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敵國의 皇后 六



"달에는 붉은 색이 어울리지."

"갑자기 웬 붉은 색입니까?"



분칠한 여인네보다도 흰 피부에 곱상하게 생긴 사내는 고운 외모와 상반되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붉은 꽃을 만지작거렸다. 여린 꽃잎이 그의 긴 손가락 안에서 바스러지자 사내의 허리를 야살스럽게 지분대며 기대있던 기생, 초선은 애교가 가득 흐르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이 꽃의 이름이 뭔지 아느냐."



그러나 사내는 평범한 자들과는 다르게 어딘가 신비스러운 사람. 대답 대신 무심한 눈빛으로 질문을 던진다.



"이거야 적월초가 아닙니까. 아! 그래서,"

"오늘 같이 달이 밝은 날에 가장 잘 어울리는 꽃이다."

"하지만 이 예쁜 것이 소안의 원료라 하지 않더이까? 소녀는 좀 무섭습니다-"



정말로 무섭다는 듯 말꼬리를 늘이며 초선은 더 깊게 안겨왔다. 술을 조금 마신 사내는 취기가 올라 나른한지 창 밖에 보이는 달만 흘긋 쳐다볼 뿐 굳이 그 분내나는 몸을 떨쳐 내지 않았다. 평소 답지 않게 고분고분 제 손길을 받아들이는 사내의 유순함과 너른 품에서 나는 시원한 체향에 순간 아찔해진 초선은 곱게 말려 올라는 입꼬리를 막을 길이 없었다.

그래, 오늘이라면. 혹 모르지.



"나으리이..."

"나으리는 무슨. 벼슬 하나 하지 않는데."

"나으리가 싫으시면 함자를 부를까요? 윤기야아-"



[방탄소년단] 적국의 황후 06,07 | 인스티즈


"허."



기생 주제 발칙하게도 제 이름을 꽤 애살스레 부르는 초선에 윤기는 실소를 터뜨렸다. 초선은 그 웃음에 홀린 듯 손바닥으로 윤기의 하얀 얼굴을 쓸었다.

제가 이리 목매게 만들었던 어여쁜 웃음.

잘 웃지 않는 편인 그가 저 때문에 이리도 곱게 웃고 있다니 마음 한 켠이 간질거려 참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오늘은 안겨오는 제 몸을 피할 생각도 않는 듯 하고.


용기가 생긴 초선은 대뜸 윤기의 무릎에 앉아 작은 아랫입술을 물었다. 잠깐 멈칫하던 윤기는 혼자 달뜬 숨을 쉬며 제 입술을 핥아내리는 초선을 내려다보다 이내 가만히 맞춰주었다.

제 열띤 입맞춤이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과 달아오른 공기를 못이긴 초선이 빠르게 옷고름을 풀어 윤기의 손을 제 가슴께로 가져갔다. 밀쳐진 건 그 순간이었다.


"아!"

"뭐하는 짓이야."

"나, 나으리..."


초선은 비단 이불 위로 넘어진 채 저를 쳐 낸 윤기를 적잖이 놀란 기색으로 올려다보았다.


아아, 결국은.

당혹스러웠던 그 고운 얼굴은 곧 절망감으로 뒤덮였다. 한숨을 내쉬며 헝클어진 제 머리칼을 쓸어 넘긴 윤기는 올 때 벗어두었던 제 겉옷을 들어 살결을 죄 드러낸 초선의 위로 던지듯 덮어 두었다.


"이런 게 하고 싶어서 술까지 먹였나?"

"그게..."

"이런 건 내가 아니라 진짜 '나으리'들 한테나 해라. 내게 아양 떨어봤자 콩고물 하나 안 떨어질 테니."


평소의 무심한 목소리에 한심함이 더해져 초선의 마음을 갈기갈기 내찢었다. 초선은 잔뜩 상처받은 낯으로 끝내 눈물을 떨군다.


다른 역겨운 영감네들에게 파는 아양 따위가 아니었는데. 진정 연모였는데. 어찌 이리 매번 내치신단 말입니까.

윤기는 매정하게도 그 눈물을 보지 않고 방에서 나온다.



"오늘도 초선이 고년이 귀찮게 했다지?"

"...행수."


마당에 발을 딛자마자 담뱃대를 든 행수가 보였다. 어린 시절부터 화련각에서 자랐던 윤기에게 행수는 어머니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초선이년이 아직 어려 잘난 사내에게 안기고픈 모양이구나."


흐음, 하고 윤기를 보던 행수가 말을 이었다.


"마음이 없는 거라면 괜히 잘해주지 말아라. 기생년들이 원래 다정한 것에 약하단다."

"...압니다. 부러 모질게 말하고 나왔으니 염려 마십시오."

"언제 이렇게 컸을까... 난향이가 보았다면 아주 매일같이 제 아들이라고 자랑을 했을게다."


흐뭇한 얼굴을 한 행수의 입에서 그리운 이름이 나왔다. 어머니를 떠올리자 윤기의 입가에도 옅은 미소가 감돌았다. 살아계셨다면 분명 그러셨겠지.

오랜만의 대화도 잠시, 오늘은 이만 가보겠다고 꾸벅 고개를 숙인 후 돌아선 윤기의 뒷모습을 찬찬히 보던 행수가 쓴웃음을 지었다.


가엾은 것. 저 한이 이 화련각을 다 채워버릴 듯 싶구나.


윤기는 좌승상 민시흥의 아들이었다. 대궐같은 집에 살고 비단 옷을 입은, 걱정 없는 한량처럼 보였으나 그것은 죄 허울 뿐. 윤기에게 제 것은 없었다. 기생이었던 어머니의 배를 빌려 태어났으나 좌승상은 그런 윤기가 제게 허물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아들이면 뭐하나. 천한 기생의 피를 타고난 것을. 서자는 어차피 정계에 진출할 수 없었다. 해봤자 낮은 직급의 하찮은 벼슬이나 전전할 뿐이지. 도움이 되지 않을 자식이라면 없는 게 나았다. 해서 좌승상은 제 아들을 꼭꼭 숨겼다. 아무도 찾아내지 못하도록.


'내 아들이란 사실을 평생 숨기고 살아라. 네놈이 나와 휘경이의 발목을 잡는 걸 볼 수 없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마라. 웬만하면 내 눈앞에도 띄지 말아야 할 것이야.'


살아온 25년동안 인이 박히도록 들었던 말들이었다. 이승에 남은 유일한 혈육이었으나 없느니만 못한 아버지. 그러나 저 역시 아버지의 자식이라는 인정이 간절했던 윤기는 바보같게도 그 25년동안 착실하게 아비의 말을 따랐다. 하여 윤기는 어머니가 지냈던 화련각과 좌승상의 자택 말고는 그 어디에도 가지 못했다. 좌승상은 윤기를 싫어하면서도 제 손이 닿는 곳에 있길 바랐으니까. 그래야 비로소 안심이 되었기에 자행한 지독히 이기적인 행동이었다. 물론 이 안심은 윤기의 안전따위가 아니라 제 허물을 들키지 않았다는 안심이었지만.

따라서 윤기는 이대로 갑자기 죽어버린다 해도 저를 기억해줄 사람이 거의 없었다. 친하게 지내는 이도, 제 이름과 집안을 속속들이 아는 이도, 하물며 그의 존재 자체를 아는 이마저. 윤기의 사정을 아는 사람은 행수와 좌승상 부부, 그리고 이복동생 휘경 뿐이었다.


팔자도 사납지. 유일한 버팀목이던 제 어미마저 그리 일찍 잃다니.


오래된 동무였던 난향이 떠오른 행수는 담배를 한 번 깊게 빨아들이더니 그대로 내뱉었다. 마치 한숨 같다.

행수가 뱉은 담배 연기가 달빛을 따라 아른거렸다.





/





유월 황궁.



