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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Yll조회 1087l
이 글은 7년 전 (2017/2/22) 게시물이에요





결혼한 지 17년차 | 인스티즈

2001년

결혼한지 17년차..


서너번의 선을 보고 마지막으로 딱 한 번 만나보란 가족의 권유에 다섯 번째의 만남에서 나타난 지금의 내 아내..

생머리에 옆가르마를 하고 깔끔하게 하나로 묶은 채로 날 보며 웃어주었던 아내에게 첫 눈에 반해 결혼까지 했다.

그렇게 서로 사랑하며 한 두 해가 지나고  세명의 아이들을 낳고 점점 싸우는 횟수도 많아지며 17년째가 되었다.

퇴근하고 돌아와보니 아내는 아이들이 먹다 남긴 분식 찌꺼기를 바닥에 앉아 손으로 집어먹으며 왔냐는 인사를 한다.

한 쪽 다리를 구부려 가슴에 대고 순대를 집어먹는 아내의 저런 모습이 이제는 신물이 난다.

난 속으로 꼽추 같이 추하다는 생각을 한채 대꾸도 안하고 방에 들어와 답답한 넥타이를 풀고 침대에 누웠다.

살짝 열려진 문 틈새로 아내가 꾸역꾸역 분식을 먹으며 내 모습을 힐끔힐끔 살펴보다가 떡볶이 묻은 손 그대로 방으로 들어오더니 회사에서 무슨일 있었냐고 묻는다.

"집에서 살림만 하는 당신이 말해봤자 뭘 알아! 혼자 있고 싶으니까 좀 나가, 냄새나"

내 눈치를 보는 아내의 표정이 이제 도 싫어 아내를 거의 밀치듯 밀어내고 일부러 문을 크게 열었다가 "꽝!"소리가 날정도로 닫았다.

문소리가 크게 들리자 방에서 아이들이 한 둘씩 나와 아내에게 무슨 일 있냐고 묻는다.

아무 일 없으니 들어가서 책 보라고 아내가 말하자 둘째 딸이 아내에게 나무라듯 말한다.

"엄마, 그거 치우고 버리라니까 그걸 또 다 먹고 앉아있어! 그러니까 뱃살이 그렇게 나오지. 내 친구 엄마들 봐 봐, 엄마같이 하고 있는 사람 있나, 다 젊은 아가씨처럼 세련되게 하고 다니는데 엄만 그게 뭐야!"

아내가 민망할 때 내는 특유의 오버스러운 웃음 소리가 들려온다. 아이들은 또 짜증난다는 듯 알아듣지 못 할 불평을 하며 방 안으로 들어가고 아내가 분식을 그제서야 치우는지 봉지 소리가 난다.

짜증난다 이제.. 아내가 하는 모든 행동들, 아내가 내는 소리들, 아내가 하는 말들, 아내 자체가 지겨워지고 아내에게 이제는 무슨 말을 해도 답답하고 말이 통할 때가 없다.




2002년

결혼한지 18년차..


회사 동료들과 술 마시는 것도 이제 지겨워지고 매일 반복되는 하루에 즐거울 것 없는 일상..

2002년은 내 인생의 지루함을 없애주는 2002 월드컵이란 것이 찾아왔다.

월드컵 분위기와 함께 회사에서도 한국 경기가 있는 날이면 일찍 보내주거나 모두 정신적으로 흐트러진 상태였고 굳이 그것을 제지하려는 사람도 없었다.

퇴근길, 집에 오는데 치킨집이 보인다. 그래, 오랜만에 집에 일찍 들어가는데 아이들 좋아하는 간식거리 사들고 집에서 축구나 봐야겠다.

축구 시작하기 딱 10분 전에 맞추어 집에 도착했다. 나보다 치킨을 더 반기는 아이들은 내가 집에 들어서자마자 치킨봉지를 내 손에서 쏙 빼, 마루 TV 앞에 앉아 대기하고 있다가 방에 있는 아내에게 소리친다.

"엄마! 축구 시작할때 되면 불러달라며! 이제 할거야 빨리 나와!"

작은 아들이 아내를 부르자마자 아내는 벌건색 티를 입고 상기된 표정으로 마루로 나온다.

축구에 축자도 모를 정도로 관심 없던 아내가 저런 티를 입고 나오니 웃기지도 않았다.

"뭐야, 어디 나가서 응원하는 것도 아닌데 쓸데없이..."

내가 짜증내고 있다는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내는 동네에서 4천원주고 티셔츠를 샀다며 흥분된 목소리로 들떠있다.

내 팔을 붙들고 이거저거 설명하는 아내가 짜증나 팔을 신경질적으로 떼고 TV 앞에 앉았다.

