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칵테일 파티
자격지심. 자존감이 없는 사람들에게서 자주 나타난다. 그리고 그 방어 기제는 사람들에게 윽박지르는 것으로 나타나곤 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괴팍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자존감이 없는 사람은, 누군가를 떠나보낼 자신이 없다. 나 같은 사람을 좋아해주다니, 고마워서. 나 같은 사람을 좋아하다니, 이 사람 이외에는 아무도 날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리고 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낼까봐.
그래서 동민은 진호를 밀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진호는 밀려나려 하지 않았다. 진호에게 잡힌 손을 빼려고 하면, 오히려 깍지를 껴 왔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면, 두 걸음 다가왔다. 천천히 멀어지려고 모진 말 없이 행동하는 동민이지만, 곧 진호에게 냉철하게 굴어야 할 것 같아 겁이 난다. 시간이 흐르는 것이 두렵다. 이대로 지내는 것은 동민의 성격상 그럴 수도 없고, 그건 진호에게 희망고문을 계속 가하는 것뿐이니까. 동민은 신음을 내뱉으며 머리를 감싸쥔다. 우리는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걸까. 아니면, 나만 잘못된 건가.
톡톡.
어디선가 약하게 유리를 치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들어보니, 현민이다. 손가락으로 두어번 문을 가리킨다. 밖으로 나오라는 건가. 동민이 터덜터덜 걸어서 나오자, 현민은 동민 대신에 사무실 문을 닫는다.
"왜 불러."
"머리아픈 월요병, 나으시라고 미니미니가 커피 한 잔 사드리려구요."
너 내가 일할 때 농땡이치지 말라고 했지. 동민이 정색을 하며 무섭게 낮게 깔린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현민은 전혀 무서워하는 기색이 아니다. 이미 매체팀에서 여러가지 시키는 것 다 하고 왔거든요! 김대리님이 조금 쉬었다가 오후 업무 준비하래서 나온거에요. 마침 누가 신경쓰이게 머리 부여잡고 있길래 부른 건데! 현민은 볼을 부풀리며 삐진척한다. 그 통통한 볼을 꼬집자, 바람이 피식 - 점점 빠진다.
"어린이 코 묻은 돈으로 뭘 얻어먹냐. 자판기 커피나 마시자."
비싼 프랜차이즈 커피를 사이즈업해서 드려도 차장님에 대한 제 마음에 비하면 저렴해요! 현민이 자판기로 향하는 동민의 팔을 잡고 매달린다. 내가 자판기 커피 입맛이라 그래. 동민의 말에 거짓말, 이라며 현민이 입을 삐죽댄다. 자판기에 있는 커피들은 모두 다 가격이 똑같다. 한 잔에 300원. 야 어떻게 종이컵 커피 한 잔이 300원이냐. 아주 자판기로 얼마를 뜯어먹겠다는 거야. 동민의 말에 현민도 끄덕인다. 학교에 있는 거는 150원이던데. 현민이 커피를 뽑을 동안, 동민은 휴게실 의자에 앉아 창문을 연다. 이제는 해가 쨍쨍해도 덥지가 않네. 가을이다.
"완전 가을 아니에요? 이런 날에 회사라니 - 한강 가서 치맥하고 싶다."
"... 나 그거 한 번도 해 본 적 없어."
동민의 앞에 커피를 놔주던 현민은 으엑 - 하고 놀란다. 정말요? 지금까지 뭘 하며 사신거에요! 뭐, 일하다 보니 노는 데에 상대적으로 관심이 없었지. ... 그런 게 즐겁다는 기분이 이제는 뭔지도 모르겠어. 창 밖에 시선을 고정시키던 동민의 옆모습을 보며 현민은 어디까지 동민이 어둠을 감추고 사는지 걱정이 됐다. 바깥으로는 밝은 모습만을 보여주려고 애쓰는 걸 알고는 있었다만. 동민은 멍하게 있다가 순간 흠칫 놀란다. 내가 어린애한테 무슨 말을.
"너는 좋은 거 보고 밝게 무럭무럭 자라라."
"그래서 지금 차장님 보잖아요."
