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 묘사가 있습니다
초입初入
시덥잖은 농담이 오가는 통에 나재민은 금방 그 모습을 지웠다. 아니,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그런데 그 골목을 지나가는 길이면 꼭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다 아, 없네, 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나재민 뇌가 그 장면을 찍어 머릿속에 심기라도 한 듯이 그랬다. 이상했다. 정말로 이상하게도 나재민은 그 광경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었다. 그건 적어도 나재민에게는 정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네가 나재민이야?"
그래서 김여주가 나재민을 먼저 찾아왔을 때 나재민은 별 오만 감정이 다 일었다. 얘가 나를 어떻게 알지,부터 목소리가 생각대로네,를 거쳐 까만 마이에 박힌 명찰을 보곤 이름을 드디어 알아냈다는 묘한 성취감도 들었다. 나재민은 자기보다 한 뼘은 작은 그 애의 등을 다 덮는 길고, 새까맣고, 여튼 그 때랑 별반 차이없는 걔 머리칼을 잠시 그때처럼 내려보았다. 눈동자도 머리칼처럼 아주 까맸다. 나재민은 허옇고 얇은 손가락을 들어 자기 명찰을 가리켰다.
"보면 몰라?"
그동안 나재민이 혼자서 쌓은 김여주와의 내적 친밀감을 고려하면 눈에 띄게 띠꺼운 말투였다.
"나 담배 좀."
"..."
"이동혁이 너한테 싸게 살 수 있다던데, 아니야?"
나재민은 그 말 한 마디에 작년의 겨울을 다시금 떠올리는 것이었다. 담배 연기를 뿜던 그 모습과 지금이 겹쳐보여 나재민은 괜히 마음이 울렁거렸다. 나재민은 기계적으로 몸을 돌려 가방 깊숙한 곳에서 노란 고무줄로 대충 감아놓은 담배 뭉치를 꺼냈다. 여기. 김여주가 나재민 손바닥 위의 뭉치를 가져가며 다른 손으로 꼬깃하게 접혀진 천원 짜리 몇 장을 올려놨다. 그럼 나재민은 다시 그 천원 짜리를 김여주의 손에 쥐어주며 말하는 것이었다. 잘 짓지도 않는 미소를 지으며.
"처음은 공짜."
김여주는 가만히 나재민을 보다 마주 웃었다. 빨간 뺨 위로 보조개가 얕게 패였다 사라졌다. 고마워, 다음에 또 와도 공짜로 줄거지? 나재민은 약간 어이가 없었다. 생각보다 뻔뻔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길래,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어버렸다. 김여주는 미련도 없이 뒤를 돌았다. 흩날리는 머리칼 끝자락에서 희미하게 독한 향이 났다.
약 일 년만의 재회였다.
나재민은 자정이 다 돼서야 학원을 마쳤다. 수강생이 별로 되지도 않는 이 작은 학원은 네온사인이 화려한 상가 끝자락에 위치해 있었는데, 나재민은 그게 퍽 마음에 들었다. 공부하기 싫으면 고개를 돌려 사람들을 구경했다. 이른 저녁부터 취객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고, 여러 무리들이 상가를 이리저리 드나들었다. 나재민은 그런 인간의 군상들을 보며 피곤하다고 느꼈나, 여튼 자기는 저렇게 안 되어야지, 생각했다.
학원의 어두컴컴하고 폭이 좁은 계단은 폰으로 손전등을 켜야 내려갈 수 있었다. 학원을 나와 시끌벅적한 상가를 지나다 저 멀리서 쭈그려 앉은 김여주를 봤다. 김여주 뒤로 큰 고깃집 간판이 눈아프게 번쩍였고, 김여주는 그 고깃집 이름이 박힌 앞치마를 입고, 쭈그려앉아 담배를 피고 있었다. 흰 연기가 피어오르다 금방 흩어져 사라졌다.
"나재민?"
김여주가 꺼먼 아스팔트 바닥에 담배를 지져 껐다. 꽤 먼 거리는 금방 좁혀졌다. 나재민은 꼴초인 거 다 아는데 그녀가 굳이 반도 안 태운 담배를 끈 이유에 대해 생각하는 중이었지만 웃으면서 너 여기 알바하나보네, 하고 말었다. 이상하리만치 머리를 묶고 고깃집 앞치마를 맨 모습이 잘 어울려서 나재민은 바보같이 무릎을 턱턱 털고 일어나 저에게 다가오는 김여주를 보고만 있었다.
