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민은 정말 한번도 보이지 않았다. 왼손으로 더듬더듬 핸드폰을 눌러가며 메세지를 보내도 답장 하나 없었다. 전화를 걸어도 받지도 않았다. 대체 어디서 뭘 하는거야, 현민은 한숨을 내쉰다. 데이트한 날, 나 뭐 잘못했나?
현민의 기억은 동민과 한강에서 저녁을 보내며 맥주를 마신 것까지였다. 그 이후에는 전혀 기억이 없다. 학교에 갔었다는 걸 기억하지 못하니, 자신이 왜 병원에 있는지도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 일에 대해 언급하는 사람도 없었다. 오른손의 재활에 바빠, 사실 현민은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는 뒷전이긴 하다. 윤선은 현민에게 트라우마가 남아있지 않았을까 싶어, 다 낫기 전까지는 그 일에 대해 일절 언급을 하지 않으려했다. 오늘도 현민은 연필을 어설프게 쥐고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린다. 예전에는 선 굵기를 자유자재로 바꿔가며 멋지게 그림을 그렸었는데. 지금은 연필을 집을 수 있다는 것으로도 만족해야하다니. 종이 위에 분신사바라도 한 듯 선이 무질서하게 그어진 것을 보며, 현민은 한숨을 쉰다.
"......뭐야, 연필 잡을 수 있어?"
병실로 들어오던 준석은 깜짝 놀란다. 분명 일주일 전에는 연필도 제대로 못잡고 떨어뜨렸는데, 오늘은 연필을 쥐고 종이 위에 이리저리 선을 긋는 현민이다. 준석은 눈을 둥그렇게 뜨며 현민의 침대로 다가온다. 그리고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종이를 가만히 내려다본다. 와, 너 진짜 회복 빠르구나. 준석의 말에 현민은 고개를 저으며 연필을 내려놓는다. 아직 멀었어요. 그림을 잘 못 그려. 현민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투에 준석은 종이 한 귀퉁이를 가리킨다. 그곳엔 현민이 간단하게 그린 귀여운 캐릭터들이 그려져있었다.
"이건 그림이 아니고 뭐야."
"이런 거 말구요. 자세한 묘사나 채색이 되어야하는데, 아직은 그렇게 안 돼요."
"일어난 지 얼마나 됐다고 마음이 급해. 이 정도 속도면, 한 달이면 그림 그리겠는데."
"한 달이나 어떻게 기다려요. 나 빨리 동민이 형 보고 싶단 말이에요."
형 보려면 퇴원해서 찾아가는 수밖에 없잖아요. 현민은 씁쓸해하며 종이와 연필을 치운다. 준석은 바보 같은 아, 소리와 함께 현민을 내려다본다. 보통 원나잇을 갈구하는 사람들은, 섹스 후에는 상대에 대한 관심은 0가 된다. 그런데 이 아이는 계속해서 동민을 찾았다. 처음에 준석은 단지 현민이 어려서, 어미 닭을 처음 본 병아리처럼 동민을 따라다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동민이 현민을 위하는 만큼 현민은 동민의 곁을 맴돌았다. 동민이 현민을 곁에 있도록 냅두는 만큼 현민도 동민을 위했다. 단순한 호기심과 이끌림은 아닌 것 같다. 만약 이게 운명이라면 운명일 수 있겠다고, 준석은 그렇게 생각했다. 게이가 운명이라니, 참 재미있는 생각이지만. 준석의 이런 생각을 모르는 현민은 입을 비죽, 내밀었다.
"내가 병원에 있는데, 형은 걱정이 안 되나봐요. 언제쯤 나는 동민이 형한테 하나뿐인 사람이 될까요."
"..............그렇게 오래 짝사랑하면, 어느 정도 마음이 식지 않아?"
"보통 사람이라면 그렇겠죠.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동민이 형인데."
준석은 현민의 핸드폰을 내려다본다. 핸드폰 배경은 동민의 옆모습이다. 차에 같이 탔을 때 찍은 사진인지, 동민은 몸을 앞을 향한 상태이다. 그러나 눈은 현민 쪽을 향하고 있었다. 현민이 재미있는 말을 하면서 사진을 찍었는지, 눈에 주름까지 만들어가며 웃고 있다. 이런 표정은 우리랑 같이 있을 때는 전혀 보여주지 않는데. 현민 한정 표정인걸, 현민만 모르나보다. 준석은 시무룩한 현민을 바라보며 고개를 젓는다.
"치료받으랴 마음고생하랴, 너도 참 바쁘다."
"짝사랑이 다 그렇죠 뭐. 형은 모르겠지만."
"........나 무시하냐?"
"아니 그냥, 형은 뭔가 이해관계 따질 것 같아서."
"나도 마음고생 하고 있는데."
준석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현민은 반응이 느리다. 짝사랑이라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사람이라, 굉장히 의외였다. .........어? 네??? 뭐요???? 현민의 눈이 두 배 이상 커지자, 준석은 킥킥 웃는다. 야, 눈 쏟아지겠다. 그러나 현민은 계속해서 준석을 쳐다보고만 있다. .......진짜로??? 왜, 누구요??
"누군지는 그게 왜 궁금해."
"아, 제가 모르는 사람인가.... 그나저나 와, 진짜요? 어쩌다가???"
".........너랑 비슷해. 잤다가...."
