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 지 / 개 / 벽
天地開闢
“참으로… 무료하기 그지없구나.”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이 푸른 기운이 감도는 눈동자를 덮었다. 눈물로 축축하게 젖은 뺨을 맞대며 신선은 정국의 목을 끌어안았다. 상제가 사는 천상백옥경, 그 아래에는 상제를 모시는 신선들이 살고 있다. 끝없는 억겁의 시간을 살며 몇 만 년간 특별한 일 하나 일어나지 않는 선계는 신선의 말처럼 한 없이 지루하고 심심하기 그지없다. 희뿌연 안개와 구름 너머로 인간들이 사는 모습을 보는 것만이 그들의 유일한 낙이었다. 이 또한 인간들이 잠드는 밤이면 할 수 없게 되니, 만약 제 옆에 있는 정국이 아니었다면 혼자 이 넓은 신전(神殿)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지 신선은 아득하기만 했다. 그래, 애초에 정국을 창조할 때 연유가 그것이었지. 혼자 있기 무료하여서.
혜벽(譿碧), 부신에게서 태어나 익곤봉의 주인이 된 신선은 충직한 벗, 정국을 조물했다. 천하의 바람둥이 신선이 산다는 서쪽 지천봉에는 선녀만 수백이 넘는다 하고, 전쟁영웅 신선이 사는 동쪽 소언봉에는 신병만 수백수천명이라 한다. 헌데도 혜벽에게는 자신이 친히 조물한 정국만으로 충분했다.
“불멸이란 이리도 덧없는 것을, 인간들은 어리석다.”
신선의 새하얀 뺨에 눈물이 흘렀다. 구름 아래로 불로불사의 약초를 찾아 헤매는 인간을 보며 신선은 그리 읊조렸다. 그렇지 않니? 라고 묻듯 자신을 바라보는 혜벽에, 정국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안아줘.”
혜벽이 정국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는 혜벽이 좀 더 편하게 그댈 수 있도록 몸을 내어주며 작은 몸을 추슬러 안았다. 투정부리고, 한없이 떼쓰는 신선을 달래는 일은 이미 숨을 쉬는 것만큼 익숙한 일이었다. 허나 시간이 갈수록 그 익숙한 일이 쉬운 일이 아닌 게 되어가고 있다는 걸, 그녀는 알까. 얄쌍한 허벅이가 정국의 허리를 감으며 품을 파고들었다. 정국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아, 이러면 내가 좀 힘든데. 이 천진난만은 신선은 가끔 제가 만든 피조물을 시험하려 들 때가 있다. 정국은 애써 이런 표정을 들키지 않으려 고개를 젖혔다.
“날 봐야지, 아가.”
가끔 신선은 정국을 더러 저런 낯간지런 호칭으로 부르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청을 들어주지 않고는 못 배겼다. 나비문양의 머리꽂이를 꼽고 하늘하늘한 옷자락을 걸친 신선은 티 하나 없이 맑고 아름다웠다. 감히, 자신을 창조한 그녀에게 이따위 역겨운 마음을 품다니 죽어 마땅한 죄악이다. 정국은 애써 감정을 숨기며 마주친 눈으로 싱긋 웃어보였다. 당장 보드라운 입술을 삼키고 싶은 욕구를 억눌렀다. 죽어도 자신이 어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감정이 딱히 실리지 않은 눈물을 흘리며 두 눈이 발갛게 상기되었다. 정국은 정신없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눈물 젖은 뺨에 입술을 찍어 눌렀다. 이것이 그에게 허락된 최대치의 애정표현이었다. 이마저도 신선이 정신이 없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매일같이 이런 고문을 당하게 될 줄이야. 서둘러 상제께 당분간 출가를 윤허 해달라 청해야 겠다. 잠시 바깥바람을 쐬고 와야 할 것 같으니.
“인간들은 무엇이 그리 재밌을까? 하계는 선계보다 시간도 훨씬 빠른데 말이야.”
“…하계인들은 살기위해 부지런히 몸을 움직입니다. 살고자하는 몸부림이 모여 하나의 무료하지 않은 세계를 일구는 것이지요.”
인간세상은 선계와 다르다. 사람들은 먹고, 자고, 싸우고, 사랑하며 살아간다. 그 가운데 크고 작은 일들이 일어나고 인간세상은 지루할 틈조차 느끼지 못한 채 아주 바쁘게 돌아간다. 혜벽이 그것이 가장 부러웠다. 무료하지 않다는 것, 외롭지 않다는 것.
“그 바쁜 가운데도 사랑을 하는구나, 그들은.”
“…….”
“아무런 욕망도 욕심도 없는 이곳과는 달라….”
아니, 당신이 잘못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어리석을 만큼 미련하고, 감정에 휘둘린다.”
“…….”
“헌데도 나는 그런 인간들이 부럽구나. 연모, 연모라. 이곳에선 죽어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인데 말이야.”
