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정국은 남자를 좋아한다
w. 정국학개론
전정국 회상 中
부제: 마음 속에 핀 작은 꽃
BGM ~ 공드리 - 혁오 (hyukoh)
나름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어떤 학교 어떤 과를 들어가야겠다, 대충 생각은 하고 있었고 오랜 기간 준비해온 결과 수시로 원하는 대학, 원하는 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최초 합격으로 단톡의 초기 멤버였기 때문에 공식적인 입학 전에도 수시 합격 동기들, 과 선배들과 술자리를 가지기도 했다. 사람을 가려 사귀는 편이 아니라 동기들과도, 선배들과도 쉽게 친해질 수 있었고, 고등학교 내내 거리를 멀리했던 여자애들과도 장난을 치는 사이까지 발전했다. 그런 내가 내심 뿌듯했지만, 가끔 떠오르는 그 애 생각은 떨쳐낼 수가 없었다. 나 없이 잘 지낸다던 그 애는 여전히 잘 지낼까, 대학은 어디로 갔을까, 언젠가 한번 마주칠 수는 있을까. 좁지만 좁지 않은 반도에서 너와 내가 마주칠 확률은 얼마나 될까.
" 형, 저 왔어요. "
" 어, 야. 너 왜 이제 오냐? 이게 선배들이랑 좀 친해졌다고 입학식도 안 오고. 빠졌지, 새끼야? "
" 아, 어제 형들이 너무 많이 줘서 그래요. 진짜 죽을 뻔 했어요. "
과 회장 형은 나에게 유독 호의적이었다. 내가 과대를 맡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는 것 같기도 한데 나는 절대 그럴 생각이 없었다. 미쳤다고 내가 그런 귀찮은 자리를. 어제 과음하는 바람에 아직도 울렁이는 배를 붙잡으며 밉지 않게 다그치는 회장 형에게 개구지게 웃으며 말하자 회장 형은 역시나 개구지게 받아 주며 오늘은 과음하지 말라며 토닥여 준다. 입학식을 오지도 못할 정도로 속이 더부룩했는데 뒤풀이라고 참여가 가능할까. 저 멀리서 어제 함께 과음했던 수시 동기들이 정시 동기들과 반갑게 인사하며 술게임을 하고 있는 걸 보며 혀를 차며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김아미?
시선을 피했다. 옆에서 회장 형은 쉴 새 없이 나에게 말을 걸고 있었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진짜 너일까. 진짜 네가 맞을까. 떨어져 있던 9개월동안 빠짐없이 떠올렸던 네가 맞을까. 주먹을 꽉 쥐었다 풀었다.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내가 어제 너무 과음하는 바람에 환영을 보는 것일까. 혹시 네가 아니면 어쩌지, 하는 마음에 다시 쳐다보지도 못하고 회장 형과의 대화를 마무리 짓고 몸을 돌려 술집을 나섰다. 봄이 다가온다고 한들 바람은 아직 찼다. 코트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한 개피를 물었다. 담배는 전학 간 학교에서 배웠다. 호기심도 관심도 없었지만 친해진 친구들을 따라다니다 보니 어느새 담배를 물고 있었다. 친구들을 만나면 피우고, 침대에 누워 있다 문득 네가 떠오르면 산책을 핑계 삼아 나와 피우고, 이렇게 너라는 환영을 만들어낸 내가 한심해 피우고. 그리고.
환영은 나를 따라 나왔다. 환영도 추위를 느끼는지 손으로 양 팔을 비비고 있었다. 술이 조금 들어간 건지 양 볼이 빨개져 있는 너의 모습이 조금은 낯설었다. 그리고 너의 모습을 한 환영과 눈이 마주쳤다. 멍해 있던 네 눈이 조금씩 또렷해졌다. 너는 정말 너일까. 내가 만들어낸 환영이 아니라 정말 그대로의 너일까.
