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앞에서 어슬렁거리는 표범
맹수지만 사람에게 길들여져
자기가 누군지 잊어버린
이제 더 이상 고개를 들 수 없겠네
무엇이 기억나는지
눈 밑으로 눈물이 흘러 생긴 삼각형
얼굴은 역삼각형
눈물과 얼굴이 만나
삼각형이 되어버린 표범
솔로 강아지
우리 강아지는 솔로다
약혼 신청을 해 온 수캐들은 많은데
엄마가 허락을 안 한다
솔로의 슬픔을 모르는 여자
인형을 사랑하게 되어 버린 우리 강아지
할아버지는 침이 묻은 인형을 버리려한다
정든다는 것을 모른다
강아지가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려 있다
외로움이 납작하다
도깨비
어둠은 빛난다
긴 혓바닥을 내밀고
뿔을 어루만진다
왈왈 짖어댈 때마다
현실이 뒤집어진다
아름답게
부럽게
어둠은 무엇이든 다 만든다
그리고 모른 척한다
오빠의 고추
오빠는 내 앞에서 벗고 다녀
고추가 내게 보여
어떡하지?
오빠는 어엿한 열두 살인데
십여 년 전 고추는
아직 철을 모르는 걸까?
이걸 시로 써도 되는 걸까? 시집에는
만으론 열 살이라 써야 되는 걸까?
눈 내리는 날 만난 남자 이야기
눈 내리는 날 만난
귀가 뾰족한 남자
말발굽을 가진 남자
턱에 염소수염이 달리고
머리카락이 말갈기인 남자
집엔 책밖에 없는 남자
이 남자 눈에 나는
어떻게 보일까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비정상일까
눈 내리는 날에는
불멸의 사과
죽은 후 남들이 욕할까 봐
살아서 하고 싶던 것을 영원히 못할까 봐
내 사랑 일 순위 순둥이를 못 볼까 봐죽음이 두려워진다
사과를 먹다 숟가락으로 두드리며 염불을 외운다
나무아미 나무아미 나무아미타불
둥둥 사과가 북소리를 낸다
사과도 죽기 싫은가보다
먹히는 게 싫은가 보다
무궁화
분홍빛 레이스
투명한 피부 아래 보이는 가는 핏줄
눈이 높이 쌓아올린 모기알
각이 없어
행복해 보이지 않는 오각형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
친구들과 내기를 했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 말하기
티라노사우르스
지네
귀신, 천둥, 주사
내가 뭐라고 말했냐면
엄마
그러자 모두들 다같이
우리 엄마 우리 엄마
엄마라는 말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
꿀맛
아무리 먹기 싫은 음식이라도
며칠을 굶어 봐
평소에는 손대기도 싫었던 음식마저
춤추며 입 안으로 들어올 거야
꿀맛이 무언지 알게 될 거야
배고픈 위에서 지식이 뇌로 올라갈거야
사춘기
아이는 빛에서 나와 계단으로 내려간다
한 칸마다 하나의 발자국
어둠 속으로 내려간다
얼굴도 손도 다리도 점점 어두워진다
찬바람이 불어오네
겨울이야 겨울
겨울잠 자러 가던 토끼가
흰 앙고라 장갑을 주고 가네
꽁꽁 얼음이 어네
겨울이야 겨울
겨울 잠 자러 가던 박쥐가
까만 부츠를 주고 가네
콜록콜록 기침소리가 들리네
겨울이야 겨울
겨울 잠 자러 가던 무당벌레가
알록달록 목도리를 주고 가네
착한 오빠
오빠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었다 내 친구가 오빠의 머리카락을 한참 잡아당겼기 때문에 태권도 사범단이면서도 때리는 대신 말없이 참는 오빠 어떤 아이가 날 놀렸을 때 오빠는 그러지 말라고 말려 주었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친구 앞이었기 때문에 남매란 무엇일까 가족이란 무엇일까 피가 섞인다는 것은 무엇일까 아플 때 같이 아프다는 것일까
내가 시를 잘 쓰는 이유
상처딱지가 떨어진 자리
피가 맺힌다
붉은 색을 보니 먹고 싶다
살짝 혀를 댄다
상큼한 쇠맛
이래서 모기가 좋아하나?
나는 모기도 아닌데
순간 왜 피를 먹었을까
몸속에 숨어 사는 피의 정체를
알아보려면
상처딱지를 뜯고 피를 맛보아야 한다
모기처럼 열심히 피를 찾아야 한다
모든 시에서는 피 냄새가 난다
애가 천재같은데 학원 가기 싫은 날 빼고 동시가 아닌 시집으로 내는 것도 좋을거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