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물 자체가 정말 리얼하지 못한 설정이지만 그래도 제 나름의 목표는 리얼하게 쓰는 거거든요. 한참 모자란 지식을 어떻게든 넓혀보겠다고 초록창에 계속 들락날락...ㅎ 저도 쓰면서 새로운 사실을 많이 알게 되네요ㅋㅋ
(임신물 주의)
쾅! 자동차 문이 세게 닫히는 소리가 주차장을 울렸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서도 뭐가 그렇게 급한지 찬열은 가만 있지를 못했다. 갑작스런 준면의 연락을 받고 가던 길을 되돌아 서울로 올라올 동안은 이렇게까지 조급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집이 가까워질수록 초조했다.
거긴 내가 대신 갈 테니까 넌 빨리 집으로 가. 널 애타게 기다리는 강아지가 하나 있던데.출장을 취소시키다니 이 사람이 장난치나 싶어서 거절했더니 '이건 명령이야!'라는 말이 떨어졌다. 집에 있는 강아지라 하면 분명히 백현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내 집에 백현이가 있는 걸 형이 도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거냐고. 그리고 백현이는 왜 집에 있는 거야. 오늘 출근을 못 했나? 어디 아픈가? 어제 새벽에 잠깐 봤을 때는 괜찮았던 것 같은데? 아, 혹시.
아기...때문인가.
큰소리나지 않게 조심스레 현관문을 닫자 집안이 온통 깜깜했다. 현관 옆에 서류 가방을 내려놓고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여 안으로 향했다. 달칵, 안방문을 열자 침대 한쪽에 이불더미가 뭉쳐있는 게 보였다. 희미하게 색색거리는 숨소리. 자고 있구나. 침대 옆에 쪼그리고 앉은 찬열이 잠든 백현의 얼굴을 쓰담았다. 잘 때 끙끙거리는 버릇이 있는 백현이는 너무 피곤할 때는 끙끙거리지조차 못하고 쥐죽은 듯이 조용하게 자곤 했다. 그런데 지금 백현이 꼭 그런 모습이었다. 색색거리는 숨소리조차 겨우 내는 것만 같아서 안쓰러웠다.
임신 사실을 전해들은 것은 대략 이주 전쯤이었다. 그날따라 유난히 조용한 아침이라고 생각했다. 무슨 큰 결심이나 한듯이 입을 꼭 앙다물고 있던 백현이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꺼내기 전까지는.
찬열아. 나 말이야.
그저께 병원에 갔었는데.
지난주에 백현은 두 번이나 구토 증상을 보였었다. 화장실로 뛰쳐들어가 한바탕 토악질을 한 후에는 어지럽다며 침대를 찾았다. 원래 아침마다 좀 저혈압이긴 했어도 평소에 감기 한 번 안 앓던 애가 갑자기 그러니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겉보기에는 멀쩡한데 한 주 내에 두 번씩이나 토하고 앓아눕는 모습에 찬열은 애가 탔다. 맘 같아서는 손 꼭 잡고 병원에 데려가고 싶었지만 바쁜 회사일 때문에 틈을 낼 수가 없어서 너 혼자서라도 꼭 병원 갔다오라고 닦달을 했었는데. 설마 무슨 큰 병이라도 걸린 걸까.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나 있잖아.. 아기, 임신, 산부인과에서, ......
전혀 예상치 못한 말들이 쏟아졌다. 백현의 입에서 나온 단어들이 매끄럽게 연결되지 못하고 툭 툭 토막난 채로 귀에 들어왔다. 뭐라고? 다시 한 번 되묻자 백현이 아까보다 훨씬 더 자신 없어하는 목소리로 웅얼댔다. 그러니까 내가 임신...아기..가졌다고.
다시 들어보아도 여전히 이질적이고 낯설었다. 그것은 먼 미래에나 들어보겠거니 했던 말이었다. 언젠가는 백현과 어쩔 수 없이 헤어지고, 집안에서 정해준 여자와 결혼을 하고, 의무적인 결혼생활을 하고, 그러고 나서도 한참 있어야 아이가 생길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임신이라니? 아기가 태어날 거라고? 도무지 실감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너 남자잖아. 근데 어떻게..?"
