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례가 끝나고 왁자지껄한 학생들 사이에서 유독 분주한 손길로 짐을 정리하는 남학생이 있었다.
“또 그냥 가게?”
“아… 응. 미안.”
말을 하는 소년의 눈이 멋쩍게 휘어졌다. 셀셀거리는 웃음에도 주변의 타박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하지만 소년은 아랑곳 없이 가방을 챙겨 둘러맸다. 한 두번 겪는게 아니라는 듯, 표정이 제법 의연했다.
“집에 꿀단지라도 숨겨놓고 사냐?”
볼멘 소리 가득한 목소리에 이번에는 온 눈을 휘어가며 웃었다.
“꿀단지는 아니고…… 그 비슷한거.”
“그래, 가라. 가.”
무리 중 한명이 손사레를 치며 못 당해내겠다는 듯 질색팔색을 한다. 그 모습을 보면 그래도 친구인지라, 조금은 미안해지기도 한다.
“니네 진짜 계집애처럼 왜 그러냐? 내일 이 형이 예뻐해줄테니까 속상해마라.”
쏜살같이 뒷문을 빠져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역시 무리 중 한명이 툭 하고 내뱉었다.
“계집애같긴 무슨…… 지 얘기 하네.”
-
[아저씨저오늘
야자안해요^^
- 고딩]
“뭐야, 여자친구야?”
실제로도 농땡이가 맞긴 했지만, 그 보다는 더 중한 범죄를 시도하다 걸린 범죄자의 기분과도 같았다. 남자는 화들짝 놀라 휴대폰까지 떨구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도 전에 제게 말을 건 사람을 확인하니 다행히도 평소 실없기로 유명한 부장이였다. 과장이 아닌 것에 남자는 내심 안도했다.
“여자친구는 무슨요. 부장님도 참…… 하하하하.”
“왜, 정대리 정도면 여자가 한트럭은 달라붙었지, 뭐.”
“하하. 아닙니다. 하하하하……”
괜히 할 말이 없으면 웃음이 커지는 것은 남자의 좋지 못한 습관 중 하나였다. 그러한 남자에게서 일어나는 묘한 기류를 감지한 서 부장은 더욱 더 짖궂은 눈을 하고 남자를 몰아갔다.
“거, 그럼 누군데 그래?”
“누구긴요. 그냥 어머니죠. 어머니. 시골에서 안부문자 온거죠. 하하하……”
“글쎄. 그러기에는 너무 놀라는데……?”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와이셔츠 안에서는 땀이 주르륵 흐르고 있을 것이다. 남자는 이 와이셔츠마저 이 일의 원인제공자에 의해 다려졌다는 걸 깨달은 순간부터는 등골마저 서늘했다.
“정대리는 참, 나이도 적은 나이도 아니면서 말이야. 어? 내가 선 좀 보라고 몇번을 얘기했는데.”
“부장님! 대리님 선 보내지마세요. 그럼 저희는 어떡해요!”
콩트같은 둘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여직원 두어명이 입을 모아 소리쳤다.
“예끼! 이 사람들아. 정대리가 나이가 몇인데 어! 혼기가 찼으면 보내야될거 아니야?”
정작 당사자는 아무렇지도 않지만, 워낙 사람 좋은 서부장은 아들뻘이나 되는 그가 퍽이나 걱정되는 것 같았다. 정대리는 또 너털웃음을 지으며 부장에게 말했다.
“아직은 일이 더 좋습니다. 나이 차기 전에 결혼 못하면 뭐, 혼자 살면 되는거고요.”
“우리 정대리만 보면, 어? 내가 가슴이 아파서 그래. 괜히 나쁜 여자 만나서 등골 빼먹힐 것 같단 말이야. 사람이 워낙 좋잖아. 어?”
또 침이 마르도록 띄어주는 비행기에 여사원들이 웃기 시작했다. 매번 반복되는 상황 속에서, 이제 정대리의 결혼은 타인에게 단순한 유희거리 그 이상은 안되나보다.
서부장이 제 딸 뻘이나 다름없는 여직원들과 한참동안 아웅다웅 입씨름을 하는 것을 보며 정대리는 한 손으로는 키패트를 만지작거렸다.
[잠이나 자라]
그러자 곧바로 답장이 온다. 역시 요즘 애들은……
[싫어요! 기다릴
거에요! 왜 맨날
잠이나 자라고
해요 내가 무슨
잠만보에요?
