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정국은 남자를 좋아한다
w. 정국학개론
BGM은 꼭 틀어주세요! 모바일도 필수!
고등학교처럼 대학교도 대규모로 이루어질 거라 생각했던 입학식은 생각보다 단촐했다. 지루할 것만 같았던 여러 교수님의 말씀은 고등학교 교장, 교감 선생님의 훈화 말씀과는 다르게 간단하게 끝이 났고, 입학식이 끝이 나고서야 내가 드디어 대학생이 되었구나, 하고 느껴졌다. 수시로 붙은 것도 아니라, 수시 오티에도 참여하지 못했고 우연히 가족여행과 날짜가 겹친 새터도 가지 못했다. 그래선지 입학식 내내 모두 짝을 지어 앉아있었고, 친구도 없는 주제에 늦게 들어온 나는 맨 뒷자리에 혼자 덩그러니 앉아있었다. 여길 봐도, 저길 봐도 적으면 두 명, 많으면 열 명씩 앉아 인사하고 있는데, 고등학교 때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무리 짓기에 한숨을 푹 쉬며 바로 내 앞자리에서 조잘조잘 얘기하는 두 명의 여자아이들을 보았다. 입학식이 단과 대학별로 이루어져, 사실 바로 앞에 있는 이 아이들이 우리 과일 거라는 확신도 없어서 조용히 휴대폰만 만지작거렸다. 이게 바로 전형적인 아싸라는 건가. 아웃싸이더.
입학식이 끝나고 학생회장님으로 추정되는 덩치가 큰 남자 선배의 말에 따라 각자 과별로 정해진 강의실로 이동했다. 학교 위치는 또 어떻게들 그렇게 잘 아는지, 무리 지어 우르르 이동하는 사람들을 따라 나도 걸음을 옮겼다. 뒤쳐져서도,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보다 빨라서 안 되는 탓에 적정한 걸음을 찾아 옮기는 게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혼자 걸어다니는 게 괜히 민망해서 여러 명 지어있는 무리 뒤를 따라 걸어보기도 하고, 또 그 무리의 눈치를 보면서 조금 떨어져 걸어보기도 하고, 암튼 아싸는 힘들었다. 빠른 시간 내에 한 명이든, 몇 명이든 친구를 사겨야겠다고 생각했다.
강의실은 생각보다 좋았고, 좁았다. 그만큼 우리 과 학생 수가 별로 많지 않다는 말이다. 기껏해야 1학년이 40명인 뿐인 과에서 넓은 강의실은 불필요했다. 몇몇 학생회로 추정되는 선배들이 우리 바로 뒤에 서 있었고, 우리는 각자 자리를 찾아 앉았다. 역시 혼자인 나는 누군가의 옆보다는 역시 혼자가 편해 최대한 뒷자리에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그때, 옆에서 바로 들려오는 의자 끄는 소리에 시선을 돌리면 좋게 말하면 새침하게, 나쁘게 말하면 싸가지 없게 생긴 여자애가 앉아 다리를 꼬고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낸다. 자리 많은데 왜 굳이 내 옆에? 라는 표정으로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으면 휴대폰에 고정되어 있던 그 애의 시선이 잠시 나에게 닿고는 휴대폰을 책상 위에 뒤집어 놓는다.
