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per Tiger, Scissors Rabbit
w.문달
일전에 말했던 대로 인간관계가 좁고 나서는게 달갑지 않은 나에게 많은 수식어가 붙게 되었는데 대체로 그것들은 나쁜 의미를 지녔다. 나는 토끼인데 여우로 둔갑해 버렸고, 양다리의 귀재이며, 예쁘지 않지만 좌우로 잘생긴 애 둘을 끼고 있는 부잣집 딸이다. 정재현과 이동혁이 내 옆에 졸지에 충실한 개가 되어서 붙어 있는 이유는 내 집안 재력 때문이며, 나는 둘의 치명적인 약점을 쥐고 협박하기를 잘한다. 소문이 이렇게 무섭고 엄청난 힘을 가졌다. 정재현은 그 말들을 하찮게 여겼고, 이동혁은 아예 언어 자체로 취급을 안했다.
소심하고 남의 말에 잘 휘둘리는 나는 처음에 무지하게 신경을 썼지만, 둘과 같이 다니다보니 나 역시 동화되어선 정말 대단한 베스트셀러들이 많다고 비꼬는 수준의 단계까지 이를 수 있게 되었다. 어쩌다보니 친하게 지내는 여자애들은 모두 윤리라와 연관되어 있어 한 명도 없고 내 주변은 죄다 남자애들만 남았다. 부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의기양양하게 사자 위에서 군림하게 된 토끼부터 순진하지만 단단한 치타에 오직 한 명에게만 절대적으로 쌀쌀한 호랑이, 옆에 없으면 허전한 존재가 돼버린 설표까지. 피라미드식 먹이 사슬이고 뭐고가 없었다. 당장에 우리는 그놈의 방학만을 기다리며 여행 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니까.
폭풍이 몰아치는 와중에도 심신은 평화로웠다. 윤리라가 나를 생까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물론 노리는 대상이 이동혁인게 흠이지만. 윤리라에게 적대심이 강해보이는 이동혁인지라 태도에서부터 믿음이 갔다. 무엇보다 중요한건,나는 아직도 지겨운 짝사랑을 하고 있다. 그것도 모두가 다 아는,훤히 드러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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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네 언제 사귈거야?"
실컷 딴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그런 말을 해오는 이민형 때문에 사레가 들렸다. 김동영이 내 등을 두들겨주며 그거 관련해서는 예민하니 꺼내지 말라고 대신 말했다. 나는 밥 친구가 늘었다. 예전에는 늘 셋이라 한 명이 꼭 앞에 투명 인간이랑 같이 외로운 식사를 가졌는데 이태용이 끼면서 짝수로 딱 맞아 떨어져 심심치 않게 됐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태용은 그 큰 눈동자에 지진을 일으키며 나랑 동영이랑 쌍둥인데 어떻게 사귀냐며 진지하게 말했다.
"나랑 김도화가 아니고, 김도화의 구질구질한 상대가 있어."
터무니 없는 질문에 아니라고 해주니 왜 저가 반색을 하는지 모르겠다만. 이민형이 눈 주변에 주름이 생길 정도로 세게 감고 웃으며 이태용에게 도영을 너무 좋아하는거 아니냐고 했다. 난 아무 말도 않고 그저 쳐다보기만 했는데도 김동영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져서는 자기는 여자가 좋다며 성을 냈다.
"아니, 이태용이 너 친구로서 좋아하는거 알아. 네가 왜 버럭해?"
"그..이민형이이! 이민형 때문이야."
지금은 아니지만 예전엔 김동영이 생각하는 만만함의 대상 1위 자리를 빛냈던 이민형 탓을 하며 그 얘기는 거기서 멈추기로 했다.
