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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결혼의 법칙




김석진. 31세. 서울에서 나고 자랐으며 현재 강남의 한 아파트에 거주 중. 세상은 공평하다, 라는 어쩌면 조금 희망적인 문장은 석진 앞에서 언제나 사상누각처럼 바스라졌다.

방탄그룹 현 회장 김용수의 차남인 석진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재벌 2세였다. 그럼 양심적으로 다른 건 좀 부족할 법도 한데, 석진은 살면서 '부족'이라는 걸 겪어본 적이 없었다. 갖고 싶다고 생각 하기도 전에 웬만한 건 다 옆에 있었고, 어린 나이에 박사학위를 딸 정도의 지성과 집중력도 있었다. 연예인 사이에 있어도 꿀리긴 커녕 단연 돋보이는 외모는 덤이랄까.  

 

보통 이 쯤 되면 부모님과의 불화라던지, 사실 형과 어머니가 다르다던지 하는 흔한 재벌의 불행을 예상할 수 있겠으나 딱히 그런 것도 아니었다. 대한민국의 재벌 2세 치곤 그는 나름 화목하고 평범하게 자랐고(재산은 안 평범함) 부모님은 잉꼬부부였으며 사랑이나 관심 역시 남들만큼은 받아왔다.

기업의 후계자인 형과는 그다지 친하지 않았지만 그게 형의 자리를 탐내기 때문은 아니었다. 석진은 그런 데 별 욕심이 없는 편이었으니까. 후계자 자리를 탐내지 않는 재벌 2세라. 그럼 그냥 술과 여자, 놀고 먹기 좋아하는 안하무인 도련님인가 싶겠지만 석진은 그런 부류도 아니었다.  

이러니 석진의 주변에 사람들이 항상 많은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세상의 이치였다. 뭐라도 얻어보려는 사람들, 잘 보이고 싶은 사람들, 석진의 관심을 받고 싶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질량 보존의 법칙처럼 괜찮은 사람들도 꽤 있었다. 그걸 걸러내는 건 좀 성가신 일이었으나 나이를 먹어가면서 대충 대화 몇 마디, 혹은 눈빛 한 번만 보고도 제게 필요없는 사람을 거르고 쳐 내는 능력도 생겼다.

사실 석진은 겉으로는 상냥하고 다정한 사람이었지만 그렇게 순하기만 한 사람은 아니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순한 것과는 거리가 있는 사람이었다. 정에 얽매이는 걸 싫어했고, 선을 넘는 걸 싫어했다. 성격이 아예 쌀쌀맞진 않지만 제 혐오감이나 귀찮음을 숨기고 마냥 착하게 굴만큼 유순한 건 아니었다. 속된 말로 어느 정도 성깔이 있는 편이란 뜻이다. 그래서인지 석진은 온화한 분위기 속에서도 특유의 냉철함이나 견고함이 느껴져 쉽게 대하기 힘든 사람이었다.  

 

이런 성격인 덕인지 탓인지 주변에 사람은 많아도 아주 친한 사람은 몇 되지 않았는데, 대학시절 만난 남준은 그중 아주 편한 사람에 속했다. 남준은 석진의 표정만 봐도쟤가 지금 무슨 생각인가를 꿰뚫어 볼 수 있었다. 

 

 

"맞다. 너 여학생들 사이에서 어떻게 불리는 지 아냐?" 

"어떻게 불리는데?" 

 

오랜만에 연구실에 놀러 온 남준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강의 준비에 몰두하던 석진은 무심하게 물었다. 와,진짜 하나도 안 궁금해 보인다, 하는 남준의 대꾸가 좀 웃겼는지 미묘하게 입매가 말려 올라가는 것 같기도 하고.  

 

"결혼은 저런 남자랑." 

"뭐?" 

"복도에서 들었어. 결혼은 너 같은 남자랑 해야되는 거라더라. 뭘 몰라도 한참 몰라. 아직 애기들이라서 그런가." 

"내가 뭐." 

"진짜 몰라서 묻는 건 아니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봐라. 너 연서씨한테 제일 최근에 연락한 거 언제야." 

 

남준의 추궁에 석진은 입을 다물었다. 언제더라. 저번 주말에 만났으니까 그 땐 전화했던 거 같은데.  

 

"거봐. 너 그러면 진짜 조만간 차여, 임마." 

"어떻게 매일 연락을 해. 그리고 한 번하면 잘 때까지 안 놔줘서 귀찮아." 

"너가 하도 무심하니까 연서씨도 애타서 그러겠지." 

 

석진은 잠시 바쁘던 손가락을 멈추고 자신의 연애를 곰곰 되돌아봤다. 그렇게 무심하진 않았던 거 같은데.

2살 아래의 여자친구인 연서는 한 사교 파티에서 만난 사람이었다. 귀찮아서 안 가고 싶었지만 이번 건 중요인사들도 많이 오는 자리니까 얼굴만 비추고 가라는 어머니의 말에 석진은 정말 얼굴만 비추고 가려고 했었다. 뜻대로 되진 않았지만.

 

"안녕하세요, 저 연화대학교 무용과 졸업한 유연서라고 해요." 

"네...그런데요?" 

"앗, 저 모르시는구나...저는 선배님 얘기 많이 들었는데..! 경영학과 졸업하신 김석진 선배님 맞으시죠?" 

"네, 제가 타과생은 잘 몰라서. 죄송해요."(사실 본인 과 사람들도 잘 모름) 

"아니에요. 괜찮으시면 저랑 잠깐 산책이라도 하실래요? 여기 옥상정원이 그렇게 예쁘대요." 

"그래요." 

 

피곤한 상태로 처음 만났던 연서는 생각보다 소탈하고 괜찮은 사람이었다. 말도 좀 통하고 사소한 취향들마저 비슷한. 그래서 몇 번의 만남 후에 시작된 연애는 2년째 진행중이었다. 숱한 연애를 했던 석진에게 연서와의 연애는 가장 편하다고 느껴졌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뭔가 그랬다. 연서가 털털하고 친화력이 좋아서 그랬나.

그런 연애를 남준이 타박하자 석진은 자신이 뭔가 소홀했던 게 있었던가, 하고 생각했다. 성숙한 어른들이었으니 보통의 연인들이 할 만한 건 다 했고 크게 싸운 적도 없고 웬만한 건 연서가 하자는 대로 다 맞춰줬었다. 아무리바빠도 3일에 한 번은 꼭 연락한 거 같은데 뭐가 문제였던 건지 석진은 이해가 안 됐다.


"너 연서씨랑 있는 거 보면 연서씨 혼자 연애하는 거 같애. 티는 안 내도 얼마나 속상하겠냐."

"내가 그 정도야..?"

"어, 그 정도야. 남의 연애사에 왈가왈부하는 거 미안한데 너는 좀 해야겠더라."

"...그런가."

"학생들 대하는 거 반이라도 해. 아까 학생이랑 얘기하는 거 보고 너 아닌 줄 알았다."

"그건 일이잖아."

"그래...네가 그럼 그렇지 뭐..."


기대도 안 한단 듯이 적당한 환멸이 섞인 얼굴로 석진을 보던 남준은 석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암튼 수고해라, 나도 일해야 돼서. 다음엔 밥이라도 먹자."

"어. 조심해서 가."


달칵, 하고 남준이 나가자 석진은 목이 뻐근한 듯 기지개를 폈다. 문득 손목의 시계로 눈을 돌리자 벌써 퇴근할 무렵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남준이 한 말이 신경 쓰였던지라 석진은 연서에게 전화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여주가 휴학했지만 학교는 아무런 기색없이 가을날의 단풍만 선연했다. 여주의 부재에 조금은 허전해 하던 친한 동기 몇몇 역시 바쁜 일상에 휩쓸려 점점 허전한 감각조차 잊어갔다.

다만 김석진 교수의 '현대사회와 기업경영' 수업을 다음학기에 바로 재수강하게 된 호석은(세컨드의 충격으로 기말고사 망함) 수업을 들을 때마다 여주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당연했다. 석진을 그렇게나 좋아하던 여주였는데 차이고 바로 휴학이라니. 한 마디 말도 없다가 이렇게나 갑자기. 무슨 일인지 자세히 얘기를 해주지 않았으니, 나름의 사정이야 있겠지만 아마 석진이 휴학사유의 8할을 차지하지 않았을까 짐작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호석은 짐작만 했어야 했다. 정말, 딱 짐작만...


"야, 윤기야. 어디냐."

- 집. 공강임. 왜.

"야 나 밥 먹을 사람이 읎어. 원래 이 수업 끝나면 여주랑 밥 먹었는데, 여주 휴학했잖아."

- 혼자 먹어, 그럼. 4학년은 원래 혼자 먹는거야.

"너 집도 코 앞이잖아. 집에서 청승떨지말고 그냥 나와서 나랑 밥 먹어."

- 귀찮아.

"아아아아앙앜 미뉸기ㅠㅠㅠㅠㅠ나오라고ㅠㅠㅠㅠ"

-아씨 귀 아파 새끼야. 배여주는 왜 갑자기 휴학을 했다냐, 진짜.

"몰라, 말도 제대로 안하고 가버리고. 걔 본가가 부산이라 만나기 힘든데 연락도 잘 안 받더라. 고거 김교수님한테 차여가지고 홧김에 휴학한거 아닌가 몰ㄹ.........."

-뭐. 말을 하다 마냐.

"야, 일단 끊어.."

-뭔ㄷ,


호석은 지금 제 입을 꼬매버리고 싶었다. 여주야 미안. 선배가 많이 못났어.


"안녕하심니까, 교수님..."

"아, 통화 마저 해도 됐는데."


호석의 머리에는 지금 망했다는 세글자밖에 남지 않았다. 요놈의 조동아리 나쁜 조동아리. 석진은 머쓱한 얼굴로 뒷목을 긁적이는 걸로 봐서 통화내용을 다 들은 게 분명했다. 아까 나가셔놓고 왜 아직도 여기 계시는 거냐고 뻔뻔하게 우기고라도 싶은 심정이었다.


"그... 호석 학생."

"ㄴ, 넵. 교수님."

"여주 학생 휴학했어요?"

"아, 네. 이번 학기에 휴학을 하긴 했는데 왜 휴학했는지는 저도 잘 모르는 거라서요, 그러니까 그게 교수님 때문인지는 아무도 모르고 여주만 아는 거고요, 네...아무튼 죄송합니다.."


속사포처럼 정리되지 않은 말을 줄줄 늘어놓던 호석은 곧 체념하고 고개를 숙였다. 입꼬리가 어깨와 함께 시옷처럼 추욱 내려간다.


"아뇨, 괜찮습니다. 학생도 신경쓰지 말고 점심 맛있게 먹어요."

"예..."


신경을 어떻게 안 씁니까, 교수님. 호석은 멀어지는 석진의 등을 향해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자신의 이 어마어마한 실수를 여주에게 알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교수님이 부러 다른 사람한테 말씀하실 것 같진 않고. 모르는 게 약이니까 우선은 말 안 하는게 나을 거 같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여주야, 미안하다. 너 복학하면 난 졸업했겠지만 네가 원하면 한 학기 정도 노예로 살아볼게...




어떤 일이 생겼는 지 알 턱이 없는 가엾은 배여주가 열심히 저녁 알바를 하고 있는 동안, 석진은 오랜만에 본가로 가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으시길래 갑자기 부르시는 건지. 보통 때처럼 아들~보고 싶으니까 와서 저녁 먹고 가~하는 말투가 아니었던지라 꽤 심각한 일이라는 것쯤은 예상을 할 수 있었다. 근데 이렇게까지 큰 일일 줄이야.

형이 제 외국인 여자친구와 함께 사랑의 도피를 해버렸단다. 보수적인 부모님이 외국인 며느리는 안 된다했더니 무턱대고 도망쳐버린 거였다. 울먹거리는 어머니와 역정을 내는 아버지 사이에서 석진은 순간 뭘 잘못 들었나 했다. 형 여자친구가 외국인인 걸 알기는 커녕 여자친구가 있는지도 몰랐던 석진은 상황파악이 끝나자 속으로 낮게 욕을 읊조렸다. 

아무리 그 여자가 좋았어도 그렇지, 열 살짜리 애도 안 할 거 같은 짓을 서른 둘이나 먹은 형이 했다는 게 어처구니가 없고 한심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빅엿을 투척하고 간 게 심히 짜증스럽기도 했다. 형의 부재는 곧 자신이 그 자리를 메꿔야 한다는 뜻이었으니까. 

솔직히 마음만 먹으면 당장에 잡아올 수 있지만서도 김 회장은 이미 큰아들을 내려놓은 듯했다. 못난 놈 같으니라고! 김 회장의 목소리에 분노가 형형하다. 평소 화를 잘 내는 성격이 아니건만 믿었던 아들놈에게 뒤통수를 맞은 게 상당히 열받는 모양이었다. 


"석진아. 너한텐 미안한 말이지만 잠시만 회사로 들어올 순 없겠니. 자리를 비워둘 순 없지 않느냐." 

"그래, 교수는 너 하고 싶을 때 언제든 돌아올 수 있잖아,응?" 


회장 부부는 곧 석진에게로 눈을 돌렸다. 재벌임에도 불구하고 평소 석진에게 어떤 압박도 가하지 않던 부모님이었으나 이번은 급한 일이니 어쩔 수 없어 보였다. 회사의 후계자가 사라졌다는 말이 돌면 주가가 급락할 게 분명하니까. 하루아침에 교수에서 회사의 미래를 책임질 후계자가 되어버린 석진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는 듯 한숨을 내쉬는 부모님을 뒤로하고 석진은 오랜만에 제 방으로 올라갔다. 

석진이 이렇게 쉽게 오케이 할 수 있었던 건 지금 하고 있는 일에 크게 미련이 없기 때문이었다. 재수없게 들릴 수도 있지만 애초에 교수도 간절히 하고 싶어서 된 게 아니라 그냥 하다보니 된 거였다. 아직 정교수도 아니었고. 아버지가 이사장으로 있는 연화대에서 근무하는 거나 아버지가 회장으로 있는 계열사에서 근무하는 거나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이다. 

형의 직책은 방탄그룹의 면세점을 비롯한 힛맨뱅 백화점 총괄사장직이었는데 그 자리를 석진이 맡게 된 셈이었다. 취임하면 백화점 이름부터 바꿔야겠는데. 이름이 힛맨뱅이 뭐야, 저러면 누가 간다고. 

그동안은 제 관할이 아니기에 굳이 참견하지 않았지만 석진은 이름이 구린 게 적자의 원인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백화점 사업은 다른 계열사들에 비해 매출이 현저히 적어 김 회장의 골칫거리였으니. 회사 생활이 시작부터 순탄치 않을 것 같다는 예감에 석진은 옅게 인상을 쓰고 머리를 쓸어넘긴다. 

여주의 휴학 소식에 정말 저 때문인가 싶어 싱숭생숭했던 마음과 서랍에 넣어놓고 여태 안 읽었던 편지를 읽어봐야겠단 생각은 형의 돌발행동에 묻혀 그대로 잊혀졌다. 



석진의 취임은 재계의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언론에선 김석훈(이시대 최고의 사랑꾼) 전 사장이 아버지의 눈밖에 나 버려졌다느니 숨죽이던 둘째의 반란이 아니냐느니 저들끼리 상상의 나래를 펼쳐댔다. 그렇지만 아닌뒈 사장이 애인한테 찐사랑이어서 튀었는뒈 해도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단 걸 알기에 부러 석훈의 얘기를 기삿거리로 만들지는 않았다. 떠벌릴만 한 일도 아니었고. 

그렇다보니 그 화살은 죄 석진이 받아내야했다. 밖은 물론이고 회사 내부 사람들도 교수나 하던 사람이 실무적인 경영을 할 수나 있겠나 하며 은근히 석진의 신경을 긁었다. 안 그래도 맡은 일은 무조건 잘해야 하는 칼 같은 성격인데, 이런 상황들은 석진을 더 예민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우선 명칭부터 바꾸죠. 힛맨뱅은 좀 아닌 거 같은데." 

"예? 명칭을요?" 


취임 후 바로 백화점 이름부터 손보는 석진의 행보에 회사 관계자들은 당황했다. 회장님이 지으신 건데..? 참나 회장님이 지으신 걸 어떻게 쉽게 바꿔. 


응, 하루만에 바뀌었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석진에게 김회장이라는 든든한 빽이 있음을 망각했다. 아내바보였던 김 회장은 아내를 쏙 빼닮은 석진을 어화둥둥 했으니. 그래서 힛맨뱅 백화점은 곧 BT 백화점이 됐으며 그 이후로도 석진은 새로운 사장으로서 열일을 멈추지 않았다. 


"현대사회에서 백화점 같은 오프라인 쇼핑몰은 온라인과 차별화를 둬야 합니다. 단순한 쇼핑몰은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없으니까." 

"어떤 차별화를 말씀하시는 건지.." 

"백화점 내에 문화콘텐츠적 요소를 많이 두세요. 문화센터에서 그치지 말고 아티스트들이 다양하게 작품을 전시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든다던가, 뭐 그런거. 건물 위치가 좋아서 전망도 괜찮은 편이니까 옥상은 신경써서 야경스팟으로 만들고. 이번에 바뀐 광고모델한테 거기서 셀카 찍어서 sns 올려달라고 하면 바로 반응 올 거예요." 

"하긴 아미 씨가 워낙 글로벌 스타니까 반응이 오긴 할 겁니다. 아! 사장님 혹시 지역의 랜드마크가 되는 전략을 쓰자, 뭐 그런..!" 


비서의 감탄에 석진은 대충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손에 들린 서류를 내밀었다. 


"그리고 명품 브랜드 거기 톰브라운부터 순서대로 3개 입점하고 요식업 브랜드 표시한 거 2개 입점할 수 있도록 진행합시다. 조금 고급스럽고 젊은 이미지를 부여해서 백화점 자체를 브랜드화 해보는 방향으로." 

"그래도 괜찮을까요? 명품은 몰라도 요식업은 단시간에 폐점할 가능성이," 

"괜찮아요, 분석했던 업체들 중 비전이 있는 데로만 선별한 거니까. 우선은 시도해볼 만해요." 


언제 업체들의 적합성까지 다 따져보고 온 건지 석진은 자신의 결정에 확신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확신이 틀리지 않았단 것을 증명하듯 석진이 이끄는 BT 백화점은 반 년만에 경쟁사의 매출을 훨씬 넘어서며 자연스레 자체 최고기록을 갱신하는 기적을 보인다. 





해가 바뀌고, 벚꽃이 나부끼는 4월이 다시 돌아왔다. 석진은 연구실이 아니라 번지르르한 사장실에서 봄을 맞이했다. 취임 후 약 7개월 간 일에만 몰두했던지라 살이 좀 빠지고 피부는 조금 거칠어졌다. 존잘 불변의 법칙인지 그 얼굴이 어디가진 않았지만.  