뭐래. 웃으며 동민이 종이컵을 집으려하자, 현민은 뜨거우니까 조심해요. 라고 말한다. 내가 애냐? 동민의 말에 현민은 커피를 한 입 마시더니, 코를 찡긋거린다. 차장님이 살면서 언제 16살 연하한테 애기 취급이나 받아보시겠어요. 참 나, 동민이 웃으며 커피를 입으로 가져간다. 동민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는 것을 바라보며, 현민은 한 손으로 턱을 괸다. 칠흙 같은 어둠 속에서 단번에 밝은 빛을 켜 버리면, 동민은 너무 눈이 부셔서 아예 눈을 감아버릴 것이다. 천천히 동민에게 다가가는 것이, 서로에게 좋은 거지. 현민은 동민에게 너무 부담을 주지 않기로 한다. 조바심 내지 않을게요. 기다릴게, 난 자신있어요.
한편 동민은 현민의 눈빛을 보며, 생각한다. 좋아하는 티가 팍팍 나는구만. 동민은 현민이 자신에게 계속해서 연락을 하고 쫓아다니는 것이, 단순히 자신이 내 준 미션 탓이거나 아기새가 어미새를 따르는 것과 같은 것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워크샵의 새벽, 동민은 현민의 마음을 들어버렸다. 나를 좋아하는구나. 처음에는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럴수도 있겠다 싶다. 만약 내가 마음이 평온한 상태라면, 그랬다면 나도 널 사랑했을텐데. 동민은 그런 생각을 하며 현민의 눈을 바라본다.
현민과 동민은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린 서로가 서로에게 준비된 것 같잖아.
어린 시절을 제외하면, 애인 같은 거. 처음 있어본다. 그래서 준석은 어색해 죽겠다.
술에 취해 경훈에게 마음을 고백한 다음 날, 너무 부끄러워서 경훈과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리고 픽업 차량이 집 근처의 지하철 역에 자신을 내려주자마자 준석은 도망치듯이 자신의 원룸으로 뛰어들어왔다. 경훈에게 연락도 하지 않았다. 와, 이런 거 어떡해야해? 준석은 핸드폰으로 초록색 검색창에 '애인이 생겼어요' 라고 검색해본다. 그랬더니 터보 노래부터, 아주 이상한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엄마에게 애인이 생겼어요!' 라는 검색 결과가 나온다. 뭐냐고!!!! 준석은 핸드폰을 집어던졌다.
그런데 방금 전, 갑자기 경훈에게 메세지가 왔다.
ㄱㄱㅎ : 이따 점심 시간에 옥상으로 와요. 11:24
좋다고 해 놓고, 왜 피하냐고 화를 내려나? 아니면 내 태도 때문에 또 상처받았나? 어떡해, 인생에서 이런 게 처음인데!!! 준석은 온갖 이상한 상상을 하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상민과 윤선은 오늘도 이 인간이 왜 저럴까. 싶어 혀를 찬다.
점심시간이 땡, 하자마자 준석은 옥상으로 달음박질쳐 올라갔다. 그렇게 쑥쓰러웠어도, 막상 얼굴은 보고싶은가 보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옥상을 둘러보는데, 아무도 없다. 내가 괜히 오버해서 빨리 올라왔나. 머쓱해져서 볼을 긁적이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안는다.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어깨에 턱을 얹고 찡얼대는 것만 봐도 누군지 알 것 같다.
"경훈씨, 안녕."
"........준석씨, 보고 싶었어요."
그러더니 품 안에서 준석을 반바퀴 돌리더니 다시 와락 껴안는다. 하루종일 연락도 없고. 눈 앞에 보이지도 않고. 보고싶어 죽는 줄 알았다구요. 경훈의 투정에 준석은 가만히 등을 쓸어준다. 어구, 우리 강아지가 그랬구나. 준석이 등을 어루만지자, 경훈은 몸을 살짝 뒤로 빼서 준석을 내려다본다. 혹시 준석씨, 선수에요? 그저께는 당기고, 어제는 밀고. 선수 같은 소리하네, 모쏠한테 선수라니. 누구 때문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설레서 일상생활이 안 되는 구만.
"준석씨. 날씨도 좋고 돈도 아낄 겸해서, 제가 도시락 싸왔어요!"
