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정의 8 아직까지 몸이 다 안 나았다. 보통 때라면 한숨 푹 자고 나면 나았을 가벼운 몸살인데 영 가시질 않는 게 이상했다. 형도 어깨를 으쓱하며 집에서 며칠 쉬라고 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별 수 없이 피곤한 몸을 이끌고 나온 학교에서 김유겸을 마주했다. "야, 몸은 다 나았어?" "아직. 학교 빠지기 뭐해서 나왔어." "너도 참 큰일이다. 몸이 약해서 어쩌냐? 곧 고삼인데." "몰라. 박진영은?" "지각인 듯." 김유겸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어제의 형은 어쩐지 어색하게도 하루종일 방구석에 눌러 앉아 땀내를 풍기고 있었다. 그 볼품없는 광경이 반가워 어딜 안 나가냐고 묻자 형은 머쓱한 얼굴로 웃어 보였다. 왠지 피곤한 얼굴을 하고 휴대폰 게임만 하던 형에 혹시 조하영과 싸운 건 아닐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다. 박진영은 열두 시가 지나도 안 오더니, 결국은 출석부에 무단결 표시를 남겼다. 오늘도 자처해 나와 하교를 함께 해 준 김유겸이 하굣길에 내게 작게 물었다. "근데 너 그 같이 사는 형이랑 뭔 일 있어?" "아니, 왜?" "되게 애틋해 보여서." 그 말을 끝으로 김유겸은 쓸데없는 말을 하는 것을 그만뒀다. 사실 김유겸에게 네가 본 게 맞다고 하고 싶었지만 가만히 걸을 수밖에 없었다. 김유겸과 인사를 나눈 후 집안으로 들어서자 형이 여전히 쓰레기처럼(이 말 말곤 형을 표현할 다른 방법이 없었다.) 방안을 지키고 누워 있었다. "오늘도 어디 안 가요?" "어. 너 어디 나가?" "아니요, 그냥 궁금해서." "우리 너구리, 오랜만에 형이랑 쇼핑이나 하러 갈까?" "쇼핑?" "마트 가서 장 보려고 너 기다렸는데." 싫어? 달콤한 목소리로 물으며 내 뺨에 입 맞춘 형에게 나는 홀린 것처럼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항상 간질거리기만 하다 튀어나오지 않던 재채기가 시원하게 나온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갈까?" "아, 가야죠." 내 손을 잡아채는 형의 뒤를 쫓자 형이 차 키를 집어들었다. 요 근래 형의 등이 이만큼 넓어 보인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형이 멋져 보였다. 형의 차를 타고 가는 동안 형은 별 말이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내게 위안을 주기엔 충분했다. "먹고 싶은 건?" "별로 없는데, 돈까스요." "그게 없는 거냐." 형이 장난스레 웃으며 내 머리카락을 마구 쓰다듬었다. 무자비한 공격을 피해 카트 하나를 빼 끌자 형이 내게서 카트 손잡이를 뺏어 갔다. 그 자연스러운 행동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문득 설레는 기분이어서, 가슴이 세차게 뛰는 것도 같았다. "그럼 쇼핑 다 하고 푸드 코트 가서 돈까스 먹을까?" "아, 좋아요." "귀엽긴." 형의 말에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평소와 다르게 오늘따라 정말……, 평소답지 않게 멋있네. 항상 조하영과 함께 있는 모습 혹은 나를 막 대하는 모습만 보여 주던 형이 괜히 떡밥을 던져 주자 심장이 금방 반응을 했다. 형과 한참 내일 저녁에 먹을 반찬 따위를 고르던 중에 맞은편에서 나를 빤히 응시하는, 조금 서러워 보이는 조하영의 얼굴을 나는 마주쳤다. "형, 저기……." "왜?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아니, 고개 좀 들어 봐요." 내 말에 형이 고개를 들었다가 금방 다시 숙이고서 아무렇지 않게 반찬 고르길 재개했다. 순간 멍해져서 상황 파악을 하는 나를 보더니, 형이 내 손을 잡았다. 미지근한 손바닥이 내 손바닥을 꽉 감쌌다. 그리고 곧 형이 내가 언젠가부터 기다리던 그 문장들을 내뱉기 시작했다. "형 하영이랑 헤어졌어." "……."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너구리한테 너무 잘 못 해 준 것 같아서 말이야. 미안해 죽겠단 말이지." "형……." "나 말고 다른 사람이랑 있는 걸 상상했는데 안 되겠더라고. 그러니까 평생 형이랑 살아야 한다." 내 손 위에 겹친 형의 손에 힘이 꽉 들어가더니 이내 손가락을 움직여 내 손에 깍지를 낀다. 아직까지도 가만히 서 있는 내 뺨을 손가락으로 툭 건드린 형이 세일에 들어간 소세지 묶음 하나를 카트 위에 올렸다. 고개를 들어 본 건너편은 이미 조하영이 사라진 후였다. "알았어?" "알았어요." 형에게 대답하면서도 어쩐지 기쁜 것보단 허탈한 마음이 더 커서 속에 구멍이 뻥 뚫린 것만 같았다. 그렇게 죽고 못 살더니 결국은 이렇게 돼 버렸다니. 그렇게 죽고 못 살더니……. 머릿속을 맴돌던 문장이 이내 지워졌다. 이미 감기가 싹 나은 기분이었다. "이거 네가 좋아하는 거다. 그치?" "그건 형이 좋아하는 거거든요? 뻔뻔스러워라." "이게 이제 형한테 뻔뻔스럽다는 말도 막 하네?" "그럴 가치가 있거든요?" 형이 내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 동안 서로를 묶고 있던 깍지를 풀지 않고 다니던 우리 둘은 당연한 절차처럼 마주 보고 앉아 돈까스를 먹었으며 자연스럽게 서로의 옆자리에 누워 잠들었다. 그러니까, 그토록 갈망하고 서롤 밀어냈다 당기길 반복하며 울고 웃기에 바빴던, 그랬던 우리의 관계는. 우리의 관계의 정의는 그렇게 간단히 나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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