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콰트로 신분교환
목숨을 담보로 게임을 한다는 설정입니다.
콰트로
내가 지목당할 것은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오현민이 지목당할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현민이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불안한 눈이 초점없이 흔들리는 모습이 꽤나 볼만하다고 생각했지만 내 이름이 호명되었을 때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착잡했다. 이기고 돌아가겠다며 인터뷰를 하고 온 너를 보니 어이가 없었다. 너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를 선택했을까. 너에겐 내가 그렇게나 약한 상대였나.방금 전 까지만 해도 함께 살아나가자. 현실을 이겨내자 따위의 소리를 던 네가 나를 지목했다는 것은 큰 충격이었다. 배신이 일상인 이곳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믿어야 하겠지만 지금 이 상황을 나는 세차게 부정했다. 눈을 몇 번이나 감았다 떴다. 바뀌는 건 없다. 도망갈 수도 없다. 남은 선택지는 맞서는 것 뿐이었다.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런 공간에서 죽기는 싫다. 겨우겨우 떨리는 목소리를 바로 잡고 인터뷰를 했다.
"여기까지 온 이상 살아나가야죠."
그래, 네가 누구든 나는 살아나갈 것이다. 살아서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9회전 데스매치를 시작하겠다는 붕대맨의 목소리가 들렸다. 화면에서 보이는 붕대맨의 얼굴과 기계음에 소름이 끼쳤다. 게임에 감정을 대입해선 안 된다. 참아야 한다. 그 누가 생명을 건 게임에서 침착할 수 있겠냐마는 철저히 감정을 숨기고 숨을 죽여야만 살 수 있다. 설사 그토록 그리던 이를 짓밟고 올라서서라도 나는 살고 싶다.
딜러가 카드를 셔플하고 첫번째 멀리건을 했다. 모두 초록색이다. 시작부터 예감이 좋지 못하다. 경훈이의 표정이 묘했다.
"형, 멀리건 또 할 거예요?"
평소와 같은 목소리. 얼마 전만해도 들으면 마냥 좋았던 목소리가 이제는 거슬린다.
"말이 없네. 옛날엔 말이 많았는데."
부러 대답을 하지 않았다. 목소리가 다시 떨릴 것만 같아서 였다. 옛날이라니. 옛날이라고 해 봤자 고작 9주 전이다. 이곳에 갖혀지고, 사회와 단절되고, 9주 전에 이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낮은 목소리로 대답을 유도하는 네가 그렇게 미울 수가 없다. 이 지독한 게임의 주최자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이런 잔인한 이야기를 설계했던가.
두번째 멀리건을 하고 카드를 열었다. 5,3,1,0. 낮은 숫자다. 내겐 6이 없었다. 최고 숫자라곤 해 봐야 고작 5가 다였다. 널 이기기 위해서는 6이 필요한데 와 주질 않았다. 6을 얻기 위해서, 살아서 나가기 위해서 발악을 계속했다. 필요한 수는 나오지도 않고 교환을 할수록 숫자가 낮아져 갔다.
"저는 빨간색 아님 파란색 카드가 필요합니다."
진짜 빨간 혹은 파란 카드가 자신이 원하는 카드인건지 아님 나를 교란시키려 말한 건지, 어느 쪽이든 나를 기만한 것임엔 틀림이 없다. 네게는 내가 그리도 쉽게 보이는 걸까.
교환, 그리고 또 교환. 그토록 바라던 빨간 6이 나오질 않는다. 5번째 교환으로 이미 있는 노란색의 6이 나왔다. 마지막 교환을 통해 버렸다. 의미가 없다. 쓸모 없는 카드는 버려야 한다.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네 콰트로를 저지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도 나는 잘못된 판단을 하며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왜 이러나 싶다. 확률상 그 많은 카드들 중 빨간색 6이 나올 가능성은 희박하다. 순간적으로 판단력이 흐려진 것을 부인하고 싶었다. 네가 6이 나온 상황에서 뭐라도 해야 내가 살 수 있겠지만 말이 없는 가상의 인물들과 무작정 카드 교환을 한 것은 미친 짓이었다. 운에 모든 것을 걸었지만 불행한 도박은 실패로 끝났다. 순간적으로 네 운명를 좌우할 수 있는 0이 두 개나 내 손에 들어와 있었지만 나는 그것들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네 패에 나의 0이 섞여 들어길 바랐지만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0을 넣지 못한 것은 나의 부족한 실력 탓일까 아니면 너를 향한 최소한의 내 감정 때문일까.
네가 교환을 했을 때 빨간색 6이 버려졌다. 허무하다. 아니, 왜, 도대체. 나의 패배가 명확해 졌다. 찾아 헤메던 6이, 모든 것을 걸었던 빨간 6이, 네 손에 쥐어져 있었다. 나는 결국 닿지도 못할 허황된 꿈에 내 모든 것을 가져다 내 버린 셈이다.
콰트로는 완성 되었지만 이기진 못했다. 킹슬레이어의 질주를 바닥을 기는 개는 막을 수 없었다. 너느 내가 원하는 패를 쥐고 놓아 주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네 감정을 끝내 건네 주지 않았다. 조금 있으면 이곳을 떠나고 죽어야 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비참하다. 나는 내 감정하나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능력 탓이라고 돌리며 내 능력과 선택을 불신하고 경멸했다. 가장 낮은 곳에서 높은 곳까지 올라가 살아남길 바랐지만 주인의 사랑도 받지 못한 채 버려졌다.
우리의 플레이 방식은 정반대에 가까웠다. 혼자서 모든 것을 짊어지고 나서는 것은 같았지만 과정도, 결과도 달랐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는 살아나가려 필사적이었다. 목숨이 걸려있는 상황에서 어느 누가 필사적이지 않겠냐마는 다수연합에 속하지 않았던 우리는 의지할 데가 서로밖에 없었고 더 각별했으며 그 낭떠러지에 몰린 심정이 우리를 더 간절하게 만들었다. 의지할 곳이 서로밖에 없는 상황에서 어느 순간 동질감을 느꼈고 동질감이 연민으로 그 연민이 연모로 변해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너는 다른 이에겐 그 간절함을 쉽사리 내 비치지 않았지만 항상 너를 보는 나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너도 불안하구나, 너도 힘들구나.
"형, 미안해요."
약간은 쉰 듯한 네 목소리가 들렸다. 나를 죽인 너임에도 나는 흔들렸다.
