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핀잔
: 오래도록 다정하게 - 프로포즈2
20
***
"이렇게 프로포즈 할 생각은 없었는데, 너가 먼저 하는 것 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
"그만 울고, 나 봐봐. 응?"
호석이의 떨리는 목소리가 그대로 전해졌다. 나는 이제 그만 울고 자신을 바라보라는 그의 말에 양 손으로 눈물을 대충 닦아냈다. 그리고는 올곧은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 나 못지 않게 제법 붉어진 눈의 그였다. 나는 오른손을 뻗어 그의 오른뺨을 어루만졌다. 잊지 못할 촉감과 시선이 오갔다. 호석이는 여전히 식탁 의자에 앉아 있는 내게서 시선을 떼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는 잠시 뒤 제 생각이 다 정리된 듯, 목소리를 이어갔다.
"부엌에서 너랑 같이 맛있는 음식 많이 먹으면서, 설거지하는 나를 네가 행복하게 바라봤으면 좋겠어."
호석이는 제 말이 끝나자 내 손을 이끌어 거실로 향했다. 그리고는 뒤에서 나를 끌어안으며 제 말을 더했다.
"여기서는 너랑 같이 영화도 보고, 드라마도 보면서 휴일을 보내고 싶어. 가끔씩은 저기 저 창문을 닦느라고 물장난도 하고 싶고."
그는 '저기 저 창문'을 말하며 우리가 커튼을 두고 키스를 나눴던 창문을 가리켰다. 새삼 물장난이라는 말이 장난스러운 그와 닮아 웃음이 터져나왔다. 나는 거실을 청소하고 그는 바깥 창문을 닦으며 내가 있는 거실 쪽으로 물 호스를 조금씩 흩뿌리는 장면이 떠올랐다. 만약 그런 상황이 생긴다면 우리는 흠뻑 젖는 것도 모르고 장난치기 바쁘겠지. 그는 티나지 않게 내게 져줄거고. 상상만으로도 행복한 하루가 될 것 같았다. 나는 내 허리께를 끌어안은 그의 손 위에 내 손을 올렸다. 그러자 그는 다시금 그런 내 손을 잡아 침실로 행했다. 나를 침대 끝머리에 앉힌 그가 제 허리를 숙여 나와 시선을 나눴다.
"여기서는 매일 잠에 들고 잠에서 깨어나는 너를 보고 싶어. 어느 날은 비바람이 무서워서 눈가에 눈물을 가득 머금은 너도 좋고 또 어느 날은 잠에 취해서 뒤척거리는 너도 좋아. 그냥, 나만 볼 수 있는 너가 이 공간에 존재했으면 좋겠어."
나는 문득 지금 이 순간, 세상에서 가장 근사한 프로포즈를 받고 있는 여성은 나일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화려한 촛불이나 꽃다발도 없는 그런 말 뿐인 프로포즈였지만, 그 글자 하나하나들이 모든 걸 대신했다. 나는 어느새 나도 모르게 호석이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낮게 대답했다. 나도 하고. 그러자 그는 이제 정말 마지막이라는 듯, 원래 내 방이었던 방으로 향했다. 그와 함께 잠들기 시작하면서 필요없어진, 그 방으로.
방은 꽤 오랜 시간 주인의 부재를 나타내듯, 냉기가 돌았다. 그는 내 손을 깍지껴 잡으며 말했다.
"너랑 나를 닮은 아이가 여기서 자랐으면 좋겠어. 우리한테 혼나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울기도 하고, 밀린 숙제를 하다가 하기 싫어서 책상 위에 그대로 잠이 들기도 하고. 또 우리한테 받은 생일선물이 좋아서 종일 그 선물을 어느 곳에 둘까 고민하기도 했으면 좋겠고."
호석이와 나를 닮은 아이. 순식간에 눈물이 차올랐다. 비로소 그와 내가 '부부'를 넘어선 '가족'이 된다는 사실이 살갗으로 닿아왔다. 우리에게는 평범하지 못했던, 그 가족의 이름이 이제는. 정말 이제는 평범해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잠시 제 숨을 고르고는 내게 말했다.