단아하고 평화롭던 그 황궁은 불살라지고 있었다. 반항한 궁인들은 피투성이로 스러졌고 그렇지 않은 궁인들은 고개를 한껏 숙인채 몸을 떨며 목숨만은 건지기를 바랐다. 고아하고 지엄해 아무도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던 황제의 처소는 한 식경만에 엉망이 되었으며 설화군의 칼날 앞에서 더없이 허술한 곳으로 변모했다. 그러나 끝까지 황제로 죽을 작정인지 유월황제와 황후는 모든 것을 체념한 담담한 낯으로 침소에 앉아 있었다.


"아, 이러면 재미없는데."


근위병을 몰고 온 정훈은 천천히 침소 안을 둘러보더니 담담한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연신 턱을 쓸었다. 태학사와 그 아들놈이 당신네들을 배신하고 저 살겠다고 도망친 것도 말했고, 당연히 공주의 침소에도 이미 제 부하들이 들이닥친 것을 알렸는데. 마치 삶의 모든 것에 미련과 욕심이 없는 것처럼 태연한 낯짝이 심기에 거슬렸다. 탐욕으로 가득찬 그가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라 더 거슬린 것일지도 몰랐다.

잠시 고민을 하는 듯 팔짱을 끼고 바닥에 냉큼 주저앉은 정훈은 곧 씨익 웃어 보였다. 한 나라의 황제라 믿기 어려울 만큼 천박한 모습에 눈살이 찌푸려질 지경이었다.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공주는 지금쯤 제 사람들의 죽음을 힘없이 지켜보기만 한 채로 비참하게 끌려가는 중일텐데. 이것도 아무렇지 않나?"


공주, 죽음, 비참. 이런 단어들이 들리자마자 황후의 꼭 쥔 주먹이 파르르 떨려왔다. 그 모습을 놓치지 않은 정훈은 꺽꺽 웃다가도 금세 기분이 나빠졌는지 낮게 욕을 중얼거렸다. 참 눈물겨운 모성애야. 누구랑은 다르게.


"마지막으로 할 말 있으면 하시지요. 친히 들어드릴테니."


묵묵히 있던 황제가 손 안에 쥐어진 딸의 편지를 내려다보더니 곧 입을 열었다.


"네놈같은 버러지에게 나라가 망할 줄 알았다면, 진작 그 아이 숨통이라도 좀 트이게 해줬을 것을. ...조금만 더 너그러이 봐줄 것을. 그것이 한스럽고 후회될 뿐이다."

"호오.."

"또한 약한 나라에 태어난 내 백성들이 가엾고 지키지 못해 통탄스럽구나."


정훈은 별 감흥이 없는 듯 황후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황후는 노기가 형형한 눈빛으로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추잡스러운 놈. 네놈은 평생을 고통 속에 살겠지. 그리고 가장 끔찍하고 처절한 방법으로 죽게 될 것이다!! 내 그리 만들고 말 것이야!"


분노가 생생한 목소리였다. 당장이라도 정훈의 목을 조여 버릴 듯 독하고 집요한. 살짝 흠칫했던 정훈은 곧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래도 가는 길 외롭지 않게 한 날 한 시 보내드리니 사위로서 아주 훌륭하지 않습니까."


두 사람을 내려다보던 정훈의 입가에서 미묘하게 감돌던 웃음기가 사라졌다.


"죽여."





/



아버지의 몸이 휘청거리며 고꾸라지는 것을 본 석진의 눈빛이 흔들렸다. 너무 놀라면 소리조차 나오지 않는다더니 그 말이 참말이었던가. 석진은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계획대로 오늘 밤 공주를 데리고 피신할 작정이었다. 아버지가 정말 시간을 잘 끌어주신다면, 정말로 그 누구도 잃지 않은 채 일상으로 돌아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와 함께. 그러나 그 기대는 보기좋게 무너뜨려졌다.


공주를 데리러 황궁으로 가던 중 석진은 등 뒤켠에서 느껴지는 살기에 걸음을 멈추었다. 섣부르게 행동해선 안됐다. 눈치가 여간 빠른 게 아닌 석진은 단숨에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누군가 아버지와 저의 계획을 이미 꿰뚫어보고 있었단 뜻이었다. 설화국 황제의 짓인가. 애초에 아버지의 말을 믿지 않았구나. 오히려 우리가 속아 넘어간 거야. 석진은 제 앞을 가로막고 선 검은 복면의 사내 셋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화초같이 자란 귀하신 도련님이니 최대한 편히 가게 해드리지요."


사내 하나가 그리 말하고서 검을 뽑았다. 어두운 밤이었지만 다행히 달이 밝아 칼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잘 보였던 석진의 눈빛이 곧 바뀌었다. 곧이곧대로 죽어줄 생각은 없다.

먼저 검을 뽑았던 사내가 달려듦과 동시에 석진은 품 안에 지니고 다니던 단도를 꺼내 사내의 검을 막고 정강이를 세게 걷어찼다. 사내가 균형을 잃은 틈에 재빨리 턱을 가격하고 무릎으로 손목을 차 검을 놓치게 하자 여태 방심하고 있던 다른 사내 두명이 그제야 석진에게 달려 들었다. 민첩하게 몸을 움직여 첫번째 자객이 놓쳤던 검을 쥔 석진은 접전 끝에 자객 두 명의 숨통을 끊어 놓았다. 검을 놓쳤던 사내는 곧 석진 앞에 무릎이 꿇려졌다.


"너희를 내게 보낸 자가 설화국 황제가 맞느냐."

"..."

"대답해. 기다려줄 시간 없으니까."

"...알고 있으면서 부러 묻는 이유가 무엇이오."

"아버님께도 찾아갔는가."

"지금쯤 이미 다 들이닥쳤을 거요."


젠장. 고운 입술이 어울리지 않게 욕을 뱉었다. 피곤함과 분노로 실핏줄이 터진 눈이 붉다. 석진은 그대로 아버지에게 달려가려다 멈칫하고서 뒤를 돌았다.


"주인을 잘못 만난 탓이라 생각해라."


자객의 머리가 칼날에 떨어져 나갔다. 사람의 목을 주저없이 베어버리고 온 몸에 피가 튄 석진에게서는 이전처럼 상냥하고 나긋한 선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충혈된 차가운 눈은 무리를 잃은 늑대처럼 적의와 살기만을 띄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여과없이 다치고 죽게 될 이 시점에서, 차분함은 사치였다. 아까 싸우다 베인 손바닥이 쓰라렸지만 석진은 그대로 부모님이 있을 집을 향해 달렸다.



숨이 차도록 힘껏 달려 도착한 집 대문 앞에서 목격한 것이 마당에 끌려나와 무릎 꿇려진 부모님, 그리고 집안 하인들이었다. 이성을 잃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으로 검을 쥔 채 집에 들어서려던 순간, 태학사와 눈이 마주친다,


'가. 어서 가거라.'


아버지의 입모양이 어서 여길 떠나라고 하고 있었다. 아까같은 어줍잖은 자객도 아니고 설화 황제의 병사들이 마당에 진을 치고 있으니, 석진 혼자 힘으로 이길 수 없음이 자명하긴 했다. 아직 그들의 눈에 석진이 들키지 않았으니 살고자 한다면 지금이라도 도망가야 한다. 그건 알지만.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들된 자로서 어찌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단 말이야. 태학사는 마지막으로 석진에게 흐릿한 미소를 보이고는 그대로 설화군의 칼에 가슴을 찔렸다. 곧이어 어머니의 몸에서도 검붉은 피가 울컥 쏟아져내렸다. 석진은 당장이라도 쓰러져있는 부모님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랬다간 개죽음을 면치 못할 걸 아는 탓에. 게다가 설화군이 들이닥친거라면 황궁 역시 안전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말대로 자신은 공주를 지켜야 했다.

