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사는 도부자
09
새끼손가락 커플
토요일, 도경수 씨와 한 약속 당일이다. 카페는 모두 박찬열과 이모에게 ^*^ 일거리 포 유!
아침부터 설레발치며 머리를 이렇게 해볼까, 화장은 또 이렇게 해볼까, 옷은 또 어떻게 입어볼까 하며 시간을 보내니 시계바늘은 어느새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냥 영화 보러가는 건데 왜이렇게 설레지, 양치까지 하고 거울 앞에 서서 머리를 정리하는데 너무 오랜만에 하는 이쁜 척이라 나 자신도 조금 낯설다.
음 좋아,
오늘 괜찮은데 나? 여성성을 되찾은 기분이야,
맨날 과잠이나 둡바에다가 선크림하고 틴트만 바르고 학교 다니던 때와는 색다른 느낌이다.
이 모습을 전봇대 브라더스가 봐야되는데, 나보고 주민번호 뒷자리가 혹시 1로 시작하지 않냐고 놀리던 그 강냉이를 하나하나, 어맛, 내가 무슨 생각을!
그래 오늘은 내 인생에 몇번 있을까 말까한 날이니만큼 좀 자제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룰루랄라 사람 된 기념으로 셀카나 한 장 찍어볼까했는데 갑자기 벌컥 열린 화장실 문에 정색 아닌 정색을 했다.
" 뭐야 엄마, 왜 화장실 문을 마음대로 벌컥벌컥 열어 ㅡㅡ "
" 문은 열려있고 하도 안나오길래, 변기에 빠져 죽은 줄 알았네 "
엄마는 내 꼬라지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찬찬히 훑어보더니 씨익 웃었다.
" 딸, 남자 생겼어? "
" 뭐 좀 꾸몄다고 다 남자생긴거야? "
사실 남자 생긴거 맞는데
" 이거이거 남자 생겼네, 어떤 머스마야! "
" 아, 아니야 그런거! "
하지만 엄마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 너 이눔기지배 어디서 해골바가지같은 거 데려오면 다리몽둥이를 분질러 버릴 줄 알아! "
" 아니라고!! 좀 나가 봐!!!! "
도경수 씨는 해골바가지가 아니라 짱짱 귀엽단 말이야!!!!!!!!!!
계속 문을 열려는 엄마와 닫기 위한 나의 싸움이 일어났다. 결과는 내 떡대의 승리
문 밖에서 치사한 기지배라며 툴툴 거리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어떻게 딸이라지만 화장실에 마음대로 들어와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고 이리저리 180도로 살펴본 뒤 화장실을 나섰다.
빨리 엄마가 더 뭐라고하기 전에 나가야지,
종종걸음으로 몰래 코트와 가방을 챙겨들어 미션임파서블 처럼 최대한 숨죽이고 현관 쪽으로 가는데 다시 방에서 나오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 외박은 안된다 "
...
" 아 아니라고!!!!!!!!!! 엄마는 날 어떻게 보고! "
" 아니면 말고 "
그게 아니면 말고로 해결될 말이야!!!!!!!!!!? 부득부득 이를 갈며 경계하니 그제야 빨리 나가라는 손짓을 하는 엄마
" 갔다올게 "
성난 목소리로 인사를 하고 집을 나왔다.
근데 또 날씨는 오질나게 춥고, 빨리 차에 탔으면 좋겠다.
얼어서 부서져버릴 것 같은 손을 주머니에 쑤셔넣고 길가로 나오자마자 삐까뻔쩍한 도경수 씨의 차와 차에 기대서있는 도경수 씨가 보인다.
" 도경수 씨! "
" 어, 일찍 나왔네요 "
두 손을 모아 호호 불며 그의 곁으로 달려갔다.
" 아니 일찍 나오고 말고, 도경수 씨는 안추워요? 차 안에서 기다리면 제가 알아서 나올텐데 왜 이렇게 나와있어요 "
도경수 씨의 얼굴이 춥다 못해 창백해져있고 귀는 빨개져서는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았다.
나보고 따뜻하게 하고 나오라더니 자기는 얼어 죽을 것처럼 하고 나왔네
" 괜찮아요. 안추워요. "
무슨..!! 지방층도 없는 사람이...안쓰러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추울텐데 빨리 차에 탑시다...
도경수 씨 얼어죽으면 안되지 하며 차 문을 열려는데 그가 온 몸으로 내 손을 막는다.
" 제가 열어드릴게요 "
이쯤되면 그냥 내가 열고타도 될 때지 않나...
뻘쭘하게 내밀었던 팔을 접고 그의 안내대로 차에 올라탔다.
차 안은 무슨 찜질방마냥 히터를 빵빵하게 틀어놓고 왜 차에서 안기다렸담, 미안해지게
하, 찬 기운을 내뱉으며 운전대를 잡는 도경수 씨의 자켓 소매부분을 살짝 꼬집듯이 만져보니 생각보다 얇다.
" 히익, 이렇게 입고 안춥다고 나와있었던 거에요? 미쳤나봐 "
내 말에 멋쩍게 입꼬리만 올리는 그
" 앞으로 이럴거면 데리러 오지마요. 추운데 미안해지게, 아니면 차 안에서 기다리던가 "
나도 모르게 혼내는 말투가 되어버렸다.
" 두껍게 입고 다닐게요, 그럼 ○○씨 데리러 와도 되는거죠... "
죽어도 차 안에서 기다리겠다는 말은 안하네
도경수 씨의 고집은 이미 알 만하니 그냥 허, 하고 웃어버리고 말았다.
똥고집 도경수 씨
나는 막상 이렇게 만나면 엄청 어색할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가 보다.
차 안에서 서로를 굳이 마주보지 않아도 생각보다 술술 이어나가는 대화에 나도 놀랄 지경
" 도경수 씨는 영화같은 거 보고 잘 울어요? "
핸들을 잡고 운전에 열중하던 도경수 씨가 힐끔 나를 보다가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려 말을 했다.
" 음... 저는 잘 안울어요. 그럼 ○○씨는 잘 울어요? "
" 전 진짜.. 집에서도 혼자 분에 못이기면 막 울고 그래요. 그래서 저 영화보고 펑펑 울면 도경수 씨가 달래줘야해요 "
아니다 달래주면 더 울 것 같기도한데 달래주지 말라고해야하나 ...
