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十三
보름 동안 태자비가 되기 위한 훈련이 이어졌다. 전부 황궁 예법을 익히는 것이었는데, 그걸 다 외우는 데 소소는 꽤나 애를 먹었다. 사소한 걷는 법이나 식사예절부터 윗사람에게 문후를 올리는 법까지 죄다 쉬운 것이 없었다. 처음에는 대승상도 윤기도 한 번을 찾아오지 않은 것에 서운했지만, 태자비 교육을 받는 동안은 외부의 출입을 일절 금하고 있다는 상궁의 말에 겨우 섭섭한 기색을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보고 싶은 이 하나 만나지 못하고 갇혀 있는 것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허리를 좀 더 곧추세우십시오.”
회초리로 아프지 않게 등허리를 살짝 치는 상궁에 소소가 숨을 참고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머리 위, 어깨 위에는 물이 담긴 자기가 올려져있었다. 그걸 떨어뜨리지 않고 걷는 연습을 하던 중이었다. 태자비 궁의 마당 한 가운데에는 잔뜩 긴장한 소소와, 훈련을 돕는 상궁 항아들밖에 없었다. 지친 얼굴로 최대한 조심하며 걷던 소소가 마당을 들어서는 누군가를 보며 반색을 했다. 정국이었다.
“별감!”
“소저!!”
제 머리에 위태롭게 올려져있는 자기를 순간 의식하지 못했던 소소는 꽤나 격하게 정국을 반겼고, 덕분에 자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기겁하는 상궁의 부름이 들렸다. 물론 상궁은 자기를 떨어뜨려서가 아니라, 정국을 더러 별감이라는 요상한 호칭으로 칭하는 소소에 놀라 그런 것이었지만.
“저런.”
담겨있던 물이 떨어지면서 소소의 분홍색 의복을 적셨다. 어깨와 가슴팍의 색이 진해졌다. 흙바닥을 나뒹구는 자기는 깨지진 않았지만 저 멀리까지 굴러갔다. 소소가 상궁의 눈치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정국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소소의 앞으로 다가왔다.
“소저, 어찌 그러한 호칭으로 부르….”
“서 상궁.”
“예, 전….”
뒤에서 항아들이 자기를 줍는 동안 질겁한 상궁이 소소에게 책망하듯 말했다. 그러나 그 말을 정국이 서둘러 저지했다. 정국의 멈추라는 손짓에 황겁하며 상궁은 고개를 숙였다. 뭔가 이상한 분위기에 젖은 의복을 살짝 털며 소소가 눈치를 보았다. 이래서 되도록 상궁나인들이 소소의 옆에 붙어있을 때에는 오기가 싫었는데, 소소가 혼자 있는 시간은 늦은 밤을 제외하곤 거의 없었다. 그렇다고 혼인도 전인데, 밤에 함부로 여인 혼자 있는 곳에 찾아갈 순 없지 않은가. 정국은 보름 정도 꾸준히 소소를 만나러 태자비 궁에 왔다. 물론 여전히 제 신분은 별감으로 위장한 채로. 그 전까진 아슬아슬하게 쉬는 시간만 골라와 상궁과의 직면은 피할 수 있었는데,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잠시 물러가 주었으면 하는데.”
“허나, 아직 정식으로 부부의 연을 맺기도 전이신데 어찌….”
정국이 소소에겐 들리지 않은 정도로 서 상궁에게 작게 속삭였다. 갑작스런 태자의 청에 머뭇대던 상궁은, 이왕이면 합방 전에 정국과 소소가 가까워지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소저께서 의복을 버리셔서, 새 옷으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네, 고맙습니다.”
상궁의 뒤를 따라 항아들이 종종걸음으로 태자비 궁을 나섰다. 둘만 남자 소소가 환하게 웃으며 정국을 바라봤다.
“어제 주신 약과를 채 다 먹지도 못하였는데, 여긴 또 어찌 오셨습니까?”
“태자전하께서 비가 되실 분을 워낙 궁금해 하셔서요. 어찌 훈련은 잘 하고 계신가 보러 왔습니다.”
장난스런 정국의 말에 소소는 처소 안으로 들어가며 푸스스 웃었다.
“거기 있는 손수건 좀 주십시오.”
함께 처소 안으로 들어오며 문을 닫은 정국이, 소소의 말에 협탁에 놓은 손수건을 집어 들었다. 꽃 자수가 수놓아진 노란색 손수건이었다.
“별감께선 하시는 일이 별로 없으신가 봅니다?”
“예?”
“제가 뵐 때마다 한가하신 것 같아서요.”
소소가 받아 든 수건으로 젖은 의복 부분을 닦았다. 그러면서 장난스레 던진 말에 정국은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다. 전장에서 삼일 밤낮을 자지 못하고, 매일 밤을 비릿한 피냄새 천지에서 검을 휘둘러야 했던 것을 순진한 그녀는 상상도 못할 것이었다. 자신이 태자인 사실도 모르는데 아무렴. 정국이 고개를 젖히고 하하 웃었다.
“지금은 상궁들이 모두 자리를 비워서, 여기 아까 내려놓았던 국화차가 있습니다. 좀 드시지요.”
“고맙습니다.”
