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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여름ll조회 1566l 6
* 센티넬버스 세계관 기반 글입니다. 폭력성 있을 수 있고 약간의 수위와 욕설 난무합니다. 취향 안 맞으신 분들은 뒤로 가기 눌러주세요. *















[씨발데레]
: 단순히 미친놈이 아니었다. 다정한 개새끼였다.










“미쳤지?”

“아니요.”

“무전기를 내팽개쳐? 아주 죽을 날만 기다리며 고사지내지?”

“아니요.”

“야!”

“왜요.”

“아니라고만 하지 말고 뭐라도 말을 해!”





작전은 성공적으로 끝마쳤다. 박우진의 활약이 대단했다는 말이 떠도는 것으로 보아, 결국 그 새끼가 끝마무리를 나쁘지 않게 한 듯싶었다. 나는 그게 죽도록 신경질이 나서 병원으로 옮겨지는 와중에도 이를 박박 갈았고, 치료가 끝나자마자 울린 호출로 하성운 방에 옮겨온 뒤로도 눈을 시퍼렇게 떴다.





“우진이 아니었으면 너 거기서 진짜 폭주했어. 알긴 해?”

“...재수 없는 새끼.”

“악 김여주! 사람 말에 반응을 좀 하라고!”

“반응하고 있잖아요. 박우진 재수 없다고.”

“그게 반응이냐? 그게 반응이야?”

“그럼 더 무슨 말을 해요. 뭐, 고맙다고 하기라도 해야 하나? 그 새끼가 이제 잘난 척 오지게 할 생각에 잠도 못 자겠는데?”

“...아. 아, 내가 너랑 무슨 말을 더 해. 머리 아파.”





하성운은 주로 나를 혼낸다기보다 그러지 말라고 어르는 느낌을 주곤 했는데, 이렇게 곧장 호출을 하고 부른 뒤에도 내 잘못만 나열하는 것을 들으니 더 짜증이 났다. 물론 이건 고쳐먹지 못할 내 성깔이 더러워서 그런 것이기도 하지만 역시 박우진에게 좋은 일만 시켰다는 분노가 더 컸다. 발끝으로 툭툭, 바닥을 치던 것을 멈췄다. 그래도 나름 반성하는 것처럼 보이겠다고 고개를 숙이고 존대도 꼬박꼬박 했는데 하나도 효과가 없었다. 대신 정말 머리가 아프다고 이마에 손을 얹고 두통약 어디 있냐며 화를 내려는 하성운만 보였다. 결국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딱 하나였다.





“저 이제 가도 되지?”

“...존댓말을 쓰던지 반말을 하던지 하나만 해라.”

“나 이제 나가도 되냐고.”

“어디 가려고.”

“가이딩 받으러.”

“지훈이 괴롭히지 마. 너 때문에 기력 다 뺏겼잖아.”

“가이드의 숙명이지.”

“한 마디도 안 지네. 너 정말, 원래 안 이랬는데.”

“원래?”

“아니다. 됐어. 가. 나가.”





내 과거인데도 저런 식으로 당사자에게 쉬쉬하려는 건 왜일까. 부러 말하지 않은 말 뒤로 숨겨진 것들이 조금 궁금해 나가지 않고 뜸을 들였다. 하지만 휘적휘적 팔을 흔들며 썩 꺼지라는 하성운을 가만히 보다보니 굳이 그 기억들을 상기하고 싶지 않은 건 내가 제일이라는 판단이 섰다. 과거에 얽매여봤자 우울해지기만 한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끝까지 지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지.”





그래서 군말 없이 입을 다물었다. 소리 내지 않고 방을 나왔다. 말한 대로 박지훈을 찾아가기 위함이었다. 치료 다 받으면 자기한테 오라고 했던 말을 충성스럽게도 지키려 했으니 말이다.





“...나한테 한 소리야?”

“여기 너 말고 누가 있냐?”





안 그래도 보이면 멱살부터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왜 하필 그 상황에서 네가 나타난 거냐고. 수많이 센티넬들 중에 후방에 있어야 할, 싸움도 못 하는 게 어째서 내 앞을 가로막고 선거냐고. 그랬는데 이렇게 먼저 나서준다면, 내가 빡치지 안 빡치나. 언제부터 듣고 서있었는지 살짝 열려있던 하성운 방 건너에서 감정 없이 기대어있던 박우진을 돌아봤다. 내 눈을 피하지 않는 박우진에게 살기가 느껴지길 바랐다. 고작 한 대 치는 걸로 모자라는 마음이었으니 감정 읽는 그 잘난 능력으로 내가 얼마나 빡 돌 것 같은지 라도 눈치를 챘으면 했다.





“뒤지는 게 목표야?”

“뭔 소리야. 너 죽이기 전에는 절대 안 죽을 건데.”

“근데 왜 무전기를 내팽개쳐. 미쳤어?”





무언가 딱 끊기는 기분이 들었다. 이미 하성운한테 미쳤나는 소리를 한 바가지로 얻어먹고 나왔다. 표현은 달랐지만, 박지훈도 오는 길 내내 비슷하게 내게 꾸중을 했다. 나 안 미쳤는데. 그 때는 그게 더 나을 거라는 판단 때문이었는데. 걱정에서 비롯된 말들임을 알아서 대꾸 없이 입을 다문 탓에 불완전하던 신경이 긁혔다. 그리고 박우진은 불을 지폈다. 그저 내 탓이라고 하는 이들 가운데 주제도 모르고 나한테 훈계질을 하려는 박우진은 특히 더, 가히 어이가 없었다.





“와. 존나 웃기는 새끼다.”

“...말 곱게 해라.”

“내가 뒤지고 싶으면 어떻고 미쳤으면 어쩔 건데?”

“야.”

“네가 무슨 상관이라고 지랄이야, 지랄이.”





애증, 남들은 흔히 그런 시시하고 단정한 단어로 나와 박우진의 관계를 정의하곤 했다. 온갖 난리를 치면서도 기어코 끝에서는 같은 편에 서있었고, 욕을 하고 싸움을 걸긴 해도 결국에는 타의에 의해서든 자의에 의해서든 죽지는 않았으니 가장 적절하다 생각한 것이다.





“너 지금 내 감정 읽히지?”





그럼 그에 대한 당사자 생각? 박우진은 몰라도 내가 두고두고 후회하는 건, 그 말을 나서서 정정하지 않았다는 거다. 언제 죽여도 죽였어야 했다. 아무리 괄괄 거려도 꼴에 같은 팀원이라고 극단으로 치닫지는 않았던 과거가 원망스러웠다. 나한테 네 존재가 아무 것도 아님을, 지나가는 벌레만도 못함을 정확하게 읊어주는 게 맞았다.





“나 너 싫어. 증오해. 왜 같은 팀인지도 모르겠고, 어째서 하필 내 앞에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





내가 생각하는 게, 본인에게 느끼는 감정이 어떤 것이지 뇌리에 박혀 기어 나오지도 못하도록 눈도 깜빡이지 않고 마주했다. 박우진은, 글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는 얼굴로 내가 토해내는 감정을 묵묵하게 받아먹었던 것 같다. 그렇게 사납게 내 말을 끊고 대담할 때는 언제고 무언가에 충격을 받은 것 같기도 했지만, 늘 말한다. 알 게 뭐야. 쟤 감정 따위.





“아. 너도 뭐 내가 기억을 잃기 전에는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 헛소리로 지금 한 말에 죄책감 느끼길 바라는 건 꿈도 꾸지 마. 심한 말 했다는 같잖은 소리도 하지 말고. 나 진심이거든.”
“......”
“그 때가 어쨌든 그 과거는 내 꺼 아니야. 지금이 내 기억이고, 감정이지.”





이어진 말은 박우진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 나한테 하는 말이었다. 기억을 잃기 전 내 모습과 현재가 많이 다르다는 눈초리를 받은 게 한 두 번이 아니라서, 하성운이 했던 말과 더불어 어쩐지 익숙하게 보이는 저 표정이 소름끼쳐서 털어내는 말. 조금의 가능성도 남겨두기 싫어서 만약, 혹시 따위로 시작되는 가정을 못 박아버리는 그런 말.





”그러니까, 제발 좆같이 좀 굴지 마. 나는 너를 찢어죽이고 싶어서 볼 때마다 짜증나.”





누군가 이 말들을 듣는다면 주저앉아 울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하는 모든 말들이, 지금 느끼는 순간순간 감정들이 박우진이 아닌 타인에게 겨냥된 거라면 상대는 분명 큰 상처를 받음에 확신했다. 다시 돌이켜봐도 모진 마음이 아닐 수 없었으니까.





“박지훈 앞에도 나타나지 말고. 걔, 차라리 내가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너한테는 안 뺏겨.”





박우진이 그제야 눈을 질끈, 감았다. 스스로도 독하다 혀를 내두르는 말을 쉬지 않고 하는 와중에도 내 감정을 샅샅이 읽어내던 박우진이었다. 그게 정말 무서워서, 사실 미친 건 너냐고 물어볼 정도로 뒷골이 서늘했다. 그런데 무심코 등장한 박지훈 이름 하나에 내 시선을 피했다. 조금 이상한 일이었다.





“...맞다.”

“뭐?”

“너 기억상실이었지.”





물론 그 뒷말이 가장 이상했다. 우르르 쏟아지는 말들을 잠자코 받아낸 것도 모자라, 짜증 분노 살의와 같은 온갖 혐오감이 다 포함된 얼굴로 쏘아봤는데도 담담하던 애가 한다는 말이 고작. 고작 맞다, 너 기억상실이었지.





“......”





감정을 지탱하던 모든 표정이 사라졌다. 이젠 열이 받는다기보다 뭐하자는 건지 허탈함이 번져왔다. 여전히 내 눈을 피해 눈을 감고 있는 박우진을 훑어냈다. 그래도 더는 눈을 뜨지 않고, 숨은 쉬는가 싶도록 가만히 있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발칵 문을 열고나온 하성운이 박우진을 끌고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박우진은 그 흔한 욕설 하나 하지 않았다.





“...사이코패스야 뭐야.”





찝찝했다. 하고 싶은 말을 몇 배로 더 얹어서 했다. 통쾌할 만큼 잔인한 말들만 골라서 집어던졌다. 그럼에도 박우진은 반응이 없었고, 오히려 박우진을 데려가던 하성운이 살짝 눈물이 고인 눈으로 나를 힐긋거렸다. 백 번 양보해도 우리 대화를, 일방적인 내 증오를 들었다는 건데 그렇게 볼 거면 나를 말리러 나오던가. 그것도 안 했으면서 왜 그딴 식으로 보고 들어가. 어느새 닫힌 하성운 방문을 노려봤다. 너머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 조금도 들리지 않았다. 잘근잘근 혀를 씹으며 열릴 생각을 않는 굳은 문 앞에 꽤 오래 서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는데도 상쾌하지 않았다. 꼭 나만 모르는 뭔가를 가지고 사람 하나 병신 만드는 것만 같았다. 기분이, 더러웠다.










[씨발데레]
: 단순히 미친놈이 아니었다. 다정한 개새끼였다.










“어, 여주야. 왔어?”

“지훈아.”

“잠깐만. 이것만 하고.”

“안아줘.”





기분이 나쁘거나 우울해질 때면 언제나 무리해서 전쟁에 나가는 게 습관이었다. 근 2년 동안 생긴. 위에서 안 된다고 해도 최소한의 가이딩과 치료만 받고 곧장 다음 전쟁터로 향했다. 아무 생각을 하지 않으려면 능력을 쓰고 피를 흘리는 게 가장 적합한 몸이기 때문이었다.





“...너 무슨 일 있어? 많이 혼났어?”

“아니.”

“근데 갑자기 왜?”

“센티넬이 전담 가이드한테 안아달라고 하는 게 잘못 됐어?”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내가 기억하는 4년 동안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다른 것을 해도 자꾸 빌어먹을 새끼가 잔상처럼 찾아오고 아무 것도 아닌 말에 무의식적으로 의미부여를 하게 된다면, 아무리 몸을 혹사시켜도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리는 건 불가능했다. 아예 다른 것으로 지우는 게 마땅했다.





“편하게 자고 싶어.”

“......”

“그냥 안아줘, 지훈아.”





