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환상
제13장 ; 아무렇지 않게
나는 정한 오빠가 챙겨준 소독약을 들고 다가오는 원우의 팔을 잡아 모닥불과 먼 곳으로 걸어갔다. 순영이도 슬슬 일어날 때가 된 것 같고, 지훈이도 그간의 공백에 찌뿌둥한 지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한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원우는 얼굴에 물음표를 잔뜩 띄운 채 따라왔다. 자리를 잡고 앉자, 눈을 크게 끄고 꿈뻑꿈뻑 하는 것이 꼭 고양이 같았다.
"소독해주려고."
"아아 -"
알아서 테이프를 뜯어낸 원우의 손을 따라 흘러내리는 붕대를 이어받아 돌돌 감았다. 점점 드러나는 상처에 미간이 절로 찌푸려진다. 으으, 아프겠다. 뭐가 웃긴지 꾹 다문 입에서 결국 김빠지는 소리가 새어, 낮게 소리 내어 웃는 원우와 눈을 맞추었다. 입꼬리에 걸려있는 웃음은 여전히 주변을 맴돌았다. 오랜만이다. 이렇게 웃는 모습이, 내가 지금 느껴버린 감정이.
"ㅇ.. 왜 웃어?"
"그냥. 너 다쳤을 때 생각나서."
"..."
"꼭 그때 나같이 행동하길래."
어쩐지 익숙하더라니. 나는 괜히 부끄러워져 오로지 붕대 감는 것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야속하게도 너무 빨리 말아진 붕대를 옆에 두고 정한 오빠가 챙겨준 소독약의 뚜껑을 열었다. 싸한 냄새가 파고들었다. 혹여나 아플까 봐, 상처 부위 주변부터 살살 적셨다. 상처 부위를 건들면 아플 법도 한데, 원우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소독하는 것을 지켜봤다.
"안 아파?"
"참을만해."
이런 건 아무것도 아냐. 원우의 마지막 말을 듣고 흠칫 멈추던 손을 다시 움직였다. 그래, 너도 아마 이것보다 더 한 고통을 느끼고 여기 왔을 테지. 차마 표출은 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수긍했다. 그 뒤로 한참을 말하지 않았다. 고요한 정적을 깬 것은 원우였다. 티스야,
"응?"
"집에 가고 싶지 않아?"
".. 가고 싶지. 근데,"
내가 돌아가면 여긴 사라지는걸. 뒷말은 꿀꺽 삼켰다. 근데? 원우가 되물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말했지, 꼭 지켜주겠다고."
"응."
"집으로 보내줄게. 꼭."
말없이 웃음으로 답한 후, 소독약이 묻은 상처 부위를 입으로 호, 하고 불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면 넌 어떻게 대할까. 그때도 나에게 지켜주겠다고 말할까 아니면, 자신의 세계를 지켜달라고 할까.
원우야 너라면, 네가 나라면, 어떻게 할래.
그대로 얼굴을 들어 원우를 바라보았다. 서서히 마주 보는 눈동자 속에 서로의 얼굴이 가득 찼다. 이렇게 가까이서 얼굴 보는 건 처음인데. 아까부터 심하게 뛰어대는 심장 때문에 죽을 지경이었다. 이 원인은 바로 앞에 있는 이 사람 때문인 게 확실하다.
어떡해. 나 설마,
"..."
"..."
".. 붕대는 내가 감을게."
"아, 응.."
맞닿은 시선이 어색하게 흩어진다. 아직도 열려 있는 약의 뚜껑을 닫고선 하염없이 매만졌다. 그럼 나 먼저 가 있을게. 슬며시 일어나며 몸을 돌리자, 원우는 나의 손목을 잡았다. 고개를 돌리자 바로 가리키는 손가락의 끝은 모닥불을 향했다. 아,
"지훈이 혼자 두는 게 낫지 않을까?"
"응.. 그러네."
"조금만 더 있다가 가."
"..."
"같이 있자, 나랑."
