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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담톡 상황톡 공지사항 팬픽 만화 단편/조각 고르기
김남길 몬스타엑스 강동원 이준혁 엑소
공 백 전체글ll조회 2474l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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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채화 (水彩畵)
w. 공 백





제 一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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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택의 최종 절차인 삼간택이 열리는 날. 식사하는 모습을 포함하여 세자빈의 여러가지 자질을 심사하는 재간택과는 다르게 삼간택의 후보자는 단 3명에 불과했고, 심층적인 질문들로 심사가 마무리되었기에 오전 중으로 세자빈이 최종적으로 결정되고는 했다. 대왕대비를 비롯한 왕실의 어른들이 심사한 결과, 사헌부 대사헌 김수혁의 여식인 김여주가 세자빈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대사헌의 측근인 조카가 정혼자가 이미 있었던 여주의 사정을 언질해주었던 터라 여주를 보는 대왕대비의 눈빛에는 측은함이 가득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채로, 제 앞에 앉은 종실제군과 왕실 내외명부 여인들에게 절을 올리는 여주의 뒷모습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아스라했다.

세자빈으로 간택되는 그 순간부터 집으로 가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었기에, 간택된 여인은 궁 안에 마련된 별궁에서 혼례날이 되기 전까지 궁중 예법을 배워야만 했다. 여주 또한 점심 수라를 물리고 지정받은 별궁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미색의 비단 저고리에, 보라색 바탕에 연보라색의 제비꽃이 수놓아진 치마를 곱게 차려입은 채로 바삐 걸음을 옮기던 여주의 앞을 누군가가 가로막는다. 짙은 남색에 금색 자수가 수놓아진 곤룡포가 눈에 들어왔다. 세자 저하. 그녀의 뒤에 시립해 있던 최 상궁이 급히 고개를 숙인다. 갑작스러운 세자의 등장에 여주 또한 덩달아 고개를 숙일 때였다. 그녀의 턱을 아프지 않게 쥔 세자가 강제로 고개를 들어올려 저를 보게끔 만든다. 제 턱을 쥐고 얼굴을 이리저리 훑는 세자의 두 눈에는 아무런 감정도 깃들어있지 않았다. 일말의 호기심마저도. 그 무감정한 눈빛과 무례한 행동에 기분이 상한 여주가 놓아달라고 말을 꺼낼 때였다.



“ 놓아주십, ”

“ 그대가 이번에 새로이 간택된 세자빈이오? ”

“ … 그렇습니다만. ”



여주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은 채로 세자가 물음을 던진다. 물론 턱을 쥔 손은 그대로였다. 다시 한 번 놓아달라고 말을 하려 했지만, 싸늘한 눈빛을 내쏘고 있는 태형의 눈을 보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예의 그 무심한 눈으로 여주를 가만히 쳐다보던 태형이 별안간 그녀의 귓가에 제 입술을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 세자의 숨결이 가까워지자 여주의 몸이 뻣뻣하게 굳는다. 그런 그녀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세자가 그녀의 귓가에 대고 잔인한 말을 속삭이기 시작했다. 그대가 하나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는데.



“ 나는 절대, 그대를 연모하지 않을 것이오. ”

“ … …. ”

“ 그대를 품는 일 또한 없을 것이오. ”



그러니 … 기대 같은 건, 하지 않는 것이 좋소. 사무치게 다정한 목소리로 한 말에는 가시가 잔뜩 돋아 있었다. 저만큼이나 세자 또한 혼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자신도 혼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자신에게는 이미 정혼자가 있었다는 말을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제 앞에 선 사내는 일반 사내가 아니었다. 태초부터 한 나라를 지배할 운명을 타고난 세자였기에, 그에게 말을 함부로 했다가는 제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하고싶은 말들을 저 마음 아래로 눌러낸 여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 잘 알아두겠사옵니다. 이만 가봐도 되겠사옵니까. 하고싶으신 말은 다 끝내신 듯 한데. 상처를 받았을 것이란 제 예상과는 다르게,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제게 말해오는 여주에 고요하던 태형의 눈동자에 흥미가 떠올랐다. 생각보다 여리기만 한 여인은 아닌 듯 했다.