신경이 쓰였다. 단 한 번도 나를 화나지 않게 한 적 없던 새끼가, 솔직히 신경 쓰였다. 왜 하성운이 그런 표정이었는지. 어째서 박우진이 그런 헛소리를 한 건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어서 더 지워지지 않았다.





“...1분이면 끝나.”





그래서 감정이 정리되기도 전에 박지훈을 찾아왔고, 원래 오기로 했던 것보다 훨씬 늦었음에도 별다른 말이 없던 박지훈은 제가 하고 있던 것을 멈추고 물끄러미 나를 봤다. 가볍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리고 정확히 1분 후에는 꼿꼿하게 내 옆자리에서 제 팔로 내 어깨를 감쌌다.





“가자.”





가타부타 말도 없는 걸음이 이어졌다. 안아달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무리 전담이라고는 해도 위기 상황도 아닌데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런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박우진처럼 감정을 읽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박지훈이 무슨 생각으로 제 숙소까지 나를 데려왔는지는 몰라도, 최소한 나는 정말 박우진을 덮어버리고도 남을 다른 것이 필요했다. 절실하게.





“하나만 물어볼게.”

“응.”

“안아달라는 게 각인이야, 아니야.”





제 숙소의 문을 열기 전에 박지훈은 꽤 진지한 얼굴로 물어봤다. 충분히 이중적인 의미로 들릴 수 있었던 내 대사에 대한 확신을 얻고자 했다.





“대답을 해줘야 원하는 걸 해주지.”





박지훈을 똑바로 쳐다봤다. 박우진을 봤던 것과 확연히 달랐다. 느낌도, 감정도. 박우진이 악을 쓰고 봐서 힘겨웠다면 박지훈은 닿은 손끝에서부터 느껴지는 따뜻함이 편했다. 생긴 것도 달랐다. 박우진은 시종일관 무표정하게 나를 관찰하는 것 마냥 시비를 걸어서 인상이 사나웠다면 박지훈은 기본으로 깔고 들어가는 눈웃음이 존재했다. 충분히 예쁜데 어떤 표정을 지어야 더 사랑을 받는지 알았다. 온화하고 조화로웠다. 목소리는 또 어떤가. 박우진이 지독하게 낮다면, 박지훈은. 아 시발.





“...짜증나.”

“어?”

“나 처음인데 괜찮지?”

“여주야.”

“내 가이드를 누가 좀 족족 뺏어가서 각인은 아직 한 번도 못 했어.”

“......”

“그래도 상관없으면 하자. 각인.”





뭘 생각해도 마지막에는 그 자식이 이어졌다. 불쾌하고 불결했다. 내 것을 다 가져갔고, 나를 이토록 날뛰게 만든 새끼가 자꾸만 자극제가 되었다. 애초에 나도 모르게 박지훈을 그 새끼에게 비교하고 있다는 것부터가 거슬렸다.





"후회 안 해?"

"그건 내가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야?"





재밌는 일이었다. 후회 안 하겠냐고, 가이드가 센티넬에게 물었다. 각인이 되는 쪽은 가이드, 각인을 새기는 쪽은 센티넬. 어떻게 봐도 그 질문은 센티넬인 내가 하는 게 맞았다. 나에게 각인되면 박지훈 너는 아무에게나 최상급 가이드를 못 하게 될 테니까. 오직 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SS급 가이드가 될 테니까.





"그런가. 그럼 물어봐."

"후회 안 해? 나한테 각인 되는 거?"





방문이 열렸고, 생긴 대로 화사할 줄로만 알았던 내부가 퍽 칙칙한 색으로 뒤덮인 것을 봤다. 동시에 박지훈이 생글 웃었다.





"후회 안 해. 나는 첫 번째로 전담 된 센티넬이랑 백년해로하기로 했어."





장난스러운 말투. 그것과는 장르가 다른 감촉. 뒤로 손을 뻗은 박지훈이 달칵, 숙소 문을 잠갔다. 박지훈은 돌연 힘주어, 하지만 아프지 않게 등허리를 감싸 쥐었다. 안 씻어도 돼? 작은 숨소리가 먹혀들었다. 더 이상의 말은 허용되지 않았다.





"딴 짓 하지 말고 나 봐."

"...하, 야. 천천히 좀 하자."

"안 돼. 먹으면서 노는 거 아니야."





밤이 길었고, 박지훈은 아름다웠다. 박우진에게 뺏기지 않은 유일한, 나의 첫 각인이었다.










[씨발데레]
: 단순히 미친놈이 아니었다. 다정한 개새끼였다.










"...너 요즘 뭐하고 다녀."





황민현은 정기적으로 참 귀찮은 타입이었다. 싫다고 해도 찾아와서 검진을 하고, 됐다고 해도 굳이 훈련 상태를 여러 번 확인하고, 하다못해 6시간에 한 번씩 꼬박꼬박 내 기준 수치를 검사했다. 남들보다 오차가 많아서 제 딴에는 어쩔 수 없다는데 그 남들이 보기에는 진정 과잉보호가 아닐 수 없었다.





"뭐하긴. 먹고 싸고 훈련하고."

"......"

"...틈틈이 잠도 자지."





황민현 표정이 저토록 썩어가는 건 또 오랜만이었다. 잠을 잔다는 말에 미묘하게 굳던 황민현의 입매가 파르르, 경기를 일으켰다. 영 틀린 말이 아니었다. 열심히 박지훈이 해주는 가이딩 먹으면서 능력 토해내고, 열심히 박지훈과 함께 훈련을 하며 중간 중간 잠도 잤다. 생략된 말은 많았지만 어쨌든 그랬다. 모든 일상에 박지훈이 낀 것만 제한다면 이전과 별로 달라진 건 없었다.





"누구야."

"뭐."

"아까부터 뒤에서 너만 빤히 보는 쟤야?"





황민현이 그라이데이션 분노하는 것을 보는 대신 뒤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있던 박지훈을 거울로 짧게 쫓았다. 계속 내 훈련을 보고 있어 딱 마주친 눈이 반달처럼 휘어졌다. 나도 마주 웃어주고 다시 황민현에게 반응했다.





"아 뭐래."

"너랑 각인한 거 박지훈이냐고 묻잖아!"





깜짝이야. 왜 승질을 부려 이 인간은. 너무 목청껏 고함을 쳐서 어깨 운동을 위해 들고 있던 아령을 떨어트렸다. 발가락 맞을 뻔 했어. 황민현 왜 또 호들갑이야. 발을 쿵쿵 구르기까지 하는 황민현을 무섭게 훑어 내리며 욕을, 차마 얼굴에 대놓고는 못 할 욕을 속으로 했다. 점점 하성운 성격을 닮아간다는 뻘한 생각은 덤이었고.





"내가 각인을 하든 말든 뭐가 문젠데."

"야, 김여주!"

"아니 설령 했다 하더라도, 내가 각인하면 더 좋은 거 아닌가? 수치가 안정화 되는데?"





황민현은 기가 찬 건지 맞는 말만 해서 황당한 건지 내 낭랑한 대꾸에 연신 한숨을 푹푹 쉬었다. 뭔가 말을 하려다가도 자꾸만 입술을 질겅질겅 씹었다. 그러다 휙, 우아하게도 앉아있던 박지훈을 한참이나 째려봤다.





"내 가이드한테 눈치 주지 마."

"내가 눈치 안 주게 생겼어?"

"그게 대체 뭔 개똥같은 소리야. 지금 이 상황이 제일 이해가 안 가는 건 난데."





팀 닥터라면 근본적으로 팀원들의 기준 수치 안정화가 제일 우선이었다. 그래서 황민현은 언제나 하늘로 치솟아있는 수치를 가진 나 때문에 하루 24시간 예민했다. 남들은 가이딩 한 번이면 삼일은 안정적인데 나는 가이딩을 받으면서도 경고음이 울린 적이 있었으니 당연한 히스테리였다.





"내가 폭주를 덜 해야 팀에 도움 되는 거 아니야?"

"너, 진짜."

"왜. 내가 틀리게 말 한 거 있으면 제대로 반박해봐."





그러니까 황민현의 반응은 도무지 상식적으로는 헤아리기 어려웠다. 늘 불안정하던 팀 대장이, 그것도 SS급 센티넬이 가이드를 잘 만나서 각성도 한 번에 하고 적당히 낯짝 좋게 웃기만 하잖아. 이전처럼 성깔도 안 부리는데 좋아해야지 왜 화를 내? 가장 먼저 알아차렸으면 사방팔방 떠들고 다니면서 축제를 해도 모자랄 판에 어째서 확인 사살 후에는 아예 속상한 얼굴을 하는데? 앞뒤가 너무 안 맞는 거 아니야?





"...가이딩으로도 충분했잖아."





도끼눈을 뜨고 내가 납득할 수 있는 변명을 재촉하면, 나직하게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각인까지는 안 해도 괜찮았잖아. 쟤랑 상성 잘 맞는다며. 순간 내가 뭘 들은 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싶어 귀를 후볐다. 그럼 연타로 들려오는 중얼중얼. 너 대체 어쩌려고 각인을 해, 가이드랑. 완전히 회복되고도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던 오른 손 끝이 바들 떨렸다. 세상에. 진짜 가만히 있던 사람 또 빡치게 하네.





"정말 내가 괜찮아 보였어?"





헛헛한 숨을 몰아쉬었다. 조금만 더 자극되면 능력을 사용할 것 같았다. 이럴 수 있나 싶도록 황민현에게 깊은 배신감이 들었다.





"그동안 박우진한테 가이드 뺏기면서, 내가 얼마나."

"......"

"얼마나 좆같이 가이딩 받았는지 알고 하는 소리냐고."

"...그런 말 아니잖아."

"아니긴 뭐가 아니야. 사실 다들 알면서 쉬쉬했잖아."

"김여주."

"그 새끼가 내 가이드 있는 거 없는 거 다 뺏어갈 때 모르는 척 공식 서류에 전담 도장 찍어준 거 내가 몰라?"





따지고 보면 말이다. 말 나온 김에 하나하나 돌이켜보면, 황민현도 내 편은 아니었다. 팀 닥터로는 훌륭할지 몰라도 인간적으로는 결코 친해질 수 없었다. 기왕이면 오래 보고 싶어서, 관계 불편해지면 나만 열 받지 싶어 삭히고 있었지만 볼 때마다 발작 일으키게 하는 박우진과의 악연이 여기까지 이어져온 건 팀의 가장 윗대가리인 하성운과 황민현의 합작 방관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선명하다, 내가."

"......"

"걔가 가장 처음에 내 가이드 뺏어가면서 했던 말."





음절 하나하나로도 부족해 엇박으로 숨 쉬던 타이밍까지도 기억에 남았다. 얼마나 강렬했던지 그 말을 들었던 계단이 본관 통로였다는 것도, 하다못해 날씨가 얼마나 짜증나도록 화창했는지도 선명했다.



잘 지키고 있어, 니 장난감.



모든 혐오감의 시작이었던, 박우진이 내 가이드를 뺏으면서 했던 첫 말이었다. 자연스럽게 나에게 짝지어지곤 했던 가이드에게 각인을 하겠다고, 내 기억 상으로는 그 아이가 첫 가이드라서 꽤나 심혈을 기울였다. 그랬는데 언젠가부터 가이드 하나를 놓고 나랑 박우진이 싸운다는 뜬소문이 내 귀까지 들렸고, 좀 신경질이 났다. 센티넬 중 누군가 미리 점 찍어놓은 가이드는 뺐지 않는 게 공공연한 예의였다. 근데 무슨 소문이 이렇게 더러운가, 박우진이 진짜 그랬을까 의심도 했다.



너 진짜 내 가이드한테 관심 있어?



그러다 언제는 물었다. 그럼 박우진은 예의 그 묘한 낯으로 미동도 않고 나만 빤히 쳐다봤다. 내 눈에서 정말 그럴 리 없다는 초조함을 읽었던지, 끝내는 피식. 위협적이게도 웃었다.



야.
왜.
나 방금 니 가이드랑 키스하고 왔어.



내가 깨어난 후 박우진과의 접점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실상 대화도, 내가 기억하는 한, 정말 내 가이드에 대해 관심 여부를 묻는 게 처음이었다. 그 전까지는 해봤자 같은 팀이라서 고작 작전을 나갔을 때 주고받은 업무상의 왕래 몇 번, 혹은 재활 치료를 하며 훈련을 받을 때 물끄러미 나를 보던 시선이 묘하게 신경에 거슬려 눈이 마주친 게 몇 번. 고작 그런 관계였다. 동료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너 지금 뭐하는 짓이냐.
뭐하긴. 니가 따먹으려고 하는 가이드 맛보여준 건데.
그러니까 그걸 왜. 시발.