"우리"
"..."
"내가 말 한 거, 다 하자."
"..."
"가족사진"
"..."
"같이 찍자.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멋있게."
결혼하자는 말 대신, 제가 말 한 것들을 같이 하지는 그만의 방식이 참 호석이다웠다. 또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멋진 가족사진을 찍자는 그의 말은 지나치게 다정했다. 다시 한 번, 왈칵 눈물이 쏟아질만큼. 나는 그의 품을 파고 들며, 답했다.
"내 프로포즈보다 훨씬 멋졌어."
"..."
"용기내줘서 고마워. 다른 건 안 보고, 나만 봐줘서. 그걸 해줘서 고마워. 정말로."
"나야말로 너만 보이게 해줘서 고마워."
"...너가 왜 고마워."
"다른 건 하나도 안 보이게 너가 예쁘니까."
"..."
"예뻐줘서 고마워"
"..."
제 부모를 죽게 만든 사람의 자식을 사랑하는 건, 과연 어떤 기분일까. 나는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기분일 것이다. 결코 쉬운 일도 아닐 터이고. 하지만 그는 그냥 '나'라는 이유로 모든 걸 용서했다. 아니. 용서라는 단어조차 무색하게, 나를 사랑했다. 단 한 순간도 내가 불안하지 않게. 자신이 나를 지키고 있으니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듯이.
**
서로의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가 끼워진 것과 같은 팔찌를 나눠낀 것을 제외하고는 달라진 게 없는 하루였다. 우리의 결혼식은 간소한 언약식처럼 치뤄질 예정이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우리 둘이 직접 손으로 적은 손편지를 돌리며, 우리의 결혼 사실을 알리고 있을 무렵. 이 나라와 이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 손님이 찾아왔다. 그를 처음 맞이한 건 나였다. 누군가 초인종을 눌러,문을 열자 보이는 얼굴은 지민이었다. 호석이는 그를 발견하자마자 나를 제 뒤로 감추며 지민이에게 으르렁거리기 바빴지만, 나는 그런 호석이를 달래며 지민을 맞이했다. 지민은 그런 호석을 견제하며 내게 잠시 시간이 되냐고 물었고, 나는 무언가를 담고 있는 그의 눈빛에 고개를 끄덕였다. 호석은 자신도 함께 가겠다며 내게 언성을 높혔지만, 나는 그의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지민이의 많은 이름들 가운데 가장 첫번째는 내 친구라고. 그러니 믿고 보내달라고. 곧이어 호석이의 긴 한숨이 이어졌고, 그는 내 반지 위에 제 입을 맞추고는 금방오라는 당부를 건넸다.
**
"정호석이 뭐라 안 해?"
"안 하긴. 아까도 봤잖아."
우리는 집 근처의 카페로 향했다. 그는 내 대답을 끝으로 한참동안 나를 바라보더니, 내 머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머리... 잘랐네?"
"아. 응. 호석이가 단발 좋아하는 것 같아서."
"...아."
"그나저나 오랜만이다. 다시 너 볼 일 없을 줄 알았는데."
"그러게."
"어쩐 일이야?"
"대외적인 이유랑 진짜 이유 중에 뭐부터 말할까."
"전자?"
문득, 지민이가 내 긴머리를 향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머리. 긴 게 더 예쁘네.'
나는 괜스레 머쓱해지는 기분에 길지 않은 머리칼을 쓸어내리며 답했다. 전자부터 듣겠다고. 그러자 그는 머리칼을 따라 내려가는 내 손 끝을 따르다, 힘 빠지게 웃고는 말했다.
"회장님이 찾으셔. 너 데리고 들어오라시고."
어렴풋이 짐작은 한 내용이었다. 한동안 잠잠해도 너무 잠잠했으니. 나는 알고 있었다는 듯, 여유롭게 웃으며 후자를 물었다.
"...후자는?"
"..."
"..."
"내가 보고 싶어서."
"..."
"너랑 같이 한국에 가고 싶어서 왔어."