인상을 쓰고 곰곰히 생각하다가 도경수 씨의 낮은 웃음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 네 달래줄게요, "
그 말을 들으니 왠지 펑펑 울어도 될 것같은 느낌...!!
안심하고 울어야지
" 영화 시작이 언제에요? "
영화관에 도착해 미리 예매해둔 표를 뽑는 도경수 씨 주변을 얼쩡거리며 물었다.
도경수 씨는 기계에서 나오는 표를 뽑아서 보다가 손목을 걷어 시계로 눈을 돌렸다.
" 40분정도 남았네요. 뭐 하고 싶은 거라도 있어요? "
" 음, 그러면! 저 좀 도와주세요, "
선물 고르는 것 좀!
원래 우리 집은 크리스마스라고 선물 챙기고, 무슨무슨 날이라고 챙겨주고 이런 게 없는 집이다.
하지만 비록 학원비로 쓰기 위한 돈일지라도 돈을 벌기 시작한 이 시점, 언젠가 언젠가 선물을 챙겨드려야지 했지만 맨날 생각으로만 그쳤는데 크리스마스는 선물을 드릴 좋은 구실이 되주었다.
거기다 백화점과 거의 붙어있는 이 영화관은 선물을 준비하기에 딱 좋은 장소였고
도경수 씨를 이끌고 평소엔 발도 안붙였던 명품관으로 발을 옮겼다.
" 부모님 선물 챙겨드리려구요 "
" 부모님 생신이세요? "
" 아뇨, 그냥 언젠가 한 번 두분 다 챙겨드리려고 했는데 이렇게 돈도 있고 기회가 있을 때 딱 챙겨야죠 "
미리 인터넷으로 봐둔 스카프가 있는데... 그 브랜드가 여기에는 없나,
고개를 쭉 빼고 이리저리 살펴보는데 다행히도 저 맨끝에 내가 원하는 매장이 보였다.
" 여기 스카프가 유명하고 이뻐요. "
하하 웃으며 아무생각없이 스카프만 생각하고 딱 들어가자마자 재빨리 내뒤로 따라붙는 직원들
맞아 여기 명품관이었지 ^q^ 수상한 사람 아닙니다.
다른 가게 같았으면 우왕! 거리면서 만져봤을텐데 여기는 저렇게 스카프가 널려있어도 범접 할 수 없는 유리막때문에 함부로 만질 수 없다는게 답답 할 뿐이고...
도경수 씨와 환한 조명 빛을 받는 스카프들이 정렬 되어있는 유리 케이스에 가까이 다가갔다.
" 어떤 스카프가 괜찮을까요? "
눈동자를 굴리며 디자인들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 .. 저는 다 괜찮은 것 같은데, "
" 저기 저 두번째 스카프는 어때요? "
" 어, 이쁘네요. 어머니께 드리면 좋아하실 것 같아요 "
역시 내 안목이란
필요한 거 있으면 말씀해주세요~를 외쳐대며 입꼬리가 내려오지 않는 직원에게 작게 저 두번째 스카프 좀 보여달라고 말을 하니 일사불란하게 손을 움직여 눈깜짝 할 새에 만질 수도 없을 것 같던 스카프가 바로 앞에 놓여졌다.
이 비싼 몸을 소인이 함부로 만져ㄷ.. 실크를...만ㅈ..만져버렷!
역시 비싼 건 비싼 값을 하는 듯 했다. 물 흐르 듯 찰랑거리는 실크는 굳이 엄마에게 선물하고 난 뒤 반응을 보지 않아도 좋아 할 것이라는 걸 느끼게해주었다.
이거다. 다른 건 볼 필요도 없다.
" 가격은 어느정도 할까요? "
" 31만원입니다~ 이번 F/W 컬렉션에서 선보인 스카프로 보시면 아실 수 있듯이 굉장히 · · · "
...?
나는 지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31만 원
멘탈이 내 머리를 빠져나가 저 우주 끝으로 날아가버리는 기분, 31만 원 하하 , 내가 인터넷으로 본 가격이랑은 다르다.인터넷에서는 분명 20만원 선이었는..
아.. 인터넷이라서 가능한 거 구나...
나는 도대체 왜 이 천쪼가리가 31만 원인지 1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비싼 천쪼가리를 붙잡고 점원의 설명을 흘려들으며 고심했다.
도경수 씨한테 완전 당당하게 부모님 선물 챙겨드리려구요! 이랬는데 지금와서 저는 못챙겨드리겠네요 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하 진짜, 그래 이런 건 빨리 사서 나같은 피해자가 없도록 해야 돼
그렇게 자기 합리화를 하고 직원에게 쿨한 척 카드를 내밀었다.
" 주세요, 선물 포장도 해주세요 "
안녕 내 노동의 결실이여 너는..한 순간에... 천쪼가리가 되었구나...
내 카드가 비명을 지르며 긁히는 모습을 보며 속으로 함께 울부짖었는데 옆에서 내가 봤던 스카프를 한참 만지작 거리던 도경수 씨도 지갑을 꺼내들었다.
" 똑같은 걸로 하나 더 선물 포장해주세요 "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우고 도경수 씨를 보니 씨익 웃으며 말하는 그
" 저도 이렇게 기회 있을 때 챙겨드리게요 "
역시 강남에 직장을 둔 자의 여유..!! 효자네 효자여 bb
기다림도 잠시 직원은 빛의 속도로 스카프를 포장하고 방긋방긋 웃으며 안녕히 가세요 고갱님~을 외쳤다.
어떻게 딱 영화 시간에 맞춰서 샀네,
머리를 가득 채우는 31만 원에 내적눈물을 흘리고 영화관으로 향하는데 주말이라서 그런가 커플이 굉장히 눈에 많이 띈다.
아직 나는 공식적으로는 솔로기 때문에 심기가 거슬리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런데 하하호호 거리면서 지나가는 커플들을 흘기며 도경수 씨와 나란히 발을 맞춰 걷다가 언뜻언뜻 그의 손가락과 스치는 새끼손가락에 자꾸 흠칫 놀라게된다.
남자 손 못잡아서 환장한 것도 아니고 왜 이러는지
도경수 씨도 한 번은 조금 진하게 손이 닿았을 때 그걸 느낀건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멋쩍게 미소지었다.