또라이도 그런 또라이가 없었다. 내 가이드와 키스를 했다며 덥석 내 입술을 물어뜯던 박우진은 개새끼 짓만 골라하려고 태어난 짐승과 다르지 않았다. 나는 온갖 신경질을 부리며 건조하게 욕을 했고, 박우진은 그 와중에도 내 눈을 똑바로 봤다. 아니, 야렸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내 아랫입술을 살짝 빨았다. 무심결에 손가락이 휘었고, 경악하며 놈에게 떨어지는 틈에 내가 날린 칼날은 박우진의 어깨를 제대로 스쳤다.



존나 미친 새끼 아냐.
그러니까.


익숙하게 어깨 위로 솟구치는 핏줄기는 신경도 쓰지 않던 박우진이 화룡점정을 찍었다.



그러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고.
뭐?
잘 지키고 있어, 니 장난감.



머리끝까지 분노가 차올라서 얼굴색이 질렸다. 발끝까지 싸하게 몸이 굳었다. 전쟁에 나가기 불과 2시간 전, 박우진은 내게 여유를 주지도 않고 제가 하고 싶은 대로 지랄을 했다. 조금 거슬린다가 전부였던 팀원이 세상 둘도 없는 시발 새끼로 낙인찍힌 최초의 시발점이었고, 두고두고 내 성격을 파탄 나게 했던 희대의 개새끼 등장이었다. 박우진은 기어코, 그 말을 한 지 24시간도 되지 않아 내 가이드를 가졌다. 나를 등지고 박우진에게 향하던 가이드를 옆에 끼고 보란 듯이 낄낄거렸다.





“분명히 경고할게.”





언제 생각해도 욕지기가 올라와 속이 울렁거리는 박우진의 말은, 몇 년이 지나도 가장 어두운 곳에서 질척거렸다. 잔뜩 꼬여서 내 감정을 옭아맨 채로 지치지도 않고 나를 괴롭혔다. 작게 심호흡을 하며 나를 망연히 보는 황민현을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시뻘건 핏줄이 손등에 생겼다. 능력을 쓰지 않으려고 악을 써서 나타난 부작용이었다.





“그 새끼 편들 거면, 어쭙잖게 걱정하는 척부터 그만둬.”

“걱정도 안 해? 나중에 어쩌려고.”

“환장하겠다. 나중에 뭐. 그리고 걱정은 오빠가 먼저 해야지.”

“뭐?”

“내가 빡 돌면, 가진 능력도 없는 오빠가 어떻게 나를 감당하려고 자꾸 선을 넘어?”

“...너 이러면 안 돼.”

“돼. 되니까 그 새끼한테 하는 것처럼 날뛰기 전에 알아서 몸 사려. 오빠 대접 해줄 때.”





황민현에게 관심을 끊어내고 냉하게 시선을 거둬내는 건,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착잡하게 나를 보는 황민현은 세상이 당장 내일 멸망한다고 해도 저만큼 창백한 얼굴색은 아닐 거였다. 아랫입술을 까득, 비린내가 가득하도록 깨물었다. 힘없이 쳐지는 황민현을 지켜보는 게 나라고 편하지만은 않았다. 나를 지키겠다고, 남에게 상처 내는 꼴이 썩 달가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나를 지키고 박지훈을 지킬 방법이 없었다. 설령 있다 해도, 나는 더 이상의 온화한 방법을 찾지 못 했다.





“...오늘 나 찾지 마. 지원 뛸 거니까.”





요 근래 주변 사람들에게 모진 말을 너무 많이 했다. 나중을 걱정하라는 황민현의 말에 순간적으로 발걸음을 멈춘 건 맞지만, 차라리 몸이 다치는 게 나을 정도의 비수를 팍팍 내리꽂았다. 두 번 다시는 안 볼 것처럼 쏘아붙였다. 그렇게 하면서까지 얻는 게 악몽임을 알면서도. 박우진에게 그런 말을 하고 사실은 견디지 못해 박지훈을 끌어안은 주제에, 또 한 번 황민현에게도 똑같은 짓을 저질렀다. 그게 나를 견디지 못 하게 했다.





“여주야.”

“따라오지 마.”

“김여주.”

“아무리 너라도 안 되는 게 있어. 현장 나가서 풀고 올게.”





박지훈이 내 뒤를 쫓았고, 나는 뒤를 돌아볼 자신도 없이 숨통부터 틀어막았다. 손가락 끝이 자꾸만 움찔거려서 고통스러웠다. 가이딩을 받은 것과는 별개로 기준 수치가 월등히 높아지고 있었다. 이런 경우에는 차라리 마음껏 능력을 사용해야 했다. 분노와 연관되어 올라가는 능력의 기준 수치는 누가 끌어안아서 보듬어준다고 가라앉을 만큼 자비롭지 않았다.





“...본부 상황실. 지금 당장 나갈 수 있는 작전이 어딥니까.”

“북쪽 지역으로 통하는 13번 게이트입니다. 바로 출발하시는 건가요.”

“네. 10분 내로 갑니다. 게이트 열어주세요.”





상황실로 바로 무전을 쳐서 출동을 한다고 해도 누구 하나 의문을 가지는 사람이 없었다. X팀 대장 김여주한테는 자주 있는 일이었다. 근데, 그 문장 하나로 반대 없는 상황이 정리가 되는데도 오늘따라 서운한 감정이 드는 건 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였을까. 나보다 박우진을 더 믿고 생각하는 것만 같은 황민현한테 속상해서? 자꾸만 독하게 살아가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 여기는 스스로가 환멸 나서? 그것도 아니면, 그 때 이후로 죽어버린 것만 같이 일주일가량 내 앞에 나타나지도 않은 박우진의 새까만 눈동자가 자꾸 뇌리에 박혀서?





“준비됐습니다. 바로 출동하시면 됩니다.”





게이트로 가는 길목에 훈련실에 들러 총과 칼만 양 허리에 둘러매며 대꾸했다. 확인. 금방이라도 바닥으로 뚫고 들어갈 것만 같은 목소리라 무전을 쳐주던 상황실 대원이 움찔 거린 것도 같았지만, 이내 이어진 목소리는 한결같이 똑같았다. 승보를 바랍니다, 이상.










[씨발데레]
: 단순히 미친놈이 아니었다. 다정한 개새끼였다.










“...그냥 뒤지는 게 편하겠다.”





이마 위로 흐르는 건 분명하게도 피였다. 시뻘건, 박우진 머리 색깔 같은 피.





“작전을 이렇게 개같이 짜놓고 예정된 지원이 원래는 없었다는 걸 말이라고 해?”

“죄송합니다. 인력이 부족해서.”

“나도 안 왔으면 어쩔 뻔 했는데. 다 자폭하려고? 사이좋게?”

“...죄송합니다.”

“네가 죄송할 건 없고, 팀 매니저한테 제대로 말해.”

“......”

“그 능력 안 되는 손으로 팀원들 갈아버리기 싫으면 머리 똑바로 굴리라고. 시발 무슨 일개 대장보다도 대가리가 안 돌아가면 어쩌자는 건데.”





우리 팀 외에는 딱히 마주칠 일이 없어서 센터 내에 얼마나 많은 팀이 있는지, 나 말고도 어떤 센티넬과 가이드가 있는지 크게 관심을 둔 적이 없었다. 다른 팀원을 만나는 건 이런 식으로 불현 듯 지원을 나올 때 말고는 없으니까. 이렇게 나왔다 하더라도 굳이 말을 섞거나 관계가 이어지는 경우가 감히 내게 있을 리가 만무했고.





“그래서 백업 팀은.”

“백업 팀은 지금 오고 있다고 합니다.”

“느려 터졌네. 거북이도 그거보다 낫겠다."

“...죄송합니다.”

“아 왜 자꾸 죄송하대. 너한테 사과 받으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니까요?”

“그래도.”

“됐으니까 가서 붕대나 좀 감던가. 옆구리 터진 거 보기 흉해.”





사상자가 많았다. 지난 번 우리 팀으로만 진행했던 작전보다 큰 규모의 전쟁이었는데도 무리해서 소수 인원으로만 조율을 한 덕분에 백업 팀도 지원 팀도 없이 시작했다고 들었다. 그러니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초토화된 후였다. 어쩐지 게이트로 넘어오는 와중에 하성운 목소리가 단 한 번도 들리지 않는다 싶었는데, 다 그럴만해서 그런 거였다. 얘네가 존나 급했을 테니. 본부에서는 아무 말 없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지만, 독단적인 내 지원 소식이 하성운 귀에도 안 들어갔다는 건 조금 이례적이긴 했으니까.





“박지훈이 또 잔소리 하겠네.”





계속 흘러내리는 이마의 피가 자꾸 눈앞을 가로막았다. 대충 소매를 당겨 슬쩍 손을 들었다. 언제 다친 건지도 기억하지 못 하게, 꽤 깊이 패여 버린 긴 상처가 만져졌다. 폭주는 하지 않았지만 감정에 따라 능력을 미친 듯이 써댄 터라 간당간당한 상태였던 손가락이 덜덜 떨렸다.





“저기.”





전쟁은 마무리되었지만, 그래서 나 혼자라면 곧장 게이트 열어서 센터로 돌아가면 되지만, 당장 바로 앞에서 옆에서 뒤에서 누워서 끙끙거리는 센티넬들을 마냥 놓고 가기에는 양심이 찔렸다. 내 코가 석 자라서 당장 박지훈을 보고 싶었지만, 그래도 팀 대장조차 정신을 잃고 혼절한 팀을 두고 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근처 돌덩이 위로 걸터앉아 떨리는 손끝을 다른 손으로 부여잡고 백업 팀이 빨리 오기만을 바랐다.





“저기, 대장님.”

“왜.”

“이거.”

“......”

“이마에 상처 닦으세요. 깨끗한 천이예요.”





살갑게 내밀어진 천은, 이 전쟁터와 어울리지 않게 새하앴다. 남자? 여자? 내 짜증에 줄곧 죄송하다고 쓸데없이 고개를 숙이던, 성별도 구분하기 힘든 어린 나이의 센티넬이었다. 제 허리는 칼빵을 맞아 터져버렸으면서도 꿋꿋하게 서서 남을 챙겨주는 상냥함이 이질적이었다.





“제 옷 찢은 거라 정말 더럽지 않아요. 쓰셔도 되세요. 나오기 전에 새로 산 깨끗한 옷 입은 거예요.”





내가 청결을 우선시하는 사람이라 받지 않는다고 생각한 듯싶었다. 눈치를 보며 안절부절못하게 오도도, 알고 싶지 않은 정보를 읊어내는 꼴이 여간 웃긴 게 아니었다.





“...일단은, 고맙다.”

“아니에요. 제가 더 감사합니다.”





작은 머리통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굴에 다 드러나서 읽기 쉬웠다. 내가 제 것을 받았다는 것을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눈빛에 나조차 답지 않게 웃음을 흘렸을 정도니까. 아이는 발그레, 고개를 숙였고 옆에 앉아도 되냐고 물었다. 나는 건조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아이가 건넨 천으로 대충 이마에서 흘러내리던 피를 닦아냈다. 온전히 멎게 하기에는 무리였지만 적당히 눈앞이 뜨일 정도는 되었다.





“정말 대단하세요, 대장님은."

“우리 초면 아닌가.”

“아, 저는 뵌 적 있어요. 지난번에 지원 나갔을 때.”





지원? 언제. 내 기억 속에는 없는 쌩 초면 얼굴이라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아이는 내가 모르시는 게 당연하다며 다시 한 번 순하게 웃었다. 저 그날 지원 갔었거든요. X팀만 갔던 작전, 왜 밤중에 갔던 그 날이요.





“나 쓰러진 날 말하고 있네.”

“맞아요. 그 날이었어요.”

“별로 좋은 기억은 아니었을 텐데. 그 때 활약한 건 내가 아니라.”

“아니에요. 대장님 싸우시는 거 모니터 했는데, 제 눈에는 정말 단연 최고셨어요.”

