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술 표면이 반짝거린다. 물기를 머금은 듯한 붉은 빛이 나를 삼켜달라는 듯이 빛을 반사했다가, 말을 하며 윗입술과 부딪히자 탱글한 촉감이 혀에 다시 전달되는 듯 하다. 현민은 동민이 말하는 동안 입술만 바라보느라 설명의 절반을 흘려들었다. 동민이 그런 현민의 눈길을 모를리 없었다. 어제 그만큼 떡을 쳤으면 됐지, 오늘 오자마자 집중 못할 건 뭐람. 이럴 거면 왜 남자친구를 만들고 그 난리를 쳤는지 모르겠다. 하여간 이 어린 놈이란. 동민은 심기가 불편해졌다.
"집중해, 어린이."
동민이 손을 들어 현민의 이마에 딱 하고 딱밤을 먹였다. 거실을 가르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현민은 있는 힘껏 인상을 쓴다. 아, 아프잖아요!
"한 애티튜드에 올인해라."
"무...무슨 말이에요!"
"나 같은 노선을 타던지, 아니면 기회비용을 들인 채로 선택한 길을 따르던지. 지금 넌 이것도 갖고 싶고 저것도 갖고 싶다는, 그야말로 욕심쟁이 어린애 심보 아니냐."
동민의 일침에 현민은 입을 다문다. 맞는 말이다. 현민은 사실 동민의 몸을 원하는 본능과 자신을 사랑해주는 성규 사이에서 무던히도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성규만 사랑하기엔 동민과의 옛 느낌을 포기할수가 없겠고, 동민에게 오기엔 자신을 이처럼 사랑해주는 김성규만한 사람이 없겠다. 현민은 동민의 집 초인종을 누를 때 까지 두 노선에 대해 엄청난 고민을 했었다. 그러나 막상 동민의 얼굴을 쳐다보면 고민 따윈 접어두고 본능을 따른다 이 말이지. 동민은 자신의 본능에만 충실한 이 어린 짐승의 스탠스가 마음에 안 드는 거다. 그럴거면 가지나 말던가. 동민은 어이 없는 표정을 지어보인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벽에 걸린 큰 시계를 바라본다. 시계는 현재 시간이 5시 21분인 것을 나타내주고 있다. 6시에 진호와 경훈이 오기로 했지만, 성격상 둘 다 일찍 올 가능성이 농후하다. 둘 다 오기 전에 이 장애물부터 치워야겠군. 동민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책상 앞에 앉은 현민을 잡아 끌어낸다.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있던 현민은 의자에 앉은 채로 질질 끌려나온다.
"이만큼 프로그램 다룰 줄 알면 됐어, 이제 집에 가라."
"저, 저기 저 아직 툴 다루는게 미숙한데요!"
"그럼 내 노트북 빌려가. 집에 가서 니 남친 품에 안긴 채로 연습이나 해. 애꿎은 남의 입술이나 보면서 침흘리지 말고."
"...........안흘렸어요."
현민의 머쓱한 말을 무시한 채, 동민은 거칠게 노트북에 연결된 코드를 뽑는다. 이거 충전기, 이거 마우스. 현민은 동민이 재빠르게 안겨 주는 노트북의 딸린 품목들을 하나하나 껴안는다. 아니, 저기, 잠깐만요. 왜 이렇게 서둘러서 나를 쫓아내려는 거야...!! 난 그저 잠깐 쳐다본 것 뿐이라고! 억울한 현민은 마음속으로 아우성치며 동민을 바라본다. 그러나 동민은 현민 쪽으로 눈길 하나 주지 않은 채, 타블렛을 현민의 가방에 넣더니 가방 끈을 현민의 팔에 끼워넣는다.
"이건 내일 회사에 가져와. 이제 너 꺼니까 소중하게 다루고."
"저, 저기 형. 알았는데 왜 이렇게 갑자기 서둘러요."
"더 있다간 어제처럼 헛짓거리 할 것 같아서. 게다가 누가 개수작을 부리니, 빨리 쫓아내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
"..어제 나만 좋아서 했나."
"둘 다 원나잇만 좋아하는 난봉꾼이면 몰라도, 충실해야 할 애인님이 있는 사람이면 이야기가 다르지."
그래, 졌다 졌어. 현민은 가만히 입술을 깨문다. 확실히 김성규가 있는 오현민이란, 절대로 예전의 사랑했던 익숙한 사람에게 안겨서는 안 되는 입장이다. 그런 현민의 표정을 가만히 보던 동민은 현민의 어깨를 밀친다. 이제 공적인 시간은 끝났어, 어린이. 장동민의 사적인 시간에는, 오현민이란 있어서는 안 돼. 현민은 최대한 밀려나지 않으려 애쓰지만, 두 팔 가득 노트북과 장비들을 안고 있는 탓에 힘이 부쳐 점점 현관문 쪽으로 밀려나기 시작한다.
"아, 내 발로 나가게 밀지 마요!"
"지금 너 니 발로 움직이고 있어. 그러니까 나가."
"아니, 좀 떠밀지 말고...!"
현민은 동민이 떠미는 힘에 휘청, 한다. 어, 이러다 넘어져서 노트북이고 타블렛이고 부딪혀서 망가져도 저는 몰라요! 그러나 동민의 태도는 굳건하다. 그거 잘못되면 내일 너만 엿되지 내가 엿되냐. 마음대로 해. 이렇게 보이지 않는 기싸움을 둘이서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이 싸움을 하나의 소음이 갈라버렸다. 이 소음에 동민과 현민은 깜짝 놀라 현관에 굳은 듯 섰다. 몇 초 뒤, 초인종이 다시 울린다. 현민은 당황한 표정으로 동민을 바라본다. 누구에요? 동민은 한숨을 내쉰다. 벌써 왔구만. 현민의 눈빛을 무시하며 현관문을 벌컥 열자, 이 상황에서 전혀 반갑지 않은 두 얼굴이 보인다.
"형아, 헬로우!"
"형, 나 왔...... 뭐야, 넌. 왜 여기 있어."
