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정국은 남자를 좋아한다
w. 정국학개론
전정국 회상 上
부제: 마음 속에 핀 작은 꽃
철없던 시절, 고등학교 1학년. 드라마, 영화에서나 접할 수 있는 로맨틱한 사랑은 언젠가 내게 올 것이라 굳게 믿었던 어린 나에게 사랑은 아주 순식간에 찾아왔다. 내 가슴은 어떤 로맨틱한 장소도, 어떤 로맨틱한 상황에서도 아닌, 버스 안에서 막 버스를 타, 교통카드를 꺼내려 가방을 뒤지는 그저 평범한 여자애에게 두근거렸다. 눈에 띄게 하앴지만, 눈에 띄게 예쁜 것도 아니었던 여자애는 찾으려던 교통카드가 없었는지 당황한 표정으로 이미 버스를 출발시킨 기사님의 눈치를 보며 다음 정류장에서 내리려 하는 것 같았다. 아무리 관심이 있다고 한들, 교복이 같다고 한들, 처음 보는 여자애 대신 교통카드를 찍어 줄 정도로 남일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 잠시 고민하며 얼굴이 뻘개진 여자애를 보았다. 요금통 앞에 있는 손잡이를 꼭 쥐고 얇은 다리를 부들부들 떠는 모습이 궁지에 몰린 토끼 같았다. 바지 주머니 속에 있는 지갑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빨리 가서 저 여자애를 도와주라고, 이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그 당시 어린 내가 처음 보는 여자에게 말을 거는 일은 쉽지 않았다. 굳이 말을 걸지 않더라고 교통카드를 찍어주면서 그 여자애는 내 얼굴을 볼 거고, 감사하다는 말 한 마디 정도는 할 거고, 그러다 보면 나는 그 여자애와 눈을 맞출 거고, 아, 아무튼. 그 당시 나는 내가 생각해도 생각이 참 많은 남자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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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2학년. 공학이면서도 분반인 칙칙한 남자반에 신물이 난 박지민은 여자반을 기웃거리는 걸 좋아했다. 그건 비단 박지민만의 얘기가 아니었다. 나를 제외한 우리 반 남자애들은 우리 반보다도 여자반 복도에서 장난치는 걸 좋아했고, 일부러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며 가끔 여자반에서 튀어나오는 동그란 얼굴들을 재미있어 했다. 나는 여자라고는 관심도 없었지만 꽤나 생긴 외모 덕에 고백을 몇 번 받아보기도 했다.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일반 남학생의 학창시절과 다름 없었다.
잊혀졌던 얼굴이었다. 첫 등교날 버스에서 보았던 그 얼굴을 잊을 수 없었지만, 더이상 보이지 않았기에 잊을 수밖에 없었던. 아주 잠깐이었지만 나를 스쳐 지나간 그 얼굴을 다시 보기 위해 뒤를 돌아보면 동그란 뒤통수에서 말꼬리 같은 머리가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그때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 이후로 여자반을 아주 잘 기웃거리는 친구들에게 섞였다. 이제서야 여자에 관심이 생겼냐는 친구들의 물음에도 머쓱하게 웃음으로 답해주었다. 그런 나를 이상하게 여긴 건 평소에 눈치도 뭣도 없는 박지민이었다. 박지민은 내가 이상하다며 밤낮으로 나를 닥달했다. 그리고 입이 무거운 편인 박지민에게 만큼은 말해도 괜찮을 것 같아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 좋아하는 여자애 있어. 본 건 작년부턴데 좋아한 건… 아, 작년부터 좋아했나? "
" 무슨 말이야. 좀 알아듣기 쉽게 말해 봐. "
" 그러니까 버스에서 처음 본 건 맞거든. 내가 그때 와 진짜 겁나 예쁘다, 생각은 했어. 아니, 걔가 예쁜 건 아닌데, 그러니까… "
" 아오, 답답해. 그러니까 작년에 네가 걔한테 첫눈에 반했다는 거잖아. "
" 아니 첫눈에 반한 건… "
첫눈에 반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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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3학년. 신기하다. 네가 내 눈 앞에 있었다. 2학년 내내 네가 모르게 쫓아다녀도 면역력이 통 생기지 않는 건지, 너와 얘기라도 해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괜히 왼쪽 가슴이 두근거렸다. 한동안 잠잠했던 게 다시 두근거려, 기분이 이상했다. 이번엔 기필코 너와 어떤 얘기라도 해 보자, 하는 마음에 네 옆자리를 뽑은 남자애를 잡아 협박 아닌 협박을 했다. 협박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음. 나는 그렇게 나쁜 남자애가 아니다. 순수하게 김아미 옆에 앉고 싶었을 뿐.
