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
"그렇게 마음에 안들어?"
"우리 경수, 내 밤샘 공부..우리 꼬물이들.."
변백현이 이를 바득바득 갈며 소아과를 씹었던 결과였던 걸까, 소아병동으로 올라간지 일주일만에 외과로 내려와버렸어. 이유인 즉슨, 내가 소아병동으로 올라간 이유 중 가장 컸던 게 소아병동에 한번에 많은 인원이 빠져서 그랬었거든. 근데 병원 관둔다며 사직서까지 낸 동기가 다시 근무하기로 결정이 났나봐. 아무래도 이제 막 일주일 된 나를 소아병동에 놓는 것 보단 3년 내내 소아병동 있었던 내 동기를 다시 앉히는 게 효율적이긴 했지.
"저어기, 우리 자기가 예뻐라하는 신규아니야?"
"..."
"어제까지만 해도 어둡던데. 너 왔다고 표정 밝아진거봐."
"..."
"쟤가 나 좀 싫어하는 것 같더라."
"말이라고."
"설마 그 때 내가 조금 정색했다고?"
"그게 어디 조금 정색이야? 나 같으면 너 신고했어."
왜 저번에 나 응급실에 있었을 때 내 프리셉티로 있었던 신규 있었잖아. 나 아파서 토할 때 괜히 옆에 있다가 백현이한테 욕먹었던. 안그래도 픽하면 울어버리던 애였는데 변백현이 그날 지랄같이 화를 내는 바람에 걔는 아마 화장실가서 한참을 울었을거야. 그걸 변백현은 되게 사소한 일로 인식했는지 별것도 아닌 걸로 자기를 피한다며 투덜투덜거려.
"선배님!"
변백현이랑 나란히 앉아서 노닥거리는 나를 본 신규가 쪼르르 달려와서 아는 척을 해. 내 옆에 변백현은 본 듯 만 듯 살짝 눈인사만 하고선 함박웃음을 지어보이는거야.
"오늘 오신다구 해서, 이거.."
그러면서 되게 수줍게 자그마한 종이가방을 내밀어. 생각지도 못한 선물에 얼떨떨하게 받아들었어. 사실, 내가 다른 병동도 아니고 외과로 툭 떨어져 버린 이유에는 얘도 한 몫을 했거든. 응급실에서 일할 때 얘가 내 프리셉티였잖아. 그 때 백현이도 응급실에 있어서 도움도 많이 받고, 뭣보다 매일같이 백현이 보면서 일했으니 컨디션도 좋았었어. 그래서 유독 내가 밑으로 들어온 신규한테 잘해줬었는데 얘는 그게 자기가 병원을 나가지 않은 이유라며, 입버릇처럼 나한테 말하곤 했었어.
병원에서 그래도 내게 최소한의 선택권을 준답시고 외과로 갈건지, 응급실로 갈건지 결정하라고 통보가 날아왔을 때 그 소식을 어디서 주워들은건지 신규한테 연락이 온거야. 아주 장문으로 제가 외과에 있는데 선배님도 외과로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는데 거기에도 많이 흔들렸던 게 맞아. 아무래도 오래있었던 외과가 더 나았던 것도 맞지만.
"뭐야, 이게?"
"선배님이랑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우와, 시계야?"
종이 가방안에 있는 예쁘게 포장된 상자를 열었더니 손목시계가 떡하니 자리잡고 앉아있었어. 내 취향은 어찌 그렇게 잘 알았는지, 마음에 쏙 드는 디자인에 손목시계를 꺼내드는데 고맙단 인사를 할 찰나에 엇,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저 가볼게요! 하고 떠나는거야. 역시 이제 막 대학 졸업하고 온 파릇파릇한 신규는 귀엽구나. 하고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을 즈음 잊고 있었던 백현이가 내 손목을 확 낚아 채더니 손목시계를 아니꼽다는 눈으로 쳐다봐.