석진은 눈앞이 아찔하여 한동안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질끈 눈을 감는다. 침착...침착해야해. 충격으로 떨리는 몸을 애써 다잡은 채 발길을 돌려 늦게나마 공주에게 가기 위해 성치 않은 몸으로 달렸다. 해가 떠오르듯 밝은 빛이 시야를 가린 것은 순간이었다. 갑자기 웬 빛이.


아아 황궁이다.

십 년간 제 집처럼 드나들었던 곳. 사랑하는 여인이 있는 곳.

이미 되돌릴 수 없이 강렬한 불길에 휩싸인 황궁은 검은 형체가 붉은 화염 속에서 아른거렸다.


아, 안돼.


석진은 더 서 있지 못하고 맥없이 무릎부터 쓰러졌다. 자신이 너무 늦어버렸다는 걸 깨달아 허망하게 흔들리는 두 눈동자에는 모든 것을 삼켜낼 듯 타오르는 불꽃만이 가득 들어찼다.





/




"거사의 시일을 앞당기시다니요."


남준이 의아한 듯 정국을 바라보았다. 무엇보다도 확실한 걸 좋아하던 정국인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기에 이런단 말인가. 혹 이전에 보낸 서신 탓인가?


"유월국 일 때문입니까."

"...형님이 공주를 황후로 맞이한다면, 그 때는 늦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 여인을 죽일 수밖에 없어요. 난 그러고 싶지 않고."

"그렇겠지요. 과정이야 어찌되었든 황제의 여인이 된 이후라면 참형에 처해질 겁니다. 그분께는 날벼락 같은 일이겠지만...."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잠깐 말을 아끼던 남준은 곧 은은한 미소를 띠었다. 제 예상이 맞는 듯 하여.


"허나 황자님께서는 그런 것에 일일이 신경쓰는 분이 아니시지 않습니까. 그 여인이 무엇이라고 오랫동안 준비했던 거사의 시일까지 바꾸려 하십니까."


찻잔을 들어올리던 정국은 잠시 멈칫했다. 남준의 눈에 장난스러운 웃음기가 도는 것이 필시 저를 놀리고 싶은 모양이었다.


"혹 그 잠깐 사이에 연심이라도,"

"아닙니다."


대답이 엄청 빠르시네. 좀 귀여운 구석이 있으시다니까. 남준은 오랜만에 보는 듯한 정국의 소년같은 모습에 푸스스 웃으며 짓궂게 물었다.


"허면 무슨 연유입니까-"

"무엇이 됐든 스승님이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닙니다. 헛되이 죽게 하기엔 아까운 사람이어서 도와줄 뿐이지. 어차피 이 상황에 황후가 되어봤자 견제만 받을 게 뻔하니까요."


그건 맞는 말이었다. 화씨도 아니고 설화인도 아닌 황후라. 귀비의 세력이 그걸 가만히 보고 있을리가. 정국이 반란을 하지 않더라도 머지 않아 폐위가 되든 죽든 할 터였다.


"허나 공주가 내 황후가 된다면, 말이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능글맞게도 저를 보고 살짝 웃어보이는 정국에 남준은 순간 당황하여 헛기침을 했다. 공주를 살리려는 줄로만 알았지, 진정 황후로 맞을 생각을 하실 줄이야.


"지금 공주와 국혼을 하시겠다고,"

"망국의 공주이니 척신을 형성할 여지도 없고 곧 설화 땅에 물밀듯 밀려들어올 유월 유민들을 수월하게 통합할 수 있는 인물이 될 겁니다. 똑똑한 여인이니 내 편으로 만들기만 한다면, 아주 든든한 정치적 동료가 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허나 그 분의 의사는요. 거절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글쎄. 지금 상황에 나를 거부하는 건 힘들텐데."


정국이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린다. 공주의 현실을 이미 파악하고 있는 정국은 그녀를 끌어들일 자신이 있었다. 삶에 아직 욕심을 갖고 있기만 하다면 분명 내 손을 잡겠지.

지금 당신의 구원자는 나 밖에 없을 테니까.


남준은 그런 정국을 보며 귀엽다고 한 것은 다 취소라고 생각했다. 그래, 이제 그는 연심에 설레하는 한낱 소년이 아니었다. 타고나길 천자로 태어난 사람이지. 너무 쉽게 보았구나. 일말의 정으로 움직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너무 쉽게 생각했어. 그에게 정은 사치였고 걸림돌일 뿐이다. 그것이 여인을 향한 연정이라면 더더욱.


"상대가 망국의 공주입니다. 후궁이 아닌 황후로 들이고 싶으신 거라면, 반대하는 목소리가 클 거라는 것 쯤은 감안하고 계시겠지요."

"그 정도도 예상 안했을까. 아마 그 목소리의 8할은 좌승상이 낼 텐데, 우린 그 자의 약점을 하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이참에 미리 경고를 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어. 정국은 찻잔을 손안에서 굴리며 혼잣말을 했다.




/




정신을 잃었던 공주는 한참을 기절해 있다 덜컹거리는 소리에 문득 눈을 떴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가마의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빛이었다. 두껍게 발린 창호지 사이로 제법 밝은 빛이 들어오는 걸 보니 해가 완전히 뜬 모양이었다. 그새 아침이 밝은 건가. 그럼 호석은?


"아."


몸을 일으키려다 목이 타들어가는 고통에 손을 갖다 대어보니 이미 누군가 투박한 손수건으로 동여매어놓았음이 느껴졌다. 제법 야무지게 묶은 것이 호석의 손길 같기도 하다. 제발 그래야 하는데. 쓰러진 사이 그가 해를 입었을까 두려워진 공주는 빠르게 작은 창을 열었다.


"호석...!"


'쉿.'


더 둘러볼 필요도 없이 가마 바로 옆에 서 있던 호석은 입모양으로 조용히 하란 신호를 보냈다. 그제야 마음을 놓은 공주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찌 됐든 둘 다 살아남긴 하였구나. 그거면 됐다. 그거면 되었어.



어젯밤, 공주의 가까이에 서 있던 병사가 정신을 차리고 다급히 달려들어 칼을 뺏어든 덕에 그녀는 목숨을 건졌다. 이 모든 게 다 공주를 정훈에게로 데려가기 위함인데, 죽게 둘 수는 없었으니까.

주춤하던 병사들은 잠시 고민한 끝에 결국 호석을 살려두기로 했다. 저 정도 굳건함이면 멀쩡히 깨어나더라도 호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혀를 깨물고 죽어버릴 기세였으니. 덕에 호석은 가마 옆에서 다친 어깨를 대충 겉옷으로 묶어두고 함께 설화로 가는 중이었다. 병사들의 시선이 따갑긴 했지만.




사람이 끄는 가마를 타고 가니 설화까지 가는 길이 꽤 험하고 길다. 어젯밤부터 하루 종일 움직인 것 같은데도 창밖의 풍경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데다 가마꾼과 병사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아직 나흘은 족히 가야 도착할 성 싶었다. 차라리 말을 타고 가는 게 잠깐 불편하더라도 빠르게 도착할 것 같은데, 설화에서 여인은 말을 탈 수 없다한다. 공주는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려 목에 힘이 들어갔다. 유월보다도 훨씬 보수적인 나라라 하더니, 저 곳의 황궁은 또 얼마나 답답할까. 어머니의 말이 떠오른 공주는 무릎을 세워 얼굴을 묻었다.


해가 저물어가자 일꾼들은 쉬기 위해 가마를 내려놓았다. 그러나 공주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런 일이 있기 전이었다면 위험하니 내리지 말라 했어도 기어이 나와서는 신기한 눈으로 구경했을 게 뻔한데. 호석은 가마의 문을 열어젖혔다. 생기 없는 낯으로 눈가는 붉게 짓물린 채 웅크리고 있는 공주를 보자 속이 쓰려 입속을 씹었다.

