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9년 5월 28일, 재현의 일기
‘사랑. 언제나 나를 매마르게도, 차고 넘치게하기도 하는 단어였다.
언제나 사랑하고 싶었고 하는만큼 받고싶었다.
그리고 내 사랑을 받아줄 그 사람이 너이길 누구보다 간절히 바랐다.
나를 온전히 채워줄 사람이 너이길,
언제나 내 곁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너이길,
그리고 나를 유약한 나를 불안에 떨지 않게 만드는 사람이 너이길.’
여기까지 글을 쓴 재현은 한숨을 쉬곤 복잡한 표정으로 스케쥴러를 덮었다.
스케쥴러 앞부분에는 영호와 준희의 청첩장이 자리잡고 있었고, 재현은 그 청첩장을 잠시 꺼내들어 눈으로 훑었다.
5월 23일 오후 12시 강남 OOOO 호텔
저희의 새 출발을 축복해주세요
“새 출발…”
준희에게도 영호에게도. 그리고 세상 누구에게든 결혼은 새 출발이다.
그리고 재현은 복잡한 마음을 안고 플래너를 덮었다.
나와 영호 형의 차이가 있다면 그건 분명 용기의 차이였을거다.
할리우드 진출에 성공했지만 너를 잡을 수 있었던 그 용기.
그리고 미국의 큰 시상식에서 상을 받고도 준희를 늘 잊지않고 언급했던 그 용기.
몇 해 전 영호 형은 시상식에서 상을 받고
"My first and last, infinite inspiration, and true love, I bet my life on you."
라는 프로포즈를 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관객으로 가있던 준희는 그 고백을 듣고 펑펑 울었다고 했다.
이왕 가는 거 멋진 모습으로 배웅을 해주고 싶었다.
옷장 앞에 서서 한참을 고민하던 재현은 몇년 전 자신의 모습이 눈에 겹쳐져 피식- 웃었다.
2017년 4월 19일
(재현 시점)
연극 영화 공연 등 예술 분야에서 자주 쓰이는 단어가 있다.
클리셰.
영화, 노래, 소설 등의 문학이나 예술 작품에서 흔히 쓰이는 소재나 이야기의 흐름 등을 뜻하고
친근감을 불러일으키지만 자칫 작품을 뻔하고 진부하게 만들 수 있는 그것.
그런 클리셰 같은 사랑 이야기가 내게도 펼쳐질지는 정말 생각하지도 못했다.
생각보다 무딘 성격의 나에게 날짜를 기억하는 일이라곤 쉽지 않은 일이였다.
몇년씩 같이 보낸 친구의 생일도 종종 잊고 사는 내가 그 날을 기억하는 이유는,
운명처럼 내가 소꿉친구였던 준희를 보고 반한 날이였기 때문에.
그 날도 아주 평범한 날이였다.
평범한 날이라 하면 오전에 일어나서 학교에 갔고,
수업을 듣고,
학기말 공연을 위해서 선배들과 회의를 하고,
간단히 밥을 먹고 집에 돌아온 그런 지극히 평범한 날이였다.
아파트로 들어가는데 준희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걸어나왔다.
“어디가?”
“빵!! 나 지금 커피사러 가”
“이 시간에?”
“응 나 오늘 밀린 과제 해야해서. 같이 갈래?”
“그래”
분명 민낯이였다.
화장기도 없었고,
집에서 과제를 하다 나왔단 걸 증명이라도 하듯 트레이닝복 차림이였고,
머리도 올려묶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심장이 쿵쾅거렸다.
/
“빵 너 뭐마실래?”
“내가 살게”
“됐거든? 내가 끌고왔으니까 내가 사줘야지!”
“그래 그럼 나 아이스 아메리카노”
“그래! 나는 그럼 아이스 카페라떼 마셔야지”
나온 커피를 손에 쥐고 아파트로 걸어가는 길이였다.
“빵 아파트에 벚꽃펴서 예쁘던데 우리 한바퀴만 걸을까?”
