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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탄소년단/전정국] 그대야 안녕 14화 | 인스티즈 

 


 

 

 

BGM - Pitpat (Sally)

 

 

 


 


 


 


 


 


 


 


 


 


 


 


 


 


 


 


 


 


 

14화 

: 회피의 역기능 


 


 


 


 


 


 


 


 


 


 


 


 


 


 


 


 


 


 


 

 "저 300원밖에 안 땄어요진짜예요." 

 

 

 

 거의 복도에 드러누운 듯한 자세로 담임쌤으로부터 안정적이게 끌려나오는 호석이를 가만히 지켜보는 것으로 시작하는 하루의 일과오늘은 왠지 학교에 일찍 오고 싶더라니 이 진귀한 풍경을 목격하기 위함이었나아마도 아침부터 교과서로 판치기를 하다 발각되어 연행되는 중인 것 같아보였는데 표정은 왜 저리 억울해보이는지아까부터 책상을 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캬캬 웃어대는 시끄러운 말소리는 다 어디 가고이젠 벌점을 조금이라도 줄이기에 급급한 표정 뿐이었다. 


 

 

 

 ".. 진짜 오랜만에 재미로 해본 건데깨빵나 진짜 거짓말 안 하잖아그렇잖아." 

 "..응응잘가." 

 "선생님저 정말 반성하고 있어요공동체 생활에서는 개인의 가벼운 호기심으로 시작된 도박성 놀이가 어떻게 다수에게 피해를..." 


 

 

 

 슬리퍼 바닥에 바퀴가 달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부드럽게 스으윽 소리를 내며 그대로 교무실 안으로 들어가면서까지 열변을 토하는 호석이우연히 마주친 내게 눈빛으로 도움을 청하는 탓에 마음이 약해져 한마디라도 거들어볼까 싶었지만 요즘 학교 벌점 부여 기준이 빡빡해져, 미안하지만 나도 내 코가 석자였다요즘 교감 선생님이 쉽게 정돈되지 않는 분리수거장 때문에 눈에 불을 켜고 온복도를 돌아다닌다는 풍문이 자자하단 말이지실제로 나도 며칠 전에 어떤 애가 그자리에서 복장 불량으로 벌점을 때려맞는 걸 목격하기도 했고까딱하다가 벌점 1등에라도 등극하는 날엔 그날로 분리수거장 청소부로 끌려갈 것 같은 느낌이 역력해 나도 모르게 멀쩡한 치마 끝단을 괜히 만지작댔다. 


 

 

 

 '우다다-' 


 

 

 

 당분간 특히 더 조심하자는 생각을 머릿속에 되새기며 텀블러를 닫으려 할 때 들려오는 다급한 뜀박질 소리누군가에겐 촌각을 다투는 시각임을 깨닫고 무의식적으로 큰 발소리의 주인에게 눈길을 돌리니. 


 

 

 

 "..." 


 

 

 

 그대로 운동화를 신은 채로 4반 앞문에 다다른 키 큰 애가 보였다김남준이었다주위 눈치를 볼 새도 없이 얼른 운동화를 벗은 후 잽싸게 신발장에서 실내화를 꺼내 갈아신는데보기에 그 모습이 재난영화급으로 급박해보여 나까지 긴장될 것만 같은 기분이랄까그래도 그대로 운동화를 신고 올라오는 길에 어느 선생님께라도 안 걸린 모양이다 싶어 나도 모르게 슬쩍 안도의 웃음을 짓는데별안간 내 쪽을 보고 흠칫 놀라는 김남준놀란 눈빛엔 대체 언제부터 보고 있던 거야?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계속 보려던 건 아니었는데. 


 

 

 

 "안녕." 

 "..안녕." 

 


 

 

 내게 선뜻 먼저 인사를 건네고 퍽 자연스러운 모양새로 이마의 땀을 훔치는 김남준본의 아니게 급히 서두르던 모습을 보인 게 괜히 민망했는지 쿨하게 뒤돌아 유유히 사라지는데 난 그 뒷모습에 웃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저기 미안한데 너 가방 반은 열려있어.. 다 흘리고 온 건 아니지? 