열린 문 옆으로 털썩 주저앉아 아까 받아뒀던 주먹밥을 꺼내 내밀자 물 한 모금 말고는 뭘 먹지도 않았으면서 입맛이 없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통에호석은 손을 끌어 당겨 억지로 밥을 쥐여주었다.


"이거라도 안 먹으면 큰일 납니다. 억지로라도 드세요."

"...싫어."

"저더러는 어떻게든 살아남으라 하시지 않았습니까."

"..."

"제게 그런 명령을 내리셨으면 마마께서도 책임을 지세요. 조금이라도 드십시오. 부탁입니다."


호석의 단호한 눈빛에 마지못해 한 입 베어물고 씹던 공주의 눈에서 곧 굵은 눈물이 툭 떨어졌다. 그러더니 끝내 서러움이 터져 작은 손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허나 소리를 내지 않으려는 듯 숨이 넘어가게 끅끅거린다. 가만히 보던 호석은 왼쪽 팔로 작은 몸을 끌어 안았다. 이런 건 원래 형님이 하던 것이었는데. 공주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늘 자리를 지켰으면서도 호석이 공주를 품에 안은 적은 손에 꼽았다. 그러니 석진과는 다른 서툰 손길로 등을 쓸어줄 밖에.


한참을 울고 나니 호석의 어깨에 매어진 피묻은 겉옷이 눈에 들어왔다. 화살을 맞았는데, 이리 무리해 걸어도 괜찮을까. 그러고보니 나를 안을 때도 한 쪽 팔만 썼는데. 혹 움직이지 못하는 건...


"어깨는 괜찮은 게야?"

"아."


워낙 정신이 없어 아픈 것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듯 호석은 그제야 제 어깨를 내려다 보았다. 자신이 왼팔만 쓰고 있었다는 걸 그때서야 알았다는 얼굴이다. 다행히 급소도 아니었고 화살을 빨리 뽑아낸 덕에 상처가 썩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피만 멎게 했을 뿐인지라 약이 없으면 팔을 못 쓸 가능성도 없잖아 있긴 했다.


"신경쓰지 마십시오. 별 거 아닙니다. 목은 좀 괜찮으십니까."


별 거 아닌 것이 아닌 듯 한데. 말을 돌리려는 호석에 황녀의 고운 미간이 살풋 찌푸려진다. 목은 괜찮냐는 물음을 보기 좋게 무시한 그녀는 꽁꽁 싸매둔 겉옷을 풀고 호석의 상의를 벗겼다.


"ㅈ, 저기 공주님 잠깐만..."


갑자기 제 옷을 벗기는 작은 손에 당황한 호석은 허둥지둥했다. 도대체 당신은. 아무리 그래도 사내인데 옷을 벗기는 데에 한 치의 머뭇거림이 없다. 당혹감도 잠시, 호석은 어깨에 바람이 닿자 상처가 쓰린 듯 신음했다.


"윽,"

"이게 별거 아니란 말이냐. 이리도 살갗이..."


화살촉에 찢겨진 상처가 생생했다. 피는 멎었지만 속히 약을 바르지 않으면 곪아 들어갈 것이 뻔해 보였다. 공주는 눈물에 젖어있던 눈으로 호석의 상처를 살폈다. 빨리, 빨리 뭐라도 치료해 주어야 하는데. 머리를 열심히 굴리던 공주는 곧 제 목의 상처가 떠올랐다.


"아까 보니 내 목에는 약초가 발라져 있던데."


호석은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새벽녘에 산길을 오르다 정말 운 좋게 발견한 약초였다. 공주가 정신을 잃은 사이 급한 대로 치료했던 것인데.


"더 남아 있지? 이리 내놓거라."

"허나 그건 이따 새로 갈아드리려고 겨우 남긴,"

"이리 내래도."


단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굳은 표정과 말투에 호석은 상심한 얼굴로 벗겨진 제 옷에서 약초 꾸러미를 꺼냈다. 꺼내기는 했으나 여전히 내키지 않는지 망설이는 손을 잡아채 그대로 여린 풀들을 올리는 손길이 조심스럽다. 제 살에 닿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이상하게 낯설어 호석은 얕게 몸을 떨었다.


"이걸 제게 쓰시면 나중에 마마께서 쓰실 것이 없는데... 목에 흉이 남으실 겁니다."

"그까짓 흉이 무에 그리 중하다고."

황녀는 호석의 잘게 떨리기까지한 목소리를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상처를 마저 치료했다. 붕대가 없으니 제 속치마를 힘겹게 찢어내 다친 어깨를 꽁꽁 싸매었다. 치맛자락을 들어올리는 것에 놀라 말리려던 호석은 곧 포기한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마마. 어제 일 말입니다."


치료가 끝나자마자 대충 다시 옷을 걸친 호석이 입을 열었다.


"앞으로 다시는 그러지 마십시오."


가라앉은 호석의 목소리에 공주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 얼굴을 살폈다. 왜 저리 상심한 얼굴을 한 것이지?


"저는 마마를 지키라고 있는 자이지, 보호받는 자가 아닙니다. 다시는 저 때문에 위험해지지 마십시오."


아아 그래서. 제 일을 수행하지 못했다 생각해 그런 것이로구나. 가만히 있던 공주는 곧 담담하게 호석의 눈을 마주했다.


"공주로서 호위무사를 지킨 게 아니라 벗으로서 벗을 지킨 것이다. 그러니 너무 신경 쓸 것 없느니라. 너는 그냥... 그냥 계속 내 곁에 있어주기만 하면 돼."


벗. 벗이라. 호석은 속으로 벗이란 말을 되뇌었다. 나는 당신에게 벗이구나. 내게 당신은 벗이 아닌데. 곁에 있어달라는 공주의 손을 잡은 호석의 입꼬리가 곱게 말려 올라갔다. 당신은 내게 단순한 벗이 아니라, 지켜야 할 사람. 그러니 계속 곁에 있어달라는 말은 못 들어주겠다. 당신이 위험해지면 또다시 목숨을 던질 테니까. 그렇게라도 구해낼 테니까.

호석은 아무 말도 않고 손만 더 세게 잡아주었다. 공주는 그것이 대답이라 생각할 뿐이었다.






/





"내리십시오."


며칠동안 이어져온 설화행에 지쳤던 공주는 저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가 가마꾼의 큰 목소리에 놀라 바르작대며 일어났다. 드디어 도착했나.

살아남자. 버텨내자, 꼭. 공주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억울해서라도 쉽게 죽을 순 없었다. 무슨 일이 있든 꺾이지 않고 살아남으리라. 너덜너덜해지는 한이 있더라도 우선은 살아남아야 복수를 하든 석진이 어디있는지 찾든 할 수 있을 테니.


호석이 조심스레 문을 열어주자 꽃이 수놓인 마른신을 신은 작은 발이 모습을 드러냈다. 며칠간 제대로 씻지도 못한데다 투박한 궁녀의 의복에, 목에는 핏물이 굳어 달라붙은 손수건까지 하고 있으니 참으로 처량하고 엉망인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줄곧 바닥을 보고 있던 황녀는 강한 햇빛에 눈이 부셔 손으로 차양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앞에 보이는 황궁은 가히 경탄할 규모임에 틀림이 없으리라. 대충 문의 크기만 보더라도 유월 것의 열배는 넘는 듯하다. 대국이라기에 장엄하고 화려할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아마 유월 황궁은 여기선 고관대작의 사가 정도에 그칠 것 같다. 어머니가 말씀하신 '대국의 황후자리'가 어느정도인지 이제야 감이 오기 시작한 황녀는 조금 겁이 났다.

아냐. 이겨낼 수 있을 것이야, 분명.

억지로 제게 세뇌하며 치맛자락을 부여잡는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간다.




