히 비상(非常)한 인물로 초세지걸(超世之傑)이라 이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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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이 조조를 섬기지 않은 이유]


한실을 부흥하고자 하는 생각이 있었고 또한 유비를 명국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융중대만 봐도 알 수 있는겁니다.

융중대를 보면 조조가 천자를 끼고있다, 장군(유비)은 제실의 후예로 천하에 신의있는 자로 알려져있다라는 말들이 나옵니다. 제갈량이 스스로를 관중과 악의에 비유한 것도 권신이 되기보다는 명군을 보좌하는 국사가 되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조조는 천자를 끼고 황실을 위협하니 제갈량이 추구하는 이상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반면 유비는 한실부흥을 위해 조조를 타도하고 있었으니 제갈량의 이상과 맞아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아무리 자신의 이상과 합치된다하더라도 주군을 한번 선택하게되면 평생을 같이하게 될 것이며 또한 당시 유비는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약소군벌에 지나지 않았으니 제갈량은 출사하는 것을 망설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제갈량은 유비가 진정으로 자신을 원하는지 아니면 지푸라기라도 잡아보자는 심정인지 알기 위해서 삼고를 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이리하여 제갈량에게 조조는 타도대상에 불과하며 유비가 지극한 정성으로 예를 다하니 어느분 말씀대로 도전의식도 생겼을 수도 있고 감동하기도 해서 유비에게 사관을 하게 된 것입니다.

애초에 조조와 제갈량은 지향하는 바가 달랐으므로 제갈량이 조조에게 가는 일은 없었겠지만 만약 사관했다한들 공융이나 양수처럼 죽임을 당하게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서로 성품과 행실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제갈량은 공융처럼 주군에게 깐죽거리는 일도 없었고 양수처럼 설레발치는 일도 없었습니다. 더욱이 인재욕이 끊임없던 조조가 능력출중한 제갈량을 푸대접이라도 했겠습니까?

배송지의 평가도 그저 평가에 불과하다는 주장 역시 제갈량과 진군, 사마의의 능력을 견주어보면 배송지의 평가가 일리있다는 생각을 하시게 될겁니다. 중국 명재상으로 손꼽히는 제갈량이 이들에게 과연 밀렸을까요? 오히려 촉한이 아닌 위에 사관했다면 명재상으로 더욱 이름을 날렸을 것입니다.

또한 오히려 천하가 조조대에 통일이라도 되었으면 제갈량이 내정에만 몰두할 수가 있습니다. 제갈량이 까이는 이유 중 하나가 북벌성과가 없다는 것인데 제갈량이 조조와 코드가 맞다는 것을 전제로 조조에게 사관했다면 전쟁생각할 필요없이 내정에만 주력하면 됩니다. 그렇게되면 정국은 더 안정되었을겁니다. 혹시나 천통되면 제갈량은 할 일이 없을거라 생각하시는 분이 계신다면,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치라는건 항상 행해지는 것이니까요. 가후도 제갈량이 다스림에 밝다고 했고 삼국시다 통틀어서 제갈량에 견줄만한 국사는 순욱뿐인데 이런 제갈량이 위에 가서 탑이 안되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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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의 참모진, 곽가/순욱/사마의 그외]


1.군재. 그리고 군략.

우선 제가 사용하고자 하는 위 용어들의 개념을 말씀드리자면, 군재란 군을 부림에 있어 승패와 연관되는 능력, 군략은 전투에 임하여 그 전투를 승리로 이끌게 하는 용병법이라고 정의하겠습니다.

제가 굳이 순유와 곽가를 비교하고자 했던 이유는, 조조의 초기 거병시기 이후부터 북방정벌 까지의 시기에서 원정군에 종군했던 군사는 저 두 사람이 핵심이었기 때문입니다. 순욱의 경우는 주로 수도방위를, 정욱의 경우는 별동대를 이끈 일이 많았음은 이전 글들에서 말씀드렸고, 조조의 언급에서 순유, 곽가는 대부분을 종군하며 보냈음을 알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군략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직접 원정하여 장막 내에서 계책을 짜 내는 것이 제1의 조건이겠지요. 통신수단이 발달한 것도 아니고, 단 몇분의 운용의 차이로 승패가 달리되는 것이 전쟁인데 멀리 있어서야 대응하기 어렵겠지요. 이릉에서 유비가 진 잘못 친 걸 아무리 제갈량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그 자리에 없어서야 당할 수 없었던 것 처럼 말이죠.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판단력과 임기응변 능력이 있겠습니다.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이에 맞춰 어떤 용병을 해야 승리로 이끌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내는 것이야 말로 군략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일 것입니다.

