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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담톡 상황톡 공지사항 팬픽 만화 단편/조각 고르기
김남길 몬스타엑스 이준혁 강동원 엑소
1323 전체글 (정상)ll조회 4570l 12
01.

인간의 기억은 단순하다. 초기 경험과 습득은 수천 마리의 해마 새끼와 같아서 목적 없이 뇌 주변을 징그럽게 배회하며 자리를 찾는다. 그리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그것들은 자살과 타살에 의해 소수만 남아 기억을 관장한다. 다시 말해 시간에 따라 자연스레 소멸하거나 해리성장애 같은 질병으로 상실한 무수한 순간을 제외한 나머지만이 우리가 말하는 기억을 정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 기억은 어떨까.

열 살이 되던 해였다. 물때 낀 좁은 원룸에서 맞은 복부를 움켜쥐고 희번득 눈알을 뒤집은 엄마에게 어떤 진통제를 쑤셨는지, 그녀를 구타한 짐승만도 못한 남자 면상에 어떤 식으로 칼을 들이밀었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내게 중요한 기억이 아니기에 소멸한 자연적 현상인지, 죽을 만큼 잊고 싶어 지워버린 고의적 현상인지 알 수가 없어 몇 번의 해가 바뀐 지금까지도 쉽게 정의하기 어렵다. 그래서 도서관에서 빌린 어느 고고한 심리학자의 책 마지막 페이지를 읽으며 그럴듯하게 서술한 기억의 정의는 옆집 치와와 민수에게 줘버리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이라 결론 지었다. 븅신들, 나도 정의 못 하면서 이딴 것도 책이라고. 캬악, 퉤.

너 같은 새끼는 죽어버려.

네가 그러고도 인간이냐?

개새끼야, 죽어버려!

죽으라고! 죽어! 죽어!

깨진 기억과 내 목소리가 윙윙, 좌우로 고개를 털어 밖으로 꺼내다 머리를 관통한 찌릿함에 넙죽 이마를 감쌌다. 더럽게 빠지지 않는 과거의 산물. 어쩌면 총알 박힌 두개골이 지옥을 벗어난 미담거리에 더 적절하지 않을까 가만히 납작한 뒤통수를 긁는다.

세상이 말세야. 어린애가 무슨 죄라고. 동그란 식탁에 앉아 신문을 읽던 남자가 다음 장을 넘기며 국을 삼켰다. 작년 B 시 중학생 진 양의 투신자살에 이어 이번엔 남매가. 학업 스트레스로 추정. 밥그릇에 코를 박고 게눈으로 열심히 헤드라인을 읽는다. 투신자살을 했다고? 저게 더 나았으려나? 너희는 죽고 나는 살고? 아니다, 내가 죽었나? 과연 누가 진실된 생존의 깃발을 잡았는지 미간을 찌푸린 채 죽은 그들과 셈을 시작하는데, 평소와 달리 스포츠면까지 빠르게 훑은 남자가 신문을 포갰다. 그리고 조식을 함께할, 아니 원래 함께 했어야 할 빈자리를 응시했다. 앞치마를 벗고 맞은편에 앉은 여자도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내게 물었다.

순영이는? 방에 없니? 구체적인 이름 때문에 음식으로 가득 찬,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입을 감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개학이라서 일찍 갔나 봐요. 기괴한 기억의 정의를 쓴 돌팔이 심리학자가 되어 그럴듯한 이유로 둘러댄다. 타액이 뒤섞인 찌꺼기를 넘기며 진즉 아구창 몇 대는 박았을 도톰한 볼때기를 떠올렸다.

야 교복 갖고 와.

들키면 약속이고 나발이고 없어.

현피라도 뜨지 않으면 다행일 피시방에 구겨 앉아 밤새 게임만 했을 새끼는 현재 식탁에 앉아 전형적인 가족의 형태를 제공하는 이들의 친아들이자 나와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겉 남매. 폭력을 피해 열한 살에 위탁된 나를 현재까지 괴롭히는 맛에 사는 원수이자 비공식적 주종 관계에서 개 같은 ‘주’를 맡고 있는 놈. 한마디로 다정한 집구석의 개또라이 시팔세.

권순영 미친 새끼야. 이런 것 좀 그만 시켜. 입김이 가시지 않은 삼월에 빌라 현관 앞에서 권순영을 기다리며 감히 앞에서는 하지도 못할 말을 뱉는다. 뭘 그만 시켜. 재밌어 뒤지겠는데. 청력을 상실케 하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헝클어진 머리를 모자에 감춘 그는 교복이 담긴 쇼핑백을 낚아채며 재수 없게 웃었다. 꼬붕한테 꼬붕짓 시키는데 그게 뭐 잘못된 거라고. 슴슴한 얼굴에 고명 같은 올라간 눈꼬리가 새로 입은 교복을 훑는다. 울 학교 여자 교복 예쁘던데 사람마다 다른 건가. 반대편 주차장에 세운 아반떼 뒤에서 담배를 빨아대는, 권순영의 또 다른 꼬붕일지도 모르는 무리가 킬킬댔다.

븅신들 어쩌라고. 맘대로 하라지. 좆밥들은 상대할 가치가 없으니 무구한 얼굴로 제 교복을 확인하는 두목을 잡는다. 뭘 얼마나 이상한 짓 하려고 여기까지 오냐. 뒤에 모텔도 많은데. 빌라 뒤편으로 순순히 끌려온다 싶었으나 저 새끼는 잡힌 손목을 일부러 밀고 당기며 저딴 말을 지껄였다.

— 분명히 약속했다.

— 뭘.

— 네 교복 심부름이랑 외박 커버 쳐주는 대신에 학교에서 절대 아는 척하지 않기로.

— 존나 구질구질하게 몇 번을 말해.

— 오늘은 내 입학식, 네 개학식. 여기 나가는 순간부터 말도 걸지 말고 눈도 마주치지 마.

— 야,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지. 정확히 하고 싶으면 계약서라도 쓰던가.

— 너 따위랑 그딴 걸 왜 해. 종이 아깝게.

— 어, 종이 아껴서 부자 되라 씨바알.

