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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 한 번 없었다. 메시지 한 통 오지 않았다. 술김의 실수로라도 넌, 어떻게 흔적 하나 남기는 법이 없었다.



밑도 끝도 없이 두 귀 다 닫고 끝을 내뱉은 건 내 쪽인데, 넌 내 말을 그저 지켜주는 것뿐인데. 보란 듯이 수증기처럼 증발해버린 네가 우습게도 한없이 원망스럽다. 맺고 끊는 게 자로 잰 듯 확실한 너를 난 늘 어른스럽다고 칭찬했었는데, 그게 내게 화살이 되어 돌아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으니까.

미웠다. 야속했다. 이젠 그럴 자격도 없는 난데. 비양심의 끝이었다. 그런 소용없는 생각이나 하며 하루하루 너 없는 시간들을 죽여 나갔다. 그래봤자 정작 죽어가는 건 나였지만.



눈을 감아도 네가 선명하다. 이제 난 두 눈을 감고서도 그날, 그 순간을 뚜렷하게 그려낼 수 있다. 네 얼굴에 져있던 짙은 그늘의 명암도, 날 발견하고 말았을 때의 그 절망적인 두 눈동자도.



"내가 다 설명할게. 그러니까 제발……."



그냥 물어보기라도 할걸. 왜 하필 그 시간에 그곳에 있었느냐고. 그러려면 차라리 나한테 들키지나 말지. 나보다 늘 한뼘은 더 크던 네가 그땐 왜 그토록 작아져 있었는지. 도대체 뭐 때문에 그런 슬픈 얼굴로 술이나 붓고 있었는지도.

괜한 고집부리지 말고 맘 좀 열어볼걸. 공연히 후회가 밀려든다. 후회하지 말라던 네 말은, 결국 이런 뜻이었을까.



읽지 않은 메시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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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휴대폰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시계 따위가 된지 꽤 오래됐다. 휴대폰 액정화면이 깜빡 발광할 때마다 혹시나 싶어 부리나케 주머니를 뒤져봤자 와있는 거라곤 고작 입출금 알림, 카카오톡 플러스 친구 메시지들이 전부다. 너 없인 그저 빈 껍데기일 뿐인 내 삶을 이제서야 마주한다. 틈만 나면 두 눈이 일렁거려 애를 먹었다. 휴대폰은 더 이상 울지 않는데, 정작 다른게 엉엉 울고 있었다.



그래도 어째 시간이 가긴 가더라.
그걸 다행이라 해야 할지, 아님 잔인하다 해야 할지.



전화 걸어 털어놓으려다 도로 관뒀다. 네가 내 곁에 있었을 땐 야속하리만치 쏜살같이 흐르던 하루하루가 지금은 거짓말처럼 더디게 느껴져 숨까지 막힌다고. 살이 죄다 내려앉아 볼품 없어진 내 얼굴이 나조차도 꼴 보기가 싫어서, 일부러 온종일 전등불 끄고 사는 내 멍청한 하루에 대해 구구절절 늘어놓는 상상도 해봤다.

안간힘 다 써가며 꾹 삼켜냈다. 어떻게 된 게 요즘은 '안녕하세요'라는 말보다 '괜찮냐'라는 걱정을 더 많이 듣는다는 것도. 그러는 너는 이제 정말 다 괜찮냐는 그 말도. 지금은 추잡한 변명쯤으로 전락해버린 수십 가지 얘기들.



"어머, 여주씨 오늘도 점심 스킵하려구?"
"전 나중에요. 대리님 점심 드시고 오세요."



그럴수록 꾸역꾸역 회사에 나갔다. 쓸데없는 오기가 발동했다고나 할까.

푹 꺼져 퀭한 눈은 제법 볼만했고, 나사 하나 빠진 정신머리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만들기엔 딱 제격이었다. 무슨 일 있냐고, 어디 아프냐고. 좀 쉬지 왜 그렇게 미련하게 구냐고 전부 한 소리씩 거들었지만 내게 다른 차선책 따윈 없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고작 이별 한 번 한 거 가지고 대책 없이 연차를 남발하는 도른자가 될 순 없었다. 그런 치기 어린 시기는 이제 지났다는 걸 잘 아니까. 그리고 사실, 어차피 연차 내고 드러누워봤자 이딴 생각이나 하면서 눈물 뺄 게 안 봐도 뻔했기 때문에.