김밥이랑 유부초밥이랑 빵이랑 우유랑. 어때요? 경훈의 말에 준석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다. 난 나가서 둘이 점심 사먹을 생각밖에 못했는데, 도시락을 싸 왔다고? 안 그래도 월요일 아침에 일어나는 게 얼마나 힘든데, 그럼 도시락 때문에 얼마나 더 일찍 일어난거야. 준석은 미안해진다. 미안해요, 라고 내뱉자 경훈은 뾰루퉁해진다. 아, 진짜!
"앞으로 미안하다는 말 좀 하지마요."
"그럼 미안한 걸 어떡해요, 나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 잤을텐데."
"그런 건 미안한게 아니라 고맙다고 하는 거에요. 자, 빨리 고맙다는 표시로,"
뽀뽀! 경훈은 입을 쭉 내민다. 네?? 준석은 경훈의 팔 안에 갇힌채로 얼굴을 붉힌다. 아니, 저기, 우리 어제부터 사귄 거잖아요. 벌써 뽀뽀는 좀... 우리 이미 할 거 다 하지 않았어요? 경훈의 말에 준석은 더욱 얼굴이 빨개진다. 아, 그거는! 그건, 저기... 준석이 고개를 푹 숙이자, 경훈은 귀여워 죽을 것 같다. 아, 내 심장... 이렇게 귀여운 건 심장에 해롭잖아요...
"그럼, 먼저 볼에 뽀뽀! 이건 괜찮죠?"
경훈이 볼을 돌려대자, 준석은 잠시 머뭇거린다. 그러다 결심이 선 듯, 입을 천천히 가져다댄다. 경훈은 그런 준석을 곁눈질로 보더니, 준석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쪽, 하고 입과 입이 맞닿았다. 미, 미쳤어요? 준석은 황급히 경훈의 품 안에서 벗어나며 경훈의 가슴팍을 한 대 친다. 누, 누가 보면 어떡해요! 준석의 말에 경훈은 메롱, 한다.
"그럼 우리 집에선 아무도 안 봐서 그런 거에요?"
오늘은 참 기념비적인 날이다. 준석은 난생 처음으로 사귄 연인에게 처음으로 로우킥을 날렸기 때문이다.
"이게 지금...!!"
진호는 눈을 깔고 있었다. 하지만 얼굴이 벌개져 억지를 부리고 있는 광고주에게 사과할 생각은 없다.
오늘은 광고주와 미팅이 있는 날이다. 기획팀과 영업1팀의 경란, 진호는 광고주와 오후 2시부터 대면해 웹사이트 광고에 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분명 처음에는 분위기가 매우 좋았다. 광고주는 천재광고가 자신의 직업군에 대한 높은 이해와 분석, 그리고 경쟁사의 키워드 분석을 통한 회사의 키워드 및 이미지 구축까지. 어느 곳 하나 빠지지 않는 일처리에 감탄을 하며 박수를 쳤다. 그런데 회의가 진행된 지 한시간 반이 지나자, 이 광고주는 귀를 후비며 한 마디를 던졌다.
"그런데 - 솔직히 노출할 채널을 늘려야 아무래도 좀 - 이게 되지 않겠습니까?"
라며 광고주는 엄지와 검지를 비빈다. 돈 얘기다. 진호는 가끔 이런 사람들이 있지, 라며 덤덤하다. 되는대로 광고의 노출 빈도와 채널만 늘리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게다가 분명 이전 성과지표로 단순히 늘리는 것은 오히려 비용 측면에서 손해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보고를 드렸는데. 이 사람, 아마 우리가 보낸 리포트를 건성으로 본 게 틀림 없다, 라고 생각하며 진호는 입을 열었다.
"이전 보고서에 단순한 유통 채널 증가는 오히려 광고 효과를 감소시킬 수 있다고 적혀있습니다. 또한 그 보고서를 읽고 아무 말씀 없으셨다는 것은, 그런 사실에 동의를 하신 줄 아는데요."
"아, 뭐 물론 그랬죠. 하지만 만에 하나, 라는 것이 있잖습니까?"