거절할 수 없어서 고개를 끄덕이자 너는 환하게 웃었다.
봄이라는 걸 증명하듯 흐드러지게 핀 벚꽃을 보고 준희는 예쁘다며 웃었다.
봄이였다.
그리고 부정할 수 없이, 내가 너와 사랑에 빠진 날이였다.
준희와 나는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친구였다.
그리고 단언컨데 서로를 이성으로 본 적이 한번도 없는 사이였다.
굳이 이유를 붙이자면 서로가 서로의 취향이 아니였고, 굳이 또 다른 이유를 찾자면 너무 어린 나이부터 본 사이라 더 그랬다.
한 동네에서 함께 보낸 10년이라는 시간은 우리에게 초중고 동창이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가져다 줬고,
어쩌다 보니 우리는 대학교 마저 같은 학교 같은 과로 오게 되었다.
그 시간동안 준희도 나도 연애를 했다. 고로 우리는 서로의 지난 연인들을 다 알고 있었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보낸 시간이 너무 길었기 때문에 준희를 향해 반응하는 내 마음이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준희를 집에 올려다보내고 나도 집에 들어와 한참을 침대에 누워있었다.
씻으면서도, 다시 옷을 갈아입으면서도 한참을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었다.
내가 미쳤나, 쟤를 여자로 보고?
아니겠지
아닐거야.
하지만 부정은 이내 긍정으로 바뀌었다.
나는 어느새 준희와 같이 등교하는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2017년 4월 23일
시간표가 똑같은 날이였다.
평상시였으면 나가기 30분 전에 일어나서 준비하다 나갔을텐데 오늘따라 눈이 일찍 떠졌다.
옷장 앞에서 나도 모르게 한참을 오늘 뭐입지 고민했다.
그러다가 문득, 이런 내 자신이 너무 낯설어 보였다.
결국 고민 끝에 베이지색 코트와 청바지를 입고 백팩을 챙겨 밖에 나가니,
“오늘 늦었어 빵재 너 이따가 커피사라”
“1분 늦었는데 좀 봐줘ㅜㅜ”
“나 시간약속 칼같은거 알아 몰라”
“알아”
“그럼 군말 말고 커피 사세요^^”
결국 커피를 사주기로 하고 함께 등교길에 올랐다.
늘 바지를 자주 입던 준희였는데 오늘은 원피스를 입었더라. 핑크색 원피스.
“너 오늘 어디 가?”
“나 이따가 데이트 있는데?”
“…너 남자친구 있었어?”
“응. 너 설마 몰랐다고 할거냐?”
지져스 크라이스트.
“너 근데 왜 나한테는 말 안했냐”
“나 말 했는데? 너가 까먹은거겠지”
“언제부터 만났는데?”
“꽤 됐는데? 너가 소개시켜줬잖아”
그리고 기억을 되짚어보니, 재현이 소개시켜준 사람은 영호였다.
영호는 일찌감치 하늘나라로 떠난 재현의 친 형 윤오의 가장 친했던 친구였다.
재현에게 또한 친형 같은 사람.
“…영호형?”
“응 영호오빠”
빨갛게 물든 볼로 환하게 웃는 준희를 보며 애써 표정관리를 했다.
난감해졌다. 왜 하필이면 영호형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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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준희가 재현이를 빵이라고 부르는 이유
몇년 전 재현이의 볼살이 통통했을때 빵빵하다고 놀려서
그리고 재현이가 빵을 좋아해서 빵재현 빵재현 하다가 아직도 빵이라고..
2. 재현이에겐 원래 친 형이 있었는데 형이 일찍 하늘나라로 가버렸어요.
영호는 그 형의 가장 친한 친구였고,
재현이 부모님이 힘들어 하셨을때 맏아들 역할을 톡톡히 했던 아이.
3. 극중에서 영호 재현 준희 셋 다 배우지망생이에요.
연극영화과 사람들이고, 영호는 둘보다 나이가 세살정도 많습니다.
4. 이제부터 찌통이 시작됩니다... 각오하세요 여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