넌 예전처럼 학교 열심히 다니고 있겠지. 다 잊고 새 출발 했을 거야. 그놈의 페이스북엔 아직도 너 찾는 사람들이 많으려나.

전 한 살 때부터 쭉 한 사람만 좋아했어요

혹시 그럼……그 댓글도 지운 건 아닐까. 그전에 날 지워버렸을지도 모르겠다. 그건 아직 좀 아픈데. 뭐 그런 애석한 잡념들 따위.



그래서 대신, 나는 하루 온종일 의자에 등 딱 붙이고 앉아 일개미처럼 일만 했다. 매번 농땡이 부리며 월급 루팡이나 하던 내가 두 손에 경련이 올 정도로 주구장창 자판을 두드리고, 눈에 불을 켜고서 서류만 수십 가지를 만들어냈다. 하늘이 두 쪽 날 일이었다. 나를 지나치는 사람마다 그런다고 월급 더 안 준다고, 적당히 해두라고 타일러댔지만, 다들 모르고 하는 소리였다. 그건 결국 나를 위한 일이었으니까. 틈만 나면 들이닥치는 네 생각을 버텨내려면, 나는 거북목이 될 각오 정도는 필요했다.



"그럼 오늘도 편의점?"
"그냥, 이게 편해서요. 먼저 다녀오세요."



등줄기 온 전체에 찌릿찌릿 담이 내려앉을 정도로 키보드를 두드리다가도 나는 점심시간만 되면 회사 1층 편의점으로 향했다. 편하다는 건 개뿔. 사실 말도 안 되는 핑계였다.

길게 고민해봤자 결국 김밥 한 줄, 라면 하나 살 거면서. 괜히 몇 번씩 가판대를 뱅뱅 돌고, 그렇게 간신히 고른 음식을 일부러 최대한 천천히 씹어먹고, 숭늉마냥 맹한 얼굴로 괜히 창밖을 두리번대며 시간을 보내다 왔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꽤나 오래.



"3400원입니다."
"……."
"3400원이요."



일전에 말했다시피 머릿속에 잘 늘어져있던 사고회로가 일정 부분 뚝 하고 끊긴지는 좀 됐다. 넋 한 번 제대로 나가서 멍 때리고 있는 날들이 아닌 날보다 더 많았기 때문에.

이렇게 얼빠져 있다 정신을 되찾고 보면 문득 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끊길 꺼면 확실히 끊길 것이지, 아예 기억 없는 바보가 되게 만들지. 구름처럼 둥둥 떠다니는 네 생각으로 괴로운 건 왜 여전한 거냐고.



"……."
"……저기요?"
"……."
"저기요, 손님."
"……아. 어머, 죄송해요. 얼마라고 하셨죠?"



몇 번 더 불리고 나서야 정신이 드는 건 이제 작은 습관쯤으로 자리했다. 그새 내 얼굴 익힌 알바생이 의심 가득한 표정으로 날 빤히 쳐다보는 일 또한 익숙해졌다.

나도 참 웃기지. 굳이 몇 날 며칠을 맛도 없는 인스턴트 라면으로 때우는 이유가 대체 무엇이냔 말이야. 생각을 하고 또 해도 결국 그 이유 하나가 다였다. 그 이유가 전부일 수 밖에 없었다.



"누나. 나야, 진혁이."



널 다시 마주한 것도 이 시간 이맘때 이곳이었으니까. 그날 그때도 내 손엔 매운맛 컵라면 하나랑 얄궂은 참치 김밥 한 줄이었으니까.

그래서 혹시나 하는 미련한 마음에.



"나랑 점심 먹으러 가자."



그 극적인 순간이 은근히 그리워져서. 그래서 어쩌면.



"사랑해. 단 한 번도 변한 적 없어."



진혁이 네 말대로 정말, 내가 지금 후회하고 있어서. 그래서 행여나.



혹시나, 어쩌면, 행여나.

가정형으로 써진 문장엔 자꾸만 무용한 기대가 담긴다. 괜한 바램이 연거푸 따라붙는다. 정작 겉옷 주머니에 든 휴대폰은 여전히 아무런 소리도 내질 않는데, 멍청하긴. 머리가 윙윙 울렸다. 두 눈을 콱 하고 감으려는 순간이었다.



"……저, 저기요!"