차마 상대가 경훈인 것을 말하지 못하는 준석은, 원나잇이라고 말한다. 따지고 보면 거짓말은 아니다. 친구였던 김경훈이, 그 하룻밤을 계기로 좋아하는 김경훈이 되어버렸으니까. 준석의 말에 현민은 더욱더 눈이 커진다. 너 그러다가 눈 찢어질 것 같은데. 준석의 말에 현민은 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다시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는다. 형이......바에 갔었다고요? 바에 안 나가겠다고 의기소침해있던 준석이, 바에서 원나잇이라고???? 현민의 말에 준석은 아차 싶다. 어떡하지, 바를 안 나갔었는데. 나갔었다고 거짓말을 해야 하나.
"와 - 형 무슨, 바에 안나가겠다고 호언장담에 떵떵거리더니.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맞긴 맞네요."
이거 내 이미지만 안좋아지는데. 현민은 중얼중얼 혼잣말을 하기 시작한다.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올라간다더니, 형이 원나잇으로 짝사랑을.... 더 들어줄 수 없어서, 준석은 현민의 입을 찰싹 한 대 때렸다. 아, 환자를 때려요? 한 대 더 맞기 전에 입 닫아라. 준석이 으르렁거리자, 현민은 입을 꾹 다문다. 준석은 침대 곁의 의자에 털썩 앉아 한숨을 내쉰다.
"그런데 나는 너처럼 대담하게 못 하겠더라. 좋다고 들러붙지도 못하겠고."
"그럼 그냥 짝사랑만 하는 거에요?"
"맨날 바라만 보고, 뭐 그러는거지."
"맨날이요? 형 맨날 바에 나가요? 그럴 시간 없었잖아요."
"아, 그게......내가......"
"..............진호 형이에요, 경훈이 형이에요?"
"...........김경훈."
요즘 병원을 자주 오는 준석인데 대체 누굴 맨날 바라만 본다는 건지. 맨날 붙어다닌 건 진호와 경훈뿐인데. 현민은 역시 그랬어, 라며 고개를 끄덕인다. 준석은 들킨 것이 민망해 고개를 푹 숙인다. 결국 자신의 마음을 이런 쪼만한 애한테 들켜버리다니. 창피하다. 현민은 역시 그렇구나, 라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다가 3초 후, 경악을 한다. 자, 자, 자, 잠깐만요!! 그러면, 경훈이 형이랑 잔 거에요??? 잤다고요??????????????
"두, 두, 둘이 그냥 친구였잖아요!! 서로 취향 아니라면서요!!!!!!"
".........어쩌다 보니, 뭐."
"와아아아......대박. 사람 일은 모른다더니."
"............넌 이런거 어떻게 참냐. 이 사람은 날 안 보는데, 나 혼자 가슴 뛰려니 죽겠다."
준석은 손을 들어 머리를 세차게 흐트러뜨린다. 곧 준석의 까만 머리는 까치집이 된다. 현민은 준석의 입에서 나온, 그러나 준석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대사에 할 말을 잃고 가만히 준석을 본다. 준석은 현민의 반응은 이제 상관 없다는 듯이, 넋두리를 하기 시작했다. 저번에는 나보고 지 알아? 자기 스타일은 키 크고 날씬한 사람이래. 그런 사람을 찾으러 바에 간대.
"그게 지금 나한테 할 소리냐. 나는 맨날 지 쫓아다니면서 맘 졸이는 게 일상인데."
"형도 한 번 바에 가서 다른 사람 찾아봐요. 자서 그냥 경훈이 형한테 끌리는 걸 수도 있잖아요."
"그 말, 너한테도 해당되는 거 알지?"
준석의 말에 현민은 다시 입을 다문다. 자신도 동민과 하룻밤 후에 동민을 따라다니는 거니까. 하지만 저는 이전엔 동민이 형을 몰랐잖아요!! 전 동민이 형을 보자마자 끌린 거라구요, 형이랑은 달라요. 현민이 억울하다는 듯 말한다. 준석은 픽 웃는다. 그래그래, 그거 참 로맨틱하다.
"이런 쓸 데 없는 고백을 하러 온 게 아닌데 내가 왜 이러고 있냐."
"어우.......저 아직도 충격이에요."
"나도 아직 충격이야. 뭐 어쨌든, 회복속도가 빨라서 다행이네. 너 나으면 퇴원 축하 파티나 해 주려고."
".........그거 하면, 동민이 형 꼭 오게 해줘요."
알았죠? 현민의 말에 준석은 아무 말 없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빨리 낫기나 해. 너 퇴원 파티때 그림 그리기 쇼 열거니까. 준석의 말에 현민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현민이 미소짓자, 준석은 씁쓸해진다. 장동민이 너를 밀어내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한다는 걸 알면, 너는 어떤 기분일까.
"저 눈물 좀 닦아야겠어요. 어헝.."
무대가 끝나자, 진호는 황홀한 표정으로 가수를 바라본다. 그리고는 감격했는지, 두 눈을 손수건으로 찍듯이 닦는다. 내가 실물을 영접하다니.......!! 요환은 그런 진호를 귀엽다는 듯이 보더니,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준다. 이렇게 좋아하다니, 데리고 오길 잘했지. 진호가 오열하다가, 무대에서 가수가 다시 말하자 고개를 홱 치켜든다. 여러분 즐거우세요!! 가수의 말에 진호는 관객들처럼 소래를 버럭 지른다. 네 형!!!!!!!!!!!!!!!!!!!!! 사실은 진호가 가수보다 3살 형이건만, 그런 건 지금 중요하지 않다. 잘생기면 다 형이야!! 진호는 외친다.