 

 

 


 


 


 


 


 


 


 


 


 


 


 


 


 


 


 


 


 


 

 

 "그래서 이 작품의 줄거리는 이생에서 갖지 못한 사랑을 몹시 그리워하고 있지만 전생에서의 내 님과의 관계를 상상하며 스스로 위로를 받고 있다이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다." 


 

 

 

 졸림에 졸림을 거듭하는 문학 시간고전 문학은 오매불망 내 님만 기다리는 순정파 사랑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든다요즘엔 그리도 바람피우는 내용의 드라마가 많던데옛날 사람들은 다 순박해서 그런지아님 불륜은 불결하다 생각하여 그 사실을 숨기느라 작품을 쓰지 않은 건지그때 그 시절이라면 두 번째 가설에 무게가 더 실리지만상대를 정말 좋아했다면야 나 같이 진솔한 사랑 또한 꽤 존재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다들 조용히 눈을 감고 내 님을 마음으로 상상해본다." 

 


 

 

 혼자 얕은 생각에 빠져있기도 잠시선생님의 말에 다들 남자 배우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눈을 감아본다내 옆의 나영이 또한 최근에 빠진 연예인의 이름을 작게 연호하며 제 어깨를 감싸안는다처진 수업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선생님의 노력에 나도 못 이긴 듯 살포시 눈을 꼭 감았다그러자 아무 일 없던 조용한 밤에 기다렸다는 듯이 별을 흩뿌리며 빛이 내려오더니 그 빛이 모여 곧 예쁜 달 하나를 만들어내니그것이 바로 내 님의 얼굴이었다그 달 안엔 정국이의 웃음기를 머금은 환한 얼굴이 두둥실 떠오르고 꾸밈없는 그 모습을 조용히 상상 속에서 지켜보다 보면 가슴 속에선 이름 모를 감정이 작은 소리를 내며 톡톡 터지기 시작한다웃을 때 생기는 저 짓궂은 눈가 주름에 잠시라도 끼어살게 해준다면야 동짓달 기나긴 밤 한 허리아니 그 이상을 베어 내어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자자그럼 다들 상상의 늪에서 이만 나오도록 하고이번엔 내 님과 나는 전생에 어떤 사람이었을지 천천히 생각해보자." 

 


 

 

 별이 가득한 밤하늘 위 장난스레 웃고 있는 정국이 얼굴이 불현듯 물러가고이번엔 전생의 관계를 상상해보기 시작했다전생이라.. 조선시대로 치자면 무조건 양반이지그렇다면 문신이었을까 무신이었을까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운동을 잘한다는 소문이 파다하니 무신을 빼고 볼 순 없지만그의 학문 능력도 빼어나니.. 이것 참완벽해도 문제가 있을 수 있구나 싶다. 

 

 


 

 "생각해봤어?" 

 "내 생각엔.. ." 

 "못 정하겠어전정국?" 

 "아니.. 그렇게 크게 말하면 어떡해." 

 "뭐 어때여기에 걔 생각하는 거 너만 있는 것도 아닐 텐데걔가 네 거라도 돼?" 

 "..그건 아니지만 뼈가 좀 아프다친구야." 


 

 

 

 작은 소리도 아니고 보통 정도의 말소리로 정국이 이름 세 글자가 나오니 나도 모르게 안색이 질려 급히 나영이 입을 막았다그에 그게 뭐가 대수냐는 식으로 내게 팩트를 가하니 정신이 어지러워진다그래그렇긴 한데.. 머릿속은 이말저말이 복잡하게 떠오르지만 막상 대꾸할 말이 없는 현실이 서글퍼 말없이 째려보니괜히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피한다그래도 하늘을 날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비행기가 생기고물 위를 떠다니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배가 생겼으니나도 정국이의 여자가 되면 어떨까 한번 생각해보면... 