그러나 한국의 어머니들이 으레 그러하듯이 석진의 어머니는 애가 너무 여유가 없고 일에 찌들어보인다며 전전긍긍했다. 혼자 사는 석진이 아침도 매일 거르고 거의 일만 하는 모습을 보며 보약이라도 해먹여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김 회장도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가끔 전화해서 쉬어가면서 해라며 넌지시 말했지만 대답만 네, 할 뿐 전혀 효력이 없었다. 

쟤가 결혼을 하면 좀 안정감을 가지려나. 현숙이네 아들은 올해 장가간다고 했는데. 그러고보니 진이가 올해 벌써 서른 하나네..! 

석진의 어머니는 생각을 거듭하다 당신 아들의 나이를 깨닫고 갑작스레 결혼에 꽂혀버렸다. 서른 하나가 그렇게 늦은 나이는 아니다만 저러고 있는 걸보니 닥달하지 않으면 영영 결혼도 안하고 살 기세였기에 그녀는 괜히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젠 곁에 남은 유일한 자식이자 기업의 후계자이니 결혼이 신경쓰일 수밖에 없었다. 김 회장은 맹목적인 아내바보였으므로 부인이 그러자고 하면 그대로 따라가는 사람이었으니, 이제 석진 앞에 남은 건 미혼 30대 남녀가 제일 무서워한다는 부모님의 "결혼은 언제할거냐" 공격이었다. 


"너 만나는 아가씨도 있다면서. 지금처럼 결혼하기 좋을 때가 어딨니." 

"그래라. 백화점은 너 온 뒤로 자리를 잡았으니 이젠 네가 자리를 잡아야지." 

"연서는 아직 결혼 생각없을 거예요. 이제 29살이라." 


연서는 무용과를 졸업하고 취미로 운동을 배웠으며 지금은 요가 학원을 운영하며 강사를 하고 있었다. 생계가 목적이 아니라 취미로 하는 일이었지만 연서는 자기가 하는 일에 꽤 자부심과 재미를 붙인 차였다. 그러니 석진은 연서가 아직은 결혼보단 일을 할 시기라고 생각한 거였고. 평소에도 결혼의 "결" 도 꺼내지않는 연서니까. 

그리고 사실 석진 스스로도 아직은 결혼을 생각하고 있지 않았었다. 연서는 좋은 애지만 결혼이라. 어려운 질문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연서를 핑계삼아 결혼 잔소리를 벗어나보려고 한 건데, 지금껏 안하시던 압박은 결혼시킬 때 하려고 아껴두신 건지 부모님(실상 어머니)은 물러서지 않았다. 


"29이면 결혼하기 딱 좋네에~ 결혼 생각없으면 네가 심어주면 되지. 연서 씨랬나? 그 아가씨가 결혼 마음 먹는건 너하기에 달린거야." 

"그래, 아버지도 너희 엄마 꼬신다고 힘 좀 썼었어. 나랑 결혼하고 싶게 만들려고." 

"어머, 옛날 생각난다. 그게 벌써 몇 년 전이죠?" 


의식의 흐름이 따로 없다. 두 분이 옛날옛적 러브스토리를 회상하고 있는 동안 석진은 지금이다 싶어 조용히 본가를 빠져나와 편안한 자기 집으로 차를 돌렸다. 

운전을 하면서도, 집에 돌아와서도, 자기 전 통화로 연서의 하루 일과를 들어주면서도, 오늘따라 끈질겼던 잔소리 탓인지 석진은 꽤 깊이 결혼에 대해 생각했다. 연서랑 결혼하면 잘 살 수 있을까.  

연서만큼 편한 여자가 지금껏 없긴 했다. 연서랑 지내는 시간은 크게 설레진 않았지만 그렇기에 더 아늑하고 편했다. 두 사람 다 결혼에 큰 낭만을 가질만큼 어린 나이는 아니었으니 서로 현실적으로 잘 살 수 있을 거 같고.

어쩌면 결혼은 그저 연애에 책임감이 더해진 것일지도 몰랐다. 그렇담 연서랑 그 결혼이란 걸 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 같았다. 어차피 언젠가 해야할 결혼이라면, 결국 그 끝엔 연서가 있지 않을까. 




"오빠!" 

 

[방탄소년단/김석진] 계약결혼의 법칙 02 | 인스티즈

 

"뛰지마. 넘어질라." 

"오빠 보고 싶어서 뛰어왔지. 우리 저번 주에 보고 못 봤잖아." 

"오빠 보고 싶었어? 타, 밥 먹으러 가자. 너 파스타 먹고 싶댔나?" 

"아니 나 오늘은 고기 썰고 싶어! 체중 관리한다고 고기 못 먹은지 오래 됐어, 나." 

"그래, 그럼 고기 먹자." 


근 일주일 만의 만남에 신났는지 연서는 지치지도 않고 내내 종알거렸다. 석진은 귀찮지도 않은지 응 또는 그랬어? 따위의 말로 다정하게 받아주며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저녁을 먹으면서도 말을 하는건 오직 연서였고 들으면서 적당한 반응을 하는 게 석진의 몫이었다. 사실 석진은 그 때 연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안 들렸다. 왜냐면 오늘 프로포즈할 거니까. 정신이 내내 딴 곳이었다. 


"오빠 내 얘기 듣고있어?" 

"아, 미안. 뭐라고 했더라." 

"치. 정신을 어디 두고 있는 거야아~" 


연서의 애교섞인 투정에 석진은 푸스스 웃는다. 홀린 듯 석진이 웃는 걸 보고 있던 연서는 곧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금세 마음을 다잡는 듯 얼굴의 그늘을 지웠다. 


"오빠. 우리 오늘은 한강변 들렀다 갈까?" 

"한강?" 

"응. 오랜만에 가고 싶어." 

"그래, 그러자." 


차에 타서 안전밸트를 매자마자 연서는 한강에 가고 싶다고 했다. 갑자기 웬 한강인가 싶었지만 늘 그랬듯 석진은 그러자고 했다. 연서는 드라이브 내내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놓고서 아까보단 한결 조용하고 차분하게 굴었다. 갑자기 얘가 봄을 타는 건가. 아니면 무슨 일이 있나. 안 그래도 오늘 평소보다 말이 좀 많긴 했는데.


"우리 처음 만났을 때, 옥상에서 산책하던거 기억나? 그 때 야경 진짜 예뻤는데." 

"응." 


그 때 너도 예뻤어, 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어쩐지 다 포기한 것 같은 연서의 눈동자에 석진은 불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설마, 지금.


"그 때나 지금이나 경치는 예쁜데..." 

"연서야," 

"헤어지자, 오빠." 


연서의 팔을 잡으려던 석진의 손이 그대로 멈췄다. 블레이저 안주머니에 넣은 반지 케이스의 모서리가 가슴께를 찌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오빠 너무 완벽하고 다정해. 그건 내가 잘 알아, 오빠 같은 사람 또 없다는 거. 근데 난 좀 더 나한테 목매는 사람이 좋아. 일이랑 나 중에 선택하라고하면 당연히 나를 선택할 사람. ...오빠는, 내가 없어도 너무 잘 살 사람 같아." 

"...내가 너한테 확신을 못 줬나보네." 

"미안. 솔직히 여자나이 스물아홉이면 결혼 생각 안 할 수가 없는데, 오빤 나한테 결혼 얘기 꺼내지도 않았잖아. 결혼 생각도 없어보였고. 그냥.. 여러모로 지쳤어." 


결혼, 당연히 안 하고 싶어하는 줄 알았는데. 내가 아직 너를 잘 몰랐나. 

아니, 사실 눈치챘으면서 확신이 없어 부러 모르는 척 비겁하게 미뤄왔던 것일지도 몰랐다. 너를 평생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확신이 없어서. 


"그럼 나 이만 갈게. 그래도 종종 만나면 인사는 하자. 잘 있어, 오빠." 

"데려다 줄게. 늦었어." 

"아냐, 괜찮아. 혼자 갈 수 있어." 

"...연서야." 

"응..?" 

"내가 너 많이 좋아했어. 조심해서 가. 그리고 종종 만나도 인사는 하지 말고. 나 그런거 잘 못하는 거 알잖아." 

"...." 


연서는 어쩐지 미련이 담긴 눈으로 살풋 웃더니 천천히 사라졌다. 석진은 시야에서 연서가 사라지자마자 다시 차에 타서 운전석에 앉았다. 앉자마자 몸에 힘이 탁 풀리는 기분이다. 

3년간의 연애는 이렇게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그래도 석진은 딱히 연서를 원망하지도 잡으려 하지도 않았다. 이미 지쳐버렸다는 애를 굳이 붙들어서 더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다시 만나봤자 연서는 자기에게 똑같은 이유로 지치게 마련일 테니. 

 

 

[방탄소년단/김석진] 계약결혼의 법칙 02 | 인스티즈



계약결혼의 법칙




김석진. 31세. 서울에서 나고 자랐으며 현재 강남의 한 아파트에 거주 중. 세상은 공평하다, 라는 어쩌면 조금 희망적인 문장은 석진 앞에서 언제나 사상누각처럼 바스라졌다.

방탄그룹 현 회장 김용수의 차남인 석진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재벌 2세였다. 그럼 양심적으로 다른 건 좀 부족할 법도 한데, 석진은 살면서 '부족'이라는 걸 겪어본 적이 없었다. 갖고 싶다고 생각 하기도 전에 웬만한 건 다 옆에 있었고, 어린 나이에 박사학위를 딸 정도의 지성과 집중력도 있었다. 연예인 사이에 있어도 꿀리긴 커녕 단연 돋보이는 외모는 덤이랄까.  

 

보통 이 쯤 되면 부모님과의 불화라던지, 사실 형과 어머니가 다르다던지 하는 흔한 재벌의 불행을 예상할 수 있겠으나 딱히 그런 것도 아니었다. 대한민국의 재벌 2세 치곤 그는 나름 화목하고 평범하게 자랐고(재산은 안 평범함) 부모님은 잉꼬부부였으며 사랑이나 관심 역시 남들만큼은 받아왔다.

기업의 후계자인 형과는 그다지 친하지 않았지만 그게 형의 자리를 탐내기 때문은 아니었다. 석진은 그런 데 별 욕심이 없는 편이었으니까. 후계자 자리를 탐내지 않는 재벌 2세라. 그럼 그냥 술과 여자, 놀고 먹기 좋아하는 안하무인 도련님인가 싶겠지만 석진은 그런 부류도 아니었다.  

이러니 석진의 주변에 사람들이 항상 많은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세상의 이치였다. 뭐라도 얻어보려는 사람들, 잘 보이고 싶은 사람들, 석진의 관심을 받고 싶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질량 보존의 법칙처럼 괜찮은 사람들도 꽤 있었다. 그걸 걸러내는 건 좀 성가신 일이었으나 나이를 먹어가면서 대충 대화 몇 마디, 혹은 눈빛 한 번만 보고도 제게 필요없는 사람을 거르고 쳐 내는 능력도 생겼다.

사실 석진은 겉으로는 상냥하고 다정한 사람이었지만 그렇게 순하기만 한 사람은 아니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순한 것과는 거리가 있는 사람이었다. 정에 얽매이는 걸 싫어했고, 선을 넘는 걸 싫어했다. 성격이 아예 쌀쌀맞진 않지만 제 혐오감이나 귀찮음을 숨기고 마냥 착하게 굴만큼 유순한 건 아니었다. 속된 말로 어느 정도 성깔이 있는 편이란 뜻이다. 그래서인지 석진은 온화한 분위기 속에서도 특유의 냉철함이나 견고함이 느껴져 쉽게 대하기 힘든 사람이었다.  

 

이런 성격인 덕인지 탓인지 주변에 사람은 많아도 아주 친한 사람은 몇 되지 않았는데, 대학시절 만난 남준은 그중 아주 편한 사람에 속했다. 남준은 석진의 표정만 봐도쟤가 지금 무슨 생각인가를 꿰뚫어 볼 수 있었다. 

 

 

"맞다. 너 여학생들 사이에서 어떻게 불리는 지 아냐?" 

"어떻게 불리는데?" 

 

오랜만에 연구실에 놀러 온 남준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강의 준비에 몰두하던 석진은 무심하게 물었다. 와,진짜 하나도 안 궁금해 보인다, 하는 남준의 대꾸가 좀 웃겼는지 미묘하게 입매가 말려 올라가는 것 같기도 하고.  

 

"결혼은 저런 남자랑." 

"뭐?" 

"복도에서 들었어. 결혼은 너 같은 남자랑 해야되는 거라더라. 뭘 몰라도 한참 몰라. 아직 애기들이라서 그런가." 

"내가 뭐." 

"진짜 몰라서 묻는 건 아니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봐라. 너 연서씨한테 제일 최근에 연락한 거 언제야." 

 

남준의 추궁에 석진은 입을 다물었다. 언제더라. 저번 주말에 만났으니까 그 땐 전화했던 거 같은데.  

 

"거봐. 너 그러면 진짜 조만간 차여, 임마." 

"어떻게 매일 연락을 해. 그리고 한 번하면 잘 때까지 안 놔줘서 귀찮아." 

"너가 하도 무심하니까 연서씨도 애타서 그러겠지." 

 

석진은 잠시 바쁘던 손가락을 멈추고 자신의 연애를 곰곰 되돌아봤다. 그렇게 무심하진 않았던 거 같은데.

2살 아래의 여자친구인 연서는 한 사교 파티에서 만난 사람이었다. 귀찮아서 안 가고 싶었지만 이번 건 중요인사들도 많이 오는 자리니까 얼굴만 비추고 가라는 어머니의 말에 석진은 정말 얼굴만 비추고 가려고 했었다. 뜻대로 되진 않았지만.

 

"안녕하세요, 저 연화대학교 무용과 졸업한 유연서라고 해요." 

"네...그런데요?" 

"앗, 저 모르시는구나...저는 선배님 얘기 많이 들었는데..! 경영학과 졸업하신 김석진 선배님 맞으시죠?" 

"네, 제가 타과생은 잘 몰라서. 죄송해요."(사실 본인 과 사람들도 잘 모름) 

"아니에요. 괜찮으시면 저랑 잠깐 산책이라도 하실래요? 여기 옥상정원이 그렇게 예쁘대요." 

"그래요." 

 

피곤한 상태로 처음 만났던 연서는 생각보다 소탈하고 괜찮은 사람이었다. 말도 좀 통하고 사소한 취향들마저 비슷한. 그래서 몇 번의 만남 후에 시작된 연애는 2년째 진행중이었다. 숱한 연애를 했던 석진에게 연서와의 연애는 가장 편하다고 느껴졌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뭔가 그랬다. 연서가 털털하고 친화력이 좋아서 그랬나.

그런 연애를 남준이 타박하자 석진은 자신이 뭔가 소홀했던 게 있었던가, 하고 생각했다. 성숙한 어른들이었으니 보통의 연인들이 할 만한 건 다 했고 크게 싸운 적도 없고 웬만한 건 연서가 하자는 대로 다 맞춰줬었다. 아무리바빠도 3일에 한 번은 꼭 연락한 거 같은데 뭐가 문제였던 건지 석진은 이해가 안 됐다.


"너 연서씨랑 있는 거 보면 연서씨 혼자 연애하는 거 같애. 티는 안 내도 얼마나 속상하겠냐."

"내가 그 정도야..?"

"어, 그 정도야. 남의 연애사에 왈가왈부하는 거 미안한데 너는 좀 해야겠더라."

"...그런가."

"학생들 대하는 거 반이라도 해. 아까 학생이랑 얘기하는 거 보고 너 아닌 줄 알았다."

"그건 일이잖아."

"그래...네가 그럼 그렇지 뭐..."


기대도 안 한단 듯이 적당한 환멸이 섞인 얼굴로 석진을 보던 남준은 석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암튼 수고해라, 나도 일해야 돼서. 다음엔 밥이라도 먹자."

"어. 조심해서 가."


달칵, 하고 남준이 나가자 석진은 목이 뻐근한 듯 기지개를 폈다. 문득 손목의 시계로 눈을 돌리자 벌써 퇴근할 무렵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남준이 한 말이 신경 쓰였던지라 석진은 연서에게 전화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여주가 휴학했지만 학교는 아무런 기색없이 가을날의 단풍만 선연했다. 여주의 부재에 조금은 허전해 하던 친한 동기 몇몇 역시 바쁜 일상에 휩쓸려 점점 허전한 감각조차 잊어갔다.

다만 김석진 교수의 '현대사회와 기업경영' 수업을 다음학기에 바로 재수강하게 된 호석은(세컨드의 충격으로 기말고사 망함) 수업을 들을 때마다 여주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당연했다. 석진을 그렇게나 좋아하던 여주였는데 차이고 바로 휴학이라니. 한 마디 말도 없다가 이렇게나 갑자기. 무슨 일인지 자세히 얘기를 해주지 않았으니, 나름의 사정이야 있겠지만 아마 석진이 휴학사유의 8할을 차지하지 않았을까 짐작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호석은 짐작만 했어야 했다. 정말, 딱 짐작만...


"야, 윤기야. 어디냐."

- 집. 공강임. 왜.

"야 나 밥 먹을 사람이 읎어. 원래 이 수업 끝나면 여주랑 밥 먹었는데, 여주 휴학했잖아."

- 혼자 먹어, 그럼. 4학년은 원래 혼자 먹는거야.

"너 집도 코 앞이잖아. 집에서 청승떨지말고 그냥 나와서 나랑 밥 먹어."

- 귀찮아.

"아아아아앙앜 미뉸기ㅠㅠㅠㅠㅠ나오라고ㅠㅠㅠㅠ"

-아씨 귀 아파 새끼야. 배여주는 왜 갑자기 휴학을 했다냐, 진짜.

"몰라, 말도 제대로 안하고 가버리고. 걔 본가가 부산이라 만나기 힘든데 연락도 잘 안 받더라. 고거 김교수님한테 차여가지고 홧김에 휴학한거 아닌가 몰ㄹ.........."

-뭐. 말을 하다 마냐.

"야, 일단 끊어.."

-뭔ㄷ,


호석은 지금 제 입을 꼬매버리고 싶었다. 여주야 미안. 선배가 많이 못났어.


"안녕하심니까, 교수님..."

"아, 통화 마저 해도 됐는데."


호석의 머리에는 지금 망했다는 세글자밖에 남지 않았다. 요놈의 조동아리 나쁜 조동아리. 석진은 머쓱한 얼굴로 뒷목을 긁적이는 걸로 봐서 통화내용을 다 들은 게 분명했다. 아까 나가셔놓고 왜 아직도 여기 계시는 거냐고 뻔뻔하게 우기고라도 싶은 심정이었다.


"그... 호석 학생."

"ㄴ, 넵. 교수님."

"여주 학생 휴학했어요?"

"아, 네. 이번 학기에 휴학을 하긴 했는데 왜 휴학했는지는 저도 잘 모르는 거라서요, 그러니까 그게 교수님 때문인지는 아무도 모르고 여주만 아는 거고요, 네...아무튼 죄송합니다.."


속사포처럼 정리되지 않은 말을 줄줄 늘어놓던 호석은 곧 체념하고 고개를 숙였다. 입꼬리가 어깨와 함께 시옷처럼 추욱 내려간다.


