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전정국
w. 정국학개론
2018, 스물넷
사진이 조금 닳았다. 이 사진을 서울로 가지고 간 기억은 없는데, 고향 내려와 짐을 풀 때 사진이 흘러내리더라. 잊고 싶지 않았는데 잊어버렸나 보다.
환하게 웃고 있는 전정국 옆에서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나.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올린 하얀색 와이셔츠와 짙은 회색 교복바지를 입은 전정국과 하얀색 와이셔츠에 아이보리색 가디건을 걸치고 무릎까지 오는 짙은 회색 교복치마를 입은 나. 이때가 좋았는데. 사진을 쓰다듬으며 그때를 회상하다 고개를 저었다. 과거에 젖지 말자.
내게 입을 맞춘 전정국은 미안하다는 흔한 말도 없이 짐을 챙겨 가버렸다. 변한 게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 생각과는 다르게 전정국은 너무 많이 변해있었다. 그 변화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커서, 과거의 전정국과 현재의 전정국의 괴리가 너무 커서 닥쳐온 현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있었다.
" 지금 어디 사는지, 무슨 일 하는지 아무도 몰라. "
" ……. "
" 아, 박지민은 알겠다. "
" ……. "
" 전정국 결혼하는 것도 알았잖아. "
" ……. "
" 너 진짜 괜찮은 거 맞아? "
세희는 나를 걱정했다. 내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조잘대고 있지만 세희도 세희 나름대로 속이 문드러져 있을 게 뻔했다. 우리 옛날엔 진짜 좋았는데. 전정국을 만난 이후로 과거에 젖는 일이 많았다. 지금 생각해 봤자 달라지는 것 하나 없을 텐데. 몇 년 전을, 하물며 한 달 전을 후회해도 달라지는 건 없을 텐데, 한심한 짓거리만 반복하고 있다.
아무런 대답 없는 내 손을 꼭 잡아주었다. 세희의 버릇이었다. 다른 사람의 손을 잡는 건. 그 덕에 세희가 막 전학왔을 때 오해하는 남자애들이 많았다. 쟤 나 좋아하는 거 아니냐며. 세희는 나를 그렇게 위로했다. 세희와 나 사이에 뚫려있던 그 오래 시간들이 메꿔지는 기분이었다. 모든 게 다 전처럼 돌아가서 좋은데. 전정국 너는 왜.
" 나 4년 동안 전정국 안 찾았어. "
" 알지. 너 나도 안 찾았잖아. "
" 처음 몇 달 간은 너무 보고 싶었는데, 연락하기 싫었어. "
" 그리고 나중엔 못했겠지. 걔 졸업하고 아버지 돌아가시고는 너처럼 사라졌잖아. "
" 어? "
" 뭐야. 몰라? 걔 갑자기 사라졌잖아. 애들이랑 연락도 끊고. 근데 꼬박꼬박 동창회는 오고. "
" …몰랐어… "
" 걔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다 알고있었어. 너 보려고 동창회 나온다는 거. "
" ……. "
" 와서는 뭐 마려운 사람처럼 계속 문만 쳐다보고 있질 않나, 담배도 안 피우는 게 담배피운다고 밖에서 서성이질 않나. 딱 봐도 누구 기다리는 눈친데, 걔가 기다릴 사람이 너밖에 더 있어? "
" …그것도 몰랐어… "
" 몰랐겠지. 그래서 몰라, 나도. 전정국이 어떻게 살았는지, 어떻게 살고있는지. 니가 모르는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
세희는 아주 잠깐 나에게 질책하는 눈빛을 보냈다. 곧 앞에 놓인 딸기주스를 다 마신 세희는 부엌에서 더 가지고 오겠다며 몸을 일으켰다. 정말 딸기주스를 더 마시기 위해 그런 건지, 아님 나를 배려해서 자리를 피해준 건지, 세희가 내게서 등을 보이자마자 눈물이 터져나왔다. 차오르되 흘리지 않기 위해 주먹을 쥐고 눈을 꾹꾹 누르는데 제대로 흐르지 못한 눈물이 눈가에 번지듯 고인다.