 


 

 

 '띠리리리-' 


 

 

 

 애석하게도 정신차리라는 듯 점심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만다그에 따라 일제히 놓고 있던 정신을 붙잡아 반사적으로 달리고 달려 뒤늦게 급식실로 향해보지만 줄은 길게 늘어서 있다오늘도 급식실에서 정국이 보기는 이미 글렀다 싶다. 

 

 

 


 


 


 


 


 


 


 


 


 


 


 


 


 


 


 


 


 


 

 

 점심을 배불리 먹으니 솔솔 잠이 오는 5교시 쉬는 시간오늘 메뉴들도 전부 기름기가 넘치는 음식에 후식 또한 달달한 요구르트가 나와버렸으니 완벽한 합리화를 하기에 충분했다갖은 방법을 쓰더라도 잠을 이기기엔 역부족이었다는 뜻이다어김없이 지루한 경제 시간이 마치자마자 다음 교시를 준비할 겨를도 없이 의자에 반듯이 앉아 곧바로 목 뒤에 담요를 끼웠다두둑한 뱃살 앞에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침체된 반 분위기 속에 차분히 쪽잠을 청하려는데 별안간 뒤에서 들리는 인기척 소리이번 달은 뒷문 쪽 맨 뒷자리가 걸렸다는 사실이 그제야 체감이 되고누가 이렇게 소리를 내며 지나다니는 걸까 원망스러웠던 때못 참겠다 싶어서 공부용 귀마개라도 끼우려 번쩍 눈을 뜨니. 

 


 

 

 "..." 

 

 

 덩그러니 날 내려다보고 있는 상상 속의 그 얼굴별안간 두둥실 하고 나타난 뜻밖의 정국이 얼굴에 화들짝 놀라 얼른 잠에서 빠져나오니 피식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내며 그새 목 뒤에서 떨어진 담요를 주워주인이 어디로 갔는지 모를 내 옆자리에 앉는다.. 앉는다? 

 


 

 

 "다음 시간에 네 자리 앉아도 되지?" 

 "..어어." 

 


 

 

 조심스럽게 주운 내 담요를 내 책상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는 정국이다무려 내 옆에 앉은 정국이가 자연스러운 기색으로 말을 걸었다는 사실과 잠깐 내 앞으로 가까이 왔던 예쁘게 생긴 손 때문에 괜시리 얼굴이 화르륵 뜨거워졌다무의식적으로 손으로 부채질을 할 뻔하다가 별안간 보인 정국이의 중국어 교과서아 그래서 우리 반 온 거구나난 또.. 깜짝 놀랄 뻔했네. 


 

 

 

 "일본어 가야 되지 않아?" 

 "응응너 아니었으면 자다가 허겁지겁 갈 뻔했네." 

 


 

 

 그렇긴 한데 내가 널 두고 어떻게 가니.. 잠결에서 완전히 헤어나오지 못해 몽롱하지만그래도 전보단 꽤 어색함이 풀어진 대화가 만족스러워 조용히 흐뭇한 미소를 지었을까책상 서랍을 뒤적거리다 일본어 책과 같이 나온 토론 노트멀뚱히 졸음에서 허우적거리는 내 모습을 바라보다 삐져나온 노트를 보고는 작게 숨을 한 번 들이마시며 내게 말을 건다. 


 

 

 

 "그래서 토론 근거는 찾았어?" 

 "아아아니바꿔달라고 하려고." 

 


 

 

 그러고보니 아직 끝나지 않은 토론 동아리 과제가 다시금 상기됐다정국이가 내 오답노트를 간접적으로 걱정해주었던 어제선뜻 나를 도와주겠다며 노트를 가져가서 덜덜 떠는 내 앞에서 함께 골똘히 고민해주었던 너였지만 마땅한 수를 찾지 못했었다그에 나는 마음만이라도 황송하다는 속마음을 어렵게 숨기고 그래도 고맙다며 긴장되는 목소리로 전했었지내 말에 그저 방긋 웃어보이고 다시 수학 문제집으로 관심을 돌린 너였지만 조금은 맘에 걸렸나 보다 싶다다음날까지도 내게 묻는 걸 보아 하니. 