요환과 진호는 드디어 두 번째 데이트를 하는 중이다. 데이트라고 하기엔, 요환이 진호를 끌고 온 것 뿐이지만. 처음에 진호는 요환과 다시 데이트를 할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공연을 잘 안하기로 유명한 자신의 본진이라 전혀 거절할 수 없었다. 오히려 가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갑시다!! 어서 저를 그곳으로 갈 수 있게 해주세요!! 진호가 신나 방방 뛰자, 요환은 자신도 신이 난다. 이 가수 노래는 들어본 적도 없건만, 콘서트 가기 일주일 전부터 노래를 들으며 달달 외우고 다녔다. 어찌나 노래 외우기에 몰두했던지, 병원에서까지 노래를 부르다가 간호사들에게 들켰다. 그날로 요환의 별명은 노래하는 대갈장군이 되었다. 노래까진 좋은데, 왜 대갈장군이라는 별명은 사라지지가 않냐구.
"그럼 다음 노래는, 이 노래입니다."
가수는 가볍게 기타 줄을 퉁겼다. 그 소리를 시작으로, 공연장에 드럼과 베이스가 서서히 깔리기 시작했다. 아까의 신나는 노래와는 정반대로, 조용하고 묵직한 가을밤에 알맞는 노래가 울려퍼지기 시작한다. 곧 기타의 선율과 함께, 가수의 소년 같은 목소리가 공연장을 메우기 시작한다. 이 가수의 매력은 이것이다. 성인 남자이면서, 소년이 자신의 일기를 또박또박 읽어내려가는 듯한 느낌. 풋풋한 느낌에 요환은 모르는 노래이건만, 점점 몰입해가며 고개를 흔들기 시작한다. 진호는 노래를 따라부르다가 옆에 앉은 요환을 바라본다. 요환은 노래에 흠뻑 젖어, 무대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나한테 관심있다며, 오히려 가수한테 입덕당한 거 같은데? 어두운 공간 속에서 빛나는 요환의 눈을 보다가, 진호는 씩 미소짓는다.
분명 이 가수에 대해 잘 모른다고 했는데, 공연이 끝난 후의 요환은 마치 팬클럽 회장 같았다. 진호씨, 앵콜 곡 진짜 좋지 않았어요? 좀 더 다듬어서 앨범에 싣는다면서요. 다듬을게 어디있어, 완전 대박인데..!! 요환은 신이 난 듯 진호의 옆에서 한시도 가만히 있질 못했다. 제자리에 폴짝거리는 요환을 보며, 진호는 한 마디 한다.
"요환씨 이제 저 가수한테 관심 생겼나봐요. 나는 끝이네."
진호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요환은 그 자리에서 우뚝 선다. 그리고는 진호를 가만히 바라본다. 뭘 봐요, 이제 콩깍지 벗겨져요? 진호는 툭 내뱉으며 요환을 지나치려 한다. 요환은 진호의 팔을 잡더니, 가볍게 자신에게 끌어당긴다. 그러나 진호는 인상을 쓰더니, 제자리에 서서 버틴다. 하지만 요환은 그런 진호를 내려다보면서 기분 좋은 미소를 짓는다.
"지금 질투해요?"
"질투는 무슨."
"맞는데, 질투."
"아니라고요."
........사실은, 어느 정도는 맞다. 뭔가 귀엽지만 소외당하는 기분이 들어서 반 농담으로 말한 건데, 단번에 간파당하니 조금 부끄럽네. 진호는 요환의 손아귀에서 팔을 비틀어뺀다. 됐고, 밥이나 먹으러 가요. 진호가 딴 곳을 바라보며 딴청을 부리자, 요환은 헤헤헤 웃는다. 뭐가 그렇게 좋아요. 진호의 말에 요환은 진호의 눈을 뚫어지게 본다. 아, 부담스럽게 왜 이래요.
"오늘은 이 정도로 충분한 것 같아요."
"뭐가요."
"나한테 관심 없던 사람이 이제 질투를 하고, 장족의 발전 아니에요? 두 번째 만남에 이 정도면 기대 이상이죠."
그러니까 질투 아니라고요. 그러나 요환은 진호의 투정 따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세번째에는 나 뭐 해줄거에요? 라며 다시 폴짝대기 시작하는 요환이다. 아, 쫌. 진호가 때리는 시늉을 해 보이자, 요환은 헤헤 웃으며 진호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세번째엔, 세번째엔 뭐에요오??? 길거리의 다른 사람들이 요환을 쳐다보는 시선을 느끼며, 진호는 부끄러워진다. 같은 일행인거 티내면 안 되겠다. 모르는 척 하고 집에 가야지.
이제 늦가을인데다가, 해지기 시작해서 밖에 많이 추워. 조심해. 정문은 현민의 옷을 잘 여며준다. 윤선은 현민을 챙기는 정문을 흐뭇하게 바라본다. 그러다 현민의 다음에 봐요, 라는 말에 윤선은 미소를 짓는다. 그래, 자주 연락하고.
