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드라마
이것이 바로 엄마의 마음인가. 준석은 입가에 잔뜩 묻히고 먹는 경훈을 보며 흐뭇해진다.
외근은 네시 반쯤 끝났다. 생각보다 일찍 끝났지만, 청소하고 요리하기엔 시간이 너무나 모자랐다. 단거리 질주를 하듯 달려서 마트에 들러 재료를 사고, 허겁지겁 요리를 하고, 끓이는 동안 널브러진 옷가지들과 물건들을 치웠다. 이 모든 일을 1시간 반만에 끝내다니...! 준석은 뿌듯한 마음으로 경훈을 방으로 들였다. 경훈은 깨끗한 방과 맛있는 냄새에 역시, 우리 준석씨는...! 이라며 눈에 콩깍지를 덕지덕지 발랐다.
"입맛에 맞아요?"
"응!"
완전 - 헤헤헤. 경훈의 애교에 준석은 하늘을 날아갈 것 같다. 매일 자취하면서 혼자만 요리해서 먹었는데, 이렇게 다른 사람과 나눠 먹으면서 요리의 뿌듯함을 느낄 줄이야. 게다가 그게 처음 사귄 나의 애인이라니! 준석은 턱을 괴고 밥그릇을 비우는 경훈을 사랑스럽게 바라본다. 경훈은 마지막 밥풀 하나하나까지 싹싹 긁어먹는다. 이렇게 맛있는 거 처음이에요! 어구, 그랬어요 - 경훈이 내민 손등을 준석은 쓰다듬는다. 그리고 빈 그릇을 모아 싱크대로 밀어넣는다. 경훈은 남은 음식이 든 냄비를 가스렌지 위에 얹어놓는다.
"자, 이제 우리 양치질해요."
"잉, 밥먹자마자 바로요?"
네, 바로 해야죠! 경훈씨 칫솔 없을까봐 새 거 하나 꺼내놨어요. 자신의 손에 칫솔을 쥐어주는 준석을 보며 경훈은 당황한다. 원래 양치질은 밤에 자기 직전에 하는 거 아닌가여? 밥 먹고 나서는 소화시키면서 빈둥거려야 제맛이지! 그러나 준석은 밥 먹고 나서 바로 치카치카 양치질을 하는 것이 습관화되어있다. 먹고 바로바로 이를 깨끗하게 닦아야 입냄새도 안 나고 입 안 위생에 좋지! 아... 귀찮은데 어쩌지... 경훈은 잠시 고민하다가, 칫솔을 받아든다. 우리 준석씨가 하자는데! 해야지!
경훈보다 먼저 양치질을 하고, 설거지를 깨끗하게 하는 준석이다. 밥 먹고 바로바로 해야 음식물도 안 눌어붙지. 사실 혼자 집에 있을때는 몇 시간이고 냅두지만, 오늘만은 경훈에게 깔끔하고 좋은 모습을 보여야한다. 뭐, 둘이 먹은 거라 그릇도 조금인데 이 정도야 금방하지. 준석이 그렇게 다 씻은 그릇과 수저를 건조대에 놓고 있는데, 경훈이 화장실에서 나온다. 아, 양치 다 했어요? 설거지 뒷정리를 하고 있는 준석을 보더니, 경훈은 웃으며 준석에게 다가온다. 그리고는 뒤에서 껴안는다. 준석씨, 우리 신혼부부 같지 않아요?
"ㅇ, 예?"
"화장실에서 나오는데 나는 내 마누라가 부엌에 서 있는 줄 알았어."
나 완전 심쿵! 경훈의 말에 준석은 쑥쓰럽다. 낯간지럽긴 한데, 기분은 좋네. 그, 그러게요. 라며 귀가 빨개지는 준석이다. 어, 귀 빨개졌다! 경훈은 산수유처럼 붉어진 귀를 보더니, 앙 하고 살짝 문다. 이를 내어 살짝 깨무는 것은 어느새 입술로 살짝 무는 것으로 바뀌더니, 이젠 혀를 내어 살짝살짝 핥는다. 간지럽고 서서히 흥분이 되는 준석은 목에서 맴도는 신음을 애써 참으며, 경훈을 살짝 밀어낸다.