지훈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다 같이 늦게 오는 우리를 보자마자 고개를 푹 숙이고 끙끙대며 일어섰다. 코앞까지 왔음에도 그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아마도, 울어서 퉁퉁 부은 눈을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일 거라고 생각했다.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훌쩍이는 콧소리가 이미 '나 울었어요'라고 알려주고 있기 때문에.
그만 가자. 승철 씨의 말에 모두가 근처의 흔적을 지웠다. 순영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눈치를 보다, 절뚝이며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고치는 지훈에게 다가갔다.
"잡아."
".. 뭐?"
"나 잡으라고. 그 몸으로 어떻게 걸을 거야. 지탱할 거라도 있어야지."
"..."
지훈에게 팔을 내민 순영은 주춤거리는 지훈의 손을 잡아 자신의 팔에 올려놓았다. 평소 순영이 답지 않게 묘하게 딱딱한 말투와 행동. 하지만 어느 누구도 오늘따라 왜 그러냐며 의아하게 보지 않았다. 순영의 마음을 이해했기 때문일까. 오히려, 아예 모른척하고 지낼 수도 있을 상황에서 저렇게 대해주는 것 자체가 고마운 일일지도.
우리는 재빨리 주변을 살피며 숲 안으로 들어갔다. 돌아가는 것이 지훈의 몸 상태를 봐서라도 좋다고 생각했지만, 탑이 무너진 마당에 여유를 찾을 순 없었다.
간간이 나오는 길 잃은 영혼들 말고는 우리를 위협했던 그 검은 것들은, 탑이 있던 정상에서 몇 마리가 나는 것을 제외하곤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쩐지, 저곳에서 우리를 보고 있다는 느낌이다.
이상한 기분에 주위를 경계하며 천천히 올라갈 때였다. 자꾸 사브작대는 소리에 모두가 귀를 기울였다. 바람 소리에 섞여 들려오는 소리를 쫓는 많은 눈들은 더욱 바삐 움직였다. 그때였다.
"...!"
챙, 소리를 내며 무언가 날아와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날이 무섭게 선 조그마한 칼이다. 급하게 피해서 다행이지, 하마터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 칼을 주워 옆에 있던 원우에게 건네주고, 다시 주변을 살폈다. 칼은 날아왔는데 정작 던진 주인공은 보이지 않았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본 칼인데.
원우 옆에서 같이 만져보던 승철 씨는 갸웃거렸다. 세상에 비슷한 칼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렇긴 하지. 원우의 말에 바로 수긍을 하던 승철 씨는 일단 움직이자며 자신이 서 있던 곳에서 꿈쩍하지 않은 사람들을 챙겼다. 순영이도, 여전히 어딘가를 바라보며 망부석처럼 서 있는 지훈을 재촉했다.
"왜 그래? 뭐 보여?"
"아니, 저기 나무에. 혼자만 너무 이상하게 흔들려."
"나무?"
지훈의 말에 다들 위를 바라봤다. 내가 볼 땐 다를 게 없는데.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저었다. 기분 탓인가. 머쓱한 지, 뒤통수를 벅벅 긁던 지훈은 아쉬움이 남는 듯 다시금 시선을 옮겼다.
".. 아냐. 기분 탓이 아니야."
"어?"
"분명히 위에 뭐가 있.."
"...!"
"...!"
무언가 굉장한 소리를 내며 떨어짐과 동시에 내 몸도 같이 바닥과 맞붙었다. 큰 충격에 멍해진 머리를 부여잡고 질끈 감은 눈을 떴다. 내 위로 떨어진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려 서서히 눈동자를 돌린 나는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검은 것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지금 저 너머에서 무방비 상태로 떨어진 이 사람을 보고 있는 승철 씨 아니, 그와 똑같은 모습을 한 자였다.
"찾았다."
작가의 말
항상 써주시는 댓글들 덕분에 오늘도 힘내서 글을 씁니다. 볼때마다 반갑고, 너무 고마워요.
느리게 굴러갈지라도 여러분들을 위해 꼭 완결은 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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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호닉 ♡
대시, 자몽몽몽, 제로나인, 늘보냥이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