"아뇨, 괜찮습니다. 학생도 신경쓰지 말고 점심 맛있게 먹어요."

"예..."


신경을 어떻게 안 씁니까, 교수님. 호석은 멀어지는 석진의 등을 향해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자신의 이 어마어마한 실수를 여주에게 알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교수님이 부러 다른 사람한테 말씀하실 것 같진 않고. 모르는 게 약이니까 우선은 말 안 하는게 나을 거 같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여주야, 미안하다. 너 복학하면 난 졸업했겠지만 네가 원하면 한 학기 정도 노예로 살아볼게...




어떤 일이 생겼는 지 알 턱이 없는 가엾은 배여주가 열심히 저녁 알바를 하고 있는 동안, 석진은 오랜만에 본가로 가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으시길래 갑자기 부르시는 건지. 보통 때처럼 아들~보고 싶으니까 와서 저녁 먹고 가~하는 말투가 아니었던지라 꽤 심각한 일이라는 것쯤은 예상을 할 수 있었다. 근데 이렇게까지 큰 일일 줄이야.

형이 제 외국인 여자친구와 함께 사랑의 도피를 해버렸단다. 보수적인 부모님이 외국인 며느리는 안 된다했더니 무턱대고 도망쳐버린 거였다. 울먹거리는 어머니와 역정을 내는 아버지 사이에서 석진은 순간 뭘 잘못 들었나 했다. 형 여자친구가 외국인인 걸 알기는 커녕 여자친구가 있는지도 몰랐던 석진은 상황파악이 끝나자 속으로 낮게 욕을 읊조렸다. 

아무리 그 여자가 좋았어도 그렇지, 열 살짜리 애도 안 할 거 같은 짓을 서른 둘이나 먹은 형이 했다는 게 어처구니가 없고 한심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빅엿을 투척하고 간 게 심히 짜증스럽기도 했다. 형의 부재는 곧 자신이 그 자리를 메꿔야 한다는 뜻이었으니까. 

솔직히 마음만 먹으면 당장에 잡아올 수 있지만서도 김 회장은 이미 큰아들을 내려놓은 듯했다. 못난 놈 같으니라고! 김 회장의 목소리에 분노가 형형하다. 평소 화를 잘 내는 성격이 아니건만 믿었던 아들놈에게 뒤통수를 맞은 게 상당히 열받는 모양이었다. 


"석진아. 너한텐 미안한 말이지만 잠시만 회사로 들어올 순 없겠니. 자리를 비워둘 순 없지 않느냐." 

"그래, 교수는 너 하고 싶을 때 언제든 돌아올 수 있잖아,응?" 


회장 부부는 곧 석진에게로 눈을 돌렸다. 재벌임에도 불구하고 평소 석진에게 어떤 압박도 가하지 않던 부모님이었으나 이번은 급한 일이니 어쩔 수 없어 보였다. 회사의 후계자가 사라졌다는 말이 돌면 주가가 급락할 게 분명하니까. 하루아침에 교수에서 회사의 미래를 책임질 후계자가 되어버린 석진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는 듯 한숨을 내쉬는 부모님을 뒤로하고 석진은 오랜만에 제 방으로 올라갔다. 

석진이 이렇게 쉽게 오케이 할 수 있었던 건 지금 하고 있는 일에 크게 미련이 없기 때문이었다. 재수없게 들릴 수도 있지만 애초에 교수도 간절히 하고 싶어서 된 게 아니라 그냥 하다보니 된 거였다. 아직 정교수도 아니었고. 아버지가 이사장으로 있는 연화대에서 근무하는 거나 아버지가 회장으로 있는 계열사에서 근무하는 거나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이다. 

형의 직책은 방탄그룹의 면세점을 비롯한 힛맨뱅 백화점 총괄사장직이었는데 그 자리를 석진이 맡게 된 셈이었다. 취임하면 백화점 이름부터 바꿔야겠는데. 이름이 힛맨뱅이 뭐야, 저러면 누가 간다고. 

그동안은 제 관할이 아니기에 굳이 참견하지 않았지만 석진은 이름이 구린 게 적자의 원인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백화점 사업은 다른 계열사들에 비해 매출이 현저히 적어 김 회장의 골칫거리였으니. 회사 생활이 시작부터 순탄치 않을 것 같다는 예감에 석진은 옅게 인상을 쓰고 머리를 쓸어넘긴다. 

여주의 휴학 소식에 정말 저 때문인가 싶어 싱숭생숭했던 마음과 서랍에 넣어놓고 여태 안 읽었던 편지를 읽어봐야겠단 생각은 형의 돌발행동에 묻혀 그대로 잊혀졌다. 



석진의 취임은 재계의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언론에선 김석훈(이시대 최고의 사랑꾼) 전 사장이 아버지의 눈밖에 나 버려졌다느니 숨죽이던 둘째의 반란이 아니냐느니 저들끼리 상상의 나래를 펼쳐댔다. 그렇지만 아닌뒈 사장이 애인한테 찐사랑이어서 튀었는뒈 해도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단 걸 알기에 부러 석훈의 얘기를 기삿거리로 만들지는 않았다. 떠벌릴만 한 일도 아니었고. 

그렇다보니 그 화살은 죄 석진이 받아내야했다. 밖은 물론이고 회사 내부 사람들도 교수나 하던 사람이 실무적인 경영을 할 수나 있겠나 하며 은근히 석진의 신경을 긁었다. 안 그래도 맡은 일은 무조건 잘해야 하는 칼 같은 성격인데, 이런 상황들은 석진을 더 예민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우선 명칭부터 바꾸죠. 힛맨뱅은 좀 아닌 거 같은데." 

"예? 명칭을요?" 


취임 후 바로 백화점 이름부터 손보는 석진의 행보에 회사 관계자들은 당황했다. 회장님이 지으신 건데..? 참나 회장님이 지으신 걸 어떻게 쉽게 바꿔. 


응, 하루만에 바뀌었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석진에게 김회장이라는 든든한 빽이 있음을 망각했다. 아내바보였던 김 회장은 아내를 쏙 빼닮은 석진을 어화둥둥 했으니. 그래서 힛맨뱅 백화점은 곧 BT 백화점이 됐으며 그 이후로도 석진은 새로운 사장으로서 열일을 멈추지 않았다. 


"현대사회에서 백화점 같은 오프라인 쇼핑몰은 온라인과 차별화를 둬야 합니다. 단순한 쇼핑몰은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없으니까." 

"어떤 차별화를 말씀하시는 건지.." 

"백화점 내에 문화콘텐츠적 요소를 많이 두세요. 문화센터에서 그치지 말고 아티스트들이 다양하게 작품을 전시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든다던가, 뭐 그런거. 건물 위치가 좋아서 전망도 괜찮은 편이니까 옥상은 신경써서 야경스팟으로 만들고. 이번에 바뀐 광고모델한테 거기서 셀카 찍어서 sns 올려달라고 하면 바로 반응 올 거예요." 

"하긴 아미 씨가 워낙 글로벌 스타니까 반응이 오긴 할 겁니다. 아! 사장님 혹시 지역의 랜드마크가 되는 전략을 쓰자, 뭐 그런..!" 


비서의 감탄에 석진은 대충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손에 들린 서류를 내밀었다. 


"그리고 명품 브랜드 거기 톰브라운부터 순서대로 3개 입점하고 요식업 브랜드 표시한 거 2개 입점할 수 있도록 진행합시다. 조금 고급스럽고 젊은 이미지를 부여해서 백화점 자체를 브랜드화 해보는 방향으로." 

"그래도 괜찮을까요? 명품은 몰라도 요식업은 단시간에 폐점할 가능성이," 

"괜찮아요, 분석했던 업체들 중 비전이 있는 데로만 선별한 거니까. 우선은 시도해볼 만해요." 


언제 업체들의 적합성까지 다 따져보고 온 건지 석진은 자신의 결정에 확신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확신이 틀리지 않았단 것을 증명하듯 석진이 이끄는 BT 백화점은 반 년만에 경쟁사의 매출을 훨씬 넘어서며 자연스레 자체 최고기록을 갱신하는 기적을 보인다. 





해가 바뀌고, 벚꽃이 나부끼는 4월이 다시 돌아왔다. 석진은 연구실이 아니라 번지르르한 사장실에서 봄을 맞이했다. 취임 후 약 7개월 간 일에만 몰두했던지라 살이 좀 빠지고 피부는 조금 거칠어졌다. 존잘 불변의 법칙인지 그 얼굴이 어디가진 않았지만.  

그러나 한국의 어머니들이 으레 그러하듯이 석진의 어머니는 애가 너무 여유가 없고 일에 찌들어보인다며 전전긍긍했다. 혼자 사는 석진이 아침도 매일 거르고 거의 일만 하는 모습을 보며 보약이라도 해먹여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김 회장도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가끔 전화해서 쉬어가면서 해라며 넌지시 말했지만 대답만 네, 할 뿐 전혀 효력이 없었다. 

쟤가 결혼을 하면 좀 안정감을 가지려나. 현숙이네 아들은 올해 장가간다고 했는데. 그러고보니 진이가 올해 벌써 서른 하나네..! 

석진의 어머니는 생각을 거듭하다 당신 아들의 나이를 깨닫고 갑작스레 결혼에 꽂혀버렸다. 서른 하나가 그렇게 늦은 나이는 아니다만 저러고 있는 걸보니 닥달하지 않으면 영영 결혼도 안하고 살 기세였기에 그녀는 괜히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젠 곁에 남은 유일한 자식이자 기업의 후계자이니 결혼이 신경쓰일 수밖에 없었다. 김 회장은 맹목적인 아내바보였으므로 부인이 그러자고 하면 그대로 따라가는 사람이었으니, 이제 석진 앞에 남은 건 미혼 30대 남녀가 제일 무서워한다는 부모님의 "결혼은 언제할거냐" 공격이었다. 


"너 만나는 아가씨도 있다면서. 지금처럼 결혼하기 좋을 때가 어딨니." 

"그래라. 백화점은 너 온 뒤로 자리를 잡았으니 이젠 네가 자리를 잡아야지." 

"연서는 아직 결혼 생각없을 거예요. 이제 29살이라." 


연서는 무용과를 졸업하고 취미로 운동을 배웠으며 지금은 요가 학원을 운영하며 강사를 하고 있었다. 생계가 목적이 아니라 취미로 하는 일이었지만 연서는 자기가 하는 일에 꽤 자부심과 재미를 붙인 차였다. 그러니 석진은 연서가 아직은 결혼보단 일을 할 시기라고 생각한 거였고. 평소에도 결혼의 "결" 도 꺼내지않는 연서니까. 

그리고 사실 석진 스스로도 아직은 결혼을 생각하고 있지 않았었다. 연서는 좋은 애지만 결혼이라. 어려운 질문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연서를 핑계삼아 결혼 잔소리를 벗어나보려고 한 건데, 지금껏 안하시던 압박은 결혼시킬 때 하려고 아껴두신 건지 부모님(실상 어머니)은 물러서지 않았다. 


"29이면 결혼하기 딱 좋네에~ 결혼 생각없으면 네가 심어주면 되지. 연서 씨랬나? 그 아가씨가 결혼 마음 먹는건 너하기에 달린거야." 

"그래, 아버지도 너희 엄마 꼬신다고 힘 좀 썼었어. 나랑 결혼하고 싶게 만들려고." 

"어머, 옛날 생각난다. 그게 벌써 몇 년 전이죠?" 


의식의 흐름이 따로 없다. 두 분이 옛날옛적 러브스토리를 회상하고 있는 동안 석진은 지금이다 싶어 조용히 본가를 빠져나와 편안한 자기 집으로 차를 돌렸다. 

운전을 하면서도, 집에 돌아와서도, 자기 전 통화로 연서의 하루 일과를 들어주면서도, 오늘따라 끈질겼던 잔소리 탓인지 석진은 꽤 깊이 결혼에 대해 생각했다. 연서랑 결혼하면 잘 살 수 있을까.  

연서만큼 편한 여자가 지금껏 없긴 했다. 연서랑 지내는 시간은 크게 설레진 않았지만 그렇기에 더 아늑하고 편했다. 두 사람 다 결혼에 큰 낭만을 가질만큼 어린 나이는 아니었으니 서로 현실적으로 잘 살 수 있을 거 같고.

어쩌면 결혼은 그저 연애에 책임감이 더해진 것일지도 몰랐다. 그렇담 연서랑 그 결혼이란 걸 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 같았다. 어차피 언젠가 해야할 결혼이라면, 결국 그 끝엔 연서가 있지 않을까. 




"오빠!" 

 

[방탄소년단/김석진] 계약결혼의 법칙 02 | 인스티즈

 

"뛰지마. 넘어질라." 

"오빠 보고 싶어서 뛰어왔지. 우리 저번 주에 보고 못 봤잖아." 

"오빠 보고 싶었어? 타, 밥 먹으러 가자. 너 파스타 먹고 싶댔나?" 

"아니 나 오늘은 고기 썰고 싶어! 체중 관리한다고 고기 못 먹은지 오래 됐어, 나." 

"그래, 그럼 고기 먹자." 


근 일주일 만의 만남에 신났는지 연서는 지치지도 않고 내내 종알거렸다. 석진은 귀찮지도 않은지 응 또는 그랬어? 따위의 말로 다정하게 받아주며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저녁을 먹으면서도 말을 하는건 오직 연서였고 들으면서 적당한 반응을 하는 게 석진의 몫이었다. 사실 석진은 그 때 연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안 들렸다. 왜냐면 오늘 프로포즈할 거니까. 정신이 내내 딴 곳이었다. 


"오빠 내 얘기 듣고있어?" 

"아, 미안. 뭐라고 했더라." 

"치. 정신을 어디 두고 있는 거야아~" 


연서의 애교섞인 투정에 석진은 푸스스 웃는다. 홀린 듯 석진이 웃는 걸 보고 있던 연서는 곧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금세 마음을 다잡는 듯 얼굴의 그늘을 지웠다. 


"오빠. 우리 오늘은 한강변 들렀다 갈까?" 

"한강?" 

"응. 오랜만에 가고 싶어." 

"그래, 그러자." 


차에 타서 안전밸트를 매자마자 연서는 한강에 가고 싶다고 했다. 갑자기 웬 한강인가 싶었지만 늘 그랬듯 석진은 그러자고 했다. 연서는 드라이브 내내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놓고서 아까보단 한결 조용하고 차분하게 굴었다. 갑자기 얘가 봄을 타는 건가. 아니면 무슨 일이 있나. 안 그래도 오늘 평소보다 말이 좀 많긴 했는데.


"우리 처음 만났을 때, 옥상에서 산책하던거 기억나? 그 때 야경 진짜 예뻤는데." 

"응." 


그 때 너도 예뻤어, 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어쩐지 다 포기한 것 같은 연서의 눈동자에 석진은 불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설마, 지금.


"그 때나 지금이나 경치는 예쁜데..." 

"연서야," 

"헤어지자, 오빠." 


연서의 팔을 잡으려던 석진의 손이 그대로 멈췄다. 블레이저 안주머니에 넣은 반지 케이스의 모서리가 가슴께를 찌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오빠 너무 완벽하고 다정해. 그건 내가 잘 알아, 오빠 같은 사람 또 없다는 거. 근데 난 좀 더 나한테 목매는 사람이 좋아. 일이랑 나 중에 선택하라고하면 당연히 나를 선택할 사람. ...오빠는, 내가 없어도 너무 잘 살 사람 같아." 

"...내가 너한테 확신을 못 줬나보네." 

"미안. 솔직히 여자나이 스물아홉이면 결혼 생각 안 할 수가 없는데, 오빤 나한테 결혼 얘기 꺼내지도 않았잖아. 결혼 생각도 없어보였고. 그냥.. 여러모로 지쳤어." 


결혼, 당연히 안 하고 싶어하는 줄 알았는데. 내가 아직 너를 잘 몰랐나. 

아니, 사실 눈치챘으면서 확신이 없어 부러 모르는 척 비겁하게 미뤄왔던 것일지도 몰랐다. 너를 평생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확신이 없어서. 


"그럼 나 이만 갈게. 그래도 종종 만나면 인사는 하자. 잘 있어, 오빠." 

"데려다 줄게. 늦었어." 

"아냐, 괜찮아. 혼자 갈 수 있어." 

"...연서야." 

"응..?" 

"내가 너 많이 좋아했어. 조심해서 가. 그리고 종종 만나도 인사는 하지 말고. 나 그런거 잘 못하는 거 알잖아." 

"...." 


연서는 어쩐지 미련이 담긴 눈으로 살풋 웃더니 천천히 사라졌다. 석진은 시야에서 연서가 사라지자마자 다시 차에 타서 운전석에 앉았다. 앉자마자 몸에 힘이 탁 풀리는 기분이다. 

3년간의 연애는 이렇게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그래도 석진은 딱히 연서를 원망하지도 잡으려 하지도 않았다. 이미 지쳐버렸다는 애를 굳이 붙들어서 더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다시 만나봤자 연서는 자기에게 똑같은 이유로 지치게 마련일 테니. 

 

 

[방탄소년단/김석진] 계약결혼의 법칙 02 | 인스티즈



계약결혼의 법칙




김석진. 31세. 서울에서 나고 자랐으며 현재 강남의 한 아파트에 거주 중. 세상은 공평하다, 라는 어쩌면 조금 희망적인 문장은 석진 앞에서 언제나 사상누각처럼 바스라졌다.

방탄그룹 현 회장 김용수의 차남인 석진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재벌 2세였다. 그럼 양심적으로 다른 건 좀 부족할 법도 한데, 석진은 살면서 '부족'이라는 걸 겪어본 적이 없었다. 갖고 싶다고 생각 하기도 전에 웬만한 건 다 옆에 있었고, 어린 나이에 박사학위를 딸 정도의 지성과 집중력도 있었다. 연예인 사이에 있어도 꿀리긴 커녕 단연 돋보이는 외모는 덤이랄까.  

 

보통 이 쯤 되면 부모님과의 불화라던지, 사실 형과 어머니가 다르다던지 하는 흔한 재벌의 불행을 예상할 수 있겠으나 딱히 그런 것도 아니었다. 대한민국의 재벌 2세 치곤 그는 나름 화목하고 평범하게 자랐고(재산은 안 평범함) 부모님은 잉꼬부부였으며 사랑이나 관심 역시 남들만큼은 받아왔다.

기업의 후계자인 형과는 그다지 친하지 않았지만 그게 형의 자리를 탐내기 때문은 아니었다. 석진은 그런 데 별 욕심이 없는 편이었으니까. 후계자 자리를 탐내지 않는 재벌 2세라. 그럼 그냥 술과 여자, 놀고 먹기 좋아하는 안하무인 도련님인가 싶겠지만 석진은 그런 부류도 아니었다.  