"뭐가 미안해. 원래 한 명만 나갈 수 있잖아. 나는 어차피..."
잠시 숨을 들이 마시고
"죽어야 했어."
내뱉었다. 잔인한 말을 입 밖으로 내는 게 쉽지 않았다.
"네 손에 죽어서 다행이야."
애써 웃어 보였다. 입꼬리가 떨리는 게 느껴졌다.
"......미안해요."
뭐가 그리도 미안한 건지. 나를 딛고 올라서기 위해 선택했으면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네게 따져 들고 싶었다. 그렇게 미안해 할 거 왜 선택했냐고. 나도 살고 싶었다고. 그럼에도 불고하고 그런 모진 말들을 네게 쏟아내지 못한 것은 남아있는 연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잠시나마 네게 반문하려는 마음을 먹었던 내가 무안해질 만큼 네가 떨고 있었다. 고장난 인형이라도 되는 양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미안하다는 말만 하는 네가 미웠다.
"꼭 살아서 나가."
가넷을 모두 네게 넘겼다.
아아, 이것은 애증이다.
나를 죽인 너를 도저히 지울 수 없다. 너를 한편으로는 이렇게 미워하고 원망하면서도 너를 놓을 수 없다. 같이 살아서 나가고 싶었어. 턱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켰다. 흐려지는 시야가 짜증이 났다. 네 떨림이 보이지 않을 정도까지 앞은 흐려졌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시렸다.
"이것으로 제9회 더지니어스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살아남으신 플레이어들께서는......"
붕대맨의 목소리를 끝으로 내가 남을 자리는 사라졌다. 문을 열고 문 밖에 있는 남자를 따라갔다. 죽으러 가는 길에도 네가 생각이 났다. 밖의 집과 가족보다 네 얼굴이 먼저 떠올랐다. 내가 진짜 보다.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리지 않겠다 다짐하고도 네 마음을 얻지 못한 것에 실망하고 그럼에도 너에게 모든 것을 다 내걸었다. 제일 구석진 방에 도착하고 방 안에 덩그러니 놓여진 의자에 앉았다. 가스가 바닥에서부터 깔리는 게 느껴졌다. 완전히 밀폐된 공간 안에서 외로움고 허탈함을 느끼며 나는 너를 그린다. 머릿속이 하얘지고 네 얼굴만 남았다. 삭막한 방 속에서 의지할 수 있었던 사람은 너 뿐이었어, 경훈아. 이제는 의미가 없어진 기억들이 눈으로, 코로, 귀로 빠져나간다. 9주, 짧았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애타게 원했다. 결국 바라던 것을 얻지 못하고 사라진다. 이미 감각이 없어진 손끝이 흐려졌다. 눈을 감았다.
"9회전 게임의 최하위자는 김경훈씨입니다. 김경훈씨는 데스메치 상대를 지목해 주십시오."
무엇을 해도 죽을 바에야 차라리 형의 손에 죽고 싶었다. 그 순간까지도 나는 이기적이었다.
부족할 것 없이 자라온 내게 지니어스는 단 하나의 '재미' 였다. 게임을 하고 처음으로 나의 부족함을 자각했으며 내가 이렇게 쓸모 없는 인간이었는지도 되돌아 보게 되었다. 단점을, 부족함을 알아갈 수록 간절해졌다. 살고 싶었다. 살겠다는 마음 하나로 이미 여럿을 죽였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이기적이었는지 이렇게 무정했는지 씁쓸했으나 그런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살고 싶다는 열망만으로, 나만 살면 된다는 마음가짐으로 게임을 했었다. 연합을 부수고 의도적인 트롤링을 하고. 질타도 많이 맞고 비난도 많이 받았지만 나는 어쨌거나 우승을 거머쥐고 싶었다. 되도 않는 가치관과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버텨나가던 중 형을 봤다. 나만큼이나 간절해 보였다. 아니, 내게만 보이는 간절함이었다. 게임을 할 때의 그는 누구보다도 진지했지만 조명이 꺼지고 난 뒤의 그는 생각보다 맑고 생각보다 삶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빛 뒤의 그림자가 너무도 강렬해 그의 빛은 오직 나에게만 비춰졌다. 회색으로 물들어가던 나에게 빛을 준 사람이었다. 그런 형의 빛도, 그림자도 모두 좋았다. 그러나 나는 그 빛을 내 손으로 망가뜨렸다. 불어서 꺼버렸다. 찬란했던, 너무도 밝았던, 오직 나만의 것이었던 빛을 먹었다. 내 무지한 이기심은 불행하게도 운이 좋아서 그만 형을 낭떠러지로 내몰았다. 내몰린 개는 발버둥을 쳤으나 어느 순간 체념했다. 아끼던 개를 내가 직접, 벼랑 끝에 내던졌다.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을 비참하게 버리다니, 기사 자격 실격이네.
마지막까지 형은 맑아서 내게 탁한 말을 건네지 않았다. 그 투명함이 마음을 뒤흔들었다. 아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이미 여럿 죽여 봤으니 괜찮을 거라 생각했던 것은 오산이었다. 형을 향한 감정은 다른 사람들을 대하던 그것과는 달리 조금 더 각별했다는 것을 그제야 느꼈다. 미안하단 말 밖에 할 수가 없었다. 몸이 떨렸다. 허무해서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내게 눈물을 흘릴 자격이라도 있겠냐마는 울고 싶었다. 울고 소리치고 붙잡고 싶었다. 복잡한 감정이 미안하다는 말로 뭉쳐 나왔다. 울고 싶은 내 마음을 대변하듯 형의 볼을 타고 눈물이 굴렀다. 강하던 사람이 흘리는 눈물은 죄책감을 증폭시켰다. 남에겐 강하게 보였지만 알고보면 여린 사람이었다. 그런 여린 사람에게 죽음을 내던졌다.
빛을 잃은 기사는 옛 추억 속 광명을 되찾을 수 없었다. 잠시나마 하얗게 보였던 회색은 다시 본래의 색으로 되돌아 왔으나 백색이었던 시절을 그리워하기만 했다. 되돌아 갈 수 없는 현실을 저주하며 탁한 회색은 그림자가 되는 길을 택했고 결국 검은 어둠에 잡아 먹혔다.
신분교환
신분
1. 개인의 사회적인 위치나 계급.
