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달감
내 나이 19살, 내 남편 전정국
01
담임년 죽인다. 이번엔 진짜 죽인다. 이번엔 진짜... 진짜.. 망할!!
내 두 손엔 딱 15분 전 담임선생 왈 '이거 전부 물리실로 부탁해^^' 와 함께 전해받은 산더미의 책들이 쌓여있었다.
책더미의 높이는 시야를 가릴 정도였고, 책더미의 무게는 내 갸날픈 두 팔을 바들바들 떨리게 할 정도였다.
이미 15분째 물리실을 찾아 많은 계단을 오르락 내리락 한 뒤라 얇은 두 다리 역시 힘을 잃어 가고 있었다.
마음 속으로 험한 말을 마구 뱉어내는 내 애처로운 처지와 달리 창문을 통해 비춰지는 햇빛은 따듯했고, 바람은 솔솔 내 교복치마를 펄럭였다.
겨우 겨우 이과건물 5층에 도착해 물리실이라고 적혀있는 표지판을 발견한 뒤 입꼬리를 올리며 복도로 들어설 때 쯤 아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국아, 너 진짜 재밌다."
"그럼 매점에서 빵하나만 사주던가"
"그럴까?"
콧소리 아주 헹헹 뿜어대며 애교웃음을 마구 흘리는 여자애와 그 옆에서 얼씨구 하며 웃어주는 남자.
그 잘난 남자가 누군지 단번에 알아챈 나는 여전히 바들거리는 다리와 함께 그 둘에게 걸어갔다.
책더미가 걸어서 다가오자 그 두 남녀도 조금 놀란 듯 했다. 그리고 난 그 두사람을 더 놀라게만들었다.
와르르-
"꺄아악! 너 뭐하는거야?"
호들갑을 떨며 자신의 쪽으로 쏟아진 책더미를 피하는 여자와 달리 남자는 책더미와 나를 태연하게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미 심기가 굉장히 불편했던 나는 그 남자의 눈을 똑바로 부릅뜨고 쳐다보았다.
"야! 너 일부로 우리 쪽에 엎었지?! 미쳤어? 다칠 뻔 했짜나!"
"내가 좀 많이 힘들어서 그런데 나 좀 도와주겠니?"
"야! 너 나 무시해?!"
옆에 그 콧소리년이 뭐라고 징징 대든 나는 여전히 그 남자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남자도 나를 여전히 그렇게 내려다보고있었다.
"정국아! 이 년한테 좀 뭐라고 해봐!"
"빵은 다음에 먹으러가자."
"응? 정..정국아?"
그렇게 읊으신 뒤 당황하는 콧소리년을 두고 흩어진 책을 주어담기 시작하는 남자였다.
나도 그제서야 후- 하고 숨을 한 번 내쉰 뒤 쭈구려 앉아 책을 주어담기 시작했다.
당황해서 아무것도 못하는 콧소리년을 두고 우리 둘은 책을 반반씩 주어 담고 일어섰다.
"어딘데"
"물리실."
둘의 말투엔 가시가 돋아있었다.
짧은 대화를 끝으로 난 한발자국 뒤 남자를 따라 물리실로 향했다.
나보다 두뼘 더 큰 키에 교복이 딱 잘어울리는 비율 좋은 체격.
뒷 모습만 해도 참 재수없이 완벽한 그 남자는 오늘 내가 심기가 불편한 원인 제공자임이 확실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죽여버릴거야, 전정국.
쾅-
물리실의 문이 닫히고 나는 일부러 과격하게 소리를 내며 책을 내려놓았다.
반면 전정국은 여전히 태연하게 책을 정상적으로 내려놓곤 뒤돌아 나를 보았다.
화가 나서 씩씩 대고 있는 나를 오히려 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바라보는 데 그게 더 나를 화나게 만들었다.
"전정국."
"왜"
"왜?"
"왜"
나는 전정국의 태도에 기가 막혀 눈을 감고 화를 더 참고 참았다.
몇 초더 마음을 정리하고 큰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말을 조근조근 꺼내어보았다.
대신 더 죽일 듯이 전정국을 째려보면서.
"니가 쳐잔 이불은 니가 곱게 개고 가랬지? 한 번만더 이불 안개고 가면 진짜 화낸다고 했어 안했어? 이불 치우라고 말 하기전에 치사하게 먼저 등교해? 죽고싶어?"
"어차피 한 침대에서 같이 자는 데 걍 니 꺼하는 김에 니가 좀 해달라니깐"
"허- 참내? 아침밥도 내가 하고, 설거지도 내가 해주는 데 그거 하나 못해줘?"
"그럼 걍 치우지말자."
"그러다 어머님 오시면! 욕은 내가 다 먹잖아!"
"..."
"이제 진짜 마지막 경고다. 한 번만더 아침에 이불 안치우고 가면 진짜 집 비번 바꿀거야."
전정국은 귀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끄덕 해보였고, 나는 이내 화를 가라앉히고 물리실을 나가기 위해 문으로 향했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에 다시 뒤돌아 전정국을 바라보곤 여전히 가시박힌 말투로 말했다.
"그래도 내 남편인데 좀 더 수준 높은 년이랑 놀아라. 자존심 상하니깐."
전정국은 피식 웃어 보이며 내 앞으로 다가와 허리를 숙여 얼굴을 가까이 했다.
"네 여보~"
약올리는 듯한 말투에 나도 질 수 없다는 생각으로 오히려 더 씽끗 웃어보였다.
그런 내가 재밌는 지 전정국도 미소를 지어보였다.
의미는 곱지 않더라도 우리는 얼굴을 마주보며 한껏 웃어보이고 있었고,
때 마침 창문으로 불어온 바람이 우리의 교복을 펄럭거리게 만들었다.
여기는 학교이고 우리는 교복을 입고 있다.
교복을 입은 우리는 19살이고, 내 나이 19살. 내 남편은 전정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