 

 


 

 "잘 생각했어주제가 난해해서.. 제대로 도와주지도 못했네." 

 "아이.. 아니야그래도 고마워." 

 


 

 

 마음만으로도 고맙다고 할 걸 그랬나좀 정 없어보이는 말이었나 싶어 말을 뱉자마자 되뇌어보는데자연스럽게 마주친 시선에서 옅게 웃음기를 달고 있는 정국이 얼굴에 순간 멈칫했다. '그래도 고마워하지 말 걸그 말을 하고 빙긋 웃어보이며 네 눈을 마주치지 말 걸. 

 


 

 

 "..." 

 "..." 


 

 

 

 순간 웃으며 눈을 마주치니 머릿속이 하얘졌다지금 여기 너와 나또 아무것도 없는 느낌또 세상에 둘만 남은 기분을 어찌 감당해야 할지 모르겠다웃음기를 머금은 얼굴로 온전히 나를 보는 눈빛에 빠져서 맘껏 헤엄치고 싶어졌다이 시간을그리고 지금 네 눈을 잡아두고 싶어졌다콩콩콩콩결코 짧지 않은 시간동안 넋이 빠져 네 눈을 멍하니 보고 있자니 또 반응해오기 시작하는 콩닥콩닥 뛰는 가슴나도 모르는 사이 숨이 가빠지고 온몸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아 얼른 눈길을 돌렸다내 눈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이번엔 진짜로 내 맘이 드러날 것만 같았다. 

 


 

 

 "어어.. 나는 이만 너네 반으로.." 

 "다다음 시간이 체육이라 아마 어수선할 거야애들이 다 성질이 급해서." 

 

 

 

 누가 봐도 의식적으로 황급히 회피한 시선을 도저히 감출 길이 없어 일본어 교과서를 들고 자리에서 들썩거리니 어어하며 급히 운을 떼는 정국이애들이 미리 옷을 훌러덩 훌러덩 갈아입어제끼고 있을 테니 웬만하면 짱박혀있다가 슬금슬금 나가라는 말에 급히 아.. 그럴까 하며 틀었던 몸을 다시 정면으로 돌렸다. 

 


 

 

 "..." 

 "..." 

 


 

 

 그러자 찾아오는 정적네 웃는 눈만 마주치지 않았다면 이번 분위기는 내가 성공적으로 리드해보는 건데 아쉽게 되었다급히 꺼낼 말머리조차 저 밑으로 꽁꽁 숨어버린 머릿속이 괜히 원망스러워 교과서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렸다간만에 서먹해진 이 분위기를 어떡하지. 

 


 

 

 "다리는 괜찮아 이제?" 

 "아 거의 다 나았어괜찮아졌어." 

 

 

 

 최대한 티나지 않게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들리는 말소리에 얼굴을 천천히 들었다그러고는 네 눈을 마주치지 않고 시선을 내려괜히 볼 것도 없는 발목을 살피는 척하니 여전히 대화 내내 내 얼굴을 보는 것 같은 시선이 느껴진다관계가 좀 풀리면 넌 대체로 대화를 할 때 열심히 눈을 보려고 하는 편이구나. 

 


 

 

 "..다행이네." 

 


 

 

 길지도 않은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언뜻 보이는 네가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다소 수줍은 기색으로 고개를 숙여 손가락을 꼼지락대는 걸 보니 말하기까지 고민을 좀 했나 보다너도 은근 생각을 숨기지 못하는 아이인 것 같아 속으로 어금니를 물며 설렘을 삼키니 네가 지금 셔츠 안에 입고 있는대놓고 보이는 체육복이 떠오른다성질이 급한 건 너도 포함인 것 같았다수업 시작 한참 전부터 내 옆에 와있는 것도 보면 말이야. 