"... 소 뒷걸음질치다 쥐 잡는 것을, 광고의 성공적인 효과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진호의 일침에, 광고주는 책상을 세게 내리친다. 쾅, 하고 치자 펜이 제자리에서 탁 튀겼다. 연승은 그걸 보고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다. 저 힘으로 얼굴을 맞았다간, 진호씨 강제 광대 수술을 하게 될거야... 경란은 애써 웃으며 진호를 말린다. 그리고 광고주 쪽으로 진정하라는 듯, 손바닥을 펴 보인다. 아하하, 광고주님도 만족하고, 광고 효과도 증대시킬 방안을 찾아보자구요. 요환과 정문도 그러믄요, 그러믄요! 라며 애써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진호는 굳어진 얼굴로 광고주를 바라본다.
"분명 보고서에 그것에 대한 웹 로그 분석과 지표까지, 차트와 그래프까지 첨부되어 있었습니다. 제대로 읽으셨다면 만에 하나라는 말도 나오지 않을테죠. 뻔히 실패할 것이라는 걸 아시니까요. 저희가 드린 보고서를 제대로 읽으시지 않으셨다면, 광고 대행 회사에 대한 기만이라고 생각합니다."
"뭐야? 너 다시 말해봐. 그리고 실패? 웃기지 마, 나 한 회사 대표고 사장이야! 고작 대리라는 쪼끄만 놈이 뭘 알아!"
"고작 대리가 아는 걸 한 회사 대표께서 모른다는 것은, 회사에게 참 안된 일이네요."
뭐가 어째? 광고주가 격노했다. 진호를 뺀 나머지 사람들은 아연실색한다. 광고주가 벌떡 일어나, 진호에게 다가온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몰라! 정문의 머릿속에 긴급 사이렌이 울린다. 정문도 일어나, 진호와 광고주 사이에 선다. 그리고 웃으면서 애써 광고주를 진정시켜 본다.
"지, 진정하세요. 이렇게 회의를 하면서 절충안을..."
"기집애가 뭘 알아!"
저리 꺼져! 라며 광고주는 한 팔로 정문을 밀친다. 가녀린 정문은 그대로 픽, 쓰러지며 밀쳐진다. 정문씨! 경란과 요환은 정문에게 다가간다. 진호는 동료를 쳤다는 사실에 분노하여 책상을 박차고 일어났다.
"이게 무슨 행패야!"
"어디서 어린 것들이 알지도 못하고! 광고주가 하라면 하는 거지, 말이 많아!"
"한 회사가 대표의 무식함으로 망하는 걸, 광고 회사로써 냅둘 수 있을 것 같아!!"
진호가 소리를 지른다. 그러자 광고주의 앙 다문 입과 턱 근육이 실룩, 한다. 그러더니 오른손으로 주먹을 쥔다. 어지간히 풍채가 좋다 보니, 주먹이 웬만한 사람 얼굴 크기만하다. 보통의 진호 같았으면, 맞는 것이 두려워 피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은 회사에서 행패에, 자신의 동료를 치기까지 했다. 때릴 테면 때려봐라, 싶어 진호는 지지 않고 맞서서 노려본다.
"이게...!!"
광고주는 진호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들어올린다. 모든 사람이 긴장한 채로 그 주먹에 집중한다. 어찌나 집중을 했던지, 미팅룸 문이 벌컥 열리고 누가 뛰어들어오는 것도 보지 못한다. 진호는 이를 꾹 다문채로, 아픈 것에 대비해 눈을 질끈 감는다. 곧 퍽 하는 무거운 마찰음이 들리고, 누군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진호는 아프지가 않다. 게다가 제대로 서 있다. 뭐지? 싶어 눈을 천천히 들어올린다.
"아이고, 이게 무슨 난리입니까, 강사장님."
상민이 웃으면서 들어온다. 그러나 눈은 웃지 않고 광고주를 똑바로 노려보고 있다. 진호는 자신과 광고주 사이에 한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 사람은 왼쪽 뺨을 감싸더니, 진호 앞을 막아선다. 이 뒷모습은, 이 사람은.
"자, 자, 장차장. 괘. 괜찮나...?"
평소 광고주와 사적인 친분이 있던 동민이었다. 동민은 아무 말 없이 계속해서 진호의 앞에 버티고 서 있다. 광고주는 자신이 동민의 뺨을 진호 대신 주먹으로 내리친 걸 깨닫고는, 흥분이 한꺼번에 가셨다. 그리고는 안절부절 못하며 상황파악을 하기 시작했다. 이거이거, 미팅룸 꼴이 말이 아니네요. 상민은 살벌하게 내뱉는다.