2. 사법(私法)에서, 부모ㆍ자녀ㆍ가족ㆍ배우자 따위와 같이 신분 관계의 구성원으로 갖는 법률적 지위.
0.
현대 사회에서는 '신분' 이 사회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신분이라는 것이 단지 자신의 사회적 계급, 혹은 자신의 신상정보 등을 다른 이에게 제시하는 것을 넘어서서 하나의 상품 개념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지금의 '신분' 은 종이 낱장으로 정리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메모리칩으로 압축되어 각자의 몸 속에 존재한다. 이 칩은 자신의 신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기억에도 연관이 있는 것이라 그 가치는 더더욱 올라갔다. 신분이 바뀌면 그에 대한 기억마저도 바뀌어져버리는 시스템이라는거지.
앞서 말했듯이 '신분' 이라는 것이 하나의 상품으로 자리잡게 되면서 여유가 있는 이들은 백만장자, 억만장자의 신분. 그것도 안 되면 중소기업의 사장의 신분이라도 손에 쥐려 엄청난 돈을 들였다. 그 신분이 자기 손에 들어오게 되면 자신의 인생 자체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기억들을 모두 잃는다 해도 사람들은 부와 명예를 얻고 싶어했고, 그랬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작디 작은 메모리칩 하나에 온갖 가치와 액수를 부여해 그들의 욕망과 탐욕을 돈으로 환산해내었다. 그렇게 사람들은 자신의 부귀영화와 편의를 위해 매우 큰 돈을 들여가며 명예로운 신분을 구입하고, 자신의 보잘 것 없는 신분은 팔아버렸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자신의 신분을 '교환'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상상을 초월하는 거래를 해가면서.
이러한 사회 속에서도 소외되는 계층, 즉 소외계층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소외계층에 해당되는 이들은 두 부류이다. 신분을 잃어버린 사람, 그리고 신분이 없는 사람. 이 둘을 묶어 흔히 '신분부재자' 라고도 부른다. 신분이 없는 이들은 돈을 위해 자신의 보잘것 없는 신분이라도 팔아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한 가련한 인생의 인간이거나, 크나큰 사고로 인해 메모리칩, 즉 신분의 데이터가 모두 날아가버려 복구가 불가능한 이들이 속한다. 신분을 잃어버린 이들의 경우는 더 비참하다. 신분을 잃은 경우는 몸 속에 메모리칩마저도 없는 경우가 커 그들의 기억은 갈 곳을 잃고 모두 흩어지고 만다. 다시 말해 신분을 잃은 이들의 삶은 하루살이라는 것이다. 24시간마다 그들의 기억은 리셋되고, 리셋되기를 반복한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의 신분을 되찾거나, 혹은 다른 이들의 신분을 얻지 않는 이상은 평생동안 자신이 누군지조차도 모른 채로 살다가 죽는다. 거짓말같지? 실제로 이런 케이스로 죽는 소외계층이 매년 서너명씩은 존재한다. 신분이 없는 것의 문제는 이 뿐만이 아니다. 정확한 신분 파악이 안 되는 이들은 사회생활에서 제약이 걸려 완전히 배척되고 만다. 신분부재자들은 그저 아무 것도 못하는 허수아비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정부에서는 이런 문제점에 대한 대책조차 마련하지 않는 채로 이들을 외면하고 있다. 참, 바람직한 정부가 아닐 수 없다.
아무튼, 현대 사회에서 신분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며,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이다.
그리고, 나는 그 신분을 잃어버렸다.
1-1.
" .....? "
눈을 뜬 곳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목격하는 장소였다. 여기는 어디일까, 천국? 아니면..감옥? 감옥이라기엔 지금 내가 누워있는 침대가 너무 포근한데. 주변에 있는 물건들, 그러니까 한쪽 벽면을 채우고 있는 책장이라던가, 그 앞에 놓여진 작고 둥그런 테이블, 벽면에 걸려진 이름 모를 그림들도 감옥에 어울릴만한 것들은 아니었다. 그럼 여긴...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몸을 일으켰을 때, 갑자기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져 앉지도, 다시 눕지도 못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내 몸을 내려다보니 상처가 났던 곳이라 예상되는 부분에 붕대가 감겨져있었다. 심지어는 한 곳도 아니고 꽤나 많은 부위에. 이게..뭐지?
이전의 기억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아무리 기억하려고 해도 티끌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심지어는 내 이름이 뭔지, 나이가 몇인지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왜 살아있는지 조차도 모를 정도로 머릿속이 너무 깨끗했다. 마치 의도적으로 누군가가 지워낸 것처럼 아주 말끔했다. 메모리칩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걸까? 메모리칩이 들어있을 목 뒤쪽을 만지작거렸다. 원래는 딱딱하고 얇은 물체가 느껴져야할텐데, 손 끝에는 메모리칩은 커녕 그 조각조차도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에 반창고의 까칠한 질감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반창고 위로 손톱을 세워 꾹 누르니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마 다친 모양인데. 메모리칩은 안에 없고...
...잠깐, 나 지금 도둑 맞은거야? 신분을?
퍼뜩 든 생각에 몽롱했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신분을 정말로 도둑맞았다면 내가 이러고 있어야할 때가 아닌데! 불에 덴 듯 벌떡 일어나 침대에서 약간 멀리 떨어진 문 쪽으로 향했다. 욱씬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이끌어가며 기어이 문 앞에 도착해 문고리를 돌렸을 때,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잠겨있었다. 원래는 바깥에 달려있어야할 열쇠구멍이 안 쪽을 향해있었다. 이 방은 애초에 안쪽에서는 열 수 없는 문이었다는 소리다. 이건 완전히 의도적인 장치다. 나로써는 이 문고리를 내가 깨어났을 때, 이 곳에서 나가려고 했을 때를 대비하여 해놓은 장치라고 볼 수 밖에 없다. 나, 납치라도 당한걸까? 그럼 이제 어떡하지? 몸값을 요구하지 않을까? 난 돈 없는데.