“...진짜?”

“네! 소문으로만 들었는데, 정말 왜 그렇게 소문이 났는지 단번에 이해했어요! 대장님은 제가 여기 입사하기 전부터 롤모델이셨어요!”





조잘조잘. 참 말도 많다. 어차피 할 일도 없어서 가볍게 맞장구만 쳐주는데 참 존경하는 인물 우러러보듯이 손뼉까지 짝짝 치는 아이의 모습은, 어쩐지 조금 귀찮았다. 귀엽다기보다 흐릿한 무언가 특정하지 않게 겹쳐 보여서 자꾸 시선을 피하게 됐다.





“근데, 그 선배님도 정말 대단하시긴 했어요.”

“그 선배님?”

“대장님이랑 같은 X팀 박우진 선배님이요.”

“...걔 왜."

“대장님 경고음 들리기도 전에 먼저 사라지셨는데, 그렇게까지 기막힌 타이밍으로 무전기 떼어버린 대장님 앞에 나타나셨잖아요. 이름 값하는 분들은 타이밍도 잘 맞추나 싶었다니까요?”





뭐라고? 걔가 뭘 해? 앞뒤 맞지 않은 말을 뭔가 크게 잘못 들은 것 같아서 바짝 인상을 썼다. 이마에 대고 있던 손을 내리고 아무 것도 모르고 방글거리는 아이를 제대로 쳐다봤다. 다시 말해봐. 그 새끼가 뭘 했는지.





“모르셨어요? 가이딩 받다가도 대장님 경고음 들리기도 전에 튕겨나가셨어요. 몸도 안 좋은데 갑자기 사라진 게 대장님 경고음 때문이었다고, 박우진 선배님이랑 대장님 이야기 그 때 백업 팀 안에서 완전 화제였어요.”





시발. 그냥 고막을 뜯어버릴 걸 그랬나. 이게 대체 무슨 개소리야. 내 경고음이 울리기 전에 그 새끼가 왜 튀어나와. 얌전히 가이드 끌어안고 치료나 하지 무슨 자신감으로 거길 기어와. 싸움도 못 하는 게.





“...이거 혹시 하면 안 되는 얘기였나요? 저는 당연히 선배님이랑 대장님이 친하신 줄 알고 한 말인데.”

“센터 들어온 지 얼마나 됐니.”

“네?”

“센티넬 능력 발현되고, 센터에 납치된 게 언제 일어난 일이냐고.”

“그 날 지원 나간 게 첫 경험이었어요.”

“박지훈이랑 비슷하게 입사했구나.”

“대장님?”

“그러니까 모르지.”





멀리서 백업 팀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나 둘 게이트를 넘어오던 가이드들이 본인의 센티넬을 찾아 달리는 것을 보며 나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랑 박우진이랑 사이 안 좋아.”

“네?”

“나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면서 왜 그건 몰라? 그 개새끼랑 나, 정말 죽이고 싶어 안달난 관계라는 거.”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가 내 불편함을 온전히 대변하고 있었다. 아이는 아, 아, 어떡해. 죄송해요. 몰랐어요, 정말 처음 들었어요. 제가 들은 소문은 그런 게 아니라서. 다시금 고개를 조아렸다. 그게 참 형용 못할 기분이라 미묘하게 아이를 한 번 내려다본 나는 잠자코 들고 있던 천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 하는 아이에게 쓰게 웃었다.





“걔가 뛰어나온 건 순수하게 나를 구하려고 한 짓이 아니야. 자기 손이 아니라 다른 새끼 손에 뒤지는 게 배알이 꼴려서 그런 거라면 몰라도.”





어쨌든 이건 고맙게 잘 쓸게. 천과 함께 주머니에 들어간 손을 살짝 들어 보이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인사했다. 아이는 흡사 부모님에게 처음 혼난 어린 아이와 같은 모습이었다. 그래서 한 마디를 더 할까 하다가 오지랖이라며 등을 돌렸다. 인사를 끝내니 기다렸다는 것처럼 뭐에 쓰인 것 마냥 미친 듯이 발악하는 손아귀를 말아 쥐었다.





“...야.”





빠르게 걷던 걸음이 어딘가에 매인 것처럼 굳었다. 아니, 원래 그렇게 묶여있었던가 착각이 들 만큼 익숙하고도 무겁던 부름은 나를 옴짝달싹 못 하게 했다.





“니가 왜 여기 있냐.”





백업 팀이 서있던 지점까지 걸어가니 어째서 가장 먼저 보인 게 박지훈이 아닌 박우진이었는지 모르겠다. 안 그래도 이상한 말을 잔뜩 들어서 쟤 얼굴을 보면 혼란스러운 거 다 들킬 것 같은데. 근데 왜 하필 일 주일 만에 나타난 게 지금 여기서야. 기분 더 뭐 같아지게.





“눈은 왜 그딴 식으로 떠.”

“...뭐.”

“안 그랬잖아.”





누누이 말하지만 나는 박우진이 싫다. 원망하고 증오한다. 그런 감정을 만들어준 건 분명 박우진이 먼저라서 내 혐오감에 대한 합당한 이유도 존재했다. 그래서 말을 막 할 수 있었고 죽이라면 죽일 수도 있었다. 그게 당연한 거였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나 4년 동안 정립한 거라고는 박우진이 미친놈이고 시발스러운 개새끼라는 상황과 현실 단 하나였으니까.





“좆같이 굴지 말라고, 죽일 거라고 하지 않았냐.”

“닥쳐.”

“나 닥치게 하려면 지금 나한테 보이는 감정부터 변명하던가.”





근데 갑자기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내가 너를 미워하게 만들었으면, 너는 나한테 쉬지 않고 지랄을 해야 하는 게 맞지 않나. 내 가이드를 뺐었을 때처럼 분노로 얼룩지게, 약 올리고 싸움을 받아줄 때처럼 담담하게 나를 대하는 게 정상 아닌가.





“너 지금 나 때문에 죽고 싶은 얼굴이잖아.”





시야가 뿌옇게 흐려져서 할 수 있는 말이 다 나오지 않았다. 어렴풋이 뭔가 물어볼 것이 있었는데도 차마 그게 무엇인지 기억나지 않았고,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저 망할 능력을 이용해 마음을 읽어내면서도 이유 한 번을 묻지 않는 재수 없는 행동이 나를 좌절시켰다.



잘 지키고 있어, 니 장난감.

가이딩 받다가도 대장님 경고음 들리기도 전에 튕겨나가셨어요.



어느 쪽이 진짜인지. 대체 내가 놓치고 있는 게 뭔지. 언젠가 느꼈던 소외감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허공에서 부딪힌 박우진은 눈꺼풀이 떨릴 정도로 정확하게 내 감정을 읽었고, 나는 차마 숨기지 못한 감정들을 박우진에게만 토해내느라 속이 매스꺼웠다. 시간이 멈춘 것만 같던 공간이었다. 벗어날 수 없는 시선의 끝에서 느껴진 게 어째서 박우진인가, 울고 싶었다. 너무 답답해서 죽고 싶었다.










[씨발데레]
: 단순히 미친놈이 아니었다. 다정한 개새끼였다.










“...주야. 김여주.”

“어?”

“무슨 생각 하느라 이렇게까지 말을 못 들어.”

“아, 아니야. 미안해. 왜?”





그 날 이후 계속 정신이 없었다. 다친 거야 이마의 상처가 다였고, 능력 많이 쓴 거야 박지훈 덕분에 하룻밤이면 모두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일상을 공유하며 이전과 같이 행동하는 박지훈은 오히려 전보다 더 격렬하게 시도 때도 없이 가이딩을 해줬다. 그래서 나는 내 옆에 박지훈이 없는, 혼자 있는 시간이 낯설어질 정도로 스며들었다.





“우리 슬슬 일어나야 돼.”

“벌써?”

“벌써는 무슨. 닥터가 6시에 온다고 했잖아. 또 까먹었어?”

“...아. 그러네. 오빠 온다고 했었지.”





황민현도 마찬가지였다. 모진 말을 했다는 죄장감을 없애려고 굳이 자원을 나갔던 것이 맞나 싶도록 어김없이 6시간에 한 번씩 나를 찾아왔다. 그게 귀찮다고 눈을 부라리면 시답잖은 농담으로 내 입을 막는 것조차 어색함이 없었다. 뿐 만인가. 바빠서 못 오면 다른 사람을 보냈다. 지극한 일상이었다.





“일어나자, 진짜. 나도 더 누워있고 싶은데 이젠 닥터 눈초리가 좀 무서워.”

“내가 다 이겨.”

“그건 알지만, 너 이렇게 예쁜 거 아무리 닥터라도 안 보여주고 싶은 것도 있어.”





실오라기 하나 없이 맞닿아있던 몸이 기분 좋은 말에 폭삭 안겼다. 그렇게 안아놓고도 부족하다는 냥 박지훈의 굵고 투박한 손이 살살 등을 쓸어내렸다. 그게 간지러워서 하지 말라고 몸을 둥글게 오므리면 박지훈은 내 머리 위로 짧은 키스를 남기고는 끌어안은 상태 그대로 읏차, 소리를 냈다. 정말 일어나야 한다는 행동이었다. 상대적으로, 이전에 비해 비교적 수치가 안정화되어가는 거지 완전 잔잔해진 게 아니라 한 번은 다급하게 내 방 앞에서 야하게 가이딩 하던 것을 황민현이 봐버린 탓이었다. 전에는 그렇게 성질냈으면서 입 꾹 다물고 그저 제 눈만 감았다는 건 조금 갸우뚱 할 일이긴 했지만, 아무리 급해도 들어가서 하라는 현실적인 조언만 했다는 건 나와 박지훈에게는 다행인 일이었다. 물론 정각에 딱 맞춰 내 방으로 찾아오는 황민현의 눈치를 조금 보자는 건 나와 박지훈 둘 모두가 동의한 생각이라 조심하기로 했다. 그래서 박지훈이 이렇듯 뭉근거리는 나를 힘으로 일으켜 세운 거였다.





“씻기 싫어.”

“땀 흘렸잖아.”

“귀찮아.”

“씻겨줘?”

“어.”

“......”

“...어?”





능글맞게 눈을 치켜뜨는 박지훈은 아무리 여러 번 따져 봐도 내가 처음이 아님에 분명했다. 침대에서 아예 벗어난 박지훈이 저와 달리 여전히 침대 위에 앉아있는 나를 보는 시선부터가 아주, 아주 순수하지 못 했다.





“원하면 씻겨줄게.”

“미쳤나봐.”

“근데 그러면 또 제 시간에 못 갈걸?”





마치 밥은 먹었니 뭘 먹었니 같은 일상적인 말을 건네는 것만 같았다. 내가 처음 봤던 박지훈은 순진무구한, 참 예쁘게 웃던 사람이었는데 언제 저렇게 된 거지. 내가 저렇게 만든 건가. 나오지 않은 답에 어지러운 표정으로 박지훈을 올려봤다. 박지훈은 그런 나를 보며 작게 소리 내어 웃었고, 농담이라며 다시금 내 머리 위로 잔 키스를 퍼부었다. 동시에 침대 위에 있던 나를 들어 올려 곧장 욕실로 옮겨놓았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대응할 거리가 없었다.





“깨끗하게 씻고 나와. 검사 끝나고 갑자기 하고 싶어질지도 모르니까.”





욕실 문을 닫아주기 전에 속삭이듯 자근거린 목소리가 참 농염했다. 원체 가이드들은 몸으로 상대를 진정시켜야 하는 입장이라 스킨십에 관대한 것은 잘 알았지만 박지훈은 뭐랄까. 나랑 상성이 놀라울 정도로 알맞지 않았어도 아주 온 몸 구석구석 각인을 해서라도 그 이상의 상성을 만들어 낼 것만 같았다. 이건 내 기분 탓이 아니라, 진짜였다. 사귄다 혹은 좋아한다 감정 없이도 몸을 내어주는 게 내 입장에서는 마냥 쉬운 일이 아닐 텐데 박지훈은 처음이라고 입을 턴 주제에, 침대 위에서는 잘도 나를 가지고 놀았다.





“기어이 흉터로 남았네.”