이러니 석진의 주변에 사람들이 항상 많은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세상의 이치였다. 뭐라도 얻어보려는 사람들, 잘 보이고 싶은 사람들, 석진의 관심을 받고 싶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질량 보존의 법칙처럼 괜찮은 사람들도 꽤 있었다. 그걸 걸러내는 건 좀 성가신 일이었으나 나이를 먹어가면서 대충 대화 몇 마디, 혹은 눈빛 한 번만 보고도 제게 필요없는 사람을 거르고 쳐 내는 능력도 생겼다.

사실 석진은 겉으로는 상냥하고 다정한 사람이었지만 그렇게 순하기만 한 사람은 아니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순한 것과는 거리가 있는 사람이었다. 정에 얽매이는 걸 싫어했고, 선을 넘는 걸 싫어했다. 성격이 아예 쌀쌀맞진 않지만 제 혐오감이나 귀찮음을 숨기고 마냥 착하게 굴만큼 유순한 건 아니었다. 속된 말로 어느 정도 성깔이 있는 편이란 뜻이다. 그래서인지 석진은 온화한 분위기 속에서도 특유의 냉철함이나 견고함이 느껴져 쉽게 대하기 힘든 사람이었다.  

 

이런 성격인 덕인지 탓인지 주변에 사람은 많아도 아주 친한 사람은 몇 되지 않았는데, 대학시절 만난 남준은 그중 아주 편한 사람에 속했다. 남준은 석진의 표정만 봐도쟤가 지금 무슨 생각인가를 꿰뚫어 볼 수 있었다. 

 

 

"맞다. 너 여학생들 사이에서 어떻게 불리는 지 아냐?" 

"어떻게 불리는데?" 

 

오랜만에 연구실에 놀러 온 남준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강의 준비에 몰두하던 석진은 무심하게 물었다. 와,진짜 하나도 안 궁금해 보인다, 하는 남준의 대꾸가 좀 웃겼는지 미묘하게 입매가 말려 올라가는 것 같기도 하고.  

 

"결혼은 저런 남자랑." 

"뭐?" 

"복도에서 들었어. 결혼은 너 같은 남자랑 해야되는 거라더라. 뭘 몰라도 한참 몰라. 아직 애기들이라서 그런가." 

"내가 뭐." 

"진짜 몰라서 묻는 건 아니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봐라. 너 연서씨한테 제일 최근에 연락한 거 언제야." 

 

남준의 추궁에 석진은 입을 다물었다. 언제더라. 저번 주말에 만났으니까 그 땐 전화했던 거 같은데.  

 

"거봐. 너 그러면 진짜 조만간 차여, 임마." 

"어떻게 매일 연락을 해. 그리고 한 번하면 잘 때까지 안 놔줘서 귀찮아." 

"너가 하도 무심하니까 연서씨도 애타서 그러겠지." 

 

석진은 잠시 바쁘던 손가락을 멈추고 자신의 연애를 곰곰 되돌아봤다. 그렇게 무심하진 않았던 거 같은데.

2살 아래의 여자친구인 연서는 한 사교 파티에서 만난 사람이었다. 귀찮아서 안 가고 싶었지만 이번 건 중요인사들도 많이 오는 자리니까 얼굴만 비추고 가라는 어머니의 말에 석진은 정말 얼굴만 비추고 가려고 했었다. 뜻대로 되진 않았지만.

 

"안녕하세요, 저 연화대학교 무용과 졸업한 유연서라고 해요." 

"네...그런데요?" 

"앗, 저 모르시는구나...저는 선배님 얘기 많이 들었는데..! 경영학과 졸업하신 김석진 선배님 맞으시죠?" 

"네, 제가 타과생은 잘 몰라서. 죄송해요."(사실 본인 과 사람들도 잘 모름) 

"아니에요. 괜찮으시면 저랑 잠깐 산책이라도 하실래요? 여기 옥상정원이 그렇게 예쁘대요." 

"그래요." 

 

피곤한 상태로 처음 만났던 연서는 생각보다 소탈하고 괜찮은 사람이었다. 말도 좀 통하고 사소한 취향들마저 비슷한. 그래서 몇 번의 만남 후에 시작된 연애는 2년째 진행중이었다. 숱한 연애를 했던 석진에게 연서와의 연애는 가장 편하다고 느껴졌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뭔가 그랬다. 연서가 털털하고 친화력이 좋아서 그랬나.

그런 연애를 남준이 타박하자 석진은 자신이 뭔가 소홀했던 게 있었던가, 하고 생각했다. 성숙한 어른들이었으니 보통의 연인들이 할 만한 건 다 했고 크게 싸운 적도 없고 웬만한 건 연서가 하자는 대로 다 맞춰줬었다. 아무리바빠도 3일에 한 번은 꼭 연락한 거 같은데 뭐가 문제였던 건지 석진은 이해가 안 됐다.


"너 연서씨랑 있는 거 보면 연서씨 혼자 연애하는 거 같애. 티는 안 내도 얼마나 속상하겠냐."

"내가 그 정도야..?"

"어, 그 정도야. 남의 연애사에 왈가왈부하는 거 미안한데 너는 좀 해야겠더라."

"...그런가."

"학생들 대하는 거 반이라도 해. 아까 학생이랑 얘기하는 거 보고 너 아닌 줄 알았다."

"그건 일이잖아."

"그래...네가 그럼 그렇지 뭐..."


기대도 안 한단 듯이 적당한 환멸이 섞인 얼굴로 석진을 보던 남준은 석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암튼 수고해라, 나도 일해야 돼서. 다음엔 밥이라도 먹자."

"어. 조심해서 가."


달칵, 하고 남준이 나가자 석진은 목이 뻐근한 듯 기지개를 폈다. 문득 손목의 시계로 눈을 돌리자 벌써 퇴근할 무렵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남준이 한 말이 신경 쓰였던지라 석진은 연서에게 전화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여주가 휴학했지만 학교는 아무런 기색없이 가을날의 단풍만 선연했다. 여주의 부재에 조금은 허전해 하던 친한 동기 몇몇 역시 바쁜 일상에 휩쓸려 점점 허전한 감각조차 잊어갔다.

다만 김석진 교수의 '현대사회와 기업경영' 수업을 다음학기에 바로 재수강하게 된 호석은(세컨드의 충격으로 기말고사 망함) 수업을 들을 때마다 여주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당연했다. 석진을 그렇게나 좋아하던 여주였는데 차이고 바로 휴학이라니. 한 마디 말도 없다가 이렇게나 갑자기. 무슨 일인지 자세히 얘기를 해주지 않았으니, 나름의 사정이야 있겠지만 아마 석진이 휴학사유의 8할을 차지하지 않았을까 짐작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호석은 짐작만 했어야 했다. 정말, 딱 짐작만...


"야, 윤기야. 어디냐."

- 집. 공강임. 왜.

"야 나 밥 먹을 사람이 읎어. 원래 이 수업 끝나면 여주랑 밥 먹었는데, 여주 휴학했잖아."

- 혼자 먹어, 그럼. 4학년은 원래 혼자 먹는거야.

"너 집도 코 앞이잖아. 집에서 청승떨지말고 그냥 나와서 나랑 밥 먹어."

- 귀찮아.

"아아아아앙앜 미뉸기ㅠㅠㅠㅠㅠ나오라고ㅠㅠㅠㅠ"

-아씨 귀 아파 새끼야. 배여주는 왜 갑자기 휴학을 했다냐, 진짜.

"몰라, 말도 제대로 안하고 가버리고. 걔 본가가 부산이라 만나기 힘든데 연락도 잘 안 받더라. 고거 김교수님한테 차여가지고 홧김에 휴학한거 아닌가 몰ㄹ.........."

-뭐. 말을 하다 마냐.

"야, 일단 끊어.."

-뭔ㄷ,


호석은 지금 제 입을 꼬매버리고 싶었다. 여주야 미안. 선배가 많이 못났어.


"안녕하심니까, 교수님..."

"아, 통화 마저 해도 됐는데."


호석의 머리에는 지금 망했다는 세글자밖에 남지 않았다. 요놈의 조동아리 나쁜 조동아리. 석진은 머쓱한 얼굴로 뒷목을 긁적이는 걸로 봐서 통화내용을 다 들은 게 분명했다. 아까 나가셔놓고 왜 아직도 여기 계시는 거냐고 뻔뻔하게 우기고라도 싶은 심정이었다.


"그... 호석 학생."

"ㄴ, 넵. 교수님."

"여주 학생 휴학했어요?"

"아, 네. 이번 학기에 휴학을 하긴 했는데 왜 휴학했는지는 저도 잘 모르는 거라서요, 그러니까 그게 교수님 때문인지는 아무도 모르고 여주만 아는 거고요, 네...아무튼 죄송합니다.."


속사포처럼 정리되지 않은 말을 줄줄 늘어놓던 호석은 곧 체념하고 고개를 숙였다. 입꼬리가 어깨와 함께 시옷처럼 추욱 내려간다.


"아뇨, 괜찮습니다. 학생도 신경쓰지 말고 점심 맛있게 먹어요."

"예..."


신경을 어떻게 안 씁니까, 교수님. 호석은 멀어지는 석진의 등을 향해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자신의 이 어마어마한 실수를 여주에게 알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교수님이 부러 다른 사람한테 말씀하실 것 같진 않고. 모르는 게 약이니까 우선은 말 안 하는게 나을 거 같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여주야, 미안하다. 너 복학하면 난 졸업했겠지만 네가 원하면 한 학기 정도 노예로 살아볼게...




어떤 일이 생겼는 지 알 턱이 없는 가엾은 배여주가 열심히 저녁 알바를 하고 있는 동안, 석진은 오랜만에 본가로 가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으시길래 갑자기 부르시는 건지. 보통 때처럼 아들~보고 싶으니까 와서 저녁 먹고 가~하는 말투가 아니었던지라 꽤 심각한 일이라는 것쯤은 예상을 할 수 있었다. 근데 이렇게까지 큰 일일 줄이야.

형이 제 외국인 여자친구와 함께 사랑의 도피를 해버렸단다. 보수적인 부모님이 외국인 며느리는 안 된다했더니 무턱대고 도망쳐버린 거였다. 울먹거리는 어머니와 역정을 내는 아버지 사이에서 석진은 순간 뭘 잘못 들었나 했다. 형 여자친구가 외국인인 걸 알기는 커녕 여자친구가 있는지도 몰랐던 석진은 상황파악이 끝나자 속으로 낮게 욕을 읊조렸다. 

아무리 그 여자가 좋았어도 그렇지, 열 살짜리 애도 안 할 거 같은 짓을 서른 둘이나 먹은 형이 했다는 게 어처구니가 없고 한심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빅엿을 투척하고 간 게 심히 짜증스럽기도 했다. 형의 부재는 곧 자신이 그 자리를 메꿔야 한다는 뜻이었으니까. 

솔직히 마음만 먹으면 당장에 잡아올 수 있지만서도 김 회장은 이미 큰아들을 내려놓은 듯했다. 못난 놈 같으니라고! 김 회장의 목소리에 분노가 형형하다. 평소 화를 잘 내는 성격이 아니건만 믿었던 아들놈에게 뒤통수를 맞은 게 상당히 열받는 모양이었다. 


"석진아. 너한텐 미안한 말이지만 잠시만 회사로 들어올 순 없겠니. 자리를 비워둘 순 없지 않느냐." 

"그래, 교수는 너 하고 싶을 때 언제든 돌아올 수 있잖아,응?" 


회장 부부는 곧 석진에게로 눈을 돌렸다. 재벌임에도 불구하고 평소 석진에게 어떤 압박도 가하지 않던 부모님이었으나 이번은 급한 일이니 어쩔 수 없어 보였다. 회사의 후계자가 사라졌다는 말이 돌면 주가가 급락할 게 분명하니까. 하루아침에 교수에서 회사의 미래를 책임질 후계자가 되어버린 석진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는 듯 한숨을 내쉬는 부모님을 뒤로하고 석진은 오랜만에 제 방으로 올라갔다. 

석진이 이렇게 쉽게 오케이 할 수 있었던 건 지금 하고 있는 일에 크게 미련이 없기 때문이었다. 재수없게 들릴 수도 있지만 애초에 교수도 간절히 하고 싶어서 된 게 아니라 그냥 하다보니 된 거였다. 아직 정교수도 아니었고. 아버지가 이사장으로 있는 연화대에서 근무하는 거나 아버지가 회장으로 있는 계열사에서 근무하는 거나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이다. 

형의 직책은 방탄그룹의 면세점을 비롯한 힛맨뱅 백화점 총괄사장직이었는데 그 자리를 석진이 맡게 된 셈이었다. 취임하면 백화점 이름부터 바꿔야겠는데. 이름이 힛맨뱅이 뭐야, 저러면 누가 간다고. 

그동안은 제 관할이 아니기에 굳이 참견하지 않았지만 석진은 이름이 구린 게 적자의 원인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백화점 사업은 다른 계열사들에 비해 매출이 현저히 적어 김 회장의 골칫거리였으니. 회사 생활이 시작부터 순탄치 않을 것 같다는 예감에 석진은 옅게 인상을 쓰고 머리를 쓸어넘긴다. 

여주의 휴학 소식에 정말 저 때문인가 싶어 싱숭생숭했던 마음과 서랍에 넣어놓고 여태 안 읽었던 편지를 읽어봐야겠단 생각은 형의 돌발행동에 묻혀 그대로 잊혀졌다. 



석진의 취임은 재계의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언론에선 김석훈(이시대 최고의 사랑꾼) 전 사장이 아버지의 눈밖에 나 버려졌다느니 숨죽이던 둘째의 반란이 아니냐느니 저들끼리 상상의 나래를 펼쳐댔다. 그렇지만 아닌뒈 사장이 애인한테 찐사랑이어서 튀었는뒈 해도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단 걸 알기에 부러 석훈의 얘기를 기삿거리로 만들지는 않았다. 떠벌릴만 한 일도 아니었고. 

그렇다보니 그 화살은 죄 석진이 받아내야했다. 밖은 물론이고 회사 내부 사람들도 교수나 하던 사람이 실무적인 경영을 할 수나 있겠나 하며 은근히 석진의 신경을 긁었다. 안 그래도 맡은 일은 무조건 잘해야 하는 칼 같은 성격인데, 이런 상황들은 석진을 더 예민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우선 명칭부터 바꾸죠. 힛맨뱅은 좀 아닌 거 같은데." 

"예? 명칭을요?" 


취임 후 바로 백화점 이름부터 손보는 석진의 행보에 회사 관계자들은 당황했다. 회장님이 지으신 건데..? 참나 회장님이 지으신 걸 어떻게 쉽게 바꿔. 


응, 하루만에 바뀌었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석진에게 김회장이라는 든든한 빽이 있음을 망각했다. 아내바보였던 김 회장은 아내를 쏙 빼닮은 석진을 어화둥둥 했으니. 그래서 힛맨뱅 백화점은 곧 BT 백화점이 됐으며 그 이후로도 석진은 새로운 사장으로서 열일을 멈추지 않았다. 


"현대사회에서 백화점 같은 오프라인 쇼핑몰은 온라인과 차별화를 둬야 합니다. 단순한 쇼핑몰은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없으니까." 

"어떤 차별화를 말씀하시는 건지.." 

"백화점 내에 문화콘텐츠적 요소를 많이 두세요. 문화센터에서 그치지 말고 아티스트들이 다양하게 작품을 전시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든다던가, 뭐 그런거. 건물 위치가 좋아서 전망도 괜찮은 편이니까 옥상은 신경써서 야경스팟으로 만들고. 이번에 바뀐 광고모델한테 거기서 셀카 찍어서 sns 올려달라고 하면 바로 반응 올 거예요." 

"하긴 아미 씨가 워낙 글로벌 스타니까 반응이 오긴 할 겁니다. 아! 사장님 혹시 지역의 랜드마크가 되는 전략을 쓰자, 뭐 그런..!" 


비서의 감탄에 석진은 대충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손에 들린 서류를 내밀었다. 


"그리고 명품 브랜드 거기 톰브라운부터 순서대로 3개 입점하고 요식업 브랜드 표시한 거 2개 입점할 수 있도록 진행합시다. 조금 고급스럽고 젊은 이미지를 부여해서 백화점 자체를 브랜드화 해보는 방향으로." 

"그래도 괜찮을까요? 명품은 몰라도 요식업은 단시간에 폐점할 가능성이," 

"괜찮아요, 분석했던 업체들 중 비전이 있는 데로만 선별한 거니까. 우선은 시도해볼 만해요." 


언제 업체들의 적합성까지 다 따져보고 온 건지 석진은 자신의 결정에 확신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확신이 틀리지 않았단 것을 증명하듯 석진이 이끄는 BT 백화점은 반 년만에 경쟁사의 매출을 훨씬 넘어서며 자연스레 자체 최고기록을 갱신하는 기적을 보인다. 





해가 바뀌고, 벚꽃이 나부끼는 4월이 다시 돌아왔다. 석진은 연구실이 아니라 번지르르한 사장실에서 봄을 맞이했다. 취임 후 약 7개월 간 일에만 몰두했던지라 살이 좀 빠지고 피부는 조금 거칠어졌다. 존잘 불변의 법칙인지 그 얼굴이 어디가진 않았지만.  

그러나 한국의 어머니들이 으레 그러하듯이 석진의 어머니는 애가 너무 여유가 없고 일에 찌들어보인다며 전전긍긍했다. 혼자 사는 석진이 아침도 매일 거르고 거의 일만 하는 모습을 보며 보약이라도 해먹여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김 회장도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가끔 전화해서 쉬어가면서 해라며 넌지시 말했지만 대답만 네, 할 뿐 전혀 효력이 없었다. 

쟤가 결혼을 하면 좀 안정감을 가지려나. 현숙이네 아들은 올해 장가간다고 했는데. 그러고보니 진이가 올해 벌써 서른 하나네..! 

석진의 어머니는 생각을 거듭하다 당신 아들의 나이를 깨닫고 갑작스레 결혼에 꽂혀버렸다. 서른 하나가 그렇게 늦은 나이는 아니다만 저러고 있는 걸보니 닥달하지 않으면 영영 결혼도 안하고 살 기세였기에 그녀는 괜히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젠 곁에 남은 유일한 자식이자 기업의 후계자이니 결혼이 신경쓰일 수밖에 없었다. 김 회장은 맹목적인 아내바보였으므로 부인이 그러자고 하면 그대로 따라가는 사람이었으니, 이제 석진 앞에 남은 건 미혼 30대 남녀가 제일 무서워한다는 부모님의 "결혼은 언제할거냐" 공격이었다. 


"너 만나는 아가씨도 있다면서. 지금처럼 결혼하기 좋을 때가 어딨니." 

"그래라. 백화점은 너 온 뒤로 자리를 잡았으니 이젠 네가 자리를 잡아야지." 

"연서는 아직 결혼 생각없을 거예요. 이제 29살이라." 


연서는 무용과를 졸업하고 취미로 운동을 배웠으며 지금은 요가 학원을 운영하며 강사를 하고 있었다. 생계가 목적이 아니라 취미로 하는 일이었지만 연서는 자기가 하는 일에 꽤 자부심과 재미를 붙인 차였다. 그러니 석진은 연서가 아직은 결혼보단 일을 할 시기라고 생각한 거였고. 평소에도 결혼의 "결" 도 꺼내지않는 연서니까. 