이곳에도 당신을 향한 그 연모라는 것이, 욕망이라는 것이 도사리고 있음을. 고백했어야 했다. 그 때, 당신을 연모한다 속삭이며 그 붉은 입술을 삼켰어야 했어. 지체한 내 탓이다. 당신이 인간의 감정 따위가 궁금하여 하계로 내려가기 전에, 어리석은 인간과 사랑에 빠지기 전에, 내가 먼저 당신을 잡아챘어야 했어.
“예, 이곳은 너무도 평이하고, 한 없이 단조롭습니다.”
허나 정국은 씁쓸한 미소를 띄우며 감정 없이 뇌까렸다. 그녀를 어르고 달래는 일마저 하지 못할까 노심초사하는 마음이 반사되어 자신도 모르게 신선의 마른 등을 애타게 쓸고, 또 어루만진다.
“하계가 궁금하구나.”
“…….”
“내가 직접 가 보아야겠어. 아가. 괜찮지?”
가시면 안 됩니다. 곁에 가만 계세요. 그렇게 말하고 그녀를 제 품에 붙잡고 있고만 싶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허나 죽어도, 정국은 그녀의 말을 거역할 수 없다. 그건 천지가 개벽할 때부터 당연한 순리였다.
天
地
開
闢
하늘과 맞닿을 듯한 높은 산. 대나무 숲을 헤치고 나아가면 그 속에는 마치 세상과 단절된 듯한 자연이 있다. 드넓게 펼쳐진 녹음 사이에 눈이 시리게 푸른 냇물이 흐르고 동쪽 끝 절벽에는 폭포가 흘러 그 주변은 안개로 자욱하다. 하계인들은 이 곳을 보며 선계가 어떤 곳일까 짐작이나 한다. 그들의 생각보다 선계는 훨씬 더 아름다고 무한한 곳이었지만, 하계에선 이곳이 선계와 가장 비슷할 테니까. 허나 워낙 깊은 산중에 도사리고 있는 곳이라 인간의 발길은 잘 닿지 않는 곳이다. 생물의 쉼터, 새가 지저귀는 소리와 냇물소리만 만연한 그곳에 어느새 낮은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젠장, 드럽게.”
그 구름은 점차 높게 떠오르다가 이내 한 형체를 만들어내고는 사라진다. 진푸른 비단, 아니 비단보다 훨씬 눈부시고 부드러운 천으로 된 옷을 입고서 짜증스럽게 머리를 터는 이. 그가 바로 구름이 남기고 난 형체였다. 천상의 사람인냥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기품과 아름다움을 머금은 사내는 어울리지 않게 상스러운 말을 내뱉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의 발이 닿은 풀은 순식간에 생명력을 뿜어내며 더욱 초록빛으로 형형빛을 냈다.
“세상이 말세야. 말세가 틀림없어. 그렇지 않고서야….”
태형은 계속해서 혼잣말을 내뱉으며 빠르게 걸었다. 구름을 타고가면 눈 깜짝할 사이에 목적지에 도착하겠지만, 하계인들이 봤다간 거품물고 쓰러진다는 선녀의 주의가 떠올라 이 악물고 인내하는 중이었다. 허나 보폭이 워낙 크고 급하게 걸은 탓에(그래도 기품은 무너지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한 초가 앞에 당도할 수 있었다. 무릉도원 속에 위치한 초가는 자연과 어울리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뜬금 없어서 낯선 느낌을 주었다. 초가 옆으론 정말 신선들이 살 법한 봉우리와 절벽이 있었는데, 그 배경은 이 초가에 사는 사람마저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상상하게 만들었다. 태형은 허름하지만 깨끗한 초가 벽을 툭툭 두드렸다. 힘조절을 잘못해서 무너지기라도 하면 머리채가 잡힐 지도 모르니 최대한 조심조심히.
헌데, 어찌 아무런 기척이 들리지 않는다. 태형이 짙은 눈썹 사이를 일그러뜨린다.
“이 여자가 진짜!”
성을 내자 바람이 일어 주위 나무를 뿌리 뽑을 듯이 뒤흔들었다. 정말 뽑히기라도 하면 큰 일이니 중간에 정신을 차린 태형이 마음을 진정시키고 심호흡을 했다.
“아, 좀 나와봐요. 얘기 좀 하게!”
나오라는 사람, 아니 신은 응답도 없는데 이 산에는 벌써 신선의 방문이 소문이라도 난 모양이다. 평소엔 첩첩산중에 숨어있어 보기도 힘들다던 그 귀한 학이 날개를 펼치고 하늘을 둥글게 날고 있었다.
“이 나라가 정녕 망조가 들었나.”
태형은 슬슬 짜증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그냥 문을 확 열고 들어가버려? 위험한 고민을 할 쯔음이었다.
“네가 참지 못하고 문을 열었다면. 널 저 학의 먹이로 주었을 게다.”
제 마음을 어찌 읽은 것인지 저런 섬뜩한 말을 하며 초가에서 한 사람이 나왔다. 다정다감한 여인의 목소리, 또 인간과 다름없는 행색을 한 여인의 모습. 허나 태형은 그녀가 한낮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부신에게서 바로 태어난 신선 혜벽. 저 고귀한 선인이 어찌 이 인간세상에 발돋우고 있는지, 정말 기함을 내지를 일이다.