" …전정국? "
환청일까, 진짜 네 목소리일까. 짝이면서도 몇 번 듣지 못한 네 목소리는 들어도,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늘 새로워서 감동이었는데, 지금 이 순간 환청이라도 네 목소리를 기억해 낸 내가 자랑스러웠다. 아직 긴 담배를 떨어뜨려 밟았다. 다시 너를 보았다. 여전히 너는 눈에 띄게 하얬고, 또 너는 눈에 띄게 예뻤다. 내가 만들어낸 환영이 아니라 네가 진짜라면, 진짜 내 눈 앞에 나타난 거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입이 바싹바싹 말라들어갔다. 다시 내가 너를 좋아할 수 있을까. 예전처럼 아주 순수한 그 감정으로 너를 좋아할 수 있을까.
" OO과? "
너는 내 물음에 예전과 다름없이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너를 만난다면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고 물어야 할까, 보고 싶었다고 해야 할까. 그럼에도 확실한 건 나는 아직 너를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9개월의 시간동안 나는 여전히 너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늘 너를 떠올렸고, 늘 네가 뭘 하는지 궁금했고, 늘 박지민에게 너의 안부를 물었다. 당연했다. 좋아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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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형의 성격을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막무가내였다. 나와 같이 김태형은 수시 최초 합격으로 초기 멤버였는데 그때부터 김태형은 나에게 꾸준히 갠톡으로 만나자는 말을 하기 일쑤였다. 수시 동기들 중 내가 제일 마음에 든다나. 아무튼 김태형은 친화력의 끝장판이었다. 그리고 김태형은 그 손을 너에게도 뻗은 것 같았다. 어쩌면 너를 좋아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신경이 곤두섰다.
입학식날 뒤풀이를 파하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간 후 김태형은 어김없이 오늘도 갠톡을 보냈다.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사소한 얘기에서부터 시작해 언제 한번 밥이나 먹자는 말로 끝나던 김태형의 톡은 사소하지 않은 얘기에서 시작되었다.
- 김아미 좋아하지
내 마음을 들킨 것일까 괜히 조마조마한 마음에 김태형의 톡을 확인하고도 잠시 고민했다. 박지민 이외의 친구에게, 그것도 별로 친한 것 같지도 않은 동기란 놈에게 나만 알고 싶은 마음을 들킨 게 기분이 이상했다. 입이 무거운 편도 아닌 것 같던데 이 일로 쓸데없는 소문이 나 내가 너를 힘들게 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어떻게 하면 다른 얘기로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을까, 고민을 하다 1을 지운 지 벌써 30분이 되었다는 사실을 깜빡했다. 그리고 김태형은 그걸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 대답 못하는 거 보니까 맞네~
전정국 김아미 좋아한대요~
- 닥쳐
안 좋아해
마음을 부정하는 건 꽤 어려운 일이었다. 나만 힘들면 된다, 하고 뱉은 말은 나에게 화살히 되어 돌아왔다. 정말. 힘들었다.
- 좋아하잖아
- 아니라고
- 좋아하는 거 아는데
- 아니라니까 병신아
김태형과의 카톡은 그렇게 끝이 없었다.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다만, 김태형이 너를 좋아하는 마음을 일깨워 주는 것이 조금은 민망했고, 불편했다. 애써 너를 부정하려는 내가 부끄러웠다.
