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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리의 역사

200X X월 XX일

체리는 여주의 애칭이었다, 태형이 5년 넘게 여주를 부르던 애칭. 중학교 3학년 철이 없던 시절부터 20살까지 태형과 여주는 함께였다. 첫 만남이 어떠했냐고 묻는 대학 친구들의 질문에 여주는 그저 가물가물하다며 술을 마셨다. 아이들의 물음에 오랜만에 태형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리자 그저 우리는 다른 아이들과 다름없었다. 그때는 한창 싸이가 유행이었는데 흔해빠진 김태형의 일 촌 신청을 받은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얼굴은 본 적 없지만 녀석은 제 다이어리에 친근하다는 듯 댓글을 남겼고 그에 여주의 친구들이 더 호들갑이었다.

"얘 옆 옆 고등학교에 완전 잘 생겼다고 소문난 애잖아!"

당근 만나 볼 거지? 이렇게 만나자고 댓글 썼잖아, 오늘 기다린데!라며 호들갑 떠는 수현이에 귀찮다며 고개를 저었지만 수현이는 미쳤다며 제 등을 때리기 일쑤였다. 참내, 김태형이 누구라고 대충 수현이의 잔소리를 귀로 흘리고 시계를 쳐다보자 곧 종례였다.

"야, 너 정말 후문으로 갈 거야? 정문에 김태형이 기다린다 했잖아!"

제 책가방을 질질 끌며 정문으로 향하는 수현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저는 그대로 수현이 손에 끌려 정문으로 향했다, 어쩐 일인지 오늘따라 붐비는 정문에 인상이 찡그려졌으나 수현이의 호들갑에 저는 느꼈다. 김태형인가 뭐시기가 있나 보네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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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드디어 나왔네, 체리."

​문득 떠오르는 첫 만남에 웃음이 지어졌다, 우리 예뻤네. 술기운이 알딸딸하게 오른 여주가 나가겠다며 가게를 떠났다. 겨울밤임을 실감하게 하는 이 차가운 바람에 재킷을 꼭 잠갔다. 김태형이 있었으면 옷 왜 이렇게 얇게 입었냐고 화냈겠지? 같이 있지 않지만 태형을 떠올리기만 해도 여주는 웃음이 터졌다. 아, 보고 싶다 김태형. 입 밖으로 내뱉어도 또 내뱉고 싶은 말임을 너는 알까. 사랑해서 미칠 것 같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구나를 태형을 만나며 알아갔다. 태형은 제 세계의 전부였고 모든 것이었다. 태형도 그럴 것이라 믿으며 뒤늦게 도착한 버스에 몸을 실었다. 잠에 취해 자꾸만 잠겨오는 두 눈꺼풀에 부릅 힘을 주고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보냈다.

1 00 : 02 AM [태혀, 나 지금 들어가는 중이오ㅓㅏ ㅣㅈ좀 따 집에서 봐ㅡㅜ]

오타가 가득하다는 것도 모르고 여주는 홀드키를 눌러 핸드폰을 재킷 주머니로 집어넣었다, 따뜻한 버스에 홀로 앉아 있으니 더욱 태형이 떠오른다. 그래도 괜찮다, 곧 집에 도착하면 태형이 저를 마중 나올 테고 저는 그런 태형과 함께 집으로 들어갈 테니까.

Oh My Cherry : 오 마이 체리!

W. 베리 크러쉬​

Next Q?

201X X월 XX일

옥상에서 담배를 물고 있는 저에 담배를 피우러 온 정국이 인상을 찌푸렸다, 같은 흡연자 주제 넌 되고 난 안 되냐?라는 제 물음에 녀석은 볼멘소리를 늘어놨다.

"누나, 누나가 금연한다 해서 나도 담배 좀 줄이고 우리 김 사장은 아이스크림은 사 왔는데."

일렁이는 바람에 자꾸만 불이 꺼지는지 녀석이 곧 등지고 제 담배에 불을 붙인 후 저를 쳐다본다, 그러더니 끝나지 않은 말을 끝맺는다. 나는 뭐 좋아, 누나 담배 필 때 섹시하거든. 키득이는 정국에 저 또한 키득였다. 어린 게 깝싼다 라는 제 말에 정국은 아무 말 없이 담배를 한 모금 할 뿐이었다. 선선한 바람에 흩날리는 담배연기가 꼭 김태형 같다, 아마 오늘 헛것을 본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맥주에 샤워를 하고 그랬으니 정신이 제정신일 리가 없다는 게 제가 내린 결론이었고 그래야만 했다. 바람에 흩날리는 담배 연기처럼 잡고 싶어도 잡을 수 없고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게 녀석이니까. 아직 많이 남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자 정국이 아깝다는 듯 저를 바라본다, 그에 대충 어깨를 으쓱이며 계단으로 내려왔다. 계단을 내려 주방을 지나 직원 룸으로 향한다. 제 이름이 적힌 사물함으로 담뱃갑을 밀어 넣는다, 혹시 김석진이 본다면 팽이팽이는 압수에 삐친 것이 열흘은 갈지도 모르니까.

"김여주 미쳤냐?"

제게 쉬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는 듯 인이어를 통해 민윤기의 낮은 목소리가 들리도 대충 대꾸한다, 나가면 되잖아 기다려 투덜 거리는 저에 또 녀석이 욕을 해야 하는데 답지 않게 아무 말이 없다. 설마 그냥 완전 개빡쳤나 걱정돼 뛰어나가자 한가로운 홀에 녀석은 제 팽이팽이를 먹고 있었다. 아니 꼽다는 눈빛을 보내자 녀석은 더 아니꼽다는 표정으로 저를 본다, 왜 뭐! 입 모양으로 따지자 녀석의 희고 고운 손끝이 가리킨 테이블에 심장이 떨어질 것 같다. 김태형과 박지민이 앉아 있는 테이블인데 내가 왜?라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다 먹은 아이스크림 막대기를 버리며 녀석이 묻는다.

[방탄소년단] Oh My Cherry : 오 마이 체리! _ 02 | 인스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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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쟤네랑 친하냐? 계속 벨 누르잖아. 스마트 워치 안 봤냐? 해결 안 해?"

민군의 일상

201X X월 XX일

윤기는 술집 제로에 일등공신, 그냥 개국공신 온갖 좋은 말은 갖다 붙일 수 있는 그런 존재였다. 진상이 나타나면 제일 먼저 나타나 진상을 처리 고하고 힘든 일도 도맡아 하는, 그런 윤기의 힘듦을 이해하는 석진은 주방 옆 딸린 방을 윤기에게 내어줬다. 자신은 어차피 취미 겸 재미로 하는 일이니 믿고 맡길 사람은 윤기뿐이라며 말이다. 친구를 데려와도 좋고 문 닫고 혼자 술 마시든 뭘 하든 좋아.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석진이 제게 내건 조건이었다. 나쁠 것은 없기에 저는 제로의 열쇠를 받아 들었다.

다 좋은 제로의 단점은 햇빛이 잘 들지 않아 아침인지 저녁인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대충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자 10시 32분. 조금만 더 있으면 점심시간이었다. 푹 잤다는 걸 증명하듯 머리에는 까치집이 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윤기는 스스럼없이 주방을 지나 계단을 통해 옥상으로 올라갔다. 모닝 담배를 위해서였다, 긴 장초를 꺼내 입에 물고 라이터로 불을 붙이려는 순간 아, 라이터 없다. 다시 내려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무렵 윤기의 시선 끝에 옥상 구석 놓인 라이터가 눈에 들어온다. 김여주 라이터. 오늘만 빌려 쓰겠노라 혼잣말을 중얼거린 윤기가 그제야 담배에 불을 붙인다. 살 것만 같은 표정으로 제 발아래 서울을 바라본다. 오늘은 조금 이르게 5시부터 오픈이었으니 씻고 준비하고 밥을 먹으면 그만인 시간이었다. 리모델링을 해야 하지 않겠냐며 갑작스레 선언한 김 사장 덕에 가게가 오래 쉬었다 다시 문을 여는 거니까 조금 일찍 여는 게 어떻겠냐는 정국의 말에 석진은 그러겠노라 받아들였다.

4달 만에 문을 열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로의 인기를 증명하듯 사람은 붐볐다, 확장공사를 한 풀장에 지하에 가장 많은 인원이 몰렸다. 제일 일이 능숙한 저와 여주가 내려가는 게 어떠냐며 묻는 석진에 1층은 호석과 정국이 지하는 저와 여주가 보기로 했는데 윤기는 시간이 좀 흘러 그것을 후회했다. 지하에 사람이 몰려든 만큼 오늘도 개진상들이 가득했다. 술값을 깎아 달라, 사장님이 보고 싶다. 오빠같이 먹어요 같은 시답잖은 농담을 들어줄 만큼 여유가 없었다. 주문은 왜 다들 한 번에 하는지, 귀찮음을 애써 감추고 태블릿을 내밀었다. 네, 제로입니다. 주문 확인하겠습니다. 무미건조한 제 목소리에 피곤함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듯했다. 아는 형들을 도와 작업한다고 하루 2~3시간 밖에 자지 못 한 탓이겠지라며 윤기는 생각했다. 그런 윤기의 피곤함은 두 배가 될 수밖에 없었다. 15번, 18번, 29번, 36번 우후죽순으로 벽 구석에 걸린 전광판에 불이 들어오고 늘 차고 다니는 스마트 워치에도 똑같이 15번, 18번, 29번, 36번이 떠올랐다. 대충 제가 가는 것으로 체크한 윤기가 스마트 워치를 잠그고 걸음을 옮겼다. 더럽게 바쁘네, 김 사장은 좋겠다 돈도 존나 벌고. 속으로 중얼거린 윤기는 바삐 주문을 처리해야 했다. 그 사이 확장 공사를 한 풀장의 물이 넘친 듯 풀장을 치우는 여주가 보이고 1층에 있어야 할 호석이 뛰어다닌다. 알바생 좀 더 뽑으라고 하던가 해야지라며 윤기가 36번 테이블을 정리할 무렵 다시 전광판과 스마트워치에 불이 들어온다, 7번. 36번에서 7번은 좀 먼 데, 애써 윤기가 무시하자 곧 스마트 워치에 김여주 7번 테이블이라는 안내 문구가 뜬다.