다 식어빠진 차였지만 소소가 당당하게 건네는 통에 정국은 웃으며 잔을 받아들었다. 식으니 더 진해져 향이 제법 좋았다. 그렇게 좋은 향을 음미하며 차를 마시다 말곤, 정국이 사례가 들려 마른기침을 내뱉었다. 소소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젖은 당의를 벗었기 때문이었다. 정국이 놀라 기침 나는 입가를 틀어막았다. 물론 안에는 흰 적삼을 겹쳐 입었지만, 언뜻언뜻 살갗이 비치는 통에, 아니 애초에 적삼 저고리 길이 너무 짧아서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랐다. 보름 동안 소소를 봐왔지만 이런 짓도 할 줄은 몰랐다.
“괜찮으십니까?”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쉴 틈 없이 기침하는 정국에게 손을 건넸다. 저걸로 뭘 어쩌라는 건지 몰랐다. 정국이 소소의 손을 잡고 밀어냈다. 설마 자신이 태자임을 안 건가. 그래서 벌써부터 일부러 저러는 것이야? 저 또한 대승상의 간계인지 의심이 되었다. 여인의 미색을 무기로 태자를 유혹할만한 위인은 아닌 것 같았지만.
“…왜 갑자기 당의를 벗으시는 것입니까.”
“아, 젖어서요.”
정국이 겨우 기침을 삼키며 물었다. 당당하게 이유를 말하는 새빨간 입술에 정국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소소는 이상함을 하나도 감지하지 못했다. 사가에서 그녀가 마주치는 사내라곤 윤기와 대승상이 전부였다. 윤기의 철통같은 명령 속에서 소소의 별당에는 사내 하인 한명도 들어올 수 없었다. 그녀에겐 남녀의 유별이 뭔지, 남녀칠세부동석이 뭔지 알 겨를도 없었다. 정국이 답지 않게 안절부절했다. 진창을 구르며 전쟁만 하던 태자에게도 이런 상황은 상상도 한 적 없었기 때문이었다. 소소는 첫 만남과 다르게 당돌했다. 보름 사이 정국이 꽤나 편해진 모양이었다.
“평소에도 이러십니까?”
“무엇이요?”
정국이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소소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그를 보다 이내 아,하는 미미한 탄색을 내뱉었다.
“평소에도 이리 칠칠치 못한 성정은 아닙니다. 오늘은 물그릇을 올리고 걷느라!”
발화의 의도를 잘못 이해한 소소가 천진하게 말했다. 정국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헌데 공께선 어디 아프십니까?”
정국의 벌건 얼굴에 소소가 당장 이마라도 짚을 듯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정국이 기겁을 하며 자신이 앉은 의자를 뒤로 뺐다. 그의 얼굴에 당황함이 스쳤다.
“손대지 마십시오.”
“…….”
“제게서 떨어지세요.”
자신도 모르게 단호한 말이 떨어졌다. 제법 성이 난 듯한 정국의 얼굴에 소소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국은 여인과 옷자락을 스친 적도 없었다. 첫 만남부터 제 품에 안겨 울었던 이 눈앞의 여인을 제외하고는. 적삼 아래 보이는 여인의 나긋한 속살에 쉽게 스스로를 제어할 위인도 못된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그런 바람에 본의 아니게 차갑게 말이 나간 모양이었다. 소소의 풀 죽은 얼굴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정국은 제발 소소가 당의를 다시 입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을 거라면 자신이 빨리 이 자리를 뜨는 게 나을 거라 생각했다.
“허면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뭐가 잘못된 건지 눈치를 못하는 소소에게 전자를 기대하긴 어려울 것 같아, 정국은 후자를 택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는 정국에, 더 당황한 낯을 한 소소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런 정국의 옷자락을 잡았다. 그는 소소를 찾아오는 유일한 외부인이었다.
“…가,지 마세요!”
정국이 놀란 얼굴을 했다. 그를 잡은 소소도 덩달아 놀랐다.
“그러니까, 공이 가시면….”
“…….”
“제가 너무 심심합니다!”
옷차림과 너무 상극으로 말을 한다. 순진하게 같이 놀 친구라도 찾는 것처럼. 소소의 입장에선 매일 피곤한 훈련을 하는 와중에, 이렇게 정국과 이야기하고 차를 마시는 시간이 아주 소중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나온 본심이었다. 정국이 입술을 깨물었다. 아내가 될 여인이 제법 자극적인 면모가 있었다. 그래서 문득, 이 여인이 숨기고 있는 것이 정말 아이처럼 순수한 마음뿐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전장에서는 사람을 쉽게 믿으면 안 된다. 언제 제 뒷통수가 베일지 모르니까. 정국에겐 이 황궁에서의 생활이, 그리고 태자로서의 삶이 전장과 같았다. 위태롭고 매서워서 한 시도 긴장을 놓칠 수 없는. 그래서 자꾸만 저 말간 낯으로 제 마음에 낙인을 찍는 그녀가 문득 두려워졌다. 그녀는 태자비가 될 여인이기 이전에 대승상의 여식이었으니까. 정국의 얼굴이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소저는….”
“…….”