"아, 아하하. 우리 이제 ㅁ, 뭐할래요?"
"...내가 뭐 하고 싶어하는 거 같아요?"
네...? 준석이 고개를 뒤로 돌려 경훈을 불안하게 바라본다. 경훈은 씨익 웃더니, 귀에서 볼로, 볼에서 목덜미로 점점 입이 내려온다. 키 차이 때문에 불편한지 아예 준석을 들어올려 싱크대에 앉힌다. 이, 이러면 싱크대 내려앉아요! 준석은 두 팔로 간신히 자신의 무게를 지탱한다. 경훈은 준석의 와이셔츠 맨 위의 단추를 풀더니, 아예 목덜미에 얼굴을 묻는다. 아, 간지러워. 준석은 경훈의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뒤로 젖힌다. 경훈의 손은 점점 준석의 가슴팍에서 그 농도를 더해간다. 그리고 허리로, 허리에서 허벅지로 손을 옮길 때 준석은 입술을 깨문다. 그러다 경훈의 손이 점점 허벅지 사이를 파고들자, 깜짝 놀라 경훈의 손을 붙잡는다.
"자, 잠깐만요. 경훈씨, 저기..."
"......"
경훈이 나른한 눈빛으로 준석을 바라본다. 그 눈빛에 준석은 압도당한다. 왜요? 낮게 깔린 경훈의 목소리까지. 준석은 이제 아무것도 모르겠다. 부끄러운 것도, 쑥쓰러운 것도. 자신을 날려버린다.
"...키스해 주세요."
준석의 말에, 경훈은 이성을 잃는다. 원래는 침대에서 부드럽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키스를 해달라니, 게다가 흥분해서 빨간 얼굴로. 이러면 내가 미쳐버리잖아. 침대로 갈만한 정신이 없다. 경훈은 준석의 입 속으로 거칠게 혀를 넣으며 옷을 하나하나 벗어던지기 시작한다.
식탁을 지탱하고 있는 준석의 팔이 위태롭게 흔들린다. 뒤에서 거칠게 밀고 들어오는 경훈의 힘이, 허리에 아프게 전해진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의 아래를 쥐고 흔드는 경훈의 손길에, 아픈 것보다 주체 못할 흥분이 머리를 가득 채우고 웅웅 울린다. 준석의 입에서는 평소라면 할 상상도 못 했을, 큰 소리의 신음이 쏟아져 나온다. 그리고 경훈은 그런 준석의 소리에 더 흥분해서 준석을 강하게 몰아붙인다. 경훈의 무게가 그대로 준석의 몸으로 전해져 온다. 미처 다 버틸 수는 없었는지 쾅, 하고 준석의 팔이 식탁 위로 무너진다. 경훈은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리고 그대로 준석의 안에서 나와, 다급하게 준석을 돌려세운다. 어느 팔이 부딪힌거지? 많이 아파요? 어떡해... 미안해요... 아무 팔이나 잡고 다급하게 입을 맞추는 경훈이다.
".. 경훈씨, 신경쓰지 말고..."
"...네?"
나 팔 말고... 빨리... 미처 가시지 않은 흥분에 말도 제대로 못 잇는 준석이다. 경훈은 발갛게 달아오른 준석을 보더니, 식탁에 준석을 들어서 앉힌다. 다시 자신의 안에 깊게 들어차는 경훈에, 준석은 고개를 뒤로 젖혀버린다. 이렇게나 흥분한 자신은 처음이다. 심지어 자기 위로를 할 때도 이렇게 정신을 잃을 것 같은 기분은 느껴본 적이 없다. 이런 자신이 너무 낯설지만,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준석은 마구 흔들리는 시야 속에서도, 자신을 나른하게 바라보는 경훈을 보며 느낀다. 그리고 입을 연다. 나, 키스, 아, 응, 해 줘...
