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미디어 출연이 잦은 광해군..
그런 광해군이 그 무엇보다 미친듯이 집착했던 궁궐에 대해 얘기해봅시다.
먼저 당시 조선의 상황...
"이제와서는 국가의 재정이 점차 탕갈되어 관아에 저축해 둔 것이 없고..." - 광해 3년 8월 8일 (1번째 기사)
"영의정은 의논드리기를 나라의 재정이 이때보다 더 심하게 탕진된적이 없는데..." - 광해 9년 1월 3일 (6번째 기사)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겪은 조선은 그냥.. 헬오브지옥의 상태
그러나...
이분은 궁궐을 하나 짓는게 아니라 크고 아름답게 동시에 여러개 짓기 시작하는데...
창덕궁 (이건 선조때부터 시작, 광해군 재개), 창경궁, 경덕궁(경희궁), 인경궁 (기록상 건물수가 경복궁 10배규모라죠), 자수궁 등등.. 경복궁에 행차한번 가니까 신하들이 긴장타고.. 주변에 살던 백성들은 도망가고... (또 짓겠구나 이거죠)
"나도 사람의 도리를 조금은 아는데 이처럼 백성이 곤궁하고 재정이 바닥나 나라일이 어려운 것을 모르겠는가 ........ 나는 본래 심병이 있어서 사람이 시끄러운 소리를 가장 싫어하므로 거처는 반드시 소통되고 확 트인곳이어야 한다." - 광해군 (광해 2년 2월 13일)
→ 한마디로 : 아 몰랑 그냥 지을꺼야
"사세상 요귀가 착란하는 곳에 그대로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 광해군 (광해 10년 5월 16일)
→ 한마디로 : 여기 귀신나옴
이분은 궁궐에 청기와를 올리길 바랬습니다. 청기와...
요런거?
자 한번 올려보죠.
"청기와에 드는 비용 역시 이루 말하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만약 2백눌을 만든다면 3만근의 염초를 써야하는데..." - 광해 10년 4월 10일 (14번째 기사)
염초는 화약의 원료입니다. 이순신장군의 행적을 살펴보면 우리 통상대감께서 얼마나 염초확보에 공을 들였는지 볼수있죠.
"신의 군관 이봉수가 그 묘법을 알아내어 3개월간 염초 1,000근을 끓여낸 바로써..." - 이순신 (임진장초, 1593년 1월 26일)
자 그 염초가 바닥날때까지 기와를 구워봅시다.
"저축되었던 염초가 떨어져서 청기와 만드는 일을 요즘 우선 정지했습니다." - 영건도감 (궁궐공사 담당기관)
"청기와 만드는 일을 어떻게 정지할 수 있겠는가. 그대로 만들어라. (그러면서 무슨 방법이든 찾아봐라)" - 광해군
(광해 12년 3월 21일 기사)
자 화약을 만들어야할 염초를 궁궐기와에 꼬라박습니다. 그런데 그 염초는 보통 중국에서 사왔습니다.
사올려면 돈이 필요하겠죠? 위에 보듯이 조선의 국고는 고갈되고 바닥난 상태입니다. 어떻게 살까요?
어? 백성들이 있네요?
이제 조도사, 독운별장을 파견해 백성을 쥐어짜봅시다. (이들의 행패부터 장난아니였죠..)
"일을 책임진 사람들이 백성들의 원망과 고통은 생각지 않고 으레 침노하여 빼앗는 것으로 능사를 삼습니다." >- 사간원 (광해 6년 5월 17일 기사)
"독운 별장 우찬순은 독운의 일을 핑계삼아 사족의 집에 마구 들어가서 부녀자를 강간하고 심지어 상가의 궤연을 버젓이 철거시키고 음행을 하는 장소로 삼았습니다." (끝내 그를 죄주지 않았다.로 기록) - 전라감사 (광해 15년 2월 5일)
"경기와 삼남의 쇠잔하고 곤궁한 백성들의 노역에 지칠대로 지쳐서 거의 다 떠나버렸으니, 장차 어디에서 징발하겠습니까." - 광해 11년 3월 13일 (9번째 기사)
"지금은 묵은 곡식이 다 떨어져서 백성들은 곤궁하고 재물은 고갈되어 조석조차도 급급합니다." - 광해 9년 4월 18일 (4번째 기사)
이당시 호남과 함경일대에는 기근까지 겹쳐 드디어 나라 망하기 일보직전...
이런 상황에 대해 당시 인물들의 평
"나는 도둑질하는 신하고 하루를 이 자리에 있으면 하루의 죄악을 더할 뿐" - 조도사 이창정
"사신은 논한다........... 더구나 지금 적당한 시기가 아닌데 크게 토목공사를 벌려서 국가의 재정이 탕갈되었는데이겠는가. 그런데도 도감을 맡고 있는 자들은 매번 사치스럽고 크게 하기만을 일삼으며 일찍이 한 사람도 한 마디 말을 하여 폐단에 대해 진달하여 만분의 일이나마 폐단을 구제하지 않으니, 애석하도다." - 사관의 평 (광해 9년 6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