“허이고, 저도 신선입니다. 고작 학의 먹이나 되자고 하계에 내려왔을까?”
“염병.”
고귀한 신선은 입버릇이 고약했다. 남들은 맨날 정국에게 아가, 아가 하며 다정한 말만 읊조리기에 혜벽의 실체를 모르고 있었지만 실은 선계에선 딱히 고얀 말을 할 필요가 없었을 뿐이다. 선계에서도 태형을 만나면 맨날 저주의 말에 욕지기만 해댔으니, 둘은 예전부터 원수지간이 틀림없었다. 딱히 사연이 있는 건 아니었다. 단지 성정의 차이일 뿐이다.
“십육만 년 만에 어리광이라니. 이미 그럴 시기는 지났다는 생각이 안 드시나?”
“무엇이 어리광이라는 거지?”
손으로 멀리 있는 잎새 하나를 딴 태형이 그걸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하계인과 혼인이라니. 선계가 발칵 뒤집어 지겠소.”
정말 질릴대로 질려버렸다는 태형의 얼굴에도, 혜벽은 빙긋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인간세상으로 내려온 지도 네 해가 지났다. 단순한 호기심에서부터 시작된 하계의 여정은 혼인이라는 기함을 내지를 결말을 내 놓았다. 부신의 핏줄 신선과 인간의 혼인이라? 태형은 처음에 그 소식을 듣곤 제 귀가 잘못 된 것이 아닐까? 아니면 혜벽 신선이 드디어 미친 겐가? 싶어 온 종일 혼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축하해주러 온 것이라면 고맙게 받도록 하지.”
“허.”
혜벽의 뻔뻔한 태도가 허를 찔렀다.
“축하는 바라지도 말아야지. 지금 당신 때문에 선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고는 있습니까?”
저 대체 뭔 소리를 짓걸이는 게냐 라고 말하는 듯한 얼굴 때문에 속이 답답하다. 옥가락지부터 금빛 손톱막이까지 온갖 장신구를 다 걸친 손으로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 모습을 보곤 혜벽은 혀를 쯧쯧 차며 선계의 재물이란 재물은 죄다 저 놈 손에 들었구나 하고 읊조렸다.
“부신께서 전쟁에 관한 일을 익곤봉에 맡기셨소. 당신이 부재하는 동안 정국이 그 일을 맡아 했지.”
“헌데?”
“그 쪽 신선 때문에 선인정국이 제정신 아닌 건 알고 있었소?”
혜벽의 푸른 눈동자가 의아한 듯 크게 팽창된다. 정국이라면 자신이 없어도 거뜬히 익곤봉을 다스릴 수 있을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제 아이는 충분히 그럴 능력도 재간도 있었다. 헌데 그런 아이가 제정신이 아니라니.
“혼인을 무르시오.”
“말을 좀 알아듣게 해주었으면 좋겠는데.”
“당신을 마음에 담은 사내 하나 죽일 생각이 아니라면, 인간과의 혼인을 무르라 하였소.”
태형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했다.
“정국, 그 놈이 미쳐 웅진에 전쟁이란 전쟁은 다 일으키고 있소. 역병을 부러 퍼뜨리는 것부터 태백에까지 손을 뻗어 웅진과 전쟁을 벌이지 뭐요.”
“그 아이가 왜….”
“왜겠소?”
자신이 창조하였기에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하계에 내려온 시간동안 아무리 떨어져 있었더라도 변함이 없을 줄 알았다. 그래, 신선은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허나, 타인에게서 전해들은 정국은 많이, 아주 많이 변해 있었다.
“당신을 사모하여서겠지.”
“뭐?”
태형은 아무런 감정이 깃들지 않은 눈을 하고서 손을 까닥여 수만의 목숨을 죽여버리던 정국의 모습을 기억해 냈다. 익곤봉과 아주 오래 알고 지냈지만 정국의 그런 모습은 태형마저 처음보는 것이었다. 정국이 노리는 것은 하찮은 인간 여럿의 목숨이 아니다. 단지 이렇게 죽이고, 죽이다 보면 제 여인의 짝이 될 그 사내도 걸려들지 않을까. 그런 끔찍한 기대에서 비롯된 전쟁들이었다.
“혼인소식을 들은 이후로 더 미쳐 날뛰더이다. 부신도 그 자가 저지르는 패악을 몰라서 가만히 계시는 게 아닐 게요. 정말 곧 선계가 뒤집어 질 것이라고.”
혜벽이 여전히 못 믿겠다는 눈으로 태형을 올려다봤다. 원수지간은 분명했지만 이런 일로 거짓말을 할 자는 아니었다. 그러니 더욱 기분이 이상한 것이다.
“어서 선계로 올라가 보시오. 정국, 그 자를 만나보라고. 당신 힘으로 뜯어말리던지 아니면 당신이 창조했으니 당신이 없애던지.”
“엿 같은 소리 하려거든 이만 돌아가렴.”
내 손으로 만들었으니 내 손으로 없애라. 그 말에 혜벽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 신선의 가시박힌 말에도 동요치 않은 태형은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내 생각에 가장 좋은 방법은 당신이 혼인을 무르고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인 듯 싶은데.”
