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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븐틴/최한솔] Dear V | 인스티즈

 
 

 

 

 

 

 

Dear V, 

 

영원히 잊지 못할 너에게 

 

 

 

* * * 

 

 

 

 

그와의 첫만남은 결코 평범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나 대신 사고를 당했고, 나 대신 침대에 누워 있었으며, 나 대신 피를 흘렸다. 어찌됐건 모든 게 나 대신이었고 내 탓이었다. 그래서, 그와 함께 있는 다소 짧은 기간 동안, 더욱더 집착하고 그를 챙겼는지도 모른다. 사실 나도 당시의 내 마음을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렇다. 

 

2월이었고, 겨울이었다. 나는 술집에서 일했다. 십대를 벗어난 지 아직 두 달밖에 되지 않았는데, 내 일자리는 그곳이었다. 가난했던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짙게 화장하고 깊게 파인 옷을 입은 나는 누가 봐도 싸 보였다. 반면에 그는, 누가 봐도 깨끗하고 고귀해 보이는 그런 사람이었다. 퇴근하던 나는 못된 사람에게 걸려들었다. 한손에 칼을 들고, 살이 베이든 말든 신경쓰지 않고 내 옷을 갈기갈기 찢어발기던 그 남자는 흉악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밤늦은 시간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술집 여자를 어떻게 괴롭힐 생각인지 궁리하는 것 같았다.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그 남자의 손에 들린 칼이 두려워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온몸을 엄습해 오는, 생전 처음 경험해 보는 두려움을 감당하지 못했던 건지 나는 실제로 무슨 짓을 당하기도 전에 기절했다. 

 

 

 

 

눈을 뜨니 낯선 곳이었다. 화학 약품 냄새가 코를 찔렀다. 생활비가 모자라 입원은커녕 감기약 처방 한 번 받아본적 없는 나지만 이곳이 병원이라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나 왜 여기 있지. 어제 그렇게 기절하고 어떻게 됐더라. 안 죽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시선을 아래로 옮겼다. 자비 없이 찢어진 옷 대신 깨끗한 병원복이 입혀져 있었다.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고 있자니 간호사가 상냥하게 말을 걸어왔다. 일어나셨어요? 큰일 날 뻔하셨어요, 지나가던 분이 구해주신 거 알고 계세요? 

 

네? 되묻는 내게 간호사는 어두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00씨는 무사하신데, 구해주신 그분이 좀... 다치셨어요. 병원에서 수술할 수가 없어서 무슨 연구원 비슷한 데로 옮겨졌나 봐요.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그 말을 들었을 때 그가 걱정되기는 했다. 하지만 고맙다는 생각은 의외로 들지 않았다. 심성이 못돼먹은 걸까. 살아봤자 별것도 없는 엿같은 인생 그냥 죽게 냅두지 뭐하러. 그런 생각을 겨우 억누르고 나는 또다시 질문을 던졌다. 수술할 수가 없다니 무슨 소리죠? 그러자 간호사는 대답하기 곤란하다는 듯 한참을 입술을 앙다문 채 고민하다가 짧게 말했다. 

 

 

 

사람이라고 하기 애매하거든요. 어떤 사람이 와서는 자길 과학자라고 소개하면서 데려갔어요. 저도 간단하게만 설명 전해들은 거라 잘 모르겠는데, 몸 절반이 인공적으로 만들어졌대요. 반쯤 인조인간인 셈이죠. 믿기진 않지만 괜히 과학자들이 와서 연구소로 데리고 가겠어요? 놀랐죠? 저도 처음엔 진짜 놀랐어요. 

 

믿기지 않는다고? 아니, 처음엔 그냥 헛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곧바로 날 구해줬다던 고마운 사람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퇴원해도 된다는 간호사의 말에 급하게 짐을 챙겨 로비로 향했다. 그 와중에도 병원비를 걱정하며 통장에 남은 돈을 가늠하고 있는 내가 싫었다. 하지만 별수 있나. 나는 정산을 위해 벌벌 떨리는 손으로 카드를 내밀었고, 돌아오는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정산되셨는데요. 그냥 가시면 됩니다. 

 

그렇게 나는 퇴원했다. 그와는, 다신 엮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 

 

 

 

며칠 뒤 내게 알 수 없는 번호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나는 그전과 똑같은 생활 패턴을 반복하며 여전히 술집에서 일했다. 밤늦게 퇴근해서 오후에 출근했다. 전화가 걸려온 건 오전 열한 시였다. 나는 잠이 덜 깨 비몽사몽한 채로 바닥을 더듬어 휴대폰을 찾았다. 잔뜩 졸린 목소리로 여보세요,라고 간신히 첫 음절을 내뱉는 내게 알 수 없는 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그랬다. 자길 좀 도와줬으면 좋겠다. 사례는 톡톡히 하겠다. 

 

 

 

"...예?" 

- "쉬운 일이야. 나한텐 진짜 중요해. 금방이면 되니까... 응?"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때 날 구해줬다던 그 사람이구나. 나는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 처음 나누는 대화부터 그는 마치 오래 알고 지내기라도 한 것처럼 반말을 했다. 하지만 결코 기분 나쁘다고는 칭할 수 없는 말투였다. 말만 짧을 뿐 하도 예의가 발라서 따지고 들 수도 없는, 그런.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였다. 달달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듣기 좋은 목소리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휴대폰을 든 채 하품을 하던 나는 마지못해 물었다. 