"넌?"
"난 저기 학원 다녀."
"공부 잘 해?"
"그냥 하는거지, 뭐."
"부럽다."
공부해서, 김여주는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말을 흐렸다. 나재민은 김여주가 이제 겨우 두 번 본 사이에 친근하게 말을 붙인다고 생각했지만 구태여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나재민은 괜히 부끄러운 마음에 가방끈을 몇 번 잡았다 풀었다. 가로등의 노란 조명을 받은 김여주 얼굴이 너무 말개서 걔 뒤에 버려진 담배가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잠깐 기다려봐."
김여주가 자기 손에 들린 라이터를 쥐여주고는 고깃집으로 들어갔다. 나재민은 황급히 앞치마를 벗으며 짐을 챙기는 김여주를 보다 근처 벽에 기대섰다. 담배나 하나 태울까, 생각하다 교복을 입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내곤 그만 두었다. 한숨같은 숨을 내쉬었는데 입김이 나오길래 나재민은 그제서야 좀 춥나, 생각했다. 딸랑, 소리가 들리고 김여주가 작은 가방을 챙겨 나왔다. 김여주가 웃으면서 손에 들린 만 원짜리 몇 장을 흔들었다.
"가자."
가자고, 어딜? 나재민은 저를 이끄는 김여주의 다 튼 손을 내려보다 원하는대로 끌려가 주었다. 나재민은 다시금 저를 덮쳐오는 울렁거리는 감정을 홀로 감내해야만 했다. 김여주는 말없이 나재민과 나란히 걷다 어느 지점에서 손을 흔들었다. 나 여기서 갈게. 너도 조심히 가. 나재민은 김여주 뒤로 옹기종기 모인 판잣집들과 오르막길을 보다 손목에 찬 시계를 내려다봤다.
"데려다줄게."
그래, 그럼. 나재민은 김여주 옆에 바짝 붙어 섰다. 끝도 없이 이어진 계단을 오르고, 좁은 폭의 골목을 몇 번 꺾어 걷다보면 걔 집이 나왔다. 노란 빛을 뿜는 가로등이 듬성듬성 세워져있는, 좁디 좁은 골목 끝에 세워진 집. 온통 갈라진 벽하며 녹슨 문하며, 허술하게 자물쇠로 겨우 잠궈져 있는. 나재민은 여전히 티 한 장만 입은 김여주의 뒷모습을 봤다. 김여주 귀 끝이며 손가락 끝이며 살짝 보이는 발목 뒤쪽이 빨갰다.
"내일 보자."
나재민이 돌아서고 손을 싹싹 비볐다. 손이 시려웠기 때문이다. 그래도 오래 걸은 탓인지 열기는 홧홧했다.
나재민이 다시 뒤를 돌았다. 불이 켜진 낡은 김여주 집 안 저편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마당이라기엔 뭣한 공간이 온통 술병으로 나뒹굴었다. 걔 집 왼쪽에 죽은 화분이 네댓 개 정도, 오른쪽에 아무것도 없는 빨래 건좃대가 덩그러니.., 나재민은 성큼 걸어가 김여주 네 집 녹슨 문을 두드렸다. 살짝 두드린다고 두드렸는데 쾅쾅 소리가 났다. 나재민은 그 소리에 깜짝 놀라 두서없이 말을 뱉었다.
"어.., 나 나재민인데!"
"..."
"그, 번호 좀."
옷을 갈아입었는지 편한 옷차림의 김여주가 문을 열었다. 나재민을 물끄러미 보던 김여주가 망설임없이 폰을 가져가 번호를 찍었다. 자. 나재민이 고마워, 하고 등을 돌리는데 김여주의 웃음기 서린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너 방금 그런 건 매너 없었던 거 알지?