"이것 참, 강사장님이 바라시는 대로 엄청난 신뢰관계가 아닙니까?"
"아니, 이팀장. 나는 그게."
상민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가신다. 강사장은 더듬거리더니, 자신의 짐 쪽으로 뛰쳐가 가방을 허겁지겁 챙기기 시작한다. 곧 폭행에 피해보상, 진단서까지 다 해서 연락 드리겠습니다. 상민의 말에 광고주는 멈칫, 하더니 빠른 걸음으로 나간다. 저거저거, 죽여버릴까! 문 밖에서 정현이 분노에 차서 신발을 내동댕이치는 소리가 들린다. 연승과 요환은 바쁘게 미팅룸 책상 정리를 하기 시작한다. 경란은 정문을 부축하며 의자에 앉힌다. 그러나 진호는 동민을 바라본다. 동민은 계속 왼쪽 뺨에 손을 대고 있다. 괜찮냐? 동민이 진호를 보자마자 한다는 소리가 그거다. 맞는 건 자기가 맞아놓고. 손 떼봐, 진호의 말에 동민은 순순히 손을 뗀다.
"... 부었어. 형."
얼마나 세게 쳤던지, 그새 볼이 벌겋게 부어 있었다. 진호는 한숨이 나온다. 미안해. 진호의 말에 동민은 고개를 저으며 진호의 어깨를 토닥인다. 니가 안 다쳤으면, 그걸로 된 거야. 더 늦기 전에 도착해서 다행이다. 동민의 말에 진호는 동민을 껴안는다. 미안해, 형. 미안...
오늘은, 급하게 밀어내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 동민은 자신을 안은 진호의 뒷머리를 천천히 쓸어내린다. 진호에게서 우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울지마, 동민은 등을 몇 번 두드려준다. 내가 일찍 와서 다행이야. 다행이다.
"장차장님이요????"
경훈의 높아진 목소리에 유현과 현민은 이야기를 나누던 것을 멈추고 경훈을 바라본다. 경훈의 표정은 놀람을 넘어서서 거의 경악에 가까웠다. 현민은 동민의 이야기에 뭐야, 무슨 얘기에요. 라며 경훈을 돌려세운다. 준석과의 통화를 끝낸 경훈이 둘에게 이야기한다.
"오늘 광고주가 미팅 중에 행패부렸는데, 동민이 형이 맞았대."
지금 매체팀은 매체 컨설팅을 위해 오후에 방송국에서 조사 및 견학을 마치고 회사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회사 앞 버스 정류장에서 내리기 직전, 준석에게 이런 연락이 온 것이다. 현민은 잠시 멍해진다. 맞았다고? 얼마나, 심하게 맞은건가? 동공이 흔들리던 현민은, 버스 뒷문이 열리자마자 버스에서 튀어나가듯 뛰어내린다. 어, 야, 같이 가!
"실례합니다, 실례합니다!"
퇴근 시간이라 사람들이 버스 정류장에 바글바글 모여 있었다. 버스 정류장을 벗어나도, 제대로 걸을수도 없을 만큼 많은 인파가 이동하고 있다. 이미 퇴근해 버린 건 아니겠지? 마음이 급해진 현민은 인파를 가르고 뛰기 시작한다. 사실 뛰지도 못한다. 사람이 너무 많아 뛰다가 걷고 다시 뛰다가 걷고를 반복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런 현민을 유현과 경훈은 종종걸음으로 뒤따라간다.
한편 동민은 막 회사 건물을 벗어나는 중이었다. 왼쪽 뺨은 아직도 팅팅 부어있다. 아까 티슈를 입 안에 넣어보니, 피가 묻어나왔다. 주먹으로 뺨을 맞으면서 입 안이 터진 것이다. 돼지 같은 놈이 힘 하나는 더럽게 좋네. 동민은 아직도 쿨팩을 뺨에 대고 있다. 아파죽겠네. 이래선 오늘 저녁에 뭘 먹지도 못할텐데. 하아, 하고 한숨을 내뱉던 동민은 어디선가 현민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을 느낀다. 주위를 둘러보니, 엄청난 인파가 퇴근 중이다. 그런 사람들 사이엔, 현민은 커녕 현민닮은 사람 하나 없다. 맞으면서 왼쪽 귀가 안 좋아졌나. 왜 어린이 목소리가 들려. 노래나 들어야겠다. 그렇게 생각한 동민은 귀에 이어폰을 꽂고 뒤를 돌아 주차장으로 발을 옮긴다.