정국이 제 옷자락을 잡은 소소의 손을 쥐고, 제 얼굴까지 끌어당겼다. 소소가 멍청한 눈으로 정국을 멀뚱히 바라봤다. 정국이 소소의 손등에 가볍게 입 맞추었다. 촉 하는 소리와 함께 떨어진 입술이, 사내치곤 색정적으로 붉었다. 소소가 제 입술을 말아 올렸다. 그녀의 눈동자가 혼란스럽게 흔들렸다.
“제게 무얼 바라십니까.”
눈빛만으로 잡아 삼킬 듯 했다. 문득 뱃속이 간질거려서 소소가 정국의 눈을 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정국이 소소의 손등을 엄지로 부드럽게 쓸었다. 소소는 사내를 잘 모르는 게 분명했다. 이것만으로 아무 말도 못하고, 제 눈을 바라보지도 못했으니까. 이대로 손가락을 입안에 넣고 굴린다면 울음이라도 터뜨릴 기세였다. 일부러 순진한 척 하는 게 아니었다. 정국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녀도, 자신도 진심이 되는 것이 무서웠다. 정국이 소소의 손을 놓았다.
“소저는 조심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
“옷이든, 마음이든.”
그래서 이 충고는 진심이었다.
/ 황 후 열 전
보름 만에 부황과의 독대였다. 정국이 전쟁에서 돌아온 이후로, 태자비 될 여인이 황궁에 입궐한 이후로, 처음 있는 것이었다. 환궁한 당일 바로 문후를 여쭙고자 왔지만 부황은 정국을 만나주지 않았다. 부황으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매우 위태로운 상황에 있었다. 현황제가 살짝 정신이 나갔다는 소문이 도성 담벼락을 타고 세간에도 전해지던 차였다. 넉 달만에 만난 부황은 얼굴이 많이 상해있었다. 정국이 부황을 향해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고 목례했지만, 부황은 보는 척도 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는 어딘가 모르게 심기 불편한 기색이 내비쳤다.
“소자, 부황께 인사 올립니다.”
“…….”
정국의 인사에 고개를 이리저리 비틀던 부황이 마침내 용상에서 일어나 태자에게 걸어왔다. 가까워지는 부황의 그림자에 정국이 마른 침을 삼켰다. 부황이 정국의 앞에 섰다. 화려한 용포를 입었지만 잔뜩 쇠약하고, 나약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는 제 아들을 향해 무자비하게 손을 날렸다. 마찰음이 나고 정국의 고개가 돌아갔다. 보자마자 뺨을 때린 까닭이었다. 벌어진 정국의 입술이 덜덜 떨렸다. 금세 고개를 바로 돌렸다.
“네 놈이 정녕 이 집안을 망하게 하려고….”
“폐하.”
“오냐! 짐이 이 나라의 황제니라! 짐의 나라이고, 짐의 황궁이고, 짐의 옥쇄다. 헌데! 이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니야. 대승상의 것이지….”
부황은 미친 것처럼 소리쳤다. 정국의 눈이 혼란스럽게 흔들렸다. 의복자락 아래서 꽉 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태의에게 들었다. 태자가 대승상의 여식을 살렸다지?”
“…….”
“앓게 놔두지 그랬더냐, 열병에 앓아 어디 한 군데 망가질 때까지 그래도 뒀어야지.”
귓전에 떨어지는 부황의 말이 납득할 수 없을만큼 매정했다. 화궁전에서 쓰러진, 소소를 구한 것에 대한 질책이었다.
“화궁전에서 정신을 잃었다면, 그 틈을 타서 밖으로 밀어버리기라도 했어야지.”
“폐하….”
“죽여도 모자랄 판국에 살려?”
“…….”
“대승상이 대승상이 된 것에 모자라, 태자의 장인이 되었다. 이제 어찌할 것이냐? 너와 나는 이미…, 그 자의 손아귀에 잡힌 것과 다름없다.”
부황의 무기력한 목소리가 힘없이 흩어졌다. 정국은 당장 입을 열면 불충한 말이 새어나올 것 같아 피가 날 정도로 입 안 여린 살을 깨물었다. 난 부황과는 달라. 꼭두각시 황제 따윈 되지 않을 것이라고. 대승상의 손에 휘둘려 그 끔찍한 삶을 살진 않을 것이라고. 스스로 되뇌었다.
“마지막 기회였다. 대승상의 여식이 황후가 되는 것을 막을 마지막 기회. 헌데 태자, 네가 그 기회를 날렸구나.”
“폐하, 소자는….”
“입 닥쳐라! 이럴 거면 차라리 전쟁터에서 죽지 그랬느냐.”
부황은 나라 잃은 사람처럼 말했다. 그 말에 충격을 받은 정국이 눈을 들어 차라리 죽지 그랬느냐고 말하는 제 아비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부황의 그 눈이, 정말 차라리 죽었으면 하고 말하고 있었다. 태자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속함성이 대승상의 개인영지가 되었다. 변방의 성주들도 죄다 그의 아래로 들어가고 있지. 전쟁을 잘하는 태자 따위, 눈엣가시가 될 것이 뻔하다. 앞으로 끊임없이 널 시험하려 들 게다.”
“…….”