 

 

 

"...무슨 일인데요. 얘기는 해줘야 될 거 아니에요." 

- "문자로 보낸 주소로 와줘. 운전면허 있어?" 

"뭐... 장롱이지만." 

- "잘됐다. 나만 픽업해 주면 돼. 어디로 가든 상관없어. 아무데나 떨궈만 주면 그 다음부턴 내가 알아서 할게." 

"그게 끝?" 

- "응. 어쩌면 좀 다쳐 있을지도 몰라. 떨어질 거거든. 4층." 

"네?!" 

- "걱정 안 해도 돼, 다쳐도 안 아파. 2시까지 와줬으면 좋겠다. 부탁할게." 

 

 

 

전화가 끊어졌다. 희미하게 몸 절반이 인공으로 되어 있다는 간호사의 말이 스쳐 지나갔다. 시간을 확인하기가 무섭게 띠링 문자 알림음이 울렸다. 여기서 대충 두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 여기까지 간다면 제시간에 맞춰 출근하지 못할 게 분명했지만 왠지 모르게 이 부탁만은 들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까짓거 마담한테 몇 대 맞으면 되겠지. 얼굴이 생명인데 설마 싸대기를 날리진 않을 테고. 그나저나 면허만 있고 차는 없는데 어떡하지. 빌려야 되나. 하나 언니가 꼭 필요할 때 말하라고 하긴 했는데. 그래, 빌리지 뭐. 

 

처음으로 내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람을 만났다. 내 번호는 어떻게 알았는지, 왜 하필 나한테 중요하다는 일을 부탁하는지, 의문점은 많았지만 묻지 않았다. 어쨌든 이 사람은 내가 도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니까. 같은 술집에서 일했던 스물여섯 살 하나 언니는 지금은 번듯한 직장을 찾아 들어갔다. 아직도 종종 연락하긴 하지만 얼굴을 본 지는 한 달이 훌쩍 넘었다. 직장이 집에서 가깝다면서 차를 쓸 일이 없다고, 필요하면 차키를 빌려준다고 했었다. 

 

 

 

[지금 출발해요] 

 

 

 

간단한 문자 하나만 남기고 시동을 걸었다. 운전은 내 로망이었다. 누군가 버리고 간 운전 문제집으로 밤새 공부해서 만 18세가 되자마자 면허를 땄다. 꿈꿔왔던 것과는 달리 돈이 부족해 차를 장만하지 못하는 바람에 면허를 따고도 운전은 하지 못했지만. 네비게이션의 건조한 음성이 지시하는 대로 나는 어설프게 핸들을 꺾었다. 

 

 

 

* 

 

 

 

그는 미리 말했던 대로 다쳐 있었다. 온몸이 긁히고 찢어졌다. 흰 셔츠에 붉은 피가 푹 젖을 정도로 배어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얼마 안 가 운전석에 앉아있던 나와 자리를 바꿔 앉았다. 내 운전이 능숙하지 못하다는 게 그 이유였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고, 그 전에 내가 아무리 말려봤자 그는 막무가내였다. 

 

 

 

"괜히 장롱이 아니네. 올 땐 어떻게 온 거야, 대체?" 

"..." 

"어디로 갈까?" 

"저기, 왜 떨어졌어요? 문 놔두고?" 

"...아." 

 

 

 

말하기 싫으면 안 말해도 돼요. 대수롭지 않게 말한 내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 순간부터 눈이 내리고 있었다. 처음엔 조금씩 내리다가 이젠 아예 함박눈이 되어 내리는 눈을 쳐다봤다. 어느새 바닥에 소복이 쌓였다. 오랜만에 보는 흰 진경에 내가 작게 감탄사를 내뱉자 운전대를 잡고 있던 그가 날 힐끗 바라봤다. 창밖 풍경을 감상하느라 정신없는 와중에도 그 시선만큼은 느낄 수 있었다. 

 

 

 

"도망 나왔어. 거기 있으면 답답하거든." 

"..." 

"몸 절반이 인공적으로 만들어졌어. 고통도 못 느끼고. 과학자들이랑 박사들이 이렇게 만들어놓은 거야. 내 몸." 

"..." 

"연구대상으로 제격이잖아. 어릴 때부터 그 연구소에 갇혀서 지냈어. 그때도 탈출한 거였거든. 너 구하려다 칼빵 맞고 과다출혈로 기절해버리는 바람에 금방 잡히긴 했지만." 

"..." 

"아, 그래도 그 새끼는 체포했다. 다행이지. 내가 경찰 불렀어." 

"...네, 뭐." 

"그래서 어디로 가? 집 주소 찍으라니까." 

"그쪽은? 갈 데 있어요?" 

"응. 갇히기 전에 살던 집 있어. 그러니까 네 상황이나 먼저 챙겨." 

"같이 가요, 그럼." 

"뭐?" 