여기에 더 필요로 되는 것이 순발력, 그리고 담력과 과감성입니다. 순발력의 경우,필요할 때 떠올리지 못하고 나중에 되서 계책을 내 봤자 이미 소용 없는 일일 것입니다.급변하는 전선의 상황에 적의 움직임에 대응하기 위한 순발력은 그 군사의 급을 결정짓는 중요한 재능이라할 수 있습니다.(물론 여기서 군주가 결단력이 없다면 묻혀버리게 되는능력입니다만.)그리고 담력. 군사로서의 재능과는 조금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특히나 전선에서 벌어지는 전투에 참가하고 있을 경우, 군사 자신이 당황해버려서는 아무 책략도 낼 수 없겠지요. 이에 대해 순유를 제가 높이 평가하는 이유가 관도에서 문추를 벤 전투의 정황입니다. 적군이 뒤쫓아오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순유는 냉철함을 잃지 않고 조조의 의도를 읽어내지요.

이런 면에서 봤을 때 군략적인 부분에서는 역시 순유가 곽가보다 한 수 앞선다고 생각합니다. 관련 기록들만으로 본다면 순유의 군략적인 면은 "종군참모"들에 국한한다면 삼국지 모든 군사들의 그것을 압도합니다. 그리고 그 압도된 군사들 중 곽가라고 예외일 수는 없구요.

2.정세판단력

군사로서 요구되는 또 하나의 능력이 바로 이 정세판단력입니다. 국지전을 승리로 이끄는 것도 중요하지만,타 세력들의 움직임을 예상하고, 전투가 벌어지기 이전에 그들이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를 판단하는 능력 또한 군사로서 꼭 필요한 재능일 것입니다.

사실 승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승리하기 위해서는 자군의 역량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는 것이 그 전제조건이고, 이에 필요로 되는 것이 순욱이 맡았던 후방총괄업무, 중립세력을 아군으로 끌어들이거나 혹은 적군으로 만들지 않기 위한 외교 활동, 그리고 타 세력이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에 대한 예측력 등일 것입니다.

더욱이, 진(進)과 퇴(退)에 따른 적 세력의 이합집산, 제3세력과의 관계 등을 이용함으로써 전투가 벌어지기 이전에 이미 "이겨놓고 시작하는" 전투를 만들 수 있게 하는 능력이 바로 이 정세판단력입니다.

이 부분은 순유도 매서운 안목을 보여주었지만, 곽가 쪽이 더 우월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관도전투 이전의 유비정벌, 손책의 북진 불가 예측, 원가의 분열과 이를 이용한 북진, 북방안정을 위한 오환세력 정벌에 대한 진언.. 이같은 정확한 판단을 통해 조조는 원씨일가와 북방을 토벌하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위 건국의 초석을 다지게 됩니다.

3.정리

이를 바탕으로 제가 생각한 각각의 역할은, 정세를 판단하여 가장 유리한 조건에서 전투가 일어나게 하는 부분은 곽가가, 전투가 일어났을 때 승패를 결정지을만한 계책을 내는 것은 순유가 더 뛰어나지 않았나 하는 생각입니다. 물론 위에서도 말했듯 순유라고 정세판단 안 한건 아니고 곽가라고 군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게 주무기였냐고 하면 각각의 재능이 따로이 있었다고 보는 게 좋지 않나 합니다.

그리고 위에 언급 안한 능력들에 대해서 짤막하게 짚고 넘어가자면..

인품.... 솔직히 순유 인품은 삼국지 전체 통틀어서 비교해서 이길 사람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뛰어나기 때문에, 감히 곽가랑 비교하려고 엄두도 못 내겠습니다. 다만 이전에 곽가 옹호글에서 적었듯, 곽가라고 때려죽일 놈 취급받을 만큼 나쁜 건 아니니조금 너그러이 봐 주시면 어떨까 합니다.

