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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1419/최주환] 자격지심





이동철, 그는 가끔 자신의 삶을 책으로 쓰면 못해도 서너 권은 족히 나올 거라며 껄껄 웃고는 했다. 누구나 하는 뻔한 소리지만 주변 사람들은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동철은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혼자 서울에 올라왔다. 요즘이면 피씨방을 다닐 나이에, 그는 몸 쓰는 일이든 머리 쓰는 일이든 가리지 않고 돈을 벌었고, 그렇게 번 돈으로 닥치는 대로 땅을 샀다. 결국 이제는 서울에 사는 사람 중에서 동철의 땅을 안 밟아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소문을 가진 부동산 재벌이 됐다. 

동철은 넘치는 재력으로 사업이나 정치에 손을 뻗는 대신, '햇님재단'라는 이름으로 보육원을 후원하고 노숙인을 위한 무료급식소를 설치했다. 언론은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며 떠들었으나, 사실 그것은 동철 개인의 속죄에 가까웠다. 돈복을 타고난 대신 자식복은 없었던 걸까? 동철의 외동딸은 혼전임신으로 속 썩이며 어렵게 결혼했고, 겨우 떠난 신혼여행에서 교통사고로 제 남편과 함께 세상을 떠났다. 동철에게 남은 것은 딸아이 뱃속에 있던 손녀뿐이었다. 

그 손녀가 바로 김여주였다. 햇님, 은 여주의 태명이었다. 결혼을 반대하느라 뱃속에 있을 때는 한 번도 불러주지 못했던 이름. 동철은 딸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것을 후회했다. 딸과 사위에게 못 다준 그의 사랑은 모두 김여주의 차지였다. 김여주는 하고 싶은 건 뭐든지 하면서 무럭무럭 자랐다. 엄마를 닮은 여주는 사람을 편견 없이 사랑했고, 동철은 그 사랑을 아낌없이 후원했다. 

여주가 보육원 봉사활동을 다녀온 후, 햇님재단은 보육원에 정기적으로 기부금을 내기 시작했다. 여주가 노숙자를 다룬 다큐를 보고 눈물짓자, 햇님재단은 전국에 급식소를 설치했다. 김여주의 세상은 김여주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물론 여주가 가진 것이 동철의 재력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여주는 당돌하지만 예의바르고, 상냥하지만 단호한 사람이었다. 김여주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여주는 스스로도 그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 소녀였다.





반면, 최주환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도, 사랑해줄 사람도 없다고 믿는 소년이었다. 누구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으나, 스스로 그렇게 믿었다. 주환은 햇님재단이 후원하는 보육원에서 자랐다. 최주환과 동갑이라는 그 댁 손녀가, 봉사를 다녀간 후로 어마무시한 기부금을 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동규는 정말 감사하고- 또 조금은 재수없다고 생각했다. 자신과 같은 해에 태어났다는 그 댁 손녀와 자신의 삶은 대체 어디서부터 나뉜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금세 잊었으나 어쨌든 처음 들은 순간에는 그러했다. 
최주환은 부모의 얼굴을 기억조차 하지 못했다. 눈물나게 외로운 밤이면 괜찮은 시설에서 좋은 원장님께 자랐으니 운이 좋았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하지만 시설에서도 열 일곱이 되면 퇴거해야하는 상황이었다. 운동에 재능이 있었으나 욕심 낼 수 없었다. 운동은커녕 고등학교도 입학하지 못할 처지였다. 

그는 처지를 비관할 바에는 차라리 눈을 감고 먹고 살 길을 생각했다. 퇴거할 때 주는 지원금으로 고시원 방을 구하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그래도 몸은 건강해서 다행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잠이 왔다. 잠이라는 건, 가난한 자에게도 찾아오니 얼마나 공평한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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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원장이 최주환을 불렀다. 실례합니다, 하고 조심히 들어간 원장실에는 종종 먼발치에서 얼굴을 봤던 이동철과 김여주가 앉아 있었다. 최주환은 김여주의 얼굴을 바라봤다. 세상이 고요해졌다. 안녕, 나는 여주야. 김여주. 김여주의 인사에, 최주환은 자기도 모르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어쩐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뭘 그렇게 경직돼있어, 앉게. 이동철이 말했다. 

저절로 따르게 되는 목소리였다. 그 후로 이동철이 꺼낸 이야기는 최주환으로서는 감히 상상도 못한 것들이었다. 이동철은 최주환을 후원하고 싶다고 했다. 후원의 내용은 간단했다. 첫째, 이동철의 집 별채에 들어와 살면서, 아침과 저녁은 꼭 함께 식사할 것. 둘째, 한국고등학교에 야구 특기생으로 입학할 것. 셋째, 아르바이트 대신 집안일을 돕고 용돈을 받아서 생활할 것.

지나칠 정도로 최주환에게 유리한 조건이었다. 주거도, 학교도, 생활비도 모두 한 번에 해결됐다. 심지어 야구도 계속 할 수 있었다. 최주환은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믿을 수가 없었다. 싫은가, 하는 이동철의 물음에 고개를 젓자, 원장은 절차는 어른들이 밟을 테니 잠시 나가 있으라고 친절히 말했다. 저도 같이 나가도 돼요? 김여주가 물었다. 언뜻 허락을 구하는 것 같았으나, 통보에 가까운 말이었다. 김여주는 최주환보다도 빨리 원장실을 박차고 나갔다. 김여주와 최주환은 건물 주변을 나란하게 걸었다. 최주환은 자기도 모르게 걸음을 늦춰 김여주보다 약간 뒤에서 걸었다. 