*
박지민에게 연락하기로 했다. 전정국과 조금이라도 더 얘기해 보고 싶었다. 전정국의 결혼을 방해하고자 하는 마음은 아니었다. 단지 내가 없는 4년 동안 전정국이 어떻게 살았는지, 지금은 뭘 하면서 살고있는지, 오랜만에 만난 친구로서 묻고 싶은 것들이 가득이었다. 연락 한번 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던 내가 결혼한다는 전정국을 질책하기엔 잘못한 게 너무 많았다.
박지민은 타지에서 대학을 다닌다고 했다. 고등학교 때 박지민은 춤을 추던 애였다. 아이돌이나 댄서 같은 목표를 가지고 춤을 추는 건 아니었다. 그냥 춤이 좋다고 했다. 수업 시간 중 애들이 조금 쳐질 때쯤이면 선생님들은 늘 박지민을 불러 춤 한번 춰보라고 하곤 했다. 나는 박지민이 교실 앞에서 간단하게 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 그때 처음 춤추는 일이 멋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박지민이 관련 학과를 갔는지는 잘 모르겠다. 현실과 타협했는지, 아님 꿈을 고수했는지.
박지민 연락처를 아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세희가 동창들에게 받아온 박지민 연락처를 건네줬다. 한참을 고민했다. 문자를 넣어볼까. 어떻게 시작하지. 그냥 바로 전정국에 대해 물어볼까. 다른 말로 빙빙 돌려봤자 박지민은 내가 왜 저에게 연락을 했는지, 처음부터 그 목적을 꿰뚫어볼 것 같았다.
ㅡ 안녕 나 김여주휴
ㅡ ? 어 안녕
대폰을 사이에 두고 하는 연락이라 박지민이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진 모르겠지만 물음표 하나에서 의아함이 느껴졌다. 박지민의 답장을 받고 휴대폰에 손을 올려놓은 채 잠시 망설였다. 뭐부터 물어봐야 할까. 망설이는 사이 박지민에게서 문자가 하나 더 도착했다.
ㅡ 010 1997 0901
ㅡ 난 해줄 말 없고 니가 바라는 게 이건 거 같아서
박지민은 칼 같았다. 내가 기억하는 박지민은 꽤 다정하고 개구진 성격이었던 것 같은데, 박지민도 시간이 주는 변화를 피하진 못했나 보다. 나처럼.
어쩌면 잘된 일이었다. 전정국에 관한 얘기를. 어쩌면 전정국과 나에 관한 얘기를 제 3자와 나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전정국의 곁에 없었다고 해서, 전정국이 곧 누군가와 결혼한다고 해서 4년 전의 나와 전정국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난 4년 전 우리가 어긋났던, 그때부터 물어봐야 했다.
그 사이 박지민에게서 문자가 하나 더 도착했다.
ㅡ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라
찔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정말 되돌릴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결혼을 결심할 정도로 애틋한 전정국과 내가 모르는 그 누군가의 관계에서 내가 치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박지민이 마지막으로 박아놓은 쐐기에 웃음이 터져나왔다. 너와 다르게 나는 아직 추억 속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려왔다.
*
2013, 열아홉
" 넌 춤 왜 좋아해? "
박지민과 당번인 날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전정국을 먼저 보내고 교실 청소를 시작했다. 나는 칠판 담당, 박지민은 마루 담당. 찬물에 빨아온 걸레를 꼭 짜고 칠판을 없애버릴 심정으로 빡빡 닦으며 박지민에게 물었다. 춤을 왜 좋아하냐고. 박지민은 그게 뭐냐며 개구지게 웃었다.
" 넌 전정국 왜 좋아하는데? "
" 어? "
바보 같은 소리가 튀어나왔다. 박지민은 다시 웃는다.
" 질문이 뭐가 그래. "
" 니가 먼저 했다. "
퉁명스러운 내 말에 박지민은 여전히 웃으며 대답한다. 박지민의 황당한 질문에 잠시 멈췄던 칠판 닦기를 다시 시작했다. 박지민은 빗자루로 바닥을 쓸고 있었다. 한 사람이 칠판을 닦는 속도는 한 사람이 바닥을 쓰는 속도보다 비교적, 아니 어쩌면 훨씬 빠르다. 빠른 속도로 칠판을 다 닦은 나는 대충 걸레를 물에 적시고 창문에 걸어놓았다. 이제 반 이상을 쓸어낸 박지민이 허리가 아픈지 허리를 두드린다.