저놈의 시비조는 이미 도가 텄다. 난 부자 될 거고 넌 꺼져. 쓸데없는 권순영과 그들을 지나쳐 대형마트를 둘러 끼고 골목길로 들어서는데, 무리와 떨어진 그가 다짜고짜 허리를 둘렀다. 마약을 처먹었나? 안긴 꼴이 사나워 있는 힘껏 밀어내지만 뿔그죽죽한 귀에 바람을 부는 건 상대 쪽이었다. 울 학교 조끼 필수야. 알려줄 때 그냥 해. 얼굴을 짓누른 조끼에 샤워 코오롱 냄새가 잔뜩 뱄다. 권순영 냄새. 쭈뼛 머리털이 섰다.

힘 빼. 안 잡아먹어.

뽕 좀 그만 넣고. 돼지냐?

단추 터진 셔츠가 적나라한 자국을 보였다. 취향 독특하네. 몇 살인데 아직도 레이스. 재수 없는 배려에 되지도 않는 고마움을 느끼다가, 조끼에 팔을 욱여넣다가, 뽕 소리에 시체처럼 차게 식다가, 가슴에 눈 돌린 권순영의 정강이를 걷어차고 유유히 길을 걸었다. 지는 수박 색깔 사각팬티 입는 주제에. 엉성한 폼으로 다리를 잡고 신음하는 변태 새끼를 버리고 도착한 학교는 어디서 뺏었거나 훔친 조끼를 입고 선도부 자리에서 복장 불량을 잡는 권순영이 있었다. 아, 씨팍. 쟤 선도부였지. 어쩐지 앵무새 머리가 거멓다 했고 웬일인지 교복도 단정하다 했다. 나는 넥타이도 맸고 치마도 무릎에 오고 찜찜하긴 하지만 조끼도 입었다. 고로 꺼릴 게 없다. 아는 척은 죽어도 하지 말라 권순영에게 각인했으니 미래 외박을 위해서도 머리가 있다면 순순히 보내주겠지. 삼삼오오 무리 지은 검은 대가리들과 뒤섞여 바닥에 얼굴을 처박았다. 밥그릇에 코를 박고 조식을 마시는 것처럼.

야, 너.

얼굴 박고 가는 애, 너.

왼발. 오른발. 오른발. 왼, 아니 오른발. 더러운 똥은 피하면 되고 권순영은 무시하면 된다. 꿋꿋이 낯선 신발들과 발을 맞추는데 별안간 막대기가 뒷목을 쿡쿡 찔렀다. 어디가. 복장 불량. 검은 대가리들의 시선에 몸뚱어리가 후끈거렸다. 고개를 들어 순진무구한 얼굴로 권순영을 올려봤다. 제가 뭘 잘못했나요? 권순영은 조끼를 가리키며 눈을 번뜩였다. 찢어진 구멍으로 번쩍이는 동공은 어릴 때 깨지 못한 사혼의 구슬 같다. 불안에 떠는 공기를 한껏 들이마신 권순영은 누구보다 내 약점을 잘 알고, 그래서 나 까짓 건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불합리에 타당성까지 거머쥐고 대담히 말을 걸었다. 개새끼, 말 걸지 말라고 했을 텐데.

벗어. 내 거야 그거.

벗으라니까? 벗겨줘?

정강이를 걷어찬 죄로 시팔세의 치졸한 복수가 입학식 첫 스타트를 끊었다. 태권도 도 대표 유망주와 더불어 2학년 선도부장까지 맡은 권순영의 관심을 넉넉히 받았으니 내 별명은 자연스럽게 권순영 애인이 됐다. 존나게 불운한 인생이었다. 위탁 아동에 중학교 유급에 자퇴에 검정고시가 족쇄였던 내가 꿈꾼 조용한 학교생활이 철저히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교내 인기 스타와 얽히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나를 비웃듯, 권순영은 그것을 완전히 짓밟고 올라 전교생 앞에서 내 존재를 알렸다. 그래도 위탁이나 유급을 거론하지 않아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싶었는데 때마침 교정으로 들어온 권순영이 어깨를 둘러 친한 척을 했다.

잘 지내보자. 뽕순이.

무진장 재수 없는 얼굴이 달처럼 동그랗게 떴다.










OFF ON OFF
; 기억의 권순영










02.

권순영은 제집에 위탁된 나를 싫어했다. 그냥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졸라게 미워했다. 딸리는 언어로 풀어보자면 푸른 들판 웬 어울리지도 않는 세발낙지가 찾아와 자신이 아낀 풀을 몽땅 뜯어 먹고 똥을 푸지직 지린 것 같다고. 몰래 권순영의 일기를 훔쳐보다 발췌한 문장이니 약간의 오류도 있겠으나 그때도 지금도 좆같은 기분은 같다.

가정위탁지원센터 봉사장이었던 권순영의 엄마는 유독 나를 가여이 여겨 아무도 거두지 않는 머리 굵은 열한 살 여자애를 집으로 들였다. 평소에도 애정 결핍이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반 쪼갠 사랑에 허덕인 권순영은 불 꺼진 화장실로 날 꼬드겨 일부러 가두거나 손바닥으로 등을 밀치고 도망가거나 하물며 좋아하지도 않는 콩자반을 내가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접시까지 싹싹 긁어먹었다.

당시 난 원초적인 미움이 두려워 권순영이 일주일에 한 번 세탁실에 태권도복을 가져오면 몰래 띠를 빨아 베란다에 말렸는데, 한번은 심하게 난 집게 자국 때문에 머리를 쥐어뜯길 만큼 싸웠다. 개새끼. 아직도 빡치네. 아무튼 권순영이 내 얼굴에 생채기를 내고 나서야 싸움은 종결됐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말미잘 같은 새끼. 새벽녘 바닥에 앉아 눈물과 콧물로 뒤섞인 얼굴로 권순영을 저주하고 있을 때, 무작정 방안으로 들어온 애가 아빠 다리를 하고 짠 냄새 들끓는 얼굴에 후시딘을 벅벅 문댔다.

그냥 너도 때려. 여기가 제일 아파. 권순영은 내 손을 잡고 그때도 두툼했던 볼기를 찰싹 때리며 약간의 죄를 사했다. 협박 비슷한 어투로 뭉갠 사과를 얼떨결에 받은 이후로 질투나 육체적 괴롭힘은 사라졌지만 더한 문제는 외부에 있었다.