그리고 사실 석진 스스로도 아직은 결혼을 생각하고 있지 않았었다. 연서는 좋은 애지만 결혼이라. 어려운 질문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연서를 핑계삼아 결혼 잔소리를 벗어나보려고 한 건데, 지금껏 안하시던 압박은 결혼시킬 때 하려고 아껴두신 건지 부모님(실상 어머니)은 물러서지 않았다. 


"29이면 결혼하기 딱 좋네에~ 결혼 생각없으면 네가 심어주면 되지. 연서 씨랬나? 그 아가씨가 결혼 마음 먹는건 너하기에 달린거야." 

"그래, 아버지도 너희 엄마 꼬신다고 힘 좀 썼었어. 나랑 결혼하고 싶게 만들려고." 

"어머, 옛날 생각난다. 그게 벌써 몇 년 전이죠?" 


의식의 흐름이 따로 없다. 두 분이 옛날옛적 러브스토리를 회상하고 있는 동안 석진은 지금이다 싶어 조용히 본가를 빠져나와 편안한 자기 집으로 차를 돌렸다. 

운전을 하면서도, 집에 돌아와서도, 자기 전 통화로 연서의 하루 일과를 들어주면서도, 오늘따라 끈질겼던 잔소리 탓인지 석진은 꽤 깊이 결혼에 대해 생각했다. 연서랑 결혼하면 잘 살 수 있을까.  

연서만큼 편한 여자가 지금껏 없긴 했다. 연서랑 지내는 시간은 크게 설레진 않았지만 그렇기에 더 아늑하고 편했다. 두 사람 다 결혼에 큰 낭만을 가질만큼 어린 나이는 아니었으니 서로 현실적으로 잘 살 수 있을 거 같고.

어쩌면 결혼은 그저 연애에 책임감이 더해진 것일지도 몰랐다. 그렇담 연서랑 그 결혼이란 걸 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 같았다. 어차피 언젠가 해야할 결혼이라면, 결국 그 끝엔 연서가 있지 않을까. 




"오빠!" 

 

[방탄소년단/김석진] 계약결혼의 법칙 02 | 인스티즈

 

"뛰지마. 넘어질라." 

"오빠 보고 싶어서 뛰어왔지. 우리 저번 주에 보고 못 봤잖아." 

"오빠 보고 싶었어? 타, 밥 먹으러 가자. 너 파스타 먹고 싶댔나?" 

"아니 나 오늘은 고기 썰고 싶어! 체중 관리한다고 고기 못 먹은지 오래 됐어, 나." 

"그래, 그럼 고기 먹자." 


근 일주일 만의 만남에 신났는지 연서는 지치지도 않고 내내 종알거렸다. 석진은 귀찮지도 않은지 응 또는 그랬어? 따위의 말로 다정하게 받아주며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저녁을 먹으면서도 말을 하는건 오직 연서였고 들으면서 적당한 반응을 하는 게 석진의 몫이었다. 사실 석진은 그 때 연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안 들렸다. 왜냐면 오늘 프로포즈할 거니까. 정신이 내내 딴 곳이었다. 


"오빠 내 얘기 듣고있어?" 

"아, 미안. 뭐라고 했더라." 

"치. 정신을 어디 두고 있는 거야아~" 


연서의 애교섞인 투정에 석진은 푸스스 웃는다. 홀린 듯 석진이 웃는 걸 보고 있던 연서는 곧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금세 마음을 다잡는 듯 얼굴의 그늘을 지웠다. 


"오빠. 우리 오늘은 한강변 들렀다 갈까?" 

"한강?" 

"응. 오랜만에 가고 싶어." 

"그래, 그러자." 


차에 타서 안전밸트를 매자마자 연서는 한강에 가고 싶다고 했다. 갑자기 웬 한강인가 싶었지만 늘 그랬듯 석진은 그러자고 했다. 연서는 드라이브 내내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놓고서 아까보단 한결 조용하고 차분하게 굴었다. 갑자기 얘가 봄을 타는 건가. 아니면 무슨 일이 있나. 안 그래도 오늘 평소보다 말이 좀 많긴 했는데.


"우리 처음 만났을 때, 옥상에서 산책하던거 기억나? 그 때 야경 진짜 예뻤는데." 

"응." 


그 때 너도 예뻤어, 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어쩐지 다 포기한 것 같은 연서의 눈동자에 석진은 불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설마, 지금.


"그 때나 지금이나 경치는 예쁜데..." 

"연서야," 

"헤어지자, 오빠." 


연서의 팔을 잡으려던 석진의 손이 그대로 멈췄다. 블레이저 안주머니에 넣은 반지 케이스의 모서리가 가슴께를 찌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오빠 너무 완벽하고 다정해. 그건 내가 잘 알아, 오빠 같은 사람 또 없다는 거. 근데 난 좀 더 나한테 목매는 사람이 좋아. 일이랑 나 중에 선택하라고하면 당연히 나를 선택할 사람. ...오빠는, 내가 없어도 너무 잘 살 사람 같아." 

"...내가 너한테 확신을 못 줬나보네." 

"미안. 솔직히 여자나이 스물아홉이면 결혼 생각 안 할 수가 없는데, 오빤 나한테 결혼 얘기 꺼내지도 않았잖아. 결혼 생각도 없어보였고. 그냥.. 여러모로 지쳤어." 


결혼, 당연히 안 하고 싶어하는 줄 알았는데. 내가 아직 너를 잘 몰랐나. 

아니, 사실 눈치챘으면서 확신이 없어 부러 모르는 척 비겁하게 미뤄왔던 것일지도 몰랐다. 너를 평생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확신이 없어서. 


"그럼 나 이만 갈게. 그래도 종종 만나면 인사는 하자. 잘 있어, 오빠." 

"데려다 줄게. 늦었어." 

"아냐, 괜찮아. 혼자 갈 수 있어." 

"...연서야." 

"응..?" 

"내가 너 많이 좋아했어. 조심해서 가. 그리고 종종 만나도 인사는 하지 말고. 나 그런거 잘 못하는 거 알잖아." 

"...." 


연서는 어쩐지 미련이 담긴 눈으로 살풋 웃더니 천천히 사라졌다. 석진은 시야에서 연서가 사라지자마자 다시 차에 타서 운전석에 앉았다. 앉자마자 몸에 힘이 탁 풀리는 기분이다. 

3년간의 연애는 이렇게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그래도 석진은 딱히 연서를 원망하지도 잡으려 하지도 않았다. 이미 지쳐버렸다는 애를 굳이 붙들어서 더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다시 만나봤자 연서는 자기에게 똑같은 이유로 지치게 마련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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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꾹 눌러서 연속재생!) 

 


정국은 무릎 부상 이후로 성격이 많이 변했다. 그저 쾌활하고 해맑았던 학창시절관 달리 조금 차분하고 시니컬해진 바람에 주변 사람들의 걱정을 사곤 했다. 지민이 태권도장에 정국을 불렀던 것도 그래서였다. 아무래도 어린아이들이랑 함께하다보면 조금이나마 밝아지지 않을까 해서. 지민의 예측이 대충 맞았는지 정국은 서서히 괜찮아졌다. 예전만큼 똥꼬발랄한 쾌남 전정국으로 돌아오진 않았지만.  

근데 그걸 시간여행하듯 한 순간에 돌려놓은 게 있었으니, 다름 아닌 배여주다. 

정국은 여주와 만날 때마다 중고딩 때의 씨걸(학교 다닐때 별명. 메이드 바이 배여주)로 돌아갔다. 아무래도 여주와 학창 시절을 함께 했다보니 자연스럽게 그 시절처럼 행동하게 되는 모양이었다. 거기다 태권도장은 초딩으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철없이 굴기 딱 좋은 장소였기에 어엿한 스물넷 성인들은 그 초딩들마저 혀를 내두르는 유치함을 선보였다. 


"정국이 형! 저두, 저두 비행기 해주세여!" 

"알았으. 야 얘들아 형이 이거 쉬는 시간에만 해주는 거야~" 

"꺄하하핳!!끼야아ㅏ앙(정국파크 개장)" 

"뭐야 전정국, 아주 힘이 남아 도는구만." 

"여주 누나, 누나도 해주세여." 

"머..? 얘들아 나 여자야... 몰랐겠지만;" 

"에이 요즘 남자여자가 어딨어여." 

"...? 아니 남자여자가 없는 건 맞는데 생물학적으로 쟤랑 나는 피지컬 차이가 난다고. 얘들아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봐, 저 근육돼지랑 나를 어떻게 동일선상에 놓을 수가 있어." 

"그래, 형이 해줄게. 여주 누나는 체력이 거지라서 안돼. 딱봐도 맥아리 없게 생겼잖아, 저 누나는." 

"그건 맞아요." 


...롸? 이것들이? 


"그리고 여주 누나는 운동은 숨쉬기 운동밖에 안해가지고 근력이 없어서 이런거 못해줘. 너넨 저런 어른 되면 안 된다?(소곤소곤)" 

"네에. 절대 안 그럴게여.(속닥속닥)" 

"너네 다 들린다." 

"어익후, 나는 또 안 들리는 줄 알았지." 

"전정국 너 이 새끼," 

"어어? 쓰읍. 자라나는 새싹들이 듣고 있는데 새끼라니." 


그 말에 여주가 흠칫하자 초딩들은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초롱초롱 눈빛 공격을 해댔다. 쒸익, 저것들 나보다 욕 더 잘할 거 같은데..!!! 억울하지만 일단 정국의 말에 틀린 건 없어서 여주는 부루퉁하게 입이 나왔다. 씨이.. 진 기분이야.(유치함 갑) 


"못된 말 해놓고 뭐 잘했다고 입이 요만큼이나 나왔어요, 여주 누나." 

"뭐야, 징그러우니까 누나라고 하지마 임마." 


아이들과 있을 때는 호칭까지 애들한테 맞춰주는건지 정국은 잘도 능글맞게 누나누나 거렸다. 


"못된 말했으니까 뽀뽀해줘야 돼요!" 


예..? 이건 또 뭔소리야. 여주와 정국이 동시에 말을 한 아이를 쳐다봤다. 

못된 말하면 벌로 뽀뽀해주는 거라고 엄마랑 아빠가 그랬어요. 이제 막 유치원에서 최고 형아 대접을 받을 것 같은 쪼끄만 감자머리 아이가 또랑또랑 말했다. 응, 애기야 부모님이 참 사랑이 넘치시는구나 근데 우린 아니야. 절대. 아니야. 지지야.(강경) 

순간 당황했던 정국은 질색하는 여주를 보자 놀리고 싶어졌는지 어느새 씨걸 눈빛을 장착했다. 


"뭐해. 뽀뽀해야한다잖아, 여주야." 

"미쳤어....?(경악)" 

"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끝까지 놀리려고 했는데 니 얼굴보니까 웃겨서 안 되겠다." 

"웃겨...?내 얼굴이 웃기냐고." 

"어, 세상에서 배여주가 제일 웃겨." 

"이 쒸걸같은 게!(욕아님)" 


한참 둘이서 투닥대는 걸 보는 유딩 및 초딩들은 태권도장에서 성장판의 활성화 뿐 아니라 인생의 교훈도 얻었다. 

크면 저런 어른은 안 되어야지.




"배여주. 아이스크림 먹고 가자. 힘썼더니 갑자기 비비빅 땡겨."

"오~ 언제는 안 땡겼던 척 하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내가 먹고 싶다했으니까 너도 사 줄게."

"엏 그럼 난 투게더."

"...? 배여주 양심 어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녁 때쯤 일을 마친 정국과 여주는 오랜만에 퇴근길을 같이했다. 오늘따라 여주는 알바를 쉬는 날이었고 정국은 다른 약속이 없었다. 

근처 편의점에서 비비빅 하나 캔디바 하나를 산 두 사람은 큰 벚나무 아래에 있는 평상에 앉아 각자 아이스크림 하나씩을 물었다. 4월이다보니 벚꽃이 한창이어서 밤하늘을 올려다 보는 여주의 얼굴에 꽃잎을 실은 봄 바람이 살랑거렸다. 

대충 비비빅을 한 입 먹던 정국은 오랜만에 여유를 즐기는 여주를 구경했다. 아르바이트가 많이 고된 지 살이 좀 빠진 것도 같았다. 마음 같아선 제대로 된 밥이라도 사 먹이고 싶은데, 도대체 알바를 몇 개를 하는 건지 여주는 좀처럼 밥 먹을 시간도 잘 나지 않았다. 물론 지금 밥이 중요한 건 아니지만. 정국은 할 말이 있는지 입술을 달싹거렸다.


"야."

"응?"

"너 서울 가게 되면, 나한테 꼭 말해주고 가."

"당연히 말하고 가지. 왜애, 내가 말도 없이 갈까봐 그르냐?"

"응. 그러면 나도 서울 가려고."

"어?!? 네가 서울을 왜 가...?"

"나 가는 거 싫어?"

"아니아니 그게 아니라 뭐 때문에 가는,(다급)"

"너."

"....어?"

"서울 가면 너 있잖아."


정국이 진지하게 눈을 맞췄다. 여주의 눈동자를 제 안에 다 담아내듯이 조금도 피하지 않고 느릿한 눈빛이다. 그 순간 시간은 흘러가는 것을 잠시 쉬어버렸다. 그래서 그 대신 여주의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공간에서 여주와 정국의 머리카락만 바람에 흔들려 얼굴을 간지럽힌다. 

...ㅇ,아니 지금 이 상황 뭐야. 갑자기 이 분위기 뭔데. 뭐냐곸!


"...전정국 구라 치지 마라."

"응, 구라야."

"야이(험한말)"


그럼 그렇지. 간질간질한 분위기는 1분을 채 못 갔다. 여주의 극대노에 다시 원래대로 돌아와 웃음이 터진 정국은 그대로 상체를 젖혀 평상에 누웠다. 


"야, 일어나라. 사람들이 너 술먹고 길에서 자는 줄 알어."

"우리 어릴 때, 날씨 따뜻해지면 맨날 여기서 누워가지고 놀았는데."

"그건 어릴 때지. 니 나이를 생각해..."

"너도 누워봐봐. 오늘은 그래도 별 3개 정도는 보이는 거 같애."

"별이 있어?"


나이를 생각하라던 배여주(24.3세)는 별 보인다는 말에 주저 않고 정국의 옆에 따라 누웠다. 부산의 하늘은 별을 자주 보여주지 않았으니까 한 곳에서 3개나 보이는 건 나름 흔치 않은 기회였다. 어릴 때부터 별 보는 걸 좋아하던 여주는 다 커서도 여전했다. 


"오, 야 진짜 3개 보여."

"눕길 잘했지?"

"어.(정신 팔림) 엇, 4개...아니네 인공위성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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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여주. 근데 나 아까 서울 간다던 건 구라 아니야. 서울에서 할 일이 생겼어."

"뭔데?"

"사진."

"사진??"

"어. 나 무릎 다치고 나서 되게 생각을 많이 해봤어, 앞으로 뭘 해야하나. 너도 알다시피 나 태권도 말고 한 게 아무것도 없잖아. 그래서 다치고 나니까 남은 게 없더라고."

"..."

"그래서 그냥 취미삼아 형 카메라 들고 다니면서 사진 찍고 그랬어. 가끔 블로그 같은 데 올리고. 근데 사진 작가가 나랑 같이 작업 해보고 싶다고 연락했더라."

"...조심스럽게 말하는 건데 사기는 아니지?"

"ㅋㅋㅋㅋ나도 당연히 그 생각 했지. 근데 만나보니까 그 사람 김태형이야."

"김태형? 내가 아는 김태형?"


대한민국에서 김태형을 모르면 간첩...까진 아니고 그냥 티비나 인터넷 같은 걸 잘 안보나 싶을 정도로 김태형은 유명했다. 연예인 왜 안하고 살았나 싶을 만큼 뛰어난 미모도 유명세에 한 몫했지만 일단 사진을 기가 막히게 찍었다. 특유의 색감과 감성이 돋보이는 젊은 사진 작가인 태형은 국내 및 해외에서 몇 번 전시회를 가질 정도였다. 

생각해보니 나 중고딩 때 쟤가 인생샷 몇 번 찍어준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유명하고 대단한 사람이 만나러 올 정도면 정국이 실력이 있는 건 확실한 모양이었다. 아직 작품을 본 적은 없지만. 


"김태형이 부산까지 왔어?"

"응. 나도 안 믿겨가지고 직접 만날 때까지 신종 사기 수법인 줄 알았다니까."

"야, 그래도 즌증구기 출세했다? 그러고보니 너 학교 다닐 때 그림그리기대회 상도 휩쓸었잖아."

"그림이랑 사진이 무슨 상관인데ㅋㅋㅋㅋ"

"상관이 왜 없어, 원래 미적 감각이 있는 사람들이 다 잘 하고 그런 거 아니야아. 어쨌든 그래서 그 사람이랑 같이 작업하러 서울 간다고?"

"응. 숙소도 마련해 주겠대. 나로서는 마다할 거 없는 조건이라 가려고."

"그럼 언제 가?"

"너 서울 돌아가고 나면. 그 형이 내가 오고 싶을 때 오라더라."

"오~ 벌써 형이라고 부르는ㄷ... 어, 근데 왜 나 서울 가고 나서 가?"

"어? 뭐, 그냥... 지금은 너랑 이렇게 노는 것도 재밌고... 나 서울에 아는 사람 아무도 없는데, 너라도 있어야 마음이 편하지."

"하긴, 그건 그렇겠다."


함냐. 수긍한다는 듯 끄덕거리던 여주는 남은 아이스크림을 입에 쏙 집어넣었다. 혹시나 다음 주에 가, 이러면 좀 아쉬울 거 같았는데 다행이었다. 힘든 생활이지만 그래도 정국이 있어서 그나마 즐거웠으니까. 그래도 정국이 빨리 그 김태형이랑 작업하게 되려면, 여주는 자기가 빨리 서울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괜히 저 때문에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하, 나도 다음 학기에는 꼭 복학하고 싶은데.


"나 이거 너한테 제일 먼저 말한 거다?"

"엑. 진짜? 가족은? 다른 친구들한테는?"

"이제 집 가서 말하려고. 너가 저번에 하~도 서운해 하길래."


무릎 부상 얘길 안해서 잠깐 서운해 했던 걸 말하는 모양이었다. 놀리듯이 말하는 정국에 여주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되받아쳤다. 


"야 내가 뭘또 하~도 서운해 했냐. 그냥 쪼꼼 속상하네 정도였지."

"너는 얼굴에서 무슨 생각하는 지 다 티나. 오빠 눈은 못 속인다."

"(험한말)"



**



연서와 헤어지고 한 달이 조금 지났다. 석진은 연서의 빈 자리를 일로 메워가며 나름대로 잘 지내고 있었다. 솔직히 연서랑 헤어지면 폐인이 되는 건 아닐까 걱정도 했는데, 생각보다 이별은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막 좋아했던 건 아닌가. ... 아닌데, 많이 좋아했는데. 