그때, 주저앉기 직전의 나를 붙잡는 가느다란 목소리. 아무리 생각해봐도 생소한 그 음성이 귓구멍에 박힌다. 고개를 돌았다. 누군가 내 앞에 서있다. 닿아 있는 그 사람의 두 손이 부자연스럽다. 제 운동화 뒤축으로 애꿎은 아스팔트 바닥을 질질 밀어대고 있는 그 모양새도.



"……저 기억하시죠."



그러니까 너를 아는 나 아닌 또 다른 누군가를 눈앞에서 맞닥뜨린 건, 너 없는 일주일이란 제법 긴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물기 없이 뻣뻣한 편의점 김밥을 마구잡이로 밀어 넣다 급체로 온갖 개고생을 한지 딱 사흘이 지나고 나서의 일이었다. 그 사람의 입에서 흘러드는 마디 마디가 테이프처럼 죽죽 늘어난다.



"저, 저번에 여기 앞에서……한 번 뵀었는데."
"……?"
"진혁……이랑."



덕분에 아직 다 낫지 못한 가슴팍이 다시금 울렁인다. 원인은 간단했다. 그건 전부, 꾹꾹 담고만 있던 네 이름 하나 때문이다. 진혁. 그 이름이 속에 꽉 들어차 도무지 내려가질 않는다.

갑갑한 표정으로 명치 부근을 퍽퍽 내려쳤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눌러가며 부스스 고개를 들었다. 머뭇대는 여자의 모습이 두 눈 가득 담긴다. 그녀를 조용히 관망했다. 잘못 삶은 면처럼 뚝뚝 끊기는 그 사람의 말꼬리를 가만히 주워 담으면서.



"안녕……하세요."
"……."
"진혁이 학교 친구예요."



안녕하지 못해 괴롭기만 한 나를 붙잡고 안녕하냐고 묻는다. 정작 본인도 안녕하지 못한 얼굴을 해서는.

밀물처럼 밀려드는 네 생각 몇 번에 탁해지려던 정신이 이내 맑아진다. 이진혁네 학교 점퍼를 입은 여학생. 그제야 기억이 났다. 여기서 마주쳤던 네 친구들. 괜히 시답잖은 오해로 달밤에 체조했던 그 기억.

그리고……그날의 입맞춤.



"…….아."



생각을 하면 할수록 머리통이 산산조각 날 것만 같다. 하마터면 와르르 무너질 뻔했다. 위태롭던 몸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괜찮으세요?"
"……."



그래, 다시금 깨달았다. 이별이 뭐 같은 건 단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네 이름 한 번에 수십 개의 기억들이 쪼르르 따라붙어서 서로 다시 떠올리라고 떼를 써대니까. 정신줄을 부러 꽉 붙들어맸다.



"우선……죄송해요."



곤란해 미칠 것 같은 얼굴을 해선 제 입술을 마구 물어뜯고 있는 그녀를 나는 그저 빤히 바라보았다. 그럴 뿐이었다. 밑도 끝도 없이 미안하다 고개까지 숙이는데, 나는 되려 입을 꾹 닫았다.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는 표현이 더 맞았다.



"……그게,"



무슨 말을 하려고 그토록 애를 써대는지. 짙은 한숨 한 번 푹 내쉰 그녀가 힘겨이 제 입술을 뗀다.



"……그날 두 분 싸우시는 거 우연히 봤거든요."



가느다란 목소리가 흘러나오자마자, 들으려고 노력조차 안 했던 이야기들이 이제서야 눈앞에 쏟아져내린다.



그게 실은요…

"교환학생 가는 거 때문에 며칠 동안 밥도 안 먹고 고민만 하고 있길래 제가,"



……뭐?



"그러지 말고 한잔하자고 그랬어요. 그거 제가 그런 거에요. 혼자 그러고 있지 말고 다 털어놔보라고. 진혁인 그때도 계속 언니 얘기만 했거든요……전부 제 잘못이에요. 죄송합니다."



그 순간 쏟아져내린 건 분명, 폭우였다. 온몸을 다 적셔 이내 살을 에는 오한이 들게 할 만큼의 차갑고 거센 폭우.








[프로듀스/이진혁] 역전의 연하남 이진혁 10 | 인스티즈





역전의 연하남 이진혁

10.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지도 못한 말들이 눈앞에서 질질 늘어진다. 꾸벅 90도로 인사까지 하는 그녀의 모습이 돌연 흐릿해졌다 돌아왔다 했다. 두 눈동자가 마구 들끓고 있었다. 미련하기 짝이 없는 눈물이었다.