" 안녕? "
" 어… 응. 안녕. "
" 너도 새터 안 갔나 봐. 주변에 친구가 한 명도 없네. 네 옆에도, 뒤에도, 앞에도. "
그 애의 말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내 옆에도, 앞에도, 뒤에도. 말 그대로 내 주변에 애들이 한 명도 없었다. 내가 그렇게 비호감으로 생겼는지, 아니면 벌서 새터에서 친해진 친구들과 무리가 이미 정해져 있는 건지, 한참 우울해하고 있는 상태에서 정곡을 찔린 느낌이었다. 원래 말을 막 내뱉는 스타일인가. 다른 사람 생각 전혀 안 하고 마음은 전혀 거치지 않고 뇌와 입을 통해서만 말을 뱉는 스타일? 내 옆에 누군가가 앉아준다는 건 생각도 못했고, 그래서 더 기쁜 일이지만 불편한 사람과 마주했다는 기분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 아, 혹시 내 말에 기분 나빴어? "
" 아니, 뭐……. "
" 기분 나빴으면 나빴다고 말해. 나 그런 말 자주 들어. 그래서 나도 주변에 친구 별로 없거든. "
이름은 정수정이라고 했다. 그리고 전임 교수님이 들어오시기 전까지 그 애와 말을 나눠본 결과 그리 나쁜 애가 아니었다. 굳이 다른 사람을 신경 쓸 필요가 없어,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했다. 다른 사람 신경 쓰다 늙어버리면 나만 손해라며, 그냥 마이웨이가 철칙인 애일 뿐, 나쁜 의도로 말을 내뱉는 건 아니라며 그 애의 성격답지 않게 애써 해명까지 해주었다. 그 애와 전혀 다르게 난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말 많이 생각하는 편이라 그저 그 애가 하는 말만 듣고 있었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알아서 조잘조잘대는 저 입이 참 부럽기까지 했다.
전임 교수님이 과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주신 후에는 대학생이 되면 늘 그렇듯, 뒤풀이를 가게 됐다. 선배들의 주도 하에 꾸려진 판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술을 처음 입에 댄다는 생각에 잔뜩 긴장하고 딱딱하게 앉아있으면 수정이가 옆에서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린다. 나와 성격도, 그리고 어쩌면 취향도 다른 수정이는 익숙하다는 듯이 소주를 돌려 따고, 술을 처음 마시는 나를 배려해서 맥주를 따주었다. 수정이의 능숙한 모습에 반강제지만 어쨌든 같은 테이블에 앉아있던 남자애들과 여자애들의 환호 소리가 들려왔다. 수정이는 어찌 됐든 다른 아이들과 잘 지낼 수 있는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대학 오면 이런 애도 있고, 저런 애도 있는 거지.
여느 1학년들이 그렇듯, 술게임이 시작됐다. 서로 잘 모르는 우리들을 선배들이 배려한 것일까, 술집은 생각보다 어두웠고 우리는 어렴풋이 서로의 얼굴과 이름을 외웠다. 술기운이 조금 오르자 테이블을 옮겨 갔고, 그 덕에 수정이와 나는 조금 멀어지게 됐다. 대학 들어와서 처음 사귄 친구와 멀어지면 낯설 것이라 생각했는데 술기운 때문인지, 원래라면 낯설어야 할 내 주변 친구들이 마치 초등학생 시절부터 알아왔던 친구들처럼 편했고, 지금 이 순간이 즐거웠다. 그래서 다들 친해지기 위해선 술을 마시라는 걸까. 한창 익숙해진 술게임에 빠져 있다가 오는 신호에 잠시 게임을 중단하고 화장실로 들어왔다. 시원하게 용변을 보고, 거울에 비친 빨개진 내 얼굴을 비교적 차가운 손등으로 꾹꾹 눌러 삼키고 나왔다. 그리고.
" 형, 저 왔어요. "
" 어, 야. 너 왜 이제 오냐? 이게 선배들이랑 좀 친해졌다고 입학식도 안 오고. 빠졌지, 새끼야? "
" 아, 어제 형들이 너무 많이 줘서 그래요. 진짜 죽을 뻔 했어요. "
전정국이었다. 내 눈이, 내 귀가, 내 기억이 정상이라면 분명 전정국이었다. 전정국을 못 본 지 겨우 9개월이었다. 그 정도면 전정국을 기억에서 지울 수 없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3학년 2학기가 시작되면서 자리가 바껴 내 옆자리에 앉은 남자애를 보며 전정국을 생각했고, 대학 합격 소식을 들으면서도 전정국을 생각했고, 여전히 난 밤마다 전정국을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채 꽃을 피워 보지도 못한 내 안타까운 첫사랑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 당연하다는 듯이 전정국은 내 앞에 서 있었다. 겨우 다섯 발자국만 가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달아나듯이 내 옆을 떠나버린 전정국이 서 있었다.