지잉-지잉-


아, 또.  

진동 소리에 폰을 뒤집어 화면을 확인한 석진의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석진의 어머니였다. 마음 같아선 안 받고 싶었다. 잠깐 마른 세수를 한 석진은 곧 수락 버튼을 눌러야 했다.


"어, 진아~ 내가 너무 좋은 자리를 알게 됐는데,(중략)~어쨌든 그 아가씨도 너 만나보고 싶대. 시간 되니?"

"....저 지금 일하는 중이에요."

"점심 시간인데? 밥 안 먹어?"

"아뇨, 먹고 왔어요."

"너 또 대충 커피랑 샌드위치 이런 거 먹었지."

"아니에요.(맞음)"

"그래, 어쨌든 오늘은 퇴근하면 집으로 와. 아버지도 기다리셔."

"네."


그래, 연서랑 헤어진 건 괜찮았다. 계속 밀려들어오는 혼담과 신나서 밀어붙이는 어머니가 안 괜찮았을 뿐. 갑자기 형이 왜 사랑의 도피를 한 건지 알 거 같기도 하고. 

어머니는 아들의 결혼이 어지간히 신경이 쓰이시는지, 계속 초면인 여자들의 사진을 내밀며 어떤지를 묻거나 억지로 약속을 만들었다. 헤어졌으니 이젠 여자친구 있다는 핑계도 안 먹혔다. 

헤어졌다는 말에 잠깐 눈치를 살폈던 그녀는 머지 않아 아들에게 어울릴 아가씨들을 물색했다. 

다른 재벌가 사모님들과 다른 게 있다면 '좋은 며느리'가 될 사람이 아니라 '좋은 아내'가 될 사람을 찾는다는 거였다. 순수하게 석진을 좋아하고 배려심 많은 사랑스러운 아가씨, 가 그 기준이었다. 물론 석진에게 연애감정을 강요하는 건 아니었고 그냥 한 번 만나보라고만 하는 것이었으나 석진은 그 자체가 귀찮았다. 예의 상 함께한 식사 후 계속 보고 싶다는 여자의 관심에 미안해요, 하고 거절하는 것도 이젠 신물이 났다. 그래서 이젠 만남 자체도 응하지 않는 중이었다. 안 그래도 결혼에 크게 관심이 없었던 석진은 순전히 결혼만을 위한 관계가 불편하고 싫었다.

퇴근 후에 또 몰아칠 잔소리를 떠올리자 석진은 한숨을 쉬고 소매를 걷어 올렸다. 





"너 토요일 회사 안 나가서 시간 낼 수 있다고 했는데 무작정 싫다고 하면 어떡해. 네 취향 아니더라도 일단 만나는 보라니까? 대화해보면 또 괜찮을 수도 있잖아."

"피곤해요."

"너 정말 자꾸 그러면 내가 골라서 결혼 시킬거야?"


체할 거 같아서 석진은 숟가락을 내려놨다. 그냥 오지 말걸. 퇴근 직후의 피곤한 몸이 더 무거워진다. 왜 저러시는지 이해는 한다만 이해와는 별개로 석진은 이 상황이 지겨웠다. 정말 아무나랑 결혼하고 몇 년 뒤에 이혼해버릴까 싶을만큼. 그럼 이 지긋지긋함도 끝나려나. 


"여보 밥 먹고 나서 얘기해요, 애가 불편해서 밥을 못 먹네."

"아니, 이렇게라도 안하면 결혼할 생각을 안하잖아요."

"...석진아. 우리가 너 힘들게 하려고 이러는 게 아닌 건 알잖으냐."

"네."

"그래, 엄마는 그냥 순수하게 너 좋아해줄 착한 아가씨가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서 그러지...우리 같은 사람들은 워낙 주변에 이상한 사람이 많잖아."

"알아요. 그냥 좀 지쳐서 그래요."


보다못한 김 회장의 중재로 제 n차 김석진 결혼 회담은 다른 국면을 맞이했다. 가족들이 다 같이 모여 있으니 무슨 일인지 궁금한 건지 지니가 총총 와서는 석진의 다리를 잡고 서서 꼬리를 흔들었다. 지니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 주던 석진은 문득 손을 멈췄다. 오늘따라 지니 눈이 초롱초롱한 게 누굴 닮은 것 같다. 내 주변에 강아지 닮은 사람이 있었던가. 누구였... 아. 

순간 지니 얼굴 위로 사슴 같은 눈망울을 반짝거리던 여주가 스쳤다. 

여주 학생이었구나. 맞아, 쳐다보는 게 닮았었지. 아직도 휴학 중이려나. 부산에 갔단 말은 들은 거 같은데. 그러고보니 아직 편지도 안 읽었다.  

어머니가 하는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는 석진은 잠시 멍하게 다른 생각을 했다.   


"응? 듣고 있는 거니? 네가 지치는 건 알지만 그래도,"

"그럼 제가 결혼할 사람 데려오면, 바로 허락하실래요."

"뭐?" 


석진은 자기가 말하고도 당황했다. 그냥 여주 생각을 잠시 했던 거 뿐인데 말이 저렇게 나와버렸다. 더이상 결혼 문제로 시달리기 싫다는 마음이 커서 그랬는지 홧김에 뱉어버린 말은 석진의 동공을 흔들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당장 결혼할 사람을 어디서 데려 와. 지금이라도 수습을,


"ㅈ..."

"어머어머 당연하지, 그걸 말이라고 하니! 엄마는 네가 좋다는 사람이면 다 좋아."

"엄마가 좋으면 아버지도 좋다. 만나는 사람이 있었으면 진작 말을 하지 그랬냐. 외국인은 아니지?(큰아들 트라우마)"

"...그게 아니고,"

"그래애~ 엄마는 너 헤어졌다길래 싱글인 줄 알았지. 그럼 만난 지 한 달도 안 된 사람인 거야?"

"만나는 기간이 뭐가 중요해요. 우리도 두 달만에 결혼했는데."

"어머나,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ㅎㅎㅎ"


금세 화기애애해진 분위기에 지니도 망망 거리면서 좋다고 팔랑팔랑 뛰었다. 

지니야, 지금 좋다고 할 때가 아니야. 형 큰 일 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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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해. 뽀뽀해야한다잖아, 여주야." 

"미쳤어....?(경악)" 

"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끝까지 놀리려고 했는데 니 얼굴보니까 웃겨서 안 되겠다." 

"웃겨...?내 얼굴이 웃기냐고." 

"어, 세상에서 배여주가 제일 웃겨." 

"이 쒸걸같은 게!(욕아님)" 


한참 둘이서 투닥대는 걸 보는 유딩 및 초딩들은 태권도장에서 성장판의 활성화 뿐 아니라 인생의 교훈도 얻었다. 

크면 저런 어른은 안 되어야지.




"배여주. 아이스크림 먹고 가자. 힘썼더니 갑자기 비비빅 땡겨."

"오~ 언제는 안 땡겼던 척 하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내가 먹고 싶다했으니까 너도 사 줄게."

"엏 그럼 난 투게더."

"...? 배여주 양심 어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녁 때쯤 일을 마친 정국과 여주는 오랜만에 퇴근길을 같이했다. 오늘따라 여주는 알바를 쉬는 날이었고 정국은 다른 약속이 없었다. 

근처 편의점에서 비비빅 하나 캔디바 하나를 산 두 사람은 큰 벚나무 아래에 있는 평상에 앉아 각자 아이스크림 하나씩을 물었다. 4월이다보니 벚꽃이 한창이어서 밤하늘을 올려다 보는 여주의 얼굴에 꽃잎을 실은 봄 바람이 살랑거렸다. 

대충 비비빅을 한 입 먹던 정국은 오랜만에 여유를 즐기는 여주를 구경했다. 아르바이트가 많이 고된 지 살이 좀 빠진 것도 같았다. 마음 같아선 제대로 된 밥이라도 사 먹이고 싶은데, 도대체 알바를 몇 개를 하는 건지 여주는 좀처럼 밥 먹을 시간도 잘 나지 않았다. 물론 지금 밥이 중요한 건 아니지만. 정국은 할 말이 있는지 입술을 달싹거렸다.


"야."

"응?"

"너 서울 가게 되면, 나한테 꼭 말해주고 가."

"당연히 말하고 가지. 왜애, 내가 말도 없이 갈까봐 그르냐?"

"응. 그러면 나도 서울 가려고."

"어?!? 네가 서울을 왜 가...?"

"나 가는 거 싫어?"

"아니아니 그게 아니라 뭐 때문에 가는,(다급)"

"너."

"....어?"

"서울 가면 너 있잖아."


정국이 진지하게 눈을 맞췄다. 여주의 눈동자를 제 안에 다 담아내듯이 조금도 피하지 않고 느릿한 눈빛이다. 그 순간 시간은 흘러가는 것을 잠시 쉬어버렸다. 그래서 그 대신 여주의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공간에서 여주와 정국의 머리카락만 바람에 흔들려 얼굴을 간지럽힌다. 

...ㅇ,아니 지금 이 상황 뭐야. 갑자기 이 분위기 뭔데. 뭐냐곸!


"...전정국 구라 치지 마라."

"응, 구라야."

"야이(험한말)"


그럼 그렇지. 간질간질한 분위기는 1분을 채 못 갔다. 여주의 극대노에 다시 원래대로 돌아와 웃음이 터진 정국은 그대로 상체를 젖혀 평상에 누웠다. 


"야, 일어나라. 사람들이 너 술먹고 길에서 자는 줄 알어."

"우리 어릴 때, 날씨 따뜻해지면 맨날 여기서 누워가지고 놀았는데."

"그건 어릴 때지. 니 나이를 생각해..."

"너도 누워봐봐. 오늘은 그래도 별 3개 정도는 보이는 거 같애."

"별이 있어?"


나이를 생각하라던 배여주(24.3세)는 별 보인다는 말에 주저 않고 정국의 옆에 따라 누웠다. 부산의 하늘은 별을 자주 보여주지 않았으니까 한 곳에서 3개나 보이는 건 나름 흔치 않은 기회였다. 어릴 때부터 별 보는 걸 좋아하던 여주는 다 커서도 여전했다. 


"오, 야 진짜 3개 보여."

"눕길 잘했지?"

"어.(정신 팔림) 엇, 4개...아니네 인공위성이네."


[방탄소년단/김석진] 계약결혼의 법칙 02 | 인스티즈

"...배여주. 근데 나 아까 서울 간다던 건 구라 아니야. 서울에서 할 일이 생겼어."

"뭔데?"

"사진."

"사진??"

"어. 나 무릎 다치고 나서 되게 생각을 많이 해봤어, 앞으로 뭘 해야하나. 너도 알다시피 나 태권도 말고 한 게 아무것도 없잖아. 그래서 다치고 나니까 남은 게 없더라고."

"..."

"그래서 그냥 취미삼아 형 카메라 들고 다니면서 사진 찍고 그랬어. 가끔 블로그 같은 데 올리고. 근데 사진 작가가 나랑 같이 작업 해보고 싶다고 연락했더라."

"...조심스럽게 말하는 건데 사기는 아니지?"

"ㅋㅋㅋㅋ나도 당연히 그 생각 했지. 근데 만나보니까 그 사람 김태형이야."

"김태형? 내가 아는 김태형?"


대한민국에서 김태형을 모르면 간첩...까진 아니고 그냥 티비나 인터넷 같은 걸 잘 안보나 싶을 정도로 김태형은 유명했다. 연예인 왜 안하고 살았나 싶을 만큼 뛰어난 미모도 유명세에 한 몫했지만 일단 사진을 기가 막히게 찍었다. 특유의 색감과 감성이 돋보이는 젊은 사진 작가인 태형은 국내 및 해외에서 몇 번 전시회를 가질 정도였다. 

생각해보니 나 중고딩 때 쟤가 인생샷 몇 번 찍어준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유명하고 대단한 사람이 만나러 올 정도면 정국이 실력이 있는 건 확실한 모양이었다. 아직 작품을 본 적은 없지만. 


"김태형이 부산까지 왔어?"

"응. 나도 안 믿겨가지고 직접 만날 때까지 신종 사기 수법인 줄 알았다니까."

"야, 그래도 즌증구기 출세했다? 그러고보니 너 학교 다닐 때 그림그리기대회 상도 휩쓸었잖아."

"그림이랑 사진이 무슨 상관인데ㅋㅋㅋㅋ"

"상관이 왜 없어, 원래 미적 감각이 있는 사람들이 다 잘 하고 그런 거 아니야아. 어쨌든 그래서 그 사람이랑 같이 작업하러 서울 간다고?"

"응. 숙소도 마련해 주겠대. 나로서는 마다할 거 없는 조건이라 가려고."

"그럼 언제 가?"

"너 서울 돌아가고 나면. 그 형이 내가 오고 싶을 때 오라더라."

"오~ 벌써 형이라고 부르는ㄷ... 어, 근데 왜 나 서울 가고 나서 가?"

"어? 뭐, 그냥... 지금은 너랑 이렇게 노는 것도 재밌고... 나 서울에 아는 사람 아무도 없는데, 너라도 있어야 마음이 편하지."

"하긴, 그건 그렇겠다."


함냐. 수긍한다는 듯 끄덕거리던 여주는 남은 아이스크림을 입에 쏙 집어넣었다. 혹시나 다음 주에 가, 이러면 좀 아쉬울 거 같았는데 다행이었다. 힘든 생활이지만 그래도 정국이 있어서 그나마 즐거웠으니까. 그래도 정국이 빨리 그 김태형이랑 작업하게 되려면, 여주는 자기가 빨리 서울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괜히 저 때문에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하, 나도 다음 학기에는 꼭 복학하고 싶은데.


"나 이거 너한테 제일 먼저 말한 거다?"

"엑. 진짜? 가족은? 다른 친구들한테는?"

"이제 집 가서 말하려고. 너가 저번에 하~도 서운해 하길래."


무릎 부상 얘길 안해서 잠깐 서운해 했던 걸 말하는 모양이었다. 놀리듯이 말하는 정국에 여주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되받아쳤다. 


"야 내가 뭘또 하~도 서운해 했냐. 그냥 쪼꼼 속상하네 정도였지."

"너는 얼굴에서 무슨 생각하는 지 다 티나. 오빠 눈은 못 속인다."

"(험한말)"



**



연서와 헤어지고 한 달이 조금 지났다. 석진은 연서의 빈 자리를 일로 메워가며 나름대로 잘 지내고 있었다. 솔직히 연서랑 헤어지면 폐인이 되는 건 아닐까 걱정도 했는데, 생각보다 이별은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막 좋아했던 건 아닌가. ... 아닌데, 많이 좋아했는데. 


지잉-지잉-


아, 또.  

진동 소리에 폰을 뒤집어 화면을 확인한 석진의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석진의 어머니였다. 마음 같아선 안 받고 싶었다. 잠깐 마른 세수를 한 석진은 곧 수락 버튼을 눌러야 했다.


"어, 진아~ 내가 너무 좋은 자리를 알게 됐는데,(중략)~어쨌든 그 아가씨도 너 만나보고 싶대. 시간 되니?"

"....저 지금 일하는 중이에요."

"점심 시간인데? 밥 안 먹어?"

"아뇨, 먹고 왔어요."

"너 또 대충 커피랑 샌드위치 이런 거 먹었지."

"아니에요.(맞음)"

"그래, 어쨌든 오늘은 퇴근하면 집으로 와. 아버지도 기다리셔."

"네."


그래, 연서랑 헤어진 건 괜찮았다. 계속 밀려들어오는 혼담과 신나서 밀어붙이는 어머니가 안 괜찮았을 뿐. 갑자기 형이 왜 사랑의 도피를 한 건지 알 거 같기도 하고. 

어머니는 아들의 결혼이 어지간히 신경이 쓰이시는지, 계속 초면인 여자들의 사진을 내밀며 어떤지를 묻거나 억지로 약속을 만들었다. 헤어졌으니 이젠 여자친구 있다는 핑계도 안 먹혔다. 

헤어졌다는 말에 잠깐 눈치를 살폈던 그녀는 머지 않아 아들에게 어울릴 아가씨들을 물색했다. 

다른 재벌가 사모님들과 다른 게 있다면 '좋은 며느리'가 될 사람이 아니라 '좋은 아내'가 될 사람을 찾는다는 거였다. 순수하게 석진을 좋아하고 배려심 많은 사랑스러운 아가씨, 가 그 기준이었다. 물론 석진에게 연애감정을 강요하는 건 아니었고 그냥 한 번 만나보라고만 하는 것이었으나 석진은 그 자체가 귀찮았다. 예의 상 함께한 식사 후 계속 보고 싶다는 여자의 관심에 미안해요, 하고 거절하는 것도 이젠 신물이 났다. 그래서 이젠 만남 자체도 응하지 않는 중이었다. 안 그래도 결혼에 크게 관심이 없었던 석진은 순전히 결혼만을 위한 관계가 불편하고 싫었다.

퇴근 후에 또 몰아칠 잔소리를 떠올리자 석진은 한숨을 쉬고 소매를 걷어 올렸다. 





"너 토요일 회사 안 나가서 시간 낼 수 있다고 했는데 무작정 싫다고 하면 어떡해. 네 취향 아니더라도 일단 만나는 보라니까? 대화해보면 또 괜찮을 수도 있잖아."

"피곤해요."

"너 정말 자꾸 그러면 내가 골라서 결혼 시킬거야?"


체할 거 같아서 석진은 숟가락을 내려놨다. 그냥 오지 말걸. 퇴근 직후의 피곤한 몸이 더 무거워진다. 왜 저러시는지 이해는 한다만 이해와는 별개로 석진은 이 상황이 지겨웠다. 정말 아무나랑 결혼하고 몇 년 뒤에 이혼해버릴까 싶을만큼. 그럼 이 지긋지긋함도 끝나려나. 


"여보 밥 먹고 나서 얘기해요, 애가 불편해서 밥을 못 먹네."

"아니, 이렇게라도 안하면 결혼할 생각을 안하잖아요."

"...석진아. 우리가 너 힘들게 하려고 이러는 게 아닌 건 알잖으냐."

"네."

"그래, 엄마는 그냥 순수하게 너 좋아해줄 착한 아가씨가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서 그러지...우리 같은 사람들은 워낙 주변에 이상한 사람이 많잖아."

"알아요. 그냥 좀 지쳐서 그래요."


보다못한 김 회장의 중재로 제 n차 김석진 결혼 회담은 다른 국면을 맞이했다. 가족들이 다 같이 모여 있으니 무슨 일인지 궁금한 건지 지니가 총총 와서는 석진의 다리를 잡고 서서 꼬리를 흔들었다. 지니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 주던 석진은 문득 손을 멈췄다. 오늘따라 지니 눈이 초롱초롱한 게 누굴 닮은 것 같다. 내 주변에 강아지 닮은 사람이 있었던가. 누구였... 아. 