그 때, 갑자기 벌컥 열리는 문에 깜짝 놀라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그 바람에 붕대가 감겨져있던 모든 부위에서 쓰린 고통이 스물스물 기어올라왔다. 앓는 소리를 내며 고통을 삭이고 있을 때 즈음, 열린 문으로 들어온 사람인지, 아니면 내 착각일지는 몰라도 누군가가 갑자기 나를 번쩍 들어올려 다시 침대에 눕히는 것이었다. 푹신한 느낌에 자동적으로 눈이 감기려고 했지만 얼른 정신을 차리고 나를 다시 침대로 귀환시킨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내 쪽으로 몸을 숙이고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 깨어났어요? "
생각보다 매우 다정한 말투에 흠칫 놀라 몸을 떨었다. 한눈에 봐도 훤칠한 키와 덩치에 꽤나 호감형인 얼굴을 가진 남자였다. 저 얼굴 뒤에 어떤 본성을 지니고 있을지 몰라. 잔뜩 경계하는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으니 그는 잠시 얼굴에서 웃음을 거두더니 숙였던 몸을 일으켰다. 그 잠깐 사이에, 그의 얼굴에 나타난 숨겨져있던 감정이 나한테 생생하게 다가오는 것 같았다. 그의 무표정에선 왠지 모를 살기와, 경멸이 보였다. 저게 말로만 듣던 싸이코패스일지도 몰라. 나는 그가 침대에서 책장 앞에 놓인 테이블로 걸어갈 때까지 경계의 눈초리를 풀지 않고 그를 눈으로 좇았다.
" 아무 것도 기억 안 나죠? "
" ..... "
" 저 나쁜 사람 아니에요. 그러니까 경계하지 마요. "
" ...... "
" 당신이 쓰러져있는걸 제가 데려와서 치료했어요. 아직 다 안 나았으니까, 너무 무리해서 움직이진 마요. "
그의 말에 내 팔이며 다리며 감겨져있는 붕대를 내려다보았다. 이걸..고맙다고 해줘야하는건가. 잠시 곰곰히 생각을 해봤다. 내가 쓰러져있는 채로 발견되었다고 했으니까, 만약 그가 날 발견하지 못했다면 난 죽었을지도 모르는 운명이었다는건데.
...그러면 당연히 고마워해야겠구나.
" ..고마워요. "
" 고맙긴요. 당연한 일을 한건데요. "
그는 테이블 위에 간단한 빵과 찻주전자를 내려놓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내가 다시 침대에서 일어나 그에게로 다가가려고 하니 내 쪽을 돌아본 그는 깜짝 놀라며 나를 다시 침대 위로 눕혔다. 아니, 내가 움직이겠다는데..? 그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움직이기도 힘들 정도의 통증이 느껴져 그 말을 모두 삼켜버렸다. 그는 나를 반듯하게 눕혀놓고 이불을 가슴 위까지 덮어주었다.
" 일단 좀 쉬는게 좋겠어요. 자세한건 다음에 얘기하는걸로.. "
그럼, 푹 쉬세요. 그는 그렇게 이야기하고 방을 나갔다. 그가 방문을 닫고 나갈 때까지 멍하니 침대 위에 앉아 그의 움직임에 따라 눈동자를 굴렸다. 그가 나가자마자 나는 조심조심 침대에서 일어나 다시 문고리를 잡았다. 제발, 열리기를!
하지만, 애석하게도 문은 철컥, 소리를 내며 더이상 돌아가지 않았다. 아무래도 닫히면 자동적으로 잠기는 모양이다. 일말의 희망마저도 산산이 부서져버렸다. 정말 다리에 힘이 풀려서 문고리를 잡은 채로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나가고 싶은데, 문은 절대로 열리지 않는다. 도대체 저 사람은 뭐고, 난 왜 여기에 갇히게 된걸까?
주저앉은 상태로 문에 기대어있으니 갑자기 눈이 감겨왔다. 내가 엄청 피곤한건지, 아니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힘이 없는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지금은 엄청 졸렸다. 침대로 다시 돌아갈 생각도 않고 그냥 그 자리에서 눈을 감았다. 눈을 뜨면 다시 돌아가있기를, 낯선 곳이 아닌 익숙한 장소에서 눈 뜨기를 바라면서.
1-2.
" ...아? "
눈을 뜬 곳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목격하는 장소였다. 여기는 어디일까, 천국? 아니면..감옥? 감옥이라기엔 지금 내가 누워있는 침대가 너무 포근한데. 주변에 있는 물건들, 그러니까 한쪽 벽면을 채우고 있는 책장이라던가, 그 앞에 놓여진 작고 둥그런 테이블, 벽면에 걸려진 이름 모를 그림들도 감옥에 어울릴만한 것들은 아니었다. 그럼 여긴...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몸을 일으켰을 때, 갑자기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져 앉지도, 다시 눕지도 못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내 몸을 내려다보니 상처가 났던 곳이라 예상되는 부분에 붕대가 감겨져있었다. 심지어는 한 곳도 아니고 꽤나 많은 부위에. 이게..뭐지?
이전의 기억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아무리 기억하려고 해도 티끌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심지어는 내 이름이 뭔지, 나이가 몇인지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왜 살아있는지 조차도 모를 정도로 머릿속이 너무 깨끗했다. 마치 의도적으로 누군가가 지워낸 것처럼 아주 말끔했다. 메모리칩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걸까?
그 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고, 그 소리에 흠칫 놀라 이불을 끌어올려 방어태세 아닌 방어태세를 취했다. 한참을 그러고 떨고 있다가 문을 연 작자가 누군지 궁금해 머리 끝까지 올린 이불을 조심스레 내렸다. 이불 위로 눈을 빼꼼 내미니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찻주전자와 접시를 들고온 쟁반 위에 차곡차곡 올려놓고 있었다.
" ㄴ..누구..세요? "
" 당신을 살려준 은인이랄까요? "
" 네? "
" 그 쪽이 쓰러져있길래 제가 데려와서 치료했거든요. 몸은 좀..괜찮으세요? "
아, 그런거였구나. 왠지 그에 대한 고마움이 물밀듯이 밀려오는 기분이었다. 당장 침대에서 뛰어나와 그에게 고맙다며 큰절이라도 해야할 심정이었으나 팔다리가 성치 않으니 그런 행동은 꿈에도 못 꿀 정도였다. 그는 식기가 가득한 쟁반을 들고 나가 어느 곳에 두고 오더니, 곧 웃는 낯을 하고 방으로 들어와 방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방문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 나를 바라보았다.