폭력과 방관으로 이룬 모난 성격은 유급과 자퇴의 최적 조건이었다. 중2병을 달리는 검은 대가리 중 손동작을 유난히 크게 하는 놈이 있었는데 하필이면 그놈 옆에 앉아 마피아 게임을 했었다. 제 딴엔 장난처럼 때리는 시늉이었으나 아까도 말했다시피 폭력과 방관에 살았던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예민 과다로 머리를 감싼 채 벌벌 떠는 기괴한 태도였다. 저놈은 맞고 자랐냐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을 만큼 화목한 가정에서 자랐나. 때리는 시늉을 연달아서 하는 놈을 피해 구석으로 숨는데, 어디선가 날렵한 발차기가 붕 뜬 대가리로 날아왔다.

— 씨팔! 니네 같은 집에서 살지? 왜 성이 다르냐고!

 아빠가 두 명이다 씨발로마.

권순영은 무릎 사이에 농구공만 한 얼굴을 짓이기고 주먹을 꽂았다. 당시 태권도 겨루기 꿈나무였던 권순영은 그놈에게 시퍼런 멍 자국 두 개와 쌍코피를 터트림으로써 학교폭력위원회에 불려갔다. 증인으로 출석한 나는 집행위원을 포함한 교직원, 권순영의 엄마, 그리고 그놈의 부모님 앞에서 의도치 않은 과거사를 말해야 했다. 결과적으로 권순영이 발차기와 주먹을 휘두른 건 내가 불행해서라고. 울음을 참아가며 마무리를 짓는 순간 권순영은 그렇지 않아도 쌍코피가 터진 놈의 콧대를 부러뜨렸다. 직사각형 넓은 탁자를 뛰어넘어 오른발로 가격하던 권순영을 아직도 잊지 못하는 이유는 그때부터 걔가 이상한 흑기사로 보였기 때문이다. 백마 탄 왕자는 꿈조차 꾸지 않아서 바라지도 않았지만, 대신 굉장히 삐뚤고 성격 사나운 어느 먼 나라 양아치 왕자를 얻어버렸다. 그냥 얻은 것도 아닌 강제로 얻어버린 것. 마음은 심란했고 옆에는 늘 화가 난 권순영이 있었다.










03.

마피아 폭력 사건 이후 왕따 비스름한 것을 겪게 됐다. 코 깁스를 하고 나타난 놈이 사정없이 뿌린 소문 덕분이었다. 쟤 엄마 아빠 없이 다른 집에 얹혀산대. 권순영네 엄마가 쟤 불쌍해서 거둬준 거래. 맨날 맞고 자라서 누가 인사만 해도 벌벌 떤다니까? 가까이 가지 마. 지 때리는 줄 알고 권순영한테 꼰지르니까. 약은 년.

청소년 태권도 대표로 시합 중이던 권순영의 부재는 상당히 괴로웠다. 시선 공포증과 대인 기피증이 생긴 것도, 더 이상 학교를 나가지 않게 된 것도 그 시기였다. 백프로 의지한 건 아니었지만 이상한 양아치 왕자가 없으니 나 또한 기력을 잃었다. 싸우기도 싫었고 특히 경멸한 시선이 죽기보다 싫었다. 너희 왜 나를 그렇게 봐? 엄마 아빠랑 같이 살지 않아서? 남의 집에 얹혀살아서? 맞고 자라서? 눈에 힘알탱이가 없어서? 그냥 내가 싫어서?

내가 유급을 당할 때 권순영은 두 번째 금메달을 안았다. 내가 자퇴서를 낼 때 권순영은 세 번째 금메달 후보였다. 내가 검정고시에 떨어졌을 때 권순영은 세 번째 금메달의 주인공이 됐다. 내가 드디어 검정고시에 합격했을 때 권순영은 스포츠 TV에 나왔다.

 만 16세 최초로 4연패를 노리고 있습니다. 기분이 어떠십니까?

 많이 떨리고 긴장됩니다.

 오늘 경기장에 부모님이 오셨는데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열심히 할 테니까 끝까지 응원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경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고 싶으신 말씀 있으시면.

 어, 집에서 보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오늘 시험 결과 나오는 날인데 꼭 합격했으면 좋겠고 시합 끝나면 연락할 테니까 받아라.

그날 권순영은 4연패를 거머쥐었다. 그리고 정말 전화를 걸었다. 수신은 받지 마. 하지만 받고 싶어. 불 꺼진 거실에 웅크려 이유 없는 눈물을 흘렸다. 왜? 내가 왜 눈물을 흘리지? 권순영 전화를 언제 받았다고 끊어지니까 왜 아쉬워하는 거지? 내가 왜? 도대체 왜?

나는 권순영을 평생 미워해야 할 원수라고 단정 지었다. 한없이 재수 없다가 한없이 다정해지는 양아치 왕자를 어느 변방국 깍둑머리 졸병으로 치부하며 이상한 감정을 지웠다. 우리는 서로 다르고 환경도 다르다. 같은 집에서 같은 밥을 먹으니 내가 단단히 착각한 모양이었다. 부모가 엿 같고 폭력에 시달린 나는 누가 감히 손만 들어도 그 자리에서 자지러지는 나약한 존재다. 쪽팔려서. 내가 쪽팔려서. 이 쪽팔린 모습을 권순영이 알고 있어서. 알고 있음에도 모르는 척 평소와 같은 권순영이 찌르는 얄팍한 자존심을 온 힘을 다해 지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랫동안 맞대고 살다 보니까 저런 새끼도 예뻐 보이는 거다. 나는 우물 안 개구리. 세상엔 많고 많은 사람이 있다. 저렇게 재수 없고 웃을 때 드러나는 네모난 치아 하며 살집 있는 손을 가진 권순영을 절대로 상상 속에 집어넣지 않기로 했다. 

그게 만약 사랑이더라도.










04.

입학식이 지나고 일 년이 흘러 다시 새 학기가 됐다. 난 여전히 권순영 애인이었다. 중학교 자퇴 후 권순영을 따라 지역을 옮겨서 위탁이나 검정고시 출신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없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겼다. 권순영의 애인이라는 꼬리표는 그동안 죄를 진 모든 업보의 결과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권순영은 내 조력에도 불구하고 외박을 걸렸다.