격하게 흔들리며 말하는 준석에 경훈은 준석의 뒷목을 잡고 그대로 자신의 얼굴로 끌어당긴다. 두 사람의 입술이 끈적하게 맞물린다. 이 뜨거운 연인에게 밤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아잇. 누구야. 친구들과 게임을 하던 현민은 핸드폰 진동소리에 짜증을 내며 핸드폰 액정을 바라본다.
- 대장 미니미니♡
어? 놀란 현민은 핸드폰을 쥐고 빤히 내려다본다. 그러자 게임 속 현민의 캐릭터는 적들의 공격을 맞고 그 자리에서 죽어버린다. 하지만 그걸 신경쓸 때가 아니지. 현민은 다급하게 채팅창에 몇 마디 남긴다.
hyun5min : 님들나ㄱㄱㄱ급한1
hyun5min : ㅂㅂ
? 투성이가 되는 채팅창을 무시하며, 현민은 거칠게 노트북 코드를 뽑아버린다. 그리고는 전화를 다급하게 받는다.
"차장님!"
「안녕 어린이. 지금 뭐해?」
"저, 서울 자취방입니다."
「알고 있어. 지금 잠깐 나올래?」
나 너네 자취 건물 앞에 공원인데. 동민의 말에 현민은 벌떡 일어난다. 네? 바로 요 앞이시라구요? 제가 금방 나갈게요! 그래, 기다릴게. 동민과의 통화가 끝나자마자, 현민은 거울 앞으로 뛰어간다. 아오, 이 머리 완전 거지 같은데. 이리저리 가르마 방향을 바꿔보다가, 전혀 수습이 안 되어 결국 검은색 스냅백을 돌려써서 덮어버린다. 옷은 얇은 진회색 맨투맨 하나로 되겠지. 진청색 반바지를 입은 현민은 오, 귀여운데 오현민 - 이라며 자뻑을 마지막으로 다급하게 방을 나선다.
굳이 어디 계시냐고 전화할 필요도 없었다. 동민이라면, 가로등이 비추지 않는 살짝 어둑어둑한 곳에 앉아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적중했다. 동민은 병커피를 마시며 혼자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의 옆엔 현민의 몫으로 사온 병커피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현민은 그것을 집어들고는 자연스레 그 자리에 앉았다. 동민은 왔냐 - 라며 반가운 눈길을 보낸다. 여기 어쩐일이세요?
"누가 이 근처에 살아서, 얼굴 잠깐 볼까하고."
누구요? 눈을 현민이 동그랗게 뜬다. 나 보러 온 게 아니였어? 현민의 토끼 같이 커진 눈에, 동민은 잠시 가만히 현민을 쳐다보다가 빵 터진다. 몸도 제대로 못 가누면서 웃더니, 결국 자기 무릎에 이마를 대고 엎드려 큭큭 웃는다. 그런 동민에 현민은 고개를 갸웃한다. 왜 웃으시는 거에요? 동민은 눈물을 쓱 훔쳐낸다.
"우리 어린이, 아직 어린이구나."
어떨 때는 송곳처럼 날카롭다가, 이런 면에서 맹한 모습이라니. 귀엽네. 동민은 허리를 꼿꼿이 펴고 다시 앉는다. 어린이, 미션 중간 현황이 궁금해서. 보고 좀 올려봐. 현민은 동민의 말에 아, 하고 입을 멍하게 벌린다. 그리고는 잠시 커피 병만을 내려보더니, 뚜껑을 열고 한 모금 마신다. 달다. 아직 커피 마실 줄 잘 모르는 현민을 위해 부러 제일 단 것을 사 온게 분명했다.
"뭐, 예상대로 순항인 것 같습니다."
"그걸 어떻게 알아. 구체적으로 그걸 뒷받침하는 자료가 있나?"
"네. 그럼요."
광고는 언제나 고객의 반응을 기반으로 성공여부를 판단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고객의 반응이 그 뒷받침을 해 주죠. 현민은 웃으며 동민을 바라본다.