" 도와줄까? "
" 됐어. "
" 그럼 나 할 거 없는데. "
" 거기 앉아서 대답이나 해. "
" 무슨 대답? "
" 전정국 왜 좋아하는지. "
박지민은 다시 웃었다. 꼭 놀리는 것처럼 구는 행동에 한숨을 쉬며 교탁에 제일 가까운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는 꽤 진지하게 생각했던 것 같아. 전정국을 왜 좋아하냐고.
" 근데 나 전정국 좋아한다고 한 적 없는데? "
" 얼씨구. "
" 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신기 있어? "
" 절씨구. "
박지민은 이상한 추임새만 반복한다. 박지민이 그런 행동을 하는 것도 영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알고 있다. 나와 전정국와 관계를 우리 학교 애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하지만 전정국을 왜 좋아하냐는 질문은 낯설다. 간접적으로 돌려서 놀리는 애들은 많았어도 직접적으로 내게 전정국으로 좋아하냐고 묻는다든지, 박지민처럼 전정국을 왜 좋아하냐고 묻지는 않았다. 박지민 딴에는 내가 춤을 왜 좋아하냐고 질문한 것에 대해 복수하는 것 같긴 한데. 괘씸해서 대답하고 싶다.
" 잘생겼잖아. "
" 나는? "
" 너 진짜. 나랑 싸우고 싶으면 말로 해, 지민아. "
어금니를 꽉 깨물고 샐샐 웃는 내 모습에 박지민이 다시 웃음을 터뜨린다. 얼굴이 일그러질 지경까지 웃는 박지민의 모습을 빤히 쳐다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 그냥. "
" 그냥? "
" 그냥 좋아. "
" 나도 그래. "
" 너 전정국 좋아해? "
박지민 얼굴이 일그러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 나도 그냥 춤이 좋다고. "
" 아… "
" 아, 소름끼쳐. 아, 진짜 싫어, 너. "
우리는 웃었다. 나는 박지민에게서 원하는 대답을 들었고, 박지민은 내게서 원하는 답을 들었다. 박지민과 조금 더 친해졌다고 생각한 날이었다.
*
2014, 스물
" 야, 나 합격했어! "
꿈에 그리던 학교였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가고 싶다고 늘 말하고 다녔던 학교였고, 그 학교만 간다면 우리 집 같은 개천에서 용이 나는 거라고 엄마가 그랬다. 노력한 결과는 좋았고, 전정국에게 당장 이 소식을 알려주고 싶었다.
전정국은 내 소식을 듣고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전정국은 나와 같은 대학교를 지원했다. 무슨 과든 상관은 없다고, 같은 대학교면 된다고 굳은 다짐을 하더니 그나마 커트라인과 경쟁률이 제일 낮은 과를 지원했다. 그리고 전정국은 예비번호를 받았다. 그 정도면 무난히 추가합격이 가능한 번호였다. 우리 동네에서 서울에 있는 대학을 둘이나 간다며 다들 기뻐했다.
그 기쁨은 얼마 가지 않았다. 지금쯤이면 추가합격이 되었을 전정국이 소식이 없었다. 휴대폰도 받지 않았고, 집전화도 받지 않았다. 의아함에 전정국 집 앞으로 찾아갔다. 파란색 대문을 두드리는 대신 몇 달 전에 고쳤다며 전정국이 자랑하던 초인종을 눌렀다. 쨍한 초인종 소리가 들린 지 10초도 채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고 전정국이 나왔다. 핼숙해진 느낌에 당황하며 얼굴에 손을 가져다대려는데, 전정국이 손을 피한다. 머쓱해진 손을 그 앞에서 잠시 멈췄다가 거뒀다.
" 무슨 일 있어? "
" ……. "
" 얼굴 안 좋아 보여. "
" ……. "
" 요새 통 연락이 없어서. "
" ……. "
" 대학은…… "
" 나 대학 안 가. "
" 어? "
" 안 간다고. "
전정국은 그렇게 간단히 말했다. 나한텐 간단하지 않은 문제를 그렇게 간단하게. 같은 대학을 가겠다고 약속했으면서. 어두운 표정으로 차갑게 던지는 말들에 울상을 지었다.
" 무슨 말이야, 그게? "
" ……. "
" 알아듣게 설명해. "
전정국은 머리에 손을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내가 보채는 게 귀찮다는 것처럼, 그렇게 굴었다, 전정국은. 몇 주 전까지 같이 기뻐한 게 아직 눈에 선한데, 갑작스럽게 달라진 전정국의 모습에 마음이 불안해졌다. 내가 싫어진 걸까. 그래서 나와 같은 대학을 가기 싫어진 걸까.