그 이후로 김태형에게 다른 말은 없었다. 학교에서 마주쳐도 알 수 없는 웃음만 지으며 지나갈 뿐, 내가 너를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나름의 배려일까, 약간의 고마움을 느끼려 했다. 김태형이 굳이 내가 보는 앞에서 너를 데리고 장난을 치기 전까지는 말이다. 나 들으라는 듯 너와 점심을 먹으러 간다며 큰 목소리로 말하질 않나, 평소 스킨십이 많은 척, 아니 물론 스킨십이 많은 편이긴 하지만 너의 손을 잡는 것에 그치지 않고 깍지를 끼질 않나. 속이 부글부글했다. 언젠가 저 새끼를 꼭 내 손으로 쥐어박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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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구한 하숙집은 방이 하나라 하숙생이 나 하나였다. 그것만으로도 좋았지만 더 마음에 든 것은 학교에서 하숙집까지 가는 길이 아늑하고 로맨틱하다는 것이었다. 가로등 하나가 깜빡거리는 게 조금 거슬리긴 했지만, 아무렴 어때. 혼자 걸으며 노래를 듣는 걸 좋아하는 편이라 여느 때와 다름없이 삼성 이어폰을 귀에 마구잡이로 끼워놓은 상태였다. 마침 이어폰에서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분위기에, 내가 좋아하는 곡. 코트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걷고 있는데 앞에서 무언가 아른거려 유심히 살펴보았다. 근처 하숙집에 사는 하숙생인가. 익숙한 뒷모습에 고개를 잠시 갸웃거리며 이어폰 한 쪽을 빼냈다.
" 어. "
김아미다.
심장에 세차게 뛰었다. 이 근처에 사는 걸까, 괜히 반가운 마음에 말을 걸고 싶었다. 마치 우리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그저 친한 친구 사이에서 네가 나를 좋아하는 것보다 내가 너를 조금 더 좋아하는 사이로 한 단계 올라간 사이인 것처럼 그렇게 말을 걸고 싶었다. 하마터면 어이없이 저지를 수도 있었던 실수에 무의식적으로 올렸던 손을 내렸다. 너를 쫓으려 걸음이 조금 빨라졌던 걸까, 너의 발소리에서 긴장감이 묻어났다. 조금 빨라진 발걸음에 내가 무서운가, 싶어 조금 거리를 두었다.
이게 너와 나 사이에 두어야 할 거리구나.
그 이상으로 멀어져서도, 그 이하로 좁혀져서도 안 되는 적정한 거리. 친구도 아니고, 그렇다고 남도 아닌 그런 사이. 그럼 대체 우린 어떤 사이일까. 그저 아는 사이에 불과한 걸까. 조금 씁쓸해진 마음에 네가 급히 하숙집 초인종을 누르는 걸 물끄러미 쳐다보다 맞은편에 있는 내 하숙집을 보았다.
정말 그 이상으로 멀어져서도, 그 이하로 좁혀져서도 안 되는 거리. 그래, 딱 이 거리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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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일어나서도 침대에서 30분 정도 뒤척였다. 이유는 너였다. 네가 맞은편 대문에서 가방끈을 꼭 쥐며 초인종을 누르는 모습이 계속 떠올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너를 기다렸다, 같이 가는 게 좋을까, 아님 내가 먼저 나서는 게 좋을까. 요란한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시계를 빤히 쳐다보고 너를 떠올리기를 반복하다,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역시. 너와 같이 가는 건 아직 무리인 것 같았다.
조용한 과실은 어색했다. 너는 보통 8시 30분쯤에 오는 걸 매번 확인했으니 앞으로 10분 후면 너나 김태형 또는 정수정이 올 거고, 40분쯤이면 시끄러운 녀석들이 몰려올 거고. 김태형은 내가 너를 좋아하는 걸 뻔히 알고 있으니까 아마 내게 너와 대화를 나눌 시간을 줄지도 모르겠다. 잔뜩 기대하며 간간히 박지민과 톡을 하며 30분을 기다린는데 역시나 정수정과 김태형이 함께 들어온다. 항상 학교 앞에서 만났다고 하던데 그게 진짜인 건지, 둘이 뭐 썸이라도 타는 건지, 조금 의심스럽긴 하다. 이제 슬슬 김아미가 올 때가 됐는데 휴대폰 시계를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고, 30분에서 1분이 지나고, 2분이 지나고, 40분이 다 되도록 보이지 않는 네 모습에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오다가 사고라도 난 게 아닐까, 그냥 내가 같이 올 걸 그랬나, 오만가지 생각을 다 하고 있는데 김태형이 앞에서 웃고 있다. 웃음의 의미를 알 것 같아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데 그 순간 문이 열리고 네가.