 

 

 


 


 


 


 


 


 


 


 


 


 


 


 


 


 


 


 


 


 

 

 “진짜 내 발 바로 앞에서 3센티도 아니야한 1센티그 앞에 하얀 페인트 같은 게 딱 떨어지는데 와.. 얼마나 심장이..” 

 


 

 

 이제 조금은 후덥지근해지려는 여름의 저녁손으로 푸다닥거리며 날파리가 득실대는 수풀 사이를 지나 영차영차 거의 멀쩡해진 다리를 이끌고 무사히 도착한 학원 건물오늘은 이상하게 서두르고 싶은 기분이 들어 군더더기 같은 시간 없이 보낸 하루인데.. 아마 이번에도 앵무새를 만나기 위함이었을까두 번이나 서두른 하루에 두 번이나 우연히 앵무새를 만났다다소 신기한 상황에 말머리를 꺼내려 입을 떼는데 그보다 먼저 치고 들어와 말을 시작하는 호석이듣자하니 방금 오는 길에 하마터면 새똥을 맞을 뻔했다며 온갖 호들갑을 떨며 말하는데차가운 외면을 받았던 아침은 그새 잊어버린 건지 평소와 똑같은 모양새로 말을 건네니 나도 모르게 안도하게 된다사실 속으로 토라지는 건 아닐까 걱정했지만 전혀호석이의 길고 긴 하루 중 미련을 두는 시간은 없는 것 같았다과연 단순한 정호석. 


 

 

 

 “근데 왜 너 혼자 와?” 

 “김태 오답노트 까먹은 거 있었대몇 개 틀린 거 잊고 있었나봐아이스크림도 안 먹고 학원 먼저 갔어.” 

 


 

 

 빈틈없는 호석이의 말소리로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는데 생각해보니 호석이 옆이 어딘가 허전한 것 같아 물어보니 돌아오는 대답오답 노트를 어떻게 잊을 수가 있지그 방대한 양을..? 태형이는 이과 중에서도 수학을 잘하는 이과였다는 사실이 다시금 와닿았다잘하는 애면 한두 문제 틀린 것 잊을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을 하며 시원한 복도를 지나 강의실 문을 여니, 방금 내 생각의 주인공이 옆 사람에게 딱 붙어 아래로 팔을 늘어뜨리고 있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아 쫌그냥 허리를 숙이라고." 

 "시러형이 주워줄 것도 아니면서." 

 "그래네 팔 길어서 좋겠다임마." 

 


 

 

 바닥에 하얀 물체가 떨어져있고꺾일 듯 옆사람에게 목을 기대고 있는 얼굴이 점점 빨개지는 것을 보아하니 아마 떨어뜨린 지우개를 주우려 안간힘을 쓰는 것 같아보였다어떻게든 허리를 안 숙이고 해결해보려 옆으로 괴상하게 목이 꺾여있는 모습이 사뭇 섬뜩하게 보여 조금은 무서워지려 할 때어느새 책상에 볼을 맞대고 있는 빨개진 얼굴이 내게 눈인사를 건넨다. 

 

 


 

 “어떻게 둘이 같이 오냐.” 

 “밑에서 만났다나 버리고 간 이 배신자야.” 

 


 


 

 하마터면 나까지도 덩달아 고개를 옆으로 꺾어 인사할 뻔했음에 기겁하고 있자, 하얀 윤기 형의 팔에 진하게 닿아있던 태형이의 정수리가 물러간다. 그와 동시에 온갖 불편함을 아낌없이 드러내며 구겨져있던 팔 주인의 인상이 펴지고제게서 떨어진 태형이를 보며 진절머리 난다는 듯 살벌한 눈빛을 보낸 뒤 원래 집중하던 핸드폰 게임에 다시 손을 올린다금방이라도 화를 쏟아낼 것만 같은 표정에 무의식적으로 눈치를 보고 있었는지 나도 모르게 한숨 돌리며 걸음을 옮기니동그랗게 눈을 뜨고 이쪽을 보고 있던 정국이와 마주친다. 

 


 

 

 “...” 