진호는 동민 옆에 서 있는 현민을 보자마자 또 으르렁거린다. 대체 왜 애인도 있는 놈이 아직도 동민의 옆에 껄떡대는지, 진호는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다. 말했잖아요. 일 때문이라고. 현민은 그런 진호의 눈빛에 맞서며 이를 악문다. 이게 뭘 잘했다고 날 이렇게 쳐다봐? 진호의 눈빛은 현민을 당장이라도 한 대 칠 기세다.
"저, 저기. 나 안에 들어가고 싶은데... 비켜주지 않을래?"
이 긴장상태를 가만히 보던 경훈이 한 마디 한다. 둘 사이가 어쨌든 그건 둘의 문제고. 나는 동민이 형네 집에 들어가야겠어. 경훈은 긴 두 팔을 뻗어 현민과 진호 사이를 가른다. 그리고는 잠깐 실례! 라며 경쾌한 말투로 집안으로 향한다. 동민은 그런 경훈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현민의 가슴팍을 그대로 떠 민다. 현민은 열린 문틈으로 그대로 밀려, 문 밖으로 나가고 만다. 동민은 진호의 팔을 당겨 집 안으로 들인다. 잘 가, 내일 아침 9시까지 와, 절대 늦지 말고. 동민은 현민에게 한 마디 툭 던지더니, 그대로 문을 닫아버린다. 그리고 돌아서는데, 진호가 화난 표정으로 동민을 바라보고 있다. 왜.
".....쟬 집 안에 들였어?"
"어쩔 수 없지. 회사 일을 하려면 프로그램을 다룰 줄 알아야 하는데."
"그걸 왜 형이 하는데."
"내가 추천인이니까."
"그러니까 형이 왜 쟬 추천하냐고! 나 이해가 안 되네."
"....왜 이렇게 애인 있는 사람들만 나한테 요즘 꼬이냐. 짜증나게."
진호가 틱틱대자, 동민은 한 마디 쏘아붙인다. 무, 뭐? 내가 애인이 어디 있어! 진호가 억울한 듯 소리치지만, 동민은 아무 대꾸 없이 휙 집 안에 들어가버릴 뿐이다. 동민은 거실 소파에 깔개처럼 누워있는 경훈에게 다가선다. 경훈은 소파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만 보고 있다.
"야."
"엉?"
"근데 왜 두 명만 왔냐. 이준석은."
".................아."
이준석, 이라는 말에 경훈의 입은 떡 벌어진다. 동공은 잠시 허공에서 흔들린다. 아, 어, 그게, 음.......... 무슨 말을 하려는지, 경훈의 입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더듬거리기만 하고 있다. 역시, 무슨 일이 있다니까. 동민은 눈썹을 들어올린다. 요즘 준석은 연락이 되지를 않는다. 기껏 연락이 닿았을 때는, 독감에 걸렸다는 말 뿐이었다. 그러나 목소리에서부터 아픈 연기를 하기 위해 애를 쓰는 것이 들렸다. 웃기지마, 아예 메르스에 걸렸다고 하지 그래? 비아냥거려봤자 준석은 이미 집 안에 다시 숨은 뒤였다.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인이 필요했는데, 마침 김경훈이 나타나주다니 잘 됐네. 동민은 누워 있는 경훈의 눈을 빤히 바라본다. 경훈은 애써 천장으로 다시 눈길을 돌려보지만, 이미 동민이 두 팔 안에 경훈의 얼굴을 가둔 후였다.
"이준석은?"
"아..........저.........아, 아프대!"
"어디가."
"아, 음.........배, 배가!"
"이준석 말로는 독감이라던데."
"아, 그...그래! 맞아! 독감이야! 열이 나서 막..."
"..............다시 물어본다. 이준석은?"
이씨잉.... 전혀 흔들리지 않는 동민의 말투에, 경훈은 억울한 듯이 억눌린 입 사이로 약한 욕을 내뱉는다. 경훈은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타고난 성격상 거짓말을 하면 온 몸이 간지럽다나. 그래서 거짓말을 못 하겠단다. 지금 경훈의 태도를 보자면 전혀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뻔뻔한 얼굴로 속일 수도 있을텐데, 그저 곤란한 표정으로 눈치만 보고 있다. 말하라고. 동민이 경훈의 얼굴 옆을 탕 치자, 경훈은 히익 - 하며 숨을 들이쉰다.
"나, 나, 나랑 어색해서 그래요!"
"너랑? 너랑 왜 어색해."
"아, 그게............."
"너 이준석한테 뭐 잘못했냐?"
"...............네."
그럴줄 알았다, 핵트롤. 동민은 경훈에게서 몸을 떼고는 경훈의 머리맡에 앉는다. ...형, 나 어떡해요!! 경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아 얼굴을 세차게 문지른다. 그 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진호는 깜짝 놀란다. 아니, 기껏 비비 발라놓고 저렇게 지워버릴건 뭐람? 곧 경훈이 얼굴에서 손을 떼자, 비비 크림이 지워져 얼굴이 군데군데 얼룩덜룩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경훈은 동민을 바라보며 울상을 짓는다.
"준석이가 나 좋아했대요. 그런데 그 말하면서 막 울고 나 쫓아내고..."
"...........뭐? 뭐가 뭘 좋아해?"
"...준석이가 나를."
경훈의 푸념을 딱 끊어버리고 동민은 경악했다. 이준석이? 얠? 왜? 이준석 나름 우리 중에 냉정한 놈 아니었냐? 근데 왜 얘를 좋아해? 동민이 입을 딱 벌리고 가만히 있자, 경훈은 다시 푸념타임을 갖기 시작한다.
"사실, 우리가 같이 섹스를 10번 넘게 하긴 했지만, 내가 눈치를 못 챘거든요. 설마 날 좋아하겠어, 라는 생각도 잠깐 들었었는데. 그런데......."
"..........뭐? 뭐가 뭘 해?"
"우리 둘이, 섹ㅅ................악!!"
이 미친 개가 진짜!!!!!!!! 진호는 경훈의 얼굴을 쿠션으로 가격했다. 덕분에 경훈은 말을 잇지도 못하고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진호는 계속해서 경훈의 얼굴을 때리기 시작했다. 정신, 나간, 놈이, 진짜, 미쳤, 냐!!!! 경훈은 소파에서 벗어나 도망가기 시작한다. 아파!!!