여튼 그 뒤로 나재민은 매너 있는 남자로 인정받기 위해 김여주의 퇴근 시간을 기다렸다. 번쩍여서 그래서 눈이 아픈 네온사인을 피해 어디 건물 아래에서 늘 김여주를 기다렸다. 그리고 매일 밤 그 오르막길을 땀 찔찔 흘리며 올랐다. 말만 그렇지, 매일 김여주 집까지 데려다 준 꼴이나 다름이 없었다. 나재민은 김여주를 볼 때마다 울렁거리는 마음을 알고 싶었고, 알기 위해서 매일 김여주 집까지 도장을 찍었다. 김여주는 가끔 길을 걷다가도 담배를 폈고, 춥다느니 하늘을 보며 허연 입김을 뿜었지만 티 한 장, 교복 마이말고는 더 걸치는 게 없었다. 그래서 김여주 손은 늘 텄고 차가웠고, 빨갰다.
나재민은 여느 날 텅 비었고 하얗고 좀 빨개진 김여주 목덜미를 보다가 자기 목도리를 풀어 김여주 목에 휘감아 주었다. 아, 숨 막혀. 되도 않은 핑계대니 김여주가 낄낄거렸다. 나재민의 그 울렁거림은 그럴 때마다 좀 목구녕까지 치솟아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았다. 가로등 아래 비치는 얼굴에, 얇은 옷소매를 걷으면 보이는 손목에, 맨날 물고있는 그 허연 담배라던지, 가끔 내리는 눈과 메마른 나뭇가지라던가 쭉 늘어진 판잣집들이 김여주와 너무나도 잘 어울려서. 그래서 나재민은 가끔 김여주를 보면 토기가 일었고 눈물이라도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춥다는 핑계를 대고 가끔은 김여주의 얇은 몸을 끌어안았고 가끔은 심심하다는 이유로 김여주 손을 잡고 안 놔줬다. 그러다 이 울렁거림을, 해소하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씨발.., 난 너만 보면,"
"..."
"울렁거려서 뒤질 거 같아..."
그래서 나재민은 김여주를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정말이지 지극히도 매너가 없었다.
3
그 일이 있고 난 후에 김여주는 나재민을 가끔 집 안으로 데려와 코코아를 타주고, 귤을 꺼내주거나 나재민을 좁은 방바닥에 앉히고 저는 설거지나 빨래를 한다던가 했다. 나재민은 김여주가 귀엽게 군다고 생각했다. 김여주는 나재민에게 자기 얘기를 한 적은 없었지만 나재민은 대충 유추해낼 수는 있어서 입을 꾹 다물었다. 연민이 드는 만큼 김여주한테 사랑을 쏟아부었다. 나재민은 여전히 김여주를 볼때마다 속이 울렁거렸고, 속이 울렁거릴 때 키스를 했다. 여튼 나재민은 그 울렁거림을 정의내릴 수 있었다. 이건, 내가 걔를 존나게 사랑하는거다. 나재민은 가로등 밑에서 김여주의 담배 피는 모습을 본 게 운명이라고 믿었다. 김여주는 그 말을 듣고 병신이라고 했지만 나재민은 아무렴 좋았다. 좋은게 좋은거지, 라고 했다.
"운명은 무슨."
"왜? 좋잖아."
"좆까라 그래."
김여주는 운명을 안 믿었다. 학교도 안 나가고 가족도 안 믿고 사람도 안 믿고 남자는 더 못 믿고 친구는 더더 못 믿고. 그래도 이동혁은 쪼금 믿는다했다. 병신같은 새끼 늘 한결같다고 욕하면서도 믿는다고 했다. 자기 주위사람 다 변했는데 이동혁이 개멍청해서 걘 아직도 똑같이 대한다고 개병신새끼 개싫다고했다. 나재민은 그게 이동혁에 대한 신뢰인 걸 알아서 이동혁이 조금 질투났다. 나 못믿어? 그럼 김여주는 못 믿는다 했다. 그래도 사랑하는 거랑 믿는 거랑은 별개라 했다. 김여주는 운명이라느니 인생이라느니 회의감에 찌들어있었다. 담배랑 나재민만 있으면 괜찮다 했다. 나재민은 동의했다. 나재민한테도 김여주랑 담배만 있으면 존나게 다 괜찮았다.
자주 깜빡거리거나 불이 나가는 작은 전구 천장에 겨우 달랑이는 김여주 집 천장을 보다 나재민은 다 괜찮다고 했다. 존나게 행복하다고 했다. 더럽게 얇은 김여주 끌어안고 재웠다. 김여주는 자다가 가끔 엄마, 하고 울었다. 그 때도 나재민은 김여주 토닥이며 괜찮다고 했다. 씨발. 진짜 다 괜찮아. 나재민은 자기가 울면서 다 괜찮다고 했다. 우는 김여주 안고 속삭였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을 리 없었다.