 

 

 

그는 어이없다는 듯 짧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같이 가자고? 되묻는 그에게 나는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안 돼요? 안 되는 건 아닌데, 날 뭘 믿고? 되돌아오는 질문에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당신은? 뭘 믿고 나한테 도와달라고 했는데? 대화 한 번 나눠본 적 없는 날, 뭘 믿고? 

 

 

 

"도와줬잖아요. 이제 나도 좀 도와줘요." 

"..." 

"술집 나가기 싫어서 그래요. 일자리 찾을 때까지만." 

 

 

 

그는 말없이 운전을 계속했다. 상대측에서 무슨 행동을 취하든 난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망할 놈의 술집에 나가지 않고 의식주만 해결할 수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핸드백을 뒤져 지갑을 꺼냈다. 그 속에 있는 현금을 모조리 꺼내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그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웃음을 파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억지미소가 저절로 지어졌다. 돈이라면 드릴 테니까, 부탁해요. 빨간불에 멈췄던 차가 다시 출발했다. 돌아오는 대답은 짧은 한숨이었다. 네비게이션에 낯선 주소가 찍혔다. 내가 사는 도시를 지나쳐가는 와중에도 눈이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 

 

 

 

"근데 그거 알아요?" 

"응?" 

"이거 내 차 아닌데." 

"뭐?!" 

"빌렸거든요." 

 

 

 

고속도로에서 막 속력을 내려던 참이었다. 그는 급하게 핸들을 돌려 갓길에 차를 댔다. 그와 달리 나는 태연했다. 차 돌리지도 못하는데 뭐 어떡하라고? 딱히 할 말이 없어서 핸드폰만 만지작거렸다. 까맣게 잊고 있던 사실이었다. 이게 빌린 차라는 거. 하지만 몹쓸 두뇌는 정상적인 사고를 하지 않았다. 까짓거 좀 나중에 돌려주면 되는 거 아닌가, 입을 삐죽이고 있는 사이 그가 네비게이션에 입력 창을 띄웠다. 

 

 

 

"주소 찍어. 범죄자 되기 싫으면." 

"친한 언니한테 빌린 거라 괜찮아요, 나중에..." 

"..." 

"...아, 찍으면 되잖아요." 

 

 

 

정의의 귀신이라도 붙었나. 전에도 그러더니. 예,불의를 보면 절대 그냥 못 지나치시는 성격 아주 좋게 봤습니다. 백 점 만점에  팔십 점 드릴게요. 들릴 듯 말듯한 한숨을 내뱉으며 입력창에 하나 언니 회사 주소를 입력했다. 차가 미끄러지듯 다시 출발했다. 

 

 

 

* 

 

 

 

잠깐 졸았다. 차키를 돌려주고 나서부터는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환승의 연속이었다. 얼마나 달렸는지 이미 밖이 어둑어둑했다. 검은 하늘색과 대비되는 흰색 눈이 아직도 펑펑 내렸다. 진짜 많이 오네. 올해 최대 강설량 찍겠다. 중얼거리다가 문득 옆을 쳐다봤다. 많이 피곤했는지 역시나 그도 눈을 감고 있었다. 하긴 나보다도 훨씬 피곤할 터였다. 아침부터 그 높은 데서 뛰어내리고, 운전하고, 차표 예매하고, 대기하고. 생각해보니 둘다 온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다. 인조인간이라 배고픔도 못 느끼는 건가, 오는 내내 배고프다는 소릴 한 번도 안 했던 것 같은데. 

 

와중에 진짜 잘생겼다. 눈을 감은 얼굴도 조각상 같았다. 한참이나 넋 놓고 감상했다. 짙게 쌍꺼풀진 눈, 커튼처럼 드리워져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긴 속눈썹, 연한 갈색 머리카락, 오똑한 코, 얇은 입술, 또... 저것도 다 인공인가. 레오나르도를 쏙 빼닮은게 인공적으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외모긴 한데. 자면서도 시선이 느껴졌던 건지 그가 실눈을 떴다. 깼나? 깼나 봐. 연갈색 눈동자랑 마주하자마자 머릿속이 새햐얘졌다. 

 

 

 

"왜... 할 말 있어?" 

"...아뇨.' 

"그럼 너도 자. 도착하려면 한참 남았어." 

 

 

 

그가 가볍게 내 이마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자동적으로 의자 등받이에 기대게 된 내가 그새를 못참고 또 고개를 돌렸다. 그는 잠이 완전히 깬 건지 어느새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었다. 조금은 긴 머리카락이 눈을 살짝 덮었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걷어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날 빤히 쳐다보는 시선을 끝까지 마주하지 못하고 먼저 고개를 돌려버렸다. 얼굴은 인공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인공 눈동자에 내가 이렇게까지 휘둘릴 리가 없다. 뭔가, 그 연한 눈동자를 보면, 힘든 일이든 좋은 일이든 싹 잊게 된다고 해야 하나. 그 순간만큼은 그에게 집중하게 만들었다. 

 

 

 

"연구소에서 뭐 했어요?" 

"왜? 궁금해?" 

"네. 대답하기 곤란한가?" 

"아니. 생체실험 당했어." 

".....네?" 

"괜찮아, 아프진 않았어. 기분은 좀 엿같았지만." 