왜 전정국이 여기 있을까,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화장실 앞에 덩그러니 혼자 놓인 채 술기운에 아파오는 머리를 쥐어뜯고 싶을 정도였다. 내가 술을 마셔서, 잠시 취해서 전정국을 만들어버린 건 아닐까, 사실 회장 선배와 얘기하는 건 전정국이 아닐 수도 있는데, 내가 못 마셔본 술을 마셔서 이러는 건 아닐까, 눈을 꾹 감았다 떠봐도 변함없는 전정국의 모습이었다. 9개월 전과, 아니 첫만남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전정국의 모습에 괜히 울컥했다. 주변은 시끄러웠지만, 귀는 멍했다. 그래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고 오직.
내 시선이 느껴졌는지, 회장 선배와 친한 듯 실실대며 웃던 전정국의 시선이 잠시 나에게 닿았다. 그리고 떨어졌다. 나를 보지 못한 걸까, 아니면 나를 보고서도 모른 척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대체 왜? 혹시 아직 그 일을 잊지 못하는 것일까, 내가 저를 무시했던 그때를 아직 기억하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너는 나를 아예 지워버린 것일까. 괜히 9개월 전의 일이 떠올랐다. 너는 나에게 다정하게 다가와주었지만 나는 너를 좋아하면서도, 그걸 내가 알고 있으면서도 너에게 상처가 될 수 있는 말들을 지금 생각해보면 별 거 아닌 아이들에게 미끼처럼 던져주었다. 그 애들이 무슨 생각을 가지고 나에게 다가왔는지 충분히 알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전정국은. 충분히 나를 미워할 만 했다. 내가 잘못했다.
" 야. 너 여기서 뭐해? 가서 안 놀아? "
" 아… 나 머리가 좀 아파서. "
" 머리 아프면 어디 가서 좀 쉬어. 한참 재미있는데 왜 벌써 머리가 아파. 우리 2차 안 가? 2차! "
화장실 앞에서 멈춰, 멍하니 있는 내가 이상했는지 수정이가 말을 걸어왔다. 수정이에게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베시시 웃어보이자, 수정이가 내 머리를 잠깐 쓰다듬고 이제는 익숙한 웃음으로 화장실에 쏙 들어가버린다. 여간 급한 것이 아니었는지, 아니면 수정이도 술기운이 오른 것인지 얼굴이 살짝 빨개져 있었다. 어디 가서 쉬기엔 애들이 지치지도 않는지 빈테이블이 없었고, 그냥 밖에 나가 찬바람이라도 쐬자 싶어서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발에 힘을 주어 술집을 나섰다. 아직은 찬 바람이 남아있다. 미처 겉옷을 챙겨오지 못해 으스스한 몸에, 손으로 양 팔을 비볐다. 괜히 나왔나 싶다가도, 찬 람 덕분인지 정신이 멀쩡해지는 기분에 조금 더 머무르고 싶어졌다. 그리고.
" …전정국? "
거짓말처럼 전정국은 또 서 있었다. 바로 내 옆에서 말이다. 내가 나오는 것부터 양 팔을 비비는 것까지, 그러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다 쳐다보고 있었을까, 전정국은 정말 아무런 표정을 담지 않고 나를 보고 있었다. 익숙한 전정국의 얼굴에, 익숙하지 않은 전정국의 손가락에 들려있는 것. 언제 배운 건지, 전정국은 익숙하게 담배를 떨어트려 비볐다. 아직 길어보이는 담배가 아깝다는 생각보단, 왜 배운 걸까, 배운진 얼마나 됐을까, 어쩌다 배우게 된 걸까, 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돌아다녔다. 애처롭게 꺼지는 담뱃불을 멍하니 쳐다보다, 고개를 들어 전정국을 보았다. 여전히 전정국은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예전처럼 또 그랬다. 다시 전정국을 만나게 된다면, 내가 그때 미안했다고, 그리고 나는 너를 정말 좋아한다고, 꼭 말하고 싶은 두 가지가 있었는데 나는 또 말하지 못할 것 같다. 미안하다는 말이 이토록 어려운 말인지 처음 알았고, 좋아한다는 걸 상대 앞에서 인정하는 게 이토록 부끄러운 일인지 처음 알았다. 전정국이 금방이라도 들어갈 것 같아 초조했다. 어렵게 만났는데 전정국을 쉽게 보내주고 싶지 않았다. 전정국은 예전처럼 나를 탐색하듯 보았다. 내 눈, 코, 입술, 그리고 다시 내 눈. 예전과 같이 얼굴이 화끈거렸다. 찬 바람을 쐬고 있었지만 술기운이 아닌 다른 이유로 얼굴이 화끈거렸고, 쉽게 가라앉을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전정국은 입을 열었다.