"교수님이 진혁인 꼭 데려가고 싶어 하세요."
"……."
"진혁이 만한 학생도 아직 없고, 진혁이한테도 좋은 기회니까."
"……."
"근데 언제 다시 돌아올지는 몰라요. 더 길어질 수도 있고."



잘 서있던 두 다리가 휘청했다. 지금 이게 다 무슨 소릴까. 내 귀가 지금 제자리에 잘 붙어있긴 한 건가. 절벽을 코앞에 둔 사람처럼 온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걸 나만 몰랐어? 그랬던 거야? 몰랐던 걸 들키기 싫은데, 당황한 표정이 숨겨질 리 없었다. 얼빠진 낯으로 마른 세수를 했다. 착잡함이나 자책의 다른 표현이었다.



"누나도 나 없이 살 수 없지."



그토록 찾아 헤맸던 퍼즐 조각 몇 개를 드디어 찾아냈는데, 기분은 상쾌해지긴커녕 점점 더 땅속을 뚫고 들어갔다. 눈앞에 절벽이 있다면 당장 몸을 내던질 수도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이진혁이 절대 말하지 말랬는데, 죄송해서요. 괜히 찝찝하고."
"……."
"언니한테 말할 자신이 없다더라고요. 너무 쉽게 가라고 보내줄 것 같아서. 언닌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라고."



듣는 내내 쥔 두 주먹에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손끝이 빨갛게 변했다. 하도 깨물고 물어뜯어서 아랫입술에는 시퍼런 멍이 잡혔다.

뭐든 상관없었다.
나는 이제, 너를 잊을 방법을 찾을 게 아니라,



"안 된다고 말해야한다고 몇 번을 말해도, 못하겠대요. 자기 없이 보낼 언니의 시간이 두렵다고. 그새 언니한테 자기가 흐려질까 봐."



너에게 속죄할 방법을 찾아야만 했으니까.

한참 어린 동생을 눈앞에 세워두고 혼자 신파를 찍었다. 울긴 죽기보다 싫어서 애써 고개를 돌리고 부러 눈을 크게 떴지만, 이미 푹 패인 뺨 타고 흐르는 눈물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하염없었다. 덜덜거리는 손바닥으로 이마 언저리를 지긋이 눌렀다. 두통이 길었다.



"어떻게 다시 만난 사람인데. 자긴 도저히 그럴 수 없다고."



생각을 하면 할 수록 방금 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결의 원망이 마음 속에 자리한다. 바보. 그런 생각을 왜 해. 왜 그렇게 나를 몰라.



근데요, 언니.

"사실, 진혁이가 학교 안 나온 지 좀 됐어요. 연락도 안 되고."

신호음은 가는데 안 받아요. 메시지는 답장도 없고.



그제서야, 어떻게 해도 차려지지 않던 정신이 돌연 번쩍 든다.



"그래서 찾아왔어요. 교수님이 혹시 진혁이 어딨는지 아는 사람 없냐고 물어보시는데 생각나는 사람이 언니뿐이라서. 갑자기 와서 죄송해요……."



피가 거꾸로 돌면 죽는다던데, 그렇다면 혹시 나는 진정 죽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엉성하게 꼬여있던 생각들이 제자리를 찾아갈수록 숨통이 끊기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진혁이 에이 밑으로 내려간 적 단 한 번도 없는데 한 번 더 빠지면 비로 내려가거든요."
"……."
"그럼……교환학생 대상자에서도 제외돼요."



이 기분을 굳이 말로 설명하자면, 술 한 방울 먹지 않았는데, 술이 다 깨는 느낌이었다.



"애들이 다 일부러 안 오는 거 같대요."
"……."
"그냥 아무 데도 안 가려고."



……언니 두고는 정말 아무 데도.

눈까지 질끈 감고 읊조리던 그녀의 문장에 드디어 마침표가 찍혔다. 그제서야 죽이고 있던 숨을 다시 내쉬었다. 거칠어진 숨만큼이나 심장이 쉴 새 없이 요동쳤다. 넌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나는 이제 널 찾아내야만 했다.



"그거……가게되면 언제 가는거에요?"