“ 가보시오. ”



흥미롭다는 눈빛을 구태여 숨기지 않은 태형이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이내 여주의 턱을 쥐고 있던 손을 놓은 태형이 고개를 까닥이고는 저 또한 동궁전으로 향했다. 세자의 곤룡포가 제 눈 앞에서 사라지자 여주는 이제야 긴장을 푼 듯,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빈궁마마, 괜찮으시옵니까. 걱정스러운 말투로 제게 말해오는 최 상궁에 여주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네. 괜찮다고 한 말과는 다르게, 제 마음속은 내내 안 괜찮다며 불만의 목소리를 내지르고 있었다. 세자의 빙벽같은 성정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으나, 저렇게 날을 세우고 달려들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느정도 혼인에 대해 회의적일 거라곤 생각했지만 … 저러실 줄이야. 씁쓸한 듯 입꼬리를 말아올린 여주가 별궁으로 발걸음을 옮겨내었다.



/



시간이 어느정도 흘러, 어느덧 세자가 별궁으로 납시어 세자빈을 맞이하고 함께 궁으로 돌아오는 친영의식이 있는 날이 되었다. 이른 새벽부터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하고, 홍원삼을 걸친 여주가 최고상궁 김씨의 억센 손에 이끌려 면경 앞에 앉았다. 이른 새벽부터 일어났던지라 졸음이 쏟아지는 기색이 역력한 여주의 얼굴에 하얀 진주 가루로 분이 칠해짐을 시작으로 해서, 본격적으로 화장이 시작되었다. 곧이어 붉은 꽃잎을 갈아 만든 연지를 입술에 바르고, 하얀 볼에 연분홍빛의 옅은 연지를 올린 후에 단정히 쪽진 머리에 대수머리를 얹는다. 생각보다 많이 무거운 가채의 무게에 여주가 굳이 얹어야 되는 것이냐며 옆에 앉은 이 상궁에게 조심스레 물어보았지만, 대답 대신 열 개는 족히 넘을 듯한 갖가지 비녀와 떨잠들이 가채 위에 꽂혔다. 울상을 지으며 제 머리에 하나둘씩 얹어지는 장신구들을 바라보고 있던 여주의 귓가에,드디어 다 되었다는 이 상궁의 말이 들려왔다. 조심스럽게 들여다 본 면경에는 긴장한 태가 많이 나는, 어여쁘게 단장한 자신이 있었다. 면경 속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그녀가 무언가 궁금해진 듯, 이 상궁을 불러내었다.



“ 저기, 이 상궁 …. ”

“ 네, 마마. 하문하시옵소서. ”

“ 혹시 오늘 날짜가 어찌 되는지 아는가? ”

“ 잎새달(4월) 닷새(5일) 이옵니다. ”



잎새달 닷새라. 자신과 석진의 혼례가 예정되어 있었던 날이었다. 만약 자신이 초간택에서부터 떨어졌었더라면 석진과 예정대로 혼례를 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 석진과의 혼례였다면 자신의 기분이 이렇게 가라앉아 있지는 않았을 텐데. 여주는 되려 기쁜 마음으로 활옷을 입었을 테고, 우울한 표정보다는 말간 웃음을 띄며 치장을 했을 것이었다. 허나 세자와의 가례를 위해 준비하는 제 얼굴에는 억지로 치장하는 기색이 만연했다. 웃음이 그려졌어야 할 입매는 축 처져서 올라오지를 않는다. 어쩌다 이리 되었을까. 어쩌다 … 그 모든 것이 이렇게 꼬여 버린 것일까. 여주의 흰 손이 붉은 치마를 움켜쥐었다. 울음을 참으려 치맛자락을 세게 그러쥐었던 탓에 손이 부들거리며 떨려온다. 어느새 먼 동이 터오고 있었다. 창 너머 들어온 이른 아침의 햇살이 그녀의 머리에 꽂힌 자수정 비녀에 부딪혀 산산히 부서졌다. 일각(15분)이 지났을까. 문 바깥에서 별궁의 적막을 깨뜨리는 낯익은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여주 낭자. ”



다정하고 사무치게 그리웠던 목소리가 창호지를 덧바른 문 밖에서 들려왔다. 환청인가 싶어 면경을 멍하니 들여다보는 것을 그만두고는 굳게 닫힌 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해가 완연히 다 뜬 것인지, 햇빛이 쏟아져 들어와 문에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낭자,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소곤대며 말해오는 석진의 목소리에 여주가 고개를 돌려 방구석에 앉아 있던 이 상궁을 쳐다보았다. 대왕대비 박씨가 미리 석진에 대한 언질을 해놓았던 듯, 이 상궁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잠시 나가있겠다고 하며 문을 열었다. 이 상궁을 비롯한 나인들이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평소에 입는 푸른색 관복과는 달리 붉은 예복을 입은 석진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평소와 다름없이 저를 향해 다정히 웃어보이는 석진에 그와 눈이 마주진 여주가 울상을 지었다. 그가 방 안으로 들어오고 나자 바깥에서 문이 닫힌다. 여전히 입가에 웃음을 띄운 채로, 여주의 앞에 앉은 석진이 입을 열었다.