" OO과? "
전정국의 입에서 내 과가 나오고 나는 놀란 눈으로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예상이 맞다면 아마 전정국이 나와 같은 과일 것이다. 친하게 보였던 회장 선배와의 모습을 잠시 떠올렸다. 전정국은 아까와 똑같이 아무 표정 없이 목 뒤를 쓰다듬었다. 나는 그런 전정국의 모습을 한참 동안이나 보고 있었다. 전정국이 그런 나를 한 번 힐끔 쳐다보고는 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다시 들어가는 모양이었다. 무언가 말이라도 걸어보고 싶었다. 그냥. 너와 다시 만나게 된 게 너무 반가웠다, 나는.
" 저기… "
" 우리 깜찍이들! 여기 있었어? "
방해가 되는 목소리. 딱 그랬다. 아까 술자리에서 잠시 인사를 나눴던 김태형이었다. 이 애를 오랫동안 알아온 것도 아니고, 아주 잠시, 그것도 겨우 20분 간 이 애를 본 결과, 친화력의 끝장판이었다. 다른 사람 신경 안 쓰는 건 딱 정수정이었고, 여자, 남자 안 가리고 친한 건 전정국 짝퉁이었다. 전정국은 여자랑은 별로 안 친하니까. 스킨십도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처음 만난 내 어깨에 팔을 두르질 않나, 게임을 한답시고 생각보다 고수위의 단계도 멀끔히 해내질 않나, 암튼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부류의 아이 중 하나였다. 그리고 지금. 김태형은 방해꾼이었다, 적어도 내게는.
" 와, 둘이 아는 사이? 전정국. 김… "
" ……. "
" 김아미! "
내 얼굴을 검지 손가락으로 가리키고는 한쪽 눈을 찡그리며 잠시 고민을 하는 듯 하던 김태형이 이내 내 이름을 떠올리고는 웃어보였다. 혼자 맞추고, 혼자 좋아하고, 혼자 뿌듯해하고, 그게 다 표정에 보이는 애라 그냥 나도 웃어버렸다. 방해꾼이든 아니든, 미워할 수 없는 애인 건 확실했다. 정작 기분이 제일 안 좋아보이는 건 전정국이었다. 얼굴을 찡그리며 김태형을 보더니, 실 웃어버리는 내 쪽을 보며 얼굴을 더 찡그린다. 괜히 죄인이 된 기분에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고 둘을 번갈아 보았다.
" 전정국. 우리 아미랑 아는 사이? 무슨 사이? 썸타는 사이? "
" 아, 귀찮게 하지 말고 들어가. "
" 이거 봐라. 무슨 사이긴 사이다, 이거지? 그러니까 자꾸 나 들어가라 하고. 어? 야 자꾸 이러면 형 섭섭하다. 무슨 사인데! "
" 그냥 별 사이 아니라고. "
" 이거, 이거. 지금 나한테 짜증낸 거 맞지. 어? 아미야 얘 나한테 짜증낸 거 맞지? "
김태형은 역시 스킨십이 자유로웠다. 내 손은 아니었지만, 팔을 붙잡고 울상을 지으며 전정국을 손으로 가리키는 모습은 그냥 애였다, 애. 웃을 수밖에 없는 행동을 하는 그 애의 모습에 또 실 웃어버리다 전정국의 굳어가는 표정을 보고 다시 웃음을 지워버렸다. 전정국 얼굴이 점점 어두워져 가는 건 아는지, 모르는지 김태형은 전정국 옆에서 쉴 새 없이 깝죽댔다. 이러다 내 등만 터질 것 같아 불안한 표정으로 김태형을 보면 김태형은 그제서야 눈치를 챈 건지, 아니면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건지 깝죽대는 걸 그만하고 베시시 웃어버린다.