합숙이 끝나는 날이면 그날 새벽 내내 친구들과 하지 못한 게임 삼매경에 빠지는 게 유일한 일탈이었으나 장기간 일탈의 향기를 쫓은 권순영의 아빠는 덜미를 붙잡고 나까지 들들 볶았다. 아침부터 잔소리 폭탄을 쌍으로 얻어맞은 권순영은 당연히 내 탓을 하기 위해 2학년 교실에 앉아 눈을 흘겼다. 야, 혼나니까 속이 다 시원하다. 가서 또 아빠 편들어 봐. 집에서는 너희 아빠가 비꼬던데 너도 참 똑같다. 차마 말은 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쨍한 하늘을 보는데 내 턱을 잡아 제게 돌리는 아주 비상식적이고도 무례한 짓을 권순영이 하고 있었다. 얘기하고 있는데 어디 봐. 애들 다 나만 쳐다보잖아. 네가 딴짓해서. 3학년 권순영은 알게 모르게 한 다리 아래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열아홉이 된 권순영은 학교보다 스포츠 TV에서 볼 때가 많아서 이목구비는 물론 주특기인 돌려차기의 길고 쭉 뻗은 다리가 검은 대가리들의 가십거리였다.

적당히 탄 피부와 왼쪽 귀에 난 오목 점을 찬양하는 애도 있었고 저 다리로 한 대만 맞아보고 싶다는 미래 변태적인 성향도 있었다. 이목구비 중에서 눈이 그렇게 예쁘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배를 잡고 깔깔댔다. 하지만 권순영은 그 부분이 어느 정도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가끔 사진첩을 정리하는 뒷모습을 훔쳐보면 예전과 달리 얼빡샷에 눈을 강력히 어필하는 자세가 많았다. 지금도 턱을 밑으로 내려 눈을 위로 치켜떴는데 워낙 인터넷 소식통이 느린 권순영은 얼짱 포즈라면서 구시대적 발언을 했다. 가끔은 한컴 타자에 머문 정신 같기도 했다.

그러다 갑자기, 교실에 시베리아 바람이 불어 닥친 것은 1교시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나서 제반으로 돌아가던 권순영의 눈치 없는 한마디 때문이었다.

— 야.

— 제발 반에 돌아가.

— 오늘 같이 자자.

춘삼월이 백스텝으로 추위를 맞았다. 머리털부터 발끝까지 흐른 전율을 설렘이라 착각할 뻔했지만 이것은 분명 소름이었다. 육두문자를 쓰지 않았을 뿐 표정은 이미 지하 세계 밑바닥쯤 갔으려나. 권순영은 수험생이랍시고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밝게 염색한 갈색 머리를 넘기며 이상함을 되물었다. 갑자기 왜 그러는데. 원래 우리 자주 하잖아. 하긴 뭘 해! 개노무새끼! 빌어먹을! 종잡을 수 없는 입을 막고 충격에 빠진 교실을 벗어나 계단 구석에 권순영을 묻었다. 너 미쳤어? 장난해? 자긴 뭘 자? 돌았어? 벌겋게 익은 얼굴로 쏘는 나를 당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권순영은 반박했다.

 오늘 소나기 온다잖냐. 엄마 아빠도 모임 때문에 없어서 같이 자자고 한 건데 뭐가 그렇게 싫어?

— 애들은 내가 비 무서워하는 거 모르잖아! 그리고 오늘 다시 합숙 들어가는 애가 뭘 같이 자?

 너 자는 거 보고 후발대로 가면 돼. 아니, 야. 왜 그렇게 화를 내.

— 같이 사는 것도 모르는데 거기서 왜 그런 말을 왜 하냐고!

 아, 그런가.

— 그리고 같이 자는 게 아니라 넌 소파고 난 바닥이야. 이게 어떻게 같이 자는 거야?

 한 공간에서 둘이 자는데 같이 자는 거라고 하지 그럼 뭐라고 해.

— 그러니까 왜 그걸 애들 앞에서 말해서!

 뭐 어때, 어차피 내 애인이라고 믿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

— 그게 자랑이냐?

 어, 자랑인데.

서로의 포인트가 미묘하게 어긋난다. 그래, 네 똥 굵다. 잘났다.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말싸움은 유치의 통로로 흘러갔다. 그럼 너 혼자 자던가! 위해줘도 지랄이네. 권순영은 3학년 교실로 계단을 올랐다. 쿵. 쿵. 쿵. 계단을 깨부수는 둔탁한 소리에 다닥다닥 붙은 대가리들이 둥그렇게 모였다. 권순영이랑 진짜 사귀기라도 해? 저 오빠 따로 여친 있는 거 아니었어? 같이 잤어? 동거해? 씨팍. 빙글빙글 하늘이 돈다. 어릴 적 세발낙지가 싸지른 똥이 그렇게도 맘에 안 들었나. 지린 똥이 포댓자루로 내렸다. 애초에 사귀는 것도 아니고 여친 있는지 없는지 내 알바도 아니고 싸가지에 밥 말아 먹은 놈은 도저히 좋아할 수가 없다고 옛날얘기처럼 전해 내려오는 루머에 강력히 거부했다. 교실로 돌아선 줄 알았던 권순영이 위에서 고개를 내밀기 전까지는.

야, 너희 뭐하냐.

괴롭히지 말고 들어가.

권순영이 하나의 율법인 듯 순식간에 사라진 대가리들은 나와 권순영을 남겨놓고 홀연히 떠났다. 교무회의에 발목 잡힌 교사들이 미웠다. 수업을 핑계로 도망쳐야 하는데 권순영은 위층에서 알 수 없는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눈빛. 내겐 아무것도 아닌 권순영의 눈.

저녁에 합숙 가.

혼자 있을 거면 그러든지.

긴 침묵 끝 사라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발자국이 멀어진다. 내가 잘못한 것과 권순영이 먹인 엿을 세어보다 문득 창밖을 주시했다. 그래, 권순영 말이 맞다. 정말 비가 온다. 소나기가 내렸다. 소름 끼치게 싫어하는 그것들이. 권순영이 없는 내게로.










05.

소나기가 내리던 겨울밤. 얼룩덜룩한 맨발이 경찰서로 도망쳤다. 오랜 폭력의 흔적을 고스란히 토하며 소독 냄새와 꿉꿉한 습도에 중독되던 그 날, 다수 주민의 신고로 체포된 만취 상태의 남자는 법과 규율과 공권력이 명백한 자리에서조차 내 목을 졸랐다.

개 같은 년! 세상에 애비를 신고하는 년이 네년 말고 또 있을까!