" 여, 김아미! "
" 야, 너 오늘 왜 이렇게 늦게… "
윤기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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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에게는 카톡으로 모든 걸 말해놓은 상태였다. 너를 보았고 네가 우리 과라는 사실을 듣고는 잔뜩 흥분하던 박지민은 나에게서 너의 소식을 궁금해했다. 그닥 친한 것도 아니었으면서 뭐가 그렇게 궁금하냐는 내 질문에 박지민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니 당연히 궁금하지 않겠냐며 샐쭉 웃곤 했다.
나는 주변의 도움을 그리 달가워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주변에서 끼어들다 망한 케이스도 여러 번 보았고, 그걸 아는 박지민은 굳이 내 짝사랑에 관해 도움을 주겠다고 설치는 일따위는 없었다. 그게 편했고, 그게 내 스타일이었는데, 김태형은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되는 스타일이었는지 매번 나에게 너와 점심을 먹으러 가는 장소를 카톡으로 보내놓곤 했다. 무슨 짓이야. 이게. 처음에는 알아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냐며 무시했는데 오늘 윤기 형과 함께 들어온 네 모습이 괜히 신경이 쓰여 박지민과의 점심은 어김없이 오늘도 김태형이 카톡으로 남겨놓은 음식점에서 먹기로 했다. 맛없는 곳이라며 투덜대던 박지민은 굳이 한 음식점을 고집하는 내가 이상했던지 내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 아, 진짜 여기 맛없는데. 내가 저번에 여기 와 봤… 어? "
말을 잇지 못한 박지민의 시선의 끝에는 네가 있었다. 그리고 김태형과 정수정. 그리고.
대체 저 형은 왜 저기 끼어있는 건지, 대체 왜 오늘 아침 너와 등교를 함께 한 건지, 의문투성이였다. 이제 복학한 형이라 아는 후배들도 없을 텐데 어떻게 너와 아는 사이인 건지. 사실 너에게 많이 서운했다. 친해지고 싶어 안달 나 있었던 그 당시 몇 개월의 나와 너보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윤기 형과 너의 사이가 더 가까워 보였다. 왜 너는 나를 그렇게 불편해했을까. 내가 그렇게 싫었던 걸까. 서운한 표정으로 너의 일행을 쳐다보는데 순간 마주친 김태형의 눈이 살갑게 접혔다. 그럼 그렇지. 하는 네 표정에 괜히 패배를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너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박지민의 고개를 내쪽으로 고정시켰다.
" 야! 와, 진짜 대학 가면 여자들은 다 예뻐진다더니 김아미 왜 이렇게 예뻐졌어? "
" 목소리 낮춰. 다 들리겠다. "
" 야, 근데 진짜 예뻐. 와, 대박. 너 겁나 신경 쓰이겠다. 옆에 분홍 머리는 누구야. 아미 남친 아니야? "
" 아니거든. 남친 아니거든. 우리 과 선배거든. "
" 아, 발끈하는 거 봐. 너 오늘 좀 귀엽다? "
내 반응이 어떻게 나올지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괜히 떠보는 박지민을 밉지 않게 노려보다 내 맞은편에 있는 너를 힐끔 쳐다보았다. 주문한 음식이 나와 숟가락을 들고서도 너를 쳐다보다 네 옆에 있는 윤기 형을 반갑지 않은 눈빛으로 노려보기도 하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 우리 거리는 이렇게나 가까운데 너는 나와 이렇게 가깝지 않다는 사실이 씁쓸했다.