심장이 불끈거린다. 되찾은 너에게 나는 꼭 말해줘야만 했다.



"확정나면 아마……3주? 한 한 달정도 있다가 갈 거에요."



네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나 또한 여기서 기다릴 거라고. 너라면 이제 난 아무렴 상관없다고.

시간이 없었다. 이렇게 허망하게 보낼 순 없었다.








[프로듀스/이진혁] 역전의 연하남 이진혁 10 | 인스티즈











오후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쪼그리고 앉아서 숨만 쉬었다고 해도 무방했다. 우동면처럼 불어터진 두 눈을 감추려고 고개만 푹 수그리고 있다 시침이 6으로 향하자마자 밖으로 냅다 뛰었다. 뒤도 한 번 안 돌고 무작정 달렸다.

지나치는 수만가지 풍경들이 자꾸만 물기 머금은 것처럼 어른어른 거린다. 내가 울 자격이나 있나. 나는 나를 야단쳤다. 부어버린 두 눈 보여주지 않으려 허벅지를 몇 번씩이나 꼬집었다. 애꿎은 두 다리에 멍이 주먹만 하게 들었을 텐데도 눈물은 쉽사리 가시질 않았다. 그 정도의 얄팍한 눈물이 아니었기에 더 그랬다.



무턱대고 달리던 걸음이 한곳에서 멈췄다. 내가 지금 갈 곳은 여기 하나 뿐이라 생각했긴 했었는데, 걷다 보니 정말로 이진혁 집 앞이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비가 내린다. 제법 거센 빗줄기가 온몸에 파고든다.

이런 사소한 순간조차도 너를 불러내고 만다. 우산을 자주 까먹는 나 때문에 제 백팩에 늘 우산 하나는 더 챙겨 다니던 네 모습, 그렇게 다 챙겨올 땐 언제고 정작 비오면 좁은 우산 하나 아래서 찰싹 붙어 있던 우리. 그냥 맘 놓고 엉엉 울었다. 자포자기했다. 어차피 다 젖어서 보이지도 않을텐데.



휴대폰을 꺼내 쥔 손이 파들파들 위태롭게 떨린다. 당장 터질 것 같은 심장 때문에 더 그랬다. 머리보다 손이 더 먼저 기억하는 숫자 열두 자리를 꾹꾹 눌러 담았다. 휴대폰이 요동쳤다. 침 한 번 삼키고, 통화 버튼을 마저 눌렀다. 신호음이 흐른다.



……Rrrr.



신호음이 꼭 내 심장 소리 같았다. 눈앞이 점점 캄캄해진다. 받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이미 차단해뒀으면 그땐 정말 어떻게 할까. 어떻게 널 다시 찾지.



- ……여보세요.



그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신호음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마치 연락해주길 기다리고 있던 사람처럼. 넌 알까. 별거 아닌 그게 나를 참 눈물 나게 한다는 거.

오랜만의 목소리를 듣는다. 익숙한 음성이 나지막히 흘러든다. 시공간부터가 달라진 이 느낌. 고작 대답 몇 글자 그것뿐인데, 추적추적 내리는 빗줄기를 정통으로 맞고 있는대도 그게 딱히 추운지도 몰랐다.



그럼 이제 난, 무슨 말을 해야할까.

내가 미안해.
왜 말하지 않았어.
너 바보야? 나한테 제일 먼저 말했어야지.
학교는 왜 또 안 나가는 거야.



쉴 새 없이 조합하고 굴려봤던 시뮬레이션이란 지금 와선 하나도 소용없었다. 연습했던 모든 말들은 무용지물이었다. 마음속에 딱 하나 남은 말 하나. 그게 지금 할 수 있는 말의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울음을 삼켜 내느라 납작해진 목소리로 나는 결국 찾아낸 그 말을 입에 담아냈다.

너무 써서 차마 삼키지도 못하고, 그러기엔 아직 다 낫질 않아서 뱉지도 못했던 알약 같은 그 말을.



"……보고 싶어."
- ……
"……보고 싶어서 죽을 거 같아."



결국 그 말이 제일 하고 싶었던 거다. 보고 싶다고. 못 보면 죽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그 말. 요동치는 목소리로 울부짖다시피 했다.

너무 보고 싶다보면 정말 죽을 수도 있다니까?