김여주 7번 테이블이라는 문구가 뜨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엔 인이어 너머로 들리는 소리가 가관이다, 7번 테이블 1번 항목 등장. 그에 별 수없이 윤기가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아직도 술값 내기 싫어 이러는 녀석들이 있나 싶어 7번 테이블에 도착했을 땐 가관이었다. 손님에 의해 강제 맥주 샤워를 한 김여주와 소리를 바락바락 지르는 여자에 전정국에게 김여주를 부탁했다, 뒷일은 제로의 조항을 따랐다. 출입 금지 및 영업 방해로 경찰에 신고해주는 것이 전부였지만 그냥. 맥주로 샤워를 한 네 모습이 안 쓰러워져도 똑같이 해줬다. 왜냐고 묻는다면 앞서 말했듯이 안쓰러워서. 제 손에 의해 너와 똑같이 맥주에 젖은 여자가 소리치고 남자들이 제 눈치를 살핀다. 뭐 어쩔래라는 제 표정에 하나 둘 일어나 자리를 뜬다. 오늘도 하루가 아주 개 조옷같다. 여주가 나간 문으로 들어오는 핑크색 머리에 윤기의 눈이 사나워진다. 김여주한테 치근덕 거리는 박지민. 제로의 직원이라면 모두 알 거다. 고개를 젓는 제 옆으로 호석이 와 묻는다.

"또라이 또 왔어요?"

박지민을 이야기하는 은어에 그렇다며 대충 고개를 끄덕이자. 호석이 혀를 찬다, 쯧쯧 두어 번 혀를 차고 녀석은 1층도 바쁘다며 떠났다. 그래, 정말 오늘 하루 아주 개 조옷 같네라고 윤기는 생각했다.

뜬구름

201X X월 XX일

오랜만의 개업날 맥주 샤워를 한 제가 안쓰러웠는지 김 사장은 휴가를 줬다, 일주일씩이나. 알바비는 정상적으로 입금될 거야 하며 제 손에 휴가비를 쥐여주는 김석진의 손은 퍽 따뜻했으나. 기나긴 휴가에도 제가 갈 곳은 없었다. 고향에 내려가자니 마음이 동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집에만 있기는 싫었다. 호킹 스나 그런 거 하고 싶은데, 혼자는 늘 두렵다. 그래서 결국 휴가 첫날부터 늦잠을 자 버렸다. 핸드폰을 들어 바라보자 이제 겨우 10시 40분이다. 크게 하고 싶은 것도 할 것도 없어 밥이나 먹자고 엄마가 보내 준 반찬을 꺼내고 밥통을 열었다, 반찬도 접시에 다 덜었는데 밥만 딱 없는 게 참, 이럴 땐 햇반이 지라며 찬장을 뒤져도 없는 밥에 대충 가디건을 걸치고 원룸을 나섰다.

"햇반이랑 또…."

나온 김에 필요한 것들을 사다 보니 생각보다 짐이 많아졌다. 검은 비닐봉지가 꽤나 무겁다. 무거운 짐을 들고 문득 거리를 걷다 보니 옛 생각이 난다. 스무 살 막 서울에 상경했을 땐 모든 게 서툴고 낯설고 무서웠는데, 어느덧 서울에 상경한지 6년이 넘었다. 제 나이 스물여섯 취업 준비로 한창 바쁜 나이였다. 그리고 나는 내 나이에 대해 남들에게 정말 눈 떠보니 스물여섯이라고 이야기하는데 바람이 너무 차다, 꼬 끝이 너무 시리다. 그에 대충 손으로 제 코를 어루만지며 골목길을 돈다. 미약한 담배 냄새가 가득한 골목에 저도 모르게 인상이 쓰였다. 남이 피는 담배는 여전히 싫다는 건가. 헛웃음을 흘리고 묵묵히 바닥을 보며 걷는다, 여기서 한 번만 더 돌면 집이다. 내 집. 바닥 위로 보이는 제 발이 가엾다 오늘따라. 추운 걸 알면서 왜 슬리퍼만 신었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제 손이 갑자기 가벼워진다. 놀라 고갤 들자 또, 또 너다. 왜 저를 보고 그렇게 반갑다는 듯이 웃는지. 알 수가 없다. 저를 두고 간 건 너이면서.

체리 없이 지낸 일상

201X X 월 XX 일

또 다툰다, 또 불안해한다. 어느새 습관처럼 저희는 등을 돌리고 잔다는 걸 너는 알까. 곧 있으면 저는 군대에도 가야 하고 해야 할 게 많은데. 아직도 네게 입을 열지 못했다. 군대에 가야 한다고 평소와 같이 사이가 좋았다면 같이 맥주를 마시며 쉽게 했을 이야기였지만 오늘은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이미 제게 등을 지고 누운 너니까. 같이 살면서부터 모든 사소한 것은 다툼의 원인이 되었다. 라면 먹고 씻어 두지 않은 냄비라던가, 치우지 않은 택배 상자. 그냥 모든 사소한 것으로 다투고 등을 돌리고 다시 마주 앉아 웃었다. 여전히 열여섯 그 순간처럼 저를 보고 환하게 웃음 짓는 네 두 눈에 제가 가득하고 내 두 눈에도 역시 네가 가득하다. 이런 게 행복일까, 저는 늘 생각하는데 너도 그럴까? 미쳐 내뱉지 못할 말들을 홀로 삼키며 잠들 네 등을 바라본다.

또, 우리가 또 다툰다. 별거 아닌데 정말 별거 아닌데. 누구나 가야 할 군대에 가는 것이라는 제 말에 너는 울먹였다. 자신도 안다며. 왜 먼저 말하지 않았냐고 우는 두 눈이 여전히 예쁘다. 여전히 네게는 제가 가득하다. 어쩌지 고민하던 제가 입을 열고 머리로 가슴으로 단 한 번도 생각 한 적 없는 말을 내뱉는다. 헤어지자, 무미건조한 제 목소리에 네 두 눈이 크게 요동친다. 네 손에 들린 제 영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곧 별을 박아둔 것처럼 어여쁜 네 두 눈에 슬픔과 분노와 같은 저를 향한 부정의 감정이 샘솟는다. 그리고 어쩔 수 없다, 제가 선택했으니까. 아무렇지 않은 듯 웃는 저에 네가 우리의 집을 벗어난다. 붙잡을 수 없다, 너는 나처럼 살면 안 되니까.

복학했다며? 그나마 잘 아는 동기 중 석호의 연락이었다, 군대에만 다녀올 요량으로 휴학했던 거니까 뭐라며 어깨를 으쓱이는 태형에 당연하다는 듯 석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의 술자리였다. 저랑 석호를 포함해 몇 명의 동기들이 가볍게 소주를 한잔하는 그런. 오랜만에 마시는 소주가 달다. 알딸딸하니 취기가 오를 것 같다. 이내 곧 석호의 옆에 앉아 있던 녀석이 인사를 건네온다. 나는 박지민 나도 얼마 전에 제대했어 과는 같은 과. 제 앞에 멈춘 손에 가볍게 악수를 취했다. 체리 없이 두 번의 사계절이 지나갔다. 서로를 바라보며 잠들었던, 서로를 바라보며 살았던 시간에 나는 아직 사는데 너는 어떠니. 건넬 수도 물어서도 감히 안 될 말을 태형이 묵묵히 삼켰다. 입안에 남은 소주가 오늘따라 참으로 달다.

지민과 알고 지낸 지 4년이 넘었다, 전역 후에 알게 되었으니까. 우리보다 군대를 미뤘던 석호가 이제야 군에를 갔고 그에 저와 지민은 둘도 없는 단짝이 되었다. 너나 나나 둘 다 애인도 없는 불쌍한 중생이니까 같이 놀자며 지민은 매일 저를 찾았다. 그에 태형도 그러려니 했다. 전처럼 누군가 저를 신경 써줄 사람도 없고 함께 해줄 사람도 없으니까. 그래서 그냥 저는 지민의 일방통행을 허락했다. 그것이 익숙해질 무렵 지민은 제게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게임 중이야, 왜.라는 제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박지민이 쉴 틈 없이 조잘 거린다. 사거리에 제로라는 술집 너 한 번도 안 가 봤다며? 여기 김여주라고 있는데 걔 엄청 예쁘다? 오늘 마침 재 오픈 일이니까 형님이 데려가 준다. 옆에서 쫑알 거리는 지민에 제 게임 캐릭터가 죽었다. 녀석을 바라보며 됐다고 손을 저었다, 왜라는 물음에 그냥 대답해줬다. 박 교수 님이랑 면담해야 한다는 제 말에 네가 그런 것도 하냐며 입을 이 죽이는 녀석을 무시했다. 제 무시에도 아랑곳 않던 녀석은 제게 밤에 가자 주소는 찍어줄 게라며 카페를 벗어났다. 매번 지 맘대로다.

박 교수의 면담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취업하려는 거지?라는 질문에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우리 학과에 협력 업체에 대해 나열하던 박 교수와 저녁까지 먹어야만 했다. 집에 돌아와 시계를 보자 박지민이 만나자 한 약속시간까지 1시간도 안 남았다, 좀 늦어도 뭐라 안 하겠지. 대충 씻고 정말 대충 옷을 골라 입고 나왔다. 녀석이 찍어준 주소로 오자 뭔 놈에 술집이 이렇게 큰지 꼭 클럽 같다. 자기는 1층이라는 박지민의 말에 어두운 실내에서 핑크 머리를 찾아 시선이 바삐 움직였다. 겨우 파악된 지민의 위치에 저는 더럽게 구석에도 앉았네라고 생각했다. 제가 자리에 앉아 방금 막 주문을 끝냈다며 녀석을 재잘거렸다. 피곤하지도 않나 대충 고개를 끄덕인 태형이 핸드폰을 꺼내 시계를 보자 곧 열 한시다. 피곤에 절어 소파에 기대자 주문하신 생맥주 나왔습니다~라며 익숙한 목소리가 제 귀에 닿는다. 맥주 두 잔을 내려놓는 알바를 빤히 쳐다봤다. 익숙한 얼굴에 제 기억 어딘가 남아 있는 향기. 옛날과 크게 달라진 것 없지만 좀 더 성숙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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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드디어 나왔네, 체리."