" 작작 처먹어, 돼지야. "
맛없는 곳이라더니 음식이 나오자마자 숟가락을 들고는 허겁지겁 먹는 박지민에게 괜한 화풀이를 하면 박지민은 누가 봐도 열은 받은 것 같지만 무섭진 않은 표정으로 나를 노려본다. 씩씩대며 숟가락을 내려놓고는 물을 한 컵 들이붓는데, 객관적으로 작은 손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게 귀여웠다. 딱 귀여움 받을 스타일이야, 얘는.
" 왜 웃냐? 웃겨? 맛없어도 맛있게 먹어주는데 내가 지금 웃겨? "
" 아니, 귀여워서. "
" 야, 그런 말은 네 여자한테나 가서 하세요~ "
" 있어야 하지. "
" 뒤에 있는 여자는 네 여자가 아니고 뭐야~ 아주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 없이 쳐다보드만. "
너를 내 여자라며 호칭하며 툴툴대는 박지민을 보며 살짝 웃다, 시선을 꺾어 너를 쳐다보았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건지, 나를 향한 네 시선에 당황하기도 잠시, 네 옆에 있는 익숙한 분홍 머리에 얼굴을 찡그렸다. 눈을 돌려 박지민을 보았다. 네 시선은 꽤 끈질겼다. 어떤 이유에서 나를 보는지, 혹시 내가 힐끔힐끔 쳐다보던 걸 느껴서 그런 걸까, 편안한 의자에서도 안절부절 못하며 박지민을 향해 애써 웃어보였더니, 눈치는 뭣도 없던 박지민이 역시 한 건 해냈다. 뭐 마려운 강아지 같다며 마려우면 화장실이나 가라는 말에 박지민 머리를 한 대 쥐어박을 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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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정국이 좋아하는 여자애 생겼다며? "
좆됐다. 다짜고짜 형들끼리의 술자리에 내가 불려갔다. 이유는 다름 아닌. 너였다. 김태형이 다 분 게 분명했다. 맨정신으로 불었든, 술에 취해 꼰 상태에 불었든, 아무튼 형들은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걸 다 알고 있었다.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추가된 내 술잔에 술을 가득 담아 준 형은 나에게 해명 전에 마음을 비울 시간을 주었다. 그리고 나는 술잔과 함께 마음도 비웠다.
역시나 범인은 김태형이었다. 네 이름까지 모두 분 상태에서 발을 빼기도 그렇고 이미 헝클어진 머리를 잔뜩 헝클어뜨렸다. 우리가 알게 되서 불편하냐는 식의 형들의 물음에는 애써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이래서 김태형보단 박지민을 더 좋아하는 거야. 김태형 개새끼.
" 김아미 맞나? 맞지? 걔 예쁘게 생기긴 했던데 그렇게 튀는 스타일은 아니잖아. "
형들의 술안주는 역시나 너와 나의 사이에 관한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이름이 오르내리는 건 별로 달갑지 않았지만 지금 더 달갑지 않은 건 내게 너를 왜 좋아하냐는 질문이었다. 사실 나도 잘 모르는데. 내가 그 이유를 알았다면 좋아하지 않았을 텐데. 너를 좋아하는 이유를 지워버리면 너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가 될 텐데. 만약 일방통행이 아니었다면 즐거운 주제였을까. 점점 어두워지는 내 얼굴에 회장 형이 그만하자며 형들의 입을 막는다. 신나서 떠들던 몇몇 형들은 그제서야 내 표정을 확인하고는 입에 지퍼를 잠근다. 그래. 좀 조용히 해 줘요.