ㄱ..고의는 아니에요
정말요,
급 소금이 되어 쇼핑백을 쥐고있는 손이든 아무것도 없는 손이든 뻘쭘해져 힘을 살짝 쥐었다 피는데 또 새끼손가락이 닿았다.
방금은 진짜 고의같았어, 밝히는 여자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야? 으으ㅡ으ㅡㅠㅠㅠㅠ
정전기가 일어난 듯 손이 닿으면 찌릿하고 뒤로 빼고 또 손이 닿으면 흠칫하고 몇번을 반복했는지 모르겠다. 이 놈의 영화관은 왜 이렇게 먼지
이제부터 손가락 간수를 잘하리라하고 다짐하는데 무언가 따뜻한게 새끼손가락에 걸렸다.
깜짝 놀라서 손을 내려다보니 내 새끼손가락을 고이 감싸고 있는 도경수 씨의 새끼손가락이 보였다.
" 이렇게하면 손가락 걸릴 일도 없고, 괜찮죠? "
ㅎ..핫..! 이거 너무 진도가 빠른 거 아니야..? 벌써 손을 잡았..아니 손가락을 잡다니..
하지만 말로 하는 대답 대신 내 손가락이 먼저 그의 새끼손가락을 꼬옥 맞잡았다.
우리는 그 손가락을 팝콘을 살 때 내가 돈을 내겠다고 조를 때 말고는 자리에 착석 할 때 까지 마치 본드라도 발라놓은 것 마냥 놓지 않았다.
왠지 손가락으로 교감하는 것 같달까...
물론 변태는 아닙니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 광고를 보며 팝콘을 흡입하는데 가방에 잠들어있는 휴지가 생각났다. 휴지 없으면 안된다고 해서 일단 챙겨오긴 했는데...
" 미리 휴지 드릴까요 "
광고 중이지만 주위에 광고조차 너무 재밌게 보는 사람이 많아서 도경수 씨에게 소곤소곤 말을 걸었다.
" 아뇨, 괜찮아요 "
... 보다가 휴지 달라고 하기만 해봐, 비죽 입을 내밀고 휴지를 꺼내쥐었다.
기껏 막 울거라고 휴지까지 들었는데 생각보다 안 울면 어떡하지,
흐흐흐흐르으ㅡ으ㅡ흐ㅡㅡㅡ으ㅡㅡㅡㅡ응으으으킁! 흑흐으ㅡ윽ㅡㅡ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뭐야 이거 완전 슬프잖아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으으ㅡ흐흐ㅡㅠㅡ유유ㅠㅠ유ㅠㅠㅠㅠㅠㅠㅠㅠ
영화가 끝무렵에 다가갈수록 수도꼭지를 튼 것 마냥 눈물이 뚝뚝 흘렀다. 휴지로 눈물과 입을 틀어막으며 주변을 둘러보니 눈물을 흘리며 코를 먹는 사람들이 늘어갔고 아무런 반응이 없어서 힐끔 바라본 도경수 씨도
휴지로 눈가를 닦고 있었다.
휴지 필요 없다면서 내 휴지는 언제 가져간거야
둘 다 질질 짜고 있는 입장이라 안 운다면서요! 라고 할 수도 없어 그냥 도경수 씨에게 더 뽑아가라며 휴지를 내밀고 함께 울었다.
영화가 끝나고 코를 훌쩍거리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섞여 나가는데 옆에서 아무 말 안하고 있는 도경수 씨를 보니 눈이 아직도 촉촉하다.
" 뭐야, 도경수 씨 잘 안운다면서요 "
눈물덕분에 살짝 떨리지만 웃음기가 담긴 목소리로 놀리 듯 말했다.
" 아, 저도 이렇게 슬플 줄은 몰랐네요 "
도경수 씨는 자기가 생각해도 웃긴지 피식피식 웃었다.
오늘이 나름 공식적인 첫 데이트라고 하면 처음인데 어떻게 하하호호 웃으며 보내도 모자를 망정 서로 우는 꼴만 보고 있으니 웃길 수 밖에,
한참 서로를 보고 키득거리며 웃다가 먼저 웃음을 멈춘 도경수 씨가 눈 앞에 새끼 손가락을 내밀었다.
약속? 약속하자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니 아까처럼 내 새끼 손가락에 자기 손가락을 엮어보인다.
뭐야..ㅎ..
" 아버님 선물은 마저 안사도 돼요? "
손가락으로 엮인 손을 흔들거리며 영화관을 나서는데 도경수 씨가 기어코 기억을 하고 물어봤다.
... 저에게는 인터넷이라는 좋은 도구가 있어서...
" 아빠 선물은 이미 주문해서 괜찮을 거 같아요 "
집에 가서 주문할 거예요
" 그럼 이번에는 ○○씨가 저 좀 도와주실래요? "
난희... 도와달라니.. 대체 어떤 대단한 걸 도와달라고 할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도경수 씨를 보았다.
" 저희 아버지 선물 고르는 것 좀 도와주세요 "
힘든 부탁도 아니라 거부 할 이유가 없어 도경수 씨를 따라 다시 밟기조차 미안하게 반짝거리는 대리석이 깔린 명품관으로 향했다.
" 혹시 미리 생각 해놓은 선물 있어요? "
" 음, 아뇨, ○○씨는 어떤 거 골랐어요? "
" 저는 지갑이 너무 비싸서 벨트 골랐는데 부담되는 가격 아니면 지갑도 괜찮을 것 같아요 "
술술, 굳이 도경수 씨가 조언을 구하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내 입은 저절로 움직였다.
그는 가만히 내 말을 듣다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 그럼 ○○씨 말대로 지갑 한 번 볼까요? "
오, 사실 가격대 생각 안하고 지갑을 보면서 미리 골라놓은 브랜드가 하나 있는데 잘됐다.
고민고민하면서 인터넷을 뒤지던 지난 시간이 헛되지 않았어...☆★
대리만족으로 신이 난 나는 대놓고 삿대질로 저 브랜드는 어때요? 저 브랜드도 괜찮아요! 하며 도경수 씨를 이끌었고
도경수 씨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 라는 황희정승같은 태도로 일관하며 내 새끼 손가락에 끌려다녔다.
한참 고르고 고른 끝에 새끼 손가락을 맞잡고 들어간 매장은 스카프 매장보다는 많이 유한 분위기였다.