" 자아, 그럼 얘기해볼까요? "
" ...뭘요? "
" 각자의 신분에 대해서요. 자기소개, 라고 하죠, 이런걸. "
" ...... "
" 전 김경훈이라고 해요. 나이는 28살, 직업은..그냥, 회사원이라고 해두죠. "
그는 여전히 웃는 얼굴을 하고 자신에 대해서 술술 늘어놓고 있었다. 가족은 몇이며, 어머니가 어떤 분이고, 아버지가 이런 일을 하시고..필요 이상으로 자신에 대해 서술하는 모습이 꽤나 어리석어보이기까지 했다. 모르는 사람한테 자기의 신체 비밀까지 알려줄 기세인데. 그는 기나긴 자기소개를 마치고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뭐야, 왜? 무슨 영문인지 몰라 가만히 그를 마주보고 있으니 그가 푸흐, 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 이제 그쪽이 하셔야죠, 자기소개. "
" ㄴ, 네? "
" 어려운거 아니잖아요. 빨리요. "
..아무리 기억해보려고 해도 안 떠오르는걸 어떻게 하라는거야! 그는 계속해서 나를 부추겼고, 난 어떻게든 나의 신분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어떻개 이렇게 기억이 안 날 수가 있는거지? 한참이나 머리를 싸매고 끙끙거리다가 결국엔 포기하고 그를 보았다.
" ..기억이, 하나도 안 나요.. "
" 알고 있어요. "
..뭐? 그의 말에 눈이 커져 그를 보니 그는 피식 웃으며 팔짱낀 팔을 풀었다. 그리고는 기댔던 몸을 일으켜 내 쪽으로 다가왔다.
" 신분이 없으니까, 기억이 없는건 당연한거겠죠. "
신분이 없어? 그 말에 나는 손을 들어 급히 목 뒤쪽을 더듬어보았다. 메모리칩이 있어야할 자리는 까칠한 질감의 반창고가 자리하고 있었고, 혹시 몰라 메모리칩이 다른 곳에 있을까 손끝으로 꾹꾹 눌러도 보았으나 메모리칩의 딱딱한 느낌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 때, 그가 주머니에서 투명한 사각 케이스를 꺼내어 보여주었다. 납작한 아크릴 케이스 안에는 작은 칩 하나가 들어있었다.
" 이거 찾으세요? "
저게 내 신분인 모양이었다. 뒷목을 꾹꾹 누르던 손으로 그 케이스를 집으려하자, 그는 케이스를 제 손 안에 숨기고 넘겨주지 않았다. 덕분에 케이스를 쥐려던 내 손은 갈 곳을 잃어 허공에서 멈추었다.
" ...그거, 제 거라면서요? "
" 네. 그런데요? "
" 그럼 주셔야죠. 뭐 하시는겁니까? "
" 그냥은 못 드리죠. "
뭔가, 잘못 걸린 것 같은 느낌인데.
" 조건이 있어요. 만약 안 하신다면 전 이걸 부숴버릴 수 밖에 없고요. "
" ..... "
" 어때요? 해보실래요? "
그렇게 말하고 씨익 웃는 그의 얼굴이 여간 얄미운 것이 아니었다. 손에 잡히는 것만 있으면 무조건 던져버리고 싶은 욕구가 치밀었다. 하지만 그런다면 저 사람의 손 안에서 내 신분이 순식간에 부서질 것만 같아 결국 손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이불을 쥐는 것 밖에는 하지 못했다.
" ..그게 제 신분이라는걸 어떻게 믿죠? "
" 믿지 않으셔도 좋아요. 다만 신분부재자는 생활하기 힘들다는건 그쪽도 잘 아실텐데. "
그는 너무나도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행여 신분이 망가질까 전전긍긍하고 있는 누구와는 다르게. 이제는 이불을 꽉 쥔 손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피가 통하지 않아 새하얗게 질린 손 위로 따뜻한 온기 하나가 덮여졌다. 그의 손이 내 손을 완전히 덮어버린 것이었다. 그 바람에 그의 얼굴과 내 얼굴 사이의 거리도 훅 좁혀졌다.
" 어쩌실래요? "
이렇게 되면 내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하나 뿐인데.
" ..네. 할게요. "
이건 완전 협박 수준이잖아. 사람 신분가지고 이렇게 딜을 걸어도 되는거야? 이 협상에 대한 부조리를 속으로 끊임없이 되뇌이고 있을 즈음, 그는 씨익 웃으면서 내 쪽으로 숙였던 몸을 일으켰다.
" ..근데, 조건이 뭐예요? "
" 닷새 동안만 같이 지내는걸로. "
뭐? 그의 말을 들으니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었다. 신분까지 걸길래 엄청 큰 조건일줄 알았건만, 고작 닷새 동안 같이 지내는거라고?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까지 나왔다. 정작 이 말을 꺼낸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덤덤하게 나를 보고 있었다.
" 왜요, 조건이 너무 시시한가요? "
" ..아니 뭐, 그 정도면..적당하네요. "
뭐, 내가 손해보는 장사도 아니고, 그냥 같이 닷새만 있어주면 내 신분을 돌려주겠다는데 뭐가 나쁠까.
" 오늘부터, 딱 닷새만이에요. 그 때까지만 나랑 같이 살아주면 돼요. "
" ..... "
" 맞다. 잠깐만요. "
그는 내 손을 펼치더니 주머니에서 나의 신분이라 주장하는 칩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꺼내어 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 ..이게..뭐..예요? "
손바닥 안에 들어온 것은 메모리칩이었다. 흔히 부르는 말로는 '신분'. 아직 닷새는 커녕 한 시간도 안 지났으니 이게 내 것일리는 없었다. 멍하니 메모리칩만 보고 있으니 그가 다가와 웃으며 말했다.
" 일단 다른 사람의 신분이라도 갖고 계시는게 좋을 것 같아서요. 제가 닷새 내내 깨어나실 때마다 설명해줄 수는 없잖아요? "
일단, 이쪽으로. 그는 마치 숙녀를 에스코트해주는 신사처럼 나한테 손을 뻗었다. 이걸 잡아, 말아? 그 손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조심히 손을 잡으니 그가 내 손을 꽉 잡아왔다. 그리고는 방을 나와 다른 곳으로 나를 이끌었다. 방을 나오니 거실은 생각보다 매우 컸다. 마치 영화에 나오는 대저택처럼 화려하고 멋진 곳이었다. 그 자태에 정신이 빼앗겨 그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가 어느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을때까지 나의 정신은 오로지 거실에 향해있었다.
문이 닫히자, 방 안은 절대적으로 어두웠다. 그 방 한 가운데에는 그와 맞먹는 키를 가진 스탠드 하나와 편해보이는 가죽의자 하나가 놓여있었다. 뭐야, 무섭잖아!