 

 

 

내가 잘못 들은 건가. 두 귀를 의심했다. 생체실험? 공포영화 소재로 종종 다뤄지곤 하던 엽기 과학자의 인간 생체실험 같은 거? 그런 걸 당했다고? 그 연구소에서? 이거 신고해야 하는 거 아냐? 혼란스러운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는 내게 그가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술집에서 일하기 힘들었겠다. 표정관리를 못하네." 

"그, 생체실험이라는 건 정확히 무슨..." 

"뭐, 약물 투하라던가. 전기충격이라던가. 제품 안전성 검사하는 거야, 그냥." 

"완전 고문 아니에요?! 그거 경찰에 신고하면...!" 

"신고해봤자 소용 없을걸. 어차피 호적상으론 죽은 사람이라." 

"...뭐라구요?" 

"여섯 살 때 유괴를 당했어. 죽을 뻔했지. 장기가 엄청 손상됐거든. 뼈도 거의 아작났고. 유괴범은 튀고 난 병원으로 급하게 옮겨졌는데, 생명줄만 겨우 붙잡고 있는 상태였대." 

"..." 

"근데 여기 과학자들이 데려다가 인공 장기들로 수술해줬어. 장기도 인공, 뼈도 인공, 피부도 인공. 그래서 아픈 것도 모르는 거야. 싹 갈아치웠으니까. 얼굴 빼곤 몸 전체가 인조인간이라고 해도 틀린 말 아니야. 듣기는 싫지만." 

 

 

 

그런 끔찍한 얘기를 꺼내는 것치고는 목소리가 너무 담담해서, 어떻게 반응해야 될지 모르겠다.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우리 둘 사이에 오가는 대화만 끊겼을 뿐인데 버스 안의 분위기가 뜬금없이 숙연해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조용해진 날 보면서 피식 웃었다. 그러게 이런 어두침침한 얘기 듣지 말고 잠이나 자라니까. 나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이런 상황에서 맘 편하게 잘 수 있을 리가 없다. 

 

 

 

"...저기." 

"응." 

"이름이 뭐예요?" 

"성은 최. 이름은 모르겠어. 하도 어렸을 때 불려서 기억 안 나." 

"과학자들은 뭐라고 불렀는데요?" 

"V." 

"...무슨 로봇 이름 같다." 

"풀네임은 더 로봇 같을걸. SVT_218. 거기 있는 실험동물들이 다 그렇게 불렸어. 쥐는 MIC_001, 개는 PUP_012, 또..." 

"아, 그만 말해요. 욕할 뻔했어. 동물이랑 사람을 같은 취급 했다고?" 

"그 사람들한테는 내가 사람이 아니었나 보지. 어릴 때부터 길러 온 인간 모형 정도." 

"그런 새끼들 다 감방 넣어야 되는데. 요즘 시대에 인간 생체실험이 말이 되냐고요." 

"다시 말하지만 난 거기서 인간 취급을 못 받았으니까." 

"남 일처럼 말하네요." 

"그러게. 막상 나오고 나니까 남 일 같네." 

 

 

 

버스가 계속 달렸다. 그 이후로는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 그는 다시 이어폰을 꽂았고, 나는 밀려오는 배고픔에 어떻게든 잠을 청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억지로 눈을 감았다. 깨어서 배고프기보단 차라리 자면서 안 배고픈 게 나았다.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출발한 버스가 목적지에 도착한 건 그 이후로 두 시간쯤 뒤였다. 펑펑 내리는 함박눈을 보며 잠들어서, 더 이상 눈이 내리지 않는 어두운 밖을 보며 잠에서 깼다. 눈을 떴을 때 내 머리가 그의 어깨에 닿아 있어서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다 왔어. 딱 맞춰서 깼네." 

"...아, 그, 죄송해요. 무거웠죠...?" 

"별로.불편해 보여서 내가 기대게 했는데. 너 자면서 창문에 머리를 몇 번 박았는지 알아?" 

 

 

 

짐을 챙기며 무심하게 말하는 목소리에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단순히 민망해서 그런지, 아니면 다른 감정인지, 나는 내 감정에 둔한 편이라 전혀 깨닫지 못했다. 앞서 버스에서 내리는 그를 다급하게 쫓아가자 기다려줄 테니까 뛰지 말라는 핀잔이 돌아왔다. 내가 다리가 짧은 걸 어쩌라고요. 아니, 그쪽이 다리가 긴 건가? 그것도 아니면 둘 다일지도. V는 지칠 대로 지친 날 한 번만 더 갈아타면 된다고 달랬다. 얼마나 멀리 온 거지. 한참이나 달렸으니까 확실히 수도권은 벗어났을 거다. 

 

한겨울의 칼바람이 몸을 때렸다. 그나마 출근할 때 입는 파인 드레스 대신 기모 후드티에 청바지까지 갖춰입고 온 게 다행이었다. 너무 오래 입어 보풀이 잔뜩 일어나긴 했지만 나름 따뜻했다. V는 핏자국이 선명한 흰 셔츠에 베이지색 코트 차림이었다. 안 춥냐고 물어봤지만 그는 인조인간이 추울 게 뭐가 있겠냐며 너스레를 떨었다. 하긴 4층에서 떨어져도 통증 하나 못 느끼는 사람인데 추위 따위를 탈 리가. 납득하고도 남았다. 