지민이의 직구에 당황한 건, 다름 아닌 나였다. 지민이를 짝사랑 할 때는 '지민이가 저를 좋아하게 해주세요.'가 내 모든 소원 한 켠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지금에서야 그 소원의 답변이 돌아오다니. 어긋난 타이밍이었다. 늘상 아버지의 곁에서 비서의 직책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으며 나를 대하던 아이였는데. 제 아버지때문에 늘상 자신을 억누르며 자라온 아이였는데.
이제야 솔직해지는 법을 배운 것일지도 몰랐다. 지민이는.
스물여덟의 문턱에서, 겨우.
나는 지민이의 말을 수십 번 곱씹으며 생각했다. 단순히 함께 한국에 가고 싶다는 뜻이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 그에 맞는 답을 주어야했다. 단 한 가지 확실한 건, 우리는 전처럼 돌아갈 수 없었다. 지민이는 제가 건넨 말에 뒤따르는 답이 없자 목이 타는지, 연신 앞에 놓인 아이스티만 들이켰다. 나는 꽤 오랜 시간 동안의 정적을 깨고서야, 그의 이름을 부를 수 있었다. 나 역시 솔직해질 시간이었다. 열일곱의 우리에게. 스물여덟의 우리에게.
"나 너랑 못 가."
"..."
"내가 너랑 가지 않을 거라는거, 알고 온 거잖아."
"...왜 그랬을 거라고 생각해."
"내가 지금 누구를 가장 믿는지."
"..."
"누구를 사랑하는지."
"..."
"알잖아. 너도."
"..."
"아니. 모를리가 없잖아."
"..."
"내 오랜 친구인데."
"..."
"지민아."
"..."
"목소리 듣고 싶다. 응? 지민아."
"...어."
지민이는 계속해서 이어지는 내 말들에 고개를 숙였다. 얼마만에 보는 그의 작은 모습인지. 순간 코끝이 찡해졌다. 나는 아무런 대답없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목소리라도 들려달라며. 지민이는 그제서야 간신히 고개를 들고는 내 시선을 마주했다. 허공에서 얽히는 서로의 눈빛이 진실로 아팠다. 특히, 지민이의 눈빛은 외로웠다. 가족에게 버림 받았을 때의 내 눈빛을 보는 것만 같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의 손을 마주잡으려 뻗어나가는 손을 제지했다. 그에게 가지 않을 거라면, 그를 흔들어서는 안됐다. 나는 애써 웃으며 그에게 내 마음을 전했다.
"내 첫사랑의 대상이 너가 아니었다는 거, 나도 알아."
지민이는 내 말에 놀란 듯, 제 눈을 키웠다. 그리고는 무엇인가 말하려는 듯, 제 입술을 달싹였으나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래도 내 첫사랑이 너라는 거. 후회는 안 해."
"..."
"너여서 내 첫사랑이 참 예뻤어."
"..."
"비록 내가 너 좋다고 따라다닐 때는 한 번 눈길도 안 주는 너였지만."
"..."
"그것마저도 너라서 좋았어."
"..."
"그래서 고마워."
"..."
"내 첫사랑이 되어줘서."
"..."
"정말로 좋아했어. 아빠의 비서, 국회의원 아들. 이런 거 다 버리고."
"..."
"내 오랜 친구 박지민으로."
"..."
"난 앞으로도 첫사랑을 떠올리면 너를 생각할 거고, 너를 생각하면서 웃을거야."
"..."
"그러니까."
"..."
"너도 그러길 바랄게."
"..."
"내 아빠였던 사람의 일로 힘들어 하지도 말고, 네 아버지 일로 괴로워 하지도 말고."
"..."
"이제는 네가 살고 싶은대로, 그렇게 살아."
"..."
"나한테 죄책감 같은 거, 가질 필요는 없어."
"..."
"그 일에 네가 가담했다는 거 알고 나도 너 충분히 미워했으니까. 퉁치면 돼."
"..."