***





敵國皇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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궐내 별감들의 안내를 받아 황궁 안 꽤 깊이까지 들어왔지만 너무 넓은 탓에 길이 어떻게 생겨먹은지도 알지 못하고 마냥 따라가기만 했다. 설화 황궁의 사람들은 이 공주가 어떻게 끌려오게 된 건지 그 경위를 알음알음 들었기에 부러 공주나 호석에게 말을 건다거나 하진 않았다. 철없는 어린 항아들과 무수리들이나 눈에 띄게 흘긋거릴 뿐. 황녀에게 그 시선이 느껴지지 않을 리 없었지만 그녀는 오히려 더 꼿꼿하게 고개를 치켜 들었다. 며칠 전 멸망한 나라라 하여도 자신이 어찌 행동하느냐에 따라 고국에 대한 인식이 바뀔 수 있음을 아는 탓이다. 저와 제 나라는 군대의 칼 앞에 나약했으나 정신은 스러지지 않았다는 걸, 한 점 잘못한 바가 없다는 것을 온몸으로 표출하는 중이었다. 황녀는 그 불편한 눈빛들을 조금도 신경쓰지 않는 것처럼 굴었다. 그렇게 영겁같이 느껴졌던 시간이 끝내 사라지니 눈앞에 보이는 것은 큰 연못이 놓인 2층짜리 목조 건물이었다. 제법 규모가 크면서도 단정한 것이 황실의 관리를 위한 건물 같지는 않고, 누군가의 처소에 가까워보였다. 허나 누가 쓰는 것 같진 않은데. 그런 생각을 하며 좀 더 안으로 들어가니 일반 나인들과 달리 진녹색 옷을 입은 중년의 여인이 서 있었다. 저 사람이 상궁인가보구나.


"유월국의 공주님을 뵙습니다."


나이가 들었음에도 고아한 태가 나는 것이, 젊은 시절 꽤나 아름다웠을 것으로 보이는 여인은 차분한 태도로 공주를 맞이했다. 제 몰골을 보고 흠칫하던 다른 궁인들과 달리 놀라는 기색이라곤 한 자락도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 마마를 모실 최고상궁 소 현입니다."


편히 소 상궁이라 하시옵소서, 하며 천천히 바른 자세로 허리를 숙이는 모습은 마치 황궁 여인의 표본 같은 것이었다. 아마 내 평생 살아온 시간보다도 더 오랜 세월을 이곳 황궁에서 지낸 사람일 터. 내가 여기서 무사하려면 일단 저 사람이 필요하겠구나. 소 상궁이 좋은 사람이건 나쁜 사람이건 그건 필요치 않았다. 그저 저를 도와줄 수 있었으면, 제게 힘이 되어줄 수 있었으면. 그 뿐이었다.


"옆에 계신 분은..."

"아, 제 호위무사입니다."

"송구하지만 무사분은 이 이상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마마."

"!"

"이곳 도화궁은 품계가 낮은 후궁 마마들께서 거처하시는 곳이었으나 지금은 아무도 쓰시지 않사옵니다. 허나 폐하를 제외한 사내가 들어올 수 없음은 여전하지요. 마마께오선 국혼이 있으시기 전까지 이곳을 쓰셔야 하니 당분간 호위무사 분과는 떨어져 계셔야 합니다."

"..."


모든 게 낯설고 두려운데 호석이도 곁에 둘 수 없다니. 그러나 보내기 싫은 티를 낸다면 호석이 마음쓰여할 것이 불보듯 뻔하였다. 그리고 이제껏 보아온 폭군 황제의 성정을 보아 제가 호석에게 미련을 가질수록, 더욱 집착해 없애버리고자 할 것이다. 그 꼴을 또 볼 순 없지.


"마마."

"난 괜찮다. 나중에... 나중에 다시 보자꾸나."


애써 지은 형식적인 미소가 호석을 향했다. 머뭇대던 호석은 곧 도화궁 항아의 안내에 따라 자리를 떴다.


"...무사는 어디로 가는 겁니까."

"아직 배정받은 바가 없는 분이시니 별감원으로 가실 겁니다. 마마께선 저를 따라오십시오. 목욕을 도와드리겠사옵니다."





/





"폐하. 지금 막 공주께서 도착하시어 도화궁에 머물고 계신다 하옵니다."

"그래?"


책이 가득 찬 집무실과 정훈은 참으로 어울리지 않았다. 자신도 그걸 아는지 밀린 정무를 보긴 커녕 먼 타국에서 들어왔다는 선인장을 화살촉으로 꾹꾹 찌르고 있던 정훈은 내시백의 말에 반색하여 고개를 들었다. 지루하던 차에 마침 잘 되었지.


"신부가 먼 타국에서 왔다는데 안 갈 수 없구나."

"..."

"도화궁으로 가자."


내시백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으나 속으로는 그 공주가 참으로 가엾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이쯤했으면 이제 그만 괴롭힐 법도 한데. 하긴, 그렇게 생각할 위인이었다면 나라를 멸하면서까지 데려오지도 않았겠지만.





공주는 며칠간의 고된 일로 더러워진 몸을 씻었다. 유월에선 기껏해야 시중을 드는 항아 한두 명과 함께였는데 이곳은 목욕탕의 크기부터 달랐다. 품계가 낮은 후궁이 쓰는 곳이 이정도면 황후는 대체... 이리 넓은 곳을 다 청소하려면 항아들이 꽤나 고생을 하겠구나. 허나 그 걱정은 하등 쓸모없는 것이었다는 것을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공주 하나 목욕하는 데 수발 들러온 궁녀만 10명은 되는 듯 싶었으니. 소 상궁에게 궁녀 수를 좀 줄여달라 하려고도 했으나 그럴 힘도 남아있지 않아 그냥 그들의 손에 편히 몸을 맡겼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니 피로가 좀 풀리는 것 같기도 하였다. 목에 여즉 남은 상처에 물이 닿을 때마다 아리긴 했으나 입술을 꼭 물고 신음을 참아냈다.

궁녀들은 모두 손이 재빨랐다. 부드러운 천으로 꼼꼼히 몸을 닦아내고 속곳과 속적삼,치마를 입히더니 어디서 구한 것인지 소 상궁은 연고를 가져와 목에 살살 펴발라 놓았다. 어쩌다 이리 되었느냐고 한번 쯤 물어볼 만도 한데 그러지 않아 고맙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이었다.


"황제 폐하 납시오!"


안 그래도 잘 놀라는 공주가 파드득 놀라더니, 목욕 직후인지라 발갛게 생기있던 얼굴이 백지장처럼 질렸다. 그 모습을 보니 연고를 바르던 소 상궁의 얼굴도 함께 굳어졌다. 생각보다 훨씬 더, 공주는 황제를 두려워한다. 그럴 법도 하지. 부모와 나라를 모두 죽여버린 자가 아니던가.


"잠깐 여기 계십시오, 마마."


소 상궁은 공주의 손을 잠시 쥐더니 빠른 걸음으로 문을 나섰다. 그 뒤를 나인 두어 명이 따랐다. 많은 문 중에서 겨우 2개 정도만 지났을 뿐인데, 황제는 그새를 참지 못하고 안까지 들어와 있었다.


"황제 폐하, 납시었사옵니까."


소 상궁과 나인들의 인사에 관심 없다는 듯 내려다 보지도 않은 정훈은 오직 공주가 있을 문 너머만 보며 무료하게 대답한다.


"공주가 안에 있느냐."

"마마께오선 먼 길을 오시느라 몸이 미령하시어 조금 전 침수에 드셨사옵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오늘은,"

"감히 황제가 이리 행차했는데, 얼굴을 보이지 않는단 말이냐."

"..."

"잠들었다면 깨우면 될 일. 문을 열어라."