"눈치는 어디다가 갖다 팔아먹고, 뭐? 10번이나 해? 니가 상대방한테 마음도 없는데 그렇게나 하고 싶었냐!!"
"우리 둘 다 궁해서 하기 시작한거라고!! 그래서 준석이도 나처럼 그냥 그런 줄 알았지!"
"너 같은 놈 빼고 어떤 놈이 좋아하지도 않는 놈이랑 10번을 넘게 하냐!!!!"
"......세, 섹스 파트너?"
경훈이 마치 퀴즈쇼의 어려운 질문에 대답하듯 진호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순간, 집 안에는 싸한 정적이 흘렀다. 동민의 입은 다시 딱 벌어졌다. 와... 진짜 쟤는 뭐지? 엄청나다 진짜. 진호는 쿠션을 잡은 동상처럼 잠시 굳어있다가, 서서히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정신머리가 개판이네. 내가 오늘 아주 사람 만들어줘야겠다, 이리와.
"죽어!!!!!!!!!!!"
우당탕탕 하는 소리와 함께 진호가 경훈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동민은 진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혀를 끌끌 찬다. 이래서 섹스는 한 사람이랑 길게 하면 안 된다니까. 저렇게 의도하지 않은 접촉사고가 나기 마련이거든. 곧 경훈이 맞는 소리가 동민의 귓가에 들려온다. 퍽퍽 소리를 배경으로 하며 동민은 생각에 잠긴다. ........그럼, 한 번 했던 사람은 두 번 다시 원해선 안 돼. 특히 애인이 있는 경우에는 더더욱. 동민은 문을 닫아버리기 직전 자신을 바라보던 현민의 얼굴을 떠올린다.
"........왔어?"
현민은 끙끙대며 집 안에 들어온다. 가방 안에 노트북이며 타블렛이며 가득 들어서, 이건 마치 군장을 가득 지고 걷는 군인의 모습 같다. 아윽, 무거워. 현민은 가방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뻐근한 어깨를 문지른다. 스스로 안마를 하다 고개를 들어보니, 성규가 방 입구에 기대어 서 있다. 그런데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지, 표정이 잔뜩 구겨져 있다. 현민이 그런 성규의 표정을 보자마자, 고개가 갸우뚱하다.
"....형?"
"한시간마다 메세지 준다고 약속했잖아."
"..........아! 미안해, 형. 핸드폰이 가방 맨 밑에 있어서 집에 올 때 연락을 못 했다!"
현민은 그제서야 성규와의 약속을 떠올렸다. 분명 불안해하는 성규를 위해 한 시간마다 카톡을 주기로 했었다. 하지만 동민이 핸드폰 위로 타블렛을 넣었고, 그 위로 현민이 그냥 나머지를 쑤셔넣어서 핸드폰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동민의 집에서 쫓겨 나면서 바로 집으로 와 버린 터라 메세지를 보내지 못했던 것이다. 현민의 말을 듣자 성규는 얼굴이 더욱 구겨진다. 핸드폰이 가방에 있는데 왜 연락을 못하는데. 성규의 불만제기에 현민은 그 즉시 가방을 열어보인다. 둘둘 말린 전선들과 노트북이 꽉 메운 가방의 내부에, 성규는 잠시 할 말을 잃는다.
"이 밑에는 타블렛도 있어."
"............산 거야?"
"아니, 받은 거."
"그 사람이 준 거야? 새 거? 다 사준 거야?"
"아니, 쓰던 거."
성규는 현민의 가방으로 다가오더니, 노트북을 꺼내본다. 쓰던 것 치고는 거의 새것처럼 상태가 양호하다. 가방 안쪽에 놓인 타블렛도 오늘 샀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성규는 잠시 가만히 이것들을 내려다보더니, 한숨을 푹 쉰다.
"현민아."
"........응."
"마음 같아서는 이거 다 갖다 버리라고 하고 싶어."
"..................."
"그리고 내가 새로 다 사주고 싶은데, 내 형편으로는 새거는 커녕 이만한 중고도 하나 못 사주겠지."
성규는 동민의 차를 본 이후로 한 가지 자격지심이 생겼다. 바로 돈. 가난한 학생에 음악을 하는 성규와는 달리, 동민은 번듯한 직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집도 있고 차도 있으니 어느 정도 여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다만, 이렇게 비싼 노트북에 타블렛까지 안겨주다니. 성규는 불안했던 마음이 더욱 불안해진다. 게다가 장동민이라는 사람, 오현민의 짝사랑이라더니 그건 아닌 거 같다. 이 사람이 돈을 잔뜩 가지고 있는 만큼, 오현민에 대한 마음도 크다. 데려다 주는 거나, 이렇게 뭘 준다거나 하는 걸 보면. 그렇게 생각한 성규는 고개를 들어 자신의 어린 연인을 바라본다.
"내가 금수저여서 장동민보다 돈이 많았다면 좋겠다."
"형, 제발."
"제발, 뭐. 사실이잖아."
"그 사람 얘기 안 하기로 했잖아요."
"너가 약속도 안 지켰는데 애인으로써 당연히 불안해할 수도 있는 거지. 게다가 그 사람 얘길 먼저 꺼낸 건 너야."
성규의 말에 현민은 입술을 가만히 깨문다. 확실히 그건 맞다. 잘못을 저지르고 속죄해야 할 사람은 현민이다. 동민에 대한 얘기를 취중에 다 털어놔버린 것도, 성규 몰래 동민과 부적절한 시간을 가져버린 것도 자신이다. 하지만 확실히 동민보다는 성규와 오래가야 할 관계다. 이제 앞으로 성규와 둘이서 함께 걸어가야만 한다. 그런데 계속해서 성규의 입에서 동민의 이야기가 나온다니. 현민은 그건 안 돼, 라며 고개를 젓는다.
"......내가 미안해요. 내가 다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얘기하지 마요."
"............."