술 취한 남자의 힘은 숨통을 억세게 쥐었다. 쏴아아, 문밖으로 터지는 빗줄기에 세포가 죽고 눈이 멀고 입술이 말랐다. 남자를 거두기 위해 서너 명은 족히 되어 보이는 경찰복들이 달라붙었다. 더는 숨을 쉬지 못하고 정신을 잃기 직전까지 거센 빗소리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남자가 쫓아오는 발자국이 꼭 그것 같아서.

위탁을 받은 후에도 고통을 앓았다. 남들은 외상 후 스트레스라며 내 병명에 대해 이것저것 잘도 붙였다. 나는 이 병을 금치산자라고 불렀다. 소나기가 내리면 심신을 상실하고 의식이 흐려지며 방에 틀어박혀 언제든 문을 따고 들어올 남자가 두려워 밤을 지새는 증상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권순영 엄마에게 위탁받은 건 장마가 기승을 부리던 시기였다. 그 여름은 그녀가 외부 봉사와 캠프로 바쁠 때였고 권순영의 아빠도 회사 일로 새벽에 들어와 침대에 철퍼덕 엎어질 때였다. 거의 한두 달 동안 죽도록 공포에 사로잡혀 홀로 외로운 싸움을 했다. 권순영이 방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날도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손톱만 물어뜯고 있었다. 권순영은 조용히 방에 들어와 이유 없이 옆에 누워 잠을 청했다. 등을 돌린 채 색색이던 숨과 하얀 메리야스 밖으로 튀어나온 날개뼈가 뒤척일 때마다 졸린 눈을 끔벅이며 선잠을 잤다. 스무 살을 앞둔 나이에도 소나기가 내리는 날이면 권순영은 홀로 두려워할 나를 비웃거나 나무라지 않았다. 본인은 소나기만 내리면 가위에 눌리니 귀신 어퍼컷 한 방은 일도 아닌 기 센 내가 있어야 잠이 온다는 핑계를 댔다.










06.

저녁에 합숙 가.

혼자 있을 거면 그러든지.

하교 후 조금씩 그치는 빗길을 따라 권순영의 목소리가 고개를 들었다. 담담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실은 내가 그렇지 못했다. 싸가지에 무진장 밥 말아 먹었다는 소리를 위층에서 듣고 있었을 권순영을 생각하면 마음이 불편했다. 그냥 홧김에 질러버린 막말이었는데. 그렇다고 완전 싹퉁바가지에 밥도 못 빌어먹는 놈도 아니었고. 다시 거슬러, 저런 권순영을 조금도 좋아할 수 없다는 말도 진심은 아니었는데. 조금, 아주 조금은 심했다 인정한 셈 치고 사과하면 괜찮을까. 언젠가 사골처럼 우려먹을 그 성격을 모르는 것도 아니지만.

얌마.

야.

이상한 환청이 들렸다. 가려운 귓구멍을 파냈다. 야자까지 마치고 학교를 둘러 지름길로 들어가면서 예전에 권순영이 보냈던 문자들을 넘겼다. 할 일이 없을 때면 시간 죽이기에 적합한 놀이 중 하나인 권순영의 문자는 나름 재밌다. 합숙소 밥 존나 맛없다. 지옥에서 돌아온 네 불어터진 라면이 더 맛있을 듯. 내 팬티 못 봤냐? 빨래 네가 갰다고 엄마가 그러던데? 아빠한테 이따 말 잘해라. 외박 걸리면 나 뒤져. 욕을 빼면 문장 완성이 되지 않는 권순영의 기막힌 화법. TV에서는 그나마 정신 차리고 말하던데 정말 괜찮을지 모르겠네.

— 야 이 새끼야.

— 억!

— 일어나.

뒤통수를 둔탁하게 내려치는 힘에 고꾸라진 몸이 아스팔트 바닥을 쓸었다. 네가 날 무시해? 부르는데 그냥 가? 질척한 흙탕물에 젖은 교복이 역한 남자 손에 걸렸다. 엉킨 머리카락과 확장된 동공이 남자를 보며 겁에 질린다. 술 냄새. 찌든 담배 냄새. 닳아진 공장 옷. 낡은 천장. 스며든 녹물 바닥. 작은 원룸. 피를 토하는 금붕어. 연체 고지서. 늘어진 내복. 엄마 알약. 칼. 식칼. 아빠. 아빠. 아빠.

네 애비 버리고 가니까 좋더냐? 그 집 년놈들이 잘해주디? 왜? 그 새끼들 목에 칼이라두 꽂지 그래? 네 애미 수면제는 잘도 털어 넣드만 술 처먹은 네 애비는 왜 살려뒀냐? 꼴에 무섭디? 엉? 네년 때문에 죽지두 살지두 못하는 네 애미는 어째? 그때 죽여버렸어야지! 그래야 내가 이 고생을 안 하지 잡년아!

추악한 발이 배를 걷어찼다. 눈깔을 뒤집고 게거품을 물던 그녀가 떠오른다. 진통제가 아니라 수면제였어. 한 통을 다 털어 넣은 것 같았는데. 아, 죽고 싶다. 정말이지 죽어버리고 싶다. 휘어 잡힌 머리카락과 얼굴이 콘크리트 벽에 수차례 찍힌다. 이마로부터 뜨거움이 몰려왔다. 짓무른 피가 쩍 갈라진 틈으로 번졌다.

살려주세요 전 아니에요 신고 안 했어요 아무것도 안 했어요 안 도망가요 아빠 살려주세요 때리지, 때리지 마세요 술 사올게요 돈 있어요 술 주세요 가지 마세요 우리 아빠가 시킨 거예요 우리 아빠 전화는 공일공 삼구칠사 공구오일 공일공 삼구칠사 공구오일

무기력한 세포와 수천 마리의 해마 새끼들이 사후로부터 환생해 목을 졸랐다. 골목으로 모여든 방관자들을 향해 소리친다. 무기력한 세포와 닮은 그들은 선뜻 나서지 않는다. 너희들도 무섭지. 영원한 방관자. 나는 피해자? 용의자? 죽일까? 죽이자. 손에 잡히는 아무것이라도 좋다. 자의와 타의가 모호한 기억이 댕강 잘리는 것도 무섭지 않다. 나는 살고 싶다. 살아야 한다. 나는. 나는. 순영이가. 순영이가.

아아악!

