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가 나에게 긴 다리로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니기도 했지만, 워낙 다리가 길어 몇 걸음 만에 온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그와 나는 동시에 입을 열었다.
“아, 혹시..”
“김여주 씨 맞으신가요?”
“네 맞아요.”
맞다는 내 대답에 올라간 눈꼬리가 휘게 웃으며 그가 말했다. 무표정일 때는 차갑고 도도하게 생긴 페이스인데, 웃는 모습은 흡사 강아지상이었다.
“반갑습니다. 황민현이라고 합니다.”
2017년 봄, 이것이 나와 황민현의 첫 만남이었다.
* * *
소개팅남, 그러니까 황민현씨는 들었던 것 이상으로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사실 처음에는 그의 화려한 겉모습과 피지컬에 눈이 갔다면, 두 번째로는 나에게 말을 걸었을 때의 부드럽고 따뜻한 목소리에 놀랐다. 그는 정말 나긋나긋하고 예쁜 목소리의 소유자였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인사도, 그는 다른 느낌을 주었다. 평소 낯을 가리는 나는 처음 만난 사람에게 쭈뼛거리며 굳은 표정으로 인사를 건네곤 했었는데. 고작 2살 차이지만 나보다 훨씬 어른이라는 생각이 든다.
“식사 안 하셨죠? 밥 먹어요.”
“네. 좋아요.”
“뭐 좋아하세요?”
“딱히 가리는 건 없는데.. 그럼 뭐 소개팅 때 다들 파스타 먹는다고 하던데 스파게티집 가실래요? 사실 제가 소개팅 처음이거든요.”
심드렁하게 뱉은 내 마지막 말에 아핳핳- 하고 소리 내서 웃는 황민현씨였다. 뭔가 갈수록 냉철했던 첫인상 이미지와는 다르게 잘 웃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주씨 재밌는 분이네요. 사실 저도 소개팅 처음이에요. 좋아요. 우리 오늘 소개팅 정석대로 해봐요.”
* * *
학교 근처 파스타집으로 자리를 옮긴 후 나는 메뉴판 하나를 들고 뭘 먹을지 열심히 고민했다. 오늘은 뭔가 느끼한게 먹고 싶으니 크림과 로제 사이에서 진지한 고민을 하고 있는데, 또 어김없이 건너편에서 아핳핳- 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어리둥절하게 그를 쳐다보자,
“아, 너무 진지한 표정으로 고민하시길래.. 크흐흐.. 지금 메뉴판만 뚫어져라 5분째 보고 있는거 알아요?”
... 벌써 5분이나 지난건가. 뭔가 5분동안 고민하는 날 빤히 쳐다봤을 그를 생각하니 민망함에 뺨을 살짝 긁적이자, 그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래서 뭐 먹을까요, 우리?”
“음... 아무래도 오늘은 로제를 먹어야겠어요! 크림이나 로제같은 좀 느끼한게 먹고 싶어서 둘 중에 계속 고민했어요 하하.. 민현 씨는요?”
“저는 그럼 크림으로 할게요. 주문이요.”
직원 분을 불러 크림 하나 로제 하나요, 라고 말한 후 방금 생각났다는 듯 뭐 마실래요? 하고 묻는 그의 질문에 콜라도 하나 시키고는 음식을 기다리는 우리였다. 직원 분이 가신 후, 그의 자연스러운 대화 리드 하에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소개팅은 어쩌다가 나오시게 된 거에요?”
“그게.. 하하. 말하자면 기네요. 간단히 말하면 그냥 친구 제안으로?”
“저도 비슷해요. 과에 친한 녀석이 제대도 했는데 연애해야하지 않겠냐며 바람 잡더니, 어느 날 여주씨 번호를 주더라고요.”
아, 그럼 이 사람이 소개팅 자리를 주선해달라고 부탁한 게 아니라 친구가 무턱대고 잡아준 거였나 싶은 마음이 들어,
“아, 그럼 혹시 원치 않는데 나오신 건..”
이라 묻자, 예쁘게 치켜 올라간 눈이 동그랗게 커지며 손사레치는 그였다.