현민의 재활은 깨어나는 데에 걸린 시간만큼 시간이 걸렸다. 어느 정도 사물을 집을 수 있을 정도로 악력이 생기자, 병원 측에서는 퇴원해도 좋다는 말이 나왔다. 하지만 현민은 그림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손의 움직임이 유연해지기 전에는 안 된다는 입장을 내비친 것이었다. 윤선은 고민하다가, 동민에게 전화를 걸어 이러한 상황을 논의했다. 원하는 대로 하게 해 줘요, 라는 동민의 짤막한 말에 윤선은 현민의 뜻을 들어주기로 했었다. 어차피 병원에서 나오는 추가 비용은 모두 동민이 부담하기 때문에, 윤선에게는 선택권이 그렇게 크지 않았다. 그렇게 현민은 결국 거친 선으로 그린 풍경화를 하나 완성했고, 그렇게 긴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병원에서 나올 수 있었다. 윤선은 연필로 그린 현민의 그림을 액자에 넣고 거실 한 편에 걸어두었다.
"빨리 가자, 준석 아저씨가 너 늦으면 아무리 주인공이라도 지각주래."
"......미성년자한테 술을 준다는 거니?"
"이미 그 사람들한테는 얘가 미성년자라는 자각은 없어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그래, 잘 놀으렴. 윤선의 말을 뒤로, 정문과 현민은 문을 나섰다. 오늘은 진호네 가게에서 현민의 퇴원 파티를 여는 날이었다. 파티라고 해 봤자, 가게 한 테이블에서 네다섯명의 사람들과 노는 게 다이지만. 그래도 실로 오랜만의 외출이라 현민은 가슴이 떨렸다. 게다가 오늘 잘하면 동민을 볼 수도 있겠다는 기대에, 현민은 더욱 걸음을 재촉했다. 버스 놓치면 어떡할거야, 빨리 와 무나!! 자신의 팔을 잡고 질질 끌고 가는 현민을 보며 정문은 비명을 지르고 싶어졌다. 좀 천천히 걸어, 나 힐 신었다고, 망할 놈아!! 정문의 말에 현민은 픽 웃는다. 게이들밖에 없는데 누가 이쁘게 입고 오래, 빨리 오기나 해.
한편 진호는 벌써 다섯 테이블 째 서비스 음식을 내오는 리아를 보며 고개를 세차게 젓는다. 오늘 장사 망하려는 거야? 온 테이블에 다 퍼주면 어떡해!! 진호가 소리치자, 리아는 쯧쯧 혀를 찬다.
"오늘은 온 세상에 서비스를 뿌려도 모자라는 날이야. 우리 애기가 퇴원해서 오랜만에 얼굴을 비추는 축하의 날인데, 어떻게 매정하게 우리 테이블만 잘 먹고 잘 살 수가 있니. 안 그렇습니까, 이쁜이들!!"
리아가 다른 테이블을 향해 외친다. 그러자 서비스를 보며 황홀해하던 게이들이 한 목소리로 외친다. 그렇습니다, 리아 누님!! 들었지? 의기양양한 리아의 얼굴을 보며 진호는 한숨을 쉰다. 난 몰라, 오늘 매출은 엄마가 알아서 해. 짜증스러운 진호의 얼굴을 보며, 요환은 재미있어한다. 경훈은 케익이 상자 안에서 어그러지진 않았는지 살펴보고 있으며, 준석은 동민에게서 받은 화구들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다. 동민이 형 집에서 다 챙겨온 것 같은데, 더 빠진 건 없겠지? 어찌나 종류가 많던지, 나중에 리스트를 하나 작성해야 할 것 같았다. 리스트 얘기에 동민은 난 다 기억나는데? 목마른 놈이 우물 판다고, 리스트 필요한 사람이 직접 만들어. 라며 문을 쾅 닫아버렸다. 진짜 못됐어, 하여튼. 준석이 그렇게 못마땅해하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덜컥 열린다. 그리고 낯선 존재인 여자 하나가 들어온다. 정문은 눈으로 준석의 테이블을 찾더니, 환하게 웃는다.
"여러분, 주인공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뒤이어 현민이 들어온다. 말쑥하게 차려 입고 머리도 단정히 꾸민 것이, 전혀 한달 전 수술을 하고 죽은 듯이 누워있었던 사람 같지 않다. 호오오오우!!!! 경훈은 현민이 들어오자마자 환호성을 지르느라 난리다. 준석도 두 팔을 들어 박수를 쳤으며, 진호는 씨익 웃으며 현민을 바라본다. 다른 테이블에서도 현민을 향한 환호성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한다. 분명 조촐한 파티라고 했는데,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를 반겨주지? 현민은 머쓱해하며 테이블마다 감사의 표시로 고개를 까딱인다. 정문은 팔랑팔랑 진호네 테이블로 걸어가더니, 진호의 옆에 털썩 앉는다. 진호는 몸에 찰싹 달라붙는 미니원피스 차림에, 하이힐까지 신은 정문을 보고 깜짝 놀란다. 겉옷을 벗어 다리가 훤히 드러난 정문에게 건네자, 정문은 다리에 겉옷을 덮는다.
"고딩이 누가 이렇게 야시시하게 입고 다니래."
"이성애자 남자들이 있는 곳에서는 이렇게 못 입는다구요. 안전한 게이 거리에서 좀 입읍시다?"
하여간 요즘 애들이란, 진호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젓는다. 감사 인사를 이제서야 끝낸 현민은 경훈의 옆에 털썩 앉는다. 그리고는 경훈이 붙잡고 있는 케익 상자를 바라본다. 어, 초코네요. 저 초코 못 먹는데. 현민의 말에 경훈의 눈썹은 바로 축 처진다. 아아, 안돼. 그런 말 하지마, 농담이라고 말해. 제발 그러지 마...!! 경훈이 낑낑대자, 현민은 낄낄거리며 웃는다.
"네. 농담이에요. 저 초코 좋아해요."