1학기 마지막 기말고사가 코 앞이라고 한꺼번에 몰아치는 수행평가에 허우적대는 중이었다. 이르게 찾아온 찌는 더위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대충 넘기며 블라인드를 내렸다. 봄까지는 좋았는데 6월 말 무렵이 되니 한 줄기 빛이라도 내 책상 위를 점령하는 꼴을 볼 수 없었다. 더우니까. 교실을 둘러보면 거의 하복 차림이고 춘추복은 찾아보기 힘든데 그 찾아보기 힘든 춘추복 중 한 명이 바로 내 옆에 앉아 있다. 단추 하나 안 풀고 손목부터 목까지 꽉 잠근 흰 셔츠 차림의 정재현을 보며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정재현이 그런 나를 발견하고는 풀고 있던 문제집을 들어 눈 밑까지 가렸다.
"왜 그런 풀린 눈을 하고서 날 보고 있어?"
"응? 내가?진짜?"
"응. 부끄러웠어."
"뭐,무슨,뭘 생각하는거야!"
우리 주변의 애들이 뒤돌아 흘기며 쏘아봤다. 지금 자습 시간이지 참.
나는 급 더워져서 부채질을 하며 목 긁는 소릴 냈다.
"근데, 안 더워? 목 갑갑해 보여. 한 두개 정도는 풀지."
"어어..야해."
"왜이래, 오늘. 너랑 안놀래."
내가 부러 질색하는 표정을 하고서 몸을 창가 쪽으로 붙이니까 베시시 웃으며 그러지 말라고 내 팔뚝을 콕콕 찔러왔다.
"지금 애교 부린거야?"
"응? 왜? 귀여웠어?"
정재현은 어째 더 능글맞아졌다. 그래서 더 편안하게 느꼈는지도 모른다. 이젠 정말 친구 같았다. 내가 아랫입술을 안으로 마니까 정재현이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며 꽉 조였던 줄 넥타이를 느슨하게 내리고는 윗 단추 두어개를 후두둑 풀었다. 내가 다 시원하면서 통쾌하긴한데 어째 자꾸 살짝 보이는 정재현의 하얀 속살에 눈이 갔다.
"내가 말했지. 야하다고. 이 봐, 자꾸 보는 것 봐. 변태."
그저 갑갑함만 덜어냈을 뿐인데, 아까와는 다르게 미소마저 야살스럽게 느껴지는 바람에 난 정재현 말대로 진짜 변태가 된 기분이었다.
호랑이가 곰과 함께 100일동안 동굴 안에 들어가 마늘과 쑥만 먹다가 못 견디고 나갔다고, 그 설화를 비웃기라도 하듯 이동혁은 교연하게 인고의 시간을 보냈다. 몰염치하게 구는 윤리라를 어떻게 물 먹이면 마음이 좀 시원할까 하고 요새 그 생각만 하며 지낸다고 했다. 물론 정재현에게만 말해줬다고 하는데 아마 내가 그동안 겪은 것에 대한 복수를 제가 대신 할 계획이라 일부러 말해주지 않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내가 하도 왜 가만히 있느냐고 이동혁을 답답하게 보자 정재현이 마지못해 몰래 귀띔해준 정보이다.
"고맙기는 한데 그냥 넘어갔음 좋겠다.. 더이상 다른 애들 다 보는 앞에서 애기들처럼 싸우기도 싫고."
"너는 그렇게 생각할지 몰라도 이동혁은 많이 얹힌게 있어서 그래. 그때 너 옥상 갔을 때 이동혁 눈 돌아가는거 나 말린다고 힘들었어.너 이동혁 혼현 작정하고 드러내는거 제대로 본 적 없지?아마 기절할거야."
나는 몸서리를 치며 바로 수긍했다. 그런 나를 귀엽다는 듯이 흐흐 거리며 흘러내린 머리를 귀 뒤로 조심스레 넘겨주는 정재현이다.
"하고나서 말하는거지만, 넘겨줘도 돼? 머리 흘러내린거."
"아,으응."
정재현은 부드럽고, 조심스러웠다.
♡
방과후 시간에 과학실로 올라가 소수 정예 심화 수업을 받는 이민형을 중앙복도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는데 윤리라가 잠깐 얘기 좀 할 수 없겠냐며 내 손목을 잡아왔다. 빈 wee클래스 교실 안으로 윤리라가 나를 데리고 들어오자 안에서 시시덕거리며 놀고 있던 무리 애들이 표정을 확 굳혔다.