“아니요! 전혀 아니에요. 오히려 지금 그 친구한테 고마울 정도에요. 아주 좋습니다.”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해주자 내가 좋다고 고백한 것도 아닌데 괜히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이외에도 서로 가족에 대한 이야기, 학교 이야기 등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부모님과 누나가 있다고 했고, 1학년 마치자마자 군대에 가 14학번이라고 했다. 아무래도 학교가 같다보니 대화가 잘 통했고, 내가 하는 여러 이야기에 그랬구나~ 하며 열심히 들어주는 모습이 좋았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음식이 나왔다. “맛있게 드세요.” 라는 직원분의 말에 똑같이 “감사합니다.”라고 직원분의 눈을 보며 말하는 그의 모습이 예뻤다. 본 지 1시간도 되지 않은 사람이지만, 정말 좋은 사람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서로의 음식을 앞에 가져다두고, 그에게 조금 권하기 위해 앞접시에 내 것을 조금 덜어 건네려는데, 내 앞에 앉은 그도 똑같이 나에게 조금 덜은 파스타를 담은 접시를 주는 것이었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서로 통했네요. 제거 많이 드세요. 크림도 먹고 싶었잖아요.”
어떻게 알았지.. 원래 둘 중 하나를 고르면 미련이 남는 법인 것을. 특히 음식에 있어서는 그것이 더더욱 그렇다는 것을 정확히 캐치하는 황민현씨였다.
그렇게 나온 음식을 먹으며 이것저것 더 이야기를 나누었다. 예경이에게 조금이나마 들은 바로는 잘생겼고(맞다), 키도 크고 훤칠하며(정말 맞다), 학점이 4는 그냥 넘는, 그냥 완벽한 사람이라고 했다.
“경제학과라고 하셨죠?”
“네 맞아요. 여주씨는 역사교육과라고 들었는데 맞나요?”
“엥, 아니요 저는 영어교육과에요!”
“아.. 김종현 바보녀석. 어떻게 영어랑 역사를 헷갈리지? 죄송해요. 주선해준 친구가 역사교육과라고 했는데, 그 친구가 좀 바보라 영어랑 역사를 헷갈렸나봐요.”
“발음이 비슷하니까 그럴 수 있죠 뭐. 그런데 되게 친한 친구인가봐요.”
“네. 중학생 때부터 동네 친구였는데, 어쩌다 같은 대학 같은 과를 와서..”
처음으로 인상을 살짝 찌푸렸지만 이내 친구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가자 입가에 미소를 살며시 띠는 황민현씨였다. 아마도 엄청 친한 친구인 듯하다. 그렇다면 예경이가 아는 오빠라는 사람이 김종현씨인 건가? 그 때였다. 우리 테이블의 뒷 테이블에 앉은, 나와 등을 맞대고 앉은 사람이 조용히 침울한 목소리로 말을 읊조린 것은.
“바보 아닌데에...”
“야 김종현 조용히 해~~ 들키겠어.”
.. 조용히 하라고 속삭이는 사람의 사투리 섞인 목소리가 더 큰 것은 비밀로 해주는 게 낫겠다. 내가 약간 뒤 테이블을 의식하는 것이 보였는지 그 짧은 찰나를 캐치한 이 눈치 빠른 남자가 “뒤에 뭐 있어요?” 하고 물었지만, 비밀로 해주는 것이 이들의 우정에 도움이 될 것 같아 그냥 아무것도 없다며 먹던 파스타를 마저 먹었다.
학교 근처라 파스타가 먹고 싶을 때 가끔 오는 곳이었지만 오늘은 내가 먹었던 이 곳 음식 중에서 가장 맛있었다. 항상 음식이 나오면 먹는 데 집중하느라 빨리 음식만 먹고 배를 두들기며 다시 학교로 향했었는데, 낯을 가리는 내가 초면인 사람과 재밌게 이야기를 하며 밥을 먹은 것은 거의 처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나도, 그도 애인을 사귀고 싶어서라기 보단 그냥 친구 부탁으로 나온 소개팅이라는 느낌이 강해 좋은 사람과 먹은 밥 한 끼 정도의 의미를 갖자고 나 자신에게 되새기며 계산서를 들고 같이 계산대에 가 카드를 내밀며 캐셔분께 “분할계산 해주세요.” 라고 말했다. 그러자 갑자기 옆에 있는 남자가 내 손목을 딱 붙잡는 게 느껴졌다.
“아니요. 그냥 이걸로 다 계산 해주세요.”