물론 여기도 차마 범접 할 수 없는 유리 결계가 쳐져있다는 건 다름 없었지만
곧바로 지갑들이 놓여있는 곳으로 가 가볍게 감탄사를 내뱉고 구경하는데 또 방실방실 웃는 직원이 다가왔다.
역시 부담스럽지만 열심히 도경수 씨에게 저거 이뻐요. 라고 말을 걸었다.
우리 아빠 선물 사는 것도 아닌데 정작 선물 받을 사람 아들은 다 좋아요. 하고 있으니.. 답답해져 도경수 씨 눈에 가장 이쁜 걸 고르라구요! 라고 말하려던 찰나였다.
" 남자친구분 지갑 고르시나봐요? 요즘 20대 남성분들 사이에서 가장 잘나가는 모델이 이 모델인데 어떠세요? "
...? 남자친구?
곧바로 아니거든요! 라고 대답하기 뭐해서 어색하게 웃고는 말했다.
" 50대? "
도경수 씨 아버님이라면 50대가...맞겠지? 한 번 아무말 없이 있는 도경수 씨의 눈치를 보고 마저 말을 이어갔다.
" 50대 남성분이 쓰실 건데... "
내 말에 아~ 아버님이 사용하실 제품이요~ 하고 손뼉을 치며 자기가 좋아라 지갑을 추천해주는 직원은 뭔가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다.
도경수 씨와 내가 사귀는 사이라고 생각한다든가 우리가 사귀는 사이라고 생각한다든가 우리가 연인 관계라고 생각한다든가...
딱히 기분이 나쁘진않은데 왠지 기분이...사귀는 사이가 아닌데도 그렇게 봐주니... 참 묘한 것이...
새끼손가락에 약하게 주고있던 힘마저 풀리려고하니 도경수 씨의 소지가 더 단단히 내 손가락을 매어왔다.
" ○○씨 저건 어때요? "
도경수 씨는 대놓고 좋아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뒤로하고 처음으로 자기가 주도해서 고른 지갑이 무엇인고 보자하니 아까 내가 이쁘다고 했던 지갑이다.
도경수 씨의 말에 직원은 어머~ 너무 탁월한 선택이세요~ 하며 말했다.
하지만 직원의 반응에도 그는 나만 쭉 쳐다보며 어떻냐는 눈빛을 보냈다.
" 네.. 이뻐요.. 이쁘네요 "
그제야 도경수 씨는 검지로 그 지갑을 콕콕 찍으며 카드를 꺼냈다 . 카드를 꺼낼 때도 손가락은 놓지 않은 채
어쩌면 직원이 괜히 오해한게 아니다 싶기도 하다.
와구와구, 쇼핑을 마치고 점심을 가볍게 때운터라 조금 이른 저녁 식사는 꿀맛이었다.
저번에 점심을 코스로 먹었을 때보다 그냥 가벼운 파스타 집이라서 편하기도 하고 크림 스파게티를 오랜만에 먹어서 호로록 잘 넘어가기도 하고
또 오늘은 내가 후줄근한 패딩을 안입고 와서 어느정도 체면은 차릴 수 있기 때문이지!!!!!!
후후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스파게티를 흡입하는데 자꾸 따끔따끔 도경수 씨의 시선이 느껴진다.
이 사람이 또 안 먹고있네
포크를 소리나게 놓으며 나를 지긋이 바라보는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 왜 안먹어요? "
" 저번 점심 먹을 때도 음식 다 안먹은거 아는데 또 이렇게 안먹을래요? 도경수 씨 먹을 때까지 저도 이러고 있을래요 "
내 크림 스파게티가 불어가는 건 조금 슬프지만...
" 저는 괜찮아요. 빨리 먹어ㅇ... "
" 자꾸 이럴래요? 저 진짜 도경수 씨 먹을 때까지 계속 이러고 있을거에요 "
도경수 씨는 내 눈치를 보다가 겨우 포크를 잡아들었다. 그렇지! 빨리 호로록!
" 진짜 제가 먹을 때까지..? "
대답 대신 굳건한 눈빛을 쏴주니 그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포크에 면을 돌돌 말아 입에 넣는다.
그리고 다시 나를 보는 그의 눈빛은 말은 안해도 먹으라는 의미는 분명하게 담고있었다.
애도 아니고 내가 이렇게까지 해서 먹여야한다니...
푸스스 웃으며 나도 같이 포크를 들었다.
저녁을 먹고 식당에서 나오는데 또다시 외박은 안된다는 엄마의 전화가 와 데이트의 흐름을 깨버렸다.
나도 모르게 엄마! 그런거 아니라고! 라며 외치는 바람에 도경수 씨는 그 전화가 엄마에게서 온 것임을 알고는 빨리 집에 가야하는 거 아니냐며 오늘 데이트를 끝내기로 했다.
하.. 엄마..제발... 아직 해도 다 안졌다고!!!!
오늘 집 앞 골목까지 태워다준 도경수 씨한테 일어난 자그마한 변화는 차 문을 열어주고 항상 마주보고 인사했는데 이제는 새끼 손가락 걸고 바로 정말 집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는 거?
남이 보면 무슨 초등학생도 아니고 새끼 손가락만 잡고 다니냐고 할텐데, 나는 그저 이거라도 설레임을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 오늘 덕분에 즐거웠어요, 보고 싶었던 영화도 보구 "
" 제가 더 고맙죠, 덕분에 부모님 선물도 잘 골랐어요. "
우리 둘은 서로를 꼭 잡고있던 새끼 손가락을 차마 놓지 못했다. 이걸 놔야지 집에 들어 갈 수 있는데, 놓기가 싫다.
그 마음이 통했던건지 도경수 씨와 나는 한참을 담벼락 밑에 서서 아무 말 없이 새끼 손가락을 꼭 붙들고 서있었다.
비록 작은 접촉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따스함이 전해지는 느낌
그러다가 휭 하니 불어오는 찬바람에 코 끝이 찡해지자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것임을 깨닫고 손가락에 힘을 빼니 도경수 씨도 순순히 내 손가락을 놓아주었다.
" 이만 들어가볼게요. 조심히 운전하세요 "
작게 목례를 하고 들어가려는데 그동안 해준 적 없는 손인사를 해보이며 밝게 웃었다.
" 연락할게요 "
*
멀끔한 정신으로 아침을 맞은 경수의 컨디션은 상 중에 최상, 그야말로 철인 3종 경기에 참가해도 순위권에 들 것 같은 컨디션이었다.