​문득 떠오르는 첫 만남에 웃음이 지어졌다, 우리 예뻤네. 술기운이 알딸딸하게 오른 여주가 나가겠다며 가게를 떠났다. 겨울밤임을 실감하게 하는 이 차가운 바람에 재킷을 꼭 잠갔다. 김태형이 있었으면 옷 왜 이렇게 얇게 입었냐고 화냈겠지? 같이 있지 않지만 태형을 떠올리기만 해도 여주는 웃음이 터졌다. 아, 보고 싶다 김태형. 입 밖으로 내뱉어도 또 내뱉고 싶은 말임을 너는 알까. 사랑해서 미칠 것 같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구나를 태형을 만나며 알아갔다. 태형은 제 세계의 전부였고 모든 것이었다. 태형도 그럴 것이라 믿으며 뒤늦게 도착한 버스에 몸을 실었다. 잠에 취해 자꾸만 잠겨오는 두 눈꺼풀에 부릅 힘을 주고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보냈다.

1 00 : 02 AM [태혀, 나 지금 들어가는 중이오ㅓㅏ ㅣㅈ좀 따 집에서 봐ㅡㅜ]

오타가 가득하다는 것도 모르고 여주는 홀드키를 눌러 핸드폰을 재킷 주머니로 집어넣었다, 따뜻한 버스에 홀로 앉아 있으니 더욱 태형이 떠오른다. 그래도 괜찮다, 곧 집에 도착하면 태형이 저를 마중 나올 테고 저는 그런 태형과 함께 집으로 들어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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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xt Q?

201X X월 XX일

옥상에서 담배를 물고 있는 저에 담배를 피우러 온 정국이 인상을 찌푸렸다, 같은 흡연자 주제 넌 되고 난 안 되냐?라는 제 물음에 녀석은 볼멘소리를 늘어놨다.

"누나, 누나가 금연한다 해서 나도 담배 좀 줄이고 우리 김 사장은 아이스크림은 사 왔는데."

일렁이는 바람에 자꾸만 불이 꺼지는지 녀석이 곧 등지고 제 담배에 불을 붙인 후 저를 쳐다본다, 그러더니 끝나지 않은 말을 끝맺는다. 나는 뭐 좋아, 누나 담배 필 때 섹시하거든. 키득이는 정국에 저 또한 키득였다. 어린 게 깝싼다 라는 제 말에 정국은 아무 말 없이 담배를 한 모금 할 뿐이었다. 선선한 바람에 흩날리는 담배연기가 꼭 김태형 같다, 아마 오늘 헛것을 본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맥주에 샤워를 하고 그랬으니 정신이 제정신일 리가 없다는 게 제가 내린 결론이었고 그래야만 했다. 바람에 흩날리는 담배 연기처럼 잡고 싶어도 잡을 수 없고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게 녀석이니까. 아직 많이 남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자 정국이 아깝다는 듯 저를 바라본다, 그에 대충 어깨를 으쓱이며 계단으로 내려왔다. 계단을 내려 주방을 지나 직원 룸으로 향한다. 제 이름이 적힌 사물함으로 담뱃갑을 밀어 넣는다, 혹시 김석진이 본다면 팽이팽이는 압수에 삐친 것이 열흘은 갈지도 모르니까.

"김여주 미쳤냐?"

제게 쉬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는 듯 인이어를 통해 민윤기의 낮은 목소리가 들리도 대충 대꾸한다, 나가면 되잖아 기다려 투덜 거리는 저에 또 녀석이 욕을 해야 하는데 답지 않게 아무 말이 없다. 설마 그냥 완전 개빡쳤나 걱정돼 뛰어나가자 한가로운 홀에 녀석은 제 팽이팽이를 먹고 있었다. 아니 꼽다는 눈빛을 보내자 녀석은 더 아니꼽다는 표정으로 저를 본다, 왜 뭐! 입 모양으로 따지자 녀석의 희고 고운 손끝이 가리킨 테이블에 심장이 떨어질 것 같다. 김태형과 박지민이 앉아 있는 테이블인데 내가 왜?라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다 먹은 아이스크림 막대기를 버리며 녀석이 묻는다.

[방탄소년단] Oh My Cherry : 오 마이 체리! _ 02 | 인스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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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쟤네랑 친하냐? 계속 벨 누르잖아. 스마트 워치 안 봤냐? 해결 안 해?"

민군의 일상

201X X월 XX일

윤기는 술집 제로에 일등공신, 그냥 개국공신 온갖 좋은 말은 갖다 붙일 수 있는 그런 존재였다. 진상이 나타나면 제일 먼저 나타나 진상을 처리 고하고 힘든 일도 도맡아 하는, 그런 윤기의 힘듦을 이해하는 석진은 주방 옆 딸린 방을 윤기에게 내어줬다. 자신은 어차피 취미 겸 재미로 하는 일이니 믿고 맡길 사람은 윤기뿐이라며 말이다. 친구를 데려와도 좋고 문 닫고 혼자 술 마시든 뭘 하든 좋아.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석진이 제게 내건 조건이었다. 나쁠 것은 없기에 저는 제로의 열쇠를 받아 들었다.

다 좋은 제로의 단점은 햇빛이 잘 들지 않아 아침인지 저녁인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대충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자 10시 32분. 조금만 더 있으면 점심시간이었다. 푹 잤다는 걸 증명하듯 머리에는 까치집이 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윤기는 스스럼없이 주방을 지나 계단을 통해 옥상으로 올라갔다. 모닝 담배를 위해서였다, 긴 장초를 꺼내 입에 물고 라이터로 불을 붙이려는 순간 아, 라이터 없다. 다시 내려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무렵 윤기의 시선 끝에 옥상 구석 놓인 라이터가 눈에 들어온다. 김여주 라이터. 오늘만 빌려 쓰겠노라 혼잣말을 중얼거린 윤기가 그제야 담배에 불을 붙인다. 살 것만 같은 표정으로 제 발아래 서울을 바라본다. 오늘은 조금 이르게 5시부터 오픈이었으니 씻고 준비하고 밥을 먹으면 그만인 시간이었다. 리모델링을 해야 하지 않겠냐며 갑작스레 선언한 김 사장 덕에 가게가 오래 쉬었다 다시 문을 여는 거니까 조금 일찍 여는 게 어떻겠냐는 정국의 말에 석진은 그러겠노라 받아들였다.

4달 만에 문을 열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로의 인기를 증명하듯 사람은 붐볐다, 확장공사를 한 풀장에 지하에 가장 많은 인원이 몰렸다. 제일 일이 능숙한 저와 여주가 내려가는 게 어떠냐며 묻는 석진에 1층은 호석과 정국이 지하는 저와 여주가 보기로 했는데 윤기는 시간이 좀 흘러 그것을 후회했다. 지하에 사람이 몰려든 만큼 오늘도 개진상들이 가득했다. 술값을 깎아 달라, 사장님이 보고 싶다. 오빠같이 먹어요 같은 시답잖은 농담을 들어줄 만큼 여유가 없었다. 주문은 왜 다들 한 번에 하는지, 귀찮음을 애써 감추고 태블릿을 내밀었다. 네, 제로입니다. 주문 확인하겠습니다. 무미건조한 제 목소리에 피곤함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듯했다. 아는 형들을 도와 작업한다고 하루 2~3시간 밖에 자지 못 한 탓이겠지라며 윤기는 생각했다. 그런 윤기의 피곤함은 두 배가 될 수밖에 없었다. 15번, 18번, 29번, 36번 우후죽순으로 벽 구석에 걸린 전광판에 불이 들어오고 늘 차고 다니는 스마트 워치에도 똑같이 15번, 18번, 29번, 36번이 떠올랐다. 대충 제가 가는 것으로 체크한 윤기가 스마트 워치를 잠그고 걸음을 옮겼다. 더럽게 바쁘네, 김 사장은 좋겠다 돈도 존나 벌고. 속으로 중얼거린 윤기는 바삐 주문을 처리해야 했다. 그 사이 확장 공사를 한 풀장의 물이 넘친 듯 풀장을 치우는 여주가 보이고 1층에 있어야 할 호석이 뛰어다닌다. 알바생 좀 더 뽑으라고 하던가 해야지라며 윤기가 36번 테이블을 정리할 무렵 다시 전광판과 스마트워치에 불이 들어온다, 7번. 36번에서 7번은 좀 먼 데, 애써 윤기가 무시하자 곧 스마트 워치에 김여주 7번 테이블이라는 안내 문구가 뜬다.

김여주 7번 테이블이라는 문구가 뜨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엔 인이어 너머로 들리는 소리가 가관이다, 7번 테이블 1번 항목 등장. 그에 별 수없이 윤기가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아직도 술값 내기 싫어 이러는 녀석들이 있나 싶어 7번 테이블에 도착했을 땐 가관이었다. 손님에 의해 강제 맥주 샤워를 한 김여주와 소리를 바락바락 지르는 여자에 전정국에게 김여주를 부탁했다, 뒷일은 제로의 조항을 따랐다. 출입 금지 및 영업 방해로 경찰에 신고해주는 것이 전부였지만 그냥. 맥주로 샤워를 한 네 모습이 안 쓰러워져도 똑같이 해줬다. 왜냐고 묻는다면 앞서 말했듯이 안쓰러워서. 제 손에 의해 너와 똑같이 맥주에 젖은 여자가 소리치고 남자들이 제 눈치를 살핀다. 뭐 어쩔래라는 제 표정에 하나 둘 일어나 자리를 뜬다. 오늘도 하루가 아주 개 조옷같다. 여주가 나간 문으로 들어오는 핑크색 머리에 윤기의 눈이 사나워진다. 김여주한테 치근덕 거리는 박지민. 제로의 직원이라면 모두 알 거다. 고개를 젓는 제 옆으로 호석이 와 묻는다.