" 정국아, 제발…… "
" 나 대학 안 갈 거야. "
" 그러니까 왜 그러는데, 갑자기. "
" 그냥. "
" …그냥? "
" 싫어졌어. "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진 것 같았다.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다. 전정국의 얼굴에 실증이 가득했다. 다정하지 않은 눈빛을 받아들이는 게 힘들어서 고개를 숙였다. 금세 맺힌 눈물이 방울져서 떨어지고, 내 앞에서 한참을 말 없이 있던 전정국이 한숨을 쉬었다.
내가 싫어졌냐고 묻지 못했다. 마지막임을 쐐기 박는 말을 전정국 입에서 듣고 싶지 않았다. 그 마지막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을 뿐더러 갑작스런 전정국의 변심을 받아들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로 내 꿈의 대학은 내 최악의 대학이 되었다. 너와 같은 곳에서 같은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거라고 나를 들뜨게 만들었던 그 학교가 나를 최악으로 이끈 것만 같았다.
전정국은 졸업식에 뒤늦게 참석했다. 나도, 전정국도 서로를 쳐다보지 않았다. 세희가 내 눈치를 보았고, 전정국 옆에 앉아있던 박지민도 그랬다. 우리 관계에 틀어짐이 있는 건 우리뿐만이 아닌 모두가 알고 있었다. 1시간이 채 되지 않은 졸업식이 끝나고 나는 친구들과 사진을 찍었다. 세희와 사진을 찍고, 반장과 사진을 찍고, 박지민과도 사진을 찍고. 전정국이 있어 내 최고의 졸업식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정국이 없어 최악의 졸업식이 되고 말았다.
전정국은 그랬다. 내 최고를 최악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 반대로 내 최악을 최고로 만들어줄 수도 있는 사람.
*
2018. 스물넷
박지민에게서 전정국의 연락처를 받은 지 일주일이 지났다. 연락할 수가 없었다. 나는 아직 그 마지막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전정국에게 연락하면 그 마지막을 받아들여야 할 것 같았다.
세희는 우리의 마지막을 몰랐다. 졸업식 때 우리가 왜 서로를 쳐다보지도 않았는지 세희는 아직도 모른다. 묻고 싶은 게 많은 표정이었지만 말을 아꼈다. 사실 나도 몰라서 그래. 전정국이 그날 나에게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뭐가 싫어진 건지. 나도 진짜 몰라서 답을 못해주겠어.
전정국에게 연락을 결심한 건 일주일을 더 보낸 후였다. 박지민에게서 연락처를 받은 지 이주가 지나서야, 나는 휴대폰에 비로소 전정국의 번호를 입력할 수 있었다. 번호를 달달 외울 정도로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해서 그 열한자리를 눈을 감고 칠 수도 있었다.
카톡 사진은 없었다. 허무하게도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저장한 이름 석자 전정국, 그게 다였다. 4년 전에는 프사로 내 사진도 하고, 자기 사진도 하고, 이것저것 많이 올리고 바꾸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많이 변한 모습에 조금 의아하다가도 괜히 기분이 이상했다. 결혼한 사람 사진 있을까 봐 많이 걱정했는데, 상처는 덜 받았다 싶다.
전정국에게 카톡을 보낼까, 문자를 보낼까, 아님 피하지 못하게 전화를 할까 고민했다. 전화가 가장 확실한 방법인데 무서웠다. 말실수 할까 봐. 마음에도 없는 소리가 튀어나갈까 봐.
ㅡ 바빠?
ㅡ 나 김여주결
론은 카톡이었다. 제일 무난하다. 그냥 4년 전 알았던 동창처럼. 우리에겐 젖을 만한 과거는 없는 것처럼. 우리의 마지막도, 시작도 없었던 것처럼.
전정국에게서 답장이 온 건 몇 시간 후였다. 오전 열한 시에 보냈고, 답장이 저녁 일곱 시에 왔으니까 정확히는 여덟 시간만이다.
ㅡ 아니 별로
ㅡ 아니
ㅡ 바빴는데 지금은 안 바빠
나처럼 허둥지둥 정신이 없어 보여서 마음이 놓였다. 나만 네가 어려운 게 아니구나. 너도 나처럼 내가 많이 어려웠으면 좋겠다.