영화 보러가자고 말하려고 할 때 그녀가 먼저 말해버려서 내심 당황했지만 결국 데이트 신청에 성공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경수는 뿌듯했다.
본래는 맨날 아침만 허겁지겁 먹고 나갔는데 오늘은 점심까지 먹고 현관에서 외출 준비를 하는 아들이 신기한 경수의 엄마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경수에게 물었다.
" 데이트 가니? "
경수는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대답했다.
" 네 "
경수의 엄마는 너무 당당한 대답에 잠깐 당황했지만 곧 팔을 불끈 들어보였다.
" 그래! 우리 아들 사랑하니까 더 멋있어지는구나! 화이팅! "
허구한 날 선을 보라며 재촉하던 엄마였는데 이렇게 자신의 주체적인 사랑을 인정해주다니, 엄마에게 조금 감동받은 경수였다.
엄마의 응원을 받으며 도착한 그녀의 집 앞, 약속 시간이 딱 되면 저 골목에서 패딩에 둥둥 파묻혀 종종 걸어올 그녀를 상상하니 경수는 절로 미소가 나왔다.
빨리 보고싶다.
원래 차 안에서 기다릴 심산이었지만 빨리 그녀를 보고싶은 마음에 다급해져서 차에서 나와 그녀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어떤 표정을 하고 나올까, 춥다고 찡그리는 표정? 아니 이왕이면 웃으면서 나왔으면 좋겠다.
경수는 자기 귀가 추워서 떨어져 나갈 것 같은 것도 모르고 헤헤 웃으며 골목 안 쪽만 오매불망 바라보았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시간을 보려 핸드폰을 꺼내던 경수를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상치 못한 놀란 표정으로
" 도경수 씨! "
" 어, 일찍 나왔네요 "
약속했던 것보다 일찍 나온 그녀가 두 손을 모아 입김을 불며 달려왔다, 에구 많이 추운가보다, 따뜻하게 입고 나오랬는데 장갑이라도 사줘야하나
" 아니 일찍 나오고 말고, 도경수 씨는 안추워요? 차 안에서 기다리면 제가 알아서 나올텐데 왜 이렇게 나와있어요 "
" 괜찮아요. 안추워요. "
빨리 보고 싶어서 나와있었어요.
비록 귀엽게 패딩에 둥둥 파묻혀있지는 않지만 코트를 입은 자태도 너무 이쁜 그녀
" 제가 열어드릴게요 "
사랑하는 여자의 문은 남자가! 멋진 기사도 정신으로 그녀가 문을 열려는 걸 막고 대신 열어주었다. 혹시 차가운 문고리를 잡으면 그녀의 손이 시렵지 않을까
차에 타 안전벨트를 하는데 빤히 나를 쳐다보던 그녀가 조그만 손으로 내 자켓을 살짝 꼬집어본다. 손 진짜 귀여워
" 히익, 이렇게 입고 안춥다고 나와있었던 거에요? 미쳤나봐 "
... ○○씨 기다리는 건 안추운데...
" 앞으로 이럴거면 데리러 오지마요. 추운데 미안해지게, 아니면 차 안에서 기다리던가 "
그건 안돼요! 나는 바쁘게 머리를 굴려 다른 선택지를 찾았다. 그리고 찾아낸 선택지가
" 두껍게 입고 다닐게요, 그럼 ○○씨 데리러 와도 되는거죠... "
그러니 밖에서 기다릴 수 있게 해주세요.
붕붕 뜬 마음으로 영화관으로 향하는데 손을 꼼지락 거리던 그녀가 경수에게 말을 걸어왔다.
" 도경수 씨는 영화같은 거 보고 잘 울어요? "
...
경수는 곧장 대답 할 수 없었다.
공부에 치여살던 학창시절 때 영화는 커녕 친구들은 다 간다는 그 흔한 피씨방도 가본게 세 손가락 안에 꼽았으니까 그것도 순전히 친구가 가자고해서 따라만갔지 피씨방 컴퓨터를 이용해본 경험은 전무했다.
그런 경수가 슬픈 영화를 보며 질질 짤 시간은 없었다.
" 음... 저는 잘 안울어요. 그럼 ○○씨는 잘 울어요? "
그 질문에 하-하며 숨을 뱉고 대답하는 그녀
" 전 진짜.. 집에서도 혼자 분에 못이기면 막 울고 그래요. 그래서 저 영화보고 펑펑 울면 도경수 씨가 달래줘야해요 "
집에서도 혼자 막 운다니,이왕이면 웃는게 좋지만 그런 모습도 귀여울 따름이다.
힐끔 옆을 보니 벌써 울 생각에 그녀가 인상을 썼다.
" 네 달래줄게요, "
거기다 펑펑울면 달래달라니, 아무렴 누구의 부탁인데 당연히 달래줘야지
" 영화 시작이 언제에요?"
영화표를 뽑고있는데 그녀가 갸웃거리며 물었다. 경수는 자신도 모르게 실없이 헤헤 웃음이 나올 뻔 했다.
" 40분정도 남았네요. 뭐 하고 싶은 거라도 있어요? "
아무거나 다 괜찮은데, ○○씨가 원하는 거라면
내 말에 눈을 반짝이던 그녀는 옷 소매를 끌며 말했다.
" 음, 그러면! 저 좀 도와주세요, "
그리고 향한 곳은, ... 명품관?
대체 여기서 무엇을 도와달라는 걸까, 설마 금전적으로 도와달라는ㄱ ...바로 그 생각을 끊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부모님 선물 챙겨드리려구요 "
" 부모님 생신이세요? "
" 아뇨, 그냥 언젠가 한 번 두분 다 챙겨드리려고 했는데 이렇게 알바도 하고 있고 기회가 있을 때 딱 챙겨야죠 "
그녀는 효녀였다.
경수는 반성했다. 지난 날의 삶을, 나름대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서 그동안 부모님에게 선물을 드린다 라는 생각을 해본적이 없었다.
맨날 공부 열심히하고 기업 물려받는게 효도하는 거라고 부모님이 직!접! 말씀하셨기 때문에 정말 그것만 하면 다인 줄 알았던 경수에게는 생신도 아닌 날 선물을 챙겨드리는 건 그야말로 컬쳐쇼크였다.
" 여기 스카프가 유명하고 이뻐요. "
여기저기 둘러보던 그녀는 이내 한 매장에 들어가더니 눈을 빛내며 깔끔하게 정렬된 스카프들을 구경했다.