도화궁 나인들이 머뭇거리는 사이에 정훈의 근위병들이 문을 열어젖혔다. 그 어떤 예의와 법칙도 무너뜨릴 수 있는 것. 그것이 천자만이 가진 권력이었다. 그 앞에서 도화궁은 나약하고 허술하기 그지 없다. 소 상궁은 화가 치미는듯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상궁은 공주가 자고 있다고 하던데,"

"..."

"목욕까지 하고 기다리고 있었나? 더 일찍 찾아올 걸 그랬군."


창백한 주먹과 뒷목에 힘이 들어갔다. 비통하다. 비통하기 짝이 없어. 이런 자에게 그 어떤 반항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 눈물 나게 비참했다.


"다 물러가 있어라. 공주와 둘이서 할 얘기가 있으니."


이 황궁 안의 모든 것이 정훈의 뜻대로 돌아간다. 한 마디 했을 뿐인데 바다의 썰물처럼 순식간에 모든 이들이 빠져나가고 침소 안은 오직 둘만 남았으니. 그럼 나도 저 자의 뜻대로 굴게 될까. 분노와 두려움이 공존한 공주는 정훈의 눈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고 떨리는 손을 들키지 않고자했다. 뜻대로 되진 않았지만.


"저런. 이리도 겁을 먹어서야."

"...저리 가."

"호오, 벌벌 떨고 있는 주제에 잘도 반말을 하시겠다."


흥미롭다는 듯 입맛을 다시던 정훈은 순식간에 공주의 턱을 잡고 밀어 침대 위로 넘어뜨렸다. 정훈의 아래에서 빠져 나오려는 여린 손목은 붙잡혀 곧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흐, 이거 놔!"

"버릇없는 강아지는 초장에 길을 들여야 하는 법이라."


빠져 나가려 할 수록 살을 파고드는 덫처럼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턱을 잡은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고통에 곧 온 몸의 힘이 빠지자 황제는 만족하는 듯 하더니 손가락으로 상처가 난 목을 만지작댔다. 눈동자에 얼핏 분노가 스친 것도 같다.


"누가 내 것에 흠집을 냈지."

"아..!"

"헌데 넌,"

"..."

"흠이 좀 난 게 더 낫구나. 보기 좋아. 누군진 모르지만 칭찬해 줘야겠어."

"그만, 읍!"

"앞으로 여기서 살 테니 잘 기억해두거라. 고분고분 내 말을 따르는 게 네게 이롭다는 걸."


그만하라고 말하려던 붉은 입 안으로 제 손가락을 넣어 말을 막아버린 정훈은 훅 끼치는 살내음에 잠시 눈이 돌아갔다. 제 아래에서 무력하게 눈물이 고인 공주라. 당장이라도 저 속적삼 안으로 손을 밀어넣고 싶었다. 그러나 곧 마음을 달리 먹었다. 오늘은 이 정도만 겁 줬으면 되었으니. 벌써 그러면 재미가 떨어지잖은가.

정훈의 몸이 멀어지자 공주는 기침과 함께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공주가 깨물어 피가 나는 제 검지손가락을 핥은 정훈은 침대에 걸터 앉아 힘들게 숨을 쉬고 있는 공주를 흘긋 내려다 보았다.


"아, 이 말을 하러 온 거였는데."

"..."

"그럴 일은 없겠지만 고향에 돌아가더라도 부모는 평생 볼 수 없을 거다. 널 버리고 간 그 사내도. 지금 도망가면 목숨은 살려주겠다 하니 바로 널 버리고 가족을 선택하더구나."

"아..."

"입발린 사랑타령에 속아 남자를 믿는다라. 황후가 될 사람이 저리도 순진해서야, 궁에서 살아남긴 하겠느냐."


정훈은 곧 제가 대동하고 온 익위사, 나인들과 도화궁을 빠져나갔다. 한 바탕 폭풍이 일고 지나간 자리에는 공주 혼자였다. 황제가 나가자마자 침소로 뛰어들어온 소 상궁은 공주의 몸 상태를 살폈다. 문 밖으로 두 사람의 대화아닌 대화가 다 들렸으니 걱정이 안 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소 상궁..."

"예, 마마. 괜찮으십니까!"

"나.. 나, 물을 좀... 아니 어지러워 그러니 창문이라도,"

"마마!"


아, 결국 쓰러졌다.

여태 여린 몸으로 잘 버티고 있다 싶었던 공주는 또다시 정신을 잃었다. 쓰러진 공주를 보고 뒤이어 들어온 항아들이 꺄악, 비명을 지르자 소 상궁은 공주를 받쳐 안고 호령한다.


"뭣들 하느냐, 어서 태의를 불러오지 않고!"






/





소 상궁이 간절히 찾는 태의는 지금 황자궁에 발이 묶여 있었다. 정국에 의해.



"그래. 지금껏 네가 선황과 현 황제의 의료일지를 조작했단 말이지."

"주, 죽여주시옵소서!"

"죽여달라... 내 앞에선 그런 말 하지 마라, 난 진짜 죽이니까."


헙. 살벌한 말을 저리 무덤덤하게 한다. 죽여달라며 모순되게 목숨을 구걸하면 그 권력에 취해 아량을 베풀던 귀비의 세력과 달리 정국에겐 그런 것이 없었다. 그런 거추장스러운 미사여구보단 확실하고 간결한 것을 선호했다. 그리 차갑고 딱딱한 분위기 뿐이던가. 전쟁영웅이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대놓고 제 키만한 검을 의자 옆에 두고 있으니, 무서워 눈물이 터진다하더라도 과언이 아니다. 분명 빈틈없이 잘 해냈다고 생각한 일이었는데 이렇게 제대로 들켜 버리다니. 태의는 지금 당장이라도 멀리 도망가고픈 심정이었다. 아니, 목숨만 살려준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지금 내 손에 든 이것이 진짜 일지겠고."

"그것이..."

"이것에 따르면, 선황은 지속적인 소안 섭취와 그 중독에 의한 심적충격사. 그리고 현황제는 소안 중독이구나. 그것도 즉위하기 전에 이미."

"ㅈ...."


습관처럼 죽여달라 하려던 태의는 아까의 살얼음같은 목소리가 떠올라 입을 다물었다.


"네가 뭐 그리 잘못이 있겠느냐. 다 네 뒷배가 한 짓일 텐데. 다만,"


다만? 제 입장을 고려해주는 듯 말하는 황자에 태의의 낯이 화색이 되었다가 다시 겁을 먹었다.


"지금부터 네 행동을 네가 바로잡냐 아니냐에 따라 처벌의 수위가 정해지겠지."

"!"

"똑똑한 자이니 잘 알아들었을 거다. 지금 내가 네게 기회를 주고 있다는 걸."

"화, 황송하옵니다."

"잘 생각해라. 모든 증거와 네놈의 명줄은 내 손에 있으니."

태의에겐 이제 선택권이 없다. 그는 저 옆의 검에 목을 베이지 않고 살아나갈 수 있는 것만으로 감격스러워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자님, 말씀 중에 송구합니다."

"무슨 일인데."

"도화궁에서 궁녀가 왔습니다. 태의를 급히 찾는다고요. 태의감에서 일러준 듯 한데..."


문밖에서 지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화궁은 지금 태의를 부를 만한 사람이 없을텐데.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정국은 곧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그 공주, 도착했나보구나.


"공주가 아프다던가?"

"예, 폐하께서 다녀가신 뒤로 쓰러지셨다 합니다."


뭐?


정국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훈이 다녀간 뒤 쓰러졌다니. 해코지라도 한건가. 망할. 마음이 급해진 정국은 저 때문에 화들짝 놀란 태의는 아랑곳 않은 채 빨리 일어나란 손짓을 했다.


"뭐하나. 어서 가지 않고."

"예? 아, 예..."

"아. 혹 누군가 황자궁에 왜 갔냐고 묻는다면, 어찌 대답해야 하는 지는 알고 있겠지."