목을 조르던 남자가 단발의 비명 뒤로 넘어졌다. 아스팔트 바닥에 머리가 박힌 채 정신을 못 차리던 남자는 나를 안고 웅크리는 누군가를 향해 이내 발길질을 퍼부었다. 괜찮아. 괜찮아. 실밥 터진 운동화가 짓누르는 교복의 주인공이, 신음을 흘리며 거친 발길질을 견디는 사람이 권순영이라는 걸 알아차렸을 때, 움츠렸던 몸을 일으켜 남자를 덮쳤다. 거뭇한 목을 두 손에 쥐고 힘껏 눌러 내렸다. 죽어! 죽어! 개새끼야 죽으라고! 골목 끝 경찰차와 앰뷸런스의 빨간 불빛이 골목으로 흘렀다. 모두가 날 주시했다. 경멸인가. 비참한 동정인가. 다수 사이에 섞인 앳된 소녀에게 묻는다. 저기요, 내가 괴물이 됐나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얼룩덜룩한 발등을 가진 아이가 눈물을 흘린다. 나는 왜 저기에. 그러지 마. 가지 마.

아득한 시야가 번쩍, 빛을 따라 눈을 감는다. 또다시 반복되는 이 모든 것이 차라리 꿈이었으면. 아스팔트 바닥이 젖어 드는 이유가 소나기가 아닌 차라리 내 눈물이었으면. 정말 모든 게 꿈이었으면. 그렇다면.










07.

사후세계치고는 밝았다. 천장에 매달린 달걀귀신 같은 권순영이 허연 손바닥을 휘적거리며 여태 본 가장 큰 눈으로 소리쳤다. 의사! 의사! 한바탕 구른 더러운 교복까지 달고 저승을 떠도는 권순영이 퍽 불쌍했다. 저승에 의사가 어딨나 이 사람아. 우수수 쏟아지는 졸음을 참은 눈이 방방 뛰는 권순영을 바라본다. 한데, 의사를 찾아 문을 나서는 사람은 권순영의 엄마 아빠다. 아, 저승이 아니구나. 결국은 살았어. 하지만 아빠는? 아빠는 없지? 순영아, 너만 있는 거지?

그 사람 깜빵 갔어.

요즘은 콩밥도 못 먹어. 비싸서.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호흡기에 의지한 채 눈물을 삼켰다. 더러운 교복 그대로 옆자리에 털썩 앉은 권순영이 흐리멍텅한 내 눈을 가리킨다. 말은 안 해도 되니까 눈만 깜빡여. 긍정은 한 번. 부정은 두 번. 어, 일단 지금 너무 아파서 죽을 것 같다. 의사 안 오면 차라리 혀 깨물고 죽겠다. 아, 그 정도는 아니야? 그래? 그럼 다행이고. 어, 아까 그 새끼, 아니 그 남자 어떻게 만났는지 기억난다. 어? 그건 기억 안 나? 그럼 맞은 기억은? 그것도? 어디서 그랬는…… 어…… 그러면…….

나는 누구게.

아니지, 그럼 대답을 못 하네.

내가 누군지 알아? 기억나?

권순영은 바보 새끼다. 천하의 재수 없는 이름을 어떻게 잊을까. 긍정은 한 번, 부정은 두 번이라 했으니 답답해 뒤져라 두 번 깜빡였다. 야, 이건 아니지. 진짜 아니지. 야. 의자에서 일어나 병실 문까지 닫아버린 권순영이 손을 잡는다. 허탈한 눈빛. 장난이 조금 심했다. 깜빡. 한번. 지금 한번 했는데.

네가 날 기억 못 하면 어떡해. 야. 아니지. 거짓말이지. 야. 내가 널. 네가 나한테 뭔데. 존나 가기 싫은 학교 나갈 때 누구 보려고 갔는데. 시합 나가면 안 보는 척하면서 다시 보기 하잖아 너. 지는 경기 보여주기 싫어서 내가 얼마나. 야. 좋아하는데 다 잊어버리면 어떡해. 좋아하는데. 좋아서 죽을 것 같은데. 좋아한다고 말도. 내가 너를.

병실 문을 박차고 달려온 의사 두 명과 간호사들이 베드를 둘러 조명등을 켰다. 뇌진탕. 골절. 의학 드라마에서 들어본 병명들이 병실을 떠돌았다. 두개골이 박살 난 것과 같이 아프고 갈비뼈 서너 개가 나간 듯한 고통. 그럼에도 나는 미친년처럼 실실거렸다. 호흡기 안으로 빠르게 차는 입김에 그들의 손이 바빠진다.

권순영 바보 새끼.

넌 존나게 바보 새끼다.










08.

정말 어쩔 뻔했니. 합숙 버스 타러 터미널에 갔는데 비가 그칠 생각을 안 해서 순영이가 많이 걱정했다더라. 연락을 할까 말까 하다가 학교를 찾아갔대. 그런데 네가 전화도 안 받고 눈에도 보이지 않으니까 주변을 돌았는데……. 정말 터미널이랑 가까워서 망정이지, 순영이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니. 정말 어쩔 뻔했어. 엄마는 아직도 가슴이 떨려서…….

방에 누워 종일 비가 내릴 창밖을 쳐다봤다. 매년 오는 봄잠바도 아니고 봄장마가 온다는 권순영의 말이 의아하긴 했지만, 고온에 다다른 전기장판에 몸을 녹이며 비를 기다렸다. 아, 비를 기다릴 수 있다는 건 빗속에서 나를 지켜줄 누군가가 있다는 뜻이다. 딱딱한 목침을 좋아하는 권순영은 머리와 종아리에 목침 두 개를 껴 놓고 이불을 덮었다. 일인용 장판은 너무하네. 나도 추운 거 아는데. 여름에 태어나서 완전 추위 잘 타잖아. 어우 씨, 수족냉증 도진다. 그러더니 장판 안으로 수욱 손을 넣었다. 네 자리는 소파야. 누가 내려 오래. 부모님의 여행을 핑계로, 여름에 태어나 추위를 잘 탄다는 핑계로, 봄에 내리는 소나기가 자신이 복장 불량을 잡을 때의 시선처럼 (본인 말로는 호랑이의 시선이라고) 매섭다는 핑계로 옆에 누워 몸을 치댔다.

— 달라붙지 마.

 추워어.

— 그만 와.

 춥다고.