 


 

 

 이미 학교에서 봤으니 인사는 생략하고 미소라도 지어보이려 했지만이미 입꼬리가 조금 올라가 있던 얼굴과 마주쳐버린 탓에 나도 모르게 아주 잠깐 맞닿았던 눈길을 피했다이번에도 표정으로 올라와버린 내 심정이 들키기라도 할까 외면한다는 것이누가 보아도 고개를 새침하게 돌려 지나쳐버린 것 같아 자리에 앉으면서부터 천근만근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영어 시간부터 내내 거듭하던 고민의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수업 중 어쩌다 정국이의 시선이 마주칠 때면 나도 모르게 책상으로 시선을 묻어두기 일쑤였다아까까지도 꽤 여러번 반복되는 상황에서 멎은 시선이 너무나도 아쉬워져 그제야 고개를 들어보았지만 난 또 네 모습을 보고 다시 눈길을 내릴 수밖에 없다모습을 보기만 해도 가슴이 뛰어오는 강도가 점점 강해지니 나로서도 곤란했다그렇게 피하기만 한 것 같은 하루에모두가 떠난 수학 강의실을 마지막으로 나서며 크게 한숨을 내쉬니 내 자아가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지기 시작한다이렇게 피하기만 할 거야진지하게 생각해보자이런 식으로 소중한 시선을 계속 놓칠 것인가천금 같은 기회가 하늘로 흩뿌려지는 것을 정녕 이대로 두고 보고만 있을 것인가감정을 얼굴에서 숨길 수가 없어 어쩔 수 없이 피하는 상황이 많아질수록 마음의 짐만 늘어가는 실정이었다당장의 부끄러움은 가려진다 해도 정국이와의 순간이 그만큼 사라지는 거였으니까. 

 


 

 

 “컵라면 먹자며.” 

 “잠깐만 기다려봐금방 끝나.” 

 


 

 

 터덜터덜어느 때보다도 힘없는 걸음으로 느릿느릿 강의실을 빠져나오니수업을 마쳐 북적이는 학원 로비 속 어렴풋이 들리는 두 사람의 대화선생님에게 물어보면서 해결할 문제들이 있다며 영어 시간이 끝나고도 남아 지금까지 학원에 있던 호석이와 방금 나와 같은 수업을 마치고 바삐 걸음을 옮겨 나가던 정국이였다평소와는 달리 분주하게 모습을 감춰버린 탓에 문제집을 들고 다가오려던 여고 애들의 아쉬운 숨소리가 아직 귓가에 생생하다그렇게 사라졌던 정국이가 어디를 가나 내심 궁금했는데 수학 선생님께 가던 것이었구나교무실에 가야 할 일이 있는 아이들과 교무실 앞 강의실에서 빠져나오는 아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안내 데스크 앞에서 여쭤볼 페이지를 편 채 사람들이 지나가기를 가만히 기다리는 정국이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온다또 심장이 뛰어댄다그리고 그 옆에서 호석이는 가방을 멘 채 지루하게 짝다리를 짚고서 허공을 바라보다 우연히 돌린 시선에 내가 들어온다. 

 


 

 

 “깨빵너 같으면 짜파게티야 너구리야?” 

 


 

 

 멍때린 게 아니라 뭐 먹을지 고민하던 거였구나몸이 축 늘어진 채 걸어 나오던 나를 돌아보는 얼굴이 사뭇 심각해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가 싶었는데. 

 

 


 

 “나는 스파게티..” 

 “그것도 좋은 생각인데.” 

