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민규씨. 디렉터님 혹시 형 있어?"
아뇨. 외동으로 아는데.. 왜요?
"아니 나 방금 디렉터님이랑 되게 닮은 사람 봤거든."
와 소오름. 세상에 도플갱어끼리 마주치면 죽는다는데. 왠지 이지훈 도플갱어는 모이면 우리가 죽을 것 같네여.
"오, 방금 민규씨 그 말 굉장히 신빙성 있었어. 소름돋았잖아."
#6.
아 여기는 뭐 이렇게 복잡해.
사원증이 없어 입구 앞을 한참 서성이던 순영은 멀리 순한 인상의 한 남자가 나오는 것을 붙잡았다.
저기요.
네?
혹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이지훈씨 아세요?
하 참 모르고 싶은데, 불행히도 아는 사이네요. 왜요?
순영은 속으로 '여기 인간들은 참 사이코가 많네' 라고 생각했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제가 전원우 친구거든요. 그, 일러스트레이터요.
아... 저 근데 커피 좀 사면서 얘기 나눠도 될까요? 심부름 가던 길이라.
#7.
순영에게 모든 자초지종을 들은 민규는 인상을 찡그리며 한숨을 쉬었다.
예????
아... 이 형이 또 깽판을. 죄송해요. 제가 대신 사과할게요.
...... 근데, 정말 죄송하지만. 그 얘기는 직접 전하셔야 할 것 같은데..
네? 제가요? 왜요?
아 그게, 일단 제가 말씀드리면.. 첫째로 안 믿구요
한 번만 살려주세요.
아까 회의 시간 때, 말도 못 꺼냈어요.
특히 일, 시간 이런 쪽에는 융통성이 없는 사람이라.
그나마 직접 상황 설명해주시면, 아주 조금은 이해를 해주실까.
아... 네. 뭐...
원우 때문에 곤란해 지신거니 어쩔 수 없죠.
순영은 귀찮은 일에 휘말려 버렸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방법도 없었다. 그의 전적과 민규씨의 표정으로 봤을 때, 제가 안 가면 원우한테든 이분한테든 뭔 사단이 날 것 같았으니까.
커피를 사들고 사무실로 올라가는 중에도 민규씨는 계속 미안해 했다.
이렇게 귀찮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사실 요즘 저희가 제일 바쁠 때거든요. 완전 죽어나가요. (똑똑) 그래서 예민해도 좀 이해해...
나가.
형 커피 사왔는데...
안 먹어.
그 일러스트레이터 친구 분 오셨...
쾅.
하하...하.... 어.... 이게... 지금....
아무말 못하고 내쫓겨난 민규는 굉장히 미안한 표정으로 순영을 바라봤다.
순영도 얼떨떨한 눈빛으로 민규를 바라봤다.
유리벽 사이로 보이는 그는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는 듯해 보였다.
귀에 전화기를 댄 채, 두 손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순영이 보기에도 지훈이 굉장히 바빠보였던 탓이라 민규에게 뭐라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민규씨. 뭐해! 커피 사왔어? 빨리 와. 일출보면서 퇴근하고 싶어?"
진짜 죄송합니다!
슬슬 옆걸음을 치던 민규는, 한 직원의 부름에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휙, 불투명한 통유리의 방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순영은 나보고 뭘 어쩌라고.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하나같이 바빠보이는 모습에 욕은 못하고 짜증은 나고,
신년 액땜을 제대로 하고 있는 건가....
순영은 멍하니 민규와 다른 직원들이 한데에 집중해서 일하는 것, 분주히 움직이는 것을 보다가
지금은 말 걸 타이밍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는.
그냥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겠다는 마음으로 뒤돌아 섰다.
쿵.
뒤돌아 서자마자 순영은, 자신의 어깨에 누군가의 머리가 부딪혔다는 것을 알기 무섭게 눈앞에 휘날리는 종이뭉치를 볼 수 있었다.
휘날리던 종이뭉치가 가라앉자 눈앞에는 자신의 어깨정도에나 겨우 닿는 작은 몸에 하얗고 뽀얀 얼굴의 엄청난 동안 외모의 남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아.... 후...."
그는 어울리지 않게 매우 짜증 난다는 표정을 짓고는 신경질적으로 종이들을 줍고 있었다.
순영은 쭈구려 앉아 같이 종이를 주워 건넸고, 무표정한 남자는 고맙다는 듯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쌩하니 회의실로 들어가버렸다.
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순영은 그가 다른 직원들이 있는 방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그가
얼굴은 애같고 성격은 개같고 말은 X같이 한다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이지훈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순영은 잠깐 온 기회를 아쉬워 하면서도.
그와 다른 직원이 바쁘게 일하고 있는 파티션 안으로는 들어갈 엄두를 못냈다.
그들은 굉장히 진지해 보였고, 또 모두들 그 일에 몰입해, 선뜻 훼방을 놓지 못할 분위기었기 때문이었다.
사원증이 없어 들락날락할 수도 없고, 여기 까지왔는데 해결도 안보고 갈 수는 없고,
순영은 이곳저곳 앉을 곳을 기웃대다가 휴게실로 보이는 곳에 앉아
무상감을 온 몸으로 다 드러내며 허공을 멍하니 쳐다봤다.
진짜 이게 뭐하는 짓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