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부는 까닭은
미루나무 한 그루 때문이다
미루나무 이파리 수천, 수만 장이
제 몸을 뒤집었다 엎었다 하기 때문이다
세상을 흔들고 싶거든
자기 자신을 먼저 흔들 줄 알아야 한다고
바람이 부는 까닭/안도현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갈대/신경림
이마에 난 흉터를 묻자 넌
지붕에 올라갔다가
별에 부딪친 상처라고 했다
어떤 날은 내가 사다리를 타고
그 별로 올라가곤 했다
내가 시인의 사고방식으로 사랑을 한다고
넌 불평을 했다
희망이 없는 날을 견디기 위해서라고
난 다만 말을 하고 싶었다
어떤 날은 그리움이 너무 커서
신문처럼 접을 수도 없었다
누가 그걸 옛 수첩에다 적어 놓은 것일까
그 지붕 위의
별들처럼
어떤 것은 그리울수록 그리운 만큼
거리를 갖고 그냥 바라봐야 한다는 걸
첫사랑/류시화
구름이 많이 모여 있어
그것을 견딜 만한 힘이 없을 때
비가 내린다
슬픔이 많이 모여 있어
그것을 견딜 만한 힘이 없을 때
눈물이 흐른다
밤새워 울어본 사람은 알리라
세상의 어떤 슬픔이든 간에
슬픔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가를
눈물로 덜어내지 않으면
제 몸 하나도 추스를 수 없다는 것을
슬픔의 무게/이정하
여기 바람 한 점 없는 산속에 서면
나무들은 움직임 없이 고요한데
어떤 나뭇가지 하나만 흔들린다
그것은 새가
그 위에 날아와 앉았기 때문이다
별일 없이 살아가는 뭇 사람들 속에서
오직 나만 홀로 흔들리는 것은
당신이 내 안에 날아와 앉았기 때문이다
새는 그 나뭇가지에 집을 짓고
나무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지만
나만 홀로 끝없이 흔들리는 것은
당신이 내 안에 집을 짓지 않은 까닭이다
새와 나무/류시화
네게로부터 불어온 바람에
나는 한참을 기침했다
다 나을 만하니
또다시 불어온다
코를 간지럽히고
참으려 해 봐도
너는 이내 터져 나온다
그댄 꽃이었던가
꽃가루/엄지용
홀로 자려고 눕는 그 순간부터
나의 천장은 널 담은 액자였다가
푸른 바다가 되고
꽃 내음 가득한 들판이었다가
한 편의 영화를 담는 스크린이 된다
그리곤 생각한다
보고 싶다
천장/엄지용
한 해골이
비스듬히 비석에 기대어 서서
비석 위에 놓인 다른 해골의 이마에
손을 얹고 있다
섬세한 잔뼈들로 이루어진 손
그토록 조심스럽게
가지런히 펼쳐진 손
안구가 뚫린 텅 빈 두 눈이
안구가 뚫린 텅 빈 두 눈을 들여다본다
(우린 마주 볼 눈이 없는걸)
(괜찮아, 이렇게 좀 더 있자)
해부극장/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