4
김여주는 머리가 좋았다. 학교 꼬박 나가고 학원도 꼬박 다니는 나재민이 숙제 때문에 김여주 집에서 책 꺼내면 옆에 붙어 열심히 책을 보고 궁금한 거 물어가며 설명을 들었다. 김여주는 존나 머리 터지는 한국사 연표를 줄줄 외우며 진짜 재밌다고 했고 나재민은 김여주 머리가 진짜 좋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안타까웠지만 티내지 않았다. 김여주한테 가지고 싶은 거 있냐니까 시간이랬다. 시간만 있으면 다 할 수 있댔다고 했다. 나재민은 자기가 공부 열심히 해서 돈 존나게 벌어주겠다고 했다. 그럼 김여주는 웃으면서 알겠다고 했다. 그럴 때마다 황급히 일어나서 나 똥 좀, 하면서 화장실로 갔다. 나재민은 그게 김여주가 울러 간다는 걸 알았다. 매너 좆도 없는 나재민은 그럴 때마다 화장실 문 쾅쾅 열어재끼고 김여주 안았다. 존나게 매너없는 새끼. 김여주는 나재민 가슴팍 팡팡 때리면서 숨 넘어갈듯이 울어제꼈다.
"재민아."
"응?"
"나 이제 너 없으면,"
어떻게 살지.., 김여주 진심이었다.
진짜 하나도 안 괜찮은데 나재민이 안아주면 괜찮아져서 나재민이 웃어주고 이름을 불러주고 집에 데려다주고 같이 있고 귤이라도 까먹다보면 정말로 다 자기 거지같은 삶이 꽤 괜찮은 것 같아서, 인생이 도화지면 검정을 오억 번 덧칠했을 자기 도화지에다 흰 색이든 노란색이든 그 색으로 별 그려 넣은 건 나재민이어서. 김여주는 상황도 현재도 과거도 사람도 좆도 안 믿었지만 미래는 믿고 싶었다. 나재민이랑 같이 있는 미래는 좀 괜찮을거라고. 자기 이렇게 살아온 게 다 좆같은 운명 탓으로 돌렸다면, 신이 있다면, 이제 자기 앞길 좀 괜찮게 해달라고, 운명을, 신을, 믿고 싶었다. 나재민. 나재민. 나재민. 나재민. 운명. 신. 나재민. 나재민. 운명. 운명. 운명...,
운명, 운명. 씨발 걍 다 좆같았다.
이때까지 안 괜찮은 삶, 나재민 있다고 괜찮아질리가 없었다.
5
그 날 눈이 왔다. 나재민 보내고 전기장판 안에 이불 덮고 있던 김여주는 문을 열고 들어온 누군가에 단박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공포에 몸이 굳어 움직이지도 않았다. 겨우 폰을 켜 카톡 보냈다.
이동혁 ㅇㅑ ㅅ미ㅏㅇㅡㅜ도와ㅈ,
김여주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수도꼭지가 고장난 모양새처럼 눈물이 흘렀다. 술냄새가 폴폴 났다. 도망칠 곳이 없어 김여주는 뒷걸음질 치다가 등에 벽이 닿자마자 오열했다. 오지마, 오지마, 오지마, 오지마. 김여주 머리채가 잡혔다. 김여주가 발악하니 몸 여기저기에 주먹과 발길질이 날아왔다. 명치를 맞은 김여주가 숨을 못 쉬었다. 켁켁. 그 와중에도 눈물이 나왔다. 아빠 제발.., 김여주는 붉게 충혈되어 실핏줄이 터진 자기 아빠의 안광을 봤다. 미친놈같았다. 휘두르는 술병에 머리를 맞았다. 눈 앞이 돌고 이마에서 뜨끈한 게 흘렀다. 피였다. 김여주는 엉금엉금 기어갔다. 살고 싶었다. 오늘 진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문 앞으로 기어가니 머리채가 잡힌 채 집 밖으로 끌려나왔다. 눈이 내렸다. 차가운 공기에 순식간에 몸이 얼고 숨쉬는 구멍마다 하얀 입김이 솟았다. 피가 급속도로 굳었다. 엉엉. 김여주는 눈물, 콧물 다 빼가며 울었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굳어 잘 벌려지지도 않는 입술로 말했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구타가 몇 번 더 이어지고 김여주는 그 마당이라고도 할 수 없는 집 앞 협소한 공간에 나뒹굴었다. 하늘을 보는데 새까맸다. 눈은 계속 내렸고, 눈물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병신같이 눈물은 너무 뜨거웠다. 김여주는 소리내어 울 힘도 없었다. 괜찮기는 개뿔. 내 현실은 이거였는데. 괜찮긴 씨발, 이게 다 나재민 때문이야. 행복하고 싶었던 것도, 자기한텐 다 사치였다고, 그건 꿈이라고 운명이 비웃는 것 같았다. 괜찮긴 개
뿔, 괜찮긴 씨발, 운명은 무슨, 운명은 지랄, 운명은, 괜찮긴, 행복은, 신은, 나재민은, 씨발 ... ...