" 근데 윤기 형은 안 보이네요. "
" 아, 윤기 새로 하숙집 들어갔잖아. "
" 이사는 어제 아니었어요? "
" 몰라. 집에 꿀이라도 숨겨놨는지 아줌마 핑계 대고는 초대도 안 한다고 하더라. 집들이는 해야 하는데. "
" 야, 그래도 그건 안 가는 게 맞지. 걔네 집도 아니고 생판 모르는 사람 집인데. "
" 아, 근데 걔 진짜 꿀이라도 숨겨 놓은 것처럼 실실 웃더라니까? "
" 윤기 형 집이 어딘데요? "
" 모르지, 그건. 우리가 언제 들이닥칠지 알고 걔가 가르쳐 주냐? 아무튼 걔 수상하다니까. 분명 집에 뭐 있어. 오늘 안 나오는 것도 그렇고. "
윤기 형은 따로 형들을 만나 술자리를 가졌을 때 우연히 만나게 된 형이었다. 좋아한다면 좋아하고, 싫어한다면 싫어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괜히 신경이 쓰였다. 너 때문이었다. 네가 아니었다면 술자리를 같이 하는 머리색이 튀는 형으로 그냥 그렇게 지나갈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순전히 너로 인해 신경이 쓰였다. 오늘 같이 등교하던 모습. 우연히 만났다며 자연스럽게 입을 열던 모습. 말도 안 돼. 알던 사람이 아닌 이상은 그렇게 자연스러울 수 없다. 아니, 애초부터 윤기 형이 우리 과라는 걸 아는 건 나밖에 없었다. 아니, 한 명 추가해 봤자 김태형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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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긋지긋한 여자 동기들이 모두 수업을 가버렸다. 누가 여자애들 아니랄까 봐 수업도 똑같이 신청해서는. 오랜만에 주어진 쉬는시간에 소파에 누워 폰을 들었다. SNS를 하는 편도 아니고, 딱히 볼 게 없어 폰을 쥐고도 한동안 검은 화면만 쳐다보았다. 쉬는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곧 과실로 들어오는 인기척에 홀드를 눌러 폰으로 열심히 뭔가를 하는 척 했다.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행동이었다.
맞은편에 책상을 두고 앉은 사람이 너라는 걸 알게 된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금방이라도 폰을 소파로 던져버리고 너에게 말을 걸고 싶었다. 아마 꼬리가 있었다면 강아지처럼 흔들지 않았을까. 말을 걸고 싶어 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너를 외면할 수가 없었다. 아니 처음부터 나는 너를 외면하지 못했다. 어떤 말로 먼저 말을 걸어야 할까 고민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너는 먼저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고민하면서도 혹시 네가 나에게 말을 걸어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던 터라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 왜. "
차가웠다. 내가 생각해도, 아니 누가 봐도 차가운 말투였다. 말을 내뱉고 나서 절망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좋아하는 여자애에게 말을 겨우 이따위로밖에 못하는 내가 한심했다. 앞에서 머뭇거리는 네 모습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 이상한 소문이 도는 것 같아서… "
이상한 소문? 듣도 보도 못한 나에 관한 소문이 퍼진 건지 알지도 못하는 소문의 출처도 궁금하지만 그 내용이 제일 궁금해 폰을 두고 너를 쳐다보았다.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던 그 소문에 대해 네가 나에게 굳이 말해 준다는 건 너도 그 소문의 주인공이라는 걸까.
" 이상한 소문? "
" 아, 그… 네가 나를 좋아한다는… "
이상한 소문이라더니.
" 내가 널 좋아하는 게 이상한 소문이야? "
" 응? "
내가 널 좋아하는 건 이상한 상황인가.
" 아, 이상한 소문. "
잠시 잊고 있었다. 너는 아마 내가 게이라는 걸 여전히 마음에 담아두고 있을 게 안 봐도 비디오였다. 너는 내가 너를 그렇게도 쫓아다녔던 몇 개월의 시간보다는 겨우 주변의 소문에 휩쓸려 나를 오해하는 겨우 그 정도의 사람이었다. 그걸 내가 아주 잠시 잊고 있었다. 너를 보면 여전히 설렜고, 금방이라도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은 기분을 자주 느꼈지만 왠지 지금만큼은 너를 보고 싶지 않았다. 내 마음을 겨우 이상한 것이라 치부할 수도 있는 너를 외면하고 싶었다. 너에게 실망했고, 또 그걸 해명하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는 나에게 실망했다.