일주일이 지난 지금, 권순영은 태평하게 TV 홈쇼핑에 눈을 돌려 두통에 좋은 애드빌 한 박스를 놓고 고민했다. 네가 맨날 머리 아프다고 지랄하니까 쟁여 놓고 먹으면 좋지 않겠냐. 아프다고 앵앵대는 사람도 없고. 권순영은 내 쪽으로 몸을 돌려 한 손은 머리를 지탱하고 나머지 한 손으로 리모컨 주문 버튼을 눌렀다. 뭘 그렇게 빤히 봐. 약 사는 사람 첨 보냐. 한참 동안 말 없는 내게 눈길을 틀었다. 검은 대가리들에게 이목구비 중 눈이 가장 예쁘다 정평이 나 있는데 모로 보나 역시 내 취향은 아니다. 굳이 말하면 콧대 정도.

— 비 온다는 거 구라지?

 뭔 소리야. 온다고 했어.

— 일주일 예보에 먹구름도 없는데 대체 언제 온다는 거야?

 좀 있다가.

— 그러니까 언제?

 뭐, 한 두세 시쯤 오겠지.

— 구라뽕을 정도껏 쳐도 유분수죠.

 그럼 오늘 말고 내일 오든지.

봄장마라더니 알면서도 속은 내가 천치였다. TV를 끄고 커튼을 친 권순영은 다시 옆에 누워 이불을 덮었다. 조용하고 좋네. 잠도 오고. 그러더니 색색 숨을 고르며 잘도 잔다. 코골이는 어렸을 적부터 고치지 못한 불운의 습관인지라 진즉 포기했다. 반대편으로 돌아누워 얼굴 끝까지 이불을 덮고 숨을 고른다. 일정한 숨소리만 들리던 동굴은 금세 권순영의 영역이 됐다.

어렸을 때 길을 잃어버렸는데 그때가 장마였어

비는 계속 오지 엄마 아빠는 안 보이지

지나가는 사람마다 미아 팔찌 보여주면서 도와 달라고 그랬는데

아무도

정말 아무도 없었어

사람들이 다 괴물 같더라

엄마 아빠 없이 그냥 비를 맞는 건데

그게 다 가시 같아서 아프고

차라리 제일 싫어하는 주사 열 번 맞고 싶을 정도로 싫었고

나도 비 무서워

그래서 혼자 못 자

너무 춥거든

토독. 토독. 기적처럼 비가 내렸다. 권순영의 핑계가 되어줄 비가. 일인용 전기장판을 반절이나 차지한 권순영은 돌아누워 등을 맞댔다. 어린 시절 서로 비밀을 숨기고 온기를 나누던 그때와 같아서 나도 모르게 안아버렸다. 부대끼는 것을 싫어하는 권순영의 앙상한 날개뼈가 느린 운동을 했다. 빠져나오기는 싫고 가만히 있으면 주체할 수 없는 그 날개뼈가.

넌 잊고 싶은 기억 있었냐.

죽을 만큼 잊고 싶은 기억 같은 거.

거기에 나도 있나.

아주 오래되고 이끼 쌓인 기억 장치를 꺼내 가만히 들여다본다. 권순영으로부터 죽을 만큼 잊고 싶은 기억이라. 생일 케이크를 주인 대신 홀라당 먹어 치우던 열두 살의 권순영, 어느 남자애가 준 고백 편지를 뺏어 실내화 가방에 숨기던 열네 살의 권순영, 같은 집 다른 성씨를 놀리던 고약한 아이를 쥐어패던 열다섯의 권순영, 자퇴서를 내고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마주친 척 아이스크림을 억지로 욱여넣던 열여섯의 권순영, 검정고시 당일 지원자보다 과다 섭취한 초콜릿 때문에 치과에 실려 간 열일곱의 권순영, 이상한 소문에 주동자를 찾아 학교를 들쑤시던 열여덟의 권순영.

그냥 내 말 무시해.

그리고 빙빙 돌려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열아홉의 권순영.

다시 내게 묻는다. 권순영으로부터 죽을 만큼 잊고 싶은 기억이 있는지. 얼굴을 마주한 권순영의 눈에 진한 입맞춤과 입술에 키스를 퍼붓는다. 사실 나도 가끔 네 눈이 예쁘다고 생각해. 그 가끔은 네가 나를 볼 때. 진득한 타액과 혀가 뒤섞여 올라탄 몸을 끌어안고 그동안 누르고 짓밟은 그 어떤 감정을 있는 그대로 분출했다.

그래도 없다. 잊고 싶은 기억이 없다. 권순영과 관련된 모든 순간은 자연적 소멸에도 고의적 기억 상실과도 무관했다. 권순영의 수천 마리 해마 새끼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내 안에 있었다. 의식이 닿지 않는 그 어디까지에도 권순영은 있었다.

같이 살자.

올해가 지나면 위탁은 종료된다. 권순영은 그걸 잘 알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온 발칙한 손이 허리를 풀어 긴장을 늦춘다. 입술로 끊임없이 들어오는 그것을 밀어내지도 막아내지도 않았다. 그럴수록 권순영의 몸짓은 애가 탔다.

같이 살자. 그러자, 우리.

불행은 불행의 씨를 낳는다. 어느 미친 심리학자의 정의는 믿지 않아도 그가 아무렇게나 갈겨 놓은 머리말은 절대적으로 믿었다. 자의적, 타의적으로도 지울 수 없는 불행의 기억은 벽에 그을린 주문과 같아서 평생 씻어낼 수 없는 죄악과 같은 거라고. 남을 망치기 가장 쉬운 사람은 이런 기억 속에 사는 사람. 나는 권순영을 망치기 싫고. 그래서 나는.













버거운 소나기가 그쳤다.

떠나야 할 핑계가 되어 줄 그 비가.













+

고객님이 전화를 받지 않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 삐 소리가 난 후에는 통화료가 부과됩니다.

야, 오랜만이다.

나 순영인데 그냥 어떻게 지내나 해서.

예전에 네가 말한 A대 특기자 전형, 그거 내가 잡았다.

확실히 네가 말한 명문대라 학식은 맛있더라.

합숙 밥이랑 비교 자체가 안돼.

너 아직도 다 불은 라면 먹냐.

물 조절 알려줘도 까막눈같이 쏟아부었잖아.

야, 넌 대학 갔어?

여기 정신 나간 애들밖에 없어서 이상해.

우리 학교 다닐 때 매점에서 맨날 메로나 갖고 싸우던 애들 기억나?