내 말이 길어질 수록 지민이의 눈이 붉어졌다. 한 번도 냉철함을 잃지 않았던 아이인데. 나는 테이블 아래로 감춰진 두 손을 세게 말아쥐며, 눈물을 참아냈다. 지민이는 울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뒤로 젖히고는 잠시동안 제 호흡을 다듬었다. 그리고는 한때는 내가 가장 좋아했던 목소리로 말했다.
"나 너 어떻게 해서든 데려가려고 했는데."
"...그랬어?"
"너가 이렇게 솔직하게 다 까버리면."
"..."
"못 데리고 가잖아."
"..."
"너한테 계속 좋은 첫사랑이고 싶어서."
"..."
"그거 깨기 싫어서, 그냥 가야겠다. 나."
"...밥이라도 먹고 ㄱ"
"넌 그냥 밥이겠지만, 나한테는 의미부여 되는 밥 한 끼일거야."
"..."
"그냥 갈게."
"..."
"네 아버지한테, 아니. 회장님한테는 내가 알아서 잘 말 할게."
"...고마워."
"그리고 반지 예쁘다."
"...아."
"커플링?"
지민이의 말에 반지의 정의를 뭐라 내려야 할까 잠시동안 고민하다가, 말했다. 결혼 반지야. 라고. 그러자 그는 생각지 못한 대답이었는지, 한참동안 반지에서 눈을 떼지 못하다가 말을 이었다. '완전 늦었네. 박지민.' 나는 그의 말에 장난스레 웃으며, 그러게 하고 핀잔을 주었다. 나는 그래도 처음보다는 편해진 그와의 분위기에 주머니 속에 담아왔던 청첩장을 그에게 건넸다. 혹시 몰라서 챙겨온 것이었는데, 결국은 주게 되네.
"뭐야?"
"청첩장."
"..."
"야아. 그렇게 반응하면 내가 머쓱하지!"
"...그래. 잘 읽을게."
**
서로가 서로의 숨과 희망이 되어주려 합니다.
오래도록 다정하게.
지민은 제 손에 들려있는 청첩장 속 문구를 곱씹었다. 숨과 희망이 되어주겠다니. 사랑한다는 수백 번의 말보다 와닿는 문구였다. '다정하다.'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아이였다. 탄소는. 그렇게 다정한 아이가 다정한 사랑을 하고 있구나. 싶었다. 나는 비행기 창문 아래로 늘어진 형태 모를 것들을 좇았다. 구름인지, 안개인지. 모를 것들을. 금세 사라질 걸 알면서도 눈끝으로, 그것이 사라질 때까지. 마치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연습이라도 하듯. 서툴지만 그렇게 제 나름의 이별 준비를 하고 있었다.
***
안녕하세요. 겨울소녀입니다. 다정 커플의 프로포즈가 마무리 되면서, 지민이의 오랜 마음 역시 함께 저물었네요. 지민이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마지막에 형태 모를 것을 좇는 지민이의 이별연습을 더했어요. 이번 작품에서 너무 아프게 해서, 미안해요. 지민아...ㅜㅅㅜ 우리 지민이도 멋진 작품으로 만나자! ㅎㅎ 호석이의 프로포즈는 참 솔직하고 사랑스러웠어요. 자신이 꿈꾸는 미래를 함께 걸어가자고 말하는 호석이와 그 미래를 상상하며 환하게 웃는 여자 주인공! 다정커플과 닮은 프로포즈였다고 생각해요! 신작 러블리러브는 다정한 핀잔이 마무리되고 나서야 진행될 예정입니다! 작품 하나를 쓸 때는 거기에 몰두해야 하는 제 특성상...! 러블리러브는 뮤즈보이와는 또 다른 달달함과 다정한 핀잔과는 또 다른 스토리를 가진 작품입니다 :) 기대해주세요!
저는 요즘들어 그렇지 않아도 짧던 입이 더욱 짧아졌어요...! 가을을 타나봐요. 다들 맛있는 거 많이 드시면서, 각자의 위치에서 화이팅합시다! 우리. 그리고 우리 방탄이들 2번째 1위 축하해요! 탄소들도 축하합니다!
다정한 사람들
누락되신 분들은 꼭! 말씀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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