"ㅁ,물론입니다, 황자님."






도화궁.


아까보다는 조금 편안해진 얼굴로 눈을 감은 공주가 일정하게 숨을 색색 내뱉었다. 진맥을 짚던 태의는 별 거 아니라는 듯 소 상궁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몸이 원체 약한지라 기가 허하고 거기다 피로가 쌓였으니 그런 것입니다."

"그럼, 심각한 것은 아닙니까."

"기력이 약한 것이야 잘 주무시고 식사를 잘 하시면 괜찮지만... 문제는 저 목에 상처인데. 아마 아물어도 흉이 좀 남을 것입니다."


소 상궁의 낯빛이 대번에 어두워졌다. 저리 잘 보이는 곳에 흉이 지시면, 황후는 커녕 후궁조차 될 수 없으실 텐데. 황제는 마마를 놓아주려 하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면 품계조차 제대로 없는 승은궁녀 취급을 받을 거였다. 그럴 순 없었다. 소 상궁은 순간 제 과거가 생각나 이마를 짚었다. 어느새, 이렇게 공주를 저 자신에 투영하고 있었던가. 주제 넘구나.


"마마님. 2황자님이 오셨습니다."

"뭐라?"


소 상궁의 판판하던 얼굴이 설핏 주름이 졌다. 지금껏 아무 일 없이 평화롭던 도화궁에 새 주인이 들었단 것 하나만으로 종일 난리였다. 황제의 행차에, 마마가 쓰러지신 것으로도 모자라 이젠 그리 무심하다던 황자님까지 친히 발걸음을 하셨으니. 호기심따위로 후궁전에 발걸음할 만한 분은 아니었는데. 필시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자 상궁은 태의를 내보내고 직접 황자를 맞으러 나갔다. 나가면서 황자와 마주친 태의가 몸을 움찔대는 것까진 보지 못하였다.


"황자님을 뵈옵니다."

"공주는 괜찮은가."


정국은 담담하게 공주의 안위를 물었다. 아까 답지 않게 조급해하던 것은 실수였단 듯이, 평소처럼 무던한 태도로 돌아왔다. 소 상궁은 당최 황자께서 그것이 왜 궁금한 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자신이 모르는 것이 있겠구나, 짐작할 따름이었다.


"지금은 편히 주무시고 계십니다.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소인이 전해드리겠습니다."

"아니다. 본인에게 직접 해야할 말이라."

"하오나,"

"깨어나면, 이걸 전해주거라. 아무도 없을 때 읽으라 하고."


침소에는 들어가실 수 없다 하려던 상궁의 두 손이 비단으로 된 손수건을 받았다. 잘 싸여진 고귀하고 정갈한 손수건 안에 무언가 글씨라도 남긴 모양이었다.


"소 상궁은 황궁 생활을 한 지 오래된 것으로 아는데. 맞는가?"

"황공하오나 그러하옵니다."

"허면 무엇을 함구해야 하는지도 잘 알겠구나."


허리를 숙여 인사하자 정국은 미련없이 바로 도화궁을 나섰다. 혹여나 황제처럼 제멋대로 들어가면 어쩌나 했던 것이 무안하도록 망설임 없는 걸음걸이였다.





/




"아...."


옅은 신음과 함께 맑은 눈이 뜨였다. 목이 쓰리고 따가워서 손을 대니 하얀 명주천이 만져진다. 정신을 잃었던 사이 누군가 정성껏 치료해 준 것 같았다.


"마마, 정신이 좀 드십니까. 괜찮으신 것이에요?"

"아, 상궁."


상체를 일으켜 앉던 공주가 걱정스러운 소 상궁의 얼굴을 보고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목이 여전히 따가운 것 말곤 몸이 아프거나 하진 않았다. 좀 자고 일어났더니 되려 몸이 개운한 것 같기도.


"내가 얼마나 잤죠?"

"오래 그러신 것은 아닙니다. 아직 술시(*19시~21시)니까요. 그리고 제겐 응당 하대를 하셔야 하옵니다, 마마."

"아. ㅇ, 알겠..다."


저도 모르는 새에 계속 존대를 하고 있었는지 머쓱해진 황녀는 머리를 긁적였다. 아랫사람에게 하대를 하는 것은 당연지사인데 지금 제 신분이 명확지 않아 헷갈려 하던 것이 언사로도 티가 났나보다. 다들 저를 아직 공주라고 부르고 있긴 하나 냉정하게 따지자면 지금은 공주 신분이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마마. 잠드신 사이 2황자님께서 다녀가셨사옵니다."

"황자님께서?"

"예. 그리고 이것을 아무도 없을 때 읽으라 전하셨습니다."


손가락에 닿는 비단의 감촉이 물처럼 부드러웠다. 급하게 풀어보려던 공주는 곧 정신을 차리고서 모두 물러가 있으라 명했다.


'이 서신을 본다면, 월영각으로. 다른 궁인은 데려오지 말고 조용히 최고상궁만 데려와요. 아마 안내해 줄 겁니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빠르게 글자를 읽던 공주의 동공이 커졌다. 황자가 은밀히 제게 할 말이 있는게 분명하다. 맥없이 정훈에게 끌려다닐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 황궁엔 정국도 있다는 걸 잊었었다. 들은 바로는 황제와 척을 지고 있는 사이라 하던데 그럼 더 생각할 것 없이 정국과 친밀한 사이를 유지해야 했다. 게다가 아까부터 여태 기다리고 있는 거라면 꽤 오랜 시간일 텐데. 지난번 우연히 만났을 때를 기억한 황녀는 곧 조용히 소 상궁을 불러 뒷문으로 도화궁을 빠져나갔다. 그때 본 모습은 분명 좋은 사람이었으니 겁먹지 않아도 될 것이라 생각하면서.




"아직 깨어나셨는지 아닌지도 모르는데 무턱대고 이렇게 기다리실 겁니까."

"내일이면 사저로 가야하니, 황자궁에 박혀있는 것보단 조금이라도 황궁 구경을 하는 게 낫지."

"다시 돌아오실 ㄱ....아니, 것보다 그 서신을 읽으셔도 안 오시면 어찌합니까."


지민은 말하다 말고 제 입을 잠깐 틀어막았다가 주변의 눈치를 본 후 말을 바꾸었다. 발까지 동동 굴러가며 그는 불안해한다. 그 순진무구하던 공주의 선택에 따라 하나뿐인 제 주군의 거사가 다른 결말을 맞이할 수도 있으니 그런 것이다. 딱 봐도 세상물정 모르는 나약하고 순한 여인이었는데. 심지어 이미 은애하는 사람도 있어 보였단 말이다.

"올 거다."


월영각이란 이름의 누각에서 며칠 전, 유월에서의 그 밤처럼 호수의 반영을 보던 정국은 지민의 보챔에 덤덤히 대답했다. 순하고 겁이 많았지만 동시에 똑똑한 여인이었다. 살고 싶다면 무엇을 해야하는지 정도는 알거라 믿었다. 그리고 정국의 계산은 여느때처럼 맞아떨어졌다. 최고상궁 하나만을 대동하고 하얀 잠옷에 또다시 하얀색 쓰개치마를 어깨에 걸친 공주가 종종거리며 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헌데 왜 저리 바삐 뛰어오는 거지? 망국의 공주라고는 하나 그래도 고귀한 신분인 것은 여전한데, 우아함이고 고상함이고 다 제쳐두고 토끼마냥 발을 빠르게 놀리고 있다.


"하... 많이 기다리셨습니까?"

"아..."


그 모습을 의아하게 보고 있던 정국은 제 앞에 당도한 그녀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묻는 말에 순간 뭐라 대답해야하는 지를 까먹었다. 기다린다고 적은 한 마디를 이리 뛰어올 정도로 신경쓸 줄은 몰랐는데. 아무래도 이 사람은 예의 황궁 여인과 같이 보아선 안 될 것 같다.