"와, 퇴원한지 얼마나 됐다고 사람을 놀려먹어. 못 됐네."
"한 달 동안 누구 놀려보지도 못했다구요. 사회성 올려주는 셈 치고 오늘 하루종일 놀림 좀 당해줘요."
뭐야!!!! 경훈이 소리를 지르자, 사람들이 킥킥 웃는다. 그런데 경훈의 어깨 너머로, 준석은 현민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것을 보고 눈이 커진다. 좀 가만히 있어!! 준석이 입모양으로 말하자, 현민은 어깨를 들썩여 보인다. 머리를 다치더니, 애가 갑자기 과감해졌어. 오늘은 나도 고통받겠군. 준석은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 정확히 1시간 후, 현민은 이게 퇴원기념 파티인지 취하기 대회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경훈은 술에 취해 다른 테이블마다 돌아다니며 자신의 이상형에 얼마나 부합하는지 사람들에게 점수를 매기고 있었다. 요환은 얼굴이 벌개져서 진호의 허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그런데 만만찮게 취한 진호는 달라붙지 말라며 컵에 든 얼음물을 요환의 머리에 들이부었다. 준석은 화구세트에서 붓을 하나 꺼내더니, 정문의 얼굴에 세차게 문지르기 시작했다. 화장이이이, 요래요래 하는 겅가?? 현민의 몫까지 술을 마신 정문은 문지름을 당하면서 그대로 고개를 끄덕인다. 문아, 너 블러셔 다 지워졌는데. 그러나 취해서 이런 사실을 알 리 없는 정문은 아직 써보지도 못한 붓에 자신의 화장품을 잔뜩 묻히고 있었다. 내 선물이라며. 현민은 한숨을 내쉰다. 그런데 갑자기 현민은 어디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낀다. 두리번거리다가 문가를 본 현민은, 너무 놀래서 입이 벌어졌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사람이, 문가에 서서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한 달 동안 얼마나 보고싶었는데, 이제서야 나타나다니. 동민은 가만히 현민을 바라보다, 현민이 자신을 발견하자마자 나가버린다. 안 돼, 놓칠 수는 없어. 현민은 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문가로 뛰쳐간다. 중간에 경훈과 어깨가 부딪혀 경훈이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하지만 지금 그런걸 신경쓸 새가 없어, 현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으로 달려간다.
"...동민이 형!!"
현민이 동민의 팔을 잡는다. 동민은 우뚝 서더니, 자신의 팔을 잡은 현민의 오른손을 가만히 바라본다. 확실하게 나아서 퇴원했구나. 이렇게 세차게 내 팔을 잡는 걸 보니 다 나았어. 동민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한 달만에 기적적으로 다 나았네. 축하해, 오현민."
".......왜 갑자기 오현민이라고 해요. 거리감 느껴지잖아요, 현민이라고 해 줘요."
"이제 다치지 마, 오현민. 좋아보이네. 그럼 이만, 난 바빠서 가 볼게."
동민은 현민의 팔을 떼어내더니, 다시 돌아가려 한다. 가지 마요, 한 달 동안 얼굴 보여주지도 않더니, 지금이라도 보여줘요. 현민의 말에 동민은 눈을 질끈 감는다. 그래, 모르는구나. 아무것도 몰라. 몰라서 다행이야, 그 아가씨 생각보다 약속을 잘 지켰구나. 동민은 정문에게 썼던 자신의 편지를 떠올린다. 그 편지 조만간 태워버리라고 해야 겠어.
"병원 입원시켜주고, 너 이렇게 잘 나은 모습 보면 됐지, 뭐."
".........내가 왜 이렇게 빨리 나았는지 알아요?"
"왜?"
"형 보려구요. 형이랑 얘기하고 싶어서요."
현민의 말에 동민은 천천히 몸을 돌려 현민을 바라본다. 현민은 진지한 눈빛이다. 앳된 얼굴에 새빨간 조명이 비춰져, 현민의 얼굴은 앳됨과 동시에 야한 분위기를 내뿜는다. 밀어내야 하는데, 이렇게 내 취향인 모습을 하고 있으면 내가 너무 힘들지. 어두운 곳에서 봐도 간신히 등을 돌릴 수 있는데 말야. 동민은 이를 악 문다.
"나 입원하기 바로 전 기억이, 형이랑 함께 한 날이에요. 점심저녁 같이 먹고, 한강 가서 얘기도 하고. 그 행복했던 기억이라구요."
".......좋은 기억이 남아서 다행이네."
"그런데 그 날 느꼈어요. 이건 내 짝사랑이 아니에요. 형도, 형도 나한테 끌리고 있죠, 그렇죠?"
다 느껴진단 말이에요. 현민의 말에 동민은 허망해진다. 나름 잘 숨기고 있다고 생각한 것을, 나 자신도 깨닫지 않기를 바랬던 것을, 너는 그대로 다 느껴버리고 말았구나. 동민은 애써 너 그거 착각이야, 라며 으르렁댄다. 그러나 현민은 아니에요, 라며 단호하게 대꾸했다.
"나 좋아하잖아요. 나도 형 좋아해요, 사랑한다고요."
"...............지금 뭐라고? 사랑?"
"네."
"착각이야, 어린이. 이건 그냥 끌림이라고 하는거야. 멀어지면 곧 사그라들."
동민은 기가 차다는 듯이 한숨을 푹 쉬더니, 허리에 한 손을 올린다. 다른 손으로는 눈썹을 세차게 문지른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하나, 싶어 동민은 난감해진다. 현민은 동민을 그저 바라만보고 있다. 동민은 나머지 손도 허리춤에 얹더니, 고개를 틀어 현민을 삐딱하게 바라본다.