 

 

마을버스로 갈아타 세 정거장 뒤에 내린 후 5분쯤 걷자 작은 2층집이 나타났다. 여기서 살았어요? 라고 묻자 그렇다고 답했다. 1층은 부모님이, 2층은 자신이 썼다고 한다. 많이 와보지 않았던 건지 서투른 손놀림으로 그가 오래된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삐리릭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손잡이를 당기자 녹슨 문이 소름 끼치게 삐거덕거리는 소리를 내며 울었다. 열쇠가 아니라서 망정이지, 만약 열쇠로 여는 문이었다면 다 녹슬어서 열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먼지 장난 아니다. 오랫동안 안 왔나 봐요?" 

"갇힌 이후로 처음 와 봐... 변한 것도 없네. TV는 안 나오려나." 

"엥? 그때는 어디 머물렀는데요?" 

"그때?" 

"나 구해줬을 때." 

"아. 근처 모텔에서 지냈어. 그땐 계획도 뭣도 없이 무작정 나온 거였거든." 

"타이밍도 좋네. 기절한 술집여자 구해주려다 칼 맞고 병원신세라니. 후회 안 해요?" 

"후회를 왜 해. 여하튼 널 만나서 탈출도 수월했고. 여러모로 신세 졌지..." 

 

 

 

대답하는 목소리가 점점 흐려졌다. 거실 한가운데 서서 집을 둘러보던 나는 소파에 앉은 그를 돌아봤다. 많이 피곤했는지 어느새 눈을 감고 있다. 새근새근 규칙적으로 새어나오는 숨소리에 잠들었음을 확인하고 나는 조심스럽게 소파로 다가갔다. 인조인간도 졸음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입고 있던 패딩을 벗어 그의 몸에 덮었다. 무음으로 돼 있던 휴대폰을 확인하니 마담에게서 걸려온 어마어마한 메세지와 부재중 전화, 그리고 몇 개의 음성메세지가 있었다. 생각해보니까 술집에 얘기를 안 했네.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는 화면을 바라보다 통화버튼을 눌렀다. 

 

 

 

- "너 미쳤어? 어디야?!" 

 

 

 

신호 한 번이 가기가 무섭게 빽 소리를 질러대는 마담의 목소리에 잠들어 있는 V의 눈치를 보며 급하게 통화볼륨을 줄였다. 너 찾는 손님이 얼마나 많은데 연락도 없이 땡땡이를 까? 당장 안 튀어와?! 어디야!! 감당하기 힘든 빽빽거림에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대폰에 대고 오늘부터 출근 안 하니까 그렇게 알라고 통보를 하고는 마담의 말이 더 이어지기 전에 전화를 끊어 버렸다. 아무리 무음으로 설정해뒀다지만 끊은 이후로도 계속 반짝이며 전화가 오고 있음을 알리고 있는 휴대폰을 아예 꺼 버리고는 1인용 소파에 몸을 구겨 넣어 잠을 청했다. 졸음이, 아까 내리던 눈처럼 쏟아졌다. 

 

 

 

 

 

 

내리쬐는 햇볕에 눈을 떴다. 아, 어젯밤에 커텐 치고 자는 걸 깜빡했다. 하도 눈부셔서 벌떡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커튼을 치자 환하던 거실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V는 아직 소파에 누워 있었다. 모로 누운 뒷모습만 보이고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먹을 것도 없는데 배는 고프다. 아무것도 안 먹은 지 거의 24시간이 되어간다. 냉장고는 예상대로 텅 비어 있었다. 하긴 음식이 있다고 쳐도 십여 년 전일 테니 식중독 걸리려고 작정한 게 아니라면 먹을 수도 없었다. 

 

깨우고 싶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이 V를 깨웠다. 몇 번 불러도 일어나지 않길래 몇 번 흔들자 작게 앓는소리를 냈다. 이내 부스스 몸을 일으킨다. 눈이 마주친다. 얼굴이 빨갰다. 뭔가 이상하다. 나는 곧바로 그의 얼굴에 손을 가져다댔다. 온몸에 불을 지른 듯, 데일 것같이 뜨거운 볼에서 곧바로 손을 뗐다.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날 쳐다보는 그에게 난 훨씬 더 놀란 말투로 말했다. 

 

 

 

"뭐야, 열 나요?!" 

"...열?" 

"왜 이렇게 뜨거워요? 감긴가?" 

"그래...?" 

 

 

 

손으로 제 이마를 짚은 V는 특유의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인정했다. 그러네, 열 나네. 감긴가 보다. 태평한 소리에 슬며시 화가 치밀었다. 아픈 건 자긴데 왜 내가 더 걱정해. 왜 내가 더 난리를 치냐고. 그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당장 병원 가요. 어제 이곳으로 오던 길에 '북천병원'이라는 이름의 버스정류장을 지나친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같은 버스를 타고 그곳에서 내려서 감기약이라도 처방받아 오면 될 거다. 그렇게 생각했건만, 그는 내 호들갑을 별거 아니라는 듯 무시하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배고프지. 시내 나가서 장이라도 봐 오자." 

"장난해요? 몸이 펄펄 끓는데 그 상태로 시내를 나가겠다고? 병원이나 먼저 갈 생각을 하지 그래요?" 