“국구자리까지 이미 얻어냈는데, 두려울 게 무에 있겠느냐. 태자.”
*국구:황제의 장인
대전회의에도 나오지 않는 황제, 상소에 옥쇄 하나 스스로 찍지 못하는 황제. 그는 제 아들 태자를 안타까운 눈길로 바라봤다.
“짐은 두렵구나. 대승상이 언제 나를 칠지 모른다는 사실이…, 짐은 못 견디게 두렵다.”
“…아바마마.”
“허니 잘 들어라.”
나약했다. 어릴 적부터 세상을 손 안에 쥐고 주무른다 생각했던 황제는 그저 죽음의 두려움을 이겨내지 못하는 나약한 사내에 불과했다. 그걸 제 눈으로 똑똑해 목도한 정국은 견딜 수 없는 충격에 휩싸였다. 심장에 누가 돌을 얹어 놓은 것처럼 답답했다. 대승상의 권력과 횡포를 알고는 있었지만, 겁에 질린 부황의 모습을 보자 그 위협이 피부에 스쳤다.
“너는 너 스스로를 지켜라. 그 어떤 위기가 와도 절대, 절대 쓰러져선 안 되느니라.”
“…….”
“짐에겐 너까지 지킬 힘이 없구나.”
부황은 그 말을 하면서 차갑게 돌아섰다. 황제의 그늘에서 내쳐진 태자는 고달팠다. 너는 스스로 지키라는 매정한 한 마디가 폐부를 날카롭게 스쳤다. 매번 전쟁에서 목숨을 걸고 온 힘을 다해 싸워도, 죽을 고비를 수십 번 넘기고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일어나도, 태자는 혼자였다. 태자의 노력 따위 부황도, 나라도 알아주지 않았다. 부황은 넓은 대전에 태자를 남겨두고 서둘러 대명전으로 도망쳤다.
그날 밤, 끊임없이 위기가 올 것이라는 부황의 말처럼 태자의 침소에 자객이 들었다. 신고식이었다. 황궁에 돌아왔다면, 제 세력이 얼마나 거대한지, 제 말 한마디면 태자또한 얼마나 쉽게 죽일 수 있는지 똑똑히 알리려는 대승상의 신고식. 원래 정국은 잠을 깊이 자는 편이 아니었다. 전장에선 이각쯤 쪽잠을 자는 순간에도 언제 적이 쳐들어올지 모르기에, 긴장을 놓쳐선 안 되었다. 어릴 적부터 전장에서 구른 정국에겐 습관처럼 베인 것이었다. 훈련된 자들의, 마치 공기를 타고 나는 듯한 작은 발소리가 들려왔다. 정국이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침상 옆에 놓인 검을 조용히 집어 들었다. 태자의 처소인 동궁은 수많은 익위사와 별감들이 그 밖을 지켰지만, 지금처럼 자객들이 아예 처소 내부로 들어왔을 때에는 그 누구도 태자를 지킬 수 없었다. 애초에 그걸 노린 것이었다. 온전히 혼자 남은 태자를. 호흡이 멎었다. 결이 다른 적막이 느껴졌다. 바로 문 밖에서 멈춰 때를 고르는 그들의 움직임이 그려졌다. 네 번 촛불이 흔들리는 사이, 적은 들어온다. 수는 대략 열명쯤 되는 것 같았다. 허나 이까지 오는 움직임을 보았을 때는 전문적으로 훈련된 살수들이었다. 게다가 어쩌면 열명이 다가 아닐지도 몰랐다.
한명이 문을 박차고 들어옴과 동시에, 정국이 침상에서 일어났다. 목의 위치를 노리고 어둠 속에서 휘두른 검을, 칼을 꺼내며 그 검 집으로 막아냈다. 적들은 정국을 포위하듯 둘러쌓고, 기합하나 없이 칼을 휘둘렀다. 공기를 가르는 얇은 칼날이 정국의 귓전에만 세게 느껴졌다. 어둠이 움직임을 읽기 어렵게 만들었다. 대충 소리로 날아드는 칼날을 쳐낸 정국이 다시금 제 팔을 겨냥하는 칼을 똑같이 칼로 스치며 재빠르게 몸을 숙였다.
“누가 보냈지?”
말을 할 겨를이 없는 것이 사실이었지만, 제 여식을 태자비로 들인 이상 대승상이 진정 제 목숨을 노리는 것은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경고에 불과하다. 분수에 맞지 않게 날뛰지 말라는 경고. 복면을 쓴 사내들은 대답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정국은 방어만 하느라 공격할 틈이 없었다. 그 틈을 자꾸만 비집고서, 복부로 칼이 날아들었다. 막는다고 막았는데, 어깨로 오는 또 다른 검을 막느라 힘이 빠졌다. 복부를 스치는 매서운 칼날에 정국이 낮게 신음을 삼켰다. 태자의 푸른 야장의를 새빨간 피가 적셨다. 정국이 작게 비틀거리며 베인 부위를 손으로 막았다. 이를 악 물었다. 고통을 느낄 시간도 없이 쉬지 않고 공격하는 탓에, 정국은 가장 근처의 자객들을 박차고 옆으로 움직였다. 이처럼 수많은 적을 상대하는 일은 정국에게 빈번했지만, 이 칠흑 같은 어둠은 그를 더 불리하게 만들었다. 정국이 처소 안 창문을 열고 몸을 날렸다. 그의 뒤를 따라 소리 없이 자객들이 다시 따라붙었다. 추격전은 처소 밖까지 이어졌다. 그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한, 아주 적막한 황궁 안에서의 일이었다.