“…….”
“선택은 당신이 하시오.”
경고 아닌 경고를 날린 태형은 등장과 비슷하게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의 빈자리를 채우는 안개마저 찰나의 시간을 머무르다 공기 속으로 흩어진다. 혜벽은 있던 곳에 가만히 섰다. 그녀를 둘러싼 무위자연은 여전하다. 허나 이곳은 선계와는 다른 하계의 것이고, 하계에는 그녀와 내일이면 혼인을 할 인간사내가 숨을 쉬며 살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남겨두고 온 익곤봉에있는 정국이, 그 하계를 기어코 망치려 하고 있다. 여기서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혜벽은 곧장 선계로 올라갔다. 그녀를 감싼 연기가 몸을 붕 띄우고 그 몸을 감싸 안다가 천천히 지상위로 떠올렸다. 선계에서와 다른 투박한 옷감으로 된 치마를 입고 있었지만 선계에 오르자 그녀는 반짝반짝 빛이 났다.
“혜벽신선을 뵙습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들린 익곤봉 신전. 그 앞을 지키던 선녀들이 혜벽을 보곤 놀라 한쪽 무릎에 손을 올리고 인사했다.
“정국은 어디에 있지?”
“정국선인께서는 주제전(朱緹殿) 계십니다.”
주제전. 붉디붉은 방. 하계의 전쟁과 죽음을 전담하는 그 방에서, 정국은 수없는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혜벽은 곧장 정국이 있다는 주제전으로 향하였다. 붉은 구슬로 된 주렴을 걷고 암묵 속에 발을 딛자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아가….”
무정한 뒷모습으로, 나긋한 손짓으로 인간을 짓누르고 악을 행하던 사내가 한 마디 부름에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정국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직 신선의 낭군이 될 사내를 죽이지 못했는데, 그녀가 자진서 제게 돌아왔을 리가 없다. 그리운 마음이 만들어낸 환청이다. 어리석은 착각이다. 냉정한 선인은 애써 그 말소리를 무시하고 다시금 손을 뻗어 수많은 죄악을 저질렀다. 그 악행가운데 포근한 향기가 스쳤다. 그 익숙한 것이 방금 전 부름이 환청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켰다.
“아가.”
다시 자신을 부른다. 정국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마른 울대가 뜨겁게 끓어오른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자 몇 년 전 자신을 떠났던 신선이 그 곳 그 자리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곧장 달려가 작은 몸을 끌어안고 싶었지만, 이미 제 손에는 수 많은 피가 묻었다. 닦지 않고 그녀를 안는다는 건 또한 죄악이다.
“많이 자랐구나.”
오랜만에 마주한 정국의 눈동자는 잔뜩 탁해져 있었다. 시혼의 사막처럼 검붉은, 감정 없는 눈이 혜벽을 담자 뜨겁게 타올랐다.
“당신이 저를 창조하셨을 때부터, 저는 이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그런가?”
목이 메였다.
“지화봉 선인태형이 내게 와 그러더구나. 아가, 네가 하계에 전쟁을 일으키고 수많은 목숨을 죽이고 있다고. 사실이니?”
당신은 가끔, 너무도 잔인하다.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는 치부를 굳이 내 입으로 직접 아뢰게 하시니 말이다. 그럼에도 난 당신을 거역할 수 없는 걸, 너무 잘 알지.
“사실입니다.”
단호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젖어있는 정국의 대답에 혜벽의 눈꼬리가 안타까운 듯 휘어진다. 그녀가 정국에게 한 발짝씩 가까워졌다. 따라서 정국의 눈동자가 한 없이 흔들렸다.
“…왜?”
“저는 당신의 생각보다 훨씬 더 악하고, 욕심이 많습니다.”
“언제부터 날 연모한 게야?”
다 알고 있다는 그 시선이, 날 다 파악하고 있다는 그 눈이 두렵다. 정국이 고개를 돌렸다. 그녀와 자신 사이에 연모가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을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어줍잖은 심술을 부리는 것은 자신이 갖지 못할 지언정 타인의 품에 안긴, 그것도 인간의 품이라면 더더욱, 그녀를 볼 수 없는 것뿐이었다.
“왜 나를 연모하는 거지?”
바짝 다가온 혜벽이 정국의 뺨에 다정하게 손등을 가져다댄다. 피로 얼룩진 뺨을 스치는 달큰한 살내음에 정신이 혼미하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부신이 천지를 개벽하신 것처럼 당연한 순리다. 그걸 왜, 당신만 몰라.
신선은 푸스스 웃었다.
“멈추어라. 너 스스로를 망치는 짓 따위는 그만 둬.”
“원래 자리로 돌아오십시오.”
정국이 제 뺨에 얹힌 그녀의 손을 맞잡으며 처절하게 매달렸다.
“나는…, 아가.”
“…….”
“네가 날 연모하는 것처럼, 그 사내를 연모한단다.”