캐셔분은 우물쭈물하며 나와 황민현씨를 번갈아 봤고, 나도 뜻밖의 스킨십에 놀라 그를 놀란 눈으로 가만히 바라봤지만 그의 시선은 계산대만을 곧게 향해 있었다. 결국 캐셔분은 황민현씨의 카드로 계산한 후, “만 구천원 나왔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그의 카드를 돌려주었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빼놓지 않고 나온 그는 그제야 그는 내 손목을 놔 주었다. 카드를 주섬주섬 지갑에 다시 넣으며 내가 말했다.
“그냥 각자 먹은 거 계산하려고 했는데.. 잘 먹었습니다. 제가 커피 살게요.”
“우리 오늘 소개팅 정석대로 다 해보자고 했잖아요.”
“네?”
“그래도 첫 소개팅인데, 딱 정석대로 해봐요. 다음은 카페를 가면 되나요?”
맞다, 아까 서로 웃으며 정석 소개팅 루트대로 해보자던 말이 생각이 났다. 뭔가 그걸 생각하며 노력하고 있는 것 같아 문득 그 모습이 귀여워 놀리고 싶어졌다.
“에이, 너무 구식이에요.”
나의 말에 그가 나를 돌아보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쳐다보았다.
“트렌디한 소개팅 해요. 요즘엔 카페보다 테이크아웃 생과일 쥬스가 유행이에요.”
내 장난아닌 장난에 그도 웃으며 우리 둘은 나란히 쥬스 가게로 향했다.
* * *
각자 한 손에 딸기바나나 쥬스 큰 사이즈를 들고 학교로 들어와 광장에 앉았다. 밤의 학교는 정말 예뻤다. 건물 이곳저곳 조명이 켜져 어둡지만도 않았고, 낮에 열기를 식히던 분수대에는 은은한 조명이 들어와 더 운치있게 했다. 근처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은 우리는 또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는 나와 비슷한 점이 너무 많았다. 휴일에 심심하면 혼자 서점에 가거나 영화관에 가서 나만의 시간을 보내는 나였는데, 그도 혼자서 시간 보내는 걸 좋아한다고 했다.
“혼자 다니는 거 좋아하는 사람 되게 드문데.”
“그러게요. 저도 맨날 혼자 영화본다, 혼자 서점간다 쇼핑간다 하면 다들 친구 없냐, 애인 없냐는 식으로 쳐다보더라고요.”
“어 맞아요! 그냥 혼자가 편한 건데. 그럼 우리 다음에 같이 서점가서 각자 책 보다가 밥이나 먹을래요? 저도 책 읽는 거 좋아하거든요.”
자연스럽게 다음 만남을 언급하는 그가 싫지 않았다. 싫지 않았다는 표현보다, 좋았다. 소개팅을 처음 해 봤지만, 그가 나를 위해 많이 맞춰 준 탓인지 아니면 서로 잘 맞는 탓인지 즐거운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그가 너무나 다정한 탓일까, 떠밀려 나온 소개팅이라 나와 연인관계로 발전할 마음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혼자 너무 좋아한 것 같아 뒤늦게 부끄러워지는 나였다.
미쳤다, 전 남자친구의 바람을 목격하고는 헤어진 지 딱 일주일이 되었는데 새로운 남자에게 설레다니. 사람의 마음은 이렇게 가벼운 걸까. 그때 갑자기 예경이에게서 카톡이 하나 도착했다.
[예경] 잘 돼가고 있냐
미리보기로 메시지를 확인하며 내가 짧게 웃자, 황민현씨도 화면을 봤는지 같이 피식- 웃는다.
“친구에요?”
“네. 소개팅 주선해준 친구.”
“아하. 고마운 분이네.”
원래 이 사람은 모든 사람한테 다정한가. 그냥 사소한 것들도 좋게 말해주는 게 버릇인데 괜히 내가 오해하고 있는 건가 생각도 들어 잠시 침울해지는 나였다.
“학교 근처에서 자취한다고 했죠?”
“네. 교육관 근처 살아요. 민현 씨는요?”
“저는 통학이에요. 벌써 밤 늦었는데, 가요 우리. 데려다 줄게요.”
“안 그러셔도 되는데..! 저 집 잘 가요. 별로 안 늦어서 각자 가도 돼요.”
“제가 마음이 불편해서 안돼요. 골목까지라도 데려다 드릴게요.”
만약 남자형제가 있었다면 이런 다정한 사람에 대한 로망이 없을 수 있었을까? 끊임 없이 밀려오는 그의 다정함에 숨이 멎을 것만 같다.
* 처음 쓰는 글에 이렇게 많은 반응 달아주신 독자분들 감사합니다 ㅠ.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