“누가 보냈는지 물었다.”
태자의 질문에 답 없이 반복되는 일격에 정국은 등을 내어주고 말았다. 점점 무너지기 시작했다. 동궁 앞 경회루에 숨어있는 셋이 더 모습을 드러냈다. 정국은 기가 막혀서 이 막막한 상황에도 헛웃음이 나왔다. 등을 가른 상처가 호흡을 천천히 갉아먹는 것 같았다. 딱 죽기직전까지, 정확히 호흡이 끊어지기 전까지 죽여 놓으라는 대승상의 명에 따라, 그들은 계속해서 달려들었다. 상처를 꽤나 입어 힘을 쓰지 못했지만, 혼자서 동시에 두 사람의 공격을 막아낸 정국이 한 번 몸을 날려 그들을 박찼다. 멀리 뒹구는 자들은 다시 일어나 달려들었다. 미칠 노릇이었다. 그 사이 검이 팔뚝을 스치고, 다리를 스쳤다. 이대로면 위험했다. 그러나 또 어디에, 얼마나 많은 수의 자객들이 숨어있을지 몰랐다. 태자의 소리 한 번에 온 곳에서 별감과 익위사가 달려올 수도 있었지만, 정국은 그럴 수 없었다. 지금 태자에겐 전쟁영웅이라는 칭호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한 자락 남은 민심과, 황권의 일말이 모다 거기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감히 동궁에 자객이 들었다는 사실보다, 태자가 자객에게 당했다는 사실이 더 치명적이었다. 무력한 태자는 쓸모가 없다. 그래서 그는 대승상의 뜻대로 굴어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숨을 토하자 입에서 피가 나왔다. 장기가 뒤틀리는 듯한 고통이 마치 불 난 마냥 온 몸에 퍼져나갔다. 정국이 고통스럽게 인상을 썼다. 더 이상 싸우기가 버거웠다. 그렇다고 마땅히 몸을 숨길 곳도 없었다. 그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자객들도 절대 따라 들어올 수 없는 곳. 이 황궁에는 그런 곳이 없다.
“…….”
아, 단 한 곳만 빼고. 태자비의 궁. 대승상의 여식이 있는 곳이자, 태자비가 될 훈련을 하느라 타인과의 대면을 철저히 금지하는 곳. 소소의 궁이라면 저들도 절대 따라오지 못할 곳이었다. 말단 자객이라 하나 대승상의 여식이 태자비 궁에 있다는 사실을 모를만큼 천지도 아닐 테니. 그까지 생각이 닿은 정국은 마지막으로 검을 쳐내고 그 곳을 향해 달렸다. 부상으로 뒤덮인 몸을 이끌고 가느라 힘이 빠져왔지만, 오기와 끈기만으로 태자비 궁까지 당도했다. 조용히 그리고 신속하게 정국의 뒤를 따르던 자객들도, 그가 가는 곳이 어디인지 짐작한 것인지 끝무렵엔 추격을 거의 포기했다. 태자비의 궁은 철저히 금인의 구역답게 그 앞을 상궁 둘과 환관 셋이 지키고 있었다. 정국은 담을 타고 그 뒤편으로 잠입했다.
“하아….”
궁정 안으로 들어오자 힘이 빠졌다. 담벼락에 기대 가파오는 숨을 몰아쉬었다. 칼날이 스친 상처들이 고통스러웠다. 특히 꽤나 깊이 베인 복부는 아직도 울컥이며 피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정국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눈앞이 희미해지려고 했다. 반쯤 정신이 혼미했다. 당장 치료하지 않으면 위험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이 꼴로 태의를 찾아갈 수도 없었다. 그러면 이 황궁에 바로 소문이 퍼질 것이었다.
“게 누구 있느냐?”
순간 처소 앞에서 환관의 얇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등불을 든 그림자가 가까워지는 게 보였다.
“젠장.”
여기서 들켜도 온 사방에 소문이 퍼질 것이 자명했다. 아니 애초에 성역처럼 다뤄지는 태자비의 궁 안에 온 몸에 상처를 입은 사내의 등장이라니. 더더욱 논란이 될 만했다. 정국이 서둘러 아픈 몸을 이끌고 처소의 뒷문을 조용히 열고 들어갔다. 최대한 소리 내지 않고 문을 닫았다. 다시 그 앞에서 쓰러지듯 앉았다. 그 사이 뒤편까지 온 환관이 등불을 비추고 몇 번 둘러보다가, 다시 돌아가는 게 그림자로 보였다. 그제서야 정국은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이미 그는 처소 안에 들어와 있었다.
“…누구 십니까.”