박지훈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생각은 없지만, 이왕 씻는 거 아주 깨끗하게 씻고 가자고 빠득빠득 몸을 닦았다. 평생 베어버린 피 냄새를 덜어냈다. 그러다 문득 거울 너머 선명하게 생긴 붉은 자욱이 눈에 띄었다. 지난 번 전쟁에서, 박우진을 보고 왈칵 울었던 이상한 날 자리잡고야만 흉터가 꽤 길고 선명하게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나 닥치게 하려면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감정부터 변명하던가.



돌연 떠오른 말소리에 생각 없이 흉터를 만지던 손가락 끝이 멈췄다. 꽉 걸어 잠갔던 스위치가 눌린 것처럼 잔상 조각이 자꾸만 나를 후벼 팠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아니, 말할 수 없었다. 그토록 박우진을 증오하던 김여주가 조금 이상해졌음을 부정할 자신이 없었다. 그러니 박지훈도 황민현도, 하성운도 모를 것이다. 사실 그 날 이후 가장 문제는 박우진이라는 것을. 내가 박우진 이름 석 자에 몸을 떠는 게 더 이상은 단순한 혐오감 때문만이 아니라는 것을.



너 지금 나 때문에 죽고 싶은 얼굴이잖아.



박우진을 뇌까리는 거울 속 내 얼굴을 마주하기 싫었다. 푹 숙여진 얼굴 위로 축축한 머리가 한 번에 밀려 내려왔다. 유연하게 견딜 수 없어 몰아쉰 숨소리가 거칠었다. 미칠 것 같았다. 너를 죽일 거라고 못 박던 내가 아직도 생경한데 도저히 이럴 수는 없다. 김여주와 박우진이 서로를 싫어한다는 건 모두가 알았다. 내가 알고, 박우진이 알고, 센터 사람들 모두가 알던 명제였다. 너무나도 확실해 어느 누가 감히 반박을 할 수 없이 확고했다.





“...아.”





근데 그게 무너졌다. 그걸 내가 봤다. 김여주는 박우진을 혐오하고 죽이고 싶어 한다. 분명하고 명확하던 2년, 도합 4년간의 기억이 뿌리부터 흔들렸다. 찰나의 순간이면 충분했다. 악을 쌓아온 건 4년이었는데 쓰러지는 건 고작 1분도 안 되는 시간이면 부족하지 않았다.





"나 진짜 미쳤나봐."





그게 나를 두 번 죽였다.










[씨발데레]
: 단순히 미친놈이 아니었다. 다정한 개새끼였다.










“사람 피곤하게 왜 오라 가라야, 이 인간은.”

“내 말이. 아직 너 검사도 덜 했는데.”





내 정체성까지 뒤흔들리던 상념은 갑자기 튀어나온 호출로 멎었다. 딱히 좋은 방식으로 멈춰진 게 아니라 눈이 세모꼴로 떠졌지만, 일단 호출이라니 황민현과 함께 열심히 이동했다. 내 방으로 가던 길에 만난 터라 어쩌다 같이 가게 되었다는 말이 더 정확한 표현이었다.





“근데 진짜 의뭉스럽네. 뜬금없이 이 시간에 호출을 왜 하지?”

“뭐 대단한 전쟁이라도 났나 보지.”

“안 무서워?”

“뭐가.”

“아니. 다른 센티넬들은 호출 오면, 혼나거나 특수 전쟁 나가거나 둘 중 하나라서 다들 겁부터 먹던데 너는 상당히 편해 보인다.”

“짬이 다르잖아.”

“...4년밖에 기억 못 하는 게 짬 타령은.”





흘리는 말 속에 묘한 가시가 숨어있었다. 그걸 나도 황민현도 알아서 내가 확 째려보면, 황민현은 어이구 도착했네. 할아버지 같은 말투로 나보다 앞서 하성운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왜 둘이 같이 와?”

“어, 검진 때문에.”

“아. 검진. 그래, 무튼. 우리 팀까지 왔으니까 다 모인 거네요.”





상당히, 지금까지 봐온 것 중 가장 신기한 조합이었다. 하성운을 필두로 주르륵 앉아있는 다른 팀 매니저와 닥터들. 그 외에 구석구석 서있는 센티넬들. 그것도 어디서 한 가닥씩 한다고 이름이 나있는 S급 이상으로만 이루어진 구성.





“...조합 보면 대충 예상하겠지만, 사상 초유의 전쟁이 터졌습니다.”





로 시작되는 서두는 딱히 놀랍지 않았다. 방 안의 모두가 그랬다. 다들 한 번씩은 그런 전쟁을 겪었고 그렇게 살아가는 게 익숙한 삶을 살아왔다. 그래서 특유의 적막과 고요는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다만, 질문은 존재했다 정도의 상태를 묻는 궁금증은 특히 죽음에 겁을 먹지 않은 센티넬들이라서 가능했다.





“6년 전 전쟁보다 더 심각한 상황인가요?”

“...작전명 발키리 말하는 건가요?”

“네. 기록상 그 전쟁이 가장 참혹했다고 배웠습니다.”





하성운은 대답하기 힘든 질문을 받은 것처럼 잠깐의 외면을 선택했다. 길어지는 침묵 속에서 시선은 자연스럽게 한 곳으로 모아졌다. 비교적 늦게 들어와서 제일 구석에 찌그러져있던 나 말고, 하성운 바로 옆에서 매니저들과 함께 떡하니 자리 잡고 앉아있는 박우진에게.





“...그것까지는 아직 모르겠네요. 초기 단계라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결국 하성운은 박우진에게 무언가를 기대하는 눈치를 하는 센티넬들을 다시 저에게 주목시켰다. X팀 담당자라서 센티넬 팀 중에서는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처지라 책임져야 할 것이 많다고 알고 있는데 봐온 모습 중 유독 곤혹스러워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 이유를 뒤늦게야 깨달았다. 말을 단정하게 끝내고 눈이 마주친 하성운의 묽어진 시선이 그걸 증명했다. 작전명 발키리, 6년 전에 벌어진 역사상 최악의 전쟁. 그 중심에 있던 게 나랑 박우진이기도 했지만 그 때도 센티넬들을 지휘하며 사건을 겪었던 팀 매니저가 하성운이었다.





“자세한 사항은 시간을 두고 차차 진행하겠지만, 우선은 통보 먼저 하겠습니다.”





나를 보고, 박우진도 한 번 쳐다본 하성운은 이내 복합한 감정을 지웠다. 대신 퍽도 위엄 있는 목소리로 방 안을 세세하게 둘러봤다.





“오늘부터 여기 있는 여러분들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X팀으로 귀속됩니다. 현재 속해 있는 팀의 자잘한 작전에서는 제외되고, 우선적으로 X팀의 작전을 수행합니다.”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조금 어두운 조명을 켜놓은 방 안이, 하성운의 독백과 같은 명령으로 가득 찼다. 각 팀의 센티넬들은 한참은 늦은 지금 순간에 접어들어서야 자세를 바로 하고 조금은 인간다운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공포, 두려움, 뭐 그런 지극히 동물적인 것들.





“작전명은, Gunnr. 군느입니다. 이상.”





하성운의 무거운 선언을 시작으로 6년 전 전쟁의 악몽이 다시 재현될 발돋움을 준비했다. 작전명 발키리에 이은, 작전명 군느. 발키리 작전 때 사망한 센티넬이 수가 헤아리지 못 하도록 너무 많아 여기 모인 센티넬들은 그들이 죽은 뒤 자리를 차지한 새로운 얼굴들이 대다수였다. 그러니까, 6년 전보다 참혹할지도 모르는 전쟁터에 또 출전하게 된 것은 나와 박우진이 유일한 센티넬이라는 의미였다. 물론 한 쪽은 기억이 있고, 한 쪽은 기억이 아예 없다는 게 큰 변수이긴 했을 테지만.










[씨발데레]
: 단순히 미친놈이 아니었다. 다정한 개새끼였다.










“...미안하다.”





모두가 물러나고 난 뒤 나는 황민현과 하성운 방에 남았다. 하성운은 박우진도 남길 원하는 눈치였지만 무슨 생각인지 웅성거리는 소란이 다 잦아들기도 전에 가장 먼저 방을 나가버린 박우진은 기존 X팀의 2차 모임에 남을 생각이 전혀 없는 듯 했다. 물론 내 입장에서는 그게 나았다. 안 그래도 하성운이 말하는 도중 집중력이 떨어져 주변을 휘휘 둘러보다 생전 처음 보는 얼굴로 눈을 감고 있는 박우진을 봐버렸고, 그건 줄곧 나를 못살게 굴던 혼란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여주 너랑 우진이는 어떻게든 빼보려고 했는데, 내가.”

“형이 왜 그걸 미안해 해. 매니저 입김이 뭐 얼마나 세다고.”

“그래도 미안. 또 그런 일 겪게 해서 정말 면목이 없어.”





박우진 때문에 입술을 물어뜯느라 정작 그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은 게 함정이긴 했다. 하지만 진심으로 불안해 보이는 하성운 모습은 또 처음이라 마음에도 없는 말을 겉치레로나마 해주긴 해야 했다. 기억이 없어서 뭐든 상관없는 나와 달리, 하성운은 실제로 경험을 한 사람이라서 무게가 남다르다는 것이 행동 하나하나 선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괜찮아. 나 아무렇지도 않아.”

“여주야.”

“구라같이 들리는 거 아는데, 기억이 하나도 없어서 그 때 내가 어땠는지 하나도 몰라.”

“...너는 무슨 그런 말을 그렇게 웃으면서 하냐.”

“진짜니까 그러지.”





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질린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황민현을 한 번, 미안해 죽으려는 하성운을 한 번 쳐다봤다. 왜 둘 다 못 믿는 표정이지. 내가 그 때 얼마나 아팠는지 어떻게 고통스러웠는지 그런 거 하나도 생각 안 나는데. 그냥 새로운 임무인데, 조금 힘들겠구나 싶고 마는데.





“근데 형.”

“왜?”

“사과는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얘보다 우진이한테 해야 하는 거 아니야?”

“......”

“걔 표정 봤어? 나 그렇게까지 급격히 망가지는 거 그 날 이후로 처음인데.”





그 날? 그 날이 뭔데. 또 나만 모르는 과거 이야기를 하는 황민현과 하성운을 번갈아가며 뚫어져라 응시했다. 부담스럽게 보면 이야기를 해줄까 기대를 했다. 하지만 공략이 쉬워 보였던 하성운조차 나를 힐긋 보더니 가만히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그건 나중에, 여주 없을 때 다시 하자.





“...기억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뭐?”

“그렇잖아. 매번 무슨 얘기를 하다가도 이렇게 쏙 자기들끼리만 빠지고.”





의자 뒤로 몸을 구겨 넣은 채 중얼거리듯 말을 이어갔다. 누가 보면 내 기억에 뭐 대단한 게 숨겨있는 줄 알겠네. 장난 반, 진담 반. 박우진이 그런 식으로 신경 쓰이니까 자연스럽게도 예전을 헤집어볼 필요성을 느끼는데, 하성운과 황민현의 지치지도 않은 과거 이야기에 나만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달을 때마다 조금 불쾌하기도 기분이 언짢기도 했다. 분명히 저들이 공유하는 시간에는 내가 존재하는데 나만 모르니까. 줄곧 간헐적으로 겪었던 기시감 혹은 소외감이 박우진과 더불어 걷잡을 수 없이 커진 탓이기도 했고.





“한 번도 궁금해 한 적 없었잖아.”





그래. 그러니 이건 분명한 변화였다.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차이점. 상당히 낯선 얼굴의 하성운은 그 점을 짚어주고 있었다. 과거는 과거라고 현재를 살아가는 내가 굳이 기억도 나지 않은 것들을 알고 싶지 않다고 내치던 냉정함이 어째서 그런 뉘앙스로 변모했냐는 근본적인 질문.





“그랬지. 근데 하도 얘기들을 하니까.”

“...우리가 그렇게 많이 얘기했나.”

“아니야. 남들도 다 그래.”

“누가.”

“다들 그래. 오랜만에 보는 사람들이라면, 센티넬 가이드 가리지 않고 그러던데.”