"나재민.."
이 상황에서 나재민 생각부터 나는 단단히 미쳐도 미쳤다. 김여주는 진짜 살고 싶었다. 나재민 때문에.
6
이동혁이 엉엉 울면서 나재민 찾아왔다. 학교 수업 도중이었는데 나재민 손을 끌고 이동혁은 어디론가 택시를 타고 달려갔다. 이동혁은 나재민한테 말 한마디도 없이 처음 본 그 순간부터 눈물만 쥐어짜냈다. 이동혁이 엉엉, 진짜로 숨도 못 쉬고 울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고 얼굴이고 뭐고 빨갛게 부어있었다. 나재민은 발을 못 내디뎠다. 이동혁이 입구에서 주저앉았다. 장례식장. 여길 왜 데려와. 나재민 발끝에서부터 소름이 돋았다. 덜컥 겁이 나고 눈물이 났다. 씨발, 씨발. 이동혁이 나재민 바짓가랑이 잡고 떠나가라 울었다. 나재민 멍청하게 장례식장으로 들어가 사람 하나 없는, 진짜 구라 안까고 단 한 명도 없는 곳에 들어섰다. 신발도 안 벗고 들어갔다. 저 사진 김여주 사진인데. 좀 앳된 사진. 뭘 그리 띠꺼운지 뚱한 표정이었다. 왜. 나재민 이동혁 질질 끌고 와 소리쳤다. 장난 하지말라고, 진짜 제발 눈물 그치고 말 좀 해보라고, 김여주 어딨냐고 소리쳤다. 그러다 이동혁 부둥켜안고 무너져내렸다. 진짜 존나 현실성 없네, 나재민 울면서 생각했다.
운명, 운명. 존나 기구한 우리네 인생. 나재민은 김여주 말이 백 번 천 번 맞다고 생각했다. 네 말대로 운명 진작에 좆 깠어야 했는데, 씨발. 씨발.
7
어이없었다. 사람 그렇게 쉽게 죽을 수 있구나 했다. 동사라고 했다. 추워서 얼어뒤진 거라고 했다, 씨발. 병신처럼. 그러게 내가 옷 좀 사입고 따뜻하게 입고 다니고 목도리도 줬고 핫팩도 사주고 씨발, 잘 챙겨먹고 감기약 챙겨먹고 물 끓여서 마시고 씨발. 그러라고 했잖아. 내가 그러라고 했잖아. 씨발. 나재민은 김여주 사진 부여잡고 울었다. 진짜 무슨 씨발. 이딴 게 운명이면 진짜, 진짜, 좆까자. 믿지 말걸. 믿지 말걸.
이동혁이 건네준 유품이랍시곤 목도리, 담배가 다였다. 그런데, 그것들도 다 제가 준 것이어서. 오로지 김여주 소유인 건 하나도 없어서. 나재민은 다시 무너져 내렸다. 발인하고 강에다 재 뿌리면서도 현실성이 존나게 없었다. 어디 살아있지 않을까. 그런 멍청한 생각했다. 현실 도피였다.
사랑은, 행복은, 운명은 무슨. 나재민은 자기가 믿었던 그런 거에 배신당했다. 괜찮을 리 없었다.