억겁의 시간동안 거짓이라곤 모르고 살아온 여인이었다. 그런 혜벽에게 정국의 마음을 고려한 하얀 거짓 따위가 나올 리가 없었다. 심장을 찢고 헤집는 그 한마디가 사내의 정신을 흔들리게 만들었다. 어찌 인간 사내 따위가 그녀를 움켜쥘 수 있지? 들끓는 살기가 주제전 안을 가득 채웠다.
“절 배려하는 법 따윈 모르시군요.”
“아가….”
“알고있습니다. 당신을 내려다볼 때면, 그 인간사내와 혀를 섞고, 몸을 섞으며 그리도 바라시던 욕망과 행복이 무엇인지 다 알게 되었다는 얼굴을 하고 계셨으니까요.”
친히 말하지 않아도 정국은 스스로 상처받길 택해오고 있었다. 그녀를 보면 나약한 자신이 원망스럽다가도, 더 이상 나약하지 않은데도 제 손에 들어오지 않는 그녀가 원망스러웠다. 순식간에 정국이 손을 까딱여 혜벽의 몸을 붕 뜨게 만든다. 놀란 신선이 무슨 짓이냐는 듯 저를 바라보지만, 정국은 표정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다시 손을 까닥여 그녀를 주제전 밖으로, 구름 밖으로 밀어버렸다. 자신의 힘을 사용할 새도 없이 몸이 한 없이 지상으로 낙하했다. 선계와 맞닿은 봉우리 너머로 학의 날갯짓이 스쳐지나갔다. 투박한 천이 덧없이 팔랑댄다. 혜벽은 눈을 곤히 감았다. 그녀의 몸이 곤두박질치려는 찰나, 누군가 그녀를 감싸 안고 사뿐히 땅위에 발을 디딘다. 정국이었다.
“전 이정도로 강해졌습니다.”
“…….”
“인간사내의 품에 안기지 마세요. 당신이 슬퍼할 것이 자명하여, 그 목숨을 끊지 않고 버틴 것입니다.”
“…….”
“혼인은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제가,”
“…….”
“그렇게 만들테니까요.”
어깨를 쥔 손이 유독 미련을 담은 듯 지분거렸다. 마지막으로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춘 정국이 혜벽을 조심스레 내려주었다.
“아….”
그리곤 무어라 말을 전할 새도 없이, 금세 사라지고 말았다. 정국의 빈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 곧 내일 혼인준비를 위해서 자신을 데리러 올 것이라던 전갈이 있었는데. 너무 오래 초가를 비웠다. 정국의 마지막 모습을 애써 지운 혜벽은 서둘러 원래 있던 초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혼인을 할 수 없게 만들거라던 정국의 말, 그녀는 믿지 않는다. 그 아이가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라는 건 자신이 가장 잘 알았으니까.
天地開闢
선연의 기운을 담은 붉은 가마가 도성 안으로 들어섰다. 웅진의 수도는 화청(花靑). 수많은 꽃들이 푸르게 덮인 낙원이라는 뜻이다. 중심에 우뚝 솟은 더없이 장엄한 황궁을 주축으로 권세가와 민가, 장시와 역참들이 빽빽이 그 넓은 땅을 채우고 있었다. 그 중 권세가들만 모여 산다는 북쪽 마을, 특히나 거대하게 자리한 가옥 앞에 그 가마가 멈춰 섰다. 가마에 딸린 시종들은 가마꾼 넷에, 어린 시녀 하나였는데 시녀는 가마가 땅에 내리자마자 앞으로 가 가마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아가씨, 제 손을 잡으셔요.”
열린 문으로 새하얀 손이 나와 작은 아이의 손을 맞잡았다. 따라서 가마 안에 도사리고 있던 여인, 혜벽이 찬찬히 상체부터 내밀었다. 담홍빛 비단너울을 둘렀지만 숨기지 못한 이마부터 콧날이 정성스레 드러났다.
“태사어른과 마님께선 도련님 혼인일로 황궁에 잠시 가셨으니, 곧장 준비된 방으로 드시라는 명이옵니다.”
혜벽이 혼인하는 사내는 정국과 태형이 생각하는 것처럼 한낮 평범한 하계인이 아니었다. 웅진의 충신 중 충신이라는 태사(太師)의 외아들로 본인도 중서시랑의 직위를 가진 권세가의 자제였다. 그와의 인연은 선연이었다. 하늘이 이어준 인연. 혜벽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하기에 연모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혜벽은 발칙하게도 곧장 준비된 방으로 가서 목욕재계를 하고 기다리라는 어른들의 명도 무시한 채 혼인도 아직 않은 신랑의 방으로 향하였다. 신선은 하계의 일에 두려움도 겁도 없다. 단지 자신의 마음이 가는대로 행동할 뿐이다.
“계시오?”
조심스레 문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자, 여느 때와 같이 정자세로 앉아 글을 읽는 석진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희미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책을 향하던 시선을 들어 문 쪽을 바라보았다. 석진의 까만 두 눈이 놀란 듯 팽창되었다.
“당신….”
“보고싶었소.”