네가 입에 늘 달고 살았던 그 한 마디. 아직 어려서 아무 소리나 하는거라고 뭣 모르고 핀잔줬던 거 미안하다고도 말해야했다, 그 말 뜻을 나도 이제 좀 알 것 같다는 말도 할 걸 그랬다.



내 형편없는 목소리를 잠자코 듣던 녀석이 옅은 한숨을 짓는다. 심장이 툭 하고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손 뻗어 줍기도 전에, 나보다 몇 배는 더 여기저기로 갈라진 목소리가 그 뒤를 잇는다. 다 찢긴 음성으로 네가 다시 물었다.



- ……어디야?
"……너네 집……밑."



어쩌다보니까 여기야. 정말 어쩌다보니까. 눈물이 비랑 섞여 줄기차게 흘러내렸다. 대답은 한참만에 돌아온다.



- 남의 집 밑에서 뭐하고 있어.
"……"
- ……집에 가.



낯설어 숨이 막힐만큼 건조한 네 음성이 가슴팍에 꽂힌다. 곱씹을수록 가슴팍이 에여지는 기분. 차마 찔끔하기 싫어 입술을 꽉 깨물고 참아냈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도 아니고 난 더한 고집도 부렸었으니까. 이대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건 정말 죽기 보다 싫었다.

엉망이 된 입술을 깨물고서 해야할 말을 열심히 주워담고 있었다. 그래봤자 이번에도 네가 더 빨랐다. 내 몰아 쉬는 숨소리를 잠자코 듣던 네가 다시 되묻는다.



- ……밖에 비와?



고작 이 문장 하나 더 물으려고.



"……어? 어……."
- ……기다려.



세 글자 남기고 전화가 뚝 끊겼다. 대답할 새도 없이 이진혁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나는 구석 벤치에 몸을 동그랗게 웅크리고 걸터 앉았다. 주저앉았다는 표현이 더 적절했다. 두 무릎에 얼굴을 폭 묻었다.

이진혁이 정말 나타나줄까. 보자마자 왜 왔냐고 화를 내도 울지 말아야지. 돌아가라고 차갑게 굴어도 당황하지 않을 거야. 아니다, 그런 걸 왜 나한테 먼저 말하지 않았느냐고 누나답게 야단이나 쳐줘야겠다. 지키지도 못할 다짐 같은 거나 했다. 눈앞에 보이는 회색 바닥 타일이 빗물에 짙은 검은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바닥이 세차게 젖어들었다. 그제야 조금 춥다는 걸 깨달았다.

추웠는데, 분명 추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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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뭐해 지금."
"……?"
"비 오잖아."



그때 문득 내 곁으로 둥그런 그림자가 진다. 필터를 씌운 것처럼 순식간에 전환되는 장면. 빗소리는 여전한데, 쏟아지던 비가 단번에 멎었다. 동시에 익숙해서 눈물 나는 그 목소리가 두 귀로 날아든다. 부스스, 그 목소리에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눈물에 얼룩덜룩 해진 얼굴을 가만히 쳐들었다.



"……일어나, 감기 걸려."



파란색 우산을 손에 든 네가 보인다. 우산이 하나뿐인 것마저도 눈물 나게 했다. 우산 들린 손을 내 위로 쭉 뻗은 채로 날 눈에 담고 있는 네가 보인다.

나보다 수십 배는 더 상한 얼굴. 비쩍 말라버린 몸뚱이가 제법 가깝다. 날 향해 뻗은 팔이 열기운에 뜨끈했다. 미간 사이로 잡힌 주름이 만든 인상, 영 개운치 못한 낯빛이 차례로 시야에 잡힌다. 이진혁은 심각하다 할 만큼 핼쑥했다. 냉랭하기 짝이 없게 굴 땐 언제고 아직 걸리지도 않은 내 감기나 걱정하고 있다니. 정작 자기가 몇 배는 더 아픈 거 같은데.



"……일단 이거 입어."
"……."
"……."
"어디 아파?"



내 물음에도 이진혁은 별다른 말이 없다. 입고 있던 제 가디건을 내 어깨 위로 둘둘 둘러주기나 할 뿐. 원래부터 대충 걸치고만 있던 겉옷이었다. 애초에 나 주려고 갖고 온 것마냥.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워 오한이 들 정돈데, 닿인 손길이 따스하다 못해 뜨거웠다.



"아니, 너 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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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추워?"