"또라이 또 왔어요?"

박지민을 이야기하는 은어에 그렇다며 대충 고개를 끄덕이자. 호석이 혀를 찬다, 쯧쯧 두어 번 혀를 차고 녀석은 1층도 바쁘다며 떠났다. 그래, 정말 오늘 하루 아주 개 조옷 같네라고 윤기는 생각했다.

뜬구름

201X X월 XX일

오랜만의 개업날 맥주 샤워를 한 제가 안쓰러웠는지 김 사장은 휴가를 줬다, 일주일씩이나. 알바비는 정상적으로 입금될 거야 하며 제 손에 휴가비를 쥐여주는 김석진의 손은 퍽 따뜻했으나. 기나긴 휴가에도 제가 갈 곳은 없었다. 고향에 내려가자니 마음이 동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집에만 있기는 싫었다. 호킹 스나 그런 거 하고 싶은데, 혼자는 늘 두렵다. 그래서 결국 휴가 첫날부터 늦잠을 자 버렸다. 핸드폰을 들어 바라보자 이제 겨우 10시 40분이다. 크게 하고 싶은 것도 할 것도 없어 밥이나 먹자고 엄마가 보내 준 반찬을 꺼내고 밥통을 열었다, 반찬도 접시에 다 덜었는데 밥만 딱 없는 게 참, 이럴 땐 햇반이 지라며 찬장을 뒤져도 없는 밥에 대충 가디건을 걸치고 원룸을 나섰다.

"햇반이랑 또…."

나온 김에 필요한 것들을 사다 보니 생각보다 짐이 많아졌다. 검은 비닐봉지가 꽤나 무겁다. 무거운 짐을 들고 문득 거리를 걷다 보니 옛 생각이 난다. 스무 살 막 서울에 상경했을 땐 모든 게 서툴고 낯설고 무서웠는데, 어느덧 서울에 상경한지 6년이 넘었다. 제 나이 스물여섯 취업 준비로 한창 바쁜 나이였다. 그리고 나는 내 나이에 대해 남들에게 정말 눈 떠보니 스물여섯이라고 이야기하는데 바람이 너무 차다, 꼬 끝이 너무 시리다. 그에 대충 손으로 제 코를 어루만지며 골목길을 돈다. 미약한 담배 냄새가 가득한 골목에 저도 모르게 인상이 쓰였다. 남이 피는 담배는 여전히 싫다는 건가. 헛웃음을 흘리고 묵묵히 바닥을 보며 걷는다, 여기서 한 번만 더 돌면 집이다. 내 집. 바닥 위로 보이는 제 발이 가엾다 오늘따라. 추운 걸 알면서 왜 슬리퍼만 신었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제 손이 갑자기 가벼워진다. 놀라 고갤 들자 또, 또 너다. 왜 저를 보고 그렇게 반갑다는 듯이 웃는지. 알 수가 없다. 저를 두고 간 건 너이면서.

체리 없이 지낸 일상

201X X 월 XX 일

또 다툰다, 또 불안해한다. 어느새 습관처럼 저희는 등을 돌리고 잔다는 걸 너는 알까. 곧 있으면 저는 군대에도 가야 하고 해야 할 게 많은데. 아직도 네게 입을 열지 못했다. 군대에 가야 한다고 평소와 같이 사이가 좋았다면 같이 맥주를 마시며 쉽게 했을 이야기였지만 오늘은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이미 제게 등을 지고 누운 너니까. 같이 살면서부터 모든 사소한 것은 다툼의 원인이 되었다. 라면 먹고 씻어 두지 않은 냄비라던가, 치우지 않은 택배 상자. 그냥 모든 사소한 것으로 다투고 등을 돌리고 다시 마주 앉아 웃었다. 여전히 열여섯 그 순간처럼 저를 보고 환하게 웃음 짓는 네 두 눈에 제가 가득하고 내 두 눈에도 역시 네가 가득하다. 이런 게 행복일까, 저는 늘 생각하는데 너도 그럴까? 미쳐 내뱉지 못할 말들을 홀로 삼키며 잠들 네 등을 바라본다.

또, 우리가 또 다툰다. 별거 아닌데 정말 별거 아닌데. 누구나 가야 할 군대에 가는 것이라는 제 말에 너는 울먹였다. 자신도 안다며. 왜 먼저 말하지 않았냐고 우는 두 눈이 여전히 예쁘다. 여전히 네게는 제가 가득하다. 어쩌지 고민하던 제가 입을 열고 머리로 가슴으로 단 한 번도 생각 한 적 없는 말을 내뱉는다. 헤어지자, 무미건조한 제 목소리에 네 두 눈이 크게 요동친다. 네 손에 들린 제 영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곧 별을 박아둔 것처럼 어여쁜 네 두 눈에 슬픔과 분노와 같은 저를 향한 부정의 감정이 샘솟는다. 그리고 어쩔 수 없다, 제가 선택했으니까. 아무렇지 않은 듯 웃는 저에 네가 우리의 집을 벗어난다. 붙잡을 수 없다, 너는 나처럼 살면 안 되니까.

복학했다며? 그나마 잘 아는 동기 중 석호의 연락이었다, 군대에만 다녀올 요량으로 휴학했던 거니까 뭐라며 어깨를 으쓱이는 태형에 당연하다는 듯 석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의 술자리였다. 저랑 석호를 포함해 몇 명의 동기들이 가볍게 소주를 한잔하는 그런. 오랜만에 마시는 소주가 달다. 알딸딸하니 취기가 오를 것 같다. 이내 곧 석호의 옆에 앉아 있던 녀석이 인사를 건네온다. 나는 박지민 나도 얼마 전에 제대했어 과는 같은 과. 제 앞에 멈춘 손에 가볍게 악수를 취했다. 체리 없이 두 번의 사계절이 지나갔다. 서로를 바라보며 잠들었던, 서로를 바라보며 살았던 시간에 나는 아직 사는데 너는 어떠니. 건넬 수도 물어서도 감히 안 될 말을 태형이 묵묵히 삼켰다. 입안에 남은 소주가 오늘따라 참으로 달다.

지민과 알고 지낸 지 4년이 넘었다, 전역 후에 알게 되었으니까. 우리보다 군대를 미뤘던 석호가 이제야 군에를 갔고 그에 저와 지민은 둘도 없는 단짝이 되었다. 너나 나나 둘 다 애인도 없는 불쌍한 중생이니까 같이 놀자며 지민은 매일 저를 찾았다. 그에 태형도 그러려니 했다. 전처럼 누군가 저를 신경 써줄 사람도 없고 함께 해줄 사람도 없으니까. 그래서 그냥 저는 지민의 일방통행을 허락했다. 그것이 익숙해질 무렵 지민은 제게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게임 중이야, 왜.라는 제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박지민이 쉴 틈 없이 조잘 거린다. 사거리에 제로라는 술집 너 한 번도 안 가 봤다며? 여기 김여주라고 있는데 걔 엄청 예쁘다? 오늘 마침 재 오픈 일이니까 형님이 데려가 준다. 옆에서 쫑알 거리는 지민에 제 게임 캐릭터가 죽었다. 녀석을 바라보며 됐다고 손을 저었다, 왜라는 물음에 그냥 대답해줬다. 박 교수 님이랑 면담해야 한다는 제 말에 네가 그런 것도 하냐며 입을 이 죽이는 녀석을 무시했다. 제 무시에도 아랑곳 않던 녀석은 제게 밤에 가자 주소는 찍어줄 게라며 카페를 벗어났다. 매번 지 맘대로다.

박 교수의 면담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취업하려는 거지?라는 질문에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우리 학과에 협력 업체에 대해 나열하던 박 교수와 저녁까지 먹어야만 했다. 집에 돌아와 시계를 보자 박지민이 만나자 한 약속시간까지 1시간도 안 남았다, 좀 늦어도 뭐라 안 하겠지. 대충 씻고 정말 대충 옷을 골라 입고 나왔다. 녀석이 찍어준 주소로 오자 뭔 놈에 술집이 이렇게 큰지 꼭 클럽 같다. 자기는 1층이라는 박지민의 말에 어두운 실내에서 핑크 머리를 찾아 시선이 바삐 움직였다. 겨우 파악된 지민의 위치에 저는 더럽게 구석에도 앉았네라고 생각했다. 제가 자리에 앉아 방금 막 주문을 끝냈다며 녀석을 재잘거렸다. 피곤하지도 않나 대충 고개를 끄덕인 태형이 핸드폰을 꺼내 시계를 보자 곧 열 한시다. 피곤에 절어 소파에 기대자 주문하신 생맥주 나왔습니다~라며 익숙한 목소리가 제 귀에 닿는다. 맥주 두 잔을 내려놓는 알바를 빤히 쳐다봤다. 익숙한 얼굴에 제 기억 어딘가 남아 있는 향기. 옛날과 크게 달라진 것 없지만 좀 더 성숙해졌다.

[방탄소년단] Oh My Cherry : 오 마이 체리! _ 02 | 인스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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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드디어 나왔네, 체리."

​문득 떠오르는 첫 만남에 웃음이 지어졌다, 우리 예뻤네. 술기운이 알딸딸하게 오른 여주가 나가겠다며 가게를 떠났다. 겨울밤임을 실감하게 하는 이 차가운 바람에 재킷을 꼭 잠갔다. 김태형이 있었으면 옷 왜 이렇게 얇게 입었냐고 화냈겠지? 같이 있지 않지만 태형을 떠올리기만 해도 여주는 웃음이 터졌다. 아, 보고 싶다 김태형. 입 밖으로 내뱉어도 또 내뱉고 싶은 말임을 너는 알까. 사랑해서 미칠 것 같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구나를 태형을 만나며 알아갔다. 태형은 제 세계의 전부였고 모든 것이었다. 태형도 그럴 것이라 믿으며 뒤늦게 도착한 버스에 몸을 실었다. 잠에 취해 자꾸만 잠겨오는 두 눈꺼풀에 부릅 힘을 주고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보냈다.

