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년여간의 기억이 생생했다. 그래,그땐 그래도 사랑 못 받을 걱정이 없었던 나날들이었다. 그때는 적어도 네가 이렇게 날 버릴 줄은 몰랐지,백현아. 습관처럼 거실바닥에 앉아 티비를 틀었다. 틀자마자 화면에선 행복하단 표정을 하고 여자의 손을 꼭 부여잡으며 인터뷰를 이어가는 네 모습이 보였다. 문득 네가 데뷔하기 전 기억이 스물스물 기어나오기 시작한다. 그때가 여름이었나, 초가을이었나.내 옆에서 웃음때문에 말을 못 이어가는 널 보고 왜 그러냐 묻자, 넌 신이 나서는 대답했었다. "경수야, 나 캐스팅됬다?" "어?" 예상치도 못한 답문에 도리어 내가 얼이 빠져 멍하니 백현이만 봤었던 걸로 기억한다. "나 저번에 종대랑 찬열이랑 경기도 청소년 예술제 나간거있잖아,거기에서 에스엠관계자가 명함주고 가더라." 함박웃음을 지으며 날 안아제끼는 너에 네 꿈이 가수라는 걸 알고 있었던 난 연신 축하해,축하해,하며 말을 건넸다. 그 후 우리 둘은 몇 분간 계속 부둥켜안고 웃어댔었다,아마도. 티비는 여전히 인터뷰를 내보내고 있었다. "백현씨,첫 사랑은 언제?" "아, 짖궂으시네.여자친구 옆에 두고." "괜찮아요,괜찮아요.태연씨,괜찮으시죠?" "네,전 뭐. 얼른 말해,찔리는 거라도 있어?" 여자의 웃음기섞인 말에 티비 속 변백현이 말을 이어나갔다. "고등학생때요,서로 진짜 좋아했었는데 결국 맘이 안 맞아서 헤어졌어요." 넌 또 거짓말이다, 일방적으로 통보했으면서. "예쁘셨어?" "그 분도 예쁘신데,지금은 내 눈엔 너가 더 예뻐."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꼭 자기를 닮은 여자를 바라보며 웃는 꼴이 얄미웠다,그리고 난 여자가 부러워지기 시작했다. 캐스팅되었단 말을 꺼낸지 몇 주후, 넌 연습생이 되었고 덩달아 연락횟수가 줄기 시작했다. 뭐해?라고 보내면 연습중이라며,바쁘다며,핸드폰 만지면 혼난다며 말문을 끊기가 항상이였다. 학교에 와서도 수업시간내내 잠만 자던 너는, 밥을 먹으러 가서도 졸린 눈을 풀지 못한채로 한마디도 하지 않으며 내 앞에서 밥만 꾸역꾸역 먹고 일어서버렸다. 그런 네가 안쓰러웠던 난 널 걱정해주며 쉬라고 말했었고,넌 그말을 듣자마자 교실로 가 잠을 청했다. 몇달이 지나 네가 데뷔반에 들어간 후, 넌 더 바빠졌고, 또 몇달이 지나, 넌 꿈에 그리던 솔로데뷔를 했다. 데뷔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너와의 카톡대화창엔 한달전쯤부터 변함이 없었다. 시간이 남을텐데,분명 남을텐데 연락을 하지 않는 널 보고는 그래,신인이니까 연습도 하며 바쁘겠지.라며 내 자신을 달래고 어르렀다. 근데 백현아,내가 바보였나봐. "데뷔 후 공백기때는 오히려 지금과 반대로 숙소에만 계셨다던데." "불러주는 곳이 있어야 스케줄을 뛰던 말던 하죠. 저 그때 할 일 없어서 연습 없던 날엔 친구들이랑 문자밖에 안했어요." "백현씨가요?" "네,오죽하면 친구들이 너 연예인 맞는거긴 맞는거냐고 했다니까요." 내 심장이 또 추락했다. "그럼 이번엔 태연씨, 백현씨랑은 어떻게 만나게 되셨어요?" "그냥 여차저차해서 프로그램에서 계속 마주치다 보니까 얼굴은 익혔는데 백현이가 아주 저 좋아하는 티를 끈질나게 내더라구요.것도 완전 티나게." "아,좋아서 그랬지!" "백현씨가 대시 되게 열성적으로 하셨나 봐요." "태연이가 보시다시피 워낙 완벽하잖아요." 방긋방긋 웃는 네 얼굴과 반대로, 내 찡그린 얼굴은 점점 더 보기 흉해졌다. 연락이 안되는 동안, 난 '이것도 이해못해주면 난 정말 이기적인거겠지,연락해줄때까지 기다리자.'라는 마음으로 닥달하지 않고 꾹 참았다. 그리고 우리의 4주년때는,실신할정도로 네가 나온 방송을 보며 울었다. 그 날도, 넌 시곗바늘이 열두시를 가리키는 순간까지 문자 한통 없없다. 그리고 몇 달 후 내 생일날, 난 그래도 오늘만큼은 연락 꼭 해주겠지. 아니,어쩌면 집에 찾아올지도 몰라. 하는 생각에 들떠 나 혼자서 미역국도 끓이고 별에별음식을 다 해두었다.내 생일인데도 불구하고. 낮, 핸드폰엔 백현이가 아닌 친구들의 문자가 수십통 와 있었다. 저녁엔, 부모님의 생일인데 집 한번 안 오겠냐는 문자. 미역국의 기름이 식어버려 굳어선 국색깔이 이상해질때까지 네 문자는 오지 않았다. 설마,설마하는 마음에 네게 전화를 걸었던 것이 기억난다. 몇번의 통화음이 들리고,나른한 목소리가 내 귀에 들렸다. 『여보세요.』 "어,백현아.나야,경수." 『도경수? 오랜만이네.』 오랜만이라니, 어이가 없어 뭐라 따지고 싶었지만 꾹 참고 말을 이어나갔다. "오늘 내 생일인데... , 어디야?" 『너 오늘 생일이야? 축하해.』 뭐? 순간 머리끝까지 화가 나 바락바락 따져버렸다. "뭐? 너 오늘 생일이야? 그게 네가 지금 할 소리야? 너 우리 4주년때도 문자 한 번 안했잖아. 내가 얼마나 참고참고 있," 『무슨 기념일? 4주년? 무슨 소리야?』 "...뭐?" 『우리 헤어진거 아니였어? 왜 그래,도경수.미련하게.지난 얘기를 하고 있어,생일 축하한다고. 나 바쁘다,끊어.』 순간 온 몸에 힘이 탁 풀려 주저앉아버렸다. 그래, 내가 바보였다. 이년동안 했던 짓이 서러워 무릎을 모아 아이같이 엉엉 울었다. "백현씨는 데뷔전이랑 데뷔후에 뭐가 제일 바뀌신 것 같아요?" "음, 우선 인간관계가 많이 변했죠.말씀드렸다싶이 첫사랑과도 헤어지고, 친구들이랑도 예전만큼 많이 못 만나고.근데 뭐,지금도 나쁘지 않아요.친구들도 이해해주고있고 이젠 태연이도 있으니까." 안 변한 건 오직 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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