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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방으로 들어오며 물었다. 나는 그 말에 아무런 반응도 없이 그저 멍청한 시선만 던질 뿐이었다.
창 밖을 한 번 힐끔 바라보곤 브러쉬를 들고 내 옆에 앉았다. 부드럽게 내 몸을 살짝 틀더니 그 상태로 사근사근, 머리를 빗겨주었다.
만족한 듯한 말투. 다정한 목소리. 그래도 나는, 당신에게 속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지금, 나에게 주문을 걸고 있는 거야.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착각하라고.
이튿 날, 그는 거실에서 나를 발견했다. 발갛게 미열에 달뜬 얼굴, 풀린 눈, 잔기침과 쉰 목소리. 감기였다.
여전히 걱정과 다그침이 뒤섞인 목소리. 계속해서 내 머리카락을 넘겨주고 이마를 짚어보는 등, 흔들리는 시선은 어느 한 군데에 정착하지 못하고 당황해 분주하게 계속해서 이동하고 있었다.
그는 이미 열려 있는 부엌문을 눈치챘다. 안절부절 못하는 시선과 가볍게 떨리는 손. 그 손은 내 이마 위로 얹어졌고, 늘 따뜻하던 손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미간이 불만스럽다는 듯 좁혀졌고, 그 손은 다시 내 목으로 올라갔다.
작게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에, 쾌재. 내 꾀에, 그가 속아넘어가기 시작했다.
벽의 시계를 힐끔 바라보며 말하곤, 나를 가볍게 번쩍, 안아들어 2층, 내 방으로 옮겨놨다. 이불은 턱 아래께까지 당겨 덮어주고, 왜 아프고 그래요, 사람 걱정되게... 하며 애잔한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내 왼손을 양손으로 감싸는 것도 잊지 않고.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지만, 되려 그 여파로 머리가 울려, 살짝 비틀거렸다.
손으로 내 머리를 자기 어깨에 기대게끔 하였다. 그렇게 기어어 있다, 살몃, 잠이 들었다. 내 차례가 되었다며 조용히 나를 깨우는 손길에 눈을 뜨고 진찰을 받으러 들어갔다. 더듬거리며 서투른 독일어로 증상을 말했고, 의사는 곧이어 감기라며 비타민을 충분히 섭취하고 푹 쉬라고 진단을 내렸다.
처방전을 받아 약국으로 들어갔다.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아까 약국에 들어오면서 손에 뭐가 묻었던지 계속 찝찝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가 결국엔 손을 씻고 오겠다며 잠깐 자리를 비웠다. 약사가 어색한 독일식 발음으로 내 이름을 불렀고, 나는 그가 쥐어주었던 돈을 건네고, 비타민제를 받았다.
내 부름에 뒤돌아 본 약사는 뭔가 필요한 것이 있냐고 물었다.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의 약사에게 다시, 더듬더듬, 차분하게 말하려 애쓰며 입을 열었다.
그는, 문을 열고 들어온 그는, 아주 능숙하고 자연스러운 독일어를 구사했다.
"여성분께서 당신이 자신을 감금했다고 하시는데."
그는 약사에게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경직된 내 어깨를 자연스럽게 감싸안았다.
내 귓가에, 한국어로 속삭였다. 굴복할 수 밖에 없는 힘. 그것이 그에게는 있었다. 나는 웃었고, 그도 웃었다.
나는 두려움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해도, 그의 시선만은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이렇게 화가 났음에도 그는 절대 언성을 높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더 무서운 것이었다. 조곤조곤. 나를 다그쳐 묻는 말 조차 어딘지 모르게 여유가 있었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질 않았다.
일부러 끊어 말했다. 그에게, 더욱 더 확실하고 선명한 상처를 주기 위해.
그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도톰한 입술은 꽉 다물려 있었고, 길고 풍성한 속눈썹은 눈물에 살짝 젖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어린 아이 같았다. 어태까지 알고 있던 세계관에 혼란을 겪고, 부정 당해 버린 어린 아이. 어쩌면, 어미 잃은 작은 짐승.
"다시 한 번 더 말해줄까요?"
짝. 귀 언저리에서 날카롭게 째지는 마찰음이 들렸다. 그리고 내가 맞았다는 것을 뒤늦게 인지하였다. 물리적 힘에 의하여 돌아간 고개를 바로 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다시 한 번 더 뺨이 얼얼해졌고, 나는 그 반동으로 뒤로 넘어지며 소파 옆의 협탁에 부딪혔다. 그리고, 스탠드며 꾳병이 내 위로 쏟아지는 걸 느끼며 눈을 꼭 감았고, 그게 끝이었다.