순간 지니 얼굴 위로 사슴 같은 눈망울을 반짝거리던 여주가 스쳤다. 

여주 학생이었구나. 맞아, 쳐다보는 게 닮았었지. 아직도 휴학 중이려나. 부산에 갔단 말은 들은 거 같은데. 그러고보니 아직 편지도 안 읽었다.  

어머니가 하는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는 석진은 잠시 멍하게 다른 생각을 했다.   


"응? 듣고 있는 거니? 네가 지치는 건 알지만 그래도,"

"그럼 제가 결혼할 사람 데려오면, 바로 허락하실래요."

"뭐?" 


석진은 자기가 말하고도 당황했다. 그냥 여주 생각을 잠시 했던 거 뿐인데 말이 저렇게 나와버렸다. 더이상 결혼 문제로 시달리기 싫다는 마음이 커서 그랬는지 홧김에 뱉어버린 말은 석진의 동공을 흔들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당장 결혼할 사람을 어디서 데려 와. 지금이라도 수습을,


"ㅈ..."

"어머어머 당연하지, 그걸 말이라고 하니! 엄마는 네가 좋다는 사람이면 다 좋아."

"엄마가 좋으면 아버지도 좋다. 만나는 사람이 있었으면 진작 말을 하지 그랬냐. 외국인은 아니지?(큰아들 트라우마)"

"...그게 아니고,"

"그래애~ 엄마는 너 헤어졌다길래 싱글인 줄 알았지. 그럼 만난 지 한 달도 안 된 사람인 거야?"

"만나는 기간이 뭐가 중요해요. 우리도 두 달만에 결혼했는데."

"어머나,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ㅎㅎㅎ"


금세 화기애애해진 분위기에 지니도 망망 거리면서 좋다고 팔랑팔랑 뛰었다. 

지니야, 지금 좋다고 할 때가 아니야. 형 큰 일 났어.


[방탄소년단/김석진] 계약결혼의 법칙 02 | 인스티즈

"뭐해. 뽀뽀해야한다잖아, 여주야." 

"미쳤어....?(경악)" 

"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끝까지 놀리려고 했는데 니 얼굴보니까 웃겨서 안 되겠다." 

"웃겨...?내 얼굴이 웃기냐고." 

"어, 세상에서 배여주가 제일 웃겨." 

"이 쒸걸같은 게!(욕아님)" 


한참 둘이서 투닥대는 걸 보는 유딩 및 초딩들은 태권도장에서 성장판의 활성화 뿐 아니라 인생의 교훈도 얻었다. 

크면 저런 어른은 안 되어야지.




"배여주. 아이스크림 먹고 가자. 힘썼더니 갑자기 비비빅 땡겨."

"오~ 언제는 안 땡겼던 척 하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내가 먹고 싶다했으니까 너도 사 줄게."

"엏 그럼 난 투게더."

"...? 배여주 양심 어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녁 때쯤 일을 마친 정국과 여주는 오랜만에 퇴근길을 같이했다. 오늘따라 여주는 알바를 쉬는 날이었고 정국은 다른 약속이 없었다. 

근처 편의점에서 비비빅 하나 캔디바 하나를 산 두 사람은 큰 벚나무 아래에 있는 평상에 앉아 각자 아이스크림 하나씩을 물었다. 4월이다보니 벚꽃이 한창이어서 밤하늘을 올려다 보는 여주의 얼굴에 꽃잎을 실은 봄 바람이 살랑거렸다. 

대충 비비빅을 한 입 먹던 정국은 오랜만에 여유를 즐기는 여주를 구경했다. 아르바이트가 많이 고된 지 살이 좀 빠진 것도 같았다. 마음 같아선 제대로 된 밥이라도 사 먹이고 싶은데, 도대체 알바를 몇 개를 하는 건지 여주는 좀처럼 밥 먹을 시간도 잘 나지 않았다. 물론 지금 밥이 중요한 건 아니지만. 정국은 할 말이 있는지 입술을 달싹거렸다.


"야."

"응?"

"너 서울 가게 되면, 나한테 꼭 말해주고 가."

"당연히 말하고 가지. 왜애, 내가 말도 없이 갈까봐 그르냐?"

"응. 그러면 나도 서울 가려고."

"어?!? 네가 서울을 왜 가...?"

"나 가는 거 싫어?"

"아니아니 그게 아니라 뭐 때문에 가는,(다급)"

"너."

"....어?"

"서울 가면 너 있잖아."


정국이 진지하게 눈을 맞췄다. 여주의 눈동자를 제 안에 다 담아내듯이 조금도 피하지 않고 느릿한 눈빛이다. 그 순간 시간은 흘러가는 것을 잠시 쉬어버렸다. 그래서 그 대신 여주의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공간에서 여주와 정국의 머리카락만 바람에 흔들려 얼굴을 간지럽힌다. 

...ㅇ,아니 지금 이 상황 뭐야. 갑자기 이 분위기 뭔데. 뭐냐곸!


"...전정국 구라 치지 마라."

"응, 구라야."

"야이(험한말)"


그럼 그렇지. 간질간질한 분위기는 1분을 채 못 갔다. 여주의 극대노에 다시 원래대로 돌아와 웃음이 터진 정국은 그대로 상체를 젖혀 평상에 누웠다. 


"야, 일어나라. 사람들이 너 술먹고 길에서 자는 줄 알어."

"우리 어릴 때, 날씨 따뜻해지면 맨날 여기서 누워가지고 놀았는데."

"그건 어릴 때지. 니 나이를 생각해..."

"너도 누워봐봐. 오늘은 그래도 별 3개 정도는 보이는 거 같애."

"별이 있어?"


나이를 생각하라던 배여주(24.3세)는 별 보인다는 말에 주저 않고 정국의 옆에 따라 누웠다. 부산의 하늘은 별을 자주 보여주지 않았으니까 한 곳에서 3개나 보이는 건 나름 흔치 않은 기회였다. 어릴 때부터 별 보는 걸 좋아하던 여주는 다 커서도 여전했다. 


"오, 야 진짜 3개 보여."

"눕길 잘했지?"

"어.(정신 팔림) 엇, 4개...아니네 인공위성이네."


[방탄소년단/김석진] 계약결혼의 법칙 02 | 인스티즈

"...배여주. 근데 나 아까 서울 간다던 건 구라 아니야. 서울에서 할 일이 생겼어."

"뭔데?"

"사진."

"사진??"

"어. 나 무릎 다치고 나서 되게 생각을 많이 해봤어, 앞으로 뭘 해야하나. 너도 알다시피 나 태권도 말고 한 게 아무것도 없잖아. 그래서 다치고 나니까 남은 게 없더라고."

"..."

"그래서 그냥 취미삼아 형 카메라 들고 다니면서 사진 찍고 그랬어. 가끔 블로그 같은 데 올리고. 근데 사진 작가가 나랑 같이 작업 해보고 싶다고 연락했더라."

"...조심스럽게 말하는 건데 사기는 아니지?"

"ㅋㅋㅋㅋ나도 당연히 그 생각 했지. 근데 만나보니까 그 사람 김태형이야."

"김태형? 내가 아는 김태형?"


대한민국에서 김태형을 모르면 간첩...까진 아니고 그냥 티비나 인터넷 같은 걸 잘 안보나 싶을 정도로 김태형은 유명했다. 연예인 왜 안하고 살았나 싶을 만큼 뛰어난 미모도 유명세에 한 몫했지만 일단 사진을 기가 막히게 찍었다. 특유의 색감과 감성이 돋보이는 젊은 사진 작가인 태형은 국내 및 해외에서 몇 번 전시회를 가질 정도였다. 

생각해보니 나 중고딩 때 쟤가 인생샷 몇 번 찍어준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유명하고 대단한 사람이 만나러 올 정도면 정국이 실력이 있는 건 확실한 모양이었다. 아직 작품을 본 적은 없지만. 


"김태형이 부산까지 왔어?"

"응. 나도 안 믿겨가지고 직접 만날 때까지 신종 사기 수법인 줄 알았다니까."

"야, 그래도 즌증구기 출세했다? 그러고보니 너 학교 다닐 때 그림그리기대회 상도 휩쓸었잖아."

"그림이랑 사진이 무슨 상관인데ㅋㅋㅋㅋ"

"상관이 왜 없어, 원래 미적 감각이 있는 사람들이 다 잘 하고 그런 거 아니야아. 어쨌든 그래서 그 사람이랑 같이 작업하러 서울 간다고?"

"응. 숙소도 마련해 주겠대. 나로서는 마다할 거 없는 조건이라 가려고."

"그럼 언제 가?"

"너 서울 돌아가고 나면. 그 형이 내가 오고 싶을 때 오라더라."

"오~ 벌써 형이라고 부르는ㄷ... 어, 근데 왜 나 서울 가고 나서 가?"

"어? 뭐, 그냥... 지금은 너랑 이렇게 노는 것도 재밌고... 나 서울에 아는 사람 아무도 없는데, 너라도 있어야 마음이 편하지."

"하긴, 그건 그렇겠다."


함냐. 수긍한다는 듯 끄덕거리던 여주는 남은 아이스크림을 입에 쏙 집어넣었다. 혹시나 다음 주에 가, 이러면 좀 아쉬울 거 같았는데 다행이었다. 힘든 생활이지만 그래도 정국이 있어서 그나마 즐거웠으니까. 그래도 정국이 빨리 그 김태형이랑 작업하게 되려면, 여주는 자기가 빨리 서울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괜히 저 때문에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하, 나도 다음 학기에는 꼭 복학하고 싶은데.


"나 이거 너한테 제일 먼저 말한 거다?"

"엑. 진짜? 가족은? 다른 친구들한테는?"

"이제 집 가서 말하려고. 너가 저번에 하~도 서운해 하길래."


무릎 부상 얘길 안해서 잠깐 서운해 했던 걸 말하는 모양이었다. 놀리듯이 말하는 정국에 여주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되받아쳤다. 


"야 내가 뭘또 하~도 서운해 했냐. 그냥 쪼꼼 속상하네 정도였지."

"너는 얼굴에서 무슨 생각하는 지 다 티나. 오빠 눈은 못 속인다."

"(험한말)"



**



연서와 헤어지고 한 달이 조금 지났다. 석진은 연서의 빈 자리를 일로 메워가며 나름대로 잘 지내고 있었다. 솔직히 연서랑 헤어지면 폐인이 되는 건 아닐까 걱정도 했는데, 생각보다 이별은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막 좋아했던 건 아닌가. ... 아닌데, 많이 좋아했는데. 


지잉-지잉-


아, 또.  

진동 소리에 폰을 뒤집어 화면을 확인한 석진의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석진의 어머니였다. 마음 같아선 안 받고 싶었다. 잠깐 마른 세수를 한 석진은 곧 수락 버튼을 눌러야 했다.


"어, 진아~ 내가 너무 좋은 자리를 알게 됐는데,(중략)~어쨌든 그 아가씨도 너 만나보고 싶대. 시간 되니?"

"....저 지금 일하는 중이에요."

"점심 시간인데? 밥 안 먹어?"

"아뇨, 먹고 왔어요."

"너 또 대충 커피랑 샌드위치 이런 거 먹었지."

"아니에요.(맞음)"

"그래, 어쨌든 오늘은 퇴근하면 집으로 와. 아버지도 기다리셔."

"네."


그래, 연서랑 헤어진 건 괜찮았다. 계속 밀려들어오는 혼담과 신나서 밀어붙이는 어머니가 안 괜찮았을 뿐. 갑자기 형이 왜 사랑의 도피를 한 건지 알 거 같기도 하고. 

어머니는 아들의 결혼이 어지간히 신경이 쓰이시는지, 계속 초면인 여자들의 사진을 내밀며 어떤지를 묻거나 억지로 약속을 만들었다. 헤어졌으니 이젠 여자친구 있다는 핑계도 안 먹혔다. 

헤어졌다는 말에 잠깐 눈치를 살폈던 그녀는 머지 않아 아들에게 어울릴 아가씨들을 물색했다. 

다른 재벌가 사모님들과 다른 게 있다면 '좋은 며느리'가 될 사람이 아니라 '좋은 아내'가 될 사람을 찾는다는 거였다. 순수하게 석진을 좋아하고 배려심 많은 사랑스러운 아가씨, 가 그 기준이었다. 물론 석진에게 연애감정을 강요하는 건 아니었고 그냥 한 번 만나보라고만 하는 것이었으나 석진은 그 자체가 귀찮았다. 예의 상 함께한 식사 후 계속 보고 싶다는 여자의 관심에 미안해요, 하고 거절하는 것도 이젠 신물이 났다. 그래서 이젠 만남 자체도 응하지 않는 중이었다. 안 그래도 결혼에 크게 관심이 없었던 석진은 순전히 결혼만을 위한 관계가 불편하고 싫었다.

퇴근 후에 또 몰아칠 잔소리를 떠올리자 석진은 한숨을 쉬고 소매를 걷어 올렸다. 





"너 토요일 회사 안 나가서 시간 낼 수 있다고 했는데 무작정 싫다고 하면 어떡해. 네 취향 아니더라도 일단 만나는 보라니까? 대화해보면 또 괜찮을 수도 있잖아."

"피곤해요."

"너 정말 자꾸 그러면 내가 골라서 결혼 시킬거야?"


체할 거 같아서 석진은 숟가락을 내려놨다. 그냥 오지 말걸. 퇴근 직후의 피곤한 몸이 더 무거워진다. 왜 저러시는지 이해는 한다만 이해와는 별개로 석진은 이 상황이 지겨웠다. 정말 아무나랑 결혼하고 몇 년 뒤에 이혼해버릴까 싶을만큼. 그럼 이 지긋지긋함도 끝나려나. 


"여보 밥 먹고 나서 얘기해요, 애가 불편해서 밥을 못 먹네."

"아니, 이렇게라도 안하면 결혼할 생각을 안하잖아요."

"...석진아. 우리가 너 힘들게 하려고 이러는 게 아닌 건 알잖으냐."

"네."

"그래, 엄마는 그냥 순수하게 너 좋아해줄 착한 아가씨가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서 그러지...우리 같은 사람들은 워낙 주변에 이상한 사람이 많잖아."

"알아요. 그냥 좀 지쳐서 그래요."


보다못한 김 회장의 중재로 제 n차 김석진 결혼 회담은 다른 국면을 맞이했다. 가족들이 다 같이 모여 있으니 무슨 일인지 궁금한 건지 지니가 총총 와서는 석진의 다리를 잡고 서서 꼬리를 흔들었다. 지니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 주던 석진은 문득 손을 멈췄다. 오늘따라 지니 눈이 초롱초롱한 게 누굴 닮은 것 같다. 내 주변에 강아지 닮은 사람이 있었던가. 누구였... 아. 

순간 지니 얼굴 위로 사슴 같은 눈망울을 반짝거리던 여주가 스쳤다. 

여주 학생이었구나. 맞아, 쳐다보는 게 닮았었지. 아직도 휴학 중이려나. 부산에 갔단 말은 들은 거 같은데. 그러고보니 아직 편지도 안 읽었다.  

어머니가 하는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는 석진은 잠시 멍하게 다른 생각을 했다.   


"응? 듣고 있는 거니? 네가 지치는 건 알지만 그래도,"

"그럼 제가 결혼할 사람 데려오면, 바로 허락하실래요."

"뭐?" 


석진은 자기가 말하고도 당황했다. 그냥 여주 생각을 잠시 했던 거 뿐인데 말이 저렇게 나와버렸다. 더이상 결혼 문제로 시달리기 싫다는 마음이 커서 그랬는지 홧김에 뱉어버린 말은 석진의 동공을 흔들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당장 결혼할 사람을 어디서 데려 와. 지금이라도 수습을,


"ㅈ..."

"어머어머 당연하지, 그걸 말이라고 하니! 엄마는 네가 좋다는 사람이면 다 좋아."

"엄마가 좋으면 아버지도 좋다. 만나는 사람이 있었으면 진작 말을 하지 그랬냐. 외국인은 아니지?(큰아들 트라우마)"

"...그게 아니고,"

"그래애~ 엄마는 너 헤어졌다길래 싱글인 줄 알았지. 그럼 만난 지 한 달도 안 된 사람인 거야?"

"만나는 기간이 뭐가 중요해요. 우리도 두 달만에 결혼했는데."

"어머나,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ㅎㅎㅎ"


금세 화기애애해진 분위기에 지니도 망망 거리면서 좋다고 팔랑팔랑 뛰었다. 

지니야, 지금 좋다고 할 때가 아니야. 형 큰 일 났어.


[방탄소년단/김석진] 계약결혼의 법칙 02 | 인스티즈비디오 태그를 지원하지 않는 브라우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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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모든 걱정을 뒤로하고 석진은 조금만 이기적으로 굴어보기로 했다. 여주의 의사가 제일 중요하긴 하지만, 일단은 부딪혀보기로. 

이러다간 진짜 부모님이, 아니 어머니가 정해준 초면인 여자랑 결혼해서 이혼도 못하고 그대로 코꿰어서 살 것 같아서. 나중 일은 나중 일이고 급한 불부터 꺼야하는 석진은 기회가 생겼을 때 일을 마무리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석진이 처음으로 자신의 선을 넘는 순간이었다.





"아...ㄱ,그래서 저한테 결혼하자고 하신 거구나아..."

"꼭 안 받아줘도 괜찮아요. 여주씨 의견이 제일 중요하니까."


석진이 건네준 휴지로 입가를 닦던 여주는 자초지종을 듣고(물론 석진은 꼭 알아야 될 것만 간단히 알려줬다.) 잠시 멍해졌다. 일단 그냥 교수인 줄 알았던 석진이 방탄그룹 회장아들인 것도 충격이지만(알바때문에 인터넷 거의 안하고 속세와 떨어져 살았음) 지금 이 상황이 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럼 나 이거 프러포즈 받은 건가..? 교수님한테...? 로맨틱하진 않지만 어쨌든 받은 건 받은 거였다. 여주는 볼을 살짝 꼬집는다. 말랑한 볼살이 잡히는 느낌이 들었다.(워낙 말랑해서 잡아도 안아픔) 

와씨, 진짜 꿈 아니네.


"결혼생활은 1년만 할 거고 1년 뒤엔 이혼할 거니까 혹시 기간이,"

"1년만요? 왜요?"

"네...?"

"아, 아니 그게 아니고요, 제 말은..."


배여주, 입. 입 좀 제발.

1년 뒤에 이혼이라는 말에 여주는 자기도 모르게 석진의 말을 끊고 다급하게 되물었다. ㄴ, 나는 백년해로해도 되는데...! 하는 속마음이 불쑥 나와버린 셈이다. 말실수했다 싶어서 수습해 보려 했지만 이미 늦은 모양이다. 석진은 얼굴에 물음표를 띄고 있다가 곧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눈가가 휘어지게 웃었다. 


"왜요? 기간을 좀 늘릴까요?"

"아니에여.... 그냥 1년으로 해여..."


여주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웅얼웅얼 대답했다. 


"어, 그럼 허락해 주는 거예요?"