한참 그 방의 분위기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즈음, 그가 나를 방 한 가운데로 끌고와 가죽의자에 냅다 앉혔다. 그리고는 의자 팔걸이에 내 손을 고정시켜놓았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저항할 새도 없이 내 몸은 의자에 단단히 고정되어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결국 나는 반항도 못 해보고 그가 수술 도구 같은 것들을 준비하는 걸 지켜보는 수 밖에 없었다. 방 안에 깔린 어둠에 몸이 단단히 짓눌리는 느낌이었다. 도대체 날 어떻게 하려고..?
그 때, 내 얼굴 위로 무언가가 씌워졌다. 흔히 병원에서 볼 수 있는, 산소마스크 같은 것이었다. 깜짝 놀라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그것을 벗겨내었다. 그는 내 고개를 한 손으로 붙잡아놓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내 얼굴에 산소마스크를 단단히 고정을 시켜놓았다.
" 이상한거 아니니까 좀 가만히 있어요. "
어디선가 쉬익- 하고 바람이 새는 소리가 들렸다. 내 얼굴에 고정된 산소마스크를 다시 벗겨내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역부족이었다. 순간 훅, 하고 들이마신 공기는 일반적인 것이 아니었다. 무언가 다른 느낌의 액체를 한껏 들이마신 느낌이었다. 폐 속에 공기가 아닌 다른 것들이 채워지자 마치 TV 전원이 꺼진 것마냥 순식간에 시야가 어두워졌다. 영문도 모른 채로 나는 내 몸을 짓누르던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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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손을 잡고 있다. 나도, 그도 매우 행복해보였다. 아침 햇살이 내리쬐는 침대에서 그와 함께 눈을 뜨기도 했고, 그와 손을 잡고 거리를 걸었고, 그와 마주보며 행복한 미소를 짓기도 했다. 분명 그와 나는 같은 성별을 가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우리 둘은 영락없는 연인 사이처럼 보였다. 분명히, 우리는 행복했다. 내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그는, 나와 마주보며 웃는 이의 이름은 또렷하게 기억났다. 김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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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짧았다. 그만큼 여운도 길었다. 이 신분의 기억 속에서 그는 연인이었다. 그에게 느끼는 감정 역시 사랑이었다. 그렇게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조금씩 정리해가면서 몽롱한 정신으로 눈을 떴을 때, 내 옆에는 그가 앉아있었다. 아직 제정신은 아니었다. 마취가 덜 풀린건지 눈 앞의 상황이 현실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는 나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미소짓더니 팔걸이에 묶여있던 내 손목을 풀어주고 그대로 내 손을 가져가 자신의 볼에 갖다대었다. 들릴듯 말듯한 목소리가 고요한 어둠을 타고 내 귓가에 가만히 내려앉았다.
" ..다행이야... "
닷새 동안의 계약이, 막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2.
" 이해 좀 해줘요. "
그는 더이상 나를 방 안에 가둬놓지 않았다. 다만, 밖에 나가게 하는 것은 절대 금지라며 나를 집 안에서만 돌아다니도록 두었다. 혹여 내가 밖으로 나가려고 시도할까봐 왼쪽 발목에 족쇄까지 채워두었다. 딱, 현관문 앞까지가 한계인 족쇄. 내가 무슨 감옥 수감자냐고! 그를 향해 불만스러운 목소리를 내려다가 결국은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해도 안 들어줄 것 같아. 첫 날 내 눈을 사로잡았던 화려한 인테리어의 거실은 여전히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아름다웠다. 한참이나 거실을 둘러보던 나는 괜한 궁금증에 소파에 앉아있는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 ..저기요. "
신문을 읽던 그는 신문에서 눈을 떼고 나를 쳐다보았다. 왠지 눈을 마주치니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와, 나 왜 이러냐.
" ..당신도 신분 산거예요? "
" 네? "
" ㅇ, 아니..이상하게 집이 좋길래... "
말을 얼버무리니 피식 웃는 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비웃는 듯한 느낌이 들어 인상을 팍 찡그렸지만 그는 신경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 아뇨. 이건 온전히 제 신분인데요. "
" 그럼..그, 신분 교환 시술은 어떻게 할 수 있는거예요? 그거 보통 불법 시술자들이..하던데. "
내 말에 그는 크게 웃었다. 난 정말 진지하게 한 말인데? 크게 웃는 그를 당황한 눈빛으로 보고 있으니 내 눈빛을 의식한 그는 웃음을 멈추고 보고 있던 신문을 접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 아까요, 내가 자기소개할 때 얘기했는데. 아버지가 이쪽 관련이라고요. "
" ..아아. "
" 아버지 밑에서 자라면서 좀 배운거예요. 대충 흉내는 낼 수 있을 정도로. "
그는 자신의 신분에 대해 얘기할 때면 눈빛이 반짝였다. 자랑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인걸까? 확신에 찬 그의 눈을 보고 있자니 약간 부담스러운 느낌이었다. 창 밖을 구경하는 척하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 준석씨. "
" ..뭐라고요? "
" ..아. "
" 그게..내 이름이에요? 준석? "
그는 낯선 이름을 뱉어내고 아차, 싶은 표정이었다. 저게 내 이름인건가? 내가 되물으니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와, 정말 내 이름? 이 신분에는 이름에 대한 데이터도 없어서 걱정이었는데, 이렇게 이름이라도 알게 되니까 다행이었다. 근데..잠깐.
" ..당신은 절 알고 있나요? "
" 무슨 뜻이죠? "
" 내 이름, 알고 있잖아요. "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단지 아까보다 더욱더 진중해진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한참 나와 그가 벌이던 눈싸움 아닌 눈싸움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나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허리를 숙여 나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갑자기 훅 다가온 그의 얼굴에 흠칫 놀라 몸을 뒤로 빼었다. 그 모습이 웃긴건지 그는 활짝 웃었다.
" 그건, 나중에 알려드릴게요. "
그는 그 말을 속삭이듯 나에게 남기고는 숙였던 상체를 일으켜 나를 지나쳐갔다. 그는 긴 다리로 휘적휘적 거실을 가로질러 그의 방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얼떨결에 거실에 혼자 남겨진 나는 멀뚱멀뚱 그 자리에 서있기만 했다. 뭐야, 저 사람.
3.