"이십대 후반에 무슨 분홍색?"
"왜, 예쁘기만 한데!"
"그래서 그거 차고 다니려고?"
"당연하..!"
"차고 다니려고?"
내가 잊고 있었던 내 손목에 이미 채워져 있던 손목시계를 변백현이 가만히 쳐다봤어. 나 처음 병원 입사할 때 선물이라며 백현이가 사준 시계인데, 이게 그냥 시계가 아니라 좀 많은 사연이 얽혀있는 시계라 약도 몇번 갈아주면서까지 계속 차고 다녔던 거였거든.
"아, 이제 3년 넘게 찼다고 필요없다는 거지?"
"그럴리가, 우리 백현이가 준 선물인데요."
백현이가 요 시계를 선물해주던 날이 생각나서 웃음이 삐져나왔어. 결국 나는 한쪽 팔에 시계를 두개나 차고 다녀야 하는 상황이 생길 것 같았지만, 그저 좋기만 했지.
그렇게 몇 분동안 이런저런 이야기하며 놀다가 나는 출근 준비하러 가고, 백현이는 새로운 인턴이 오는 날이라며 잔뜩 들떠서 내려갔어. 이제 정말 백현이의 고된 인턴 기간이 끝나는가 싶었어.
다시 돌아온 외과병동이라 익숙한 사람들도 많고 아무래도 난 외과체질인가보다, 싶어서 기분도 좋았어. 옷 갈아입고 왼쪽 가슴부근에는 다시 외과증이 걸리고, 늦을 새라 얼른 인계받고 병동 돌러 갈 준비를 했어.
"선배님, 있죠. 오늘부터 인턴쌤들 새로 오신대요."
"오늘부터야? 머리 터지겠네."
"그 정도예요?"
"인턴들 차트 작성해놓은거 고치다가 날밤 샐걸."
오늘 온다는 인턴 목록을 받아서 쭈욱 훑어보는데, 뭐 이름하고 학교만 적혀있으니 나는 알아볼 턱이 없지. 대충 보고 넘기려다 익숙한 학교 이름에 다시 집어들어서 미간을 조금 좁히고 봤더니 신규가 내게 왜 그러냐며 물어와.
"왜요?"
"어..이 학교 출신도 있네."
"그 학교에서 혼자 왔대요, 외과에는. 거의 다 우리학교 출신인데."
"백현이가 좋아라하겠다. 후배왔다고."
변백현선생님요..?하며 표정이 점점 굳는 우리 신규를 보고있으려니 괜히 웃긴거있지. 변백현 아주 단단히 찍혔구나 싶었어. 그나저나, 백현이 학교에서 우리병원 왔을 정도면 공부 꽤 했던건가. 백현이도 차석 찍고 들어왔으니까 얘도 그정도 하겠지. 백현이도 똑부러지게 일 잘했으니 얘도 잘하겠지, 했는데 며칠 만에 그 기대가 와르르 깨져버릴 줄이야.
ㅡ
"야, 이 답답아. 답답아!"
"죄송해요.."
"잠만, 퍼질러, 자면, 응? 언제 환자 볼거야?"
말을 탁탁 끊으면서 제 차트로 인턴 팔을 내려치는 꼴이, 딱 변백현 일년 전 모습이 오버랩됐어. 변백현이 저렇게 까이던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 새 레지던트 달고 제 밑에 들어온 인턴을 까네. 변백현이 제 후배 들어왔다며 나한테 자랑했던 게 불과 몇시간 전이었는데, 인턴치고 너무 편하게 잠을 퍼질러 잔 새 인턴때문에 변백현 속은 터질 지경이었어. 차트도 엉망으로 써놓은 바람에 우리 신규 거의 울다시피 앉아서 하나하나 고치고 있었고 아침부터 지각하는 바람에 백현이 손에 질질 끌려가다시피 하고 있는 새 인턴이었지.
"선배님.."
"그거, 그냥 변백현한테 넘겨."