"됐어, 이게 뭐라고..." 

"당장 안 일어나면 들쳐업고 갈 거예요." 

"병원 못 가, 나." 

"왜요?!" 

"그냥, 별로 안 좋아해. 약국에서 감기약이나 사다 먹지 뭐." 

"참나, 장 보면서 태평하게 오이나 고르다가 픽 쓰러져 봐야 정신 차리죠?" 

"오이 안 좋아하는데. 김밥 먹을 때도 빼고 먹어." 

"잘났어 진짜. 집에서 쉬어요, 장은 내가 봐올게." 

"같이 가도 되는데..." 

"병원 갈래요, 집에서 쉴래요?" 

"...집에 있을게.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하고." 

 

 

 

집을 나왔다. 가급적 빨리 장을 보고 약이나 사서 한 시간 내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이곳 지리는 생각보다 단순했기에, 집 바로 앞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몇 정거장만 가면 바로 시내가 등장했다. 걸어서라도 갈 수 있을 듯 단순한 길이었다. 그래도 시내라고 제법 큰 대형 마트가 있다. 카트를 밀면서 식재료가 될만한 걸 대충 골라 담고 계산대로 향했다. 음식보다 급한 건 감기약과 해열제였다. 

 

 

 

 

 

 

"나 왔어요. 콩나물국밥 사 왔는데 괜찮죠? 원래 감기 걸렸을 때는 뜨끈한 국물이 들어가야... V, 자요?" 

 

 

 

식탁에 짐을 내려놓으며 조잘대다가, 원래대로라면 웃으며 대답해야 할 목소리가 들리지 않기에 시선을 소파로 옮겼다. 아까처럼 등을 보이며 누워있는 그를 몇 번 부른다. 미동도 없다. 의외로 잠이 많은 스타일이구나. 밥 먹어야죠, 일어나요, 하고 부르면서 그를 일으켰다. 그리고 그 얼굴을 마주하기가 무섭게 나는 나도 모르게 헉 하고 숨을 들이켜야 했다. 

 

불덩이처럼 뜨겁던 몸이, 이제는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어 있었다. 

 

 

 

"괜찮아요? 왜 그래요?!" 

"..." 

"내가 얼마나 늦게 왔다고 이래요. 아, 눈 좀 떠 보라니까?!" 

 

 

 

죽지 않았다. 그거 하나만은 확실했다. 불안정한 호흡이 분명히 들렸으니까. 하지만 소리를 질러도, 제발 일어나 보라고 애원을 해도, 마구 흔들어도 그는 작은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단순한 감기가 아니었던 것 같다. 지독한 독감이거나, 어쩌면 다른 병일지도. 꺼 뒀던 휴대폰을 켜 119를 불렀다. 휴대폰이 켜지는 30초가 그렇게 느릴 수가 없었다. 구급대원이 주소를 말해 달라고 했다. 주소? 여기가 어딘데? 정확한 주소를 알 리가 없다. 기억을 더듬었다. 이 근처 정류장 이름이 뭐더라. 

 

이번 정거장은 한솔마을입니다. 다음 정거장은.... 

 

한솔마을. 마을버스가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마을버스 1번 타고 한솔마을 정류장에서 내리면 바로 보이는 2층집이에요, 최대한 빨리 와 주세요. 다급한 목소리로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눈 좀 떠봐요, 그쪽이 병원 안 가도 된다고 했잖아요. 감기약만 먹으면 된다면서요. 끊임없이 깨웠지만 여전했다. 불안전한 호흡. 살아있다는 유일한 증거. 그것만 빼면 V는 거의 시체나 다름없었다. 

구급차는 10분만에 그를 태우러 왔다. 

 

 

 

 

 

 

"환자분 이름이 뭐죠?" 

"...네?" 

"이름이요-" 

 

 

 

V가 진료실에 들어가고, 나는 간호사에게 환자 이름이 뭐냐는 질문을 받았다. 이름이 뭐냐고? V? 아니, 그건 실험 대상한테 매기는 번호 비슷한 거잖아. 그렇게 말한다고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간호사가 안경 너머로 날 쳐다보며 재차 물었다. 환자분 이름이 뭐냐니까요? V가 날 구해줬던 날, 친절하게 웃어 보이던 간호사와는 사뭇 다른 말투에 나는 슬며시 위축되었다. 하지만 난 그의 입장을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 저는 목격자라서, 잘 모르겠는데요."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딱 거기까지였다. 

 

 

 

 

 

 

이름이 뭐니. 모르겠어요. 기억이 안 나요. 성이 최라는 것만 알아요. 초조하게 그의 검사가 끝나기를 기다리면서 생각했다. 이름이 뭐예요, 대체. 문득 머릿속에 이 마을의 이름이 스쳐지나갔다. 한솔마을. 실례라는 거 알지만, 이렇게 단순하게 생각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내가 최한솔이라고 불러도 괜찮아요? V 말고, 당신을 부를 수 있는 다른 이름이 필요해요. 고개를 푹 숙인다.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정이 들어버린 건지 눈물이 뚝뚝 떨어져 청바지를 적셨다. 어쩌면 단순 빈혈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눈앞에서 사람이 쓰러진 걸 20년 인생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내게는 진료실 안의 상황이 미칠 듯한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보호자 분?" 