"도화야, 부탁하고 싶은게 있어."
"뭔데?"
"너 혹시 아직도 이동혁 좋아하면 이렇게 무릎 꿇고서라도 빌테니까 포기해주면 안될까?정말 이렇게 빌게. 미안해 도화야. 그런데 나 진짜 이동혁이랑 잘해보고 싶어. 부탁이야. 네가 이동혁한테 말 좀 잘해주면 안될까? 정말 미안해. 내가 그때 너 때려서 정말 미안해. 용서 안되겠지만 그래도 나 좀 불쌍하게 봐주라. 응?"
윤리라는 정말 간절하다는 눈빛으로 무릎을 꿇고 손을 모아 빌며 애원했다.
당황해서 윤리라를 일으켜세우려 했지만 윤리라는 꿈쩍도 않고 나만 바라보며 손을 비볐다. 그걸 지켜보던 애들이 리라 좀 봐달라고 거들었다.
"리라야,미안하면 네가 포기해. 그리고 너랑 잘해보려고 마음 먹는건 이동혁 이 결정할 일이지. 내가 말 한다고 달라지진 않을 것 같아."
치마 주머니에 넣어 놓은 핸드폰이 우웅 거렸다. 길게 이어지는 걸 보니 이민형인 것 같았다. 나는 기다리는 친구가 있어서 이만 가겠다고 하곤 문 쪽으로 걸어갔다.
"역시, 말로 좋게 하니까 안되는구나.야, 김도화. 너 그거 알아?"
발개진 무릎을 탈탈 털고 일어난 윤리라가 바로 태도가 변해서는 뜸을 들였다. 나는 궁금하지 않다고 초장부터 벽을 치곤 문을 열고 나가려고 했다.
"이동혁, 집안끼리 맺어진 약혼녀 있대. 너도 알지? 이동혁 집 존나 잘 사는거. "
"그걸 너는 어떻게 아는데?"
"우리 아빠 고등학교 동창이 알고보니 이동혁 약혼녀 아빠던데? 서혜린 이라고 들으면 넌 아니? 네오과고 1학년이래."
"아..그래? 그런데 뭐 어쩌라고?"
"뭐?"
"그래서 그게 뭐 어떻다고. 어떡해, 그럼 나는 애초에 안되겠다~ 라는 반응이라도 해주길 바라? 하.. 진짜 그러지 마 윤리라. 그리고 너 나 때린 것도 내가 암 말 않고 참아주니까 이렇게 넘어갈 수 있는거야. 당연히 미안해 할 일이고."
"야!"
더 들을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고 뒤에서 육두문자를 날리든 말든 문을 열고 나갔다. 아까부터 계속 울리는 이민형의 전화를 받으며 미리 줄 좀 서 있으라고 했다. 눈물이 찔끔 나오려고 했다. 가슴이 미칠듯이 뜨거웠다.
"안색이 며칠 똥 못 싼 것 같아."
"하,민형아 내가 비위가 세서 다행이지 밥상머리에서 똥 얘기 하는거 아니다."
내 말에 쏘리 쏘리 하던 이민형이 생선까스 위에 얹어진 소스를 젓가락으로 밀어내며 무슨 일 있냐 물어왔다.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고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 뭔 일 생기면 바로바로 주변 사람한테 털어. 너 아무리 힘들어도 말 안하면 아무도 몰라준다."
이걸 말해,말아 하려다 끌어올린 숨을 길게 뱉었다. 민형이 밥상머리 위에서 한숨 쉬지 말라고 젓가락을 손처럼 흔들었다.
"..민형아. 나는 이제 앞으로 어떡하면 좋을까? 계속 이런 사이로 셋이 지내기는 어려울 것 같기도 하고."
"정재현한테 미안해서 둘이 못 사귀는거지?"