1 00 : 02 AM [태혀, 나 지금 들어가는 중이오ㅓㅏ ㅣㅈ좀 따 집에서 봐ㅡㅜ]

오타가 가득하다는 것도 모르고 여주는 홀드키를 눌러 핸드폰을 재킷 주머니로 집어넣었다, 따뜻한 버스에 홀로 앉아 있으니 더욱 태형이 떠오른다. 그래도 괜찮다, 곧 집에 도착하면 태형이 저를 마중 나올 테고 저는 그런 태형과 함께 집으로 들어갈 테니까.

Oh My Cherry : 오 마이 체리!

W. 베리 크러쉬​

Next Q?

201X X월 XX일

옥상에서 담배를 물고 있는 저에 담배를 피우러 온 정국이 인상을 찌푸렸다, 같은 흡연자 주제 넌 되고 난 안 되냐?라는 제 물음에 녀석은 볼멘소리를 늘어놨다.

"누나, 누나가 금연한다 해서 나도 담배 좀 줄이고 우리 김 사장은 아이스크림은 사 왔는데."

일렁이는 바람에 자꾸만 불이 꺼지는지 녀석이 곧 등지고 제 담배에 불을 붙인 후 저를 쳐다본다, 그러더니 끝나지 않은 말을 끝맺는다. 나는 뭐 좋아, 누나 담배 필 때 섹시하거든. 키득이는 정국에 저 또한 키득였다. 어린 게 깝싼다 라는 제 말에 정국은 아무 말 없이 담배를 한 모금 할 뿐이었다. 선선한 바람에 흩날리는 담배연기가 꼭 김태형 같다, 아마 오늘 헛것을 본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맥주에 샤워를 하고 그랬으니 정신이 제정신일 리가 없다는 게 제가 내린 결론이었고 그래야만 했다. 바람에 흩날리는 담배 연기처럼 잡고 싶어도 잡을 수 없고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게 녀석이니까. 아직 많이 남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자 정국이 아깝다는 듯 저를 바라본다, 그에 대충 어깨를 으쓱이며 계단으로 내려왔다. 계단을 내려 주방을 지나 직원 룸으로 향한다. 제 이름이 적힌 사물함으로 담뱃갑을 밀어 넣는다, 혹시 김석진이 본다면 팽이팽이는 압수에 삐친 것이 열흘은 갈지도 모르니까.

"김여주 미쳤냐?"

제게 쉬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는 듯 인이어를 통해 민윤기의 낮은 목소리가 들리도 대충 대꾸한다, 나가면 되잖아 기다려 투덜 거리는 저에 또 녀석이 욕을 해야 하는데 답지 않게 아무 말이 없다. 설마 그냥 완전 개빡쳤나 걱정돼 뛰어나가자 한가로운 홀에 녀석은 제 팽이팽이를 먹고 있었다. 아니 꼽다는 눈빛을 보내자 녀석은 더 아니꼽다는 표정으로 저를 본다, 왜 뭐! 입 모양으로 따지자 녀석의 희고 고운 손끝이 가리킨 테이블에 심장이 떨어질 것 같다. 김태형과 박지민이 앉아 있는 테이블인데 내가 왜?라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다 먹은 아이스크림 막대기를 버리며 녀석이 묻는다.

[방탄소년단] Oh My Cherry : 오 마이 체리! _ 02 | 인스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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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쟤네랑 친하냐? 계속 벨 누르잖아. 스마트 워치 안 봤냐? 해결 안 해?"

민군의 일상

201X X월 XX일

윤기는 술집 제로에 일등공신, 그냥 개국공신 온갖 좋은 말은 갖다 붙일 수 있는 그런 존재였다. 진상이 나타나면 제일 먼저 나타나 진상을 처리 고하고 힘든 일도 도맡아 하는, 그런 윤기의 힘듦을 이해하는 석진은 주방 옆 딸린 방을 윤기에게 내어줬다. 자신은 어차피 취미 겸 재미로 하는 일이니 믿고 맡길 사람은 윤기뿐이라며 말이다. 친구를 데려와도 좋고 문 닫고 혼자 술 마시든 뭘 하든 좋아.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석진이 제게 내건 조건이었다. 나쁠 것은 없기에 저는 제로의 열쇠를 받아 들었다.

다 좋은 제로의 단점은 햇빛이 잘 들지 않아 아침인지 저녁인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대충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자 10시 32분. 조금만 더 있으면 점심시간이었다. 푹 잤다는 걸 증명하듯 머리에는 까치집이 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윤기는 스스럼없이 주방을 지나 계단을 통해 옥상으로 올라갔다. 모닝 담배를 위해서였다, 긴 장초를 꺼내 입에 물고 라이터로 불을 붙이려는 순간 아, 라이터 없다. 다시 내려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무렵 윤기의 시선 끝에 옥상 구석 놓인 라이터가 눈에 들어온다. 김여주 라이터. 오늘만 빌려 쓰겠노라 혼잣말을 중얼거린 윤기가 그제야 담배에 불을 붙인다. 살 것만 같은 표정으로 제 발아래 서울을 바라본다. 오늘은 조금 이르게 5시부터 오픈이었으니 씻고 준비하고 밥을 먹으면 그만인 시간이었다. 리모델링을 해야 하지 않겠냐며 갑작스레 선언한 김 사장 덕에 가게가 오래 쉬었다 다시 문을 여는 거니까 조금 일찍 여는 게 어떻겠냐는 정국의 말에 석진은 그러겠노라 받아들였다.

4달 만에 문을 열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로의 인기를 증명하듯 사람은 붐볐다, 확장공사를 한 풀장에 지하에 가장 많은 인원이 몰렸다. 제일 일이 능숙한 저와 여주가 내려가는 게 어떠냐며 묻는 석진에 1층은 호석과 정국이 지하는 저와 여주가 보기로 했는데 윤기는 시간이 좀 흘러 그것을 후회했다. 지하에 사람이 몰려든 만큼 오늘도 개진상들이 가득했다. 술값을 깎아 달라, 사장님이 보고 싶다. 오빠같이 먹어요 같은 시답잖은 농담을 들어줄 만큼 여유가 없었다. 주문은 왜 다들 한 번에 하는지, 귀찮음을 애써 감추고 태블릿을 내밀었다. 네, 제로입니다. 주문 확인하겠습니다. 무미건조한 제 목소리에 피곤함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듯했다. 아는 형들을 도와 작업한다고 하루 2~3시간 밖에 자지 못 한 탓이겠지라며 윤기는 생각했다. 그런 윤기의 피곤함은 두 배가 될 수밖에 없었다. 15번, 18번, 29번, 36번 우후죽순으로 벽 구석에 걸린 전광판에 불이 들어오고 늘 차고 다니는 스마트 워치에도 똑같이 15번, 18번, 29번, 36번이 떠올랐다. 대충 제가 가는 것으로 체크한 윤기가 스마트 워치를 잠그고 걸음을 옮겼다. 더럽게 바쁘네, 김 사장은 좋겠다 돈도 존나 벌고. 속으로 중얼거린 윤기는 바삐 주문을 처리해야 했다. 그 사이 확장 공사를 한 풀장의 물이 넘친 듯 풀장을 치우는 여주가 보이고 1층에 있어야 할 호석이 뛰어다닌다. 알바생 좀 더 뽑으라고 하던가 해야지라며 윤기가 36번 테이블을 정리할 무렵 다시 전광판과 스마트워치에 불이 들어온다, 7번. 36번에서 7번은 좀 먼 데, 애써 윤기가 무시하자 곧 스마트 워치에 김여주 7번 테이블이라는 안내 문구가 뜬다.

김여주 7번 테이블이라는 문구가 뜨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엔 인이어 너머로 들리는 소리가 가관이다, 7번 테이블 1번 항목 등장. 그에 별 수없이 윤기가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아직도 술값 내기 싫어 이러는 녀석들이 있나 싶어 7번 테이블에 도착했을 땐 가관이었다. 손님에 의해 강제 맥주 샤워를 한 김여주와 소리를 바락바락 지르는 여자에 전정국에게 김여주를 부탁했다, 뒷일은 제로의 조항을 따랐다. 출입 금지 및 영업 방해로 경찰에 신고해주는 것이 전부였지만 그냥. 맥주로 샤워를 한 네 모습이 안 쓰러워져도 똑같이 해줬다. 왜냐고 묻는다면 앞서 말했듯이 안쓰러워서. 제 손에 의해 너와 똑같이 맥주에 젖은 여자가 소리치고 남자들이 제 눈치를 살핀다. 뭐 어쩔래라는 제 표정에 하나 둘 일어나 자리를 뜬다. 오늘도 하루가 아주 개 조옷같다. 여주가 나간 문으로 들어오는 핑크색 머리에 윤기의 눈이 사나워진다. 김여주한테 치근덕 거리는 박지민. 제로의 직원이라면 모두 알 거다. 고개를 젓는 제 옆으로 호석이 와 묻는다.

"또라이 또 왔어요?"

박지민을 이야기하는 은어에 그렇다며 대충 고개를 끄덕이자. 호석이 혀를 찬다, 쯧쯧 두어 번 혀를 차고 녀석은 1층도 바쁘다며 떠났다. 그래, 정말 오늘 하루 아주 개 조옷 같네라고 윤기는 생각했다.

뜬구름

201X X월 XX일

오랜만의 개업날 맥주 샤워를 한 제가 안쓰러웠는지 김 사장은 휴가를 줬다, 일주일씩이나. 알바비는 정상적으로 입금될 거야 하며 제 손에 휴가비를 쥐여주는 김석진의 손은 퍽 따뜻했으나. 기나긴 휴가에도 제가 갈 곳은 없었다. 고향에 내려가자니 마음이 동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집에만 있기는 싫었다. 호킹 스나 그런 거 하고 싶은데, 혼자는 늘 두렵다. 그래서 결국 휴가 첫날부터 늦잠을 자 버렸다. 핸드폰을 들어 바라보자 이제 겨우 10시 40분이다. 크게 하고 싶은 것도 할 것도 없어 밥이나 먹자고 엄마가 보내 준 반찬을 꺼내고 밥통을 열었다, 반찬도 접시에 다 덜었는데 밥만 딱 없는 게 참, 이럴 땐 햇반이 지라며 찬장을 뒤져도 없는 밥에 대충 가디건을 걸치고 원룸을 나섰다.