"...! 네!" 

"약물 부작용입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약을 주사했어요. 죽을 지경은 아니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시간 문제죠. 곧 깨어날 겁니다. 혹시 모르니 당분간 입원해 있으면서 지켜보죠. 빠르면 이틀 안에 퇴원하실 수 있을 겁니다." 

 

 

 

다리에 힘이 스르르 풀렸다. 이런저런 감정들이 뒤섞였다. 약물 부작용이라면, 연구실에서 생체실험 대상인 V에게 온갖 약물을 주사한 지독한 결과물이 분명했다. 그 싸이코 과학자 새끼들에 대한 분노와, V에 대한 걱정 등등. 그는 몇 시간 뒤에 깨어났다. 간이 침대 옆에서 지키고 있던 나는 그가 깨어나자마자 와락 끌어안았다. 엉엉 울면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냐고 소리 소리를 질러댔다. 당황한 듯 잠시 돌처럼 굳어 있다가도 내 등을 살살 쓸어주던 그는, 이곳이 병원이라는 걸 자각하자마자 당장 일어섰다. 

 

 

 

"어디 가요? 당분간 입원해야 된다고 했단 말이에요!" 

"집에 가자. 여기 있으면 위험해." 

"여기가 제일 안전해요! 또 부작용 일어날지 누가 알아요?!" 

"제발. 집에 가자, 응?" 

 

 

 

그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병원을 싫어했다. 아니,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막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링거를 뽑고 환자복 차림으로 뛰쳐나갈 기세였다. 나는 온 힘을 다해 그를 막았다. 그렇게 실랑이한지 십 분쯤 지났을까,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아주 예의 바른 노크였다. 

 

그가 왜 그렇게 병원을 싫어했는지, 그 순간 깨달았다. 

좆같게도, 노크 후에 문을 열고 들어온 오십 대 중후반쯤의 남자는 명함을 내밀며 저를 과학자라고 소개했다. 

 

 

 

 

 

 

잠깐 할 말이 있는데 5분만 둘만 있게 해 주시겠어요? 분노를 참아 가며, 어금니를 꽉 깨물며, 간신히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 과학자는 별거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인자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저 표정도 다 가식이겠지. 손바닥에 깊게 손톱 자국이 났다. 주먹을 너무 꽉 쥔 탓이다. 

잠깐의 시간 동안 V와 나눈 대화는 이랬다. 그의 인공 뼈 속에 심어진 칩이, 병원 근처에 가면 연구소로 신호를 보낸다. 대한민국에 있는 병원이라면 어떤 곳이든. 감시용이 아닌 의학용으로 심어진 칩이었지만 오히려 그 칩은 악용되었다. 그래서 먼젓번 날 구해준 때도 병원까지 과학자와 연구원들이 찾아와 V를 데려갔던 것이었다. 그가 병원을 죽도록 싫어한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진작 말하지 그랬어요!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울면서 나는 애써 목소리를 죽였다.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과학자가 들을까봐 소리도 제대로 치지 못했다. 그 와중에도 V는날 걱정했다. 칩에 관한 내용은 연구소에서도 철저히 숨기고 있는 내용이라서, 내가 그 칩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된다면 연구소 측에서 내게 무슨 조치를 취할지 모른다고. 그러니까 앞으로도 이 얘기는 말하고 다니면 안 된다고, 그는 몇 번이고 당부했다. 

 

 

 

"가면 또 생체실험 당해요? 다시 못 나와요...?" 

"아무래도 보안이 심해지겠지." 

"오늘 약물 부작용 일어난 거 다 생체실험 때문이잖아요. 계속하면 죽을지도 모른다고요." 

"안 아파. 괜찮아." 

"아픈 게 문제예요?!" 

"..." 

 

 

 

V는 가만히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손길이 너무 다정해서 더 울었다. 어린애처럼. 스무 살이나 먹은 주제에 일곱 살 때로 돌아간 것처럼, 하지만 밖에 있는 그 괴짜 과학자 때문에 목놓아 울지는 못하고 끅끅거리면서. 솔직히 내가 다른 사람 때문에 이 지경으로 울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심지어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인데. 그는 그만큼 나한테 특별한 인연이었다. 내가 필요하다고 했던 최초의 사람.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 그래서 속상했고, 그래서 울고 있다. 

 

 

 

"뭐, 하루 동안이지만, 도와줘서 고마웠어. 같이 있던 것도 재밌었고." 

 

내가 더 고마웠어요. 진짜로. 

 

"어디 가서 너 같은 애 다시 못 만날 거야." 

 

그게 누가 할 소린데. 

 

"일자리 찾을 때까지 같이 있어준다는 건 못 지켜서 미안하고." 

"..." 

"가급적이면 술집은 다시 가지 마. 또 이상한 새끼 꼬일라." 

"..." 

"...나중에 다시 보자. 기회 되면." 

