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여덟, 서로가 서로의 첫사랑이었던 평범한 고등학생 지나와 수영부 현규.
서로에게 이끌려 시작된 사랑은 현규의 어이 없는 통보로 마음의 준비를 할 겨를도 없이 갑작스러운 이별을 맞게 된다.
과외 선생님이 준 떡을 먹고 체해 수능을 보지 못 하게 된 현규는 친구들이 놀리는 말에 홧김에 “아니야, 나 일본으로 수영 유학 가!”라고 뱉어 버렸다.

그렇게 현규의 20대는 열아홉에 무심코 집어 먹은 떡 하나로, 생각 없이 뱉은 말 한 마디로 꼬이기 시작했다.
쪽팔리지만 다 제 선택이었기에 누군가를 탓할 수도 없었다.
그걸 의연하게 수습하기엔 현규도 너무 어렸다.

“넌 항상 네 맘대로지?
어떻게 너 유학 가는 얘기를 남한테 듣게 해?
어떻게 내가 이렇게 찾아 오게 하냐고!!!”
-미안..
“내 문자에는 왜 답 안 하는데? 진짜 헤어지자는 거야?”

-너무 미안해서..
“미안하면 대답했어야지, 미안하면 만났어야지!!”

-...진짜 미안
“넌 맨날 이래.
내가 먼저 너 좋아했으니까, 내가 더 좋아하니까!
넌 그걸 알아. 그거 다 알고!!!
하.... 됐다.”

-그런 거 아니야. 내가 다 설명할게.
나 유학 간다고 했지, 너랑 헤어진다고 안 했어..

“이거 봐. 또 네 맘대로잖아.”

결국 현규는 한국에서의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쳐 일본으로 떠났다. 돌이켜보면 너무나 애 같은 선택이었다.

지나는 그런 현규를 무작정 기다렸다.
왜 그렇게까지 기다려? 만나면 어쩌게?
몰라, 그냥 다 아쉬워서. 같이 못 해본 게 너무 많아서.
한강에서 맥주도 못 마셔봤고, 키스도 못 해봐서.

지나의 시간은 기다림으로 가득 찼고, 기다림은 굳은살 박히듯 인생에 버릇과 습관으로 자리 잡았다.
작가가 된 지나의 필명은 이현규에서 한 글자 뺀 이현.
작가 이현의 모든 작품 속 갈등은 남주의 회피, 도망.

“나 떡 안 먹어. 떡 진짜 싫어.”
그렇게 지나의 20대는 먹지도 소화시키지도 못 한 채 열아홉에 체해 있었다.
어느덧 20대의 끝자락이었다.

[동창회 올 거지? 현규도 온대.]

“현규새끼 동창회 온다며?”
-응, 나 예쁘게 해줘. 한 10배, 아니 30배!
“어유 놈.
유학 가서 공부한다고 네 연락은 안 받더니 동창회는 오네?!”

-공부는 무슨, 처노느라 안 받았지.
SNS에 사진 잘만 올리드만.
“내가 너 이별 통보 문자로 받은 거,
그거 생각하면 아직도 열이 받아.”
-..

지나는 그 얼굴을 보겠다고 제 발로 동창회 자리에 앉았다. 이런 날조차도 지나가 기다려야 했지만 짜증나진 않았다. 그게 습관이니까. 9년 간 그래 왔으니까.

그리고 진짜 이현규가 왔다.

“왜 왔어?
한국엔 왜 왔고, 동창회엔 왜 왔냐고...
..됐어, 가.”
-데려다 줄까?

“괜찮으니까 가라고.”
-...택시 온다, 갈게.
지나는 그토록 기다렸던 사람을 만나고도 ‘왜’ 왔냐고 물었다.
현규는 또 말을 피했다.

몸도 마음도 열여덟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기다림이 습관인 지나와 반대로 현규의 습관은 도망이었다.
스물아홉이 되어서야 겨우 동창회에 나가볼 만큼의 용기가 생긴 찌질이. 그치만 열아홉에도, 스물아홉에도 두고 온 지나가 마음에 걸리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리하여 이번엔 후회하지 않게,
마음이 시키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저기..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한데,

“...1층 가 있어. 내려 갈게.”

“우리 집 누가 알려 줬어?”
-알음알음 물었어.
“알려 줬다고, 알아 냈다고 와도 된다고 판단했어?”
-아니... 절대로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근데?”
-어쩔 수 없었어.

-보고 싶었거든. 한국엔 너 보고 싶어서 왔고, 동창횐 너 보고 싶어서 갔어. 지금은 이 말 하려고 왔고.
“넌 항상 네 맘대로네.”