조조의 신임..쪽은 누굴 더 중히 여겼다고 볼 수 없을 만큼 둘 다 신임받고 있었지만, 순유에 대해서는 "공경" 곽가에 대해서는 "친밀" 한 태도를 보였다고 느껴지는 것은 저 뿐일런지요.

마지막으로 공적입니다만, 사실 의문나는 것이, 순유의 경우북방정벌 이후 나타난 공적이 있는가 하면 그게 없습니다. 실제로 활약시기를 보면 비슷한 시기에 임관한 곽가와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이지요. 순유의 사망년도는 214년. 마초 정벌 조금 이후의 시기입니다만, 개인적으로 제일 궁금한 것은 적벽대전 때 순유에 대한 언급이 제가 갖고 있는 자료상에는 (정사삼국지, 자치통감) 한 구절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인데요, 혹시 이 시기의 행적에 대해 알고 계신 분이 계시다면 꼭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m(_ _)m 추측으로는 아무래도 건강상의 문제로 투병중이지 않았나 생각합니다만, 그렇게만 보기에는 조금 기네요;

갑자기 이야기가 샜습니다만, 곽가가 공적이 없다 없다 해도 순유전과 곽가전에 드러난 활약상은 크게 차이나는 양은 아니며, 조조군의 대대적인 논공행상이 이루어 진 시기는 북방정벌 이후 귀환 직후입니다. 이는 곽가가 사망한 직후이며, 조조가 헌제에게 올린 표문에도 잘 나와 있습니다. 이 떄문에 관직과 식읍이 다른 군사들에 비해 낮은 감도 있구요.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곽가의 공적이 높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순유의 활약상이 생각보다 없다는 점입니다. 물론순유전 적힌게 전부냐면 그건 아니겠지만, 적혀 있는 것 빼고 다른 것도 했겠지라고 생각한다면 곽가라고 그런 거 없었을거냐 하는 점입니다. 위에 말씀드렸듯 아마도 순유의 장기간투병설이 순유전의 기록적음을 입증해주는 것일텐데, 조조가 문병간 시기가 언제쯤인지 알 수만 있으면 좋을 텐데 말이지요.

4.다른 군사들과의 비교.

우선 순욱을 언급하자면, 어디까지나 사견입니다만, 순유 곽가 가후 등이 "비서"였다면 순욱은 "국무총리"일 만큼, 단순한 조언이나 헌책을 담당한 것이 아닌, 내정 전반을 관장하는 위치에 있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때문에 군재나 지략보다는 정치와 내정쪽에 그 재능을 보여주었고, 삼국지 게임에서도 그냥 정치력 100 찍어줘도 별 불만 없을 것 같은 위치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지략적인 면에서 보여준활약상으로보면 순유 곽가 가후에 비하면 아래쪽에 위치시키는 것이 타당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그 다음 가후를 보면, 이후에 가후에 대해서도 쓸 예정이니 짧게 쓰겠습니다만, 위에 제시한 군재와 판단력 양측에서 활약하는 가후입니다만, 순유보다 군략이 뛰어났는가 하면 순유에는 못 미치는 듯 하고, 정세판단력이 곽가보다 뛰어난가 하면 그렇게 보기는 약간 힘든 게 제 의견입니다. 그렇다고 크게 뒤쳐지느냐 하면 그건 아니지만, 축구로 따지면 순유가 왼쪽 윙이면 곽가는 오른쪽 윙, 가후는 양측을 다 뛸 수 있는 윙이라는 느낌이랄까요. 어디까지나 사견입니다만(것보다 비유가 조금 이상합니다만.)

그리고 이전에 손무교님께서도 언급하셨고 주석에도 달려있는 내용이지만, 인품의 면에서 순유와 가후는 조금 큰 차이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순유가 정도(正道)라면 가후는 아무래도 처세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제일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조조가 후계자 문제로 가후에게 상담했을 때 원가와 유표의 예를 든 일이 아무래도 신경쓰이는 게 되네요. 자세하게는 이후에 가후글에서 다시 언급하겠습니다만.