" 그럼 아미 내가 데려간다. 아미야 안에서 자꾸 너 데려오라고 난리다. "
" …수정이가? "
" 아니. 내가. "
자칫하면 내가 숨이 턱 막혀 죽을 수도 있을 정도로 멋있게 웃던 김태형이 여전히 내 팔을 붙잡고 있던 손을 흔들더니 술집 쪽으로 끌고 간다. 덩그러니 남아있는 전정국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전정국은 내 쪽을 보지 않았다. 귀찮은 게 가셨다는 듯, 전정국은 어느새 꺼낸 담배 한 개피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고 있었다. 전정국의 발 옆에 아까 담뱃불이 꺼졌던 긴 담배 한 개피를 보았다. 그리고 전정국을 보았다. 나를 보고 있었는지, 뭔지 전정국과 눈이 마주쳤다. 맞췄다가 아니라 마주쳤다. 그 정도로 전정국의 눈엔 아무 것도 담겨있지 않았다. 첫만남과는 다소 다른, 전정국와의 재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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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전정국은 많이도 변해있었다. 여자랑은 절대 친해지지 않는다는 모토라도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여자랑은 말도 안 섞던 애가 여자 동기들은 물론이고, 여자 선배들과도 스스럼 없이 대화를 나눈다. 과실에서 보이는 이상한 광경에, 그것도 나만 아는 광경에 나만 놀라고 나만 입을 벌리고 있었다. 전정국이 여자에게 저렇게 다정하게 웃는 걸 보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아니, 처음부터 전정국과 내가 다시 만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지금 전정국의 모습은 내가 아는 전정국의 얼굴을 한 다른 사람인 것 같았다. 예를 들면 김태형. 김태형은 내 옆에 있었다. 역시나 스킨십이 자유로운 성격답게 내 손 하나를 붙잡고 꼼지락대고 있었다. 자칭 네일 아트 장인이라는 수정이에게 손톱을 맡겼더니, 타칭 네일 아트라고 불려도 될 정도의 실력으로 내 손톱을 화려하게 꾸며주었다. 그게 신기했는지 김태형은 오늘 하루종일 자꾸만 내 손을 만지작거렸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는 건 아니었다. 김태형이 스킨십이 자유로운 건 우리 과 동기들이고, 선배들이고 모두가 잘 아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김태형이 누구 손을 잡고 다니든, 그게 여자 손이든, 남자 손이든 신경 쓰지 않을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 와, 진짜 볼 수록 신기하다. 어떻게 이렇게 만드는데. 야, 정수정! "
김태형이 사투리 가득한 말투로 중얼거리다, 전정국과 말하는 무리 중 하나였던 수정이를 큰 소리로 부른다. 누가 목소리 안 크다고 할까봐, 김태형 목소리에 과실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김태형을 본다. 정수정을 불렀는데, 댁들이 왜 보시는지. 덕분에 김태형 옆에 있는 내가 민망해지고, 그러다 마주친 전정국과의 눈을 피했다. 그 일이 있은 후로, 전정국과는 단 한 마디도 안 했다. 아니, 못했다고 할 정도로 전정국은 쌩 했고, 다른 여자애들에게는 다정했다. 그래서 여자애들도 내게 와서 이상하다고 할 정도로 전정국은 그랬다. 조금은 섭섭했지만, 그런 감정을 느끼면 안 된다고 생각할 정도로 내가 한심했고, 그 일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고, 그만큼 후회도 많이 했기 때문에 전정국에게 아무런 기대도, 서운함도 가질 수가 없었다. 그냥. 언젠가 전정국이 말을 걸어준다면, 올지 모를 그 날을 대비해 어떤 말부터 시작해야 할지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것. 그게 지금 가장 큰 고민거리였고, 문제거리였다.
" 왜, 미친놈아. "
웃긴 얘기를 하다 왔는지, 수정이는 눈이 초승달로 접혀서는 내 옆에 와, 앉았다. 웃고 있는 모습과 대조적으로 입에서는 험한 말이 튀어나왔다. 김태형은 내 손톱을 보고 신기하다며, 감탄하다 수정이를 칭찬하려 부른 게 분명했다. 그래서인지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잡고 있던 내 손을 흔들어 수정이를 가리켰다.