내가 네 옆자리에 앉을 때까지, 그리고 선생님이 들어와 칠판에 자기 이름을 적을 때까지 나를 단 한 번도 보지 않았다. 짝이 마음에 들지 않은 걸까, 걱정되는 마음에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 책상 위에 엎드려 곧은 자세로 칠판을 쳐다보는, 아니 어쩌면 노려보는, 너를 빤히 보았다. 첫 등교날과 같이 너는 눈에 띄게 하얬지만, 눈에 띄게 예쁘진 않았다. 그럼에도 널 보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 안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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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 나를 부르는 친구들은 많았지만 굳이 나가지 않았다. 예전이라면 귀찮아서 나가지 않았겠지만, 요즘은 나가고 싶지 않았다. 친한 친구가 없는 건지, 쉬는 시간까지도 책을 펴놓고 들여다 보는 네가 나와는 아주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처럼 느껴져 낯설었지만, 그런 모습을 보는 것도 좋았고, 가끔 피곤할 땐 책상 위에 엎드려 있는 모습을 보는 것도 좋았다. 그런 내 마음을 이미 아는 박지민은 가끔 우리 반에 놀러와 내 앞자리에서 나와 너를 번갈아보기 바빴고, 가끔 네가 잠들었을 땐 나를 놀리기 바빴다. 아무튼 인생 참 바쁘게 사는 놈이다.
내가 너를 피하게 된 건 중간고사가 끝났을 무렵이었다. 네가 나를 피하는 건 애초부터 알고 있었고, 그런 건 굳이 신경을 쓰지 않았다. 점심시간에 나와 밥을 같이 먹지 않아도 괜찮았고, 너 때문에 줄기차게 붙어 있었던 야자 시간이 끝나고도 나와 같이 하교를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네가 같이 밥을 먹지 않아도 나는 급식실 어딘가에서 네가 밥을 먹으며 친구들과 밝게 웃는 모습을 보는 것도 좋았고, 네가 먼저 뛰어간다 한들 내 눈은 늘 네 뒷모습을 쫓았으니까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고 삼이나 됐으니 중간고사가 끝나고서도 책상에 붙어 있어야 한다며 과거의 나를 잘 알고 있던 담임 선생님이 나를 불러 훈계하셨고, 지구가 내일 당장 멸망한다고 해도 세상에 무척이나 아름다워 보이는 나는 그걸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교무실을 나왔다. 다시 올라가 네가 공부하는 모습을 볼 생각에 괜히 가슴이 설레 계단을 두 칸 씩 오르고 있을 때였다.
" 요즘 전정국 좋아하는 여자애 생긴 것 같지 않아? "
" 그러니까 걔 김아미. 걔 진짜 신경 쓰인다니까. 일부러 전정국한테 꼬리 치는 것 같기도 하고. 아, 짜증 나, 진짜. "
" 야, 우리 언니가 작년에 전정국 진짜 좋아했잖아. 그래서 내가 언니한테 말을 했거든? 그랬더니 아주, 수업 때려치고 당장 오겠다고, 내가 말리느라 혼났다니까. "
" 뭐야, 너네 언니 아직도 전정국 좋아해? "
" 우리 언니가 그렇게 안 보여도 순정파야~ 아직도 전정국한테 카톡 보낸다는데 답이 없대 얘가. 카톡 프사는 바뀌면서. "
" 뭐야, 완전 나쁜 남자. "
" 그 맛에 우리 언니가 전정국 좋아하잖아. 아무튼 김아미, 걔랑 뭐 있는지 잘 보라고 우리 언니가 그러더라. 알지? 우리 언니 집착 심한 거. 작년에 전정국 좋아한 여자애들 언니가 다 죽였잖아. "
" 아, 그래. 그거 너네 언니가 한 거지? 작년 우리 반 여자애 그것 때문에 며칠 동안 학교 안 나왔잖아. "
무시해야 하는 건지, 아님 내가 꼭 들어야 할 중요한 얘기인 건지 분간을 못하고 가만히 있는데, 문득 들려오는 게 네 이름이었다. 얘기의 주인공이 누군지는 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 누나 덕분에 작년, 부담스러운 고백 없이 기분이 좋았던 것도 사실이었고. 사실 그때의 난 너무 어려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가져 본 적도 없는 내가 그 아이를 어떻게 하면 지킬 수 있을까, 그것부터 고민했다. 지금 생각하면 사실 아무런 고민거리가 아닌데, 당시의 난 네가 다치는 게 누구보다도 싫었고 그런 너를 지키는 방법은 단 하나라고 생각했다. 네가 거슬리게 만들지 않는 것. 그래서 무작정 너를 피했다.