성규는 하마터면 싫어, 라고 말해버릴 뻔 했다. 그런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로 괜찮아질 것 같아? 장동민이라는 사람 때문에 내가 얼마나 속상한지 넌 모를 거야. 성규는 현민이 처음으로 정말 미워졌다. 가난한 것에 대한 자격지심, 애인에 대한 불안감이라는 두 가지에 단 하나의 불안요소가 작용했다. 장동민. 그런데 그의 집에 현민이 연속 이틀이나 다녀왔다. 불안하게 연락도 제대로 안 되고 말이지. 이건 내가 화를 내도 되는 부분 아닌가? 성규가 굳은 얼굴로 계속해서 말이 없자, 현민은 성규의 손을 덥석 잡아온다.
"형, 나 봐요."
"..............."
"정말 미안해요. 내가 다 잘못한 거 아니까, 조금만 나 용서해주면 안 돼요?"
".........나 마저 작업하던거 하고 얘기하자."
성규는 현민의 손을 놓더니 작업실로 들어가버린다. 현민은 성규의 뒷모습만 바라보더니, 바닥에 털썩 누워버린다. 오늘 하루 되는 일이 없네. 이건 다 내가 노선을 제대로 정하지 않아서 생긴 문제 같다. 일을 저질렀으면 책임을 지고 하나에 몰두해야하는데, 둘 다 놓고 싶지 않다는 안일하고 무른 생각 때문에 둘 다에게 싸늘한 시선을 받았다. 나쁘다, 최악이야 오현민. 현민은 가만히 누워 눈을 감았다.
다 안다고. 동민의 말에 준석은 한숨을 쉬었다. 그 놈이 또 다 불었죠, 김경훈이?
- 그래.
"하여간 입이 깃털이야, 깃털."
- 그런 놈 좋아하는 너도 고생이다.
동민이 말하자 준석은 얼굴이 화끈해진다. 경훈을 쫓아낸 그 날부터 경훈과 연락을 끊고 얼굴을 보지도 않았는데, 그새 경훈이 더 좋아져버렸다. 꿈에 경훈이 나오는 건 다반사요, 침대에 누워만 있어도 경훈과 몸을 섞던 그 느낌이 자꾸만 되살아난다. 이쯤 되면 중증이야, 이준석.
- 그래서, 이렇게 인연을 끊고 살 셈이냐?
"........솔직히 얼굴 더 보고 싶지가 않았어요. 나 혼자만 좋아하고 그러니까."
- 짝사랑 한 두번 해보냐. 오바는.
"지금 경우는 예전이랑 다르죠. 김경훈은, 나 섹파 취급하면서 그런건데. 내가 상처 받는 건 당연하죠."
- 확실히 그 놈이 다른 사람 마음 못 헤아리는 건 타고났지.
".........그런데 또 좋고, 미치겠어요."
전화기 너머로 동민이 못마땅하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온다. 확실히 동민은 좋은 연애상담소 거리는 못 된다. 연애를 해 본적이 있는 사람이어야 말이지. 한번도 동민은 누군가와 진득하니 연애라는 것을 해 본적이 없다. 그래서 두근두근한 연애 직전의 사람들이 가지는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지금도 누군가를 이렇게 좋아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반응을 보이는데 말이야. 그런데도 준석은 동민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제일 편하다. 오히려 연애감정을 전혀 느끼지 않는 사람에게 털어놓는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이야기를 하거나 충고를 듣는 것에서 부담이 덜하다. 심지어는 엄청난 돌직구로 연애 고민을 타파해 줄 때도 있다.
- 그럼 한 번 만나.
이렇게. 준석은 애써 미루고만 있던 해결책을 듣고는 입술을 깨문다. 이렇게 피하기만 해서는 답이 내려지지 않는다. 적어도 준석에게는. 피한다고 피했더니 더 좋아지기만 하고, 이럴거면 아예 맞닥뜨려서 제대로 담판을 짓는게 낫지. 이 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준석은 일부러 경훈에게 연락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맞닥뜨렸을 때, 그리고 담판을 지었을 때 생길 자신의 마음에 남을 상처가 무서워서.
- 뭐, 걔가 너한테 마음이 없다면 너가 상처받겠지만. 펑펑 미뤄서 계속 마음 졸일 바에야 아예 마음을 부숴버리는 게 낫지. 원래 뼈도 완전하게 부숴져야 빨리 붙는 법이거든.
".......요즘 독심술 배워요?"
- 들켰지? 사람들 생각하는 게 다 똑같지. 거기서 거기야.
사람을 많이 만나는 동민이라 그런지, 사람 심리 파악하는 거 하나는 죽여준다. 엄청난 남성 편력이 이런 능력을 가지게 할 줄이야.
- 그런 의미에서, 이번주 금요일 저녁 8시 시간 비워라. 시사회나 가.
"......에?"
- 표가 두 장 생겼는데 별로 관심 없는 영화거든. 마침 잘 됐지, 너네가 그거 써라.
........아니 저기, 나는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 김경훈이랑 뭔 얘기를 해야 둘이 같이 영화를 보던가 하지! 갑자기 그렇게 진지한 얘기도 못 나눴는데 영화를 어떻게 봐! 준석이 당황해하자, 동민은 킥킥거린다. 그렇게 신음이나 나눌 때 이야기나 나누지 그랬냐.
- 너만 준비 안 된거지, 다른 사람들은 다 준비 됐다.
"다른 사람들?"
- 시사회 여는 인간들, 시사회 나오는 인간들, 그리고 김경훈. 너랑 보랬더니 표 두 장 넙죽 가져가던데?
".........김경훈이 별 말 안해요?"
- 글쎄. 그 별 말을 내가 전해줘도 되겠냐. 당사자한테 직접 들어야지.
그건 그렇지. 준석이 중얼거린다. 전화기에서 한숨이 흘러나오더니, 낮은 동민의 목소리가 들린다. 내가 지금 내 앞가림도 못하는데, 이것들 코치는 무슨.. 응? 앞가림? 준석이 되묻자, 동민은 갑자기 전화를 끊어버린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그러나 이미 통화는 끝났다. 준석은 핸드폰을 침대 위로 던져버린다.
"김경훈이랑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또 화를 내야 되나? 아니면 그동안 나한테 어떤 스탠스로 그랬는지를 물어봐야하나?"
준석은 경훈과 나눌 이야기를 하나하나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러더니 아예 책상에서 종이를 꺼내더니, 마인드 맵을 그리기 시작한다. 가지가 점점 늘어날수록, 준석의 표정에는 자신감이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글쎄, 과연 저 말을 당당히 다 할 수 있을진 모르겠다만.