어느 새 사흘 째였다. 아무 것도 하는 것 없이 집 안에서 뒹굴거리고 있으려니 엄청 심심했다. 그는 무슨 일을 하는건지 아침 일찍 나가 밤늦게 들어오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심지어는 아예 집에 안 들어오기까지 했다. 뭐야, 이거 지금 나 집 지키라고 이렇게 잡아놓은거 맞지? 왠지 애완견이라도 된 것 같아 기분이 묘하게 나빠졌다.
신문을 읽으려고 해도 어쩐지 몇년 전 신문이고, 책을 읽으려고 해도 무슨 소리인지 모를 이상한 언어로 쓰여있는 탓에 아무것도 읽지 못했다. 결국 놀거리를 찾아 헤매이던 나는 푹신한 소파에 그대로 몸을 묻고 리모콘을 집어들었다. 그래, 여유롭게 TV나 보자- 전원 버튼을 누르니 경쾌한 소리와 함께 화면이 켜졌다. 화면이 켜지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것은 뉴스 속보였다.
' 사흘 전, 한 교도소에서 사형수가 탈출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일가족을 살해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은 이씨는 사흘 전 22시 경에 사형 집행을 위해 향하던 도중, 동행하던 교도관들을 살해하고 추격하던 교도관들에게 부상을 입히고 달아났습니다. 이 사고로 교도관 8명이 사망하고 3명이 중상을 입는 등 큰 피해가 있었습니다. 정부는... '
사형수 탈출 사건이라니. 참 뉴스다운 내용이네. 꽤나 흥미가 있을 것 같은 내용이었지만 뉴스는 역시 지루했다. 저절로 하품이 나와 입을 쩌억 벌리고 하품을 해댔다. 다른 뉴스는 없나..
그 때, 현관문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그가 들어와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는 나를 목격했다. 나도 그와 눈이 마주쳐 반갑게 손을 흔들어주었지만 그는 내가 반갑지 않은 모양인지 급하게 다가와 내 손에서 리모콘을 빼앗아갔다. 그리고는 전원 버튼을 연타해 TV를 껐다. 던지듯 리모콘을 내려놓은 그는 꽤 화난 모양이었다.
" 이런걸 왜 보고 있어요! "
" 아니..심심하니까..요. "
뭐야, 분노의 포인트가 도대체 어디인거야?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으니 그는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는다. 뭔데, 내가 뭐 큰 잘못이라도 했어?
" ..아니다. 일단 방으로 들어가요. TV는 켜지 말고. "
그는 그렇게 말하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았다. 그가 방으로 들어갈 때까지도 난 무슨 영문인지를 몰라 그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을 수 밖에 없었다. 뭐야, 내가 뭐 크게 잘못한거야?
4.
어이, 김경훈이.
..네, 장 형사님.
듣자하니 니가 우리가 찾는 새/끼를 잡고 있다고 하던데, 맞냐?
..잘못 들으신 모양인데요
에이, 경훈아. 우리 사이에 무슨 거짓말이 필요하냐? 솔직하게 얘기해봐.
전 정말 모르는 일이라니까요?
...너 내가 모를 줄 알지?
.........
누가 꽁꽁 숨겨놓고 있으면 모를 줄 알고..?
...신분..아직 못 찾았어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좋아. 이틀 준다. 그 안에 신분 되찾아서 잡아와. 우리랑 계약한게 있잖냐?
..기다려주시죠. 완전히 절 믿고 있으니까, 잡기는 쉬울거예요.
짜식, 마음에 들었다. 꼭 우리한테 넘겨줘야한다?
믿고 맡겨주세요.
5-1.
" D-Day이네요. "
방 안에서 가만히 창 밖을 내다보고 있을 때,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닷새. 그 120시간의 흐름이 빨리 지나간 것은 처음이었다. 그 시간동안은 내가 누구인지 완전히 모르고 있었다고 해도, 전혀 불안하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도움으로 더 편하고 행복할 수 있었던걸지도 모른다. 그는 살짝 미소짓더니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내 손 위에 올려놓았다.
" ..이게 진짜 당신 신분. 가져가요. "
이게, 진짜 내 신분이구나.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해져서 손 안에서 메모리칩 케이스를 굴리고 있으니 그의 손이 메모리칩을 쥔 내 손 위로 겹쳐져왔다.
" 당신이 감당할 수 있을까 싶어요. 일단, 제가 직접..옮겨드릴까요? "
그는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내가 처음으로 신분을 받았을 때처럼. 그의 손을 잡는 것은 더이상 망설여지지 않았다. 그의 손에 이끌려 그 어두운 방 안으로 들어가 마취당하는 것 역시 이젠 두렵지 않았다. 그가 날 억지로 앉히기 전에 스스로 의자에 앉아 그가 신분 교환을 준비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왠지 교환을 준비하는 그의 얼굴이 매우 어두워보였다.
" ..제가 신분을 찾으면..여기 더 못 있는건가요? "
" ..아무래도요. "
그의 얼굴에 허탈한 웃음이 걸렸다.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까. 단지 쓰러진 사람을 우연히 발견하고 데려와 극진히 간호한 착한 시민인걸까. 혹시, 신분 속의 기억을 찾으면 내 기억 속에 그의 얼굴이 자리잡고 있지는 않을까.
" 전..가기 싫은데. "
" 신분을 되찾자마자 당장 이 곳을 떠나는게, 더 도움이 되실거예요. "
무슨 소리일까. 그에게 이해를 못 했다는 눈빛을 보내보았지만 그는 이미 수면마취를 위한 모든 장비를 갖춰놓고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조용히 산소마스크를 쓰고 이질적인 느낌의 기체를 들이마셨다. TV 화면이 꺼지듯 순식간에 시야가 어두워지는 것은 언제나 적응하기 힘든 것이었다. 점점 몸이 가라앉는 걸 느끼며 그대로 깊게 빠져들어갔다.
나의 진짜 기억은, 진짜 신분은 도대체 어떤 형태일까.
5-2.
순식간에 많은 장면이 스쳐지나갔다. 피가 가득한 방 안. 손에 들린 식칼. 나를 끌고 가던 경찰들.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인 좁은 방. 거울 속에 비춰진 내 얼굴, 그리고 흙빛 유니폼 가슴께에 달린 빨간 명찰. 그 명찰에 쓰여있는 알 수 없는 조합의 네 자리 숫자. 이게 정말 나인걸까?