잔뜩 당황하여 저를 바라보는 석진은 무시한 채 도도도 걸어 들어온 혜벽이 석진의 무릎위에 체중을 실어 앉았다. 석진의 뒷목에 팔을 감고 눈을 반짝이며 맞추는 것마저 감정표현에 지나치게 솔직한 시선들의 특징을 빼다 박은 짓이다. 덕분에 당황한 석진이 고개를 돌려 헛기침을 내뱉으며 딱딱하게 굳은 몸을 움찔한다. 그러자 석진의 무릎 위에 정착한 혜벽의 몸이 뒤로 넘어갈 듯 위태로웠다.
“조심하십시오.”
다시 놀란 석진이 혜벽의 허리를 감싸 안는다.
“그대는 날 보고 싶지 않았나 보오?”
평소처럼 단조롭고 다정한 모습에 혜벽이 애살스럽게도 물었다. 그 뻔뻔한 물음에 석진은 고개를 숙이고 참을 수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첫만남부터 지금까지, 대체 갈피를 잡을 수가 없는 여인이다.
“진정 그리 생각하십니까?”
순식간에 진지하게 표정을 뒤바꾼 석진이 허리를 좀 더 세게 끌어안고 당장이라도 입술이 닿을 거리까지 얼굴을 가까이 했다. 코 끝이 스친다. 여인은 간지럽다는 듯 고개를 달싹였다. 그럼에도 단 한 치의 부끄러운 기색이 없다. 이 당찬 여인을 어찌하면 좋을까. 석진이 미치겠다는 듯 고개를 젖힌다.
“내일이오. 우리 혼인.”
그럼 혜벽은 덧없이 사랑스런 음성으로 말을 하며 드러난 석진의 목언저리에 천천히 입을 맞춘다. 석진의 울대가 느릿하게 움직였다. 평소엔 그 누구보다 학문을 사랑하는 정갈한 사내가, 정인의 입맞춤에 성마른 신음을 내뱉었다. 산중 깊은 곳에서의 첫 만남, 마치 조상이 환생한 듯한 옛스러운 말투, 어딘가 모르게 비상식적인 행동들. 허나, 석진은 그녀가 좋았다. 수많은 권세가의 혼담들을 죄다 거절하고 그녀를 택할 만큼, 그녀를 연모했다.
석진이 다급하게 고개를 숙이곤 혜벽의 뺨을 감싸 쥐었다. 입술을 살짝 맞추자, 서투른 입술로 놓기 싫다는 듯 제 입술을 물어온다. 입술이 맞닿은 상태에서 석진이 입을 벌리고 나직한 탄식을 내뱉었다. 그녀의 모든 순간이 못견디게 사랑스러웠다.
“같이 살아요”
“내일이면 그러기 싫어도 그래야 할 게요.”
“임자라는 사람은 어찌….”
존대부터 ‘임자’라는 호칭까지 그녀를 배려하지 않은 것들이 없는데, 혜벽은 아무렇지도 않게 절절한 고백을 받아친다. 그게 또 웃기고 괘씸해서 석진은 혜벽의 아랫입술을 찬찬히 깨물었다.
“괜시리 억울한 느낌이 듭니다.”
“무엇이?”
“그 기괴한 말투는 언제 바꾸실 것입니까? 임자가 그러니까….”
종이장을 넘기던 그 길고 새하얀 군자의 손이 어느새 저고리를 파고들어 살갗을 뜨겁게 지분댄다.
“…거리감이 느껴진단 말입니다.”
혜벽이 석진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간헐적인 숨을 뱉어냈다. 이 뻔뻔한 사내는 어떻게 목소리만 이렇게 안정적일 수 있단 말인가. 혜벽은 자신이 되려 억울해졌다.
“내일 혼인식이 끝나면,”
“…….”
“석진, 하고 내 이름을 불러주세요.”
“…….”
“부인.”
그 녹아내릴 만큼 다정한 말에도 혜벽은 차마 대답하지 못한 채 석진의 너른 등을 더 애타게 끌어안았다.
天地開闢
혼인 날이 밝았다. 석진의 침소에서 눈을 뜨는 자신을 누구라도 발견했다간 집안이 발칵 뒤집힐 것이 자명하니, 혜벽은 늦은 새벽에 조심스레 제 방으로 돌아갔다. 신선에게 본래 잠은 필요해서 자는 것이 아니었으니 상관은 없었지만, 왜인지 지난밤은 죽어도 잠이 오지 않았다. 그저 심장만 쿵쿵 뛰는 것이었다. 혼인이라니. 그것도 인간사내와. 수만년을 살면서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다. 허나 이번 일만큼 자신이 확신을 가진 일도 없었다.
태사 댁 시녀들은 날이 밝자 혜벽을 욕간으로 데려가 정성스레 목욕재계를 실시했다. 하계에서 혼인이란 더없이 숭고한 의식과도 같아서, 정해진 절차에 따라 정갈하게 진행되는 것이라 했다. 혜벽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그들이 해주는 수발을 조용히 받았다. 목욕을 마치고 적삼차림으로 방 안으로 돌아간 혜벽은 준비된 녹의를 많은 단계를 거쳐 어렵게 입었다. 하계의 옷은 천 하나 걸친 것처럼 가벼운 선계의 옷과 달리 원래도 답답하고 두꺼웠다. 특히 혼례 때 입는 옷은 더욱 겹겹이 쌓여있었는데 까딱하면 자신도 모르게 도술을 써서 훌렁 벗어던지고 싶을 만큼이었다. 그래도 꾹 참았다.