쉬쉬하고 있었다. 무슨 영문인지 다들 내 앞에서는 과거 이야기를 꺼리는 것처럼 보였다. 언제는 그게 참 이상해서 귀동냥으로 주워들은 적도 있었다. 건너건너 들은 것도 많았고. 그런데 듣다 보니 과거의 나라는 게, 내가 모르는 김여주의 존재라는 게 마냥 달갑지는 않았다. 지금과는 정 반대의 모습이라던가, 성격도 말투도 행동거지조차도 싹 변해버려서 못 알아볼 것 같다던가 하는 말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말을 들으면 고작 가진 게 4년뿐인 내가 현재의 나조차 부정하게 된다는 건 자명된 일인데도 그들은 그렇게 열심히 카더라를 날랐다.





“매니저님도 그런 말 한적 있잖아. 내가 원래는 안 이랬다고.”





그래서 관뒀다. 과거에 시니컬해진 건 얼마 되지 않은 지금을 붙잡기 위함이었다. 나에게는 과거의 일들보다 현재 내 앞에 벌어진 일들이 더 소중했고 중요했다. 가진 거라고는 그게 다니까. 나는 정말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상태로 다시 시작했고, 과거에는 어땠는지 모를 타인과 소통을 하게 되기까지 걸린 시간이 못 해도 2년이었다. 그 동안의 나는 죽어라 노력을 해야만 했고 과거를 찾는답시고 힘들게 보낸 그 시간을 무시하기에는 내가 너무 억울했다. 과거는 과거로 묻는 게 가장 합당한 방법이었던 거다.





“...그건, 사실이야.”

“나도 동감.”

“원래는 존댓말도 잘 하고 고분고분 명령도 잘 듣고.”

“맞아. X팀 불도저는 우진이 하나였지. 매번 우진이만 똥강아지라고 했잖아. 얘는 자기 배 아파 낳은 애처럼 이뻐하고."

“그러게. 묘하게 그 때가 그립네. 망나니는 하나로도 충분했는데.”





고도의 돌려 까기인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내가 말하려던 건 이게 아니었는데, 어쩌다 내용이 이리로 튀었는지에 대한 고민을 했다. 하지만 내가 고민에 대한 해답을 찾기도 전에 빠르게 원 궤도를 찾은 하성운은 대뜸 그런 말을 했다.





“근데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어?”

“굳이 그걸 반복하지는 않을래.”

“이건 또 무슨 소리래.”

“과거보다 현재가 우선이라는 말, 나도 동의한다고.”

“매니저님은 그 말 싫어하지 않았어?”

“싫어했는데 생각이 바뀌었어.”

“왜?”

“...너무 알려고 하지 마. 그냥 요즘 그런 생각이 들어.”





우리 중 최고의 승자는 김여주 너인 것 같다는 생각. 이어진 말이, 몹시 모순적이었다. 조금은 기괴하게 들리기도 했다. 2년 동안 움직이지 않는 몸을 이 지경으로 되돌린다고 피를 토해내고 눈물을 흘렸던 것을 가장 옆에서 지켜봤으면서도 저런 말을 하는 게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차라리 후회를 하는 게 낫지, 과거에 갇히는 건 못 할 짓이야.”





어깨를 으쓱하며 오늘 얘기할 거리는 이게 끝이라고 업무용 책상에 홀연히 앉아버리는 하성운의 맺음말은 꽤 많은 생각이 들게 했다. 과거에 갇히는 것보다 후회를 하는 게 낫다는 말을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석하는 게 맞는 건지 도무지 감이 안 잡혔다.





“나가자. 너 검사 하던 거 이어서 해야지.”

“아 맞다. 그래. 우리는 갈게, 매니저님.”





빤히 하성운을 본다고 나오지 않은 게 희번뜩 나타날 리 있나. 기어코 닥터로서의 제 본분을 찾아낸 황민현 덕분에 나는 작게 고개 인사를 하고 하성운 방을 나왔다. 둘이서는 딱히 별 할 말이 없어 조용하게 다시 걸음을 옮겼다. 수치 검사 도구를 놓고 왔던 내 방으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나만 모르는 황민현과 함께.










[씨발데레]
: 단순히 미친놈이 아니었다. 다정한 개새끼였다.










황민현과 도란도란, 은 아니고. 적당히 평화롭게 검진을 끝내고 박지훈을 만나러 가기 전에 들르고 싶은 곳이 생겼다. 센터 본관 뒤쪽으로 넓게 퍼져있는 외부 훈련장. 몸을 비교적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된 후로 거의 1년가량 내리 혼자 생활했던 공간이었다. 2년 동안 죽은 사람처럼 숨만 쉬다가 깨어나서, 2년 동안은 숨어서 재활 훈련을 하고, 활동기 2년 중 1년을 주로 여기서 혼자 시간을 보낸 것이다. 왜냐고 묻는다면, 답은 정해져 있는 것뿐이다. 옆에 아무도 없었으니까. 애초에 과거 동료였다던 이들은 거의 다 죽어 없어진 상황에서 기억도 없으니 상대가 나를 안다고 하더라도 정작 나는 모르는 사람 천지였다. 그런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주는 건 하성운 황민현, 좀 뭐 같은 경로까지 더한다면 박우진이 전부라고 밖에 할 수 없는 건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날씨 좋네.”





물론 요즘에는 주로 실내 훈련장에서 훈련을 했다. 적당히 팀원들과도 말을 텄고, 팀 대장으로의 업무가 늘어날수록 여기까지 와서 훈련할 짬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여기까지 올 일이 없었다. 외부 훈련장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진짜 더럽게 좋네, 날씨.”





이미 해는 저문 지 오래라 외부 훈련장을 밝히고 있는 건 센터에서 비쳐오는 미세한 불빛이 전부였다. 멍하니 눈을 깜박거리며 넓은 훈련장을 한 번 쭉 돌아봤다. 그새 눈이 어둠에 익숙해져 인영들이 곧잘 선명하게 보였다.





“시원하다.”





대충 자리에 주저앉으며 팔을 뒤로 뻗었다.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았다. 불어오는 바람이 꽤 신선했다.


작전명은, Gunnr. 군느입니다.

...작전명 발키리 말하는 건가요?



잔잔히 요동치던 머릿속에서 교차되는 두 개의 명칭이 있었다. 하나는 내가 겪었지만 기억나지 않은 전쟁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내가 겪고 기억에도 남게 될 전쟁이었다. 사실상 아직 둘 다 겪은 건 아니니 어느 것이 더 잔혹할지 내가 판가름할 수 있는 척도는 없었다. 그저 연관되어 생각나는 것만 존재했다.



그래도 미안. 또 그런 일 겪게 해서 정말 면목이 없어.


가령, 하성운의 사과라던지.





“...존나 이상했지.”





뒤도 안 돌아보고 방을 나가던 박우진의 뒷모습 같은. 느릿하게 고개를 내저으며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왜."





사람 심란하게 꼭 지 생각할 때 나타나지. 누가 S급 아니랄까봐. 낯설지 않은 인기척이 어느새 내 앞자리까지 서있었다.





“...빠져."





박우진이었다. 언제 왔는지, 어떻게 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은. 아까는 왜 그런 식으로 자리를 떠나버렸는지. 왜 그 날의 나를 그토록 죽고 싶게 했는지. 4년 동안 남은 게 왜 너를 향한 악 뿐인지, 어째서 나를 괴롭히지 않고는 못 배겼는지. 미묘한 물음표만 남아버린 그 박우진.





“다짜고짜 뭐라는 거야.”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빠지라고.”

“주어는.”

“이번 전쟁. 작전명, 군느.”





팔을 지탱해 뒤로 빼고 있던 몸을 바로 세웠다. 선선한 바람이 다시 한 번 불어왔고, 나는 잠깐의 바람을 견디지 못 하고 한 박자 늦게 박우진을 올려다봤다. 내가 왜 그래야 해? 역시나 한 박자 늦은 되물음이었다.





“...그런 거 좀 그만 물어.”

“이해가 안 되는데 어떻게 안 물어봐?”

“말해줘도 안 믿을 거면서 왜 자꾸 물어.”

“말해준 적은 있고?”





욕만 오가지 않았지, 명백한 싸움이었다. 이유를 읊지도 않고 지 멋대로 의견을 강요하는 박우진과 그런 박우진에게 속내를 드러내라며 팽팽하게 캐묻는 나는 어딘가 비틀어진 채 맞물려갔다. 이전과 같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서로에게 진심을 숨기며 날을 세웠다.





“있어. 존나 많지.”

“나는 모르겠는데.”

“니가 귀를 막았으니까.”

“뭐?”

“눈도 막고, 입도 막았으니까.”





박우진을 올려다보는 시선이 격해졌다. 내가 분명 말했지. 짐승 소리 내지 말고 인간처럼 말을 하라고. 듣는 사람 제대로 알아듣게. 짓눌리는 입 안 여린 살이 잔뜩 성을 냈다. 으르렁거리는 박우진의 영문 모를 개소리에 대응하기 위함이었다. 그럼 박우진은 한참이나 뜸을 들이다가, 기어코 내 눈을 봤다. 이제는 살기라고만 단정 지을 수 없도록 불운해져버린 내 눈을 보고 그대로 감정을 읽었다. 그리고 말했다.





“야.”

“...뭐.”

“나는 한 때 너를 위해 죽을 수도 있었어.”





박우진이 빨갛게 물들었다. 무언가에 항변하는 사람처럼 곧게도 서있던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앉아있는 나와 시선을 맞추듯 그대로 쓰러진 채, 내가 무슨 감정인지 빠짐없이 읽어내면서도 단 한 번의 깜빡임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 날, 내가 저를 보며 죽을 것처럼 굴던 그 눈을 하고서 스스로에게 벌을 주는 것처럼 굴었다.





“그러니까 니만 좆같이 살았다고 생각하지 마.”





지독하도록 텁텁한 공기였다. 숨결이 부딪히지도 못하고 꺾일 만큼 위태로웠다. 있던 것조차 사라질 것만 같은 분위기에 먹혀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박우진은, 그렇게 나를 쳐다보며 가장 밑바닥에 죽어있던 감정을 쏟아냈다.





“모르겠지만.”

“......”

“나도 좆같이 살았어. 매일매일 죽고 싶을 만큼, 충분히.”





이게 무슨 말이고 반응을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하는 건 나중에 할 일이었다. 분명 어디선가 겪은 익숙함에 온 몸에서 위험 신호를 울렸다. 이건 아니라고 시퍼런 비명을 질렀다. 부들거리는 양 손이 그걸 증명했다. 더 이상은, 안 된다고. 뭐든 이게 박우진의 민낯을 받아내는 마지막이어야 한다고 지난날의 나처럼 몸부림을 쳤다.





“...그럼.”

“......”

“그럼 더 좆같이 살면 되겠네. 내가 행복해지게.”





그래서 도망쳤다. 내가 너한테 언제 흔들렸냐는 것처럼, 그 날 너를 보며 울었던 것은 신기루에 불과했다는 것처럼 건조하게 웃었다. 덜덜 떨리는 감정에게서 매몰차게도 먼저 등을 돌렸다.





“...아, 시발...”





나를 쫓아와서 더 깊은 것들을 꺼낼까봐, 나를 붙잡고서 알면 안 되는 것을 늘어놓을까봐 겁이 났다. 박우진을 피해 달음박질치는 와중에도 무서워서 계속 뒤를 돌아봤다. 따라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박우진은 보이지도 않게 흐려졌음에도 벗어나려고 뻗는 두 다리를 멈출 수 없었다.



나랑 사귀자. 해달라는 거 다 해줄게.


기억이, 파편으로 돌아왔다.



뭐가 그렇게 좋아? 아주 자지러지겠네?



나만 몰랐던 내가, 내가 기억하지 못 하는 박우진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게 너무 두려웠다. 아무리 달려도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처럼 온 몸이 심연으로 가라앉는 절망감이었다. 살려달라고 팔을 뻗고 발장구를 쳐도 점점 더 심해로 떨어지기만 했다. 나는, 박우진은. 나는, 박우진에게. 나는.



야, 문 열어. 둘 다 죽여 버리기 전에.



나는, 박우진을, 알고 있었다. 6년 전 발키리 작전 그 이전부터. 아주 오랫동안 박우진과 함께였다.










[씨발데레]
: 단순히 미친놈이 아니었다. 다정한 개새끼였다.










“...여주야. 문 좀 열어봐.”

“계속 안 열어?”

“네. 대체 뭐 때문인지 모르겠어요.”

“아까 너 만나러 갈 때까지만 해도 괜찮아 보였는데.”