"햇반이랑 또…."

나온 김에 필요한 것들을 사다 보니 생각보다 짐이 많아졌다. 검은 비닐봉지가 꽤나 무겁다. 무거운 짐을 들고 문득 거리를 걷다 보니 옛 생각이 난다. 스무 살 막 서울에 상경했을 땐 모든 게 서툴고 낯설고 무서웠는데, 어느덧 서울에 상경한지 6년이 넘었다. 제 나이 스물여섯 취업 준비로 한창 바쁜 나이였다. 그리고 나는 내 나이에 대해 남들에게 정말 눈 떠보니 스물여섯이라고 이야기하는데 바람이 너무 차다, 꼬 끝이 너무 시리다. 그에 대충 손으로 제 코를 어루만지며 골목길을 돈다. 미약한 담배 냄새가 가득한 골목에 저도 모르게 인상이 쓰였다. 남이 피는 담배는 여전히 싫다는 건가. 헛웃음을 흘리고 묵묵히 바닥을 보며 걷는다, 여기서 한 번만 더 돌면 집이다. 내 집. 바닥 위로 보이는 제 발이 가엾다 오늘따라. 추운 걸 알면서 왜 슬리퍼만 신었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제 손이 갑자기 가벼워진다. 놀라 고갤 들자 또, 또 너다. 왜 저를 보고 그렇게 반갑다는 듯이 웃는지. 알 수가 없다. 저를 두고 간 건 너이면서.

체리 없이 지낸 일상

201X X 월 XX 일

또 다툰다, 또 불안해한다. 어느새 습관처럼 저희는 등을 돌리고 잔다는 걸 너는 알까. 곧 있으면 저는 군대에도 가야 하고 해야 할 게 많은데. 아직도 네게 입을 열지 못했다. 군대에 가야 한다고 평소와 같이 사이가 좋았다면 같이 맥주를 마시며 쉽게 했을 이야기였지만 오늘은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이미 제게 등을 지고 누운 너니까. 같이 살면서부터 모든 사소한 것은 다툼의 원인이 되었다. 라면 먹고 씻어 두지 않은 냄비라던가, 치우지 않은 택배 상자. 그냥 모든 사소한 것으로 다투고 등을 돌리고 다시 마주 앉아 웃었다. 여전히 열여섯 그 순간처럼 저를 보고 환하게 웃음 짓는 네 두 눈에 제가 가득하고 내 두 눈에도 역시 네가 가득하다. 이런 게 행복일까, 저는 늘 생각하는데 너도 그럴까? 미쳐 내뱉지 못할 말들을 홀로 삼키며 잠들 네 등을 바라본다.

또, 우리가 또 다툰다. 별거 아닌데 정말 별거 아닌데. 누구나 가야 할 군대에 가는 것이라는 제 말에 너는 울먹였다. 자신도 안다며. 왜 먼저 말하지 않았냐고 우는 두 눈이 여전히 예쁘다. 여전히 네게는 제가 가득하다. 어쩌지 고민하던 제가 입을 열고 머리로 가슴으로 단 한 번도 생각 한 적 없는 말을 내뱉는다. 헤어지자, 무미건조한 제 목소리에 네 두 눈이 크게 요동친다. 네 손에 들린 제 영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곧 별을 박아둔 것처럼 어여쁜 네 두 눈에 슬픔과 분노와 같은 저를 향한 부정의 감정이 샘솟는다. 그리고 어쩔 수 없다, 제가 선택했으니까. 아무렇지 않은 듯 웃는 저에 네가 우리의 집을 벗어난다. 붙잡을 수 없다, 너는 나처럼 살면 안 되니까.

복학했다며? 그나마 잘 아는 동기 중 석호의 연락이었다, 군대에만 다녀올 요량으로 휴학했던 거니까 뭐라며 어깨를 으쓱이는 태형에 당연하다는 듯 석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의 술자리였다. 저랑 석호를 포함해 몇 명의 동기들이 가볍게 소주를 한잔하는 그런. 오랜만에 마시는 소주가 달다. 알딸딸하니 취기가 오를 것 같다. 이내 곧 석호의 옆에 앉아 있던 녀석이 인사를 건네온다. 나는 박지민 나도 얼마 전에 제대했어 과는 같은 과. 제 앞에 멈춘 손에 가볍게 악수를 취했다. 체리 없이 두 번의 사계절이 지나갔다. 서로를 바라보며 잠들었던, 서로를 바라보며 살았던 시간에 나는 아직 사는데 너는 어떠니. 건넬 수도 물어서도 감히 안 될 말을 태형이 묵묵히 삼켰다. 입안에 남은 소주가 오늘따라 참으로 달다.

지민과 알고 지낸 지 4년이 넘었다, 전역 후에 알게 되었으니까. 우리보다 군대를 미뤘던 석호가 이제야 군에를 갔고 그에 저와 지민은 둘도 없는 단짝이 되었다. 너나 나나 둘 다 애인도 없는 불쌍한 중생이니까 같이 놀자며 지민은 매일 저를 찾았다. 그에 태형도 그러려니 했다. 전처럼 누군가 저를 신경 써줄 사람도 없고 함께 해줄 사람도 없으니까. 그래서 그냥 저는 지민의 일방통행을 허락했다. 그것이 익숙해질 무렵 지민은 제게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게임 중이야, 왜.라는 제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박지민이 쉴 틈 없이 조잘 거린다. 사거리에 제로라는 술집 너 한 번도 안 가 봤다며? 여기 김여주라고 있는데 걔 엄청 예쁘다? 오늘 마침 재 오픈 일이니까 형님이 데려가 준다. 옆에서 쫑알 거리는 지민에 제 게임 캐릭터가 죽었다. 녀석을 바라보며 됐다고 손을 저었다, 왜라는 물음에 그냥 대답해줬다. 박 교수 님이랑 면담해야 한다는 제 말에 네가 그런 것도 하냐며 입을 이 죽이는 녀석을 무시했다. 제 무시에도 아랑곳 않던 녀석은 제게 밤에 가자 주소는 찍어줄 게라며 카페를 벗어났다. 매번 지 맘대로다.

박 교수의 면담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취업하려는 거지?라는 질문에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우리 학과에 협력 업체에 대해 나열하던 박 교수와 저녁까지 먹어야만 했다. 집에 돌아와 시계를 보자 박지민이 만나자 한 약속시간까지 1시간도 안 남았다, 좀 늦어도 뭐라 안 하겠지. 대충 씻고 정말 대충 옷을 골라 입고 나왔다. 녀석이 찍어준 주소로 오자 뭔 놈에 술집이 이렇게 큰지 꼭 클럽 같다. 자기는 1층이라는 박지민의 말에 어두운 실내에서 핑크 머리를 찾아 시선이 바삐 움직였다. 겨우 파악된 지민의 위치에 저는 더럽게 구석에도 앉았네라고 생각했다. 제가 자리에 앉아 방금 막 주문을 끝냈다며 녀석을 재잘거렸다. 피곤하지도 않나 대충 고개를 끄덕인 태형이 핸드폰을 꺼내 시계를 보자 곧 열 한시다. 피곤에 절어 소파에 기대자 주문하신 생맥주 나왔습니다~라며 익숙한 목소리가 제 귀에 닿는다. 맥주 두 잔을 내려놓는 알바를 빤히 쳐다봤다. 익숙한 얼굴에 제 기억 어딘가 남아 있는 향기. 옛날과 크게 달라진 것 없지만 좀 더 성숙해졌다.

[방탄소년단] Oh My Cherry : 오 마이 체리! _ 02 | 인스티즈비디오 태그를 지원하지 않는 브라우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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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리의 역사
200X X월 XX일




체리는 여주의 애칭이었다, 태형이 5년 넘게 여주를 부르던 애칭. 중학교 3학년 철이 없던 시절부터 20살까지 태형과 여주는 함께였다. 첫 만남이 어떠했냐고 묻는 대학 친구들의 질문에 여주는 그저 가물가물하다며 술을 마셨다. 아이들의 물음에 오랜만에 태형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리자 그저 우리는 다른 아이들과 다름없었다. 그때는 한창 싸이가 유행이었는데 흔해빠진 김태형의 일촌 신청을 받은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얼굴은 본 적 없지만 녀석은 제 다이어리에 친근하다는 듯 댓글을 남겼고 그에 여주의 친구들이 더 호들갑이었다.




"얘 옆 옆 고등학교에 완전 잘 생겼다고 소문난 애잖아!"




당근 만나 볼 거지? 이렇게 만나자고 댓글 썼잖아, 오늘 기다린데!라며 호들갑 떠는 수현이에 귀찮다며 고개를 저었지만 수현이는 미쳤다며 제 등을 때리기 일쑤였다. 참내, 김태형이 누구라고 대충 수현이의 잔소리를 귀로 흘리고 시계를 쳐다보자 곧 종례였다.




"야, 너 정말 후문으로 갈 거야? 정문에 김태형이 기다린다 했잖아!"



제 책가방을 질질 끌며 정문으로 향하는 수현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저는 그대로 수현이 손에 끌려 정문으로 향했다, 어쩐 일인지 오늘따라 붐비는 정문에 인상이 찡그려졌으나 수현이의 호들갑에 저는 느꼈다. 김태형인가 뭐시기가 있나 보네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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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드디어 나왔네, 체리."