그 때 인내심이란 인내심은 죄다 끌어와서 겨우 치장을 받고 있는 혜벽의 방으로 쿵쾅대는 발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그 발소리의 주인공은 시원하게 문을 열어젖히며 뛰어 들어왔다. 혜벽이 살짝 커진 눈으로 그 주인공을 올려다본다. 어제부터 자신을 모시던 시녀였다.
“무슨 일이니?”
“아가씨!! 놀라지 마소서.”
자신이 가장 놀래켜 놓고 놀라지 말라는 말이 이상했다. 허나 혜벽은 예전처럼 사소한 것에 꼬투리 잡지 않고 기다리는 법을 석진에게서 배웠다. 시녀는 잠시 숨을 고르며 곧 넘어갈 듯이 제 심장을 쿵쿵 두드렸다. 그런 이상한 짓 말고 말을 하렴. 혜벽이 웃으며 중얼거렸다.
“오늘 혼례식에, 화,화,황제 폐하께서 오신답니다!!”
“뭐?”
황제. 황제라면 인간세상의 우두머리가 아닌가. 혜벽의 익곤봉이 웅진의 치안의 맡고 있긴 했지만 혜벽이 아는 황제라곤 5만년 전 죽은 1대 황제가 다이다. 5만년 동안 인간이 죽지 않았을 리는 없으니 생전 본 적 없는 새 황제일 텐데 그 자가 왜 제 혼례를 보러 온단 말이지?
“태사께서 워낙 충신이시라, 페하께서 친히 도련님의 혼례를 축하하러 오신다는 게지요!”
아, 황제는 자신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라 석진 때문에 오는 것이었다. 혜벽이 멋쩍게 미소지었다. 시녀는 이 중차대하고 천지만물이 놀랄 법한 일에 발을 동동 굴렀지만, 황제의 위엄이 어느정도인지 짐작하지 못하는 혜벽은 그저 무미건조할 뿐이었다. 옆에 또다른 시녀가 혜벽의 뺨에 연지를 찍어바르며 입을 열었다.
“세상에, 우리 마님 혼례상을 또 상다리 부러질 정도로 차리시겠네.”
“황제폐하의 행차야 말로 가문의 영광이 아닙니까!”
가문의 영광이라. 아무렴. 황제의 행차든 동네 거지의 행차든 아무 상관 없다. 그녀는 그저 석진과의 혼례가 무사히 끝나길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준비를 마친 혜벽이 두 시녀의 시종을 받으며 느릿한 걸음으로 처소를 나섰다. 드넓은 태사댁의 마당에는 혼례준비로 한창 분주한 사람들과, 그 사이로 역시 준비를 끝마친 석진이 보였다. 석진의 발견하자 혜벽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그녀를 발견한 석진도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어여쁩니다.”
“그대도 멋있소.”
“폐하께서 우리 혼례에 친히 참석하신다는 것은 들으셨습니까?”
석진이 맑은 눈동자로 혜벽의 모습을 찬찬히 눈에 담았다. 미소가 걸린 그의 얼굴에서, 그 역시 황제의 행차에 잔뜩 들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대도 황제의 행차가 신나오?”
자신과 혼인한다는 사실보다 혼례식에 황제가 참석한다는 사실이 더 기뻐보여 괜히 뾰루퉁해진 혜벽이 짐짓 퉁명스런 어조로 석진에게 질문을 던진다. 석진은 그녀의 얼굴에서 모든 감정을 읽었다는 듯 한 없이 미소지으며 혜벽의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었다.
“페하께서 행차해 우리 혼례를 참관하신다는 것은, 모두가 우릴 부부로 인정한다는 사실과 진배 없습니다.”
“…….”
“우리가 황제도 인정한 인연이 된다는 소리지요.”
너무도 단순하게, 석진의 그 한마디에 혜벽은 싱긋 웃고 만다. 이 하계사내는 참으로 괘씸하다. 어찌 자신을 이리 쉽게 들었다 놓길 반복한단 말인가. 져 줄 수밖에 없다. 하계의 연모라는 건 끊임없는 항복의 반복이다.
“자, 그럼 곧 혼례식이 시작되겠군요.”
*
웅진에서 가장 유명한 충신 태사댁의 혼례식.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태사댁 드넓은 마당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허나 높은 전각 위 한 자리는 남겨두었는데, 그 곳의 주인은 누구도 우러러 볼 수 없는 만인지상 황제였다. 산해진미와 색색의 과일이 올려진 길다란 탁상을 두고 마주한 신부와 신랑. 연지곤지를 찍고 족두리를 한 혜벽은 고개를 숙이고 혼합주를 받아든다.
“신랑은 먼저 음하시오!”