"문 부술까요?"

"아니야. 일단 그냥 두자. 알아서 나오겠지."





무슨 정신으로 여기까지 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달리는 와중에 몇 번 넘어져 무릎이 까진 것도 같았고, 너무 울어서 머리가 깨질 것도 같았다. 그래도 풀리지 않았다. 응어리진 것들이 더 매서운 속도로 얽히고 얽혔다. 나에게는 그것을 풀 힘도, 시간도 없었다.



...가이딩으로도 충분했잖아.

우진이 아니었으면 너 거기서 진짜 폭주했어. 알긴 해?



의문스러웠던 목소리가 앞 다투어 번져왔다. 박우진은 아니고, 박지훈도 아니고. 아. 황민현. 그리고 하성운. 각인을 했다니까 화를 내던 황민현과 마찬가지로 울분을 토하듯 고함친 하성운이 했던 말들이 뒤늦게 메아리쳐 울리기 시작했다.



...맞다. 너 기억상실이었지.

야. 나는 한 때 너를 위해 죽을 수도 있었어.



그리고 결단코, 나에게만은 개새끼처럼 굴었던 박우진의 말까지 한데 범벅되어 나를 찾아왔다. 당시에는 조금 기분 나쁘고 말았던 말들이,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아니었던 대사들이 나를 희롱했다.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은 흐릿한 것들이 자꾸만 내 것이라고 우겨댔다. 나는 모르는 건데. 나한테는 그런 추억들이 없었는데 네 것이 맞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나,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하지.”





다 아는 것도 아니고, 모든 것이 드라마틱하게 한 큐에 생각난 건 절대 아니었다. 내가 더 괴로운 건 그 때문이었다. 알 듯 모를 듯 적적하게 밀려오는, 아주 조금씩 확인되는 과거의 것들은 지치지도 않았다. 문득문득 치고는 상당히 자주 나를 고통스럽게 했다.





“왜, 하필.”





그러니까 어떤 경로 때문인지는 몰라도 지금 내 머릿속에서 불안하게 떠도는 기억들이 정말 사실이라면, 내가 잊었던 과거의 것들이 확실하다면 나는 정말 죽고 싶어질 지도 몰랐다. 그 4년 전에도 죽지 않겠다고 악착같이 버텼는데 고작 그 새끼에게 관련된 기억 파편만으로도 나는 살아갈 힘을 잃어버렸다. 설혹 서로가 과거의 깊은 관련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간 박우진이 했던 행동으로는 지독한 악연이었거나 다른 장르로 관계가 있었을 거라고 확신했었다. 어떤 까닭으로 걔가 그런 짓들을 시작했는지는 몰라도 단단히 틀어진 사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 알지 알지. 나도 존나 사랑해.



근데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 어쩌면 내가 가장 염두에 두지 않았던 감정들을 주고받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게 정말이라면 왜 나한테 그렇게까지 좆같이 굴었으며 어째서 내가 저를 증오하게 만들었는지 도무지 짐작도 안 된다는 생각.



차라리 후회를 하는 게 낫지. 과거에 갇히는 건 못 할 짓이야.



단헐적으로 파득거리던 숨소리가 멎었다. 드문드문 떠오르는 단편들에 헐떡거리느라 앞 뒤 상관관계가 어떤 것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감히 짐작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벽하게 틀린 문장이라고 확신 드는 단 한 개는 그런 것이었다. 기억을 못 하는 나와 그렇지 않은 이들을 소환해냈던 하성운의 한탄은 잘못되었다.





“...어째서.”





과거에 갇히는 것이 후회보다 나쁘다는 말은 옳지 않았다. 조각들로 엮인 불완전한 기억의 형태를 깨닫고야 만 내 꼴이 이토록 형편없다는 건, 과거에 갇히지 않아 후회를 하게 될 누군가의 미래가 그리 아름답지는 않을 것임을 말해주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아마 모든 것을 다 알게 되면 후회를 할 것이 자명했다. 어떤 경로로든, 누구에게든 죄인으로 남을 것임을 직감했다. 그게 가장 괴로웠다.










[씨발데레]
: 단순히 미친놈이 아니었다. 다정한 개새끼였다.










“...잠깐 얘기 좀 해.”

“지금?”

“응. 지금.”





밤새 고민을 하고 생각을 했다. 붙잡고 있으면 뭐라도 나아질까 싶어서 간절하게 희망을 찾았다. 이 복잡한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방법 혹은 다시 아무 것도 모르던 때로 돌아갈 길 같은 긍정적인 무언가를.





“뭐야. 너 울었어? 무슨 일 있어?”





하지만 결론이 나오지는 않았다. 꼬박 뜬 눈으로 덜덜 떨던 나를 무참하게 비웃던 과거는 결코 쉬운 차선책을 알려주지도 다른 선택 사항을 아량 넓게 베풀어 주지도 않았다. 그게 마치 혼자, 너 혼자 다 잊고 편하게 살았으니 벌을 받으라고 손가락질 하는 것만 같았다. 참담하고, 절망적이었다.





“기억이 돌아왔어.”

“뭐?”

“매니저님은 어떻게 생각해?”

“그게 무슨.”

“김여주에게 6년 전 일들이 떠오르고 있다는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조언을 구하러 왔어.”





많이 놀란 얼굴, 아니. 상당히 누렇게 뜬 얼굴. 단순히 충격을 받았다는 말로는 형용되지 않는 표정으로 뒷걸음을 치던 하성운은 기어코 부딪힌 의자에 털썩. 바닥으로 처박히는 것처럼 주저앉았다. 미친 듯이 떨리는 시선의 끝에는 퍽도 냉담한 얼굴을 한 내가 서있었다는 게 가장 역설적이었다.





“뭐가, 어디서. 어쩌다가. 왜?"

“...그렇게까지 반응할 일인가.”

“여주야.”

“기억이 다 돌아온 건 아니야.”

“그럼.”

“단편적으로, 간헐적으로. 아주 부분적으로.”





파들거리며 할 말을 찾지 못 하는 하성운의 모습은 생에 처음 보는 터라, 아. 아닌가. 본 적이 있었나. 어쩐지 익숙한 하성운의 낙담에 어렴풋한 미소가 그려졌다. 몰랐는데, 박우진만 오래 함께했던 게 아니라 하성운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았다. 하긴. 다 아는 것처럼 말을 할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던 내가 멍청한 거였지. 최소한 발키리 작전 때도 X팀 매니저였던 하성운, 왜인지는 몰라도 그 이후 팀 닥터가 된 황민현까지는 내 기억을 다 알고 있는 눈치였는데.





“그래서 사실 묻고 싶은 것도 있어.”

“......”

“조언을 구한다는 건 핑계고, 그걸 알아야 내가 정리를 좀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황민현한테 가는 것보다는 여기가 나을 것 같더라고. 삐딱하게 웃는 입꼬리가 미묘하게 떨렸다. 줄곧 나오지 않는 나 때문에 황민현과 박지훈이 한참이나 문 앞에서 씨름하다가 돌아간 후, 방을 나오게 되었을 때 문 앞에 정갈하게 놓여있던 황민현의 검사 도구는 얄궂은 기시감을 일으켰다. 이렇게까지 내 상태에 집착하는 건 혹시 나 대신 과거를 기억하고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물론 그 전에 확인받고 싶은 건, 매니저님은 어디까지 알고 있냐는 거야.”

“......”

“나에 대해서, 그... 박우진에 대해서 얼마나 알아? 다 알아?”





그리고 생각했다. 분명 발키리 작전 때에는 X팀이 아니었다던 황민현이 그 정도라면, 발키리 작전 때도 팀 매니저였던 하성운은 어디까지 얼마나 짊어지고 있는 건지. 황민현이 저렇게까지 하는데 하성운은 어디까지 막아내고 있는 건지. 내가 알고 싶은 것을 다 말해줄 수 있는 건, 현실적으로 하성운이 유일한 건 아닌지.





“...뭐가 묻고 싶은 건데.”

“대답부터 해, 매니저님.”

“다 알면. 내가 너희들에 대해 다 알면, 넌 대체 뭘 하고 싶은 건데 여주야.”





울 것 같았다. 내가 아니라, 하성운이. 언젠가 스치듯이 봤던 눈으로 나를 봤다. 아마, 내가 박우진에게 온갖 모진 말을 하고 하성운이 박우진을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던 그 날과 같이.





“박우진이 나를 좋아했어?"

“묻고 싶은 게 그거야?”

“응. 박우진이, 6년 전 김여주를 좋아했는지가 제일 혼란스러워.”





숨찬 공기가, 결코 부드럽지 않은 분위기가 한참이나 흘렀다. 하성운은 내가 저에게 물어볼 것을 짐작했으면서도 대답하기 힘든지 연신 낮은 신음소리를 냈다. 무언가에 가득 차있는데, 차마 원하는 만큼 다 풀지 못해 응어리 진 울먹거림이었다.





“...좋아했지. 네가.”

“어?”

“박우진이 아니라, 김여주 네가 좋아했다고.”





그러다가 한 말은, 뭐랄까. 무언가에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당연히, 나는 어렵지 않게 짐작하고 판단했다. 박우진이 6년 전 김여주를 좋아했다고. 단편적인 과거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고 그랬어야만 지금의 박우진이 왜 그런 개새끼 짓을 했는지 이해가 될 것도 같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고. 걔가 아니라 내가 좋아한 거라고. 줄곧 차분하게 하성운의 떨림을 지켜보던 호흡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열심히 인위적인 암시를 걸어둔 덕분에 크게 마음에 두지 않고 무관심하게 일관하던 태도가 망가지고 있었다.





“내가 봤던 너희는 언제나 네가 쫓아다니는 쪽이었어.”





처음부터 그랬어. 내가 X팀 매니저로 부임하던 10년 전부터 너는 우진이를 좋아하고 있었고 우진이는 너를 밀어냈지. 한결같았어. 상황이 바뀌었다. 울고 싶은 건 이제 하성운이 아니라 내가 되었다. 아주 오래전, 기억도 나지 않는 언젠가 부터의 박우진이 가려진 내 기억에 살아 숨 쉰다는 것은 알았다. 그건 모를 수가 없었다. 나는 다 자라지 못한 박우진을 봤으니까. 과거의 나는, 나만 모르게 가늠도 안 되는 나이의 박우진 옆에 서있었으니까.





“...그래서 가장 처음에는 네가 일부러 우진이한테 복수한다고 생각했어.”

“......”

“늘 안타까운 건 너였으니까, 기억을 잃은 게 아니라 척 하는 거라고. 박우진 보란 듯이 저러는 거라고.”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고, 꽉 악문 입가로 선혈이 새어나왔다. 그럼에도 멈출 수 없는 건 순식간에 차오르는 감정이었고, 멈춰지지 않는 건 하성운의 머릿속에서 살아가던 나였다. 나만 몰랐던 김여주는 모두의 대화 속에서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참 우스꽝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여전히 기억이 다 없는데, 나를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모두 기억되고 있다는 게 너무 웃겼다.





“근데 아니더라. 너는 정말 기억을 잃었고, 박우진은.”





하성운은 잠깐 숨을 멈췄다. 소리도 내지 않고, 어떻게든 감당하기 힘든 것들을 버티겠다고 눈을 부릅뜨고 주먹을 말아 쥔 나를 배려한다기보다 스스로가 벅차서 텁텁한 말소리를 한 박자 늦췄다. 덕분에 나는 더 큰 울먹임이 올라와서, 스스로 자각도 못한 감정들에 기어코 내리 찍혔다. 정의할 수 없는 눈물이 터졌다.





“...우진이는, 그런 너를 보더니 미쳤어. 네가 아무 것도 모르고 센티넬에게 각인하려고 했던 날 완전히 돌아버렸지.”





어디서부터 받아들이고,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지 몰랐다. 여전히 흑색인 기억들 속에서 단편 조각들이 결국에는 드러난 제 색을 자랑하고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번져오는 건 절망감이었지 미안함이 아니었다.





“이 정도면 원하는 답이 됐어?”

“...응.”

“정말? 겨우 이걸로 충분해?”