너와 말을 하는 것도, 너를 보는 것도 다 포기할 수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네 옆자리는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때 느꼈다. 우리는 원래 대화를 잘 나누지 않는 사이였구나. 내가 말을 걸지 않으면 우리는 정말 삭막한 사이가 되는구나. 내가 너와 친해지려고 몹시도 노력을 많이 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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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좋아한다던 그 누나는 꾸준히도 나를 괴롭혔다. 좋아서 따라다니는 정도가 지나쳐 그 순하고 순한 박지민의 입에서 웬만하면 경찰서에 신고하라는 말까지 튀어나왔다. 나는 건장한 19세의 남자였지만 한 번만 하자고 온갖 음담패설을 늘어놓는 그 여자가 무서웠고 늦은 시간, 너를 데려다 주고 돌아온 우리 집 앞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그 여자가 이제는 소름끼치기까지 했다. 여자의 힘을 제압할 힘 정도는 있었지만 당시엔 정신적으로 너무도 힘이 들었다.
" 이제 그만 오면 안 돼요? 저 너무 힘들어요, 누나. "
" 그러니까 한 번만 해 주면 앞으로 네 뒤도 안 밟고, 네 뒤도 안 캔다니까? "
" 누나 남자 친구 있는 거 알아요. 남자친구 있는 사람이 진짜 저한테 왜 그래요. "
" 누나 남자 친구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우리 정국이 말을 차갑게 해도 누나한테 관심 많구나? "
" 아뇨. 누나 동생이 흘린 말 주워 들은 거예요. 저 누나한테 관심 없어요. "
겉보기엔 여느 여대생과 다름 없는 외모였다. 꾸미기 좋아하고 옷에 관심 많은, 흔한 여대생. 조금 더 붙이자면 예쁘장한 외모 덕에 학교에서 꽤나 인기 있을 것 같은 여대생. 작년에는 이렇게까지 유별나지 않았는데, 내가 19살이 되면서, 그리고 누나가 20살이 되면서 대범해졌다. 내가 기억하는 건 뒤에서 가끔 편지를 보내기도 하고, 내가 좋아하는 음료수를 건네는, 귀여운 정도였는데 놀라울 정도로 집착이 심한 사람이었다. 내가 싫다고 피하면 피할수록, 숨으면 숨을수록 나를 찾는 사람 같았다. 그제서야 느꼈다.
아, 한 사람을 많이 좋아하면 정말 끝까지 치닫을 수도 있구나. 좋아하는 사람을 괴롭게 만들 수도 있구나.
" 오늘 너네 집에 아무도 없는 것 같던데. 누나 들어가도 되지? "
" 이따 친구 오기로 했어요. 누나 우리 집 비밀번호 어떻게 아셨는지 모르겠는데, 이거 범죄예요. "
" 알지. 근데 그만큼 누나가 정국이를 좋아하는 걸 어떡해? "
아, 누군가를 좋아하는 게 이렇게도 무서운 일이구나.
깨닫는 순간 나는 나에게 온갖 정이 다 떨어졌다. 어쩌면 나도 이 누나처럼 무서운 사랑을 하게 될 수도 있겠구나. 나만 기분 좋은 사랑을 할 수도 있구나. 자신만의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않는 이 사람이 어쩌면 참 불쌍할 수도 있겠구나.
누나는 익숙하게 우리 집 비밀번호를 치고 문을 열었다. 부모님께서는 아침 일찍 타지로 출장을 가셨다. 덕분에 휑한 집에 들어선 누나는 제 집인 것처럼 신발을 벗고는 익숙하게 불을 켰다. 부모님이 출장을 가신 날에는 매번 같은 패턴이라 한숨을 쉬며 방으로 들어가 가방을 벗었다. 늘 같은 패턴이었다면 누나는 부엌에 들어가 우리 집 반찬을 확인하고는 소파에 누워 티비를 켰을 것이었다. 그런데 거실은 조용했고, 뒤를 돌아선 순간 누나는 나와 코가 닿을 거리에 있었다. 가까워진 거리에 겁이 나 뒷걸음질을 치다 침대에 오금이 걸려 털썩 앉아버렸다.