홍보 디자인 팀이 하는 일은 단순하다. 온갖 광고물들을 디자인하고 기획하는 것. 그러나 현민에게 주어진 임무는 디자인 기획 쪽이 아니었다. 디자인 팀에서 한 모든 디자인 파일들을 확인하고, 자잘한 단순 노동을 하는 것. 뭐, 확실히 첫 날에는 중요한 임무를 주지는 않지. 하지만 오전 9시부터 인수인계 대신 엄청난 파일들을 하나하나 검수하는 건 좀 아니지 않나? 현민은 혼자 툴툴대며 6시간 째 컴퓨터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으, 눈이야. 눈이 더욱 뻑뻑해지는 것을 느끼며 파일을 열어보는데, 갑자기 누가 책상 위에 툭 하고 무언가를 던지는 소리가 난다. 고개를 들어보니, 디자인 팀 사원인 연주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
"파일 다 보거든 이것들 좀 정리해줘요. 지난 디자인들 자료인데 다 섞어서. 밑에 날짜 있으니까 잘 보고."
그리고는 말없이 몸을 돌려 가 버린다. 현민의 옆에는 두꺼운 파일철 하나와, 딱 봐도 몇백장은 되어 보이는 종이뭉치가 놓여있다. ........이걸 언제 다 해...? 현민은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현민이 아침에 인사를 드릴 때부터 저 사원은 표정이 좋지 않았다. 학교를 중퇴한 사람이 일을 잘 하겠어? 라는 혼잣말과 함께 자신을 노려보던 그 눈빛을, 현민은 똑똑히 기억한다. 장차장님이 추천해 준 사람이니까 다들 믿고 맡기라구! 연승의 애써 분위기를 띄우는 말에도 연주는 말없이 현민을 노려보았다. 내 참, 내가 나오고 싶어서 나왔나. 현민은 으르렁거리면서도 종이뭉치를 덥석 잡는다. 내가 한 시간 만에 다 해서 칼퇴를 해 주지. 두고 봐.
"괜찮은 거 같아요?"
동민은 연승의 말소리에 화들짝 놀라 하마터면 종이컵을 떨어뜨릴 뻔했다. 복도를 지나는 김에, 디자인 팀 사무실을 흘끗 쳐다보며 현민이 잘 하고 있는지 몰래 보는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나타난 연승이 말을 걸다니. 동민은 놀랐다는 티를 내지 않고 연승을 가만히 바라본다.
"아직, 온 지 하루 됐는데 어떻게 알아. 그리고 그건 내가 최과장한테 물을 말 아닌가?"
"아 그러네!"
나 바보다! 라며 연승이 활짝 웃자, 연승의 치아에 사무실 조명이 비춘다. 동민은 순간 자일리톨 모델이 연승이었다면 껌 매출이 2배 이상은 찍었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 인수인계 제대로 해 주지도 못했는데 검토하는 거 보면, 괜찮더라고요."
"아직은 딱히 디자인 업무 쪽은 못 시키겠나보지?"
"그래도 내일은 한 번 일주일 기한 잡고 웹 디자인 기획 한 번 시켜보려구요. 아직 큰 업무에 투입시키긴 그렇고."
"........고등학교 중퇴인 미성년자가 회사 아르바이트. 칼퇴까지 하실 텐데, 부서 직원들이 퍽도 이쁘게 보겠어."
"...다른 사람들은 괜찮은데, 우리 부서 사원 하나가 좀 안좋게 보더라구요. 학벌 좋은 사람이라 그런지, 중퇴라니까 표정이 아주 그냥..."
막, 막 이래요. 연주를 따라하는 연승의 표정은 마치 새침한 호나우딩요 같았다. 너네 팀에는 축구 선수가 사원으로 있냐? 우리 디자인 팀 글로벌하네. 동민의 말에 연승은 장난스럽게 화를 낸다. 아, 차장님 쫌.
"........실력으로 까는 건 상관없는데, 그런 색안경은 좀 그렇다. 그런 건 최과장 선에서 좀 잘라줘."
"뭐 뒷얘기 도는 건 어쩔 수 없는데, 회사 내에서야 제가 막을 수 있죠. 걱정하지 마요."
연승의 말에 동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사무실 안을 바라본다. 그런데 현민이 어찌나 일에 몰두를 했던지, 두 사람이 사무실 밖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것도 느끼지 못한채 종이뭉치를 빠르게 분류하고 있었다. 나름의 분류 기준이 있는지, 여러 종이뭉치를 파라락 넘기며 이리저리 정리하는 폼이 마냥 어린이 같지는 않다. 잘 해, 어린이. 동민은 중얼거리며 사무실 앞을 벗어난다.
아직 6시인데 벌써 해가 이렇게 진단 말이야? 동민은 회사를 벗어나다가 놀란다. 아직 날은 더운데 곧 겨울이 오려는지, 해가 너무나 짧아졌다. 여름엔 8시에도 이것보단 밝았는데, 시간 한 번 빠르게 흐르네. 놀란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어두운 하늘이 가득한 시야에 뭐가 훅 들어온다. 뭐야, 싶어 고개를 내리자 어디에선가 본 듯한 남자 하나가 자신을 노려보는 것이 느껴진다. 청바지의 무릎 부분이 찢어지고, 신고 있는 워커 앞 부분이 헤진 거지 몰골의 남자. 내가 저런 거지를 언제 봤지? 나 요즘 서울역 잘 안 가는데. 동민은 재빠르게 머리를 굴려본다. 그러다 곧 하나의 기억이 스쳐지나간다. 주말, 현민을 데려다 줄 때 서 있던 그 남자.
".........장동민 씨 맞죠?"
"............."
그래, 어린이 남자친구였지. 어쩐지 남자인데 안 끌린다 했네. 동민은 성규가 다가오는 동안 가만히 성규의 옷차림을 훑는다. 때 탄 버버리에 뿌리염색이 필요해 보이는 노랑머리. 전형적인 20대 초반의 모습이다. 어린이가 생각보다 눈이 낮았네. 성규도 동민에게 다가가는 동안 동민을 훑는다. 옷차림만 멀쑥하지, 키도 작고 못생겼다. 현민이 첫사랑이라는 인간이, 돈 빼고는 별로 볼 게 없네.