젠장. 젠장. 정국이 미간을 조이며 고통을 짓누르다, 잔뜩 곤란하다는 낯빛이 되었다. 숨을 고를 시간도 없었다. 안에서 소소의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정말 작은 인기척이었을 텐데, 소소가 잠에서 깨어난 모양이었다. 해명이든 협박이든 해야 하는데, 정국은 힘이 빠져 그조차 할 수 없었다. 이를 다시 악 물었다. 고통어린 신음이 새어나올 것 같아서였다. 금방 침상에서 일어나 정국이 있는 문 쪽으로 다가온 소소가 옆에 놓인 초를 그에게 가져다댔다. 희미한 불빛으로, 소소는 이 깊은 밤 제 처소에 들어온 의문의 사내가 정국임을 알았다. 잔뜩 긴장하여 목이 뻣뻣해졌던 소소는 그제야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숨을 참았다. 희미하게 보인 정국의 얼굴과 몸은 상처 투성이었다.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듯 했다.
“별감께서 어찌….”
“쉿.”
잔뜩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소소에 정국이 겨우 힘을 짜내서 조용하라고 말했다. 소소가 촛불을 옆에 두고, 무릎을 굽히고 앉아 정국을 살폈다. 오늘 낮에만 해도 정국의 의문스러운 말에 혼란스러워하던 소소였다. 그러나 정국이 다쳐 온 지금, 낮의 일은 마치 없던 일이라도 된 것처럼 걱정만 했다. 조심스럽게 정국의 어깨를 잡는 손길에 정국의 입에서는 낮은 신음이 튀어나왔다. 반사적으로 놀란 소소가 손을 급하게 뗐다.
“어떡해. 상처투성이입니다. 이걸 어찌….”
소소가 울 것처럼 인상을 찡그렸다. 제가 다 아프다는 얼굴을 했다. 정국의 입에서 힘없이 바람 빠진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대 아비가 보낸 자객들에게 베인 상처인데, 그대는 그걸 보고 우는 구나. 마음이 이상했다. 아, 정신이 하나도 없다. 눈앞의 소소가 흐릿하게 움직였다. 정신을 놓을 듯 하는 정국에 소소가 어쩔 줄 몰라 그의 의복을 벗겼다. 피가 범벅이 된 야장의는 상황을 더 심각하게 보이게 했다. 달달 떨리는 손으로 옷의 매듭을 풀다 말고, 소소가 급히 일어났다. 그리고는 어디로 황급히 달려갔다. 정국은 아무런 말도 행동도 없이 그런 뒷모습을 바라봤다. 뭘 하려해도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몸이 아팠기 때문이었다. 잠시 뒤, 소소가 흰 천과 물이 담긴 대야를 들고 왔다. 마치 자신이 다친 것처럼 당장 안절부절하는 소소가 눈물을 떨구며 그 천을 물로 적셨다. 정국이 힘없이 손을 들어서 그런 소소의 손을 쥐었다.
“…진정하십시오.”
목소리가 쩍쩍 갈라졌다. 소소는 더 아픈 얼굴을 하며 더 급하게 천을 적시고, 다시 다가와 의복의 매듭을 풀었다. 옷을 걷어내자 상처투성이의 탄탄한 상체가 드러났다. 소소가 숨을 참았다. 그의 상처를 보는데,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어떤 삶을 살기에,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이렇게 많이 다쳤지. 마음이 아팠다. 그의 가슴팍이 거친 호흡을 따라 오르락 내리락하고 있었다. 정국의 풀린 눈이 흰 천의 물기를 짜내고, 상처를 닦는 소소의 모습을 온전히 보았다.
“대체 이런 상처는, 흐으, 어디서 달고 오신 것입니까?”
엉엉 울면서 말하는데 발음이 죄다 뭉게지는 게 귀여웠다. 그대 아비가 이리 만들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데. 이 상황에서, 정국은 이런 실없는 생각이 드는 자신이 놀라웠다. 아직 덜 다친 게 틀림없었다. 소소는 천으로 피를 닦아내고, 다시 물에 씻는 것을 정신없이 반복했다. 피를 닦아내자 더 선명해진 상처가 수없이 난자된 정국의 몸을 덮고 있었다.
“의원을, 의원을 불러야 할 것 같습니다. 의원을….”
그걸 보고 심각성을 다시 한 번 상기한 소소가 의원을 부르겠다며 일어나려 했다. 정국이 그녀의 손을 잡아챘다. 소소가 그를 보자 정국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대체 어쩌겠다고. 소소가 절망스런 얼굴을 했다.
“의원은, 안 됩니다. 그냥 하루만 이렇게 쉬면….”
“상처가 이렇게 깊은데 어찌 그냥 쉰다고 해결되겠습니까!!”
“아, 제발 조용히….”
소소가 호통을 치는 바람에 황급히 그녀의 뒷통수를 잡고 저를 보게 한 정국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조용히, 라고 말하는 그는 매우 힘겨워 보였다. 때문에 소소는 의원을 외치던 입을 굳게 다물 수밖에 없었다. 뭔가, 뭔가 사정이 있는 것이겠지. 정국을 이해해 보려고 애쓰면서 소소가 입술을 꾹 물었다.
“갑자기 제게 오셔서, 대체 뭘 어떡하라고.”