장면이 넘어갔다. 내 양 손목에는 수갑이 채워져있었고, 내 양 옆은 물론이고 앞뒤로 교도관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나를 이끌고 걸어가고 있었다. 어딜 가는걸까?
그 때, 시야가 어지럽게 흔들린다. 육중한 무언가를 쉴새없이 폭행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나를 잡으려 다가오다가 알 수 없는 행동으로 바닥에 쓰러지는 교도관들이 보인다. 저 멀리에선 다른 교도관들이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급하게 쓰러진 교도관 주머니에서 리볼버와 열쇠꾸러미를 꺼내들어 리볼버를 달려오는 이들에게 실컷 쏘아주고는 뒤돌아 내달렸다. 들리는 거라고는 총성이 울리고 남은 잔해들과 쿵쾅대는 심장소리였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달리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 총알이 다리와 어깨를 마구 스치고 지나가는데도 절대로 멈추지 않았다. 적어도 미로같은 감옥 속에서 빠져나오기 전까지는.
교도소에서 멀리 빠져나온 모양이었다. 새벽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은 거리에서 나는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맨발로 터벅터벅 걸었다. 피가 쉴새없이 흐르는 다리와 어깨에서 붉은 액체가 툭, 툭 떨어졌다. 너무 힘들었다. 결국 얼마 더 못 걷고 바닥에 곤두박질쳐졌다. 숨소리가 불규칙적으로 들려왔다. 피곤했던건지 눈이 점점 감겨왔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발소리를 자장가 삼아, 그대로 깊은 잠에 빠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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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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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게 진짜 나의 기억이다. 찝찝한 기분으로 마취에서 깨어나 가죽의자에서 일어났을 때, 방 안은 여전히 어두웠다. 그는 내 옆에 없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어둠 속을 천천히 걸어 방에서 나왔다. 방에서 나오자마자 그와 눈이 마주쳤다. 화려한 거실의 자태따위는 더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나의 눈은 그에게로만 향해있었다.
" ...이거였어요? "
" ...... "
" 떠나라는 말이, 이거..때문이었어요? "
" 좀 있으면 경찰들이 들이닥칠거예요. 그 전에 피하시는게 좋아요. "
그는 내 눈을 피했다. 늘 당차고 확신에 차있던 눈빛이 오늘은 불안함으로 마구 흔들렸다. 마치 자신이 혼나기라도 할까봐 조마조마해하는 어린아이같은 모습이었다.
" 닷새 동안 날 숨기려고 그랬던거죠? "
" ...... "
" ...왜요? 도대체 왜 그랬어요? "
그는 말없이 나를 보다가 깊은 한숨을 쉬며 마른 세수를 했다. 한참이나 그는 말이 없었다. 가는 시곗바늘이 반바퀴 정도 돌았을 때야 어렵사리 입을 연 그의 목소리는 파르르 떨려왔다.
" ..잃고 싶지 않았어요. 다시는..다시는 잃고 싶지 않았어요. "
" ....... "
" ..형이, 다시 감옥으로 끌려가는거 보기 싫었다구요... "
" ..경훈아. "
내 입에서 튀어나왔지만 정말 낯설었다. 그를 이름으로 부른 것은 닷새 동안 처음이었다. 그는 울먹이고 있었다. 왜일까, 그는 왜 눈물을 글썽이며 나에게 다가오는걸까. 아직 완전히 자리잡지 못한 내 신분은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도록 도와주지 못했다. 다만 내가 이 상황에서 취해야할 행동은 조금이나마 제시해주고 있었다.
내 앞까지 다가온 그의 허리를 껴안고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처음 안기는 것이었지만 너무도 익숙했다. 경훈아, 내가 미안해. 조용히 내뱉은 그 말이 너무 크게 내 귓가에 울렸다. 이제서야 모든게 제자리를 찾아가는 느낌이었다. 난 절대로 내 것이 아닌 신분의 영향을 받아 그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낀 것이 아니었다. 그건, 오롯이 나의 감정이었다. 처음에 받았던 신분도, 지금 내가 받은 신분도 모두 내 것이었다. 그는 그걸 알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무엇을 바랐던 것일까? 사형수가 아닌 평범한 시민 이준석으로 돌아와 같이 살기를 바랐던걸까? 아니면...
그의 품에 묻었던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내 얼굴 위로 그의 눈물이 한 방울 툭, 떨어졌다. 여전히 눈물이 많구만. 이상하게 웃음이 났다. 웃어야할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
" ..같이 죽을까? "
" 좋은 생각이네요. "
내 손에는 이미 방 안에서 들고온 수술용 메스가 들려있었다. 날카로운 메스는 이미 그의 등가죽을 뚫고 그의 심장을 향해 깊게, 아주 깊게 파고들고 있었다. 정말 아플 법도 한데, 고통스러울 법도 한데 그는 웃고 있었다. 정말 행복하다는 듯이. 피가 넘어와 주르륵 흘러내리는 입술로 그는 내 이마에 키스했다. 이마에서부터 끈적한 액체가 흘러내려왔다.
" ...사랑해요. "
타앙-!!
순식간에 내 몸은 엄청난 반동을 받고 그의 몸에서 떨어져나갔다. 그 바람에 내가 부축하다시피 하고 있던 그의 몸도 바닥으로 곤두박질쳐졌다. 가슴이 너무 아팠다. 너무나도 아팠다. 처음 이 집에서 깨어났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아팠는데, 이상하게 행복했다. 드디어, 모든게 끝났다고 생각하니까 웃음이 났다. 안 돌아가는 고개를 힘겹게 돌리니 그도 나를 보고 있었다. 그도 웃고 있었다. 행복한 표정이었다. 몸이 움직이질 않아 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대신 서로의 몸에서 흘러나온 액체가 맞닿아 섞였다.
목소리도 더 나오지 않았다. 죽는다는게, 이런거였을 줄이야. 사람을 죽이는 일은 몰라도 죽는 일은 겪어보지 못했던건데, 내 손에서 죽어간 사람들은 다 이런 기분이었을까.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힘들어져 결국에는 눈을 감아버렸다.
이제 들리는 것이라곤 저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와, 미약하게나마 호흡하는 나와 그의 숨소리 뿐이었다. 그리고 시곗바늘의 발자국 소리가 수십번 정도 울렸을 때가, 정말 마지막이었다.
사형수. 잔인하고 고통스러우면서도 스스로는 행복해질 수 있는 신분의 이름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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