​문득 떠오르는 첫 만남에 웃음이 지어졌다, 우리 예뻤네. 술기운이 알딸딸하게 오른 여주가 나가겠다며 가게를 떠났다. 겨울밤임을 실감하게 하는 이 차가운 바람에 재킷을 꼭 잠갔다. 김태형이 있었으면 옷 왜 이렇게 얇게 입었냐고 화냈겠지? 같이 있지 않지만 태형을 떠올리기만 해도 여주는 웃음이 터졌다. 아, 보고 싶다 김태형. 입 밖으로 내뱉어도 또 내뱉고 싶은 말임을 너는 알까. 사랑해서 미칠 것 같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구나를 태형을 만나며 알아갔다. 태형은 제 세계의 전부였고 모든 것이었다. 태형도 그럴 것이라 믿으며 뒤늦게 도착한 버스에 몸을 실었다. 잠에 취해 자꾸만 잠겨오는 두 눈꺼풀에 부릅 힘을 주고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보냈다.





 00 : 02 AM [태혀, 나 지금 들어가는 중이오ㅓㅏ ㅣㅈ좀 따 집에서 봐ㅡㅜ]




오타가 가득하다는 것도 모르고 여주는 홀드키를 눌러 핸드폰을 재킷 주머니로 집어넣었다, 따뜻한 버스에 홀로 앉아 있으니 더욱 태형이 떠오른다. 그래도 괜찮다, 곧 집에 도착하면 태형이 저를 마중 나올 테고 저는 그런 태형과 함께 집으로 들어갈 테니까.












Oh My Cherry : 오 마이 체리!


W. 베리 크러쉬​











Next Q?
201X X월 XX일









옥상에서 담배를 물고 있는 저에 담배를 피우러 온 정국이 인상을 찌푸렸다, 같은 흡연자 주제 넌 되고 난 안 되냐?라는 제 물음에 녀석은 볼멘소리를 늘어놨다.



"누나, 누나가 금연한다 해서 나도 담배 좀 줄이고 우리 김 사장은 아이스크림은 사 왔는데."



일렁이는 바람에 자꾸만 불이 꺼지는지 녀석이 곧 등지고 제 담배에 불을 붙인 후 저를 쳐다본다, 그러더니 끝나지 않은 말을 끝맺는다. 나는 뭐 좋아, 누나 담배 필 때 섹시하거든. 키득이는 정국에 저 또한 키득였다. 어린 게 깝싼다 라는 제 말에 정국은 아무 말 없이 담배를 한 모금 할 뿐이었다. 선선한 바람에 흩날리는 담배연기가 꼭 김태형 같다, 아마 오늘 헛것을 본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맥주에 샤워를 하고 그랬으니 정신이 제정신일 리가 없다는 게 제가 내린 결론이었고 그래야만 했다. 바람에 흩날리는 담배 연기처럼 잡고 싶어도 잡을 수 없고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게 녀석이니까. 아직 많이 남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자 정국이 아깝다는 듯 저를 바라본다, 그에 대충 어깨를 으쓱이며 계단으로 내려왔다. 계단을 내려 주방을 지나 직원 룸으로 향한다. 제 이름이 적힌 사물함으로 담뱃갑을 밀어 넣는다, 혹시 김석진이 본다면 팽이팽이는 압수에 삐친 것이 열흘은 갈지도 모르니까.





"김여주 미쳤냐?"





제게 쉬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는 듯 인이어를 통해 민윤기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에저는 대충 대꾸한다, 나가면 되잖아 기다려 투덜 거리는 저에 또 녀석이 욕을 해야 하는데 답지 않게 아무 말이 없다. 설마 그냥 완전 개빡쳤나 걱정돼 뛰어나가자 한가로운 홀에 녀석은 제 팽이팽이를 먹고 있었다. 아니꼽다는 눈빛을 보내자 녀석은 더 아니꼽다는 표정으로 저를 본다, 왜 뭐! 입 모양으로 따지자 녀석의 희고 고운 손끝이 가리킨 테이블에 심장이 떨어질 것 같다. 김태형과 박지민이 앉아 있는 테이블인데 내가 왜?라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다 먹은 아이스크림 막대기를 버리며 녀석이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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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쟤네랑 친하냐? 계속 벨 누르잖아. 스마트 워치 안 봤냐? 해결 안 해?"











민군의 일상
201X X월 XX일



윤기는 술집 제로에 일등공신, 그냥 개국공신 온갖 좋은 말은 갖다 붙일 수 있는 그런 존재였다. 진상이 나타나면 제일 먼저 나타나 진상을 처리하고 힘든 일도 도맡아 하는, 그런 윤기의 힘듦을 이해하는 석진은 주방 옆 딸린 방을 윤기에게 내어줬다. 자신은 어차피 취미 겸 재미로 하는 일이니 믿고 맡길 사람은 윤기뿐이라며 말이다. 친구를 데려와도 좋고 문 닫고 혼자 술 마시든 뭘 하든 좋아.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석진이 제게 내건 조건이었다. 나쁠 것은 없기에 저는 제로의 열쇠를 받아 들었다.




다 좋은 제로의 단점은 햇빛이 잘 들지 않아 아침인지 저녁인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대충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자 10시 32분. 조금만 더 있으면 점심시간이었다. 푹 잤다는 걸 증명하듯 머리에는 까치집이 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윤기는 스스럼없이 주방을 지나 계단을 통해 옥상으로 올라갔다. 모닝 담배를 위해서였다, 긴 장초를 꺼내 입에 물고 라이터로 불을 붙이려는 순간 아, 라이터 없다. 다시 내려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무렵 윤기의 시선 끝에 옥상 구석 놓인 라이터가 눈에 들어온다. 김여주 라이터. 오늘만 빌려 쓰겠노라 혼잣말을 중얼거린 윤기가 그제야 담배에 불을 붙인다. 살 것만 같은 표정으로 제 발아래 서울을 바라본다. 오늘은 조금 이르게 5시부터 오픈이었으니 씻고 준비하고 밥을 먹으면 그만인 시간이었다. 리모델링을 해야 하지 않겠냐며 갑작스레 선언한 김 사장 덕에 가게가 오래 쉬었다 다시 문을 여는 거니까 조금 일찍 여는 게 어떻겠냐는 정국의 말에 석진은 그러겠노라 받아들였다.




4달 만에 문을 열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로의 인기를 증명하듯 사람은 붐볐다, 확장공사를 한 풀장으로 지하에 가장 많은 인원이 몰렸다. 제일 일이 능숙한 저와 여주가 내려가는 게 어떠냐며 묻는 석진에 1층은 호석과 정국이 지하는 저와 여주가 보기로 했는데 윤기는 시간이 좀 흘러 그것을 후회했다. 지하에 사람이 몰려든 만큼 오늘도 개진상들이 가득했다. 술값을 깎아 달라, 사장님이 보고 싶다. 오빠같이 먹어요 같은 시답잖은 농담을 들어줄 만큼 여유가 없었다. 주문은 왜 다들 한 번에 하는지, 귀찮음을 애써 감추고 태블릿을 내밀었다. 네, 제로입니다. 주문 확인하겠습니다. 무미건조한 제 목소리에 피곤함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듯했다. 아는 형들을 도와 작업한다고 하루 2~3시간 밖에 자지 못 한 탓이겠지라며 윤기는 생각했다. 곧이어 그런 윤기의 피곤함은 두 배가 될 수밖에 없었다. 15번, 18번, 29번, 36번 우후죽순으로 벽 구석에 걸린 전광판에 불이 들어오고 늘 차고 다니는 스마트 워치에도 똑같이 15번, 18번, 29번, 36번이 떠올랐다. 대충 제가 가는 것으로 체크한 윤기가 스마트 워치를 잠그고 걸음을 옮겼다. 더럽게 바쁘네, 김 사장은 좋겠다 돈도 존나 벌고. 속으로 중얼거린 윤기는 바삐 주문을 처리해야 했다. 그 사이 확장 공사를 한 풀장의 물이 넘친 듯 풀장을 치우는 여주가 보이고 1층에 있어야 할 호석이 뛰어다닌다. 알바생 좀 더 뽑으라고 하던가 해야지라며 윤기가 36번 테이블을 정리할 무렵 다시 전광판과 스마트워치에 불이 들어온다, 7번. 36번에서 7번은 좀 먼 데, 애써 윤기가 무시하자 곧 스마트 워치에 김여주 7번 테이블이라는 안내 문구가 뜬다.




김여주 7번 테이블이라는 문구가 뜨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엔 인이어 너머로 들리는 소리가 가관이다, 7번 테이블 제로 하나 항목 등장. 그에 별 수없이 윤기가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아직도 술값 내기 싫어 이러는 녀석들이 있나 싶어 7번 테이블에 도착했을 땐 가관이었다. 손님에 의해 강제 맥주 샤워를 한 김여주와 소리를 바락바락 지르는 여자에 전정국에게 김여주를 부탁했다, 뒷일은 제로의 조항을 따랐다. 출입 금지 및 영업 방해로 경찰에 신고해주는 것이 전부였지만 그냥. 맥주로 샤워를 한 네 모습이 안 쓰러워져도 똑같이 해줬다. 왜냐고 묻는다면 앞서 말했듯이 안쓰러워서. 제 손에 의해 너와 똑같이 맥주에 젖은 여자가 소리치고 남자들이 제 눈치를 살핀다. 뭐 어쩔래라는 제 표정에 하나 둘 일어나 자리를 뜬다. 오늘도 하루가 아주 개 조옷같다. 여주가 나간 문으로 들어오는 핑크색 머리에 윤기의 눈이 사나워진다. 김여주한테 치근덕 거리는 박지민. 제로의 직원이라면 모두 알 거다. 고개를 젓는 제 옆으로 호석이 와 묻는다.





"또라이 또 왔어요?"




박지민을 이야기하는 은어에 그렇다며 대충 고개를 끄덕이자. 호석이 혀를 찬다, 쯧쯧 두어 번 혀를 차고 녀석은 1층도 바쁘다며 떠났다. 그래, 정말 오늘 하루 아주 개 조옷 같네라고 윤기는 생각했다.