"그래, 이참에 솔직하게 말할게. 나는 너한테 처음부터 끌렸고, 너도 그랬어. 그리고 서로를 원해서 섹스했지. 이게 끝이야. 더는 없어."
"그런 게 아니에요. 그냥, 그냥 같이 잔 건 하위 내용이죠. 우리 같이 서울 데이트한 날, 그 날은 섹슈얼한 게 전혀 없었잖아요! 그런데도 우리가 그냥 섹스를 위한 사이인 거에요?"
"....너가 다치지만 않았어도, 결국 우린 침대에서 아침을 맞이했겠지. 그게 다야. 사랑? 그런 건 없어. 그냥 섹스를 위한 단계를 밟은 사람인거야, 우리 둘 다. 난 죽었다 깨어나도, 널 절대 사랑할 리 없어."
동민은 다시 현민을 거칠게 떠밀었다. 현민은 강력한 동민의 벽 앞에 오늘도 울고 싶어진다. 혼자 이러는 거, 너무 힘든데.
".......그러면 나는 형이랑 연인이라는 사이가 되고 싶은데, 어떡해요?"
"접어."
"......그럼, 적어도 나한테 상냥하게 대해주면 안 돼요?"
"너가 쓸데없는 희망을 가지는데 내가 굳이 그렇게 할 필요는 없지."
동민은 고개를 젓는다. 현민의 눈은 다시 촉촉해진다. 현민이 우는 것을 보면서, 동민은 입이 씁쓸해진다. 다시 일어나게 되면, 현민이 웃는 것을 보고 싶었던 동민이었다. 하지만 현민을 웃게 하기엔, 동민의 죄책감은 너무나 강했다. 내 곁에서는 웃으면 안 된다는 결론을 내린 동민은 이전보다 더욱 강하게 현민을 밀어내기로 했다. 그러나 현민의 눈물을 볼 때마다 마음이 항상 약해진다. 지금도 현민에게 강한 말을 건네지 못하고 망설이는 동민이다. 널 어떻게 해야 되냐, 어린이. 눈물을 흘리는 현민에, 동민의 목소리는 다시 부드러워진다. 현민아.
"너는 내가 처음이라 이 세상에 나만 있는 것처럼 이렇게 나만 바라보는거야."
".........아니에요."
"지금은 아닌 것 같겠지. 나중엔, 장동민이라는 사람이 있었지, 정도로만 기억날거야."
"..........절대 아니에요."
"내 말 믿어. 아직 어려서 모르는거야. 넌 충분히 매력 있으니까, 다른 사람들도 너를 원할 거고. 너도 그 사람들 중 한 명 이상을 원하게 될거야."
..........얼굴 봤으니 이제 됐다. 난 갈게. 동민은 울고 있는 현민을 잠시 보더니, 몸을 돌려 가 버린다. 더 이상 현민을 바라보고 있다간 말이 길어지고, 더 같이 있고 싶어질까봐 위험하다. 그렇게 빠르게 자리를 벗어나는 동민을 보며, 현민은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준석은 귀를 의심했다. 뭐? 애인? 그러자 경훈은 고개를 세차게 끄덕인다. 응! 내 애인이야!
테이블마다 돌아다니던 경훈은, 새하얀 한 사람 앞에서 우뚝 섰다. 가늘고 긴 눈으로 웃으며 자신을 흘기던 남자는, 경훈이 손을 잡아오자 자신도 경훈의 손을 강하게 잡았다. 두 사람은 마치 지구에 둘만 남은 기분이었다. 찾았다 내 사람, 내가 찾던 사람. 둘은 눈으로 그 뜻을 대신했다. 그리고 서로 바라본지 3분만에, 경훈은 남자에게 사귀자고 말했고, 남자는 응했다. 경훈은 남자를 끌고 바로 자신의 테이블로 돌아와, 애인이라고 소개시켜주는 것이다. 준석은 바로 술이 확 깨버렸다. 애인이라고? 진호는 벌개진 얼굴로 경훈과 남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이고, 반갑습니다. 성함이?"
"김유현, 이라고 합니다."
"......응? 뭐라고 자기야? 김유...뭐?"
"..........애인이라면서요."
정문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노려보자, 경훈은 고개를 또 끄덕인다. 응! 그런데 왜 이름을 몰라요!! 정문이 따지자, 경훈은 남자답게 가슴을 딱 펴고 말한다. 모를 수도 있지, 난 이 사람의 이름을 사랑하는 게 아니니까! 이 사람 자체를 사랑하는 걸!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사람에게 사랑이라니, 준석은 울고 싶어 진다. 나는 대체 왜 이런 금사빠를 좋아해서 마음 고생을 하고 있는 걸까. 정문과 진호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요환은 두 분이 잘 어울리세요! 라는 말을 하다가, 준석의 째려받음을 한 몸에 받고 입을 다물었다.
"와, 내가 저 테이블에 간 순간. 이건 운명이다 싶었어."
"나도 자기가 우리 테이블에 온 순간, 후광이 비췄지."
"마치 자석처럼."
"지구가 우리를 끌어당기듯."