“너 내가 못 헤어질 줄 알았잖아 그때. 그렇게 질질 끌다가 헤어진 건지 아닌 건지도 모르게 결국 우리 헤어졌어.”
-내내 후회했어. 그때 난 너무 어렸고,
“무턱대고 남의 집 앞에 찾아가서 무턱대고 기다리는 거 나도 해 봐서 알아. 만나면 무슨 말을 할까 몇 번을 고민해도 답은 없고, 근데도 그냥... 그냥 기다리게 되더라. 그냥...”

-나지나.
“근데 넌 나랑 다르네...
하긴.. 나는 너 못 만났으니까. 너는 나 만났고.”
-...
“그때 이렇게 왔어야지. 너무 늦었다, 9년은.”

-알아. 뭘 어쩌자는 게 아니야. 난...
난 그냥 네 질문에 대답하고 싶었어.
만일 그게 널 복잡하게 만들면 그냥 잊어버려.
미안하다. 그냥 생각하지 마.

“하게 돼. 이렇게 보면 또 한동안은 네 생각이 나. 지금도 봐. 결국 네 앞에 앉아 있잖아 내가.”

“난 네 앞에 있으면 여전히 그때 그 자리로 돌아간 것 같아... 매일 축축했어. 그 수영장 바닥도, 빗속도.
매일 나는 너 좋아하는 게 축축했어.
넌 뽀송뽀송했을지 몰라도..”
-...
“거기로 다시 돌아 오라면, 글쎄.”

-난 그래도 다 좋았어. 그래도 다.. 좋았어 난.

대화는 도돌이표.
‘걔는 딱 보니까 별 생각도 없이 무작정 왔는데, 난 그 앞에서 우습게 무너지는 거지. 걔 미소 한 번에 또 열여덟 나지나가 되더라.’
지나는 고민 끝에 현규를 다시 찾아간다.

“우리 만나자.”
-어?
“딱 세 번만 만나 보자.
이 마음이 미련인지 진짠지 확인해보게...
딱 세 번만 만나 보고 결정해.”

-그래.
“먼저 연락하지도 말고, 무턱대고 찾아 오지도 말고.”
-어.
“내가 먼저 연락할 거니까 기다려.”
-응, 기다릴게.
“오래 걸릴지도 몰라.”

-그래도 기다릴게.
“갈게.”

-기다린다, 나~!
첫 번째 만남은 둘이 자주 갔던 분식집에서.

-너 떡 싫어한다며.
“어, 싫어해. 트라우마 극복.”

-오징어 튀김도 시킬까? 너 오징어 튀김 엄청 좋아했잖아.
“맛있었지. 근데 나 이제 오징어 못 먹어.”
-왜?
“스물세 살땐가? 먹고 체한 뒤로 오징어만 먹으면 두드러기 올라와.”
-아 진짜..?

“너 그때는 수영 때문에 몸 관리한다고 떡볶이 먹지도 않더니, 이젠 잘 먹는다?”
-그냥 뭐... 이젠 수영도 안 하니까.
“...”

“근데 이 집... 맛이 좀 변한 것 같지 않아?”
-그래? 모르겠는데? 난 여전히 맛있는데?
“그런가..?”
장소는 같지만 식성도, 하는 일도, 입맛도 달라진 둘.

-여기 어디쯤 아니었나? 우리도 낙서하지 않았어? 여기 5년 전 것도 있다.. 우리 것도 있는 거 아니야?
“없어. 예전에 와서 찾아 봤거든.
그 이후로 사람들이 낙서해서 안 보이더라 이젠.”
달라진 만큼 추억도 지워져 가고 있었다.

-...내일은 뭐 해?
“내일? 병원 갈 걸?”
-왜? 어디 아파?
“아니, 아는 애가.”
-나도 아는 애야?
“아니.”
-아..

-되게 신기하다, 네가 운전하는 차 타니까.
“나이가 몇인데.”

-너 담배 펴?
“어..”
-몰랐네.
“당연히 모르지. 스무 살 때부터 폈으니까.”

-너 담배 연기 죽어라 싫어했잖아.
“그러게. 나도 내가 흡연자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넌 안 펴?”
-응, 난 그냥 옛날에 몇 번 피다가 말았어.
“응.. 하긴 운동하는 애들은 안 피더라.”
-나 운동 안 해 지금은.

“...아.... 그치.”
둘의 대화는 계속 과거에 맴돈다.
할 수 있는 얘기를 찾으려면, 자꾸 열여덟로 돌아가게 된다.
두 번째 만남

“너, 나 만나러 한국 오고 나 만나러 동창회 왔댔지.”
-응.
“나도. 나도 매년 너 만나려고 동창회 갔었어.
‘안 오면 어쩌나, 근데 진짜 오면 어쩌나.’ 그 생각하면서,
매번 실망하고 또 기대하면서 거기 앉아 있었어.”

“그뿐인 줄 알아?
너네 집 앞엔 못 가서 괜히 그 주변 서성거리고 그랬어.
너네 집 근처 카페에도 앉아 있어 보고,
너네 집 근처 지하철역에 내려서 괜히 앉아 있다가고 그랬어.
혹시 너 내릴까봐 지하철 문 열릴 때 마다 긴장하고, 또 긴장하고.”