"그래도.."
차트 수정해야 될 양이 10이라고 하면 그 중 8은 백현이 후배가 저지른 짓이었어. 안그래도 병아리같은 인턴들 새로 들어와서 간호사실은 난리가 났는데 거기에 아주 크게 거들어주시니 퇴근 시간을 2시간 오버한 채로 눈이 빠져라 타자를 두들기고 있었던거야. 두시간 내내 타자를 쳐대던 신규가 휴대폰을 들었다가 손목이 아픈지 놓쳐버리는 모습을 보고 한마디 해야겠다 싶어서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었어. 회진 돌고 오기만 하면 제대로 쐐기를 박을 생각이었지.
피곤해서 따가워지는 눈을 문지르고 있으려니 맨 안쪽 병실에서 백현이랑 인턴무리들이 우르르 나와. 매일 레지던트 쌤들 뒤꽁무니 따라다니는 모습만 보다가 이제는 제법 앞쪽에 서있는 모습에 뿌듯함을 채 느끼기도 전, 문제의 그 인턴을 발견했어. 물론 나를 발견하고 쪼르르 먼저 달려온 건 백현이었지만.
"왜 퇴근 안했어?"
"..말투."
"아, 오늘 오버타임 길어지는 것 같은데, 무슨 일 있어요?"
"인턴쌤들 처음이라 정신 없는 건 아는데 이런 식으로 차트 넘기면 간호사실에서 다 처리 못하거든요, 우리 쪽도 신균데 두시간 넘도록 퇴근 못하는 거 보이세,"
"미안해요. 내일부터는 주의 시킬게요."
"그 쪽 인턴만 힘들고 우리 신규는 천하무적인 건 아니잖아요. 내일부턴 다시 돌려보낼거예요."
변백현이 인턴으로 있을 시절에도 나보다 윗년차 선생님들이 레지던트 쌤들이랑 많이 부딪히는 걸 보곤 했었는데 내가 이렇게 직접적으로 나선 건 처음이었어. 일단 백현이가 그 대상이기도 했고 괜한 투정이 섞인 것도 없지 않아 있었지. 그런 마음을 알아챈건지, 괜한 입씨름 하지 않고 바로 숙여주는 백현이 덕에 그 일은 무난히 지나갔어.
사실 연애 전이나, 연애 초기에는 백현이랑 나랑 사소한 걸로도 많이 싸웠어. 가끔 투약 상태 확인하다가 의견이 엇갈릴 때가 많은데 백현이는 백현이대로 자기 오더가 맞다고 주장하고 나는 하루 종일 환자를 케어한 입장에서 내 판단이 맞을 거라고 밀고 나가다가 점점 감정싸움으로 번지는 거지. 그렇게 병원에서 한바탕 하고 그 감정을 식히지 못해서 집에 가는 길에 또 싸우고, 결국 내가 엉엉 울어버리고 나서야 백현이가 조금 굽혀주곤 했었어.
쨋든 사건의 주 원인이었던 인턴을 쳐다보니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퉁퉁 부은 눈으로 서있어. 저가 잘못한 건 아는지 죄인 표정을 짓고 있는데 아침에 늦잠자서 눈이 부은 건지 뭔지, 그 얼굴이 너무 얄미운거야. 그래도 백현이가 나서서 사과했는데, 여기서 한마디 더 하기는 싫어서 입 꾹 다물고 하던거 마저 하려고 자판 위에 다시 손을 올렸어.
백현이 뒤에 졸졸 쫓아오던 인턴 몇명이 살짝 고개를 숙인 뒤 병동을 빠져나가고 백현이가 프론트를 돌아서 의자를 당겨다 내 옆에 앉았어.
"손목 많이 아파?"
"자꾸 말 놓지 말라니까, 인턴들 새로 왔는데."
"애들 지금 없잖아."
"너, 니 후배. 걔가 제일 문제야."