1을 그렇게 빨리 없애고도 답장하길 망설였다. 그 이상으로 뭐라고 어떻게 보내야 할지 고민하는데, 전정국에게서 답장 하나가 더 온다.
ㅡ 만날래?
너도 많이 망설이고 보낸 말일까. 조금 설렜다. 안 될 거 아는데, 마지막인 거 뻔히 아는데, 나처럼 너도 내게 할 말이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조금 몽글몽글해졌다.
만남을 지체하지 않았다. 내가 지금 전정국과 어떤 사이로 정의된 게 아니라 다음을 기약할 수가 없었다. 전정국은 근처 타지에 있다고 했다. 차로 가면 1시간 정도가 걸리니 8시 반에 동창회 때 만났던 호프집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문득 전정국이 호프집 옆 골목에서 그 사람과 통화했던 일이 떠올랐다. 여자 옆자리에 앉는 것도 싫어하는 것 같던데, 나와 만나도 괜찮은 걸까.
*
2014, 스물
동기와는 정말 우연히 사귀게 되었다. 술자리에서 자주 만나다 보니 얼굴이 눈에 익었고, 대화가 잘 통했고, 마음이 잘 맞았다. 결정적으로는 주변의 분위기가 우리를 몰았다. 고등학교 때 전정국과 나의 미묘한 관계를 알면서도 모른 척해주었던 친구들이 있어서 그랬을까, 선배들과 동기들이 우리를 몰아가는 분위기가 낯설었고, 억지로는 아니었지만 반강제로 연애를 시작했다.
남자친구는 센스가 넘쳤다. 누나가 있어서 여자를 잘 아는 편이었고, 비교적 나를 편안하게 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크게 마음을 가진 건 아닌 터라 서로 원만한 관계를 쌓을 수 있었다. 다만, 좋은 감정이 연애감정이 아닌 걸 느끼게 된 건 스킨십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손은 잡을 수 있었다. 포옹도, 어깨동무도, 가벼운 뽀뽀도, 간단한 스킨십 정도는 받아들일 수 있다. 평범한 커플보다 스킨십 진도가 느린 걸 알게 된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고, 그 후로부터 농도가 짙은 스킨십을 하는 남자친구를 받아들이기 어려워졌다.
" 진짜 왜 그러는데. "
" …좀… 부담스러워서… "
" 내가 뭐, 큰 거 바란 거야? "
" 아니, 그건 아닌데… "
남자친구 입장도 이해가 갔다. 스킨십을 거부하는 여자친구. 당연히 애정전선에 문제가 있다고 파악한 남자친구는 그 이후로 내게 손도 대지 않았다. 포옹, 뽀뽀는 물론이고 손도 잡지 않았다. 동기들 역시 그 변화를 알아차렸다. 그 상태로 우리는 새해를 함께 맞았고, 남자친구는 신입생들에게 눈을 돌렸다.
마음이 아프지는 않았다. 애초부터 깊은 연애감정을 가진 건 아니었으니까. 남자친구도 그랬다. 과씨씨라는 껍데기를 벗기엔 주변의 시선이 조금은 신경이 쓰이기에 군대를 가기 전까지만 붙잡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그럴 수 없었다.
그 애는 나와 수업을 함께 듣고, 밥을 함께 먹고, 신입생들과의 술자리를 즐겼다. 아는 여자 후배들이 늘어났고, 밥을 함께 먹는 시간이 줄어들었고, 수업을 빠지는 일이 잦았다. 문제가 대두된 건 그 애가 단톡방에 여자 후배와 찍은 셀카를 찍으면서부터였다. 잘못 보낸 게 분명했다. 사진은 수위가 꽤 높았다. 누가 봐도 모텔이었고, 전신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둘 모두 나체 상태였다.
" 미안해, 진짜. 내가… "
" 괜찮아. "
그 애는 내게 사과했다. 사실 뭐가 미안한 건지, 뭐가 괜찮은 건지 모르겠다. 여자친구를 두고 여자 후배와 그런 짓을 한 게 미안한 건지, 아니면 단톡방에 올려서 내가 민망한 모양새가 된 게 미안한 건지. 그렇다면 나는 그 애가 바람을 피운 게 괜찮다는 건지, 나를 민망하게 만든 것이 괜찮다는 건지. 그냥 그대로 그 주제는 끝이었다. 적어도 우리에겐.
