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 인류가 태어난 이후 인류는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진화를 했다. 역사 이전의 시대를 선사(先史)시대라 부른다. 선사시대 인류는 돌을 깨 그 돌로 사냥을 하며 지냈다. 이 시기가 구석기시대다. 그런데 신석기시대에 이르면 인류는 거친 돌을 갈아 만든 석기인 마제석기를 사용한다. 게다가 신석기 시대에 인류는 흙을 빚어 토기를 만든다. 토기의 등장으로 인류는 식량을 저장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이 시기, 인류는 바닷가에 자리잡고 농사를 짓는 등 정착생활을 한다. 그래서 학자들은 신석기시대를 신석기혁명이라 부른다. 그것은 이 시기에 이르러 인류가 지구의 주인이 되는 계기가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신석기시대의 시작은 기원전 8000년경으로 소급된다. 우리나라 신석기문화는 북방 시베리아의 영향을 받았다고 가르치고 있다. 특히 북한의 고고학자 도유호는 다음과 같이 한반도의 신석기문화가 시베리아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지탑리의 장란형(長卵形) 및 독과 같은 크기의 질그릇을 생각컨대, 시베리아 바이칼 쌰얀 지대에서 일정한 종족그룹이 내몽고지방을 거쳐 서북조선으로 이동해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 저자는 궁산, 지탑리 유적으로 대표되는 우리나라의 신석기시대 문화가 알타이 계통의 종족, 좀더좁혀서 말하면 퉁구스 종족 내주와 관련된 문화라 생각한다.
도유호, 「지탑리 원시문화의 개괄적 고찰」, 지탑리 원시유적 발굴보고』, 유적발굴 보고제8집, 과학원출판사, 평양,1961
그런데 현재 북한학계는 도유호의 시베리아 기원설을 전면 수정하여 우리 선조들은 고유한 신석기시대 문화를 창조, 발전시켜 왔으며 같은 시기에 이웃한 시베리아 및 황하유역의 주민들이 남긴 문화와 뚜렷이 구별된다고 하고 있다.
동북아시아 신석기문화의 기원과 관련하여 선문대 이형구 교수는 「발해연안 빗살무늬토기 문화의 연구」란 자신의 논문에서 동북아시아 신석기문화가 발해연안에서 기원하였다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놀라운 사실이 있다. 발해연안 지역인 대릉하 유역의 중국 요녕성 능원형 우하량의 적석총, 삼관전자의 석관묘, 요녕성 부신현 호두구의 적석총 등 발해연안 지역에는 신석기시대 돌무덤(석묘, 적석총, 석곽묘, 지석묘) 들이 대거 보인다는 점이다. 게다가 하북성 당산시 석관묘, 요동반도 노철산, 사평산, 장군산, 우가촌의 적석총, 후목성역 강상, 루상 적석총 등 청동기 시대 돌무덤등도 보인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도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돌무덤이 발견되었다. 신석기시대 유적인 서해 시도 조개무지의 적석총, 청동기시대의 유적인 황해도 황주군 침촌리 유적과 강원도 춘천시 천전리 유적의 혼합식 적석총(고인돌 전단계) 등이 그것이다.
이는 발해연안과 한반도가 동일한 문화권이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고고학에서 가장 중시하는 것이 묘장법이다. 왜냐하면 죽은 사람을 장례치르는 의식인 묘장법이야 말로 오랜기간 변하지 않는 그 민족 고유의 전통이기 때문이다. 한반도와 발해연안의 묘장법이 같다는 것.... 이는 발해연안과 한반도가 동일한 사람들이 활동한 동일한 문화거주지였음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발해연안의 돌무덤의 기원과 관련하여 남한에서는 북방 시베리아 문화에서 되었다고 본다. 북한도 처음에는 기원전 7세기경에 북방 시베리아 문화인 '따가르(Tagar)' 문화 에서 되었다는 시베리아 기원설을 주장했으나, 1960년대 이후 돌무덤은 우리 선조들만의 고유한 것으로, 한반도 자생설을 주장하고 있다.
발해연안 북부 대릉하 유역에서 발견된 적석총과 석관묘의 연대는 기원전 3500년경으로 소급되는데, 이 시기는 시베리아의 가장 이른 돌무덤의 연대보다 무려 1000년이나 빠를 뿐 아니라 '따가르(Tagar)' 시기(기원전 7~2세기)보다 3000년이나 앞서고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걸까? 발해연안에서 창조된 우리의 신석기문화가 역으로 북으로 전파되어 시베리아 신석기문화에 영향을 주었다는 의미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