 

 

 

읏차, 소리를 내며 그가 침대에서 가볍게 뛰어내렸다. 이대로 있다가는 밤 새갰다며 농담을 던지더니 문 쪽으로 걸어갔다. 저 문을 열고, 그 괴짜 과학자를 따라가게 되면, 겨우 허물어진 벽이 또 생길 거다. 생체실험 당하는 인조인간, 가난한 스무 살 백수. 전혀 접점이 없는 둘이 만날 일이 또 어디 있을까. 기회 되면 다시 보자는 그 인사를 마지막으로 그는 병실 문을 열었고, 창이 까맣게 튜닝되어 안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검은 차를 타고 멀어져갔다. 

 

 

 

 

 

 

*** 

 

 

 

 

 

 

"00야, 손님!" 

"네...!" 

"7번 테이블 서빙 나가야 돼!" 

"네, 잠시만요! 주문하시겠어요?" 

 

 

 

12월이다. 그중에서도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가게에 유난히 예약이 빗발치는 날. 그날 이후로 약 10개월 정도가 지났다. 의외로 평범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나는 어느 레스토랑에 일자리를 얻었고, 술집과 맞먹을 만큼 페이도 셌다. 물론 힘들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술집에서 일할 때와는 달리 나름대로 보람차기도 했다. 생활비가 빠듯한 건 여전했지만 그렇다고 전처럼 죽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처음 며칠은 V가 보고 싶기도 했다.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하루 종일 생각했다. 그래도 역시 시간이 답이었다. 꿈을 꾼 것 같았다. V라는 인조인간이 등장하는, 처음은 당황스러웠고 중간은 행복했고 끝은 슬펐던, 평생 기억에 남을 꿈. 절대로 잊지 못할 꿈. 

청소하느라 뻐근해진 어깨를 주무르며 도시락을 들고 쭈그려 앉았다. 30분간 주어진 점심시간이다. 이때마다 휴대폰에 메인으로 뜨는 뉴스를 읽곤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나는 화면을 빼곡하게 채운 기사들을 주르륵 넘기며 눈에 띄는 제목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한 문구가 내 이목을 집중시켰다. 

 

S연구소 소장 A씨, 인간 생체실험 혐의로 검거... 대국민 사과 요청 빗발쳐 

 

S연구소. 생체실험. 검거. 대국민 사과. 단어가 머릿속에서 하나씩 조합됐다. S연구소라면, V가 있었던, 내가 4층에서 뛰어내린 그의 탈출을 도와주려 하나 언니의 차를 끌고 찾아갔던 그곳. 눈을 몇 번씩 비비고 다시 읽어봐도 크게 박힌 헤드라인 문구는 변하지 않았다. 기사에 박혀 있던 사진은 모자이크 처리되었지만 분명히 그였다. 인자한 미소를 짓고 되도 않는 가식을 떨어대던 괴짜. 

 

 

 

심장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결국 잡혔구나. 그럼 V는? 아니, 최한솔은? 살아 있어? 

휴대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다. 지금 기사 읽기도 바빠 죽겠는데. 확 끊어 버리려다가 그때가 생각났다. 모르는 번호로 걸려왔던 한 통의 전화를 받았더니 처음 듣는 목소리가 네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다. 어쩐지 익숙하다. 통화버튼을 눌렀다. 

 

 

 

- "...아, 여보세요?" 

"..." 

- "기사 봤는지 모르겠네. 나 연구소 나왔어. 소장이 감방 들어갔거든." 

"..." 

- "탈출한 거 아니야. 이제 거기 잡혀 들어갈 필요도 없어." 

 

 

 

목에 뭔가가 걸린 듯 답답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여기 주소를 읊으면서 와달라고 부탁하고 싶지만 그 흔한 오랜만이라는 인사조차 건네기 힘들었다. 대답하지 않자 휴대폰 너머에서도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긴 침묵 끝에 들려오는 조심스러운 말. 

 

 

 

- "시간 될 때 연락해줘. 잠깐 만나자. 너 있는 데로 갈게." 

 

 

 

창밖에 눈이 내렸다. 그때처럼, 펑펑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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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회원31.73
작가님,,, 작가님,,,,,,,,,,,,,,,,,,,,,, 이거 너무 재미있어요 흐아악 으아아아앙 잘 읽었어요,,,, 정말,, 홀린 듯이 읽었어요 ㅠㅁㅠ 좋은 글 써 주셔서 감사해요 ♡
7년 전
비회원254.24
정말 재밌게 읽고 가요ㅠㅠㅠㅠㅠ 끝을 볼 때까지 폰을 손에서 놓지 못했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흥미진진했구요ㅠㅠㅠ 주인공의 심경 변화도 먹먹했고 아무렇지 않아하는 솔이도 가슴 아팠어요ㅠㅠㅠㅠ 과학자가 잡혔다는 걸 읽었을 때 얼마나 마음이 나아졌는지 몰라요... 또 종종 읽으러 올 것 같아요 8ㅅ8 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7년 전
독자1
헐 이런 내용 너무 좋아요 ㅠㅜㅜㅜㅜ 제목 보고 이끌려서 들어왔는데... 짱이네요 사랑합니다♡
7년 전
비회원 댓글
대박...마지막문장에서 진짜 심장이 쿵했어요 ㅠㅠㅠㅠㅠㅠ
7년 전
비회원도 댓글을 달 수 있어요 (You can write a com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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