"고객이 점점 편안하게 여기고, 바라보는 시선의 빈도가 잦아지고, 찾는 빈도 또한 점차 잦아지고 있습니다. 이 정도면 전망이 밝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내가 그랬었나. 동민은 생각에 잠긴다. 확실히. 한 달만에 현민은 동민에게 가장 편한 사람이 되었다. 굳이 부연설명 없이도 모든 상황에 대한 설명을 가장 잘 알아들었으며, 자신이 기대하는 바를 눈빛 하나만으로 알아듣고 실행해 왔다. 그래서 동민은 모든 일이 있을 때, 현민을 찾았다. 그리고 항상 현민을 찾기 위해 고개를 돌리면, 어떻게 알았는지 이미 현민은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자신이 보낸 신호에 바로 반응해서 다가오듯이.
"그래도 아직 고객이 충성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볼 수 있지는 않을까? 게다가, "
경쟁사가 있고 말이야. 동민의 말에 현민은 깜짝 놀라 동민을 바라본다. 이건 분명, 진호의 얘기다. 동민은 이제 부정할 수 없었다. 예전엔 진호가 마음 속에서 자리를 넓혀갔다. 점점 벽을 넘으려 올라왔고, 동민은 그런 진호에 맞게 벽을 높게 쌓아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고개를 돌려니, 한 들꽃이 자신의 영역 안에 들어와 싹을 틔웠다. 그리고 그 들꽃은 잘 자라고 있었다. 편안한 마음으로 꽃이 피우기를 바라고 있는 동민이었다. 이런 작은 꽃이 내 마음에 무슨 바람이야 일으키겠느냐고. 이런 생각과 함께. 그렇게 냅두었던 꽃에게, 이젠 눈길이 점점 가고 있었다. 인정해야했다. 어느덧 오현민은 모르는 척할 수 없을만큼 동민의 마음에 닿아 있었다.
"당연히 경쟁사에 대한 차별화가 있죠. 경쟁사는 특정 고객을 위해 자신을 변화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본질이 흔들리게 된다는 단점이 있죠. 반면 저는 - "
그 고객 하나만을 위한 거고. 현민의 말에 동민은 현민을 마주본다. 그래도, 급하게 충성도를 바라진 않을 거에요. 다급하게 나만을 봐요, 라는 광고는 오히려 고객의 반감만 불러일으키잖아요? 그런 강요는 원하지 않을 거에요. 어차피, 이제 고객도 알고 있잖아요. 라며 현민은 싱긋 웃는다. 응, 알아.
"그래도, 확실하게는 해 줘요. 어느 쪽 하나를 선택해야 의미 없는 생산을 중지하죠."
미안하다고 냅둬 버리기엔, 너무 멀리 왔잖아요. 다 알고 있구나. 네, 그럼요. 동민은 착잡한 마음에 커피를 마신다. 너무 뒤늦게 고객맞춤형 물건이라, 죄송합니다. 현민은 애써 장난스럽게 고개를 숙인다. 동민은 그 말에 입에서 커피를 떼더니, 픽 웃는다.
"어린이. 내가 뭐라고 했지? 광고인은 생각하는 걸 유연하게 해야 된다고. 반대로 생각할 줄도 알아야지."
동민은 현민의 관자놀이 쪽에 손을 가져다댄다. 그리고 살짝 어루만졌다.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평생 못 만날 수도 있었던 걸 이제서라도 만나게 되어서 다행인 거야. 현민은 입이 벌어진다. 동민은 보고 잘 들었어. 라며 일어나 엉덩이를 턴다.
"벌써 가세요?"
"응, 보고 들으면서 생각할 게 좀 있었는데. 목적 달성했으니 집에 가야지."
"얼굴 본다고 하신 분은요? 이미 보고 오신 거에요?"
현민의 말에 동민은 현민에게 다가선다. 그리고 빤히 현민을 내려다본다.
"다 봤다. 나 갈게."
동민은 뒤돌아 미련 없이 공원을 빠져나간다. 현민은 잠시 멍하게 있다가, 왠지 쑥쓰러워져 목덜미를 쓸어내린다. 뭐야, 볼 사람이 나였어?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천재회사의 전체 회의의 쉬는 시간. 유현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물을 마신다.