“ 어여쁘십니다, 낭자 … 아니, 이제 빈궁마마라고 불러야 하나요. ”

“ … 웃음이 나오십니까, 나으리. ”

“ 빈궁마마께오서 이리 고우신데, 웃음이 안 날 리가 있겠습니까. ”

“ 나으리. ”



제 속이 말이 아닐텐데, 석진은 잘도 웃으면서 어여쁘다고 말해온다. 그것이 속상했던 탓인지 여주의 두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결국은 눈물이 붉게 연지를 바른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만다. 그녀의 앞에 앉아 한없이 다정한 눈길로 그녀를 보던 석진이 조심스럽게 눈물을 닦아 주었다. 울지 마십시오. 곱게 화장한 것이 다 지워지지 않습니까. 길게 뻗은 엄지 손가락으로 찬찬히 여주의 볼을 닦아내던 큰 손으로 그녀의 볼을 감싼다. 곧이어 제 볼을 다정히 어루어만지는 석진에 여주가 터지려는 울음을 막으려 입 안의 여린 살을 세게 짓씹었다. 울음을 참는 것이 여실히 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석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우리가 조금 더 일찍 혼례를 올렸더라면, 이리 곱게 차려입은 낭자의 옆은 제가 차지했겠지요. ”

“ … …. ”

“ 후회는 하지 않습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 아닙니까. 이제 와서 지난 일을 후회하는 것이 무에 쓸모가 있겠습니까. ”

“ … 나으리. ”

“ 저는 … 잠시나마 그대를 마음에 품을 수 있어서 ”

“ … …. ”

“ 행복했습니다. ”



당신을 온 마음을 다해 연모한 것. 그것만으로도 저는 만족합니다. 보잘 것 없는 제게는 너무나도 과분하고, 제 옆에 머물러 있기에는 아까운 그대가 아닙니까. 낭자는 아무래도, 제 부인의 그릇이 아닌 세자빈의 그릇이었나 봅니다. 말을 끝마치며 나직하게 웃음을 터뜨린 석진이 여주의 눈꼬리에 매달린 눈물을 손가락으로 훔쳐내었다. 그러니까 그만 우십시오. 좋은 날이지 않습니까. 손을 거두는 대신에 석진이 그녀의 입꼬리를 위로 끌어올렸다. 이렇게, 웃으십시오. 환하게. 말하면서 덩달아 저도 미소를 지은 석진이 말을 이었다. 낭자는 웃는 것이 더 어여쁘십니다. 그의 말에, 여주가 푸스스 웃음을 터뜨렸다. 웃는 것도 잠시, 문 바깥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소리가 나더니 최고상궁 이씨의 목소리가 문을 넘어 들려왔다.



“ 빈궁마마, 나가셔야 합니다. ”

“ … 알았네. ”



나가야 한다는 말에, 석진이 품 안에서 나비 모양의 떨잠을 꺼내어 여주의 가채 뒤쪽에 조심스러운 손길로 꽂아주었다. 은색의 몸통에 알알이 박힌 보석에 햇빛이 비쳐 사방으로 온 빛을 흩뿌린다. 무엇입니까? 여주가 궁금하다는 듯이 석진을 보며 질문을 했다. 나비 모양의 떨잠입니다. 원래는 혼례식 전에 주려고 하였던 것인데, 아시다시피 상황이 이리 되지 않았습니까. 가채에 꽂힌 떨잠을 두어번 매만진 석진의 얼굴에 일순 씁쓸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혹여라도 여주가 볼까 싶어 그 표정을 단숨에 지워낸 석진이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다. 자꾸만 바깥에서 헛기침을 하며 가야한다고 무언의 압박을 주는 이 상궁에 석진이 여주의 손을 잡아 자리에서 일으켜 주었다.