" 하지 마요. "
단호한 말투에도 미세하게 떨리는 내 목소리를 캐치한 누나가 눈을 접어 웃으며 내 무릎에 앉아 목에 팔을 둘렀다. 두 손으로 몸을 지탱하며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면 누나는 그런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지 내 어깨를 눌러 아주 익숙하게 나를 눕혔다. 무서웠다. 나는 분명 19세의 남자고, 내 위에 있는 사람은 나보다 고작 한 살이 많은 여자였는데도 나는 무서웠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내 위에서 와이셔츠 단추를 푸는 누나의 분주한 손길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곧 맨살이 드러나고 내 몸을 조금씩 더듬거리던 누나가 거침없이 자신의 옷을 벗어버렸다. 속옷만 남아버린 누나의 모습에 눈을 질끈 감았다.
" 왜 눈을 감아, 정국아. 눈 떠. "
" 싫어요. 누나 진짜 하지 마요. 저 진짜 이거 싫어요, 누나. "
" 눈 뜨라니까. "
" 누나 제발요. 저 진짜 무서워요. "
" 뭐가 무서운데? 내가? 내가 무서워? "
눈도, 입도 꾹 다물고 몇 초가 흘렀을까, 누나의 손이 바지춤에 닿는 걸 느끼고는 화들짝 놀라 손으로 바지를 붙잡았다. 누나 왜 그래요. 진짜 이건 아닌 것 같아요. 애원하는 목소리에도 누나는 제 옷을 벗었던 것처럼 거침이 없었다. 능숙하게 단추를 푸르고 지퍼를 내려 바지를 벗기려는 누나의 손목을 세게 쥐었다. 하지 마요. 제발.
그때였을까. 잠시 집에 들렀다 우리 집으로 오기로 했던 박지민이 들어왔는지, 현관이 시끄러웠다. 바로 방으로 와 주었으면 하는 마음에 박지민! 하고 박지민을 큰 소리로 부르면 박지민은 근처 마트라도 들렀다 왔는지 비닐봉지 소리를 시끄럽게 내며 다다다다 방으로 달려왔다. 그리고는.
" 이게 뭐야. "
놀란 듯 비닐봉지를 툭 하고 떨어뜨리고는 빠르게 달려와 내 위에 올라와 있던 누나를 내던지듯 밀치고는 빠르게 내 바지를 올려 잠가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지만 그 당시에는 무서운 마음이 너무도 커서 박지민의 옷을 붙잡고는 나보다 키가 작은 박지민의 뒤에서 어깨 너머로 잔뜩 화가 나 있는 누나를 보았다. 정말 무슨 짓이라도 저지를 것처럼 독기를 가득 품은 눈에 눈을 질끈 감고 박지민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으면 당시에 보기보다 남자다웠던 박지민으 잘 들을 수 없는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누나 자꾸 이러시면 저 많이 불쾌한데요. "
" ……. "
" 누나 동생한테 들었는데 누구였더라 정국이네 반 여자애, 정국아 걔 누구지, 네 짝. 이름도 모르지? 아무튼 걔 잘 봐두라고 하셨다면서요. "
" ……. "
" 미안해서 어쩌죠. 우리 정국이 여자한테 관심 추호도 없거든요. "
" ……. "
" 걔한테도 관심 없고, 누나한테도 관심 없다고요. 이 정도 말했으면 그만 나가주는 게 어때요. 저 정국이랑 뜨밤 보내러 온 건데. "
준비해 온 멘트인 것처럼 차분하게 잘도 내뱉는 박지민의 옷 소매를 꼭 붙잡고는 누나가 옷을 여미고 나가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박지민도 떨리기는 마찬가지였는지 누나가 나가는 소리를 듣자마자 한숨을 푹 쉬고는 뒤로 돌아 내 양 볼을 꼬집어 흔들었다.
" 그러게. 내가 같이 가자니까. 하여튼 말을 안 들어요, 말을. 누가 전정국 아니랄까 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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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내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소문이었다. 박지민도 연관되어 있으니 나만의 소문은 아니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소문은 소문일 뿐이고, 반 여자애들이 나를 이상하게 쳐다봐도 친한 친구들은 가끔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 나를 게이새끼라고 놀리긴 해도 야동은 꼭 여자와 남자로 구성된 야동만 보는 나를 알기에 믿지 않았다. 그것도 박지민과의 소문이라니. 당연히 믿지 않을 게 뻔했다.