"무슨 일이시죠."
"질문 하나 하고 싶어서요."
".......................?"
"제 애인 말을 듣자니, 마케팅 부서 차장님이시라고."
그런 얘기까지 했냐, 어린이. 동민은 대체 자신의 주변에는 입이 무겁지 않은 사람이 이리도 많은 건지 한탄스러워졌다. 내 얘기를, 그것도 자기 애인한테 했어? 얘도 김경훈 급으로 대단하네.
"네, 그런데요."
"그래서 그런데, 좀 충고 하나만 해 주세요. 제가 음악을 하고 있거든요."
"........네?"
"인디 뮤지션으로 앨범을 유명하게 만들기 위한 마케팅은 무엇을 해야 할지가 궁금해서요."
성규는 이런 이야기를 동민에게 하는 자신이 의외였다. 하지만, 그만큼 절박한 게 사실이기도 했다. 자신도 동민에게 꿀리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의 음악으로 성공을 하는 것이 그 열쇠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동민에 대한 혐오감을 무릅쓰고 이런 질문을 던진 것이다. 한편 동민은 성규에게 이런 질문을 듣는 것이 당황스러웠다. 처음 보는 인간이 나에게 이런 질문이라. 게다가 눈에는 저렇게 대놓고 적대감을 담고 있는데, 입으로는 이런 공적인 질문이라니. 얼마나 물어볼 사람이 없으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싫어하는 사람에게 이런 걸 물어볼까 싶어진 동민이다. 그렇게나 절박하시다니, 나름 진지하게 대답해드려야지.
"실력이야 있으면 유명해지겠죠."
"요즘은 실력으로 안 되는 거 아시잖아요."
"되도록이면 그 쪽 음악을 듣는 사람들의 n수를 늘리는 게 제일 적합하긴 하지. 버스킹 많이 하고 SNS도 많이 해요."
"............그게 다에요?"
"뻔하게 들리기야 하겠지만, 인생사라는게 다 뻔한 거거든. 그런 기초를 밟아가면서 차차 듣는 사람들을 늘려야지 별 수 있겠어요."
동민은 주머니를 뒤지더니, 담배를 꺼내어 한 개피 입에 문다. 곧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담배의 끝에 불이 붙는다. 성규는 동민의 라이터가, 길에서 볼 수 있는 흔한 라이터가 아님을 발견했다. 그리고 담배를 잡는 손의 손목에 걸려있는 시계도, 남자들이 로망을 가질만한 고가의 것임을 놓치지 않았다. 나도, 당신만큼 돈을 잘 벌고 싶다고요. 나도 당신만큼 돈이 많고 싶다고, 빨리.
"그 방법은 시간이 너무 많이 들어요."
"성공이란 게 원래 그렇지. 어렵게 얻어야 어렵게 날아가지 않는 거에요."
"인생 한 방이라는 게 괜히 나온 게 아니에요. 그리고 이제 방세도 내야하는데, 돈이 생겨야 어떻게 하죠."
".......돈이 궁하면 아르바이트를 하면 되지. 뭐가 문제에요."
"아르바이트를 하기엔, 음악할 시간도 빠듯해요."
"연애할 시간에 하면 되겠구만."
동민은 빈정거린다. 돈에 욕심을 내면서, 돈을 열심히 벌 생각은 없다, 라. 나 같으면 연애 같은 거 할 시간에 편의점 아르바이트라도 해서 어떻게든 돈을 벌 거 같구만. 동민의 말에 성규의 안면근육이 실룩인다. 저 인간은 저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연애랑 관련이 없는 것 같은데요."
"관련이 있지. 돈이 필요하면 그 시간에 벌어."
"아르바이트보다는 음악에 집중하는 게 더 좋죠. 좋은 음악으로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잖아요."
성규는 동민에게 답답하다는 듯이 짜증을 부린다. 사실 답답한 건 자기 자신인데, 동민의 말을 듣자니 동민에게 그 답답함이 전이된다. 대체 이 인간은 사람 말을 뭘로 듣는거야. 성규의 짜증에, 동민은 물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집어던지더니 발로 거칠게 짓이긴다. 동민의 구둣발에 담배는 처참하게 가루가 된다. 성규를 바라보는 동민의 눈은, 진지하게 화가 나 있다.
"지금 장난하는 건가? 제대로 현실을 다져놓고 꿈을 이루려고 해야지. 자기 앞가림 하나 제대로 못 하면서 자기 앨범을 마케팅을 해? 꿈 깨. 가난한 뮤지션이 영감을 얻어서 앨범을 내서 대박을 쳐서 성공한다는, 그런 클리셰 넘치는 영화는 갖다 버리고. 대체 뭘 하자는 거야, 그런 정신머리로."
"..............."
"연애도 하고, 이렇게 애인 데리러 올 시간은 넘쳐나면서 일을 할 시간은 없다? 음악하느라 온 시간을 몰두할거면 이렇게 낭비하는 시간도 없어야 하는 것 아닌가? 노력을 쏟아붓는 것도 아니고 설렁설렁하면서 영화처럼 성공이 앞에 다가와주길 바라는건가? 돈 없는 게 훈장이 되어서 성공이 부가적으로 따라올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난, 나는......"
"정신 좀 차리지. 가난한 건 결코 고귀한 게 아니야."
내가 뭐하자고 이런 놈 장단에 맞춰주느라 시간만 버렸는지 모르겠네. 나 갑니다. 동민은 말을 마치자마자 주차장으로 발길을 돌린다. 성규는 그런 동민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바닥만 바라본다. 동민의 말 하나하나가 성규의 머리를 강하게 내리친 것 같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성규를 찌른다. 여유롭지 못한 형편에 성공 가능성이 미지수인 음악만을 하고 있는데. 돈이 없는 가난한 학생이라는 현실이 자꾸만 성규의 꿈을 좀먹고 있다. 애써 외면했는데, 저런 남자의 말을 들으니 더욱더 현실이 와닿아서 닿은 부분이 아프다. 성규는 짜증스럽게 머리를 턴다. 괜히 말 걸었다, 급해도 아무 지푸라기나 잡는 건 아닌데.