" 상관 없잖아. "
" …응? "
" 내가 게인 건 네가 알고 있을 거고, 그럼 넌 내가 널 안 좋아한다는 거 알고. "
" ……. "
" 너는 나를 안 좋아하고. "
마음이 아팠다. 네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인정하는 게. 그걸 내 입으로 꺼낸다는 게. 열아홉, 네 옆자리에 않아 수도 없이 되뇌였던 그 말을 스물,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마음이 조각나버린 것 같았다. 아니, 조각이 났다.
" ……. "
" 그럼 상관 없는 거 아니야? 뭐가 문젠데. "
" ……. "
" 아, 혹시 좋아하는 사람 있나. "
" ……. "
" 그. "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것만 생각했다. 네가 누군가를 좋아할 거란 생각은 해 본 적도 없었다. 그리고 그게 참 미련한 짓이란 걸 이제서야 깨달았다.
" 윤기 형? "
어쩐지 네 눈이 흔들린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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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자리는 지긋지긋했다. 형들과 함께는 물론이었고 주변에 여자 동기들이든, 선배들이든 여자는 더욱이었다. 오늘 마시면 제대로 취해 인사불성이 될 것 같아 술잔을 입에 대었다 떼기만 수십 번이었다. 어긋난 시선에는 네가 닿았다. 아니, 처음부터 네가 어디 앉았는진 파악하고 있었다. 굳이 알고 싶지 않아도 눈에 들어왔고, 네 옆에 있는 윤기 형이 거슬렸다. 어떤 관계든 간에 네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게 남자라는 사실이 기분을 더럽혔다.
윤기 형과 너는 꽤 다정해 보였다. 네가 겨우 며칠만에 친해질 수 있는 사람이었던 걸까. 너는 내가 알고 있는 김아미가 맞긴 한 걸까. 내가 아는 너는 남자와 여자 간 친구 사이에도 철벽을 만리장성급으로 쌓아 올리던 여자애였는데, 스무살이 되면서 많이 변한 걸까, 거리낌 없이 웃고 있는 네가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었다. 술도 못 마시는 게 혼자서 벌써 반 병째였다. 어디 가서 헤실헤실 웃지만 않는다면 예쁠 텐데. 아니, 그 웃음이 나만을 향한 거라면 참 좋을 텐데. 답답한 마음에 담배가 그리웠다.
생각보다 따뜻한 바람에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담배를 꺼냈다. 익숙하게 한 개피를 꺼내 물었고 불을 붙였다. 네 생각을 정리하려고 물었던 담배가 무색하게도 너는 거짓말처럼 내 옆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굳이 말을 걸지는 않았다. 담배를 다 태우고, 동시에 너에 관한 내 생각도, 마음도 태우고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어느새 단초가 된 담배를 떨어뜨려 밟아 껐다. 미동도 않고 있는 네가 거슬려 그제서야 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네가 나를 보고 있었다. 몽롱한 표정으로, 눈에는 초점을 잃은 채 나를 보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입이 삐죽거리는 게 심술이 가득했다. 엄마가 장난감을 사 주지 않아 삐친 아이같은 모습에 괜히 웃음이 나왔다. 술에 취한 게 분명한 네 모습에 괜히 안심이 되었다. 네가 날 이렇게 볼 정도면 만취 상태라고 봐도 무방할까. 네게 어떤 말을 해도 네가 기억하지 못했다면 나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 뭘 봐. "
뚫어져라 나를 쳐다보는 네가 부담스러웠다. 내 한 마디에 열이 받았던 건지 씩씩대며 아예 내 쪽으로 몸을 돌리는데 얼굴이 빨개진 게 귀여워서 입가에 퍼지는 미소를 멈출 수가 없었다. 술 좀 작작 마시지.