“혹시라도 마주칠까봐. 그런 짓 엄청했어, 나.”
-몰랐어..
“원망하는 거 아니야. 죄인 같은 얼굴 하지 마.
그냥 말해 주려는 거야.
나 혼자 되게 오래 너 사랑해 왔다는 거.”

“내 머릿 속에서 나는 내내 혼자 너 계속 사랑했어.
근데 요즘 너 만나면서 그런 생각이 들어.
내가 사랑했던 거, 그거 진짜 네가 맞을까?”
-무슨 뜻인데?
“난 너에 대해서 아는 게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아.”

“다시 만나 보니까 알겠어.
내가 사랑해 온 거 그거, 열여덟 때 너야.
나 혼자 계속 거기 서 있었어. 넌 저만치 가고 있었는데.”
기다리는 게 습관이라, 익숙함에 속아 모르고 있었다.
너를 사랑하는 내 모습만 열여덟인 게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너도 열여덟이라는 것을.
9년만에 만난 현규는 교복도 트레이닝복도 아닌
카페 유니폼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동안 난 누구를 기다렸던 걸까.
긴 시간이 야기한 간극은 너무 컸다.
지나는 그걸 이제서야 깨달았다.

그리고 지나의 말을 들은 현규도 깨달았다.
‘나 이제 도망 안 가.’
이 결심은 너무 늦었다는 것을.
세 번째 만남

“되게 오랜만이다, 여기.”
-그땐 엄청 넓어 보였는데.
“그만큼 우리가 큰 거겠지.”

-너 처음 봤을 때 말이야. 진짜 귀여웠어.
복도에서 눈 마주쳤을 때 날 쳐다보는 네 눈에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다 써 있어서, 그게 그대로 읽혀서 그게 너무 좋았어.
네 눈이 너무 솔직해서.
“...”
-근데 그거 알아? 넌 지금도 그래.
네 눈은 아직도 너무 솔직해. 나랑은 너무 다르게.

-그때 수능 떡 먹고 체해서 아침부터 병원에 실려 가는데
그런 생각이 들더라.
‘잘 됐다.’
네 앞에서 호기롭게 같이 대학가자, 같이 인서울하자 그랬는데.. 알잖아? 나 솔직히 실력 안 되는 거.
근데 네 앞에서 그런 말하기 싫었어. 너무 쪽팔려서.
네가 너무 좋아서. 네 앞에선 늘 멋있고 싶어서.

-무작정 유학 가서 내가 네 연락 피했지?
그래 놓곤 SNS에 맨날 뭐 그럴싸한 사진만 올리고..
나 사실 매일 자기 전에 울었어. 말도 안 통하고,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훈련에선 뒤처지고.. 진짜 엉망진창이었거든.
“...”
-매일 집에 가고 싶었어. 매일 네가 보고 싶었어.

-근데 네 목소리 들으면 울 것 같더라. 네가 알아챌 것 같더라.
“...”
-그래서 피했어.
“...”
-근데 그렇게 해놓고 또 돌아와 버렸어. 그렇게까지 해놓고 돌아와 버렸다는 게 너무 창피해서.. 그래서 연락을 못 했어.

“왜..”
-난 너한테 나쁜 놈인 게 낫지, 한심한 놈이고 싶지 않았거든... 근데 그게 진짜 한심한 거지.
내가 그렇게 애였어. 내가 덜 큰 놈이었어.

-미안해.
“말을 하지.. 말을 하지 그랬어.”
-...

-이 운동장, 아직도 내 눈엔 넓어 보인다?
나 하나도 안 컸나봐.
“현규야...”

-네가 만나자고 한 거 아니고 내가 만나자고 한 거니까
아직 한 번 남은 거다?
그 한 번은 정말 네가 만나고 싶을 때, 그때 만나자.
정말 내가 보고 싶을 때.
억지로 만나지 말고.. 구걸 안 할게.
“...”
-마지막으로, 졸업 기념 악수.
그렇게 둘은 비로소 습관을 졸업한다.

어린 사랑에게도 성숙하고 솔직한 이별은 필요하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서로의 열여덟에게 이별을 고했다.

“잘 가.”
이제 지나와 현규는 각자의 시간이 이끈 방향으로,
스물아홉으로 걸어 간다.

아프더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것이 서로에 대한 책임이다.
이 결말은 그 누구도 아닌 나에게서 비롯된 것이니까.

‘언니(지나)는 열여덟, 열아홉을 지나 스물,
마침내 지금에 서 있는 기분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게 언제였어도 결국 이런 결말이었을 거라고.’

‘결국 이런 결말, 그건 운명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첫사랑
그리고 사람,
더 달라지기 전에,
지금의 우리를 위해
안녕.

나지나(신도현 분)X이현규(강태오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