이지훈이랑 부승관. 걔네들도 A대 왔어. 아, 이지훈 여자친구도.

네 안부 묻던데 나도 몰라서 그냥 말 안 했어.

야, 시합 경기 있으면 너 오냐?

찾은 건 아니고 그냥 안 보여서 궁금해가지고.

근데 이거 자동응답기 확인은 하는 거지? 번호 안 바꿨지?













……엄마가 보고 싶대.

또 연락할게. 잘 지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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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회원148.191
선생님 ,, 여주가 너모 안쓰럽네요 ㅠㅠ 우째쓰까리 ,,, 여운이 너무 대박적이고요 두 번 읽었는데 읽을수록 더 대박입니다 선샌님 ,,,
5년 전
비회원112.212
작가님은 왜 이렇게 단편을 잘써요? 작가님 글은 사람 마음을 너무 후벼 파요 마음이 너무 아프고 그런데 너무 설레고.. 감사해요 좋은 글 써주셔서ㅎㅎ
5년 전
독자1
아 이번 단편은 여러모로 마음이 아프네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여주 너무 불쌍하고.... 너무 아픈 기억이어서 쉽사리 잊을 수도 없는 그 고통스러운 마음이 저한테까지 와닿았어요 그와중에 남들과 달리 세상 맑은 눈으로 여주를 봐준 순영이는 역시 설레네요 ㅠㅠㅠㅠㅠㅠㅠ 츤데레끼가 다분... 오늘도 너무 잘 보고 가요 어느새 작가님 글만 기다리고 있어요 좋은 글 항상 감사해요 (하트)
5년 전
독자2
와 진짜 글 너무 대박인 것 같아요.... 읽으면서 계속 감탄했어요.. 여주 너무 마음이 아파요 안쓰럽고ㅠㅠㅠ
5년 전
독자3
작가님 진짜 필력 대박이에요.... 정말 책 소설 읽는 것 같아요 여주가 너무 안쓰럽네요.. 글 너무 잘 읽었어요!!!!!!❤️
5년 전
독자4
와..진짜 몰입해서 봤어요 엔딩까지 아련하게 대박이에요ㅠㅠㅠㅠㅠ 지금 제가 다 막 맞아서 몸이 쑤시는 것 같구 .. 처음엔 이 사이가 어떻게 이어지려나 했는데 이미 서로 마음이 통하고 있었네요ㅠㅠㅠ 너무 잘 읽었습니다 작가님 !!!
5년 전
독자5
와 자까님 필력 와 대박이에요 ㅜㅜㅜ 아 ㅜㅜ 와 저 ㅜㅜ 와 ㅜㅜ 그냥 말이 안 나와요 읽으면서 그냥 와하고 아ㅣ ㅜㅜㅜ진짜 마음 찢어져요 마지막 그 통화하는 거 와ㅜㅜ 아니 ㅜㅜㅜ너무 잘읽었어요 작가님 ㅜㅜㅜ 진짜 ㅜㅜㅜ 아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 사랑해요ㅜㅜㅜ
5년 전
독자6
아 작가님 저 진짜 울어요,,,,,
5년 전
독자7
ㅠㅠㅠㅠㅠ작ㅠㅠㅠ가ㅠㅠㅠ님ㅠㅠㅠ 저 울어요ㅠㅠㅠ 어떡해요 진짜 순영이도 여주도 너무 안쓰럽고ㅠㅠㅠ 또 안타깝고...... 몇 번을 돌려읽었는지 모르겠어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ㅜㅜ
5년 전
비회원10.69
작가님... 어떻게 글을 이렇게 잘 쓰세요..? 게다가 여운이ㅠㅠㅠㅠㅠㅠㅠ
5년 전
비회원12.159
작가님 책임지세요...작가님 때문에 심장이 아파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5년 전
독자8
선생님 이번 작품 진짜너무 마음 아픈데 마지막 순영이 전화보고 진짜 눈물 한 방울 찔끔..... 늘 이렇게 좋은 작품 써주셔서 감사해요
5년 전
독자9
이지훈...부승관....이지훈 여자친구.........................쟉가님 은근히 언급해주시는거에 다시 눈물버튼이 눌리고............아아아...장편도 단편도 작가님 호흡에 맞춰 읽는 글들이 다 너무 좋아요 저는 작가님 글이 너무 좋아요 ..... .......아니..........그냥...그냥....ㅜㅜㅜㅠㅠㅜㅜㅜㅜㅜㅜㅜㅜ아 ㅜㅜㅜㅠ비 싫어ㅜㅜㅜ ㅜ ㅜㅜ ㅜㅜㅜㅜ작가님 행복하세요ㅜㅜ ㅜ ㅜ ㅜㅜㅜㅜ
5년 전
독자10
너무 잘 보고 있는데 글을 다 읽고난 후의 감정을 댓글로 쓰질 못하겠어요,, 그냥 작가님 글 읽으면 자알 기다렸다! 라는 생각뿐이고, 하루종일 다시 생각하게 돼요,, 암튼 감사하다구요 작가님,,
5년 전
독자11
대박이에요 작가님 표현력 대단하신것 같아요 진짜 보면서 숨도 못쉬고 몰입해서 봤어요 문장 하나하나가 다 너무 설레고 아프고 슬프고 읽으면서 슉슉 들어오는 감정이 너무 좋았습니다 사랑합니다ㅠㅜㅜㅜㅠㅠㅜㅠㅠ
5년 전
독자12
이지훈 부승관 이지훈 여친 A대...(이스터에그?에 새삼 놀라고 갑니다) 역시 오늘도 글 넘 재미써요 사랑해요 작까님
5년 전
독자13
미쳤다 ,,,, 필력 무슨일이예요 진짜 몰입감 증말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해피엔딩 일 줄 알았는데 ,, 마지막에 넘무 슬프고 아련하고 그르네여 엉엉 그와중에 권순영 츤데레 성격 취저라서 좋았어요 ㅠㅠ
5년 전
독자14
자까님..저 청아예요ㅠㅠ 다시 오실거죠오..? 지금 전 글들 다 정주행중입니다아...자까님 오실거라구 믿어요ㅠㅠ
5년 전
독자15
작가님,, ,, , , 보고싶어요,,, , , ,((1호 처돌이 도제))
5년 전
독자16
작가님 진짜 대박 권순영 사랑해 알라뷰ㅠㅠㅠㅠㅠㅠㅠㅠ
4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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