이민형이 내 표정을 확인하더니 맞군 하고 끄덕였다. 제대로 들어맞는 말이다. 윤리라 입장에선 지 일부러 골리려고 안 사귀나 하는 생각만 하고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정재현에게 미안해서 못하겠다. 정재현에게 더이상 상처를 주기 싫었고, 또 나로 인해 정재현과 이동혁 사이가 뻘쭘해지는 것도 싫었다.
아마 이동혁도 친구를 잃을까봐 내게 말을 안하는게 아닐까 싶다. 아니면, 약혼녀 때문이라든가. 우울해졌다. 윤리라는 일부러 이동혁과 정재현이 없고 나만 있는 교실에서 들으라는 듯 시끄럽게 서혜린 이라는 아이에 대해 떠들어댔다. 이런 내가 너무 싫은데 아닌척 하며 그 애가 어떤 아인지에 대해 알고 싶어 걔들 얘기를 엿들었다.
서혜린이라는 아이는, 열일곱이고 소피 마르소를 닮아서 엄청 유명하다고 한다. 별명이 혜린 마르소 라고. 공부를 잘해서 과학 고를 들어갔고, 아버지는 이름을 대면 알만한 브랜드 회사의 대표시고, 어머니는 지금도 활동하고 계시는 여배우 시라고 한다. 이동혁네 집안과는 아주 어릴 때부터 친했고, 아버지들끼리는 얘기가 농담처럼 오가다가 진짜가 된 분위기라고 했다. 윤리라는 얄밉게도 제 아버지 힘을 빌려 남의 집안 사정 얘기를 잘도 알게 됐다.
"누구는 존나 불쌍하다. 어차피 이뤄지지도 못하는데."
자기가 더 불쌍한 신세면서. 나는 이어폰을 꽂고 누가 불러도 못 들을만큼 볼륨을 키워 노래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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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단점 중 고치고 싶은 하나는 남의 말에 너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분명 괜찮다고 생각해서 산 옷인데 누군가 어 예쁘다 근데 색이 좀 니 얼굴을 죽이는 것 같다 라고 하면 그때부터 손이 잘 안가게 됐다. 남들이 나를 뭐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를 엄청 신경 썼고, 최소한의 욕은 안 들어먹으려고 뭐든 다 들어주고 조용히 지냈다. 그래서 내 평판은 이동혁과 정재현을 만나기 전까진 착하고 조용한 애였다. 지금은 많이 내려놓았는데, 그래서 나도 좀 강한 사람이 되었구나 하고 있었는데 또 무너지려고 했다.
쉬는 시간에 이동혁과 정재현과 모여 앉아 있으면서 각자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이동혁이 핸드폰을 책상에 내려놓더니 졸리다며 의자처럼 깔고 앉아 있던 정재현에게 기댔다. 정재현이 덥다며 앞에 앉아 엎드리라고 해도 이동혁은 이 자세가 더 편하다며 정재현의 어깨를 감싸 안고 머리를 붙였다. 진동이 울리더니 이동혁의 핸드폰 화면이 켜졌다.
카카오톡 서혜린: 아 왜애애~~~~ 보게 해조!
보지 말았어야 했는데. 쓸데없이 눈이 좋은 탓이었다. 윤리라는 자꾸 입만 열면 서혜린을 그렇게 불러댔다. 정작 그 애와 인사 한번 정식으로 나눠본 적도 없으면서 친한 언니동생 사이인것 마냥 굴었다. 나 혼자 있을 때만 크게 얘기하는게 악의적인 의도가 너무 비쳐서 꼴사나웠다. 그나저나 검색창에 소피 마르소를 쳤다가 너무나도 예쁜 사람 사진이 좌르륵 나오는 걸 보고 우울해하는 나도 문제라면 문제였다.
"오늘 나 야자 안 하고 간다."
"왜?"
"아, 만나? 잘 가라. 도화야 우리끼리 야자하자. 이동혁은 치사하게 야자 째고 놀러간대."