경훈과 유현은 사이좋게 대사를 주고 받는다. 뭐 지금 삼류 드라마 찍으세요? 준석의 표정은 급격하게 썩어들어가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둘이 어찌나 꼴불견인지, 경훈을 사랑하지도 않는 진호와 정문의 표정마저 급격하게 나빠지기 시작했다. 애인이 생겼다니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주고 싶은데, 왜 하나도 안 기쁘지. 오로지 요환만이 아빠미소로 둘을 축복해주고 있었다. 진호는 이런 사람에게 호감을 느꼈던 자신이 부끄러워 짜증이 난다. 셋의 표정이 어떻든, 경훈은 유현의 손을 꼭 붙잡는다.
"나 먼저 일어나봐도 될까? 오늘 밤은 내 연인과 사랑을 속삭이고 싶어."
"그래, 꺼져라. 제발 꺼져줘."
"자세한 소개는, 내일 다시 해 줄게. 그럼 이만, 가자 유훈아."
"그래, 경민 자기."
.........저기, 너님들 이름은 유현이랑 경훈인데요? 준석은 어이가 없어진다. 정문은 코웃음을 쳤으며, 진호는 어서 꺼져요!! 라고 소리를 질렀다. 요환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진호에게 전 당신의 이름을 저렇게 잘못 알고 있지 않아요. 홍.진.호.씨. 라며 또박또박 진호의 이름을 귓가에 대고 읊어주었다. 그러나 진호는 듣기 실다며, 이젠 아예 얼음물이 든 물통을 요환의 머리 위에서 뒤집었다. 준석은 문득 한 워터파크에 있는 물 쏟는 해골을 요환의 머리로 대신하면 어떨까, 싶어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차인 남자 주인공이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며 공원을 떠돈다. 가을 바람은 남자의 뺨을 때리고, 남자는 그렇게 공원 벤치에 앉아 고독을 씹는다. 현민은 이런 광경은 옛날 드라마에서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재, 현민은 그러고 있었다.
작은 스케치북 하나와 색연필을 들고, 현민은 공원에 앉아있다. 길을 지나는 행인들을 크로키할 심산으로 이리저리 사람들을 살핀다. 그러다가 곧 현민은 자신이 동민을 찾는 것을 발견한다. 아니, 이 길거리에 장동민이 있을리가 없잖아. 나, 왜 이리 청승맞은 거지? 현민은 한숨을 내쉬면서 공책에 애꿎은 색연필만 벅벅 문댔다. 그렇게 하얀 공책은 갈색으로 물들어가는데, 현민의 귀에 갑자기 잔잔한 음악이 들리기 시작한다. 누군가가 노래를 부르고 있다. 현민은 고개를 들어 소리의 근원지를 눈으로 좇았다. 그리고 곧, 현민은 공원 한 구석에서 앰프의 옆에 앉아 노래를 부르는 남자를 발견한다. 남자의 목소리는 너무 높지도, 너무 낮지도 않아 가을 바람에 잘 어울리는 목소리였다. 현민은 그림 그리는 것을 멈추고 남자의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날 안아주면 안 돼요
손 잡아주면 안 돼요
남자가 이야기하듯 부르는 노래 가사에 현민은 동민이 떠오른다. 자신이 동민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다. 오랜만에 보는데, 제발 당신이 필요한 나를 따뜻하게 대해줘요. 그러나 동민은 차가운 말을 끝으로 등을 돌리고 가 버렸다. 현민은 동민이 생각나, 검은 색연필을 들고 동민을 그리기 시작한다. 머리카락부터 단단한 어깨, 크지 않지만 좋은 비율, 다리까지. 무언가에 홀린듯 현민은 빠르게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막상 눈을 그리려니, 현민은 고민에 빠졌다. 다정한 눈을 그리고 싶다. 하지만 동민이 마지막으로 보여준 냉정한 눈빛만이 머릿속에 가득하다. 그러나 그런 눈빛은 그리고 싶지 않은데. 현민은 고민하더니, 결국 색연필을 놔 버린다. 이 그림은 여기까지가 끝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고개를 드는데, 문득 노랫소리가 끊긴 것을 발견한다. 응? 아직 해도 안 졌는데, 벌써 버스킹이 끝난건가? 현민은 두리번거리다가, 노래를 부르던 남자가 자신의 옆에 다가오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남자는 현민이 자신을 바라보자, 씩 웃더니 더욱 빠르게 다가왔다.
"그림은, 잘 그려져요?"
"네?"
"아니, 아까 노래부르면서 보는데, 그림을 열심히 그리길래."
"아, 뭐 그냥 크로키 수준이에요."
저 봐도 돼요? 남자는 현민의 무릎 위에 놓인 공책을 가리키며 묻는다. 현민이 고개를 가만히 끄덕이자, 앰프를 조심스럽게 땅에 놓고는 남자는 현민의 옆에 앉는다. 그리고 스케치북을 가져가 그림을 한 장 한 장 구경하기 시작한다. 와, 진짜 잘 그리시네요. 낯선 이의 칭찬에, 현민은 살짝 기분이 좋아진다. 그러다 남자는 스케치북을 탁 덮고, 현민을 바라본다.
"그림은 다 그렸어요?"
"아, 글쎄요. 뭐......"
"저는 오늘 너무 추워서 버스킹 이만하고 커피나 한 잔 할까 하는데, 한 잔 할래요?"
"네?"
"이 공원에 외톨이는 나 혼자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혼자 계시니까 제가 반가워서 그래요."