"어? 성규 형!"
현민은 문을 나서다가, 회사 앞에 성규가 마중 나온 것을 발견한다. 여긴 어떻게 알았대! 현민이 반가운 얼굴로 뛰어온다. 성규는 애써 표정을 밝게 한다. 현민의 앞에서는 동민의 이야기를 하지 말기로 결심했으니, 동민과 대화한 것을 숨겨야 겠다고 생각하는 성규다. 주먹을 꽉 쥐며 있는 힘을 다 짜내어, 성규는 입꼬리를 천천히 올린다. 집에 가자, 현민아.
아, 아니야!! 경훈은 얼굴이 벌개져 소리를 지른다. 그러자 진호와 동민은 시선을 교환하더니, 혀를 찬다. 맞다고, 바보야.
"그, 그냥 친구끼리 같이 영화 보는 거지!"
"이준석한테 김경훈은 더 이상 그냥 친구가 될 수 없는데?"
진호의 말에 경훈은 절대 데이트 아니라니까! 라고 소리를 지르며 술을 한 모금 마신다. 그러나 애써 먼 곳을 바라보는 경훈의 귀는 벌겋게 달아올랐다. 동민은 진호 쪽으로 몸을 기울여 소곤댄다. 야, 금사빠 각? 진호는 나지막히 말한다. 응, 금사빠 각. 1초 안에 사랑에 빠질 수 있는 금사빠금사빠 열매가 있다면, 경훈은 그것을 태어나자마자 먹은 것이 틀림없다. 준석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순간부터, 경훈은 준석과 함께했던 시간들을 되새김질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경훈은 점점 준석이 신경쓰이기 시작한 것이다. 아니, 정정하자. 드디어 경훈도 준석을 바라보게 되었다. 준석에겐 기쁜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안 된 일이다. 어떻게 이렇게 빠르게 사랑에 빠지는 거지? 진심이긴 한 건가. 동민은 술만 들이키는 경훈을 한심스럽게 바라본다.
"몸 섞을 때는, 그렇게 느껴지지도 않더니 좋아한다고 쳐울어야 그제서야 좋아하냐."
"누, 누가 좋아해!! 그리고, 그 때는 그냥 친구로써 서로의 욕구 해소를 도와주는 거라고 생각했지!"
"어느 정신 나간 놈이 친구 성욕을 풀어줘?."
........나? 경훈이 자신의 얼굴을 가리켜보이자, 진호는 경훈의 얼굴에 젖은 휴지를 던져버린다. 내가 말했지, 나가 죽으라고. 아악!! 비비 지워진다고!! 경훈이 얼굴에서 조심스럽게 휴지를 떼어내는 것을 보다가, 동민은 진호에게 고개를 돌린다. 그 의사 양반이랑 결혼 준비는 잘 되어가냐? 동민의 말에 진호는 적잖이 당황한다.
"결혼 같은 소리 하지마. 아무런 사이도 아니야."
"아무런 사이가 아닌데 상견례를 해?"
"상견례? 무슨 상견례?"
"집에서 같이 셋이 저녁 먹었다며. 리아 누나가 그러던데."
누가 보면 단란한 가족이야 아주. 동민은 대놓고 빈정거린다. 진호는 리아가 동민에게까지 말했다는 것에 짜증이 난다.
"왜, 혼수로 애 하나 배지 그래."
"그만해, 좀. 그냥 요환씨는 나를 좋아하는 것 뿐이라고."
"요환씨? 와, 부르는 것부터 남편 부르듯 하네. 왜, 우리 서방님이라고 하지."
"아, 그만하라고!"
진호는 동민에게 소리를 지른다. 사실 요 며칠간 진호는 매일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고민을 하고 있었다. 요환의 고백에 진호는 생각해볼게요, 라고 대답했고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게 지금까지 친절하게 대해줬던 요환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며칠 동안 머리를 싸매도 이렇다 할 결론이 나질 않았다. 그래서 미치기 직전인데, 이렇게 옆에서 계속 동민이 요환을 주제로 빈정대는 것은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안 그래도 머리 아파 죽겠는데 형까지 왜 그래!!
"둘이 사귀고 있으니 하는 말이지. 게다가 엄청나게 진지한 연애를 하니, 누가 봐도 약혼 그 이상이라."
"고백만 받은 거지 아직 아무런 관계가 아니라고. 그런데 형이....."
".........고백?"
동민이 되묻자 진호는 입을 다물었다. 경훈도 휴지를 떼어내다 말고 진호를 바라봤다. 고백 받은 것은 아직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너 고백받았어? 동민과 경훈이 자신을 바라보자, 진호는 흥분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동민은 진지한 표정으로 진호에게 다시 질문했다. 너 고백받은거야, 그 의사한테?
"..............응. 진지하게 사귈 생각 없냐고."
진호의 말에 동민은 그저 술잔을 들어 잔을 비울 뿐이었다. 동민은 진호가 요환과 얽히는 것이 상당히 못마땅하다. 이 바닥의 게이들 답지 않게 무슨 신붓감 고르는 거 마냥 진지한 요환이 이해가 되지 않아 못마땅한 것도 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것은 이성애자 놀이에 점점 마음이 끌리는 듯한 진호의 태도였다. 썸을 타고, 데이트를 하고, 입에 귀에 걸려서는 요환 얘기나 해 대고. 동민은 옆에서 그 변화를 지켜보며 상당히 짜증이 났다. 삼류 드라마 그만 찍어라, 보는 사람 짜증난다. 동민이 옆에 앉아 계속해서 틱틱 대자, 진호는 더 이상 참기가 힘들다. 자신이 아무리 동민에 대한 애착이 있다지만, 계속해서 사람 속을 긁는 듯한 동민의 태도는 지금 진호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 자꾸 요환씨 얘기만 나오면 이래?"
"......................."
"아, 술맛 떨어진다. 야, 김경훈. 오늘은 니가 내라."