마지막으로 유엽과 곽가와의 비교는, 그 예측력과 판단력에 있어서는 비견할 수 있습니다만, 진언 성공율이 이렇게 낮아서야;;; 물론 당시 상황이 순유와 곽가가 활동하던 건국초기 전란시대와는 많이 다르지만(이 바로 뒤에 언급하겠습니다) 그 설득력이란 부분에서 의문을 갖게 하네요. 물론 그것이 무제와 문제의 차이점이기도 하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유엽을곽가와 같이 평가하지 않은 이유는, 활약 시기상의 차이입니다. 조조군의 북방정벌 이후 비로소 조조군은 하나의 국가에 준하는 세력으로 발돋움하게 되고, 이에 따라 정비된 체제로의 탈바꿈을 가능케 합니다. 이에 따른 변화의 하나가 자국 내 세력의 다양화인데, 실제로 거병 초기, 군 내에서 조조의 권력은 절대적이었으며, 참모진의 의견과 다소 엇갈리더라도 어느 정도 무마시킬 수 있는 여건이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북방 정벌 이후 하나의 나라로서의 체제를 갖춤으로써, 그 참모진 내부는 단순한 참모뿐만 아니라 당시의 명사,내부 세력의 대표자, 기존 참모진 등 여러 인재가 들어오게 되고, 조조는 이들 전부의 의견을 어느 정도 존중하지 않고는 국가를 이끌어 나갈 수 없는 자리로 갈아탔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에 덧붙여 훈련된 군사들의 확보가 가능해지고, 대항하는 세력들도 나름의 훈련도와 장수의 자질을 갖춘 이들이었기에 이제까지와의 전투양상과 다른 모습을 띄게 되었다는 점 또한 주목해야 하구요.

유엽의 경우는 그 임관이 정확히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눈에 띄는 활약이 시작된 것은 한중공방전 즈음부터 입니다. 위에도 말씀드렸듯 이 시기의 상황은 이전과는 많이 달랐고, 무엇보다 군사의 역할이 초기에 비해 많이 제한되었으며, 군사적 재능 이외의 것을 필요로 하게 됨으로써 "군사"가 아닌 "문관"에 의해 군사적 결정까지 내려지는 체제로 돌입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때문에 위에 언급했듯 유엽의 진언성공율이 낮다고 해서 무턱대고 곽가보다 못하다고 결정지을 수도 없는 것이구요. 다만 그렇다고 "그럼 유엽이 초기에 임관했으면 곽가만큼 했겠네?" 라고 생각하는 것에도 무리가 있기 때문에차라리 비교하지 아니함만 못하다고 생각하여 하지 않은 것입니다. 사실 가후의 경우도, 활약은 일찍부터 했으나 조조군 내에서 활약한 것은 관도전투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어 한중 공방전에서 완전히 눈에 띄게 되고 문제 즉위 이후까지 활약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비교하기 상당히 껄끄러운 것이 사실입니다만, 위의 짧은 비교는 그에 따른 부정확성을 감수하고 내린 비교라는 것을 감안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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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의 인간적인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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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를 한 단어로 표현하면 "난세의 간웅" 이란 표현이 가장 적절하게 보입니다.


삼국시대를 풍미한 인물이지만, 결국 그는 삼국을 통일하지 못한 비련의 인물


환관출신의 비천한 출신배경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그것을 딛고 위나라의 황제로 삼국통일의


발판을 마련한 것은 조조의 능력이 그만큼 뛰어났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을까요?


그러나, 아직 조조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엇갈리고 있고 아직까진 안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서주 대학살과 같은 잔인한 면모를 보이고 있지만


그의 인재를 중용하는 능력, 부하를 통솔하는 능력만큼은


삼국지 전체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능력이라 봅니다.


현재 조조에 대한 평가가 점점 새로워지고 있고, 영화나 드라마 같은 겨우에서도


이제 조조는 더이상 악당이 아닙니다.


앞으로 그의 대한 평가가 어떻게 달라질지 무척 궁금하군요.!!



다음편엔 많이들 좋아하시는 촉의 장수 "조운"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그 외에 궁금한 인물이 있으시면 말씀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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