" 정국아… "
취해서도 정신이 있는 건지, 뭔지 머뭇거리며 내 이름을 부르고는 무릎에 고개를 묻는다. 술에 취해서 얼굴이 빨개진 게 분명한데도,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어쩐지 이 분위기라면 내가 고백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네가 꼭 나를 받아 줄 것만 같았다.
" 왜. "
" 정국아아… "
" 왜. "
" 정국아! "
" ……. "
" ……. "
순간 네가 묻었던 얼굴을 들어 나를 보았다. 헤실헤실 웃는 모습에 정신 차리라며 네 이마를 아프지 않게 밀었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미소가 끊이지 않는 얼굴이 좋았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얼굴인데 이걸 이제 보여 주네. 그냥 웃어버렸다. 지금 아니면 언제 또 네가 나와 이렇게 웃어 줄까, 싶어서 그냥 네 앞에서 숨기지 않고 웃어버렸다. 나는 너를 좋아한다는 걸 꼭 알려 주고 싶었다.
" 왜 자꾸 나를 피해… "
" 어? "
" 왜! 자꾸! 나 피하냐구우…… "
" 내가 언제 피했어. "
" 자꾸… 다른 여자애들한텐 막 이케, 이케 웃어 주면서 나한텐…… 씨… "
기분이 좋았다. 오늘따라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도, 내 앞에서 꼬장을 부리는 너도, 다 좋았다. 오늘이 내 생일인가, 싶었다.
" 안 그럴게. "
" 지짜? "
" 진짜. "
" 다른 여자애들한테 막 이케, 이케 안 웃어 줄 거야? "
" 안 웃을게. "
" 나한텐? "
너는 생각치도 못하게 훅 들어왔다. 당황스러운 표정이 네 눈에도 보였던 걸까. 네 눈이 금세 휘어졌다. 뭐라고 답을 해야 하지. 술 취한 애를 붙잡고 내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사실 아무렇게나 답해도 만취 상태인 네가 기억을 할지, 안 할지도 모르는데 나는 왜 이걸 진지하게 대답하고 있는 거지. 여러 생각이 겹쳐 머리가 복잡했다. 결국 내일 아침이면 다시 돌아올 네가 분명한데. 나는 왜 이러고 있을까. 한숨을 쉬며 네 앞에 굽혔던 무릎을 일으키려 할 때였다.
" 대답 안 해 줘? "
네가 내 멱살을 잡고 끌어 당겼다. 코가 닿을만큼 가까워진 거리에 숨을 멈추었다. 네가 내 앞에서 눈을 끔뻑이고 있었다. 너의 특유의 냄새와 술냄새가 섞여들었다. 너는 순식간에 나에게 밀려왔고, 입술의 촉감은 생생했다. 꿈이 아닐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너를 보았지만, 너는 여전히 내 멱살을 쥐고 있었고, 당연한 순서인 듯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고, 또. 우리는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리고. 막 나오는 윤기 형과 시선이 닿았다.
머리가.
복잡했다.
전정국은 남자를 좋아한다
w. 정국학개론
늦게 온 이유를 물으신다면 전 쓰차가 이제 풀려 오게 되었다라는 말과 동시에 정국이 회상을 어떻게 하면 적절한 분량으로 짤까 많이 고민을 했기 때문이라고 말씀 드리고 싶어요 8ㅅ8 오늘 분량이 좀 많아요 제가 반드시 상 하로 나누리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제가 참 많은 이야기를 써놨더라고여... 저도 몰랐져 이렇게 정국이 이야기를 많이 써야 할 줄은... 정말 몰랐는데 쓰고 나니 中 분량이 너무 많아서 혹시 읽다 포기하시는 분이 있을까... 염려가 됩니다 ㅠㅠ
일단 열심히 썼구요 역시나 똥글이지만 항상 응원해 주시는 독자님들 덕분에 제가 힘을 내요♡
Aㅏ thㅏ랑해요 암호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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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놓친 암호닉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늘 감사해요 여러분 하트하트하트하트하트x10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