깊게 생각하기 전에 무심코 튀어나온 일차원적인 질문에 단박에 상처 입은 얼굴이 된 백현을 보고 아차 싶었다. 분명히 저도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 얘기하는 것일 텐데.
"나도 몰라. 그냥, 그렇다더라."
찬열이 뚫어져라 백현을 보았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백현은 깨작깨작 젓가락을 놀렸다. 얼굴 한 번 보고, 배 한 번 보고, 또 얼굴 보고, 배 보고... 납작한데 아직. 저게 부풀어오른단 말이야? 정말 저 안에 아기가 있을까? 백현아, 너 거짓말하는 거 아니야? 찬열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따끔따끔했다. 후두둑 눈물이 떨어지자 백현은 황급히 옷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사실은 임신 소식을 통보하는 저도 믿기지가 않았다. 존재 자체가 믿어지기 힘든 것을 제가 품고 있다는 사실을 감당하기가 벅찼다. 내가 이런데 넌 어떻겠어. 진짜 못 믿겠지? 그렇다고 그런 얼굴은 하지 마. 그런 눈으로 나 보지 마.... 기어이 눈물이 다시 흘렀다. 어떡하지? 너무 무섭다 찬열아. 왜, 왜 나야? 남자가 임신하는 거 나도 생전 처음 보는데 그게 왜 하필 나냐고. 앞으로 회사는 어떻게 다니지? 너는, 어떡해? 평생 나랑만 살 수는 없잖아. 벌써 6주나 됐다는데 나는 그동안 아무것도 모르고... 애기가 불쌍해. 존재 자체가 고민거리라니 너무 슬프지 않아? 다른 데 갔으면 좋아서 난리였을 텐데 왜 하필 남자인 나한테 와서.. 무사히 태어날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불쌍해. 담담한 척 울음을 삼키는 백현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무작정 '내가 책임질게' 하는 것은 오히려 더 무책임한 게 된다. 그게 현실이었다.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주는 손길조차 무거웠다.
출근하는 차 안에서 백현이 차분하게 말했다.
연말 지날 때까지는 나 혼자서 어떻게든 하고 있을 테니까 너는 신경 쓰지 마. 너 바쁠 텐데 내가 알아서 할게.
아까 펑펑 울어놓고서는. 그래도 걱정시키지 않겠다고 야무지게 말하는 게 찬열의 눈에는 그저 기특했다. 예쁘다, 내새끼.
그 후 지나간 이주일이 전부 꿈 같았다. 일은 정신 없이 밀려들고, 하루하루가 몽롱하게 흘러갔다. 아기에 대한 얘기는커녕 일상적인 대화도 하지 못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어쩌면 이기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쓰렸다. 머리로는 이해하는 척 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는지 자꾸 무의식적으로 거부감이 일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닐 텐데, 백현이도 힘들 건데. 아무리 바빠도 얘기 정도는 할 수 있는 건데 내가 너무 모질었던 게 아닐까. 사실 제일 힘든 건 아기를 품고 있는 당사자인데. 백현이가 깨어나면 그동안 밀린 얘기들을 해야겠다 생각하면서 찬열은 잠든 백현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쓰담는 손길에 힘이 들어갔다.
*
"얼마나 됐다고?"
"한 8주 좀 넘었나? 너한테 말할 때 6주였으니까..응, 그렇겠다. 8주 정도 됐어."
준면에게 얘기해서 내일 나란히 월차를 내기로 한 두 사람은 밤늦게 병원을 찾았다. 집 앞을 지나다닐 때 늘 보던 곳이라 그저 그런 동네병원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규모가 컸다. 이름난 대형 병원만큼 으리으리하진 않아도 진료실, 입원실, 심지어는 수술실 몇 개까지 건물 1,2,3층에 들어찬 게 거의 종합병원 수준이었다.
나 처음에 왔을 때 내과에 갔는데, 의사 선생님이 증상 듣고 고개를 갸웃갸웃하시는 거야. 그리고 위층에 산부인과 있으니 한 번 가보라는 거야. '저 남잔데요.' 하니까 '산부인과에 여자만 가는 건 아니에요.' 하시는 거. 그래서...오랜만에 푹 자고 생기를 되찾은 백현이 조잘조잘 떠드는 사이 엘리베이터는 3층에 도착했다.
