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함에 관하여
w. 다정과따뜻함
일본 편의점에서 한국인을 만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들은 생각보다 여행을 좋아하고, 가깝고 문화가 다양한 일본으로 여행을 오는 건 자주 있는 일이니까.
널리 알려진 관광지보다는 여기처럼 조용한 마을을 좋아하는 사람도 아마 많겠지.
하지만 이런 경우는 어떨까.
한국인인 내가 일본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일본어가 엄청 서툰 한국인이 나를 보며 일본어로 더듬더듬 말하고 있는 지금 상황.
흔한 상황일까?
그는 내가 한국인임을 알지 못했다. 그건 당연했다. 일본인과 한국인은 잘 구분이 안 가는 경우가 많으니까.
그는 음료가 진열된 곳으로 가 한참을 서 있더니, 결국 탄산수 하나를 집어들었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그가 한국인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문제는 그가 건넨 돈이 모자랐다.
"お金が不足します。 もっと払わなければなりません。(돈이 부족합니다. 더 내야해요.)"
"..네, 네?"
잔뜩 귀찮은 목소리로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리고 들려오는 대답에 놀라 퍼뜩 고개를 들었다.
분명. '네' 라고 대답한 것 같은데..
"아.. 아! 잠시만요."
정확한 발음의 한국어. 당황하는 얼굴과 뒷머리를 긁적거리는 행동까지 느리게 보였다.
정말 한국인이었다. 이런 곳에서 한국인을 만나게 되다니... 이렇게나 조용한 마을에서.
나는 그에게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말하지 못한 채, 그가 허둥지둥 주머니를 뒤지는 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서 누군가가 떠올라서 그가 내 어깨를 두드릴 때까지 목소리 한 번 내지 못했다.
그는 미동없는 내 모습에 당황한건지 내 코 앞에서 손을 휘휘 저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움찔하며 뒷걸음질 쳤다.
그가 내민 손바닥 위에는 일엔짜리 여섯개가 놓여있었다. 이번에는 더 많이 줬다. 나는 얼떨결에 피식 웃으며 그의 손바닥에서 일엔을 두개 주웠다.
이제 됐네요.
그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
"한국인..이세요?"
"...아..네."
여기 사시는 거예요? 시골 마을이라 한국인 볼 기대조차 안 했는데! 그래서인지 너무 반갑네요. 혹시 이 마을에 대해 잘 아세요?
제가 오는 길에 가이드북을 잃어버려서..
그는 마치 미로처럼 어지러운 밀림에서 표지판을 발견한 사람처럼 환한 얼굴로 내게 말을 걸었다. 그동안 홀로 꾹 삼켜왔던 모국어가 쏟아져 나오는 듯 했다.
하지만 나는 입 밖으로 그 한마디 내뱉을 수 없었다.
막상 들려오는 말들에 대해 맞받아쳐야하는 입장이 되자 입술이 떨렸다.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한국어로 대화 할 수 있을까? 내가? 아주 오래 전부터 생각만 했던 순간이 벌써?
그는 내가 말을 꺼내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눈을 똑바로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申し訳ないけど、私は韓国語しません。(죄송하지만, 저 한국어 안 해요.)"
"..네?"
"これ以上やめてください。(더 이상 하지 말아주세요.)"
그가 제대로 알아들었던 못 알아들었던 간에, 나는 내 할 말만 하고 그에게 영수증을 내밀었다.
그의 허여멀건한 손은 물방울이 맺힌 탄산수만 움켜쥐고 있었다.
나는 그를 불편해 한다는 걸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더 이상 이야기 하기 싫어요, 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는 알아차린 건지, 나의 무례에 대해 기분이 나빴던 건지 한참을 말 없이 서 있다, 영수증을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말 없이 뒤를 돌아 편의점을 나섰다.
문이 가볍게 닫히며 움직이자 가을의 제법 쌀쌀한 바람이 카운터까지 끼쳐왔다.
그리고 그가 남기고 간 쪽지를 발견했을 때는,
조금 주저앉을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