내가 사온 치킨을 맛있게 먹는 아이들... 평소에 치킨같은거 좋아하지도 않는 아내도 목살을 집어 뜯고있다.

치킨을 먹는 아내의 토끼앞니가 더 커보여 뵈기 싫다. 게다가 목살을 돌려먹던 중 치킨조각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어쩜 저렇게 미운 짓만 골라서 하지.. 기름기 묻은 바닥을 휴지로 닦고 있는 아내의 뒷모습..

뱃살은 더이상 나올데도 없어 옆으로 삐죽삐죽 튀어나와있고 남산만한 엉덩이에 어디 한 군데 좋게 봐줄데가 없다.

경기 중 아깝게 골이 안 들어가거나 안 풀리는 것 같을 때마다 이 때다 하고 아내에게 괜히 짜증내며 물 가져와라, 맥주 가져와라 일부러 시켜댔다. 이제는 하라고 하면 다 하는 아내의 곰탱이 같은 모습까지 미련해보인다.




2003년

결혼한지 19년차


결국 안 되겠다 싶어 아내에게 각방을 쓰자고 말해 현재는 각방을 쓰고있다. 이 생활이 너무 좋다.

아내와 잘 마주치지 않을 수 있고 예전처럼 아내가 밥과 청소등 집안 살림은 그대로 도맡아하고..

왜 진작 이런 생각을 안 하고 살았는지 빨리 생각해볼껄 하는 후회도 있지만 말이다.

가끔씩 단 둘이 저녁식사를 할 때 아내는 내 눈치를 힐끔힐끔 보면서 방을 다시 합치면 안되냐 물어보지만 무시하면 땡이다.

식탁이 쨍하고 깨질 정도로 젓가락과 숟가락을 놓고 아내를 노려보면 아내도 더이상 말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며 밥만 떠먹는다.

이제 나에게 아내는 파출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한 달에 한 번씩 월급 주듯 생활비 쥐어주면 아이들 키워주고 집안 살림 해주는 능력 좋은 뚱뚱한 파출부...

어느날은 이 여편네가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저녁마다 운동을 할거란다. 306호 아줌마랑 동네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가서 하루에 줄넘기 50번씩 할거라고 내게 떠들어댄다.

하던지 말던지 무시하면 됐겠지만 난 아내를 또 약올리고 싶어 이렇게 말했다.

"306호면 그 호리호리한 아줌마? 하필 운동을 해도 비교되게 그런 아줌마랑 하냐, 하려면 혼자 동네에 최대한 안 보이는 구석가서 뛰고와!"

운동한다고 얘기하면 내가 칭찬해줄 것을 은근히 바랐었던 모양인지 내 말을 들은 아내가 멋쩍은 표정으로 아무 말 않고 방으로 들어간다.

그렇게 아내가 운동을 하기 시작하고 일주일 만에 아내는 운동을 그만두었다.

"거봐, 제대로 하지도 못 할 거면서.. 그렇게 운동한다 난리 피더니만.."

"여보, 나 이상해.. 줄넘기 하는데 자꾸 소변이 조금씩 나오고 아랫배가 많이 아파."

"그러게 운동도 다 팔자 타고난 사람이 하는거야, 그냥 생긴대로 노는게 제일 좋은거야."

그 날 이후부터 아내는 틈만 나면 온 몸을 주물럭거리며 피곤하다는 말을 자주 했다.

어느 날은 아이들에게 안마를 부탁하다 아이들이 기어코 해주기 싫다고 하며 아내를 지들 방에서 내쫓았는지 아내는 내 방으로 슬슬 들어오더니 몸이 너무 뻐근해서 못참겠다며 안마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난 소리 지르며 내쫓을까 하다가 좋은 생각이 나 아내에게 흔쾌히 안마를 해주기로 했다.

퍽퍽퍽! 손에 힘을 주고 죽을 힘을 다해 아내의 등이며 어깨를 때려주었다.

아내는 10초도 안 돼 아프다며 내 안마는 너무 세서 몸에 안 맞는 것 같다고 나가버렸다.

다시는 이제 나에게 부탁 안 하겠지..

앞으로 귀찮아야 될 한 가지를 미리 없애놓으니 기분이 너무 좋다. 난 침대에 엎어져 배를 잡고 웃어댔다.




2004년

결혼한지 20년차


아내의 아랫배 통증이 도저히 없어지질 않았는지 결국 병원가서 검사를 받으러 간다고 나한테 병원에 데려다 달란다.

인터넷 찾아 병원 위치를 살펴보니 회사를 지나쳐 가야하는 곳이라 아내를 태우고 회사 앞에서 내린 다음 택시타고 혼자 병원가라고 했다. 너무 힘드니 병원 앞까지 데려다 달라는 아내를 차에서 끌어내는데 아침부터 진땀을 뺐다.