“ 가십시오, 낭자. 세자 저하께오서 기다리실 것입니다. ”



시무룩한 표정을 한 채 저를 올려다 보는 여주에 석진은 자꾸만 축 처지려는 입꼬리를 끌어당겨 환히 웃어보였다. 자신까지 이 상황에서 우울해 한다면 그녀가 미안해 할 것이 뻔했기에. 그렇기에 석진은 더더욱 활짝 웃을 수밖에 없었다. 놓기 싫은 석진의 손을 놓은 여주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어 문 쪽으로 향했다. 낭자. 문을 열기를 망설이던 여주의 뒤에 서있던 석진이 조용히 그녀를 불러내었다. 그의 부름에 느릿한 발걸음이 문에서 몇 발짝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멈춰선다. … 행복하셔야 합니다. 답지 않게 석진의 목소리는 울음을 참는 듯 했다. 그의 애닳은 어투에 여주는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빈궁마마, 어서 나오셔야 합니다. 이 상궁의 재촉에 알겠다고 대답한 여주가 돌연 몸을 돌려 석진에게로 빠르게 다가갔다. 돌아서서 다가온 그녀에 놀랄 틈도 없이, 여주의 입술이 느릿하게 제 볼에 닿았다 떨어진다. 물기어린 눈으로 석진을 쳐다보던 그녀가 그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을 해온다. 앞으로도, 저랑 둘이 있으실 때는 낭자라고 불러주세요.



“ … 부탁입니다. 나으리에게까지는, 세자빈이고 싶지 않아요. ”



처연한 그 표정에, 석진은 어느샌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더랬다. 안심한 듯 옅게 웃은 여주가 이내 돌아서서 문 밖으로 나섰다. 금방이라도 풀썩 쓰러질 듯한, 무거운 대례복을 걸치고 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석진의 얼굴에서 점점 웃음기가 사라진다. 생각보다 의연히 잘, 보내주었다고 생각했는데. 제 마음은 아니었나보다. 여주의 입술이 스치고 지나간 제 볼을 매만지던 석진이 이내 바람 빠지는 웃음 소리를 내었다. 마음이 있다고 한들 어쩌겠는가. 이미 세자 저하의 여인인 것을. 고개를 두어번 저어 여주에 대한 생각을 애써 떨쳐낸 석진이 세자의 혼례에 참석하기 위해 방 바깥으로 나섰다.



/



여주를 태운 가마가 경복궁 앞에 멈춰섰다. 궁으로 오는 길 내내 여주는 창백한 낯빛을 하고 치맛자락을 쉴 새 없이 만지작대고 있었더랬다. 긴장을 생각보다 많이 했던 탓이었다. 붉은 치맛자락을 움켜쥔 그녀의 시야를 가리고 있던 가리개가 올라간다. 가리개가 올려지자마자 가마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에 눈이 부시다. 잠시동안 인상을 찡그리고 있던 여주의 눈 앞으로 큰 손이 불쑥 내밀어 진다. 잡으시오. 면류관을 쓰고, 검정색 구장복을 입은 세자가 제 앞에서 저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제게 내밀어진 손을 가만히 쳐다보던 여주가 이내 제 손을 태형의 손에 겹쳐 올렸다. 맞잡은 손이 태형의 외관이나, 목소리에 비해서는 따뜻하다는 생각을 하며 내린 그녀가 가마 옆에 서있던 이 상궁이 쥐어준 규를 두 손으로 잡는다.

세자와 두 번째 세자빈의 가례는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북벽단 전안석에 세자가 기러기를 올려놓는 전안례가 마무리되고, 태형과 여주가 단 앞에 늘어선 문무백관과 종친들에게로 돌아선다. 붉은 예복을 입고 저와 세자에게로 고개를 조아리는 신하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사이로, 홍문관 대제학의 뒤에 서있는 석진이 여주의 눈에 들어왔다. 하례를 올린 석진이 고개를 들어 태형과 나란히 선 그녀와 눈을 맞춰온다. 행복하십시오. 원래대로라면 제 옆에 서있어야 했을 석진이 다른 사내와 자신과의 혼례를 축하해주는 건 … 상상 이상으로 잔인한 일이었다. 석진에게도, 저에게도.