소소가 흐느끼며 말했다. 저를 살짝 원망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남은 피를 닦고, 좀 늘어날 것 같아 보이는 헝겊으로는 상처부위를 천천히 동여맸다. 지혈이라도 하고자 함이었다. 상처에 압박이 오자 찌르는 듯한 고통이 정국이 고개를 젖히며 신음했다. 소소는 아파하는 정국에 어쩔 줄 몰랐지만, 그래도 환부를 동여매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복부에 천을 휘감을 때 소소가 그의 허리를 안듯이 팔을 감고, 정국의 어깨위로 고개를 올렸다. 맞닿은 몸이 꽤 차가웠다. 체온이 낮은 것 같았다. 그래서 소소는 부러 더 길게 그를 안고 있었다. 자신의 체온을 나눠주기라도 하듯이. 정국의 큰 몸을 감싸는 여린 몸뚱어리가 제법 강단 있게 품을 파고들었다. 정국은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머리칼에 입을 맞추었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그녀의 품이 꽤나 따뜻했기 때문이었다. 소소가 상처를 다 싸매고 의복을 정리했다. 그때는 정국의 눈이 모두 감겨있었다. 눈 뜰 힘도 없었다. 정국은 간신히 의식만 붙들고 있었다.
“일단 다 되긴 하였는데….”
“고맙,습니다.”
소소가 정국의 이마를 살짝 짚어보았다. 아까 안았을 때 느낀 것처럼 차가웠다. 그의 얼굴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상처 때문에 체온이 급히 내려간 것 같았는데, 이대로면 더 위험하다는 게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이를 어찌하지. 의원을 부르겠다는 것도 막는 것으로 봐선 외부엔 들켜서는 안 되는 무슨 일이, 정국에게 있음이 짐작 갔다. 누구에게도 도움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이 절망스러웠다. 잠시 생각하던 소소가 이내 정국의 팔을 제 목에 감고, 그를 부축했다.
“조금만 참으십시오.”
소소가 자신보다 훨씬 큰 정국을 힘겹게 부축해서 침상에 뉘였다. 일단 상체만 눕혔는데, 환부가 쓸린 듯 미간을 조이던 정국은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다리까지 전부 누인 후에, 그를 침상의 안쪽으로까지 밀었다. 그 후에, 그 옆에 소소가 올라갔다. 침상이 꽤나 넓었기에 두 사람이 누워도 그리 좁지 않았다. 소소는 그대로 얼음장 같은 정국의 몸을 끌어안았다. 살짝 벌어진 정국의 입에선 뜨거운 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소소가 제 남은 온기는 모두 나눠주듯이 정국의 품을 깊이 안았다. 상처뿐인 사내의 몸이 낯선 온기에 본능적으로 소소를 감싸듯 안았다. 정수리에 닿는 정국의 턱이 느껴졌다. 소소는 문득 심란해졌다. 남편이 될 태자의 얼굴은 한 번도 보지 못하였는데, 혼인도 전에 이리 외간 사내와 끌어안고 있는 게 참으로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단 이렇게 피투성이가 되어서 찾아온 정국을 그냥 둘 수 없었다. 안쓰러웠다. 무슨 사정인지는 몰랐지만, 그냥 모든 걸 체념한 듯한 그 위험한 눈이, 성한 곳 하나 없는 그의 몸이, 마음 아팠다. 체온을 높이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그냥 안아주고 싶었다. 그런 소소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 정국은 그녀를 같이 끌어안았다. 심장이 재가 되어 타올랐다. 왜인지 이대로 눈 감고 죽어도 억울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날은 정말, 이상한 밤이었다.
다음 날은 창호지를 뚫고 들어오는 햇빛에 정국이 먼저 눈을 떴다. 의식이 들자마자 온 몸을 쑤시듯 고통이 찾아들었다. 덕분이 얼굴을 구긴 정국이 잠시 뒤 제 상황을 자각했다. 어젯밤 자객이 들었고, 그들의 칼에 찔려 부상을 입었다. 몸을 이끌고 태자비의 궁정에 들어온 이후엔…, 자신을 걱정하며 상처를 닦아주던 소소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시선을 내려 바라보면, 제 품에 곤히 안긴 소소의 얼굴이 보였다.
“하….”
말갛다는 말이 어울리는 얼굴이었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것도 같았다. 아직 깨어나지 않은 그녀는 아무런 움직임 없이 정말 곤히 자고 있었다. 아래로 뻗은 긴 속눈썹이 예뻤다. 완전히 다물리지 않고 살짝 열려서 작은 숨을 뱉어내는 입술이 못 견디게 사랑스러웠다. 정국이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여 입 맞췄다. 별안간의 감촉에 의식이 들 듯 하던 소소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아 진짜. 찡그리는 그 얼굴에 정국이 참지 못하고 그런 그녀를 더 품 안 깊이 안았다. 상처는 여전히 아팠지만, 살 것 같았다. 제 상처를 보고 눈물 흘리던 어젯밤 소소의 얼굴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희한했다. 무정한 대승상에게서 난 여식답지 않게 정이 너무 많았다.
“골치 아프군.”