*
그가 내 한 손을 자신의 손으로 꼭 쥐고 울고 있었다. 다른 손으로는 계속해서 나오는 피를 수건으로 닦고 있었다.
울음으로 잠긴 목소리로 내게 되물었다.
그제서야 깨달았다는 표정으로 잠시만 기다리라며 어딘가로 달려갔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확인한 상처는, 가벼운 찰과상이나 타박상 정도였다.
그는 대충 유리 파편들을 치워놓고, 소파 아래에 무릎 꾾고 내 상처들 하나하나 정성스레 치료해주려 하였다. 나는 좀 과도하다 싶을 정도의 치료에 그의 손을 저지했다. 그제서야 상반신을 일으키고 바닥을 살펴보았다. 소파 주변의 유리 파편과 그 유리 파편 위의 새빨간 선혈들. 그리고 아까 그가 지나왔던 곳을 따라 난 붉은 핏자국들.
정말 이 정도로 사람에게 미칠 수 있다니. 자신의 발에 유리 파편으로 인해 상처가 나고 피가 흐르는 것은 괜찮다고, 웃으면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도대체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
그러다 문득, 스스로에게 의문이 생겼다. 나는 왜 이 상황에서 그를 걱정하는 걸까. 난 정말 미친 걸까. 아까는 그렇게 부정해놓고 어째서 이제 와 긍정하는 건가. |
안녕하세요, 밤비입니다.
근 2주만에 다시 찾아뵙게 되었는데 그 동안 아무런 말도 없다가 이제야 나타나게 된 점, 정말 면목 없습니다.
구차한 변명이나마 하자면, 사적인 일이 있었습니다. 저에게 일어났다기 보다는 제 지인 분께 일어난 일이지만, 그 여파가 상당히 커서 제게까지 미치더군요.
매번 글이라 칭하기도 민망한, '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조차 민망한 제 끄적임을 읽어주시는 분들께 아무런 말씀도 드리지 못하고 갑작스레 사라졌다 갑작스레 나타난 점, 다시 한 번 사과드립니다.
또, 항상 이렇게 게시물을 맺을 때마다 건강 조심하시라고 당부 인사를 드리는데, 정말, 다시 한 번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건강만큼 중요한 게 없는 것 같네요. 이제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회사원 분들께서도 곧 여름휴가철을 맞이하실텐데 조금만 짬을 내어 건강검진 받아보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이 빙의글의 매력이던 몽환적인 느낌이 사라졌다고 느끼시는 분들이 많으실 거라고 조심스레 예측해 봅니다. 이제 이 빙의글은 후반부에 접어들다 못해 곧 끝이 나기 때문에 몽환적인 분위기 보다는 좀 더 격렬한 느낌을 드리고자 합니다. '어? 뭐야, 이거 왜 급 전개 되고 난리?' 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원래 길어야 10화 정도에서 끝나는 글이었습니다. 어찌보면 시작은 참 원대하게 했으나 끝으로 갈 수록 흐지부지 되어버리네요. 정말 큰 애착을 가지고, 명수 군 특유의 그 미묘한 분위기를 살려내고자 애썼지만, 저는 제가 느끼는 것을 표현할 만큼의 재주는 부여받지 못 했나 봐요. 그래도 늘 읽어주시고, 응원해주시는 분들이 있으시기에 힘내서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하며 항상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6화는 댓댓글을 달아드리진 못했지만 댓글은 전부 하나하나 꼼꼼히 다 읽어 봤습니다. 늘 응원해주셔서, 진심으로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연재하는 동안 이렇게 많은 사건사고가 일어났던 건 Schmetterling이 처음이었습니다만, 쓰기 시작할 때부터 빙의글은 주목 받지 못하는 글잡에서 쓴다는 것 자체가 많이 걱정되었지만, 그래도 한 분이라도 읽어주시고 좋아해주신다면 끝을 보겠다던 각오, 잊지 않고 열심히 하는 밤비 되겠습니다.
제가 쓴 걸 다시 읽어보니 저 조차도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네요... 요점은 죄송하고 감사드린다는 거예요.
매번 드리는 말씀이지만, 이렇게 더운 날, 건강 유의하세요.
그럼 전, 조만간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