애석하게도 나는 6년 전의 내가 안타까웠다는 말에 더 크게 반응을 하지 못하도록 현재의 김여주에게 익숙해져있었고, 박우진의 행동을 이해한다기보다 왜 그 때도 지금도 나에게만 모질 게 굴었는지 모를 박우진이 미웠다. 대답만 들으면 모든 것이 정리될 줄로만 알았던 과거는 더 독하고 날카로운 파편이 되었고, 나는 또 한 번 숨이 막혔다. 그저 피하기 급급했다.





“충분해. 말해줘서 고마워.”





결국 단편적인 기억을 스스로 떠올리던, 부분적인 기억을 타인에게 전해 듣던 내가 내릴 수 있는 결과 값은 소름끼치도록 똑같았다. 나중에 후회를 하게 되더라도 지금의 내가 더 서러웠고 불쌍했고, 내가 버텨온 4년부터 지켜야만 했다. 이기적이었고 자기본위적이었다. 하지만 그게 맞는 거라고 생각했다. 다 같이 과거를 끌어안고 그 기억에 파묻혀 죽을 바에, 나 혼자라도 외면하는 게 나았다. 내가 가진, 내가 알게 된 기억이라는 게 그런 존재였다.





“...그리고 이건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뭐?”

“내 기억이 일정 부분 돌아왔다는 거, 매니저님한테 이런 걸 물었다는 거.”

“......”

“모두 다 비밀이야. 지키기 힘들면, 그냥 잊어.”





단정한 말은 분명 부탁을 빙자한 협박이었다. 기 막힌다는 하성운의 눈이 어쩜 그러냐고 나를 노려보고 있었고, 나는 오롯이 그 시선을 감당하며 턱 끝으로 맺힌 감정 방울을 닦아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굴었다. 온 힘을 다해 깨물어버린 탓에 비릿한 피 맛이 입 안 가득 맴돌아도 언제 피를 흘렸냐는 것 마냥 피를 삼기고 말았고, 너무 세게 주먹 쥔 탓에 손톱자국이 선명하게 남아도 세심하지 않게 힐끗 내려다보고 말았다.





“...이런 말 한 게 너무 매정하게 느껴져서 내가 미우면 미워해도 돼. 안 말려.”





방을 나오기 전의 말은, 끝끝내 하성운에게까지 돌아간 모질고 억센 마음이었다. 과거의 나를 오롯이 감내하던 셋 모두에게 던져진 것들은 틀림없이 내게 후회로 돌아와 몇 십 배, 몇 백 배로 꽂히게 될 것임을 알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멈추지도 돌아서지도 않았다. 목구멍을 조이고 숨통을 막아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나를 위해, 어쩌면 나를 지키겠다고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있던 이들을 버렸다.





“...아, 김여주."





대신 당장 내 앞에 있던 현재를 바라봤고, 보다 나은 안정감을 줄 것만 같던 미래의 것을 택했다.





"너 내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계속 문도 안 열어주다가 갑자기 사라져서.”

“......”

“...왜 그런 얼굴이야. 누가 그랬어.”





기억이 흐릿하던 6년 전 과거의 박우진을 뒤로 하고 선명하게 나를 안아주는 현재의 박지훈에게 손을 뻗었다. 늦지 않게 나를 토닥여주고 괜찮다고 속삭여줄 수 있는 누군가 절실했다는 게 변명이라면 변명이었다. 내가 과거로 괴로워할 때 가장 위로가 되는 사람은, 나와 같은 것을 공유하지 않고 그래서 함께 아파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단언했던 까닭이었다.





“지훈아, 박지훈."

“...말해.”

“너는 나 안 미워하지?”

“뭐?”

“남들이 다 내가 나쁘다고 해도, 너는 안 그럴 수 있지? 응?”

“자꾸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너는 절대 나한테 등 안 돌릴 거라고. 끝까지 내 옆에서 내 편만 들어줄 거라고 약속해줘, 제발.”





불안함과 공포감이 슬픔에 잡아먹혀 정신이 또렷하지 못했다. 내가 얼마나 용기가 부족해 주저앉기만을 반복했는지, 얼마나 겁이 많아 눈을 질끈 막아버렸는지. 그 때는 차마 알지 못 했다.





“나야말로, 제발. 그런 걱정을 왜 해?”

“대답부터 해줘. 응?”

“...걱정 하지 마. 그런 거 걱정할 바에 차라리 나한테 안아달라고 해.”

“진짜? 진짜지?”

“내가 그랬잖아. 나는 너랑 같이, 끝까지 살아남을 거라고. 꼭 백년해로 할 거라고.”





주저앉는 것이 달리는 것이라 착각을 하고, 눈을 질끈 막아버린 게 앞만 보는 거라고 착시했다. 겪어보지 못 하면 모른다는 말,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십분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을 무르고 우둔하고 고약하게만 굴었다.





“...타이밍이 안 좋은 건 알지만, 여주야. 좋아해.”





품 안에 넣어 온갖 달콤한 말을 속삭여주고, 불안하게 들썩이는 몸 위로 부드럽게 잔 키스를 퍼붓던 박지훈이 나를 구제한다고 여겼다. 나는 항상 여기 있을게. 사랑해. 사랑해, 김여주. 내가 원하는 말만 해주며 나만이 전부인 것처럼 애정을 넘치도록 주니까, 나는 이런 고통에서도 박지훈의 키스만 있으면 괜찮아질 것이라 쉽게 생각했다.





“나도, 나도 좋아해. 정말 사랑해.”





너 좋아해. 우진아, 나 너 사랑해.



고백이 아닌, 최면을 걸면서. 자유가 아닌 속박을 원하는 주제에 잘도 사랑을 농락했다.










+)

음... 어... 맛보기가... 재미가... 있으셨나 봐요... 많이들 읽으셨네요... 제목이 격렬해서 그런가... 무튼 일단은... 올리는 김에 여기에도 한 번 더 올리겠습니다 허헣

그리고 남겨주신 댓글은 눈물 줄줄 흘리면서 읽었습니다. 저 어디 안 가니까 같이 계속 워너원 해요, 우리. 자주는 아니더라도 우리원 보고 싶으면 가끔 올게요.

그럼 더위 조심하시고, 언제나 행복하세요. 우리원 11명도 늘 행복만 해. 많이 보고싶고,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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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혜성처럼 순식간에 등장한 롕입니다
•••답글  
독자3
1등하려구 급하게 헉헉...넘치는 분량에 눈물을 흘리고ㅠㅠ 잊혀진 기억 속에 우진이와 썸띵이 있을거라고는 생각했는데 ㅜㅜ여주가 우진이를 조아했었군요ㅠ 대충 연인이 아니었울까 싶었는데 ㅜㅜㅜ그냥 지훈이랑도 사귀고 우진이랑도 사귑시다...폴리아모리 다자연애...글에서는 해도 괜찮잖아요•••¿ 흑흑 오늘도 잘 읽구 갑니다 푸른밤 보내세요🌙
•••
그 해 여름
와 진짜 오랜만이에요 그대한테 푸른밤 보내라는 말 듣는 것도 뭔가 되게 까마득하고 그러네요ㅠㅠㅠ 아니 근뎈ㅋㅋㅋㅋ 폴리아모리 다자연앸ㅋㅋㅋㅋㅋㅋㅋㅋ 그쵸 글에서는 그런 것도 나쁘지 않죠 허헣
•••
독자5
어차피 픽션인데. ....우리..... 다 행복해도 되잖아요 흑흑흑흑 덕분에 자기전에 힐링하구가요🙂🙂
•••
독자2
분량ㄷㄷㄷ
우진이ㅜㅡ는불쌍해여ㅜㅜ

•••답글  
독자4
와.... 진짜 영화 보는 기분입니다ㅜㅜㅜㅜㅜ 잘 보고 가요!!!!!!!!❣️
•••답글  
독자6
최고.. 단연 최고입니다 제 취향을 파괴하셨어요
•••답글  
독자7
흐어어ㅓㅠㅠ 미야에요ㅠㅠㅠ 알람 뜬거보자마자 호다닥 들어왔는데 이런 마음아픈..ㅠㅠ 보면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흐르더라구요.. 다음 편도 기대하겠습니다 엉엉..
•••답글  
독자8
작가님 저 단훈하에요!
작가님 글이 올라와서 바로 달려왔어용><와 작가님 최고......여주가 지훈이랑 각인하고 나서 우진이랑 기억이 생각났는데..ㅠㅠㅠㅠ유ㅏ우 타이밍이 정말 ㅠㅠ 어떻게 될지 넘 궁금합니다...지훈이랑 여주는 너무 달달한데 우진이랑 여주는 좀 서로 너무 쎄용...ㅎㅎㅎ작가님 짱 재밌아용><

•••답글  
독자9
헐...이런사연이있었다니........어떡해요ㅠㅠㅠ큐ㅠㅠㅠㅠㅠ둘다 안쓰러워요ㅠㅠ작가니뮤ㅠㅠ너무재밌어요 짱짱!!
•••답글  
독자10
아니 그래도 조금은 예상했는데 너무 막 눈앞에 그려지고 슬퍼요ㅠㅠㅠㅠ
•••답글  
독자11
ㅠㅜㅜㅜㅠㅠㅠ 우진이 역시 그랫구나 ㅠㅜㅜㅜㅠㅠ 영화같아요ㅠㅠㅠㅠ
•••답글  
독자12
으아 .. 작가님 ... 넘 슬퍼요 ㅠㅠ 근데 진짜 오늘도 어김없이 작가님 필력에 감탄하고 갑니다 ...
•••답글  
독자14
아 작가님 저 ... 아가씨 모시는 비서썰? 이 갑자기 생각나서 너무 보고싶어요 ><ㅎㅎ 그것도 혹시 올려주실 계획 있으신지 ...
•••
그 해 여름
예전 글들은 거의 다 다른 곳에 백업을 했기 때문에 굳이 여기에는 올릴 계획이 없습니다! 죄송해요😂😂
•••
독자13
안녕하세요 선생님 대체 이글은 뭐죠? 제가 정말 지금 술을 먹고 와서 그런게 아니라 어떻게 이런 띵작이 나오는지 정말 궁금해서 그럽니다요
•••답글  
그 해 여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시험에 지친 저에게 크나큰 웃음을 주셨습니다,,, 고마워요,,,
•••
독자15
아니 미치겠어요..... 왕따 당하는줄 알았어요 너무 답답해서... 근데 진짜 애바ㅠㅠ 여주가 우진이를 좋아했었다니...... 소름 대체 왜 우짘이는 여주한테 모질게 대한걸까요 또 숨겨진과거는 뭘지 궁금해죽겠어요ㅠㅠ
•••답글  
독자16
흐어ㅠ
•••답글  
비회원212.140
헉스 우진이 시점도 너무 보고싶어요 ,,, 우진이의 심정은 어떠했을지 .. ㅠㅠ 진짜 너무 명작이예요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글잡 보다가 한번 봤는데 지금 헤어나오지 못하고 몇번 다시 읽는중이예요 ㅠㅠㅜ
•••답글  
독자17
이건 대작이다 한편마다 분량 쩌는 것도 좋고 저 이런 찌통 너무 조아해요 흑흐그으스그ㅡ그으흐그ㅡㅇ으ㅡ 다음 편 기다립니다,,
•••답글  
독자18
안녕하세요, 인스티즈입니다
글잡담F '한 편만 써도 아아' 이벤트에 당첨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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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글  
독자19
저 죽어요 진짜ㅠㅠㅠㅠㅠ 전공시험을 버리고 여기에 빠져있을정도로요ㅜㅜ
•••답글  
그 해 여름
안 돼요,,, 전공은 중요합니다 그대,,, 저와 함께 여길 나가서 전공책을 봅시다,,, 어차피 다음 편은 제 전공 시험이 끝나야 와요,,,
•••
독자20
와 그 해 여름님 글 진짜 몇달만에 보는거야.. 대박.. 그저 감탄만...
•••답글  
독자21
(˃̣̣̣̣̣̣︿˂̣̣̣̣̣̣ ) 자까님이 활동하시는 그 카페 어딘지 알수있을까요!!!!!!!! 가만히 여기서 기다리지 못해!!!!!!
•••답글  
그 해 여름
앗 그거 말 하면 저 징계 먹을 걸요...? 그리고 카페 활동 안 합니다! 백업 공간이 따로 있긴 하지만!
•••
독자22
쾅) 제이드입니다 자까님...이게 뭐죠...?어떻게 저한테 한마디 언질조차 없이 이렇게 조용히....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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