“ 빈궁. ”

“ … 예? ”

“ 안색이 좋지 않은데, 괜찮은 것이오? ”



석진에 대한 생각들이 여주의 머릿속을 좀먹을 무렵, 가례는 드디어 연회만을 남겨놓고 있었다. 웅장한 북소리와 함께 여령들의 춤사위가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좀처럼 연회에 집중하지 못했다. 세자와 세자빈이 앉은 상석의 양 옆으로 배치된 문무백관들의 자리를 흘깃거리며 창백한 안색을 하고 있던 여주에게로 태형이 괜찮냐는 물음을 던진다. 나직하게 물어오는 목소리가 일전 자신에게로 말해오던 목소리와는 다르게 꽤나 다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으로 석진을 찾던 그녀가 고개를 돌려 제 옆에 나란히 앉은 태형을 쳐다보았다. 차가운 눈동자를 한 태형과 눈이 마주치자, 제 생각은 착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 … 아무것도 아닙니다. ”



한참을 있다가 흘러나온 답에 무심한 눈길로 여주를 내려다보던 태형이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게 물은 질문은 그저 예의상 했던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면 그렇지. 입 밖으로 터져나오려는 한숨을 삼킨 여주가 연회에 집중하려 저 또한 고개를 돌릴 때였다. 저 멀리 젊은 문무백관들이 자리한 곳에 앉아 묵묵히 술잔을 비워내는 석진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평소 술을 좋아하지 않아 입에도 대지 않던 그였기에 그 모습은 여주에게는 꽤나 낯선 것이었다. … 많이 힘든건가. 목구멍이 타는 듯한 쓰라림에 미간을 찡그리면서도, 술잔을 채우고, 비우는 것을 멈추지 않는 석진에 여주의 표정 또한 찌푸려진다. 그가 그러는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속이 더 상해왔다. … 그만 마시지. 속상함으로 똘똘 뭉친 속내는 결국 말이 되어 입 밖으로 튀어나오고 만다. 워낙 작았던 목소리였기에 멀찍히 서 있던 내관들과 상궁들에게는 가 닿진 않았지만, 옆에 앉은 태형은 충분히 들을 수 있었다. 연회가 지루했던 탓에 나른한 눈초리를 한 태형이 고개를 돌려 제 옆의 세자빈을 쳐다보았다.



“ 누구를 보는 것이오? ”

“ 아닙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 ”

“ 그대가 다른 사내를 보는 건 싫은데. ”



몸을 제게로 기울여 목소리를 낮추지도 않고, 낯간지러운 말을 해대는 태형에 여주의 얼굴이 당황한 듯 발갛게 달아오른다. 이래봬도 내가 질투가 조금 많은 터라. 한 쪽 입꼬리를 끌어올려 미소를 지어보인 태형이 다시 몸을 바르게 일으킨다. 태형의 목소리가 꽤 컸던 탓에 이미 왕실의 어른들은 새로운 세자 부부가 금슬이 참 좋다며 이야기하기 바빴다. 이런 반응을 의도한 건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저와 태형을 바라보는 그들에 여주는 어쩔 수 없이 부끄러운 듯 웃어 보였다. 어느새 연회는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연회가 끝난 뒤에는 … 세자와 세자빈의 동뢰연과 합방이 이루어질 터였다.

해시(오후 9시~11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세자와 세자빈이 동뢰연을 마치고 합방에 들어가야 할 시간이었다. 그러나, 합방이 이루어져야 할 동궁전은 여전히 소란스럽기만 했다. 합방을 하는 데에 당연히 있어야 할 세자가 면류관을 덩그러니 남겨둔 채로 구장복을 입고 감쪽같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강 내관을 포함한 내관들과 상궁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세자가 있을만한 곳을 둘러보았지만, 해시가 지나도록 태형의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가 없었다. 동궁전 깊은 곳, 방 한구석에 차려진 술상 앞에 홀로 앉은 여주의 그림자가 호롱불에 비춰져 문에 그려졌다.



“ 빈궁마마, 대례복을 벗으시옵소서. ”

“ … 저하를 못 찾은 것인가? ”

“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 그렇사옵니다. ”