다 알고 있는 듯한 정재현의 말에 주어는 생략 되어 있어도 나는 어렴풋이 누굴 만나러 간다고 이틀 하는 야자를 빼는지 짐작이 갔다. 서혜린이라는 그 아이겠지. 분명 이렇게 의식하기 전에도 둘은 소소하게 만났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알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모든게 다 원망스러웠다. 서혜린의 존재를 일깨워준 윤리라도, 서혜린이라는 아이도, 약혼녀도 있는 주제에 날 좋아한다 했던 이동혁도. 그 긴 야자 시간을 통째로 날리며 나는 슬픈 노래만 계속 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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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 겉 핥기 식으로 진실과 왜곡 사이를 넘나들며 간당하게 아는 애들은 윤리라를 엄청나게 착한 이동혁 여자친구로 안다. 아직도 둘이 사귀고 있는데 내가 플러팅 하고 있는 줄로 아는 애들이 상당히 많다. 윤리라는 그 말에 절대 부정하지 않고 그저 웃어주며 자기를 더 가련해보이게 만든다. 참,약았다. 바람 난 남자친구를 용서해준 천사같은 여자 친구 이미지. 윤리라는 그렇게 남들 입에 오르내리도록 굳혔다. 그러나 아무리 정교하더라도 짝퉁은 진품 옆에 있으면 언젠가 반드시 정체가 들통나기 마련이다.
"근데 쟤도 진짜 독하다. 내가 악혼녀 있다고 얘기까지 했는데 꿋꿋하게 이동혁 옆에 붙어있는 거 보면. 얌체 같애. "
오늘도 대놓고 뒷담화다. 아니 이건 앞담인가? 그러려니 하고 있는데, 아침부터 피곤하다며 학교에 와서는 계속 엎드려 있길래 지금도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자고 있는 줄로만 알았던 이동혁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동혁의 목소리가 나는 그 자리로 고개를 돌렸다.
"야, 작작해."
갑작스레 험악해진 분위기에 깔깔 거리며 웃던 윤리라와 애들도, 그 외 관심 없고 각자 할 일 하던 반 애들도 모두 입을 다물었다. 조용하기로는 은근히 내 다음가는 이동혁이지만 애들은 이동혁을 은근히 무서워했다. 몸에 털이 곤두섰다. 이동혁이 제대로 화났다는 신호이다. 나는 이동혁을 잠재워줄 정재현을 찾았지만 도서관에 간다던 정재현은 아직까지 교실에 들어와 있지 않았다. 정말 큰일났구나, 하고 생각했다. 속이 울렁거렸다. 빠르게 뛰는 심장에 나는 가슴을 부여잡고 책상 위로 쓰러지듯 엎드렸다.
"지랄맞은 것도 정도가 있지, 그놈의 주둥아리를 다무는 법이 없네."
아무래도 계속 쌓아두고 있던 걸 지금 다 풀어내려는 모양이었다. 그러지 말라고 하고 싶은데 가감없이 드러나는 호랑이의 기개에 눌려 도저히 몸을 일으켜 세울 수가 없었다. 이동혁이 이를 갈며 윤리라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동혁아..왜 그래애.."
이동혁이 바로 윤리라의 말을 끊었다. 윤리라의 목소리는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나 역시 귀가 대롱대롱 튀어나온 지 오래였다. 망해버려.
"니 대가리는 사람들 구경하라고 폼으로 놔둔 관상용이냐? 더럽게 말 못 알아 쳐듣는 거 보면 그런 것 같아 보인다. 야, 이참에 앞으로 나가서 애들 다 듣게 얘기 해. 왜, 너 잘하는거 있잖아. 떠벌리고 다니는거."
"야,이동혁. 너,너 말이 심하잖아."
"나랑 사귄다고 동네방네 떠들어댔으면서 왜 나한테 차였다고는 안하고 다녀? 그것도 같이 애들 앞에서 큰 소리로 떠들어줘. 아직도 내가 너랑 사귀는 줄 알잖아. 얼마나 기분 나쁜지 알아? 너랑 같이 엮여서 입방아 오르내리는거."