-고딩]
분명 텍스트인데도 불구하고 어디선가 환청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남자는 새는 웃음을 애써 막고 다시 키패드를 눌러댔다.
[바쁘니까 문자
하지마]
[그럼 차단해요
- 고딩]
“……어쭈?”
[그래. 이제 차단]
[....진짜 미워죽겠
다 - 고딩]
이번에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어깨까지 떨어대며 웃었다. 그런 남자를 보고 일순간 조용해진 주변의 이목은 당연히 남자에게로 집중되었다. 그제야 남자는 손사레를 치면서 입을 연다. 마치 환기라도 시키는 듯. 볼일들 보세요. 전 담배 한대 피고 올게요. 그러면서 담배갑은 놓고 간다. 대신 폰은 손에 꽉 쥐어져있다.
자리를 뜬 정대리의 발걸음은 우스울 정도로 가벼워보인다. 그 꼴을 가만히 보고있던 서부장이 입을 열었다.
“정대리, 연애하는거 맞다니까.”
화장실보다는 휴게실, 휴게실보다는 옥상. 비밀유지가 아주 철통같은 옥상은 역시 철통같이 잠겨있는 자물쇠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을 위해 몇 개월간 친목을 도모했던 경비아저씨의 도움으로 비밀번호까지 뚫어버리고 옥상에 입성한 남자는 서둘러 폰을 꺼내 초록색 통화버튼을 눌렀다. 몇 안되는 수신음이 지나자 바로 통화가 연결된다.
“삐졌어?”
능글맞게 시작되는 목소리는 다정하기까지 하다.
[뭐라고요? 누가 삐져요?]
하지만 상대방은 볼멘 소리 가득했다. 역시 애는 애다. 당당할만큼 대놓고 삐져서는 아닌 체 하는 소년이 몹시 귀여워 남자의 얼굴에는 절로 웃음이 났다.
“왜. 삐졌잖아.”
[와. 엄청 웃기네. 안 삐졌는데?]
“나 보고싶어?”
[아니요. 안 보고싶은데요?]
“와. 너 엄청 삐졌구나.”
[아닌데. 바쁜 분한테 삐지긴 어떻게 삐져요.]
정말 제대로 삐졌구나. 오늘은 뭘 좀 사갈까? 남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행복해서 죽을 것 같은 고민을 했다.
“오늘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어?”
[……]
“또 농구하다가 설쳐서 인대 늘어났어?”
[아, 그 얘긴 왜 자꾸 해요. 진짜 딱 세번만 그랬는데.]
“얼씨구. 세번만? 한번만 더 다치고오면 죽어. 진짜.”
[아. 됐어요. 저 잘거에요.]
목소리를 듣기만 해도 뾰루퉁한 얼굴이 자동으로 떠올라서 남자는 소년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려주고싶은 마음 뿐이었다.
“자긴 뭘 자. 넌 나 기다려야지.”
[뭐래.. 진짜 욕하고 싶게.]
“욕해. 언제는 안했나?”
[……]
“보고싶으면서 맨날 튕기고…… 전화도 절대 먼저 안걸지, 너.”
[바쁘잖아요.]
“내가 그래서 안받은 적 있냐?”
[있는데?]
“야, 그건 회의때고. 그때 한번 빼고 내가 다 받았잖아.”
[아, 몰라요. 귀찮아요. 끊을래요.]
“피곤해? 야자도 안한 놈이. 통화 끊으면 컴퓨터 하지말고 자라? PC방 갔다간 진짜 큰일나는거 알지?”
[알았어요. 잘거니까 끊을래요.]
“그래. 끊어. 잘 자.”
[……빨리 오세요.]
“응.”
뽀뽀라도 해줄까, 하다가 주책맞다 싶어서 그냥 끊었다. 뚜-뚜- 하고 끊킨 신호음마저 달콤하다니. 남자는 행복한 비명을 지르며 기지개를 폈다. 또 행복에 충만한 웃음을 짓다가 그제야 담배 생각이 동해서 주머니를 뒤졌다. 아, 생각해보니 책상 위에 놓고 온 것 같다. 그래. 아무렴 어때. 이제 금연할까? 놈과 맞담배 하기는 싫으니까. 코 끝을 찡그리면서 남자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분명 별 것 없는 날인데도 왜이렇게 생기가 넘쳐흘러보이는지.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
분량 짧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