역시 영업 1팀에서는 동민이 나와 그 동안의 영업 실적과 앞으로 3분기에는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지표를 통해 논리정연하게 설명했다. 영업 2팀에서는 준석이 나왔다. 그런데 어디가 불편한지, 준석은 의자 하나를 가지고 나와 몸을 지탱하며 프리젠테이션을 했다. 영업 2팀 또한 3분기 방침은 1팀과 비슷했다. 정현의 15분 휴식시간! 의 외침을 시작으로, 회의실의 무거운 분위기는 열린 문 틈으로 빠져나왔다.
"김대리님, 피피티 구동 다 됩니다! 방금 다 확인 했어요!"
현민은 쉬는 시간이 주어지자마자 다음 발표인 유현의 피피티가 잘 돌아가는지 최종 확인을 한 후, 오케이 사인을 손가락으로 만들어보였다. 현민에게 피피티 슬라이드를 넘기는 리모컨을 건네받은 유현은 씩 웃는다. 오인턴 일처리 하나 최고라니까! 장차장님이 왜 이뻐하는지도 알겠어!
"네?"
"장차장님이 요즘 현민씨 되게 이뻐하잖아 - 보통 바보 소리 듣고 핀잔듣기 쉬운데, 아주 현민씨랑 얘기할 때는 편해보이시던데?"
유현의 말에 현민은 씨익 웃더니 아이고, 감사합니다. 라며 유현에게 악수를 건넨다. 이렇게 귀엽고 일도 잘하는 인턴이라니, 나 같아도 이뻐하겠지만. 유현은 중얼거리며 현민의 손을 맞잡는다.
"글쎄."
심드렁한 목소리의 진호다. 유현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진호를 바라본다. 요새 진호와 현민 사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틈만 나면 둘이 으르렁거린다. 진호가 날카롭게 현민을 대하면, 현민도 지지 않고 맞선다. 원래 둘 다 이런 사람들이 아닌데... 유현은 갑자기 이 두 사람 사이에 끼게 되어 당황스럽다. 아... 나가고 싶다...
"어제 건네 준 파일 정렬은 다 했나 몰라."
"기한을 정해주시지 않으셔서, 오늘 회의 후에 하려고 했습니다."
"분명 어제 아침에 준 걸로 기억하는데? 근데 아직도 안 했단 말이야?"
그거 좀 급한건데. 이렇게 일처리가 굼떠서 어떡해? 진호의 으르렁거림에 유현은 식은 땀이 삐질 솟는다. 아, 저기, 진호씨... 좀 말리려는 찰나, 현민이 반격한다.
"급하고 중요한 업무라면 기한이 언제인지 정확히 전달해 주세요. 그리고 저도 공식 인턴 업무가 있습니다. 그 업무를 우선적으로 끝내고 대리님이 넘겨주신 업무를 할 수 있는게 아닐까요?"
그리고 그렇게 몰아붙이시면 되던 일도 안 되죠. 현민의 빈정거림에 진호의 이마에 핏줄이 솟는다. 몰아붙인다. 이 단어는 진호에게 예민하다. 안 그래도 이제 동민을 밀어붙이기로 작정한 진호에게, 현민은 이 단어가 어떻게 작용할 것인지 매우 잘 알고 있다.
"그래도 그렇게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는다고 일이 되는건가? 행동을 해야지."
진호의 말에 현민은 까득 소리를 내며 이를 간다. 솔직히, 현민은 동민이 불안하기도 하다. 이렇게 기다리고만 있는 것이,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가져다 줄 것인지 의문이 드는 것이다. 자신이 믿을 거라곤, 동민과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통함. 그리고 그것을 동민이 무척 편안해 한다는 것. 그러나 동민의 환경이 불안정하다. 바로 홍진호라는 사람 때문. 이렇게 흔들어대면 동민의 어두운 면이 어떻게 작용할 것인지. 너무나 불안하다. 진호는 그런 현민의 불안함도 알고 있다.
그러나 이 둘은 유현의 불안함을 알지는 못한다. 둘 사이에서 유현은 숨소리도 내지 않고 가만히 얼어있다. 둘의 신경전에 나가지도 못하고 가만히 물컵만 잡고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거친 진호와, 불안한 현민과, 그걸 지켜보는 유현. 그건 아마도 전쟁 같은 분위기.