진호는 동민에게 등을 돌리며 바를 나가버렸다. 어, 야, 홍진호!! 경훈의 외침 같은 건 원래 무시했었지만, 동민에게 이렇게 벌컥 화를 낸 적은 거의 없었던 진호였다. 씩씩대며 바를 걸어나오던 진호는, 문득 동민에게 등을 홱 돌리고 나온 자신에 놀란다. 원래 동민이 말투가 짖궂은 것을 누구보다 뻔히 아는 자신인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참기가 힘든 거지. 그리고 그 비꼬는 말들이 이렇게까지 화를 내고 바를 뛰쳐나올 일인가 싶어졌다. 아이씨, 아직 10시인데 벌써 나와버렸네. 딴 데 갈 데도 없고. 지금이라도 동민이 형한테 돌아가서 미안하다고 할까. 진호는 뒤돌아 바의 문을 바라본다. 그러니까 왜 화 한 번 못참고 뛰쳐나와서는...!! 진호는 이를 악 문다. 그러다 깨닫는다. 자신이 문을 나오게 된 이유를.
"....아."
진호는 이제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지를 깨달았다.
요환은 급하게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다. 다다다닥, 다다닥. 한 버튼을 연타하는 요환을 보며 한 환자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어디 급한 일 있나, 의사가 왜 저래? 심지어 우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안으로 뛰어들어가자, 환자는 아예 복도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사 양반이 어디 아픈거 아니야? 곧 문이 닫히고, 요환은 자신의 더벅머리를 마구 헝크러뜨리며 머리를 정돈한다. 아이씽, 누가 봐도 나 일에 찌들었습니다 의 모습이잖아!! 이럴 줄 알았으면 좀 꾸며가면서 일할걸. 이렇게 못생긴 날에 진호씨는 갑자기 오고 그래... 요환은 슬퍼진다.
로비문을 열고 나서자, 진호는 병원 앞 벤치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감기 걸리겠다, 안에 들어와있지. 요환은 재빠르게 계단을 뛰어내려간다. 인기척에 진호는 고개를 들어 요환을 바라본다.
"진호씨가 무슨 일로 병원까지 다 오세요?"
"요환씨 당직이니까 병원에서 못 나오잖아요. 그래서 왔지, 뭐."
"요새 바빠서 못 보니까 기분 안 좋았는데! 이렇게 보니까 진짜 좋네요."
요환은 눈꼬리를 있는대로 휘어가며 눈웃음친다. 그렇게 좋아요? 라고 묻는 진호의 말에 요환은 고개를 끄덕인다. 당연하죠!
"그런데 할 말이 뭐에요? 이제 생각 다 하신 거에요?"
"하루이틀이면 다 생각이 정리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오래 걸리더라구요. 그래도 이제 대답을 할 수 있을 거 같아서요."
진호는 사뭇 비장한 표정이다. 요환은 진호의 표정을 살핀다. 표정을 보면 대답이 예스일지 노일지 보일 것 같았다. 그런데 꾹 다문 입하며, 웃지 않는 눈. ...이거 거절하는 느낌 아니야? 그럼 여기까지 굳이 왜 왔대? 요환은 약간 시무룩해진다. 그런 요환의 반응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진호는 앞만 쳐다보며 말을 이어간다.
"저, 잘 몰라서 그러는데."
".......네?"
"고백에 응할때는, 보통 어떻게 말해야 돼요?"
.....뭐야, 그럼 오케이하려는 거잖아? 다시 입꼬리가 위로 올라가는 요환은 헤실거리며 웃기 시작한다.
"뭐, 나도 좋아했어요. 아니면 그래요 우리 사귀어요! 라고 말하죠!"
".......좀 오글거리네요. 그럼 거절할때는요?"
.....거절 루트인거야, 진짜로?? 요환은 웃던 것을 멈추고 눈썹이 축 처진다.
".......미안해요... 라던가.. 우린 아니에요, 이 정도...?"
"우린 아니에요는 좀 가혹하네요."
진호는 그렇구나, 하고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요환을 바라본다. 어느 쪽인거에요, 진호씨? 요환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진호를 쳐다보고 있다. 잠시 그 웃긴 표정을 보고 있자니, 진호는 웃음이 나왔다. 진호가 웃기 시작하자 요환은 더욱 혼란스러워진다. 왜 웃지...?
"아, 깜짝이야. 표정이 왜 그래요."
"......진호씨가 어떤 얘기를 할지 전혀 감이 안 와서요."
"똑똑한 의사 선생님이 이것도 몰라요? 바본데?"
진호는 계속 킥킥거린다. 요환은 계속해서 진호의 눈치만 살피고 있다. 기분 좋아보이는 게 승낙 루트인 것도 같긴 한데, 별로 긴장하고 있지는 않으니 거절인 건가... 진호씨 의외로 선수 아니야...?
"하아, 이제 그만 웃어야지. 웃으러 온 게 아니니까."
"네, 이제 말 좀 해줘요."
"........솔직히 어느 쪽으로든, 나는 요환씨가 말한 그런 보편적인 말은 못하겠어요."
..........네? 요환은 이제 어리둥절해진다. 무슨 뜻이지?
"그래도 뭐, 첫 번째엔 호감. 두 번째엔 질투. 세 번째엔 뽀뽀. 네 번째엔 고백."
"......."
"다섯 번째가 거절의 말만 아니면, 뭐든지 승낙 아닐까요? 제가 오글거리는 말을 잘 못해서, 말로는 잘 못하겠더라고요. 행동 쪽이 나은 거 같아서 찾아왔어요."
"..... 그 말은, 진호씨가...?"
....지금 내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거 맞죠? 요환이 진호를 바라보자, 진호는 고개를 가만히 끄덕인다.
"........진짜 내가 제대로 이해한 거 맞겠죠? 나 좋을대로만 이해하는 거 아니겠죠?"
"아, 맞다니까요."
"..그래도 혹시나 해서요."
"답답해 진짜."
오늘 두 번이나 이 사람 때문에 짜증나네, 진짜. 알았어요, 더 확실하게 해 줄게요. 진호는 손을 들어 요환의 눈을 가린다. 그리고는 요환의 입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댄다. 몇 초 정도 맞닿은 후에, 둘의 입은 떨어진다. 손을 떼자, 요환은 얼떨떨한 표정이다. 아까부터 계속 표정으로 웃기네, 이 아저씨. 진호는 킥킥 웃더니 요환의 입술을 매만진다. 이제 확실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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