문제를 부풀린 건 동기들이었다. 그것도 여자 동기들. 버젓이 과씨씨를 하면서 과 내에서 바람을 피우는 게 말이 되냐며 노발대발이었다. 이해했다. 내 동기가 그런 일을 겪었다면 나도 그랬을 것을. 다만, 우리의 관계는 예전 같지 않았고, 서로에 대한 연애감정이 끝난 지 오래였다는 것. 그걸 모르고 있었다. 굳이 해명할 생각은 없었다. 편하자고 그 관계를 유지한 그 애가 감당할 몫이라고 생각했다.
그 애는 그렇게 입대했다. 여자 후배는 한 학기 정도 학교를 다니다 휴학했다. 과뿐만이 아니라 단과대학, 더 넓게는 대학으로까지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다. 실명이 밝혀진 건 순식간이었고, 아마 학교가 잠잠해지면 나올 생각인 모양이었다.
주변의 시선이 조금은 버거웠지만 많이 힘들진 않았다. 일부러 학교 근로 활동을 시작했고, 성적을 올려 장학금을 받았고, 대외활동을 시작해 상장을 받았다. 나에 관한 관심은 점차 줄어들었고, 내가 3학년이 되었을 땐 소문은 소문이었을 뿐, 내 이름이 오르내리진 않았다.
변명이라면 변명이다. 나는 전정국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신경을 쓸 여유도 없었고, 찾을 여유도 없었다. 내 인생 살아가기에 급급했고, 그 인생에 전정국이 없는 게 가끔 야속했을 뿐, 그 이상으로 그리워하진 않았다. 전정국을 만나게 되면 말하고 싶었다. 넌 왜 내 인생을 최악으로 치닫게 했냐고.
네가 있었으면 이런 일 따위 겪지 않았을 텐데.
*
2018, 스물넷
" 일찍 와있었네. "
" 어, 뭐. 조금 긴장돼서 세게 밟다보니. "
전정국은 그날과 다르게 빠르게 입을 열었다. 조금 여유를 가진 것도 같았다. 맥주 500과 감자튀김을 주문했다. 입이 바싹 마르고, 손에 땀이 났다. 이제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어떤 말부터 꺼내서 어떻게 마지막을 받아들여야 할까.
빠르게 도착한 맥주 500을 한 모금 마신 전정국은 나보다도 먼저 입을 열었다.
" 잘 지냈어? "
" ……. "
" 잘 지냈지? "
" …응. 너는? "
거짓말을 했다. 잘 지낸다고. 거짓말인지도 잘 모르겠다. 잘 지냈을 수도 있겠다. 전정국이 없는 동안 연애답지 않은 연애도 하고, 가슴 설레는 사람도 만나고, 남들 부럽지 않게 잘 지냈던 것 같기도 하다.
전정국은 맥주 손잡이를 잡았다 놓기를 반복하며 말을 아끼다, 곧 대답했다.
" 잘 지냈지. "
" …음, 어디 살아? "
" 그냥, 근처에. 여기서 한 시간쯤 걸리는 곳. "
" 학교는 다녀? "
" 아니, 안 갔어. 일하고 있어. "
" 무슨 일 하는데? "
"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로 버는 일. 말할 정도로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라서. "
" …그렇구나. "
묻고 싶은 걸 물었는데, 만족스러운 대답이 나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빙빙 둘러서 대답을 피하는 전정국이 마음에 들지 않아 더이상 묻지 않고 맥주를 들이켰다. 갓 나온 감자튀김 하나를 입에 넣었다.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전정국이 말한다.
" 결혼은 안 물어? "
" ……. "
" 묻고 싶은 거 그거 아니야? "
" ……. "
" 얼마나 됐는지, 결혼은 언제 하는지, 뭐 이런 거. "
" ……. "
" 아닌가. "
방금 씹어 넘긴 감자튀김이 목구멍에 콱 하고 막힌 기분이 들었다. 터져나오는 기침에 입을 막고 연신 콜록거렸다. 당황한 표정을 짓는 전정국을 노려봤다.