“ … 어쩔 수 없구나. ”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쉰 여주가 제 머리 위에 무겁게 얹혀 있던 장신구들을 빼내기 시작했다. 도와주겠다는 상궁을 저지하며 천천히 장신구를 빼내던 그녀의 손 끝에 나비 모양의 떨잠이 잡혔다. 아마도 석진이 꽂아준 것일 터. 입매를 굳게 다문 여주의 망막에 제게 행복하라고 말해오던 석진과, 허탈한 표정으로 술을 계속해서 제 입 안으로 털어넣던 석진이 교차되어 떠올랐다. 계속해서 제 머릿속을 유영하는 석진에 대한 생각에 눈물이 고인다. 떨리는 손으로 무거웠던 가채를 머리에서 내려 바닥에 조심스레 둔 여주가 술상으로 눈길을 돌렸다. 세자와 함께 마셨어야 할 합환주가 올려진 상은 이미 저만치 구석으로 밀려나 있었다. 제게 마음을 주지 않겠다던 태형의 말은 정말로 사실이었나 보다.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던 연회에서의 그 말 또한 거짓임에 틀림없었다. 대례복을 제 손으로 벗어내린 여주가 석진이 준 나비 떨잠을 손에 꼭 쥐고는 금침을 파고들었다. 감은 두 눈에서, 미처 참아내지 못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Epilogue



“ … 여기 있었느냐? ”



세자의 가례 때문에 미처 걷지 못한 빨래를 걷어내기 위해 바삐 움직이던 손이 일순 멈췄다. 귀에 익은 낮은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월혜의 앞에는 구장복을 입은 태형이 장난스레 웃고 있었더랬다. 세자 저하? 여긴 어찌 …. 지금쯤 세자빈과 합방에 들어갔어야 할 태형의 등장에 놀란 듯 그녀의 목소리가 커졌다. 쉿. 목소리를 낮추라는 듯이 제 검지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댄 태형은 어느새 제 앞으로 성큼 다가와 있었다. 그건 잠시 내려놓고, 이리 오거라. 월혜의 손에 들린 옷가지가 든 바구니를 옆의 평상에 내려놓은 태형이 부드럽게 그녀의 손을 잡아 그녀의 처소 안으로 이끌었다.



“ 빈궁마마와 합방에 들어가셔야 하는 분이, 왜 여기에 …. ”

“ 네가 보고 싶어 온 것이다. 오늘 하루종일 못 봤지 않느냐. ”

“ 그래도 …. ”



수려한 얼굴로, 제가 보고싶어 왔다고 말하는 세자에 월혜의 얼굴이 붉게 물든다. 성정이 칼같다고, 한 치의 흔들림도 없다고 소문난 세자는 유독 제 앞에서 느슨하게 풀어졌다. 나른한 표정을 한 태형이 그녀의 어깨에 제 얼굴을 묻었다. 종일 뻣뻣하게 있었더니 힘들구나. 잠시만 이러고 있어도 되겠느냐? 태형의 물음에 월혜는 대답 대신 조심스레 손을 들어 태형의 등을 토닥였다. 긍정의 표시에 태형이 희미하게 웃음을 터트린다. 몇 분이 지났을까. 이제는 진짜 가야 한다며 월혜가 태형의 팔을 톡톡 건드릴 때였다. 여전히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띄운 채로,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은 태형이 자신에게로 그녀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놀랐는지 동그랗게 눈을 뜬 월혜가 귀엽다는 듯 웃은 태형이 그녀에게로 고개를 숙였다. … 놀라지 말거라. 다정히 속삭인 그가 이내 월혜의 아랫입술을 아프지 않게 물었다. 곧이어 부드럽게 입을 맞춰오는 세자에 월혜가 눈을 감고 그의 옷깃을 그러쥐었다. 제 입 속을 이리저리 헤집는 태형에 정신이 아득해진다. 어느덧, 자시(오후 11시~새벽 1시)를 알리는 종이 울리는 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왔다.










/

정신없이 쓰고 나니 벌써 한시가 넘었네요!
애들 컴백까지 내일부터 머리풀고 달릴 예정 '^' 
오늘 뜬 거 궁예 조금 하다가 잘까봐요! ㅋㅋㅋㅋ
암호닉은 정리해서 다음 화에 올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꿈 꾸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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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와 떴다 선댓이요
4년 전
독자5
프리지아임다! 아니 여주랑 석진이랑 이 나라 뜨는 방법 없나요ㅠㅠㅠ 앗쉬 태형이 너 그렇게 순간 설레게할건 뭐람!!ㅠㅠㅜㅜㅜㅠㅠ 너는 월혜인가 뭔가하는 그 친구랑 잘 해보고 나중에 석진이랑 여주랑도 몰래 만나는거 눈치주는일 없어야해!!ㅠㅠㅠ여주 아프지 말자ㅠㅠㅠㅜㅠㅠㅠ
4년 전
독자2