"백현씨 오셨어요? 나 엄청 기다렸잖아."
생기발랄하게 백현을 반기는 여의사는 생각보다 젊었다. 어머, 아기 아빠 되시는 분이세요? 잘생기셨다. 처음 본 사이인데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너스레를 떠는 그녀에게 찬열은 멋쩍은 미소만 보였다. 일단 아기가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 사진부터 찍어볼까요?
"이야...진짜 신기하다. 자궁이 없는데 어떻게 아기집이 생겼지?"
들으라고 말하는 건지 혼잣말을 하는 건지, 의사 선생님은 사진을 들여다보며 중얼중얼댔다.
'원래 저러셔?'
찬열이 백현에게 입모양으로 묻자
'응. 너도 적응해.'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자, 자. 여기 보세요. 요기 보이는 주머니 같은 거 있죠? 이게 아기집이에요. 원래는 자궁 내벽에 붙어있어야 되는데 백현씨는 자궁이 없잖아요? 그냥 복강내 어딘가에 있는 것 같네요. 너무 신기하다 정말. 그동안 숱하게 초음파 사진을 봤지만 이런 경우는 저도 처음 봐요!"
이 여자 특이하네. 실례인지 모르겠지만 의사 선생님 말씀을 듣는 동안 찬열은 그런 생각을 했다. 일단 말하는 톤이 상황에 맞지 않게 너무 쾌활했다. 나 즐거워요, 신나요, 온 몸으로 보여주는 듯해서 솔직히 조금 기가 막혔다. 남은 심란해 죽겠는데 뭐야. 대학 새내기라 해도 믿을법한 앳된 얼굴에, 머리까지 한 갈래로 땋아서 더 소녀 같았다. 입고 있는 하얀 의사 가운이 어색했다. 교복 입어야 할 것 같은데. 찬열은 책상 위에 올려진 명패를 흘깃 쳐다보았다. 산부인과 전문의 노 유 나. 이름까지 소녀 같네.
"아기는요? 있는 거예요?"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던 찬열은 백현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낳을 것인지 안 낳을 것인지, 혹은 낳지 못할 것인지 모든 게 불확실한 상황이지만 그래도 제 아기라고 백현은 궁금한 모양이었다.
"그럼요! 아기는 다른 게 아니라 아기집 안에 반 넘게 차지하고 있는 요게 바로 아기예요. 아기집은 아기랑 같이 크는 거거든요. 보세요, 팔다리가 돋아나고 있네요."
"우와...신기하다."
뭣이?! 팔다리가 있다는 말에 놀란 찬열이 눈을 크게 뜨고 초음파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콩알처럼 둥글둥글한 덩어리에 정말로 올록볼록 조그만 것들이 돋아나고 있었다.
"아기 태명은 지으셨어요?"
"아뇨, 아직 못 지었어요."
"그래요? 그럼 소리 내서 아가를 불러주신 적은? 없어요? 단 한 번도?"
"네...마음속으로만 했는데."
"태교를 마음속으로만 하면 안 되죠! 백현씨 혼나야겠다."
정말 밉다는 듯이 백현을 흘기던 의사가 시선을 돌려 찬열에게도 찌릿, 따가운 눈빛을 보내자 찬열은 흠칫했다. 휴...의사가 한숨을 쉬었다.
"두 분 다 남자라서 그런가, 많이 서투르시네요. 뭐 그럴 수밖에 없긴 하지만. 이대로 두면 안 될 것 같으니 교육을 좀 해드려야겠어요."
교육? 뜻밖의 말에 두 사람은 긴장했다. 의사 선생님의 표정이 좀전까지와 다르게 사뭇 진지해졌다.
"우선 이것부터 확실하게 하고 가죠. 낳으실 건가요?"
"네, 낳고 싶어요..!"
....!
찬열이 놀란 눈으로 백현을 보았다. 의사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답하는 데 단 1초도 망설이지 않은 그 목소리에는 간절함마저 묻어 있었다. 모성본능이라는 게 바로 이런 것인가. 낳고 싶어요, 낳을 수 있게 해주세요. 아기를 세상에 나오게 하고야 말겠다는 백현의 의지는 찬열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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