석진은 놀란 듯 피곤해 보이던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아직 계약 내용 다 말하지도 않았는데..? 싶은 얼굴이라 여주는 괜히 머쓱해졌다. 너무 바로 오케이했나. 아니 근데 저는 진짜 교수님이랑 살아도 되는뎅...(살아난 얼빠 본능) 

석진을 보니 1년 전 마음이 다시 피어났는지, 여주는 석진이라면 계약결혼도 그냥 괜찮을 거 같았다. 석진은 제게 어린 나이에 이혼이란 꼬리표가 붙을 것을 걱정했지만, 어차피 여주는 비혼주의자에 가까워서 꼬리표가 붙든 말든 상관 없다고 생각했다. 그냥 수많은 경험 중 하나를 하게 되는 거 아닐까 싶은 마음이었다. 

여주는 여전히 단순했다.


"네, 저는 상관없어요."

"어... 그래도 결혼인데 조금 생각을 해봐야 하지 않아요?"

"괜찮은데..."


예상보다 여주가 너무 쿨하게 수락해서 당황스러운 건 도리어 석진이었다. 오늘은 제안만 하고 생각할 시간을 주려고 했는데. 요즘 어린 친구들 사이에서는 결혼이 아무 것도 아닌가...?(아님)


"그럼 허락한 걸로 알게요. 나중에 후회하면 안 돼요...?"

"넹.(단순)"


그럴 일은 없다고 생각한 여주는 오히려 석진이 후회할 게 걱정이었다. 나중에 괜히 나랑 결혼했다고 후회하시면 어쩌지. 그건 조금 상처일 거 같은데.


"웬만한 건 여주씨한테 맞춰줄 거예요. 필요한 거 있으면 다 해줄 거고."

"네에.. 근데 저 결혼하면 서울 가야 하는 거죠..?"

"원하면 여주씨 부모님 집도 서울에 마련해볼게요."

"아, 아니요 부모님 때문이 아니라 제가 부산에서 알바하고 있어가지고.."

"아르바이트?"

"ㅇ...그게..."


왜인지 석진 앞에서는 집이 가난해서 아르바이트를 그만둘 수 없다는 말을 하기가 어려웠다. 뭔가 제대로 빌붙으려는 거 같잖아! 교수님한테 그렇게 보이는 건 싫은데.


우물쭈물하는 여주를 내려다보던 석진은 대충 여주가 어떤 상황인지 알아챘다. 

나 때문이 아니라 집이 어려워서 휴학한 거였구나. 그리 길지 않은 교수 생활을 하면서 석진은 형편이 넉넉지 않은 대학생들을 숱하게 봐왔다. 그래서 재벌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어려움을 어느 정도 이해했다. 여주도 아마 그런 학생들 중 하나겠구나 싶었다. 

사실 아까부터 고기집 기름 냄새가 많이 나길래 밥을 먹고 온 건가 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거기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모양이었다. 석진은 최대한 여주가 기분 나쁘지 않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나는 여주씨한테 부탁하는 입장이니까 최대한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주고 싶어요. 그러니까 필요할 때 나 써먹어요."

"..." 

"아르바이트하는 이유가 생활비인거면 내가 책임질게요. 여주씨 학교도 무사히 졸업할 수 있게 도울거고. 그래도 돼요?"

"네? 아, 너무 감사하기는 한데 죄ㅅ,"

"나 여주씨한테 잘보이고 싶어서 이러는 건데. 응?"


석진은 다정한 목소리로 물어오면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여주의 얼굴을 살폈다. 사실 이렇게 돈에 쪼들려서 사는 거 너무 힘든데 어디다 터놓고 말할 데도 없었던 여주는 석진이 도와주겠다고 하자 왈칵 눈물이 터질 거 같아서 열심히 참는 중이었다. 진정해라 배여주, 지금 울면 진짜 거의 구걸 수준이야.(입술 꾹)

석진은 다정하고 사려깊은 사람이니까, 그래서 부러 저렇게 말해주는 걸 여주는 잘 알았다. 첫사랑과 이런 재회라니, 비참했지만 도움 필요없다고 뻗대기엔 작은 몸이 지칠 대로 지쳐있어 감히 거절할 수 없었던 여주는 뻔뻔해지기로 마음 먹고 고개를 끄덕였다. 

석진의 답지 않은 이기심 조금, 여주의 답지 않은 뻔뻔함 조금으로 둘 사이의 계약 결혼은 무사히 첫 걸음을 내딛었다.





여주는 새 알바생을 구하기까지 일주일만 더 일하기로 편의점 사장님과 고깃집 사장님께 각각 합의를 봤다. 태권도장에도 그만둬야할 것 같다며 그동안 감사했다는 인사를 했다. 지민의 아버지는 그동안 열심히 일해줘서 고맙다며 마지막으로 같이 회식이나 하자고 했다. 말이 회식이지 지민의 집 옥상에서 고기를 구워먹는 거였지만. 여주는 감사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야, 얘들아. 오늘 누나 마지막 출근이다. 이제 너네 못 봐."

"네."

"이제 누나 못 본다니까..?"

"네, 그래서요?"


이 시끼들이? 쒸익.

요즘 초등학생들은 감성이 없었다. 라떼는 말이야...! 여주는 씩씩대며 꼰대같은 생각을 하다가 막 도장에 들어온 정국과 눈이 마주쳤다.


"뭔 소리야. 너 왜 오늘 마지막인데?"

"어, 왔냐. 그거는 그럴 만한 일이 있어가지고... 나중에 말해줄게."

"안 좋은 일은 아니지?"

"어... 애매한 일...?"

"...불안한데."


저녁 무렵 쯤 아이들을 다 보내고 지민의 집으로 향했다. 지민의 부모님은 광란의 고기파티를 준비하시는 중이었고, 막 퇴근한 지민은 씻고 온다며 방으로 내려갔다. 오늘 같은 날은 일 하는 거 아니라면서 아줌마, 아저씨가 말리는 탓에 여주와 정국은 평상 반대편에서 동네 야경을 구경했다. 아까 못 들었던 여주의 퇴사 사유를 들은(쇼윈도 결혼인 거 아무한테도 말 안했으니까 비밀로 하라고 한참 입단속 시킴) 정국의 표정이 싸늘하게 어두워졌다.


"인소냐? 뭔 계약 결혼이야."

"나도 아직 안 믿겨.."

"그리고 그 정도 재벌이면 시집살이 엄청날텐데 너 그거 어떻게 버티게."

"1년이니까 괜찮지 않을까..?(아무 생각 없음)"

"너는..."


정국은 답답한 듯 머리를 쓸어넘겼다. 저거 저렇게 세상 물정 몰라가지고 어떡하지.


"그리고 그 교수란 인간도 이상해. 할 사람이 없어서 자기 제자한테 그런 걸 부탁하냐?"

"지금은 교수 아니시래.(정정) 그리고 이상한 사람 아ㄴ,"

"그 정도면 주변에 결혼하자는 여자가 줄을 섰을 텐데 왜 하필 너냐고."

"...."

"딱봐도 순진하고 어린 여자애 꼬드겨서 자기 원하는대로 이용하고 버린단 거 아냐."

"...버ㄹ..."

"야. 그러니까, 내 말은..."

"근데 나도 그렇게 생각해. 교수님이 나한테 마음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그 상황에 제일 쉽고 뒷탈 없는 상대가 나여서 그러셨겠지."

[방탄소년단/김석진] 계약결혼의 법칙 02 | 인스티즈

"야이..미안하다, 내가 말을 너무 막했네."

"네가 왜 미안해 하냐ㅋㅋㅋ 괜찮아."


자기 일인 양 화내던 정국은 곧 진정하고 여주의 눈치를 봤다. 힘은 오지게 센 게 마음은 여려가지고. 여주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야경을 보며 맑게 미소 짓다가 말을 이었다.


"그냥...그거 다 감수할 수 있을 정도로 내가 좋아해서 그래." 

"..."

"조금이라도 더 옆에 있고 싶어서. 원래 좋아하면 다들 그러지 않냐? 아닌가."

"...맞아."


그러니까 내가 지금 이러고 있는 거잖아. 네 옆에 있으려고. 

정국은 새어나오려는 마음을 삼켰다. 여주의 결혼 소식이 청천벽력이지만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여주에게 지금 자신의 진심은 부담밖엔 안 될 거 같아서 절망감을 티내지도 못했다. 그래도 끝이 정해진 1년짜리 결혼인게 그나마 위로라고 해야하나. 빡치지만 여주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는데, 욕할 수도 없고. 정국은 얕은 한숨을 쉬었다.

  

"핫쉬. 나 방금 감성 좀 에바였어. 미안하다. 아직 술도 안 들어갔는데 왜 이러지."

"원래 야경보고 그러면 감성적이게 되고 그런거지, 뭐. ...너 혹시라도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 바로 갈 테니까."

"알았어."

"아니다, 그냥 무슨 일 없어도 연락해. 어차피 나 서울에 친구 너밖에 없어."

"그래. 너 나 결혼하고 바로 서울오게?"

"응. ..야, 어쨌든 축하한다. 배여주 모쏠이라고 그렇게 놀렸는데 연애 해보기도 전에 결혼부터 해버리네."

"ㅋㅋㅋㅋㅋㅋㅋ그러네. 마, 세상 일이 이렇게 한 치 앞도 모르는 거야 임마."

"네 누님. 새겨듣겠슴다."


[방탄소년단/김석진] 계약결혼의 법칙 02 | 인스티즈

"증구기랑 여주 일로와아~ 술 먹자!"

"저희 술 아니고 고기 먹으러 온 거거든여, 형."

"술도 마실 거잖아~"

"저 형은 술을 왜 저렇게 좋아해..."

"지민오빠 술 잘 마시잖어. 야,우리도 가서 수저 놓자!"


밤하늘을 지붕 삼고, 야경을 벽 삼은 옥상은 곧 웃음소리와 고기 굽는 소리로 꼼꼼하게 메워졌다. 입 안에 쌈을 집어넣은 여주는 어쩌면 결혼 전 마지막 술자리일 거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어제 석진이 집까지 바래다주는 차 안에서 했던 말이 기억나서.



주말에 한번 더 만나서 계약 내용을 정리하자는 대화를 하며 둘러본 석진의 차는 깔끔하고 좋은 향이 났다. 참새가 방앗간 드나들 듯 허구한 날 가던 연구실과 닮아있었다. 교수님 집도 이런 분위기려나?

 

"결혼 자체가 목적인 거라 결혼식을 최대한 빨리 할 생각이에요. 부모님한테도 미리 말씀 꼭 드려요, 걱정하실라."

"네. 근데여 그...계약 결혼인 것도 말씀 드려야 되나여.."

"...여주씨가 생각했을 때는 부모님이 결혼이랑 거짓말 중에 뭘 더 속상해하실 것 같아요?"

"음, 계약 결혼 하는 걸 더 속상해하실 것 같긴해요. 거짓말은 안 들키면 되는 거라.(전적 많음)"

"그럼 그냥 좋아해서 결혼한다고만 말씀드려요. 혹시 허락 안하시면,"

"아녀. 그럴 일은 없어요. 무조건 프리패스 하실 상이세요.(단호)"

"그래요? 다행이네."


세상에서 제일 단호하고 확고한 표정으로 그럴 일이 없다는 여주에 석진은 푸스스 웃었다. 살짝 접히는 눈가가 이유없이 설레서 여주는 괜히 창밖을 보는 척 고개를 돌렸다. 벌써부터 이래가지고 나중에 한 지붕 아래 어떻게 살지!(심장 붕방붕방) 


"아, 여기서 내려주시면 돼요."

"길이 좀 어두운 거 같은데. 괜찮겠어요?"

"네네. 바로 요 앞이에요."

"조심해서 가요."

"네, 교수님도 운전 조심 하세요!"

"아, 여주씨."

"?"

[방탄소년단/김석진] 계약결혼의 법칙 02 | 인스티즈

"앞으로 잘 부탁해요. 우리 일요일에 또 봐요."





------------------------------------------------


이상한 데서 끊은 거 같다는 기분이 드신다면 기분 탓이 아니고 진짜입니다... 분량조절을 못하는 병이 있어서...☆

시간 흐름이 이상한 거 같은데 3화부터는 과거 없이 그냥 쭉 갈 거 같아여 전체적인 과거얘기는 나중에 특별편에서 간단히 나올듯 싶습니다


사실 제가 이런 장르는 처음이어가지고(맨날 무거운 거만 쓰던 사람임) 익숙하지 않다보니까 별로 안 설레는 거 같아여... 인물들 얼굴이 설렌다 생각하고 읽어주세여(찡긋

그리고 혹시 헷갈리실까봐 말씀드리는건데 석지니는 여주를 좋아하지 않아요! 아직은..ㅎ

지금 석지니에게 여주는 그냥 미안하고 귀여운 애기댕댕이 정도일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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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으우어아아ㅓㅠㅠㅠ읽단 댓글부터 쓰고 읽어야쥐ㅠㅠㅠㅠㅠㅠㅠ흑흑
4년 전
독자6
아 너무 재밌어요.. 전여친이 좀 거슬릴거 같긴하지만ㅠㅠㅠㅠㅠ엉엉 다정한 석진이 너무좋고ㅠㅠㅠ쿨한 여주도좋고ㅠㅠㅠ귀여운정국이도 너무좋아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4년 전
독자2
작가님 알림에 바로 달려왔습니다!!! 꺄항 계약결혼성사되었으니 이제 결혼생활이 펼쳐지는거져..??꺄하핳
4년 전
독자3
알림 뜨자마자 후다닥 읽었어요ㅠㅠㅠㅠ 계약결혼 보면 억지로 하거나 까칠한 이미지였는데 넘 스윗한거 아닌가요ㅠㅠㅠㅠㅠㅠㅠ 으악ㅠㅠㅠㅠㅠ 1편 또 읽고 와야겠어요ㅠ 작가님 벌써부터 설레고 너무 재밌으면 어떡하죠?ㅠㅠ
4년 전
독자4
기대돼요
4년 전
독자5
찐짜 너무너무 재밌어요 석진 글중에 작가님 글이 제가 읽은 것중 단연 최고에요 작가님 다음글 기다리겟슴니다 흑흑
4년 전
독자7
작가님 사랑해용🖤 저런 겨수님은 절대로 없어서 유감이네요ㅜㅜ 다음편뜨면 또 달려올게용 아! 작가님 글쓰는 방식이 너무 제스타일이라서 심장이 아파요
4년 전
비회원72.238
작가님 분량은 많을수록 오예입니다
다음화어서보고싶어요ㅜㅜ
작가님 화이팅!!!

4년 전
독자8
작가님 짱이심니다ㅜㅜㅜㅜㅜㅜㅜ 다음화가 너무 기달려져요ㅠㅜㅜㅜㅜㅜㅜㅜ
4년 전
독자9
분량 무슨일이죠????ㅠㅠㅠㅠㅠㅠ 작가님 너무 열일하시는거 아니에여?? 정국이 짠내난다 ㅠㅠㅠ 벌써부터 불쌍해요
4년 전
비회원202.87
자까님 어느 방향에 계신지...ㅜㅜㅜㅜ계신 방향 어딘지 모르겠으니 동서남북 다 절할래여ㅠㅠㅠㅠㅠ넘아 설레는 것ㅜㅜㅜㅜㅜ
4년 전
독자10
어이고 작가님 ㅠㅠㅠ이렇게 훌륭한 글을 또 분량을 엄청나게해서 들고오셨네요 ㅠㅠㅠㅠ도대체 얼마나 오래 붙잡고계셨어요 ㅠㅠㅠㅠ 너무너무 완벽해요 ㅠㅠㅠㅠ 너무 글도 좋고 너무 잘 읽히고 그래서 조는순간 다 읽어버렸어요 ㅠ 안그래도 왜 안올라오나 궁금한 차였는데 이렇게 딱 ㅠㅠㅠ 진짜 감동이에요 앞으로도 잘 읽을게요!
4년 전
독자11
아아아 진짜 너모 조아요,,,,, 분량에 감동의 눈물 한 번 내용에 감동의 눈물 한 번 흘렀네여 ㅠㅠㅠ 애기댕댕 여주 넘 귀엽고 ㅜㅜㅜ 애기댕댕이 여주 대하는 석지니가 어떻게 달라질까 흥미진진하네여💜 정국이는 벌써 눈물나서 어째요... 엉엉.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지 엄청 궁금합니다!!!! 다음편도 보러 달려올게여💜💜

4년 전
독자12
네에 좋아요♥ 이 분량 너무 마음에 드는 것... 사랑해요 작가님.. (찡긋)
이번 화에서 조금 거슬리는 등장인물들이 생겨났군요?!
뭐 나쁜 쪽으로만 벌써 커플인 사람들이.. 흠...
석진이는 그렇다 쳐도 여주 근처에 친구로 있는 정국이가 또 뭔가 있는 것 같아서..
기대되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신경 거슬리는 커플 빼곤 다 좋아요♥
글잡에 레전드가 되어주소서★

4년 전
독자13
꺄 작가님 기다렸어요ㅠㅠㅜ분량 진짜 너무너무 만족해요ㅠ그리고 석진이 왜 이렇게 다정해 심장 아프게ㅠㅜ석진이도 얼른 여주에 매력에 폴인럽 했으면 좋겠네요 진짜 너모 재밌어요!
4년 전
독자14
빨리 다음편 보고싶어요 ㅠㅠㅠㅠㅠ
4년 전
독자15
작가님,,, 넘 재밌게 잘 읽고 갑니다,,, 또 기다릴게요🥺
4년 전
비회원227.155
작가님 빨리 와주세요ㅠㅠㅠ 현기증 날 거 같아요
4년 전
독자16
언늉와요 작가님 ㅍㅍ퓨ㅠㅠㅠㅠㅠㅠㅠ 대박이쟈나ㅠㅠㅠㅠ
4년 전
비회원51.185
우앙 ㅜㅜ 어쩌다 이 새벽에 제목에 끌려들어와 정주행을 했습니다,,, 너무 설레고 진짜 설레서 아무래도 너무 설렙니다.. 김석진으로 삼행시을 해볼게요 김 김석진은 석 석지니는 진 진차,,, 다음화 기다리게씁니당 ㅜㅜㅜ❤️💛💜😄
4년 전
독자17
작가님 진짜 너무 재밌어요ㅠㅠㅠ
4년 전
비회원227.155
작가님 where are you
4년 전
코레
과제가 몰아치는 바람에 글을 못 쓰고 있읍니다...혐,생 흑흑...죄송해여 되도록 빨리 오긴 할건데ㅠㅠㅠㅠㅠ확답을 못드리겠네여ㅠㅠㅠ
4년 전
독자18
시작은 계약이지만 끝은 찐 결혼 가즈아!!!!
4년 전
비회원61.121
이거모죠 이거모조 이거모죠 이거모죠 이띵작 모조 분량 모조 대박 모죠 와 👍 늦었지만 댓이라도 남겨요!(비회원도 남길수 있다길래..... 흐흐흫흫흫흐흐흐ㅎㅎㅎ)
3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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