" 안 궁금해, 그런 거. "
" 아, 안 궁금해? "
" 궁금해한 적도 없고, 궁금해할 일도 업어. "
" …궁금해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
" 난. "
" ……. "
잠시 뜸을 들였다. 묻고 싶은 게 많았는데, 물어도 쉽게 대답해줄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관두기로 했는데, 전정국은 사람 속을 긁는 재주가 있다. 우리가 만난 목적에 왜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그 사람이 끼어있어야 하는지, 왜 우리가 만났는데 그 사람 얘기로 시작해야 하는지. 속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4년의 시간이 흘렀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전정국에게 소중한 사람이 생겼고, 곧 사랑의 결실을 맺는다. 그럼에도 전정국을 만나고자 한 건 우리의 마지막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해야 했기 때문이다. 너를 끝내고 나도 새로운 시작을 하고 싶어서.
" 잘 못 지냈어. "
" 어? "
" 잘 지낸 적 없었어. "
" ……. "
" 네가 그지같이 만들었잖아. "
" ……. "
" 너 나한테 왜 그랬어? "
" 야, 김여주…… "
" 나한테 왜 그랬냐고. 나 너한테 묻고 싶은 거 많아서 보자고 한 거야. 근데 하나만 묻자. 너 나한테 진짜 왜 그랬어? "
" ……. "
주어 없는 말에도 전정국은 대충 눈치챈 듯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가장 솔직한 대답이길 원했다. 빙빙 둘러서 나를 속이려는 대답 말고, 가장 솔직하고 정확한 대답. 4년 전 우리의 관계를 진심으로 진지하게 생각했다면 전정국은 그렇게 대답해야 했다.
그런데 전정국은.
" 이런 거 이제 와서 말해 뭐하냐. "
" …뭐? "
"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냥 술이나 한잔 하고. 기분 좋게 가자, 어? "
" ……. "
당시의 나에게 전정국은 내 전부였다. 좋아한다는 말이 부족할 정도여서 전정국을 사랑한다고 했다. 우리가 성인이 되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을 줄 알았고, 우리의 공동 목표는 서로의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전정국이 과거를 먼저 잊으려고 한다. 아직 그곳에 머물러 있는 나를 민망하게 만든다.
맥주는 반 이상 남았고, 감자튀김은 하나씩 집어먹은 게 겨우였다. 그럼에도 의자에 있는 코트와 가방을 챙기는 건 자존심이었다. 먼저 과거를 떠나버린 너에 대한 내 자존심.
" 나 갈래. "
" 야, 김여주. 나 너 보려고 한 시간 왔어. "
" 아, 너 그건 알아야 해. "
" ……. "
" 나한테 가벼운 마음 가지지 마. "
" ……. "
" 내 생각 하면 우울했음 좋겠고, 슬펐음 좋겠어. 지나간 과거 붙잡는 미련한 애라고 생각해도 상관없는데, 난 니가 그랬으면 좋겠어. 그리고… "
" ……. "
" 결혼 축하한다. "
//////////사담//////////
오늘 양이 좀 많지 않나요? 힝... 제가 메모장에 미리 써놓은 탓에 분량 조절을 드디어 실패했습니다!
아 그리고 제가 완결을 아마 좀 더 늦출 것 같아요 이쯤에서 완결내야지라고 생각했던 부분에서 스토리가 더 떠올라서 완결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습니다 (ㅠㅠ)
그때까지는 아마 이 연재기간을 유지하고 글이 잘 안 써질 경우에는 텀이 더 늘어날 수도 있다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다들 설은 잘 보내셨어요? 저는 어제 오늘 할머니댁 가서 세배하고 용돈도 받고 그러느라 정신이 무지 없었어요...
다들 맛난 거 많이 드시고 이왕이면 세뱃돈도 많이 받으셨으면 좋겠네요! 남은 연휴도 푹 쉬시면서 즐겁게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참고로, 여러분 저번에 암호닉 신청은 [암호닉] (주저리주저리) 요렇게 예시를 적어드렸는데 다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암호닉] (작가님 어쩌구 저쩌구) 이렇게 () 괄호까지 쳐주신 분들이 몇 계시더라구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예시였는데 넘 귀엽 ㅠ... 입덕할 뻔했어요ㅠ...
↓ 암호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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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치 호비 애플파이 월드콘 고티에 오늘도행복해 꾸깅 보름달 꾸꾸꾹꾹 0105 쿠키스 달리 봉이 밍슈슈 순구육 담이 민윤기 코딱지 크림치즈 이꾹 멈찌 요리에센스석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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