석진이 먼저 혼합주를 음하고, 따라서 혜벽도 술잔을 기울인다. 선계에서도 술이라면 환장을 했던 신선에게 요 작은 잔에 한모금도 안 되는 술은 아쉽기 그지없었다. 그렇다고 이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술잔을 탈탈 털어넣는짓은 상당히 위험했는데, 혜벽은 그런 것을 인지할 정도로 하계에 익숙해지진 않았다. 남은 한 방울 까지 털어넣고 고개를 숙이자 석진이 미치겠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그제야 상황을 자각한 혜벽을 손을 더 높이 들어 얼굴을 깊숙이 가렸다.
“신랑, 신부 맞절!”
다음은 맞절 차례였다. 선계에선 부신이 아닌 그 누구에게도 고개 숙인 적 없던 혜벽은 아주 뻗뻗한 몸짓으로 팔을 올리고 자리에 부복했다. 절하는 법을 몰라 맞은 편의 석진이 하는 절을 똑같이 따라하니 순식간에 장내가 술렁였다.
“세상에 아가씨, 혼례복을 입고 사내 절을 하시면 어쩝니까!”
그 이유를 알려주듯 오른쪽 시중을 들던 시녀가 귓가에 대고 급박하게 속삭였다. 혜벽은 아차 싶어 다시 한 번 일어났다가, 다시 양쪽 시녀들의 도움으로 겨우 절을 해냈다. 당최 제대로 굴러가는 것 없는 혼례에 참석한 이들이 당황해 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석진은 왜인지 이 어이없는 상황들이 즐거웠다. 그래, 저 여인은 자신을 즐겁게 하는 여인이었다. 종잡을 수가 없어, 더욱 어쩔 수 없는 여인.
이 혼례식이 끝이 나면, 그녀는 자신의 신부가 된다.
“황제폐하 납시오!”
그 혼례식의 꽃. 황제의 행차. 황제는 혼례식이 거의 끝을 보일 때쯤에 등장했는데 내관의 목소리 한 번에 장내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만인지상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혼례의 주인공인 석진과 혜벽도 예외가 아니었다. 혜벽은 그 잘난 황제의 얼굴 한 번 보고자 하였으나 시녀둘의 만류에 어쩔 수 없이 무릎을 꿇고 상체를 바짝 숙였다. 천천히 가까워지는 걸음소리들이 들린다.
“황제폐하를 뵈옵니다!”
엎드려 있어 황제가 행차했는지 염라대왕이 행차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은 그저 그 위엄에 눌려 우렁찬 인사를 내뱉었다. 황제 일행의 걸음들이 잠시 느려지고 개중 한 사람의 발소리가 다시 가까워지는 게 느껴졌다. 그 하나가 황제의 것이다. 혜벽은 직감했다.
“충신 태사의 하나뿐인 아들이 혼인을 한다는데 군주가 되어 어찌 가만 있겠나?”
듣기좋은 사내의 음성, 황제의 음성이 넓은 마당을 울렸다. 혜벽은 고개를 들어 황제의 얼굴을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입술을 깨물고 참아냈다.
“황제폐하의 은혜가 하해와 같사옵니다.”
건너 편 석진이 황제를 향해 감사인사를 올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황제의 걸음이 가까워진다. 그가 제 바로 앞에 섰음을 느낀 혜벽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황제가 무릎을 굽히고 앉는다. 상체가 피면 시야가 얼추 비슷할 정도로 숙인 황제가….
“신부는 고개를 들라.”
혜벽을 더러 고개를 들라고, 명을 했다. 예상밖의 전개에 석진이 놀란 듯 몸을 움찔하지만 상대는 천자(天子). 제 아내에게 고개를 들라 명하는 의중이 궁금했으나 모두가 숨죽이는 가운데 누구도 이의를 재기할 순 없다. 혜벽이 황제의 말을 따라 찬찬히 고개를 들었다.
새하얀 옥안이 면류관 밑으로 내려진 주렴 너머로 눈시리게 보였다.
이자가 황제구나. 선계를 다스리는 부신의 친근한 용안과는 사뭇 다른 잘생긴 사내의 얼굴이었다. 혜벽이 자신도 모르게 빙긋 미소 지었다.
“너로구나….”
황제가 혜벽과 눈을 맞추었다. 특유의 느릿하고 여운이 남는 목소리가 귓전에 들어온다. 황제가 손을 뻗어 혜벽의 턱을 치켜 들었다. 아프진 않지만 명백한 지배자의 것이었다.
“짐은 말이다….”
어쩐지 비장하기까지한 황제의 눈빛이, 어느순간 불안해졌다.
“네 혼례를 축하해 주러 온 것이 아니라,”
“…….”
어쩌면 서둘러 직감했는지도 모른다.
혐생 이번주에 끝났습니다. 너무 오래 기다리시게 한 것 같아 임시저장함에
습니다ㅜㅜ 현생 정말 죽이고 싶다......
브금이랑 짤추가, 오타수정은 곧 하겠습니다 급하게 올리는 거라.. 아 그리고
짤 추가하면 아시겠지만 황제는 윤기입니다. 스토리상 7방탄 모두가 등장하지만
다 등장할 수 있을까.. 그 중 러브라인으로 엮이지 않는 멤버는 호석이랑 지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