"아직 밤에는 날이 찹니다. 고뿔에 걸리시겠어요."

"나보단 공주의 옷이 더 얇아 보입니다."

"아, 전 아직 제 몸에 맞는 옷이 마련돼있지 않아서..."


공주가 고개를 숙이며 말을 얼버무리자 옆에서 지민이 대충 눈짓을 했다. 겉옷 안 벗어주고 뭐하냐는 듯한 눈빛이다. 사실 이 자리는 정국이 공주에게 청혼하는 자리였다. 낭만과는 거리가 멀다 하나 그래도 청혼인데, 이 정도의 다정함은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게 지민의 생각이었다. 정국은 따가운 눈총에 못내 제 옷을 벗어 공주의 어깨에 얹었다. 말 그대로, 정말 얹기만 했다.


"ㄱ, 그렇다고 옷을 벗어달라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전 괜찮으니,"

"그대가 그걸 입어야 내가 편합니다. 그냥 그러고 있어요."


만족한 얼굴로 방싯 웃는 지민을 질린다는 눈으로 흘긋 본 정국이 공주의 얼굴은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당황했던 공주는 곧 조그맣게 고맙다고 하며 정국의 옷 속으로 몸을 숨겼다. 체구가 작아서 그러한지 그다지 큰 옷도 아니었는데 몸이 잡아 먹힌 것 같은 모습이다.


"호수를 좋아하는 것 같아서, 저번에 그 곳과 가장 비슷한 곳으로 고르건데... 마음에 듭니까."

"예? 아아... 예쁩니다! 마음에 들어요."


얼마 전 연회에서 밤 산책을 했던 게 생각나 공주는 베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생각보다 섬세한 사람이구나. 근데 내게 왜 만나자고 한 것이지?


"다행이네요. 앞으로 계속 여기서 살 텐데, 이곳 황궁에서도 좋아하는 곳이 있었으면 해서."

"아..."

"폐하께서 독단적으로 자행한 일이라 막을 틈이 없었습니다. 변명이란 건 알지만, 미안해요."


무슨 일인지 굳이 말하진 않았지만 모를 리가 없었다. 소 상궁과 지민이 고개를 숙이고 있자 공주는 곧 괜찮다는 듯 희미하게 웃었다. 아프고 나서인지 그 웃음에 더 힘이 없었다.


"아닙니다. 황자님께서 사과하실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게 생각해준다면 고맙고."


그 보송한 얼굴을 마주하자 정국은 입을 떼기가 더 어려웠다. 처음으로 행동이 망설여지는 순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정국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공주에겐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저와의 국혼은 최선이 아니라 차악이자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유일한 기회일 뿐이니. 사실 거사를 미뤄 공주를 살리고, 혼인 대신 그녀를 다시 자유롭게 해주는 방법도 있었다. 그러나 정국은 기회를 놓치지 않는 사람. 공주가 안쓰러운 건 안쓰러운 거고, 그에게 이건 별개의 문제이자 다신 없을 기회였다. 민가 여식을 황후로 만들지 않을 기회. 반란에 성공한다해도 민씨를 외척으로 만들 수밖에 없었는데, 공주가 이 황궁에 발딛은 이상 전환점이 생긴 거다. 정국은 타고난 천자. 그러니 개인의 감정과 정치를 물과 기름처럼 구분할 수 있는 것임이라.


"난 지금부터 그대에게 좀 힘든 제안을 할 겁니다."

"제안...이요?"

"하나의 계약 같은 거예요. 들으면 수락해야 하는데, 할래요?"

"예?"

"그대에게 지금 두 가지 길이 있는데, 내 생각엔 수락하는 게 좋은 쪽이에요."


정국은 나름 강수를 뒀다. 아무 것도 없는 공주에게 이런 짓을 하는 것 자체가 양심을 찔렀지만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선 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효과적인 방안을 선택해야 했다. 망설이던 공주는 조심스럽게 정국을 올려다 본다.


"수락하는 게 좋은 쪽이라는 거, 확신하십니까?"

"적어도 지금 보다는."


하긴. 공주도 그 말에 수긍하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면 정훈의 황후가 될 것이고, 호석도 없고, 석진은 생사도 모른다. 이보다 더 안 좋아질 순 없었다.


"...받아 들이겠습니다. 허니 말씀하세요, 황자님."


잠깐의 정적이 지나자 공주가 받아들이겠다고 한자 한자 말했다. 나긋한 목소리를 듣자마자 정국의 입매가 싱긋 올라갔다. 기다리는 대답이었다는 듯. 긴장하고 있던 공주는 그 따듯하고 청아한 얼굴에 이상하게도 안심을 했으나 그 다음 이어지는 말은 그녀가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난 곧 반란을 할 겁니다."

"!"

"그 때, 내 황후가 되세요."







----------------------------------------


콘서트 광탈의 아픔을 담은 6,7화..........

[방탄소년단] 적국의 황후 06,07 | 인스티즈


잘 지내셨나요...? 다들 코로나 바이러스 조심하시고 건강하세요..... 당첨되신 분들 축하드리고..... 저처럼 광탈되신 분은.... 랜선 소주 한잔.......흑흑따....































첫글과 막글
· [현재글] [막글] [방탄소년단] 적국의 황후 06,07  8  16일 전
· [첫글] [방탄소년단] 적국의 황후pro  10  3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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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탄소년단] 적국의 황후 02  9  2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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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회원152.111
크흐 ㅠㅠㅠ청혼이라니 우리석진이는대체어케되는것인가ㅠㅠㅠㅠㅠㅠ

근데 공주가 정말 석진이가 가족선택햇다고믿으면언되는데 ㅠㅠㅠ 석진이빼고다죽엇는데 ㅠㅠ 하 정말 심정이복잡하네됴
콘서트 광탈.... 랜선소주 저와같이하셔요 작가님 ㅠㅠㅠ

•••답글
로즈
큽...광탈탄들(성인탄소만..!) 다 한잔씩 하쎄요...
•••
독자1
아니..작가님..광탈이라뇨..광탈이라니!! 못된 추첨제...우리 작가님은 뽑아줬어야지...!!!!
작가님 티켓팅 무조건 하시는 거죠? 소주잔 내려놓고 지금부터 우리 손을 트레이닝 해야 한다구욧!!
피켓팅이겠지만 어떻게든 입성은 해야하는 것 아닙니까...ㅠㅠ
후..광탈의 충격속에서도 이렇게 예쁜 작품으로 찾아와 주셔서 너무 감사드려요...
진짜 많이 기다렸다구욧...!!
호석이 석진이 살려주셔서 감사해요..ㅠㅅㅠ
그리구 우리 여주에게도 정훈이가 그렇고 그런 더러운 손으로 그..응? 아시죠...
그러지 못하게 해주셔서 감사드리고 ㅠㅠ 그냥 흡끅...우리 여주 너무 안쓰러운데 또 이번에
여주의 곁을 지켜줄 소 상궁이라는 사람이 착한 사람인 것 같아서도 감사하고..
진짜 오늘도 너무 재미있게 보고 갑니다..작가님..감사하고 티켓팅 화이팅 해요 우리...!!!!!!!!!!!!!!!!!!♥

오늘 잠깐 나온 윤기에게 발리고 정국이 청혼에 발리고 그냥 녹아버렸네요 진짜...다음 화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답글
로즈
흑흑 티켓팅 힘내자구요ㅠㅠㅠㅠ늘 댓글 예쁘게 남겨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
독자2
아 뒷 얘기가 궁금하네요 콘서트 광탈하셨다니ㅠ 티켓팅은 꼭 성공하세요!!
•••답글
로즈
코마워요....😭
•••
비회원127.112
로즈님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당
•••답글
로즈
잘 보고 계신다니 다행입니다..ㅠ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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