김여주와 최주환 사이에 '감히'라는 두 글자가 서있는 것 같았다. 김여주가 갑자기 최주환에게로 몸을 돌렸다. 최주환이 뒷걸음질을 치자, 김여주가 작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도 니가 다니게 될 학교에 다녀. 아니, 아직 다니는 건 아니지. 입학은 안했으니까. 어쨌든 다닐 거야, 삼월부터. 잘 부탁할게. 재잘대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최주환은 자신이 과거에 했던 생각을 반성했다. 누가 김여주를 재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이렇게 환하게, 사랑스럽게 웃는 아이를. 최주환이 대답을 하지 않자, 김여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 너 공 되게 잘 치더라!

그 순간, 최주환은 자신의 삶에 나타난 갑작스러운 행운이 어디에서 기인되었는지 바로 알았다. 네가 그렇게 한 거야? 최주환이 물었다. 내가 뭘 했는데? 여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야구, 학교, 집. 내 고민을 전부 해결한 게 너야? 최주환이 보다 분명하게 물었다. 그렇다고 말하면 니 기분이 상할까? 김여주가 슬쩍 최주환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최주환의 무응답에 김여주가 허둥지둥 말을 잇기 시작했다. 나는 그냥 ‘옆 학교에 야구 잘하는 애가 있어요’ 그랬거든. 진짜야, 진짜로 그 말만 했어. 그런데 할아버지가 너에 대해 알아보시더니... 김여주의 커다란 눈동자가 열심히 굴러갔다. 최주환은 조금 전 여주에게 인사하던 때처럼 허리를 굽혔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서 그래. 김여주는 당황하며 말렸지만, 최주환은 한참동안 굽힌 허리를 펴지 않았다.





시설에서 집에 오는 내내, 김여주는 자신에게 허리를 굽히고 고맙다고 말하던 최주환의 모습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사실 최주환이 후원을 받게 된 건 전적으로 김여주의 뜻이었다. 처음에는 이렇게 될 줄 몰랐어요-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보통 그렇게 말하던데, 김여주는 배트를 휘두르는 최주환을 보자마자 자신의 첫사랑이 시작되었음을 알아차렸다. 그 날 저녁, 김여주는 이동철에게 최주환의 이야기를 흘렸다. 후원이 결정되기까지는 채 이틀이 걸리지 않았다. 

들뜨지 말았어야 했는데. 할아버지를 따라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최소한 내가 그 아이의 이야기를 했다는 건 비밀로 했어야 했는데. 후회가 이어졌다. 고개를 숙인 최주환의 뒤통수가 자존심이 상했다는 것조차 숨겨야 하는 소년의 비참함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똑똑한 김여주가 그 비참함이 가리키는 바를 모를 리가 없었다. 최주환 안에서 김여주의 포지션이 정해진 것이다. 후원자의 하나뿐인 손녀딸. 당연하게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숙여야 하는 상대. 

이제 최주환은 김여주를 친구로도 여자로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거기까지 정리하자 괜히 최주환이 원망스러웠다. 경솔한 소리를 한 건 전부 그 눈빛 탓이었다. 인사를 건넸을 때 마주한 최주환의 흔들리는 눈빛이, 마치 첫눈에 네게 반했다고 고백하는 것 같아서. 울렁이는 가슴을 단속하느라, 흘러나오는 말들을 단속할 정신은 남아있지가 않았다. 시작부터 완전히 망했네. 김여주가 창문을 내리며 중얼거렸다.





김여주가 떠난 후, 최주환은 원장에게 이런저런 설명을 들었다. 졸업식 날 그 집에 들어가기로 했다고, 참 감사한 분이라는 말도 덧붙였고, 우리 주환이가 착하게 살아서 좋은 일이 생겼나보다며 어깨도 토닥이셨다. 그날 밤, 최주환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답답함이 가슴을 눌렀다. 야구를 원하는 만큼 할 수 있고, 머물 곳을 고민할 필요가 없는데도, 최주환은 자꾸만 화가 났다. 머릿속에서 김여주의 얼굴이 사라지지 않았다. 김여주는 잘못한 것이 없었다. 그런데 그 애가 가슴 시리게 미운 이유를 최주환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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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와 진짜 좋아요...bbb
2년 전
독자2
와 온이 글이라니ㅜㅜ 감동 다음화도 기대할게요❤
2년 전
독자3
무슨 문학 작품같네요 ㅠㅠㅠㅜㅠㅠㅠㅠㅠ 작가님 다음 편도 있는거죠?? ㅠㅠㅜㅠㅠ
2년 전
독자4
헐........... 대박...........
2년 전
비회원39.149
그런데 그 애가 가슴 시리게 미운 이유를 최주환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드르륵 탁
그런데 그 애가 가슴 시리게 미운 이유를 최주환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드르륵 탁
그런데 그 애가 가슴 시리게 미운 이유를 최주환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드르륵 탁

2년 전
독자5
ㅠㅜㅠㅜㅠㅜㅠㅠㅠ 너무 좋아요
2년 전
독자6
이제 고등학교 입학식부터 시작되는거죠? 이렇게 가시면 안됩니다...ㅠㅠㅠ
2년 전
독자7
처음 보는 분인데 글이랑 잘 어울리네요 ㅠㅠㅠㅠ 다음편... 꼭....
2년 전
독자8
헐 대박 온이 글이라니!!!! 외치면서 들어왓는데 문체대박..... 진짜 문학 작품같아요!!!!! 다음 글 너무 기대됩ㄴㅣ다 작가님 꼭 써주실거죠?!??♥
2년 전
비회원46.89
다음 이야기 궁금해요ㅠㅠ
2년 전
독자9
안녕하세요 작가님 사실 전 이분을 이 글에서
처음 보는데 필력에 빠져서 정말 잘봤습니다!!
앞으로도 기대할게요

2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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