윤리라와 그렇게 몰려 다니던 애들이 슬금슬금 뒤로 빠졌다. 나는 억지로 허리를 세우고 두 손으로 책상을 짚어 지탱했다. 윤리라는 거의 눈물을 떨구기 직전이었다.
"아, 그리고 너 서혜린한테 자꾸 추근대지 마. 뭔 연이 있어서 닿았는지 모르겠는데 걔가 요새 너 때문에 난감하대. 왜 애한테 약혼녀니 뭐니 하는 개소릴 하고 지랄이야. 거의 친동생 같은 앤데 너 때문에 서먹해지게 생겼잖니, 응?"
마지막엔 애 타이르듯이 어그러진 목소리로 이동혁이 윤리라의 어깨를 도닥이며 말했다. 그게 분노에 차서 길길이 뛰는 것보다 더 사람 자존심을 마구 즈려 밟는 태도였다.
"너도 알잖아, 내가 누구 좋아하는지. 너는 아닌 거 제일 잘 알잖아. 그거 때문에 차인 애가 왜 그러지? 분위기 읽자."
그때, 김동영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줄 게 있으니 밖으로 나와보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이 상황에 어떻게 나가지 하려다가 아무것도 모르는 9반 김동영은 죄가 없기에 자세를 낮추고 애들 틈으로 몰래 빠져나갔다. 김동영은 해맑은 표정으로 머리 위로 손까지 흔들며 깡총깡총 뛰어왔다.
"빨리 오빠 존경합니다, 라고 해."
김동영이 준다던건 대만에서 건너온 망고젤리 였다. 그것도 서너 봉지씩이나. 저번에 대만 갔다 온 교회 아는 동생을 부러워 하던 걸 기억하고 있었나보다. 어디서 났냐 했더니 이태용한테 얘기하니까 바로 갖다줬단다. 정말 든든한 백이다. 그때 교실 안에서 윤리라의 비명 섞인 소리가 들렸다.
"너나 김도화나 나한테 미안해서라도 이러면 안돼. 알아? 너네 둘이한테 놀아나는 것도 모르고 바보같이 앵앵 거리던 나는 뭐가 되냐고. 나 존나 억울하다고!"
윤리라가 몸을 벌벌 떨며 자기만 쳐다보며 쑥덕거리는 애들을 휙휙 쳐다보았다. 그러다 뭔 일인가 싶어 들어온 나와 눈이 마주쳤다. 윤리라는 악에 받쳐 있었다. 심지어는 같이 놀던 무리마저 윤리라를 한심 어린 눈으로 보았다. 나와 밖에서 얘기하던 김동영은 무언가에 홀린듯 내 뒤로 따라들어왔다. 무언가를 깊게 생각하더니 검지와 엄지끼리 따닥 소리 내 부딪치며 김동영이 말했다.
"너 고작 저딴 애한테 쩔쩔매고 살았어?"
나는 눈을 부라리며 이를 악물고 하지 말라고 김동영의 옆구리를 찔렀다. 윤리라와 이동혁이 뒤에 서 있는 나와 김동영을 동시에 쳐다보았다.
" 심각하다. 방금 온 나도 이 교실 공기 험악한거 알겠는데. 나 같으면 지금 교실 뛰쳐나갔다. 불쌍해라. 두뇌 회전이 느린 편인가봐?"
김동영이 관자놀이 근처에 대고 손가락을 빙빙 놀리며 빈정거리는걸 끝으로 윤리라가 내 어깨를 밀치고 나갔다. 밀려나가는 나를 김동영이 받아들곤 열린 뒷문 쪽으로 욕을 뱉었다.
"사람 막 들이박고 사과도 없냐!"
그리고 마지막 정점은 기똥찬 타이밍으로 정재현이 품에 빌린 책을 안고 들어 오며 찍었다.
"왜 다들 몰려 있어? 이동혁..? 도화 너 혹시..?"
오고 싶지 않았던 축제에 온 기분이었다. 어지럽다. 현기증이 다 났다. 나는 결국 짧은 시간동안 엄청나게 받은 스트레스로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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