댕강 말꼬리가 잘려나갔다. 이진혁의 진한 두 눈이 돌연 내게로 팍 꽂힌다. 덕분에 더 물으려다가 입을 꾹 닫았다. 저렇게 쳐다 보면 진짜 할 말이 없어진다. 해야할 말이 분명 스무 개는 더 됐는데, 멍청하게 뭐에라도 홀린 사람처럼 묵묵히 고개만 좌우로 도리질했다.. 바보, 손수 입혀 준 것도 모자라 단추를 아주 목 끝까지 단단히 잠가 줬는데 추울리가 없잖아.



"그럼 됐어."



내 고개짓을 보자마자 그제야 이진혁이 개운한 얼굴을 한다. 그렇게 명료할 수가 없다. 문득문득 어딘가 안 좋은 듯 인상을 팍 쓰는 주제에 대체 뭐가 됐다는 건지. 화를 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는데 순간 덜컥 화가 치민다.



"일단 병원부터 가자니까, 너."
"……."
"아니, 진짜. 너 열 나잖아. 약은 먹었어?"
"……."



얼굴까지 울긋불긋 붉혀가며 열 내봐도 이진혁은 별 말이 없다. 특유의 빤한 두 눈으로 한참동안 그저 나를 바라보기만 할뿐. 정말이지 속이 터진다. 가만 보면 얜 이렇게 쳐다보다 보면 머지않아 내 말문이 턱 하고 막힌다는 걸 알고 이런다니까. 맞다, 완전 정답이었다. 또 머릿속이 돌연 암전됐다.

으아, 너 때문에 또 까먹었잖아. 뭐부터 말하려고 그랬더라? 아, 맞다. 그런 걸 왜 나한테 먼저 말하지 않았느냐고 야단부터 쳐놨어야 했는데 타이밍도 놓쳐버렸다. 나 건망증 같은 거 아직 없는데. 이건 전부 너 때문이다. 그때 네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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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그런데 문득. 심각한 얼굴로 폼 잡을 땐 언제고, 갑자기 이진혁이 피식 웃음을 흘린다. 자조 섞인 웃음이었다. 녀석을 에워싸고 있던 차가운 얼음장이 그제야 와장창 부숴졌다. 이렇게 쉽게 녹을 줄 알았음 더 빨리 와 볼걸. 다 녹은 얼굴이 가까워진다. 지척에서 마주한 얼굴이 많이도 상했다. 타들어가는 이 속도 모르고 열 기운 가득한 손으로 내 손을 가만히 쥐여보는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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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대체 일주일 어떻게 참았어? 진짜 말도 안 된다."



날 눈에 담은 채로 제 자신에게 묻는다. 그건 날 향한 질문이기도 했다. 이런 널 두고 나는 대체 그동안 어떻게 참았던 걸까.



"이제 좀 사는 것 같다, 누나 보니까."
"……."
"잔소리 더 해주라."



싱긋 보란듯이 웃어보인 두 눈이 어여쁘게 휘어진다. 변함없는 다정함. 너무나도 보고 싶었던 그 웃음이 눈앞에서 펼쳐진다.



"아니, 너 병원 가야 된다니까……"
"왜 가? 갈 필요가 없어졌는데."



여전히 시원찮은 얼굴을 해선 내 손을 꼬옥 쥔다. 내 손등 위로 포개어진 네 손. 내 손등을 문질문질 하는 귀여운 습관도 변하지 않았다. 그리웠던 순간들, 그토록 보고싶던 너.



"객기 부려서 미안해."
"……."
"누나 없이 못 사는 건 난데."
"진혁아."



내겐 세상 유일무이한 너를 나는 이제 보내야만 한다.



"나도야."
"응?"
"나도……못 산다고."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
와우 완전 대박 늦게 온 주제에 글 재질 상태까지 너무 Low 그레이드인 것...변명해보자면...매콤보이답게 조금 핫 앤 스파이시한 진혁이도 한번 그려보고 시펐달까요...언제나 사람이 솜사탕 맛일 수만은 없으니깐,,,
근데 네 맛도 내 맛도 아닌 글이 된 것같아 죄송한 마음입니다 ㅠ_ㅠ 진혁 미안 여러분들도 미앙...

그래서 진혁인, 외국을 갈까요~말까요~?
의견 언제나 환영입니다. 어머어머 이걸 또 여러분들께 묻고 있네요? 제가 쓴 건데? 떠넘기긴가?