현민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잘 됐다, 어서 가요! 남자는 넉살 좋은 눈웃음을 쳐 보이며, 한 손으로 현민의 손을 잡아 당긴다. 몇 시간 동안 차가운 곳에 앉아 노래를 불렀던 탓인지, 남자의 손은 매우 차갑다. 어, 추우시겠어요. 현민의 말에 남자는 응, 너무 추웠어요. 라며 우는 소리를 해 보인다. 그러더니.
"나 까페까지, 잠깐 내 손 좀 녹여주면 안돼요?"
라면서, 대뜸 현민의 손을 꽉 잡는다. 깍지까지 껴 오는 그의 손을, 현민은 놀라기는 했지만 뿌리치지 않았다. 그렇게 둘은 손을 사이좋게 맞잡고 작은 까페로 향했다. 남자가 따뜻한 라떼 두 개를 시키는 동안, 현민은 까페 구석의 테이블에 앉는다. 그러다 문득 동민과는 이렇게 작은 까페에 와 보지도 못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냥 뻔뻔하게 찾아가 대뜸 나 커피 사줘요! 라고 하면, 동민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어린애가 사 달라니 별 수 있나, 라며 마지못하는 척 하며 나와 줄까? 아니면 무시하고 그 날처럼 쌩하니 가 버릴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잔 두 개가 테이블 위에 놓인다. 놀라 눈을 들어보니, 남자가 잔 하나를 현민의 앞에 놓아준다. 그리고 자신의 잔도 가져가더니, 트레이를 창틀 위에 올려놓는다. 그러더니 테이블 위에 놓인 현민의 손을 또 다시 잡는다.
"아직 손이 얼어있어서, 좀 더 잡아줘요."
"커피 잔 있잖아요."
"얜 너무 뜨겁잖아요! 좀 녹인 다음에 잡아야지! 화상 입어요!"
화상은 무슨. 현민이 픽 웃어보이자 남자는 헤헤 웃는다. 현민이 라떼 한 모금을 마시는데, 잔을 내려놓자마자 남자가 현민을 개구지게 바라보며 입을 연다,
"전 김성규라고 해요. 이름이 어떻게 돼요?"
"전, 오현민이요."
"현민씨라, 오현민씨..."
오현민. 현민이... 몇 번 이름을 반복해서 말하더니, 성규는 다시 현민을 바라본다. 나이는?
".....18살이요."
".......에엑??? 18살?? 와........나 경찰서 끌려가는 거 아냐?"
"18살이랑 커피 마시는 게 어때서요."
"단순히 커피만 마시면 모르지만, 난 지금 18살 현민이한테 작업걸고 있는 건데."
성규의 말에 현민은 귀를 의심한다. 네? 되묻자, 성규는 현민의 손을 더욱 강하게 잡는다. 그리고는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표정을 정리한다. 사뭇 진지한 표정이 된 성규는 현민을 그윽하게 바라본다.
"난 23살, 김성규라고 해요. 현민씨가 공원 들어왔을 때부터 관심있게 지켜봤는데."
".....아......"
"........마음에 안 드나? 나 어때요?"
"그냥, 갑작스럽네요."
"아직 안 지 얼마 안 되었잖아요. 조금만 더 있어봐요. 나 진짜 괜찮은 사람이야."
성규는 헤헤 웃더니 현민의 손을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그새 성규의 손은 현민과 똑같은 온도가 되었다. 이젠 차갑지도 않네, 라고 생각하며 현민은 성규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본다. 성규도 현민의 눈을 빤히 바라보더니, 와 - 라며 탄성을 내뱉는다.
"진짜 귀엽다."
"아니, 아니에요."
"빈 말이 아니라, 멀리서 봤을 때 진짜 귀여웠는데. 가까이서 보니깐 사랑스럽게 귀엽네."
사랑이라. 이렇게 낯선 사람에게 들어도 기분 나쁘지 않은 단어이다. 현민은 자신의 외로움이 누그러지는 것을 느끼며 성규의 눈을 천천히 바라본다. 상처받은 강아지의 눈을 한 현민을 보자, 성규는 차분하게 현민의 손을 흔든다. 왜 그래요, 응? 성규의 친절한 말에 현민은 다른 한 손을 잡아달라는 듯이 내민다. 성규가 두 손을 잡아주자, 현민은 처음 느껴보는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다. 뭘까. 현민은 처음으로 동민이 생각나지 않는 순간을 느끼며, 오늘 처음 본 남자의 손을 더욱 강하게 맞잡는다.
여기서 안 나온 사실 몇 가지.
1. 현민은 당분간 진호네 집에서 지냄
2. 짐은 동민이 현민이 몰래 모두 차로 진호네 집까지 날라다 줌. 그러나 그 피묻은 맨투맨과 바지는 짐 속에 없음
3. 퇴원 파티날, 경훈과 현민이 돈을 안 내고 사라짐. 게다가 진호가 차로 정문을 집까지 데려다주어, 결국 그 날 돈은 준석이 다 냄. 게다가 미술도구들까지 진호네 집으로 배달해주어야 해서, 준석은 며칠 내내 그 일로 화가 나 있었음.
4. 동민이 정문에게 써 주었던 편지는, 이미 진호가 화가 나서 찢어버림. 애도요..
5. 동민이 정문에게 준 스프레이는 의외의 용도로 쓰인다. 정문이 몰래 창엽의 자리, 가방, 체육복, 교복에 다 뿌려놓아 최루액 냄새가 진동을 하는 것. 그래서 괴롭힘을 당하던 아이들은 최루액 냄새가 조금이라도 나면 바로 도망쳐 위기를 모면한다고 한다.
새털같은 새털데이. 달립시다 호우호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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