뒤따라 들어간 경수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스카프를 보고있는 그녀의 뒤를 기웃거렸다.
엄마가 맨날 이상한 걸 목에 칭칭 두르고 있길래 뭔가 했는데 이거 였구나,
" 어떤 스카프가 괜찮을까요? "
다 똑같은 것 같은데... 그녀의 물음에 당황한 완벽한 이과남자 경수는 이 조잡한 무늬를 이해 할 수 없었다.
" .. 저는 다 괜찮은 것 같은데, "
경수의 최선의 대답
" 저기 저 두번째 스카프는 어때요? "
" 어, 이쁘네요. 어머니께 드리면 좋아하실 것 같아요 "
스카프 무늬를 이쁘다, 안이쁘다를 구별 할 수는 없지만 그녀가 고른 건 이쁘고 고르지 않은 건 안 이쁘다 라는 건 이미 머릿속에 박힌 경수였다.
○○씨가 고른건 다 이뻐
" 가격은 어느정도 할까요? "
" 31만원입니다~ 이번 F/W 컬렉션에서 선보인 스카프로 보시면 아실 수 있듯이 굉장히 · · · "
만지작만지작, 그녀가 고른 스카프를 만져보았다. 오 맞아 이게 맨날 엄마가 두르던 거랑 똑같아, 되게 좋아하던데
경수는 그녀의 안목에 놀랐다. 어떻게 어른들의 취향을 저렇게 잘 알까
분명 결혼하면 시댁에서도 이쁨받을 여자임이 틀림 없다. ... ㅎ
아무 생각 없이 스카프를 만지고있는데 옆에서 계산을 하는 그녀,
" 주세요, 선물 포장도 해주세요 "
알바하면서 부담 될텐데, 부모님을 위해 돈을 아끼지 않는 그녀에게 감명을 받은 경수는 이내 자신도 카드를 꺼내들었다.
언젠가 자신이 부모님에게 생신이 아닌 날 깜짝 선물을 드린 적이 있었던가,
" 똑같은 걸로 하나 더 선물 포장해주세요 "
○○씨가 고른거니까 분명 엄마도 좋아 할 거야
" 저도 이렇게 기회 있을 때 챙겨드리게요 "
언제 또 같이 부모님 선물을 사러오겠어요.
경수는 매장을 나와 영화관을 가면서 쇼핑백 안에 곱게 포장된 스카프를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어머니께 드리려고 고르고 고른 스카프는 경수의 마음에도 쏙 들었다.
만약 엄마가 받고 좋아한다면 ○○씨는 우리 집안 며느ㄹ,
...
잠깐 착각이었나, 손가락이 닿은 것 같은데... 착각인ㄱ.. 또 닿았다.
이번에는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나란히 걷는 그녀의 손가락과 내 손가락이 닿았다.
작은 접촉에도 침이 바짝바짝 말라 목을 한 번 크게 울렁였다.
아, 죽겠다. 자꾸 손이 닿는다.
미치겠다.
손잡고 싶은데
그녀가 모르게 고개를 살짝 돌려 깊게 숨을 내뱉었다. 계속 이러다가는 나도 모르게 손을 잡아버릴지도 몰라...
그리고는 두 손에 꼭 힘을 주었다. 정말, 정말 이성을 잃고 손을 잡아서 그녀가 경수를 환멸의 눈길로 바라볼 수도 있는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경수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조금 더 진하게 손이 부딪혀 왔을 때 였다.
" 이렇게하면 손가락 걸릴 일도 없고, 괜찮죠? "
그녀의 새끼 손가락을 꼭 잡은 건 순식간이었다. 경수도 당황했다. 나름 최선의 방법인 것 같았는데,그녀가 싫어하면 어쩌지
마음을 졸이며 ○○씨의 얼굴을 마주보는데 그녀는 말 대신 똑같이 새끼손가락으로 대답해주었다.
꼬옥, 따뜻하게 손가락 포옹을 하면서
하.. 진짜 짜증난다. 영화가 뭔데 손가락 포옹을 끊는가!! 경수는 영화관에 앉으면서 자연스럽게 끊긴 손가락에 화가 났다. 그녀가 아니라 팝콘과 영화에,
" 미리 휴지 드릴까요 "
광고를 보던 그녀는 팝콘을 먹다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그럴 때마다 마음이 몽글몽글 거리는게, 흠칫 쪼그라들게 된다.
" 아뇨, 괜찮아요 "
내가 울까봐 챙겨주는 것 봐, 배려심 넘쳐
이때까지 경수는 몰랐다. 자신에게 휴지가 필요 할 줄은, 그리고 영화가 자신을 울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훌쩍, 영화는 생각보다 너무 슬펐다. 초중반까지는 잔잔히 와닿는 내용에 보다가 어느샌가 터져버린 눈물을 주체 할 수가 없었다.
정신없이 울고있는 그녀의 휴지를 몰래 몇장 빼서 흐르는 눈물을 닦았지만 이러다가 자신이 그녀를 달래주기는 커녕 그녀가 자신을 달래줘야 할 지경이었다.
잘 안운다고했건만... 휴지도 조금씩 젖어가 부족해지려는데 내 눈물을 알아차린 그녀가 조용히 휴지를 건내주었다.
고마워요...
영화가 끝나고 함께 영화관을 나오는 그녀가 붉은 눈가로 살풋 웃으며 말을 걸었다. 울어도 이뻐
" 뭐야, 도경수 씨 잘 안운다면서요 "
.. 그런 줄 알았는데
" 아, 저도 이렇게 슬플 줄은 몰랐네요 "
나도 내가 이렇게 목소리가 살짝 잠길 정도로 울 줄은 몰랐다. 그냥 슬퍼도 눈물 몇방울 정도만 흘릴 줄 알았지...
나 자신이 얼마나 웃긴지 풋, 하고 웃음이 터지니 그녀도 따라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구석에서 한참 서로를 보며 웃다가 눈물이 조금 가라앉아 아직 물기가 가시지 않았지만 이쁘게 미소를 담고있는 그녀의 얼굴 앞에 새끼 손가락을 들이밀어 보였다.