울 때 말고 웃을 때도 예뻤다. 태자비 교육을 받다가도 자신을 보면 반색하고 천진하게 웃는 게 기분 좋았다. 그래서 부러 이 태자비 궁을 더 많이 들렸는지도 모른다. 정국은 애써 모른 척하고 싶었지만 이미 그러길 실패했다.
“깨셨습니까?….”
품 안에서 바르작거리는 움직임이 느껴지더니, 소소가 채 뜨이지 않은 눈을 부비며 품에서 고개를 떼곤 물었다. 정국이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 봤다.
“상처는 아프시지 않습니까?”
깨자마자 상처타령부터 했다. 이 여인을 어떻게 해야할까. 정국은 정말이지, 알 수가 없었다.
“아프시지요? 그러게 의원을 부르자니까 왜 되도 않는 고집을 부려서….”
“…….”
“피가 멈추긴 했습니까? 어디.”
소소가 거침없이 정국의 의복을 들췄다. 매듭을 풀고 어깨를 걷는 작은 손은 무슨 망설임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잔뜩 당황한 정국이 그녀의 손길을 저지하기도 전에, 겁도 없이 소소는 정국의 몸에 손도장을 찍으며 상처를 살폈다. 허. 기가 막혔다.
“감아놓은 천에도 여전히 피가 많습니다. 정말.”
상처가 아니라 그녀의 손이 닿는 곳이 화끈거렸다. 정국이 제 몸을 짚은 그녀의 손을 쥐고 올려서 입 맞췄다. 어제 낮에 그런 것처럼, 반복되는 정국의 행동에 질겁한 소소가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왜 자꾸 손을….”
“날 왜 살렸지?”
부황께선 태자인 내가, 대승상의 여식인 그대를 살렸다고 내 뺨을 치셨다. 난 그대를 살린 것을 후회했는데, 그대는 왜 나를 살린 것이지? 덧붙이지 못한 말들이 입안을 씁쓸하게 맴돌았다. 정국의 질문에 잠시 엄한 눈을 하던 소소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걸 질문이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그럼?”
소소가 야무지게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래도 정국의 질문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공께서 다쳐서 제게 왔는데, 어찌 살리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내가 그대에게 무엇인데?”
성이 난 채 대답하는 소소에, 흥미로운 표정을 한 정국이 짐짓 장난스럽게 되물었다. 소소의 입술이 잠시 일자가 되어 실룩이다 떨어졌다.
“공께선 제 은인이시고, 동무이시고, 또….”
“또?”
처음엔 당돌하게 얘기하던 입술이 망설임에 잠시 떨어질 줄 몰랐다.
“사내이시니까….”
단지 성별의 사내를 말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것을 뜻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정국은 그로도 충분했다. 이 나라의 태자도 아니고, 무자비한 붉은 투구도 아닌 한낱 별감에 불과한 자신을 진심으로 대했다. 정국은 목이 타는 것 같았다. 갈증이 일었다.
“허면,”
“…….”
“물어도 됩니까?”
무엇을? 소소가 의아해 물을 겨를도 없었다. 정국이 소소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살짝 입맞추는 게 전부였던 입술이 손가락을 느릿하게 깨물고, 핥았다. 질겁을 한 소소가 당황해서 커진 눈으로 쳐다볼 곳을 찾지 못하고 혼동했다. 허나 정국은 멈추지 않고 소소의 입술을 깨물었다. 아프지 않았지만 너무 놀라서 입술을 벌린 틈을 타, 혀가 비집고 들어왔다. 입술을 쓸고, 입천장을 두드리는 야릇한 움직임에 소소가 당황해서 입술을 움직였다. 정국이 소소의 뒷통수를 붙들고 뒤로 젖혔다. 더 깊게 들어와 헤집는 혀가 마치 제 심장을 헤집는 것 같아서 소소가 급하게 작은 손으로 정국의 얼굴을 감쌌다. 온 몸이 화끈거렸다
안녕하세요. 원래처럼 여러 편 묶어서 올리는 것보다 이렇게 저속한 분량+별 진전(재미)없는 내용이지만 끊어서 자주 올리는 게 그나마 빠를 것 같아 먼저 업로드 합니다! 흑 지난번에 근 10화 이내로 달달한 부분은 별로 없을 거라 말씀드렸는데, 오늘은 쩜 달달한 것두 같네욥.. 근데 진짜 다음부턴 없어요.. 사약길 파티입니다.. 또 태형이는 어디 있냐 물으신다면 오늘은 죄다 과거 장면이기 때문에.. 태형이는 다음화부터 나옵니다 다크 태형으로 다시 만나요
그리고 태자 시절 정국이는 이성에 대해 무지하고, 여인을 별로 만나본 적도 없는 그런 순진한 캐릭터는 맞는데, 오늘 이렇게 알 거 다 아는 저돌적인 모습으로 나온 건 정국이의 천성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별 경험은 없어도 본능적으로 여자 홀리는 (전에 황제는 쫌 치명적이라 적으로 두기 위험한 사내 어쩌구 이런 서술 한 번 있었는데 약간 고런 느낌으로 봐주시면 됩니다) 그냥 존재만으로, 아무 생각 없이 하는 짓 하나하나가 좀 치명적인..그런 느낌.. (물론 전정국이기에 가능한 것입니다^_^) 여러분 그럼 또 조만간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