계속해서 사람들과 부딪혀 실례합니다, 죄송합니다. 만을 반복하고 있던 현민은 저 멀리서, 인파 사이에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한다. 저깄다, 아직 안 갔어! 찾았다는 기쁨에 현민은 더욱 속도를 낸다.
"차장님!!!"
또야. 이제는 노래 속에서 어린이 목소리가 들려? 귀가 제대로 망가졌구만. 내일 점심시간에게 이비인후과나 가 봐야겠다고 생각하던 동민은 뒤에서 누가 어깨를 붙잡아서 화들짝 놀란다. 뒤를 천천히 돌자, 뛰어왔는지 숨을 헐떡이는 현민이 보인다. 어린이..? 진짜 어린이네.
"맞았다면서요. 어쩌다가 그런 거에요? 지금은 괜찮아요?"
아, 아니네. 쿨팩 밑으로 부어있는 왼쪽 뺨을 보더니, 현민은 얼굴을 팍 찡그린다. 광고주가 미팅 때 난리쳤다면서요. 하... 현민이 한숨을 쉰다. 동민은 사회 생활이 그렇지 뭐. 라며 웃어보인다. 웃지 마요. 웃을 때 아니야. 현민은 동민이 멘 가방을 풀어서 자신이 대신 멘다. 뭐야, 훔쳐가지마. 아픈 사람이 뭘 메요. 차까지 제가 메다 드릴게요.
"됐다, 위에 올라가서 빨리 퇴근 준비해서 가. 벌써 6시 넘었어."
"속상하니까 그만 말해요. 얼른 차장님 차로 가자구요."
현민의 말에 동민은 삐딱하게 서서 가만히 현민을 바라본다. 어린이, 차 태워줄게. 네? 현민이 되묻자, 동민은 오른손으로 차키를 꺼내 흔들어보인다. 집, 바래다 준다고. 빨리 가방 가지고 내려와. 옆쪽 길에 차 대놓고 있을게. 동민의 말에 현민은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회사로 뛰어들어간다. 어라. 야, 내 가방은 주고 가야지! 동민은 현민의 뒤에 대고 외쳐보지만, 이미 현민은 자신의 가방을 멘 상태로 건물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못 말려. 라고 생각하며 현민이 사라진 곳을 계속해서 바라본다.
"형, 혀엉!!!!!!!!!!!!!"
"아, 깜짝이야!!! 왜 소리를 질러!!!"
경훈이 귀 옆에다 대고 소리를 지른다. 이게 남 귀머거리 만들 일있나!! 동민이 소리를 버럭 지른다. 아까 저기서부터 계속 소리지르면서 불렀어요! 유현이 인파 사이를 가리키며 말한다. 아, 그랬어? 안 들렸어. 머쓱한 듯 동민이 말하자, 경훈이 울먹이는 표정을 짓는다. 광고주한테 맞았다며, 귓방망이 맞아서 귀 안 좋아 진거야? 우리 형, 나이도 많은데 귀까지 안 좋아서 어떡해...?? 다리는 아직 튼튼하다, 라며 동민은 낮에 경훈이 로우킥 맞은 곳을 또 때린다. 아!!! 아까 나 여기 맞았단 말이에요! 누구한테? 동민이 반문하자 경훈은 아! 그... 뭐, 있어요. 라며 말을 돌린다.
"난 또 현민이가 막 달려가길래 엄청나게 구타당한 줄 알았네. 생각보다 많이 안 다치셨네요."
"오, 척척박사. 바로 알아맞혔어!"
이 와중에도 놀리고 싶어요? 사실이잖아. 동민이 웃어보이자 유현은 에잇, 저 가요. 라며 회사 안으로 들어간다. 경훈도 혀엉, 아푸지 마여... 나 가요... 라며 유현을 따라간다. 하여간 매체팀 인간들은 재밌다니까, 동민은 씩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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