영화 보는 동안 못 잡았잖아요. 팝콘 때문에
새끼 손가락을 흔들어보기도 굽혔다 펴보기도 했지만 ○○씨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정말 모르는 건지 모르는 척 하는 건지
내가 먼저 그녀에게 손가락 포옹을 하니 그제야 알아채서는 히히 웃는다. 그럼 또 나는 따라서 히히 웃을 수 밖에
바보된 것 같아 나,
즐겁게 맞잡은 손을 흔들거리며 걸음을 옮기는데 다음 행선지를 고르지 못했다.
음... 부모님 선물을 살 거라고 했나 그러면
" 아버님 선물은 마저 안사도 돼요? "
벌써 밥먹으러가면 또 거기서 손가락 못 잡잖아요.
기대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니 슬금슬금 눈을 피한다.
" 아빠 선물은 이미 주문해서 괜찮을 거 같아요 "
아...
...
" 그럼 이번에는 ○○씨가 저 좀 도와주실래요? "
아직 밥은 먹기 싫어요.
" 저희 아버지 선물 고르는 것 좀 도와주세요 "
○○씨는 이미 샀지만 저는 아직 안샀잖아요.
아우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경수는 서로 맞잡은 손가락을 때지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져 실실 웃음을 흘렸다.
" 혹시 미리 생각 해놓은 선물 있어요? "
" 음, 아뇨, ○○씨는 어떤 거 골랐어요? "
주체적으로 골라 산 선물이 아니라 선물 받으실 부모님께는 죄송하지만 안목이 없는 아들을 탓하세요. ○○씨가 산 거 따라사야지, 경수는 그녀의 안목을 100% 신뢰했다.
" 저는 지갑이 너무 비싸서 벨트 골랐는데 부담되는 가격 아니면 지갑도 괜찮을 것 같아요 "
정성스러운 그녀의 대답은 경수의 마음에도 쏙 들었다. 어쩌면 말을 저렇게 이쁘게할까, 경수의 눈에 콩깍지가 단단히 씌인 듯했다.
" 그럼 ○○씨 말대로 지갑 한 번 볼까요? "
그 말에 ○○씨는 화색을 하며 종알종알 말을 하기 시작했다.
저 브랜드는 디자인은 이쁜데 내구성은 별로에요. 저건 가격이 너무 부담스러울 것 같아요. 굳이 그녀의 말에 대답을 해주지 않아도 자기 선물인 것처럼 이 생각 저 생각 한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정작 경수는 별 생각 없이 아버지 선물을 사러가는 것 좀 도와달라고 라고 물었을 뿐인데, 네 그래요, 좋아요 하며 따라다니기도 한참 그녀는 한 매장을 찝으며 여기가 괜찮을 것 같아요! 라고 외쳤다.
사실 전 뭐가 좋고 뭐가 나쁜 건지 아무것도 몰라요. 100% ○○씨의 안목을 믿을 수 밖에
경수는 지갑 선택은 모두 떠맡긴 채 꼭 잡은 새끼손가락이 뭐라도 된 것마냥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뿌듯하게 내려다보았다.
비록 새끼손가락이지만 작게 연결된 이 고리는 서로의 감정을 주고받기에는 충분했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손가락이 아니라 손바닥끼리 맞잡을 수 있는 날이 오겠지
그렇게 경수는 머릿속으로 그녀와 연인이 된 날을 상상하는데 직원이 그 산통을 깨버렸다.
" 남자친구분 지갑 고르시나봐요? 요즘 20대 남성분들 사이에서 가장 잘나가는 모델이 이 모델인데 어떠세요? "
음? ○○씨와 나는 동시에 잘못들은 건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직원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연인처럼 보이나봐요. 그녀또한 대놓고 직원에게 부정을 표하지 않았다. 싫지는 않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나요?
" 50대? "
○○씨는 문뜩 내게 50대? 하며 웃고있는 나에게 물어왔다. 우리 아버지 50대 맞으신데, 단박에 알아채다니 우린 역시 연인인가봐요.
" 50대 남성분이 쓰실 건데... "
흐뭇한 표정으로 직원에게 이야기하는 ○○씨를 보고있노라면 새삼 그녀의 부모님께 감사드리게된다. 어떻게 이렇게 이쁜 딸을 낳으셨지요.
너무 과하게 바라본 까닭일까, 내 시선을 느낀 그녀가 뾰루퉁한 표정으로 눈을 흘겼다. 그래 여기서만 이러고 있을게 아니라 밖에 돌아다니면서 빨리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꼭 잡은 새끼 손가락을 보여줘야한다.
" ○○씨 저건 어때요? "
사실 아까 ○○씨가 추천해준건데 제 눈에도 저게 이뻐보여요.
사근사근 거리는 눈빛으로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 네.. 이뻐요.. 이쁘네요 "
좋아, 그녀가 이쁘다고 해줬으니 바로 계산 하는 걸로!
이른 저녁, 나는 예전에 한번 점심을 단둘이 했을 때 이후로 언제 또 해볼까 했는데, 이렇게 해보네
많이 배고팠는지 다람쥐처럼 입 안 가득 파스타를 오물거리는 그녀, 보고있으면 눈을 땔 수가 없다 또 내가 언제 밥을 먹었는지는 느껴지지도 않게 공복감은 사라져버리고 없다.
그저 바라만 봐도 좋은게 이런건가보다.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지만 속으로 아이구 잘먹네, 라는 말만 가득차니 나는 밥을 안먹어도 좋다.
포크를 들 시간도 아까워 가만히 있으니 갑자기 포크를 내려놓는 그녀
" 왜 안먹어요? "
" 저번 점심 먹을 때도 음식 다 안먹은거 아는데 또 이렇게 안먹을래요? 도경수 씨 먹을 때까지 저도 이러고 있을래요 "
애가 타기 시작했다. 안먹는다니.. 먹는 모습 지켜보는게 내 식사시간에 존재하는 유일한 낙이 되었는데,
" 저는 괜찮아요. 빨리 먹어ㅇ... "
" 자꾸 이럴래요? 저 진짜 도경수 씨 먹을 때까지 계속 이러고 있을거에요 "
그건 안돼요. 울며겨자먹기로 포크를 들어 파스타 중간을 딱 찍고 눈동자를 올려 ○○씨를 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끝까지 내 입 속으로 파스타가 들어가는 것까지 보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불타오르는 모습이었다.
" 진짜 제가 먹을 때까지..? "
이제는 의지에 눈동자까지 불에 탈 듯 했다.