가장 걱정인 건 김아미, 너였다. 그날 이후로 누나는 연락이 없었고, 유치하게도 어떠한 경로로든 내가 게이라는 소문을 퍼뜨린 게 분명했다. 더이상 누나가 나에게 집착하지 않았고 그래서 너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그럼에도 다가가지 못한 건 한 사람을 좋아한다는 게 얼마나 큰 감정인지, 또 그 감정이 자칫하면 너를 아프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너무도 크게 자리잡았기 때문이었다. 부끄러워 말을 걸지 못 했던 그때와는 또 다르게 말을 한 번 걸기 위해 신중, 또 신중을 가했다. 너는 여전히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짝이었지만 우리는 삭막했다.
너에게 어떻게 하면 말을 걸 수 있을까, 많이 고민했던 밤이었다. 내일은 꼭 말을 걸어야지, 내 감정을 숨기고 조금씩 다시 다가가야지, 새로운 마음을 가지고 잠에 들었다. 그리고 그날 아침은 내 이삿날이었다. 몇 달 전부터 예정되어 있었던 이사였지만, 이런저런 일이 겹쳐 잠시 잊고 있기도 했고, 부모님의 근무지가 예정보다 빠르게 변경된 탓도 있었다. 그래서 학교를 나가지 못 했다. 박지민과 친구들에게는 미리 말을 했지만 네 연락처를 모르는 탓에 너에게는 연락을 하지 못 했다. 아니, 연락처를 알았더라도 과연 연락을 했을까.
전화를 통해 전학 수속을 대충 밟고는 새로운 교복을 샀다. 고작 몇 개월 다닐 학교였지만 동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부모님의 돈지랄이 분명했다. 예전 교복을 정리하며 네가 생각이 나 박지민에게 네 안부를 물어보려 했다. 너는 잘 지내는지, 혹시 내가 없어진 것에 대해 너에게 뭔가 묻지 않았는지, 여전히 공부는 잘 하고 있는지, 밥은 잘 먹는지. 물을 것이 많았지만 무엇부터 물어야 할지 몰라 폰을 들고도 잠시 고민했다. 그때였을까, 박지민에게서 먼저 사진 한 장이 도착했다.
네 사진이었다. 텅 빈 내 자리의 옆자리에서 해맑게 웃고 있는 네 모습이 조금은 낯설어 보였다. 반 여자애들과 친해진 건지 웃고 있는 네 모습이 아직도 나는 어려웠다. 네 웃는 모습을 보려고 그렇게도 매달렸는데, 내가 모르는 친구들과 웃고 있을 때면, 아, 내가 잘 모르는 너의 모습이 있겠구나, 싶었는데 익숙한 얼굴들에 둘러싸인 내가 좋아하는 얼굴은 나에게는 그렇게도 보여 주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잘 지내는 걸 확인하면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았는데.
잘 모르겠다. 나도 내 마음이 왜 이런지. 불편한 구석이 자꾸만 커져 마음을 조금씩 조금씩 차지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네가 잘 지내는 모습을 보면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왜 이렇게도 질투가 나는 건지. 너는 내가 없이도 잘 지내는데, 왜 나는 이렇게도 너를 보고 싶어 하는 건지. 네 앞에서만큼은 숨기려 애를 썼던 좋아하는 마음이 어쩐지 숨기려 하다 보니 더 커진 것 같았다. 더 커지고, 커지고 또 커지다 너에게 해를 가하는 날이 오게 될까 무서워 아무것도 묻지 않고 휴대폰 홀드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 김아미 잘 지내. 너랑 있을 때보다 더 잘 지내는 것 같은데. ]
[ 그리고 걔 네가 진짜 남자 좋아하는 줄 아는 것 같더라. ]
[ 얘 네가 얘 좋아하는 거 몰라? ]
[ 그냥 현식이가 말해 줬는데 우리가 듣기에는 좀 꽁기한 말을 걔가 여자애들한테 했대. ]
전정국은 남자를 좋아한다
w. 정국학개론
사실 이렇게 빨리 정국이 회상을 가져올 생각은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이 시기가 적절한 것 같아 가져오게 됐어요
도저히 어떻게 써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아 정국이 회상을 가져온 건 비밀 아닌 비밀!
지금까지 비춰졌던 정국이와는 조금 달라서 당황...ㅅ러우ㅝ...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조금 걱정이긴 하지만...
일단 오늘 정국이는 고등학생이었던 정국이구요, 다음 편에는 여주와의 만남부터 다룰 것 같아요.
분량 조절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정국이 회상은 적으면 두 편, 많으면 세 편으로 이루어질 것 같아요.
고등학교 시절을 이렇게까지 길게 담고 싶지 않았는데 어쩌다 보니... 제 글 읽어 주시는 독자님들 최소 보살 ㅎㅅㅎ 사랑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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