오랜만의 야근이네. 동민은 뻐근한 목을 문지르며 이리저리 움직여본다.
원래 오늘 야근은 경란과 진호였다. 정현은 오후 야근 때문에 외근한 회사에서 바로 퇴근했다. 동민은 경란에게 퇴근하세요, 제가 대신 야근하고 가겠습니다. 라며 먼저 집에 갈 것을 제안했다. 경란이 결혼한 지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머, 그래도 돼요? 고마워 동민씨 - 라며 경란은 신랑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동민은 진호를 신경쓰지 않고 기획안 마무리에 몰두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보니 벌써 밤 아홉시가 넘었다. 아우, 목이야.
"많이 아파?"
자신의 목을 문질러주는 진호다. 동민은 다 끝냈냐며 진호에게 묻는다. 응, 나도 마무리 다 됐어. 슬슬하고 가자. 그래야지, 라며 동민은 지금까지 작성한 자료를 저장하고 내용을 다시 한 번 훑어본다. 오타는 있는지, 빠진 내용은 없는지.
"맥주 한 잔 하고 가자."
진호의 말에 동민은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진호를 바라본다. 진호는 한 쪽 팔을 책상에 짚고 비스듬히 서서 동민을 내려다본다. 동민은 피곤해, 라며 다시 서류 검토를 시작한다. 그럼 나 집까지 태워다 줘. 진호의 말에 동민은 눈을 질끈 감는다. 진호야.
"......"
"확실히 너를 잃고 싶지 않아."
그래도 계속 끌고가는 건. 이건 너한테 너무 희망고문이야. 그리고 설령 너와 잘 된다고 하더라도, 나는 이전 상처 때문에 너를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을거야. 진호는 동민의 말에 입을 꾹 다문다.
"이제와서 그렇게 밀어내면 나는 아, 그렇구나 해야하는 건가?"
"...진호야."
"말했잖아. 늦었다고."
진호는 좀 더 강하게 나가기로 한다. 동민이 대체 왜 싫다는 말을 못하는지, 확실하고 야멸차게 밀어내지 못하는지 알 수가 없다. 나에 대한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닌데, 왜 자꾸 과거 상처에 매여 있을까. 내가 좋은 사람인 걸 알면, 나도 이 관계로 인해 상처 받은 걸 알면. 그냥 나를 선택하면 안돼? 이 세상에 상처 안 받은 사람이 어디있어. 나도 상처가 있어, 형. 진호는 동민에게 호소한다. 동민은 고개를 저으며 컴퓨터를 끈다.
"미안해. 내가 좋은 사람을 잃는 게 너무 두려웠어.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든 될 줄 알았어. 너도, 나도, 아무런 상처 받지 않고 계속 그대로 지낼 수 있다고 생각했어."
어두운 나한테 좋은 사람들과 함께 계속해서 지내는 것. 정말 하나의 연극 같은 일이었어. 그래서 기뻤고, 계속 될 거라고 생각했어.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 만에 하나라는 것이 있다고 여겼던 거야. 0.1프로의 가능성보다 99.9프로의 가능성이 더 실현될 경우가 큰 걸 알면서.
"내 판단이 틀렸어. 미안해."
말을 마친 동민은 가방을 들고 사무실을 빠르게 빠져나간다. 진호는 동민의 자리에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두 사람이 드라마에 등장한다. 좋아해. 난 안 그래. 내겐 상처가 있어. 그런데 다가오는 네가 신경이 쓰이네? 그럼 나도 널 좋아하는구나. 좋아해. 사랑해. 해피엔딩. 이렇게 일반적인 드라마 같이 전개되었다면, 얼마나 기뻤을까. 그러나 우리의 드라마는 달랐다. 이렇듯 슬프고, 잔인하다. 우리의 드라마에서는, 두 사람이 가진 감정의 화살표가 엇갈려 두 사람 모두 상처를 받는다. 둘 다 상처 없이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한참을 진호는 그렇게 사무실에 앉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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