혹시나 회사 동료들이 아내를 보고있을까 차를 세우고 나서는 아내를 처음 대하는 사람인거마냥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는척을 하고 들어갔다. 회사 로비를 들어가며 잠깐 뒤를 보니 아내는 그 자리에서 하염없이 날 바라보고 있는듯했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니 아내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는듯 말한다.

"여보, 나 자궁에 물혹이 큰게 있대. 제거하는 수술을 해야하나봐."

수술? 그 까짓 거 죽는 병도 아닌데 하라면 하라지..

난 그렇게 하라는 무성의한 대답을 해주고 아내 앞에서 일부러 꽝소리를 내며 문을 닫았다.

병원에 가보기도 싫었지만 보호자 동의서 때문에 아내가 수술한 날 입원실에 들러보았다.

아내는 소리가 나지도 않는 TV가 뭐가 재밌는지 들여다보고 있다가 내가 인기척을 내니 반갑게 웃어준다.

여러가지 속옷과 기타 준비물 챙겨온 것을 아내 옆에 내려다놓고 의자에 앉았다.

수술할 때 고생이 많았는지 입술이 허옇게 변해 부르트고 다크써클이 전보다 더 심해진것 같았다.

그런 아내가 조금 측은해져 더 옆에 있어주려 했지만 아이들은 어떻냐, 밥은 뭐해먹냐 쉴새없이 떠드는 아내의 입에서 나는 입냄새 때문에 역겨워져 담배 피고 온다는 말 한마디 하고 그냥 집으로 가버렸다.




2005년

결혼한지 21년차


물혹 제거 수술을 한 이후로 이상하게 아내는 몸이 더 좋아지질 않았다. 입맛없을때 자주 먹던 열무비빔밥도 예전엔 한 그릇 금방 뚝딱이더니만 오늘은 세 숟갈도 못먹고 오렌지 주스만 홀짝거리고 있는다.

"쌀 아깝게 그게 뭐야! 누군 밖에서 돈이 그냥 들어오는줄 알아?"

큰 소리 좀 냈더니 아내는 미안하다면서 다시 숟가락을 들고 밥을 뜨기 시작한다. 억지로 크게 한입 넣고선 우물거리다가 잘못 넘기거나 체했는지 급한 걸음으로 화장실로 가서 구역질을 한다.

작은 아들이 곧 화장실로 따라가 아내에게 괜찮냐고 물으며 등을 두드려준다.

그러자 다시 오바이트를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예상했던 둘째 딸의 불평섞인 소리가 앞에서 들린다.

"아씨 아침부터 밥맛 떨어지게.."

자식 앞이라 내가 하고싶어도 못했던 말을 둘째 딸이 말해주니 괜히 속이 시원해지는 느낌이다.

회사 나가는데 배웅하는 아내가 아무래도 다시 병원에 가서 검사좀 받아봐야겠다고 말한다.

"난 이제 네가 병원간다고 하는 것도 지겨우니까 보고하지 말고 알아서 가!"

아내의 코 앞에 대고 화를 내며 집을 나와버렸다.




2006년...

결혼한지 22년차..


그리고아내가 세상을 떠난지 1년..

결국 아내가 그토록 아파했던건 자궁암 때문이었다. 제거 수술 후 합병증으로 자궁암 바이러스가 찾아와 수술하는 도중 자궁을 드러내다 막을 수 없는 출혈이 생겨 아내는 수술도중 세상을 떠났다.

아내가 죽었어도 바뀐건 아무 것도 없었다. 세상은 여전히 바쁘게 돌아갔고 아이들도 몇 개월은 슬픔의 충격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리는 듯 싶더니 지금 둘째 딸은 대학에 들어가 캠퍼스 커플로 사랑을 하고 있기도 하고 큰 아들은 좋은 회사에 취업을 해 눈도 잠시 붙이기 모자란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

나 또한 달라진 것이 없었다. 언제나 그랬듯 난 아내의 인생에 있어 나쁜 남편이었고 아내가 죽었다해도 그 사실은 변함없는거니까...

지금 아내의 무덤 앞에 앉아 소주병이나 들이키고 있는 날 마치 욕하는 듯 햇빛이 너무나 강렬하게 나를 내리쬐고 있다.

누군가 나의 일기를 발견한다면 난 아내의 곁으로 가 있는 거겠지.

제발 오늘로써 나의 모든 것이 끝이 나주길...

이깟 목숨 버리며 세상에서 가장 착했던 한 여자를 쓸쓸하게 죽게 한 죄책감에서 벗어나려는 내가 많이 나쁘다는 것을 알지만

벌을 받더라도 얼른 아내의 곁으로 돌아가 받고 싶다.


===

2006년 9월 충남 논산에서 자살한 고 김재형(가명)씨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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