내가 머리를 쥐어뜯을 기세로 변백현을 노려봤더니 옆에서 신규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세차게 끄덕거려. 변백현은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건지 한번 스윽 웃더니 알겠다며 대답하곤 자리에서 일어섰어.
그렇게 퇴근하고, 다음 날 출근해서 또 데스크 위에 쌓여있는 차트를 들고 대충 훑었어. 오늘도 엉망이면 가만두지 않을 기세였지.
"아, 선배님. 그거 정리 끝난거예요!"
"벌써?"
"수정할 거 하나도 없던데요?"
나보다 한시간정도 일찍왔다는 신규가 밝게 웃어보이면서 다 했다는데, 어제까지만 해도 실수투성이였던 차트가 오늘은 완벽하다는게 말이 안되는 일이었어. 의아한 마음에 다시 내용을 확인했더니, 두줄을 죽죽 긋고 수정한 표시 투성이었어. 그러면 그렇지, 파란색으로 수정한 글씨는 죄다 백현이 글씨였던거야.
"이거 누가 들고왔어?"
"그 바보 인턴 쌤이요."
"그래?"
"그리고 미안하다고, 이것도 주고 갔어요."
그러면서 데스크 위에 있던 커피랑 핫초코를 가르키는데, 저것도 분명 백현이가 시킨 일이 었을거야. 더워 죽을 것 같은 여름 날 나에게 핫초코를 추천할 위인은 백현이밖에 없었거든.
덕분에 조금 널널해져서 의자에 앉아 핫초코를 홀짝이고 있는데 아침부터 제 후배를 끌고 여기저기 쏘다닌 백현이가 머리에 잔뜩 까치집을 짓고 반갑게 웃어보여.
"잘했어요?"
칭찬받길 기다리는 어린애처럼 눈을 반짝이는 모습에 고개를 끄덕였어.
"인턴아, 내가 말했던 거 다 하고 식당으로 내려와."
뒤에 서있던 인턴을 턱짓으로 보낸 백현이가 생긋생긋 웃으면서 눈인사를 하곤 내려갔어. 어제보단 확실히 똘망똘망하게 눈을 뜨고 있는 인턴이 짧게 대답하곤 옆에서 트레이를 위에 이것 저것 챙긴 우리 신규랑 같이 병실로 들어갔어.
백현이가 그 인턴한테 시키고 간 일이 정말 쉬운 일이어서 별 걱정 하지 않고 여유롭게 차트를 훑고 있었는데,
"아, 좀!"
"죄송해요.."
"거기서 그걸 그렇게 빨리 뽑아 버리면 어떡해요!"
"다 된 줄 알고.."
"옷 다 버리구, 이게 뭐야.."
옷 앞자락에는 피를 잔뜩 묻힌 우리 신규랑, 뒤에서 뒷머리를 긁적이며 신규 표정을 살피는 꼴통 인턴이 병실을 빠져나왔어. 대충 봐도 뭐하다가 저렇게 됐는지 대충 짐작이 갔지. 백현이 후배라더니 백현이랑 똑같은 건 아니네.
"제가, 세탁해다 드릴게요."
"됐어요."
"그럼 이거라도."
그러면서 그 꼴통같은 인턴이 제 가운 안에 입고 있던 가디건을 벗어서 건네는데 우리 신규는 단단히 짜증이 났는지 됐다며 받아주지도 않아.
"됐다니까요."
"앞에 다 묻었잖아요."
결국 인턴이 신규 허릿자락에 제 가디건을 단단히 묶어주고서야 만족이 됐는지 트레이를 끌고 들어가고 신규는 어이없단 표정으로 나를 쳐다봐.
"선배님,"
"응?"
"김종인 선생님 완전 또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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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너무..늦었..져..? 지금 답댓 달러 갈거예여..ㅎㅎ...다들 알라븅.....!!!!!!아 그리고 1편부터 차차 고칠 예정이에여..ㅠㅠ..너무 이상해 첫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