 


 

 

 옆에 들리는 말소리에 우리를 힐끗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들고 있는 문제집으로 시선을 돌리는 정국이오늘은 선생님이 답지를 다른 곳에 두고 오신 바람에 함께 문제를 풀고 맞춰본 시간이었는데무슨 풀이 때문에 온 건지 조금 궁금해져 호석이와 대화하던 중 까치발을 들어 슬쩍 곁눈질로 봐보니웬일로 내가 한 개만 틀렸던 페이지였다이렇게 내 오답은 늘어가는 건가 눈물이 앞을 가릴 것 같을 때학생들이 많이 빠져나가 시끄러웠던 주위 말소리가 조금은 잦아들고 교무실에서 답지를 챙겨 나온 수학쌤의 모습이 보인다옆에 있던 정국이는 그에 따라 안내 데스크 위에 답지를 올려놓는 쌤에게 다가가고호석이의 수다를 듣던 내 발걸음도 나도 모르게 조금씩 그쪽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이 문제 풀이가 정확히 이해가 안 가서요.” 

 


 

 

 답지가 아닌 선생님의 풀이에 이의가 생긴 정국이의 표정은 조심스러웠고 말투는 정중했다언뜻 보니 내가 그 페이지에서 유일하게 틀렸던 문제였고 정국이도 나처럼 다르게 풀이한 모양이었다궁금증이 많은 주인 덕분에 오른쪽은 호석이의 말을 왼쪽은 정국이의 말을 듣느라 귀가 고생하고 있을 때, 별안간 울리는 핸드폰 진동 소리호석이 핸드폰의 발신자는 엄마였다잠깐만 잠깐만하고 본인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며 전화를 받으러 급히 밖으로 걸음을 옮기는 호석이. 

 


 

 

 “아 기다려.” 

 

 


 

 그에 나도 조용히 따라가 인사만 건네고 집에 갈까 싶어 어느새 정국이 쪽으로 가까워진 몸을 떼고 몰래 사라지려는데내 손등 위로 덮어진 보드라운 정국이의 손그 즉시 심장소리가 내 귀에 들리기 시작했다선생님의 말을 경청하며 데스크 위를 더듬거리다 대충 만져지는 손을 잡은 것 같았는데 그게 어쩌다 내 손이라니곤란해죽겠는 내 손이라니놀라고 떨리는 마음에 정국이 손을 보는 상태 그대로 굳어버려 그저 내 손등 위로 포개진 정국이 다부진 손등을 하염없이 보고 있었을까급기야 가지 말라는 듯이 겹쳐진 손등을 꼭 잡기 시작하는 말랑한 힘이 느껴져 숨을 크게 들이마시니미안하다는 선생님의 말을 마지막으로 대화가 끝이 나려 하고 책을 덮는다. 

 

 


 

 “어디 의리 없이 가려고..” 

 “...” 

 


 

 

 그대로 내 손등을 꼭 쥔 채 다른 한 손으로 책을 챙기며 고개를 돌리다 정통으로 마주쳐버린 시선나를 발견한 정국이의 눈이 흔들린다심하게 흔들린다. 서로 말을 잃었다정지해버린 분위기 속에서 몇 초를 그 상태로 멈췄다가, 다시금 놀라 한 걸음 물러나며 내 손을 놓는 정국이. 

 


 

 

 “..미안.” 

 


 

 

 그 길로 난 고개를 숙이고 달려 나왔다밖으로 뛰쳐나오자 미적지근한 바람이 나를 맞아주고난 그 바람을 탓하며 계속 달린다온몸이 터질 것 같이 달아오른 열은 모두 뜨거워진 바람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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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여기에 댓을 안썼구나ㅠ 세상에 진짜 앞으로 기대돼서 벌써 막 너무 설레요ㅠㅠㅠ 다시처음부터 정주행해야지ㅠㅠㅠ
4년 전
비회원56.117
작가님 오랜만이에요!!다시 돌아와주셔서 좋아요ㅎㅎ
4년 전
비회원165.113
정주행했어요.. 우와 진짜 대리설렘..ㅜㅜ 이런 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시험망치고 하루종일 우울모드엿다가 글 읽으면서 간만에 행복햇어요 ㅎㅎ!!
4년 전
독자2
ㅠㅠㅠㅠ정주행 하고 왔습니다ㅠㅠㅠㅠㅠㅠ재연재 해주셔서 감사해요!! 혹시 암호닉 받으시면 [청포도]로 신청할게여!!!
4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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