..알았어요, ○○씨가 안먹으면 손해보는건 제 쪽인 것 같네요.
결국 ○○씨와 나, 모두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그녀는 만족한 얼굴로 식당을 나오며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당연하다는 듯이 새끼 손가락을 잡아주었다.
밥먹고 좀 더 돌아다닐까요.라고 물어보려던 찰나 요란하게 울리는 그녀의 핸드폰, 대체 우리 둘의 시간을 방해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봤더니 ○○씨의 어머니셨다.
아... 어머님..
아무래도 외출한 딸이 걱정되셔서 전화를 하신 모양이셨다. 아마 나도 ○○씨 같은 딸이 있다면 외출은 커녕 학교 보낼 때도 벌벌 떨 것 같다.
그런 어머님의 마음이 이해가 돼 이만 오늘의 데이트를 끝내기로 했다. 저는 믿음직한 사윗감임을 알아주세요!!
이렇게 비교적 밝은 시간대에 그녀를 데려다 준 적이 몇 번이나 있던가, 시간도 여유롭겠다. 그리고 이렇게 새끼 손가락도 꼭 잡았겠다.
헤어지기 싫은 마음만 커져갔다.
" 오늘 덕분에 즐거웠어요, 보고 싶었던 영화도 보구 "
" 제가 더 고맙죠, 덕분에 부모님 선물도 잘 골랐어요. "
분명 부모님도 좋아하실 거에요.
이제 이 잡은 손가락을 놔야 할 텐데, 우리 둘은 서로를 놓지 못했다. 마음이 통한 것이다.
만나면 만날수록 통하는 것이 점점 늘어가는 기분, 별 것 아닌 거에도 설레고, 놀라고, 웃음만 나오고, 회사 사람들이 요즘 좋은 일 있냐고 자꾸 물어보더라니, 다 ○○씨 때문이었다. 아니 덕분이었다.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보다 마음은 더 커져만 가고 열어주지 않을 것만 같았던 그녀의 마음은 어느새 내 마음을 받아주고있었다.
없으면 자꾸 생각나고 일하다가도 보고싶고 시간이 남으면 폰으로 한 대화 내용을 다시 훑어보기도하고 만나면 무슨 말을 걸까 고민하기도 했던 지난 시간이 열매를 맺었다.
이제 시간이 지나 열매가 농익을 때만 기다리면 된다.
꼭 그 때가 오겠죠?
스르르 손가락이 풀리며 우리는 너나할 것 없이 입가에 이쁘게 미소를 띄웠다. 아쉽지만 또 설레기도 했던 시간
" 이만 들어가볼게요. 조심히 운전하세요 "
환한 미소로 인사하는 그녀, 보내기 싫지만 다음에 봐요.
" 연락할게요 "
*
선물 그 뒷이야기
찬기운을 몰고 집으로 들어온 경수는 곧장 거실 쇼파에 앉아있는 자신의 엄마에게 향했다.
평소에 잘 마주앉아보지도 않던 아들이 돌아오자마자 이러다니, 경수의 엄마는 놀랄 노자였다.
" 웬일이야 아들 "
경수는 말없이 한 손에 든 작은 쇼핑백 두 개를 내밀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갑자기 뭔지도 파악이 안된 경수의 엄마는 연신 어머어머 거리며 쇼핑백을 받아 들어 남의 것 마냥 뜯어 볼 생각은 안하고 훔쳐보기만 했다.
" 선물이야 "
선물? 그동안 선물이라고는 나름 비싼거라고 백화점 베이커리에서 케이크만 사오던 애가 갑자기 웬 선물?
경수의 엄마는 경수와 똑 닮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빠르게 두 쇼핑백을 뜯어보기 시작했다.
" 아 그거는 아버지꺼고, 이게 엄마꺼 "
" 너가 이걸 어떻게 알아서 이걸 사? "
엄마 선물이라며 산 스카프는 친구들이 자기 며느리가 사줬녜 선물로 받았녜하며 자랑하던 스카프와 같은 브랜드였다. 풍족하지 않았던 젊을 적 소비 습관으로 스카프를 그만한 돈 주고 살 기량이 없어 그동안 저렴한 스카프만 사고 부러워하기만 했는데 아들이 그 마음을 알아 준 것이었다.
" 아들... 정말... "
경수는 대답이 없었다. 자신은 나름 작은 선물이랍시고 샀는데 그에 비해 엄마는 너무 많이 감동을 표했기 때문이었다. 이정도로 좋아하실 거라고는 상상치도 못했다.
울먹거리며 스카프를 바로 꺼내 목에 둘러보던 경수의 엄마는 문뜩 오늘 아들이 데이트 다녀왔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
생각보다 며늘아가 될 애는 괜찮은 애 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애라면
" 아버지도 좋아하실거야, 잘해봐 "
다른 집 아들들은 죄다 연애하고 여자 잘못만나서 난리도 아닌데 생각보다 우리 아들은 좋은 애를 만난 것 같다.
*
연락할게요 라는 약속을 지키듯 도경수 씨에게서 톡이 왔다.
역시 내 안목이란
ㅎ...? 다음에도 또...?
카페 노예 보쌈 하고싶은 도경수 X 도씨집안 예비 며늘 아가 카페노예
*
사담
하이 여러분 리히터예요!
.. 오늘 여러분들이 제 이런 인사를 달가워 하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습니다.. 네.. 많이 늦었죠..
사실 변명이라고 보일 수도 있지만 원래 이번 9화는 빠르면 금요일 저녁, 늦어도 오늘인 토요일 낮시간에 올리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요즘 격주로 토요일마다 위장염으로 병원을 다니고 있는데요. 오늘은 계획에 없던 정밀검사도 하고 수액도 맞으면서 병원에 있는 시간이 너무 길어져서 저녁에 부랴부랴 집에 도착해 마무리 짓고 올리게 됐습니다.
최대한 빨리 돌아오고싶었는데 독자님들을 기다리게 해서 정말 사과의 말씀 드립니다.
강남 사는 도부자에게 많은 관심 부탁드리구 댓글 달아주시는 독자님들, 추천해주시는 독자님들, 응원 해주시는 독자님들 무튼 강남 사는 도부자 봐주시는 분들 모두 고맙고 사랑합니다! 앞으로 더 노력하는 리히터의 모습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맞다 여러분들 요즘 많이 추운데 감기랑 빙판길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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