" 아미야, 쟤가 나 괴롭혀. "
" 괴롭히긴 개뿔? 야, 그리고 너 누가 우리 아미 손 잡고 있으래. 안 놔? 이게 어떤 손인 줄 알고 붙잡아, 미친놈이! "
" 이게 어떤 손인데! 내가 잡은 손이지. 밖에 나가면 태형아 손 좀 잡아줘~ 하는 여자애들이 널렸어, 나쁜년아! "
" 그건 밖에 나가서 할 소리고! 보이지? 우리 아미 손은 나만 이렇게 다정하게 잡을 수 있어 미친놈아~ "
투닥거림의 끝은 수정이의 승리였는지, 수정이가 내 손을 꽉 쥐고는 김태형에게 보여주자 그저 내 손을 만지작거리던 김태형은 아까보다 더 울상이 돼서는 씩씩댄다. 그리고는 잠시 고민하다 내 손에 깍지를 껴서, 꼭 쥐고는 들어올려 수정이에게 보여준다.
" 것보단 이거지. 보이냐? 내 승리야. "
" 미친놈아! 누구 손에 깍지를 껴! "
안 그래도 높은 목소리를 가진 수정이가 빽 소리를 지르자, 평소와 다름 없이 김태형과 정수정의 투닥거림인데도 불구하고 다시 과실에 있는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물론 아마, 그 집중은 정수정과 김태형의 투닥거림이 아니라 깍지를 끼고 있는 김태형과 내 손을 향한 것이었다. 물론 지금 이 순간만큼은 김태형에게 할 줄 모르는 쌍욕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전정국이 떠난 학교에서 겨우겨우 살아남았다. 전정국과의 실패를 통해 많은 것을 깨달았고, 덕분에 남자애들과도 말을 섞을 정도는 됐었단 말이다. 근데 학교에서 남자애와 손을 잡는 건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우리 아빠 외의 남자에게 손을 내준 적도 없을 뿐더러, 아무리 김태형이라도 깍지는 좀. 아, 그래. 아무튼 깍지는 좀 그랬다. 그래, 아무도 못 보는 새에 깍지를 끼는 건 그렇다고 치자. 아니, 다 봐도 괜찮은데. 전정국. 너만은 보지 않았으면 했다. 그리고 전정국과 눈이 마주쳤을 때, 나는 피하지 못했다. 그 눈을.
전정국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김태형이 자랑스럽게 흔들어대는 내 손을 보면서 전정국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아니,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이러고 있는 것에 대해 무슨 생각이 필요하겠느냐만은, 전정국을 좋아하는 한 여자의 입장에서 부끄러운 일이었다. 마치 남자친구 앞에서 바로 바람을 피는 느낌이랄까. 물론 내가 전정국을 좋아하는 건 아무도 모른다. 심지어 전정국 본인조차도.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언제부터 저를 좋아했는지, 또 언제부터 저를 계속 생각했는지, 전정국은 생각도 못할 것이다. 물론 내가 그렇게 행동했다. 그래서 더 가슴이 아팠다. 왜 티를 내지 않았을까. 왜 티를 내지 못했을까. 왜 나는 철저하게 숨겼을까. 왜 나는 너에게 고백조차도 하지 못했을까. 왜 너는 내가 좋아하는 걸 알아서 알지 못할까. 왜 너는 지금.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내가 아닌. 나와 김태형의 손을 보고 있는 걸까.
전정국은 남자를 좋아한다
w. 정국학개론
안녕하세요. 생각보다 좋아해주시는 분들이 꽤 되셔서 빨리 왔어요.
시험기간인데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어떻게 글을 써야 좋아해주실까, 그것만 고민했어요.
이제 슬슬 공부 시작해서 시험 빨리 끝내고 와서 다음 편 바로 업뎃 하겠습니다.
서툰 글 좋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앗, 근데 다 써보고 나니 왜케 짧죠. 다음 편은 완전 겁나게 길게 적어서 오겠슴다.
암호닉
현지 / 카누 / 낭자 / 정국이최소내남자 / 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