너는 죽고 나는 살아서, 너를 두고 나는 살아서, 내가 너를 보낼 수가 없어서, 나재민은 괜찮을 수가 없었다.
8
이동혁도 죽었다. 자살했다고 했다. 이동혁이 나재민한테 남겨둔 편지엔 구구절절 우리네들 인생이 적혀 있었다. 이동혁은 미안하다고 했다. 김여주한테 미안하다고 했고 나재민한테 미안하다고 했다. 나재민한테 행복하라고 했고 살라고 했고 죄책감 가지지 말라고 했다. 정작 이동혁은 안 행복했고 죽었고 죄책감 때문에 자살한 거면서. 존나 웃기는 놈이라고 생각했다. 이동혁한테 도와달라고 김여주 카톡이 왔다는데, 나재민은 그걸 편지를 읽고 처음 알았다.
이동혁 편지를 읽고 왜 김여주가 사람을, 인생을, 친구를, 가족을, 남자를, 운명을 안 믿었는지 너무 이해가 되어서. 몰아붙인 자기가 존나게 혐오스러웠다. 나재민은. 나재민도 씨발 죽고싶어서 손목도 긋고 수면제도 털어넣고 했지만 나재민한테는 가족이 있었고 친구가 있었고 따뜻한 집과 그런 것들이 있어서..., 실패했다.
그제서야 나재민은 김여주와 그리고 이동혁이 가졌던 혼자와 가난의 무게와 불행의 부피가 실감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죽는 것 대신 살기로 했다.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살아내기로 했다.
김여주. 김여주가 유일하게 믿었던 이동혁. 그 둘이 죽고 그 둘을 기억하는 건 이제 나재민 밖에 없었다. 나재민은 운명 좆까고 살기로 했다. 살아가는 것도 살아남은 것도 아닌, 온 악바리를 다 써서 살아내기로 했다. 그건 진짜 좆같았다.
9
재민이에게.
재민아 미안하다. 나 도저히 못 살겠다. 근데 이건 운명이 아니라 내가 도망치는 거니까 이해해주라.
여주 카톡 내가 못 받았어. 그래서 죽은거야. 내가 카톡 빨리 봤으면 김여주 살수도 있었는데. 그 못된년 몸이 꽝꽝 얼어서 아무리 불러도 안 일어나고 아무리 안고 따뜻한 데 데려갔는데도 몸이 안 녹더라. 씨발. 씨발. 진짜 병신같은 년. 사실 제일 병신은 난데.
김여주가 니 얘기 진짜 많이 했다. 사랑한다고 존나게 사랑한다고 나한테 그런 말 아무렇지도 않게 하더라. 알잖냐. 나랑 김여주 인생이 너무 좆같아서. 자기 엄마 도망가고 아빠가 때려도 안 울던 앤데 너 만나고 눈물도 늘고. 걔 너 못 믿었다고 하지만 제일 믿었을걸. 그건 내가 장담하니까 그런 걸로 알아라. 김여주 말 듣지 말고.
나는 죽는걸로 김여주한테 속죄할란다. 아마 만나도 왜 왔냐고 니 잘못 아니라고 울 애긴 한데. 여튼 너는 살아라.
여튼 너는 살아. 여튼 너는 살아. 살아라. 재민아. 미안하다. 재민아, 미안하다 ... ...
10
이동혁 편지, 여튼 기억하는 것만 나재민은 메모에 옮겨 적었다. 진짜 개못된 새끼. 개못된 년. 나재민이 김여주를 보고,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그건 다 겨울 즈음에 벌어진 일들이었다. 나재민은 겨울을 제일 사랑하면서도, 제일 싫어했고 혐오했고, 진저리쳤고, 지긋지긋했다. 겨울을 닮은 김여주, 겨울에 죽은 겨울. 겨울은 하나같이 하얗고 거멓고 차갑고 메마른 것들 뿐이라 나재민은 수분을 자기가 채우기라도 하듯 겨울이 되면 하루가 멀다하고 울었다.
그래도 시간은 흐르고 흐르고 흘러서, 무뎌졌다고 하기엔 그건 아직 거짓말이지만 나재민은 살아내고 있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고 여름이 가고 가을을 맞고. 네 생각에 울고 울고 울고 자고 다시 일어나 울고 울고 울다. 다시, 이제 곧 다시.
초입.
겨울의 초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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