4년 전
독자3
반짝반짝진이별입니다! 다시봐도 석진이 너무 짠내나네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 오랜만에 글 보는데 감회가 새록새록해요 작가님 오래 기다렸어요๑̑◡・̑๑
4년 전
독자4
[물오름 달 아흐레]
안녕하세요 작가님💜진짜 볼 때마다 안타까운 여주와 석진이의 아픔은.. 이루 말할 수가 없네요.. 여주가 조금만 힘들어했으면 좋겠습니다🥺보는 내내 맘 아파서😭😭
작가님 잘 돌아오셨습니다 탄이들 컴백 전까지 함께 달려보아요😉

4년 전
독자6
핫초코입니당...홍홍홍
아무리 봐도 석진이랑은 눈물이 앞을 가리네... 타이밍이 너무 비극적이야ㅜㅜㅜ 빨리 식을 올렸어야 했는데ㅜㅜㅜ

4년 전
비회원72.238
진이 입니다!!!
달려주신다니 너무기뻐요!!!

하ㅠㅠ 여주입장에자꾸감정이입해서 애간장이엄청타고 가슴이 아프고그래요

재밌게잘읽엇습니다
담에 또봬요💜

4년 전
독자7
선댓이여!!!
4년 전
독자8
[청포도]입니다!!!
ㅠㅠㅠㅠㅠ징챠 다시봐도 여주 징챠ㅜㅜㅜㅜㅜㅜㅜ너무 짠해요ㅜㅠㅠㅠㅠㅠㅠ다음화가 기다려져요!! 오늘도 잘읽고 갑니다!!

4년 전
독자9

4년 전
독자10
쿼카에요 ㅠ ㅠ ! 불면증이 도움이 될 때도 있군요 ,,, 그나저나 월혜 너어 ... (부들부들) 벌써부터 다시 월혜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오르네요.. 여우같은 것.. 아 앞으로 스토리에서는 다르게 갈 수도 있쥐만요..ㅎ헤 오늘도 잘 읽고 갑니다 !
4년 전
독자11
문라이트입니다! 진짜여주 너무 안타까워요ㅜㅜㅜ월혜...,조금씩 미워질 것 같네요..,ㅜㅜㅜㅜ잘읽고가용!
4년 전
독자12
슈가나라에요!!! 다시 봐도 석진이랑 여주 너무 마음아파요ㅜㅜㅜ 둘이 떠났으면 하는데 또 그러기엔 태형이가 걸리고... 태형이랑 이어지자니 또 석진이가 마음에 걸리고...
4년 전
독자13
리본이에요!! 여주가 너무 맘아파서 글 몇 번이나 읽었어요ㅠㅠㅠㅠ흑 몰입도 최고입니다...
4년 전
독자14
새싹이입니다!!!다시봐도 여주와 석진이의 짠내가ㅠㅠㅠㅠㅠ다시봐도 너무 내가 다 슬프구ㅠㅠㅠㅠㅠ 이번편도 잘 읽고갑니다!
4년 전
독자15
작가님 ㅠㅠㅠㅠ 너무 서러워요 석진이랑 있었으면 행복했을텐데 여주는 아웃오브 안중인 태형이랑 ㅠㅠㅠㅠㅠ 태형이는 고마 월혜랑 살고 여주 도망칩시다ㅠㅠㅠㅠㅠㅠㅠ 세자비고 뭐고 알게뭐야 석진이랑 튑시다우리ㅜㅜㅜㅠㅠㅠㅠㅠㅠㅠㅠ 서러워서 몽살갰네 작까님은 절 1회 만에 울리셨어요 아주 천재ㅏㅈㅇ짱맨
4년 전
비회원69.196
와 진짜 아거 대박 감사해요 ㅠㅠㅠㅠ 전 처음 보는데 감정이입 대박이에요 월혜.. 잘 눈여겨보겠습니다 석진 여주 너무 애틋하고 마음 아파요 ㅠㅠㅠㅠ 매일 수채화만 기다리구잇슴다...
4년 전
독자17
벽성입니다! 아무리 다시 봐도 석진아ㅜㅜㅜㅜㅜ엉어우ㅜㅜ
4년 전
독자18
정꾸입니다! 아니...진짜ㅠㅠㅠ석진여주만 보면 눈물나는 거 어떡하죠ㅠ(짠내폭발)ㅠㅠㅠㅠ
4년 전
독자19
작가님 오랜만이에요 ㅜㅜㅜ 잘 보고갑니다 !!!!
4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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