ㅎㅎ아마 다음 편이 완결일거에요! (소망)
여기까지 함께 달려주신 여러분들 항상 제가 마니마니 사랑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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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작가님...[주디🐰]입니다
이게...얼마만인지요... 입시에 치여 떠내려가다보니 시간이 이렇게.... 연하남 다음편이 완결이라고 할 만큼 시간이 많이 지나버렸네요.... 진짜 애끼는 커플인데.. 이렇게 싸워서 둘다 힘들어하는 모습 보면서 가슴아프다 생각하다가도 여주얼굴보고 금방 웃어버리는 진혁이보고 진짜 좋구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두사람 사이에 사랑이 쌓이고 믿음이 쌓이고 굉장한 기다림을 견딜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면 교환학생도 두렵지 않을 거라 생각해요! 이것이 바로 사랑의힘....(오글) 다음편도 기대할께요!!

•••답글
독자2
신알신 울려서 달려왓어요!! 저번 매콤한 진혁이땜에 진짜 심쿵했었는데 풀어져서 다행이에요퓨ㅠㅠㅠㅠㅠㅠㅠㅠㅠ
갠적으로는 교환학생 갔으면 좋겠는데.. 그런 기회는 쉽게 오는게 아니니까! (너무 현실적인가ㅋㅋ

•••답글
독자3
작가님 덕분에 글잡을 다시 보고...... 매일 쪽지 확인했어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아니 근데 진혁아,,, 진짜 나는 너 없이는 못 살 것 같아 어어엉우우웅ㅇ 오늘 글 읽고 콧물 한 바가지 흘렸습니다 완결이라는 게 넘 아쉽지만 둘 다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좋은 글 읽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해요 작가님
•••답글
독자4
ㅠㅠㅠㅠㅠ 작가님 기다렸어요 ㅠㅠ 진혁아 교환학생 때문에 그랬던거구나 말을하지 ㅠ 말을해야 가든 말든 결정을 할거 아니야 ㅠㅠ 둘 다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된다는걸 깨닫게되는 계기가 된거같아요 둘이 만난 모습보는데 너무 안심되구 기뻐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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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5
으악 자까님 기다렸어요ㅠㅠㅠㅠㅠㅠㅠㅠ진혁아 그런건 말을해야지ㅠㅠㅠㅠㅠㅠㅠㅠㅠ그래도 다시 만났다ㅠㅠㅠㅠㅠ휴ㅠㅠㅠㅠㅠㅠㅠㅠㅠ 교환학생 가야겠죠오ㅠㅠㅠㅠㅠㅠㅠㅠㅠ
•••답글
독자6
작가님....... 또 제 눈물파티를 개최해주셨군요..... 전 심지어 군대 가는 거 아니냐고 예측했던 이인데요... 교환학생이라는 말 보고 안심할 뻔 했답니다.. 마음만은 절대 안 갔으면 좋겠지만.. 창창한 대학생의 미래를 위해서는 보내줘야겠죠...ㅠㅠㅠㅠㅠ 눈물바람으로 배웅할 준비하면 되나요.. 아 저는 [여우비]입니당 완결..이 다가온건가요 아쉽고 슬프고.. 마음의 준비 하고 있을게요 작가님 ㅠㅠㅠㅠ
•••답글
독자7
신알신 뜨는거 보고 달려왔습니다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다른 이유가 아니라서 다행이기도 하고 또 헤어지는거 보기가 힘들거 같아서 눈물 날 거 같아서 걱정이기도 해요ㅜㅜㅜㅜㅜㅜㅜㅜㅜ좀 더 길었으면 좋겠다 싶네요ㅜㅜ 질척 거려서 죄송하구 완결ㅜㅜ 마음의 준비를 하구 기다리고 있을께요 작가님ㅜㅜㅜ
•••답글
독자8
여주야 진혁이랑 같이 갑시다!!!! 는 너무 터무니없죠ㅠㅠㅠ알아요ㅠㅠㅠㅠㅠ 그런데 진짜 작가님 분명히 제가 암호닉이 있었을텐데 뭔지 까먹어서요ㅜㅠ 지금까지 예쁜 글 선사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ㅠㅠㅠㅠ
•••답글
독자9
작까님... 재회하게 해주셔서 감삼다....감삼다..!!ㅠㅠㅠ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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