뜬구름
201X X월 XX일



오랜만의 개업날 맥주 샤워를 한 제가 안쓰러웠는지 김 사장은 휴가를 줬다, 일주일씩이나. 알바비는 정상적으로 입금될 거야 하며 제 손에 휴가비를 쥐여주는 김석진의 손은 퍽 따뜻했으나. 기나긴 휴가에도 제가 갈 곳은 없었다. 고향에 내려가자니 마음이 동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집에만 있기는 싫었다. 호킹스나 그런 거 하고 싶은데, 혼자는 늘 두렵다. 그래서 결국 휴가 첫날부터 늦잠을 자 버렸다. 핸드폰을 들어 바라보자 이제 겨우 10시 40분이다. 크게 하고 싶은 것도 할 것도 없어 밥이나 먹자고 엄마가 보내 준 반찬을 꺼내고 밥통을 열었다, 반찬도 접시에 다 덜었는데 밥만 딱 없는 게 참, 이럴 땐 햇반이 지라며 찬장을 뒤져도 없는 밥에 대충 가디건을 걸치고 원룸을 나섰다.




"햇반이랑 또…."




나온 김에 필요한 것들을 사다 보니 생각보다 짐이 많아졌다. 검은 비닐봉지가 꽤나 무겁다. 무거운 짐을 들고 문득 거리를 걷다 보니 옛 생각이 난다. 스무 살 막 서울에 상경했을 땐 모든 게 서툴고 낯설고 무서웠는데, 어느덧 서울에 상경한지 6년이 넘었다. 제 나이 스물여섯 취업 준비로 한창 바쁜 나이였다. 그리고 나는 내 나이에 대해 남들에게 정말 눈 떠보니 스물여섯이라고 이야기하는데 바람이 너무 차다, 꼬 끝이 너무 시리다. 그에 대충 손으로 제 코를 어루만지며 골목길을 돈다. 미약한 담배 냄새가 가득한 골목에 저도 모르게 인상이 쓰였다. 남이 피는 담배는 여전히 싫다는 건가. 헛웃음을 흘리고 묵묵히 바닥을 보며 걷는다, 여기서 한 번만 더 돌면 집이다. 내 집. 바닥 위로 보이는 제 발이 가엾다 오늘따라. 추운 걸 알면서 왜 슬리퍼만 신었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제 손이 갑자기 가벼워진다. 놀라 고갤 들자 또, 또 너다. 왜 저를 보고 그렇게 반갑다는 듯이 웃는지. 알 수가 없다. 저를 두고 간 건 너이면서.























체리 없이 지낸 일상
201X X 월 XX 일







또 다툰다, 또 불안해한다. 어느새 습관처럼 저희는 등을 돌리고 잔다는 걸 너는 알까. 곧 있으면 저는 군대에도 가야 하고 해야 할 게 많은데. 아직도 네게 입을 열지 못했다. 군대에 가야 한다고 평소와 같이 사이가 좋았다면 같이 맥주를 마시며 쉽게 했을 이야기였지만 오늘은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이미 제게 등을 지고 누운 너니까. 같이 살면서부터 모든 사소한 것은 다툼의 원인이 되었다. 라면 먹고 씻어 두지 않은 냄비라던가, 치우지 않은 택배 상자. 그냥 모든 사소한 것으로 다투고 등을 돌리고 다시 마주 앉아 웃었다. 여전히 열여섯 그 순간처럼 저를 보고 환하게 웃음 짓는 네 두 눈에 제가 가득하고 내 두 눈에도 역시 네가 가득하다. 이런 게 행복일까, 저는 늘 생각하는데 너도 그럴까? 미쳐 내뱉지 못할 말들을 홀로 삼키며 잠든 네 등을 바라본다.



또, 우리가 또 다툰다. 별거 아닌데 정말 별거 아닌데. 누구나 가야 할 군대에 가는 것이라는 제 말에 너는 울먹였다. 자신도 안다며. 왜 먼저 말하지 않았냐고 우는 두 눈이 여전히 예쁘다. 여전히 네게는 제가 가득하다. 어쩌지 고민하던 제가 입을 열고 머리로 가슴으로 단 한 번도 생각 한 적 없는 말을 내뱉는다. 헤어지자, 무미건조한 제 목소리에 네 두 눈이 크게 요동한다. 네 손에 들린 제 영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곧 별을 박아둔 것처럼 어여쁜 네 두 눈에 슬픔과 분노와 같은 저를 향한 부정의 감정이 샘솟는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제가 선택했으니까. 아무렇지 않은 듯 웃는 저에 네가 우리의 집을 벗어난다. 붙잡을 수 없다, 너는 나처럼 살면 안 되니까.





복학했다며? 그나마 잘 아는 동기 중 석호의 연락이었다, 군대에만 다녀올 요량으로 휴학했던 거니까 뭐라며 어깨를 으쓱이는 태형에 당연하다는 듯 석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의 술자리였다. 저랑 석호를 포함해 몇 명의 동기들이 가볍게 소주를 한잔하는 그런. 오랜만에 마시는 소주가 달다. 알딸딸하니 취기가 오를 것 같다. 이내 곧 석호의 옆에 앉아 있던 녀석이 인사를 건네온다. 나는 박지민 나도 얼마 전에 제대했어 과는 같은 과. 제 앞에 멈춘 손에 가볍게 악수를 취했다. 체리 없이 두 번의 사계절이 지나갔다. 서로를 바라보며 잠들었던, 서로를 바라보며 살았던 시간에 나는 아직 사는데 너는 어떠니. 건넬 수도 물어서도 감히 안 될 말을 태형이 묵묵히 삼켰다. 입안에 남은 소주가 오늘따라 참으로 달다.






지민과 알고 지낸 지 4년이 넘었다, 전역 후에 알게 되었으니까. 우리보다 군대를 미뤘던 석호가 이제야 군에를 갔고 그에 저와 지민은 둘도 없는 단짝이 되었다. 너나 나나 둘 다 애인도 없는 불쌍한 중생이니까 같이 놀자며 지민은 매일 저를 찾았다. 그에 태형도 그러려니 했다. 전처럼 누군가 저를 신경 써줄 사람도 없고 함께 해줄 사람도 없으니까. 그래서 그냥 저는 지민의 일방통행을 허락했다. 그것이 익숙해질 무렵 지민은 제게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게임 중이야, 왜.라는 제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박지민이 쉴 틈 없이 조잘 거린다. 사거리에 제로라는 술집 너 한 번도 안 가 봤다며? 여기 김여주라고 있는데 걔 엄청 예쁘다? 오늘 마침 재 오픈 일이니까 형님이 데려가 준다. 옆에서 쫑알 거리는 지민에 제 게임 캐릭터가 죽었다. 녀석을 바라보며 됐다고 손을 저었다, 왜라는 물음에 그냥 대답해줬다. 박 교수 님이랑 면담해야 한다는 제 말에 네가 그런 것도 하냐며 입을 이 죽이는 녀석을 무시했다. 제 무시에도 아랑곳 않던 녀석은 제게 밤에 가자 주소는 찍어줄게라며 카페를 벗어났다. 매번 지 맘대로다.





박 교수의 면담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취업하려는 거지?라는 질문에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우리 학과에 협력 업체에 대해 나열하던 박 교수와 저녁까지 먹어야만 했다. 집에 돌아와 시계를 보자 박지민이 만나자 한 약속시간까지 1시간도 안 남았다, 좀 늦어도 뭐라 안 하겠지. 대충 씻고 정말 대충 옷을 골라 입고 나왔다. 녀석이 찍어준 주소로 오자 뭔 놈에 술집이 이렇게 큰지 꼭 클럽 같다. 자기는 1층이라는 박지민의 말에 어두운 실내에서 핑크 머리를 찾아 시선이 바삐 움직였다. 겨우 파악된 지민의 위치에 저는 더럽게 구석에도 앉았네라고 생각했다. 제가 자리에 앉자 방금 막 주문을 끝냈다며 녀석을 재잘거렸다. 피곤하지도 않나 대충 고개를 끄덕인 태형이 핸드폰을 꺼내 시계를 보자 곧 열 한시다. 피곤에 쩔어 소파에 기대자 주문하신 생맥주 나왔습니다~라며 익숙한 목소리가 제 귀에 닿는다. 맥주 두 잔을 내려놓는 알바를 빤히 쳐다봤다. 익숙한 얼굴에 제 기억 어딘가 남아 있는 향기. 옛날과 크게 달라진 것 없는 얼굴이지만 좀 더 성숙해지고 더 예뻐졌다. 너도 저를 알아볼까, 별 생각이 다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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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리?"




그 순간 ​뒷머리를 긁적이며 너와 나만 애칭을 내뱉었다. 실수임을 알았으나 이미 내뱉어진 후였다. 저를 바라보는 네 눈이 떨린다. 손끝도 떨리는 것만 같다. 대충 맥주를 둔 너는 호출이 울린다며 테이블을 벗어난다. 그에 박지민이 뭐냐는 눈빛을 보내왔지만 아무것도 닿지도 들리지도 않는 듯 저는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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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베리 크러쉬입니다.
대충 술집 제로에 대해 설명하자면 석진이 놀기 위해 만든 곳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냥 취미로 재미로 하는
또 한 알바생들에게 복지가 좋은데요 근무 시 지켜야 하는 것이나 뭐 몇 가지 이야기 하자면 무조건 유니폼을 입어야 하고 
홀과 주방은 서로 혼돈이 없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인이어를 차고 있습니다. 윤기처럼 주문을 받기 위해 개인 타블렛을 쓸 수도 있고 테이블에 달린 걸 사용 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등장한 스마트 워치는 벨을 누른 테이블을 확인하고 누가 가는지 알려주는 그 정도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세부적인 내용이 나올 때마다 혹은 설명이 미흡한 부분은 이렇게 사족을 달겠습니다, 오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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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오오 태형이 전남친이었군요ㅠㅠㅜㅠㅠ럽라가 누가 추가될지도 기대돼요ㅎㅎ오늘도 재밌게 읽고가요~!!
4년 전
독자2
재미있게 정주행 하고왔습니다~기대되는 작품...!! 기다리고있겠습니다><
4년 전
비회원도 댓글을 달 수 있어요 (You can write a com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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